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3)


마지막 걸음


〈세익스피어 맥베드에 “숲이 움직이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지금 걸어 내려오시는 그 벌판 가득 중공군이 풀을 꽂고 남하할 때 임진강 건너 영국 크러스터 대대는 그 대목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벌판에서 한 많은 임진강 전투를 생각하시면 덜 피곤하실 겁니다. 신장남교는 새로 놓은 것이고, 옛날 다릿발 하나를 우기고 우겨서 남겨놓았습니다.(2월까지 있었는데, 아직 있겠지요.) 그 다리 밑 두지나루에 황포돛배가 있었는데 돈벌이가 안 되니까 없앤 모양입니다. 요샌 북한이 황강댐을 열었다 닫았다 물장난을 하는 바람에 임진강 황복은 고사하고 참게까지 최악의 세월이랍니다. 혹시 宗漁라는 물고기를 아세요? 다음에 뵐 때 얘기해 드릴게요.>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新장남교를 두고 로드맵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지만, 내게는 몹시 위험한 다리였다. 다리는 꽤나 길고 높이도 꽤 높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난간은 낮았다. 인도가 따로 마련된 것도 아니어서 마주 오는 커다란 트럭을 피하다 보면 난간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아 아찔해지곤 했다. 사람이 걸어서 건너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다리 같았다.


강원도 고성 명파초등학교에 시작하여 열하루 동안 걸은 380km의 길. 

아픔과 상처의 땅을 내 발로 걸었다는 것이 소중하게 남았다.


그래도 적성까지 왔으니 하루의 일정치고는 많이 온 셈이었다. 허름한 식당을 찾아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몇 숟갈을 뜨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이재필 장로님이었다. 걷기의 마지막 날, 퇴근길에 먼 길을 달려온 장로님은 저녁을 같이 먹는 대신 숙소를 수소문했다. 마지막 날이라도 편히 쉬라는 배려였다.


조금은 외진 곳에 있는 펜션은 은퇴를 한 부부가 운영을 하는 곳으로 더없이 조용했다. 비수기에 평일이라 그랬는지 다른 손님들은 없는 것 같았다. 방에 짐을 내려놓은 뒤 마당에 있는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벌써 몇 번째인가, 열하루 길을 걷는 동안 장로님은 여러 번 먼 길을 달려왔다. 폭우에 젖은 발을 위해 신발을 사가지고, 행여 쓰러질까 고기를 사주시려, 물집이 잡힌 발을 감싼 인민군식 발싸개를 보고는 안쓰러워,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숙소까지…, 그냥 고맙고 좋은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노을이 어느새 서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 장로님을 배웅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함광복 장로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길을 소개하시고는 그 길을 제대로 걸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는 장로님의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아, 미수를 넘기신 어머님께서 그 땡볕을! 거기서 숭의전으로 가는 길은 약간 우회하는 방법입니다. 그래도 숭의전은 꼭 들러 가십시오. 목사님은 궁예가 갔던 길을 걷고 계시며, 철원서 개성(임진각)까지는 고려의 건국과 패망의 역사가 새겨진 왕건의 길입니다. 조금 더 가 고랑포는 경순왕이 귀부한 나루, 죽어서 경주로 못가고 묻힌 통한의 땅, 그 전에는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치기위해 도강한 여울,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임진나루를 버리고 저벅저벅 걸어 건너간 도섭지역, 6.25때는 인민군 탱크가 도강한 지점, 그리고 김신조가 겨울 강바닥을 엎드려 통과한 한국사의 Hot Point Place입니다. 그러나 예정된 길에서 왕복 약8km를 보태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차량이 가능하면 경순왕릉 폐허의 고랑포(춘천중앙교회 역사를 연 이덕수 전도사의 고향땅) 그리고 호로고로성을 다녀오시면 좋은데~. 어제 거리를 좀 벌기도 하셨을까. 점심 드시며 옆 사람들에게 구원 요청을 해보세요. 이를 강추하는 이유는 임진강은 이토록 역사의 강일뿐더러 이 역사를 머금고 있는 고호(임진강 유역의 옛 이름) 8경의 풍광은 늘 울먹이며 펼쳐져 있어서 어느 가을날 저도 그 강 길을 혼자 통곡을 하며 걸었던 그 기억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로드맵 필요 없습니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가시기만 하면 되니까. 벌써 내일인가요? 정말 역사를 쓰고 계십니다.>


울먹이며 펼쳐져 있는 풍광은 어떤 모습일까, 이번 일정에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아쉽지만 언젠가 혼자 통곡하며 걸었다는 그 길을 장로님과 함께 걷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동쪽 끝에서 시작하여 서쪽 끝까지, 얼마든지 마음 먹기에 따라 도보순례는 가능한 것이었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것은 일정을 마치는 날이기도 했거니와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들 규민이가 찾아오기로 했다. 마지막 날 길을 함께 걷고 싶다고 했다. 장파리에서 가족들을 만났다. 규민이가 차를 운전해서 찾아왔다. 열하루 만에 만나는데다가 내내 DMZ를 걷다 가족들을 만나니 마치 내가 군에 입대했다가 휴가를 나온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길에서 만난 지라 김밥이며 과일 등 준비해온 음식을 자동차 안에서 먹으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진각까지 가는 길을 절반쯤으로 나눠 반은 아내와 걷고, 나머지를 규민이와 걷기로 했다. 길을 걷는 동안 자동차는 규민이와 아내가 반씩 운전을 했다. 오래 전 이순원이 쓴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읽은 적이 있거니와, 나란히 길을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들은 남달랐다. 우리가 인생의 길도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예외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 때문이었을까, 마지막 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느슨해진 탓일까, 나도 모르게 체력이 고갈된 것일까, 가벼울 줄 알았던 걸음이 갈수록 무겁게 느껴졌고 더뎌졌다. 동행하는 가족이 없었다면 여러 번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정을 모두 마쳤을 때,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 고마웠다.


마침내, 저 멀리, 임진각이 보였다. 열하루 일정의 종착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마침내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된 것이다. 마음도 마음이지만 몸이 버텨줄까, 괜히 중간에 포기를 하여 나를 기억하는 이들은 물론 나 자신에게 실망을 주는 건 아닐까, 길을 걸을 때마다 나를 떠나지 않고 뒤따라오거나 앞질러 갔던 그림자처럼 마음 한 구석에 붙어 있던 생각이었다. 이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조금 더 나 자신을 신뢰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차를 운전해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아내를 만났더니 임진각에 온 김에 전망대에 올라갔다 오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이상했다. 마치 자석에 붙들린 쇠붙이처럼 걸음이 한 걸음도 떼어지질 않았다. 그것이 마음 때문인지 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한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전망대는 아내와 규민이만 다녀왔다.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까지 약 380km에 해당하는 열하루의 길, 폭우에 땡볕에 어쩌면 나는 정말로 몸과 마음을 소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내게서 빠져나간 모든 것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하고는 다르기를, 세상과 사람이 다르게 다가오기를,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걸음이기를, 많은 이들이 오고가는 임진각 마당에 하나의 사물처럼 서서 그렇게 빌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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