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3)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숭의전을 찾아가는 길 곳곳에서는 많은 군인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시커먼 칠로 얼굴을 위장한 채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을 하고 있었다. 개미떼처럼 긴 행렬도 있었고, 특별한 임무를 띤 있는 것인지 소수의 인원이 움직이는 짧은 줄도 있었다. 모두가 귀한 집 자식들, 나라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군인들의 행렬을 뒤따를 때도 있었다. 군인들에 비해 작은 배낭을 메고 총 대신 스틱을 들었지만 그들을 뒤따르다 보니 나도 예비역인데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분단의 땅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할 수가 있었다.



고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의전은 

아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는 듯, 단아한 모습이었다.


‘숭의전’(崇義殿)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의를 높이는 곳’이라니, 뜻이 범상치를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싶어 찾아본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년)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년)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년)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년)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새 왕조를 연 뒤 이전 왕조의 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곳이 숭의전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거나 부정하지 않고 보존을 하여 기억을 하는 모습도 그랬고, 그곳에 숭의전(崇義殿)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부여한 것도 그렇고, 고려의 충신을 기리는 전(殿)을 고려의 후손을 찾아내 관리를 맡겼다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숭의전 초입의 ‘어수정’(御水井)에는 마침 하지(夏至)를 맞아 하지 감자를 씻으러 온 할머니가 있었다. 하지와 감자와 할머니, 시간의 흐름을 기억하고 따르는 순연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그윽하게 여겨졌다.


어수정의 물은 달고도 시원했다. 좋은 샘 곁에서 산다는 것은 큰 복이다 싶었다.


무더위 속 먼 길을 걸어서 그랬겠지만 어수정의 물은 유난히 달고 시원했다. 그처럼 맑은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곳에서 살아가니 그 물을 마시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싶어 할머니께 여쭈니 “그럼요, 큰 복이지요.” 하시며 십분 공감을 하신다. 맞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샘을 가까이 둔 이들은 큰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동안 걸으면서 흘린 땀에 해당할 만큼의 물을 마신 뒤, ‘하마비’(下馬碑)를 지나 큰 나무의 그늘이 드리워진 호젓한 언덕길을 오르니 숭의전이 나타났다. 고려의 충신들을 모시는 숭의전은 마치 아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단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뜨거운 날씨 탓인지, 나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숭의전을 모르기 때문인지, 숭의전을 찾은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막 숭의전을 둘러보고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숭의전을 찬찬히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을 때, 저만치 언덕길을 올라오는 한 여자 분이 보였다. 손에는 어수정에서 길었지 싶은 물통을 들고 있었고 목에는 명찰, 아마도 안내원이 아닐까 싶었다.


이미 숭의전을 둘러보았으니 그냥 떠날까 하다가 안내원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눴다. 다시 찾아오기 쉽지 않은 시간,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배낭에 매달린 여벌의 신발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나의 여정을 물어 들은 안내원은 얼른 두 손을 내밀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기를 전해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는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했지만, 세상에 이런 기를 어디서 받겠느냐며 마치 확실한 기를 전해 받은 사람처럼 이야기를 했다.


숭의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 준 안내원은 “이리 한 번 와 보실래요?” 하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따라가니 숭의전 앞에 서 있는 큰 나무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무성한 나뭇잎 뿐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무엇을 보라는 것이지요?” 묻자 “부엉이가 저기 있잖아요.” 한다. 설명을 듣고 자세히 보니 부엉이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안내원은 다시 한 나무를 살피더니 “저 곳에도 한 마리가 더 있네요.” 한다.


숭의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부엉이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했다.


언젠가부터 부엉이가 찾아와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한 마리였는데, 언제부턴가 한 마리가 더 찾아왔다는 것이다. 안내원은 말했다. “아마도 고려 충신들의 혼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삶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한 일이 존재하기도 하는 법, 아시시 프란체스코 수도원 이야기를 안내원에게 들려주었다. 그곳에서는 흰색 비둘기가 프란체스코 동상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안내원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떠나 ‘임진적벽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을 따라서 난 숲길은 빼어난 절경이었다. 몇 번인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궁예와 왕건도 나처럼 서서 저 강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숲을 다 빠져나가도록 아무도 만난 사람이 없었으니, 드문 길을 걸은 셈이었다.


숲을 걸을 때 문득 떠오른 어릴 적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비가 몹시 내리던 수요일이었다. 그 시절 수요일 오후에는 어린이 예배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에 목마른 우리들이 즐겨 찾던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성경동화는 그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었다.


그 날은 뭔가 이상했다. 시간이 지났다 싶은데도 종소리가 들리지를 않았다. 빗소리에 지워진 것인지 정말로 종을 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망설이다가 예배당으로 달려갔다. 그 시절엔 어찌 그리 우산이 귀했는지 비를 쫄딱 맞은 채였다.


어두컴컴한 예배당 현관에 들어서니 신발장에 신발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기도라도 드리고 가야지 싶어 예배당 문을 열었는데, 예배당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한 분이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은 예배당 앞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신 듯 했다.


그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수요일 오후, 아무도 오지 않는 예배당을 기도로 지키던 모습이 남아있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신다. ‘얘야,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네 자리를 지키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란다.’

마음속에 묻혀 있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은 숭의전 앞 나무에서 보았던 부엉이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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