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언제쯤이나 한희철의 얘기마을(195) 언제쯤이나 김정옥 집사가 한 광주리 점심을 이고 염태 고개를 올라간다. 벼를 베는 날이다. 얼굴이 부었다 내렸다 계속 몸이 안 좋은 김정옥 집사. 일꾼을 몇 명이나 얻은 것인지 점심은 한 광주리 가득이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김 집사가 맏딸 명림 씨와 둘째 진성이를 낳았을 때였다. 상자골에 일이 있어 점심을 나르는데 그 모습이 가히 가관이었다. 막 걷기를 배운 딸이야 손 하나 잡아주면 되었지만 진성이는 천생 업어야 했고, 밥이며 찬이며 뜨거운 국까지 들은 광주리는 이고, 주렁주렁 바가지를 엮은 그릇들은 어깨에 메고. 박수근 작/'고목과 여인'(1960년대) 상자골까지 올라 보면 알지만 그냥 오르기에도 벅찬, 울퉁불퉁 곳곳이 패이고 잡초는 우거.. 2021. 1. 6. 촌놈 한희철의 얘기마을(194) 촌놈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주머니들이 교회 마당에서 흙투성이 되어 놀던 규민이를 보더니 “어휴, 너도 촌에서 사니 별수 없구나!” 하며 한 마디씩 합니다. 마당에서 놀던 규민이는 동네 사람이 지나가면 그게 반가운지 꾸벅 말도 없이 인사를 하든지 손을 흔들어 대든지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규민이 꼴이 영락없는 촌놈입니다. 얼굴이며 손에 흙이 잔뜩 묻었고 신은 어디다 벗어버린 건지 맨발입니다. 헐렁한 옷차림과 밤송이 같은 머리가 그런 모습에 잘 맞아 떨어져 시골에서 막 자라는 촌티가 밸대로 배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아주머니들의 웃음 속엔 왠지 모를 반가움과 편안함이 담겨 있습니다. 다르지 않다는, 흘러가는 시간 속 결국은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는 반가움과 안도감에 가.. 2021. 1. 5. 배춧국 한희철의 얘기마을(193) 배춧국 저녁 무렵 강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저만치 일 마치고 돌아오는 아주머니가 있어 보니 조귀농에 사는 분이었습니다. 단강1리라는 같은 행정구역 안에 살면서도 강과 산을 끼고 뚝 떨어져 있어 오히려 다리 하나 사이로 마주한 충청북도 덕은리와 어울려 살아가는 마을이 조귀농입니다. 원래는 조귀농도 단강교회 선교구역이지만 단강교회가 세워질 즈음 덕은리에도 교회가 세워져 자연스레 조귀농이 덕은교회 선교구역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조귀농 하곤 가까이 지낼 만한 일이 특별히 없었습니다. 그래도 몇 년 시간이 지나며 한 두 사람씩 알게 된 것이 그나마 얼굴만이라도 알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강가에서 만난 아주머니를 알게 된 건 지난 추석 때였습니다. 섬뜰 방앗간으로 쌀.. 2021. 1. 4. 할머니의 낙 한희철의 얘기마을(192) 할머니의 낙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 진부로 일을 하러 나가 있었습니다. 당근을 캐는 일이었는데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습니다. 진부란 곳은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아주 먼 곳’입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일당을 챙겨 얼마만큼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 마을 사람들 중 몇 사람이 진부로 떠났습니다. 윗작실 영미 아버지가 중간상을 해 그를 생각해서 간다는 사람도 있었고 오랜만에 바깥바람이나 쐬러 간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작실 속회 예배를 마쳤을 때 진부 당근 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왜 할머니는 안 가셨냐고 한 교우가 허석분 할머니께 묻자 할머니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난 안가, 까짓 거 가서 돈 번다 해도 그게 어디 밤에 자식들 .. 2021. 1. 3. 마음의 병 한희철의 얘기마을(191) 마음의 병 지 집사님이 몸살을 되게 앓았다. 찾아 갔을 땐 정말 눈이 십리나 들어가 있었다. 워낙 마른 분이 꼼짝없이 앓아누우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몸을 무너뜨리는 오한도 심했지만 허리통증으로 집사님은 꼼짝을 못했다. 경운기에 겨우 실려 아랫말 보건소에 몇 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다음날 다시 찾았을 땐 빈 집인 줄 알았다. 한참을 불러도 기척이 없어 병원에라도 다니러 갔나 돌아서려는데, 방안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문을 여니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방, 집사님은 두꺼운 이불 속에 혼자 누워 있었다. 전날에 비해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병원이 있는 원주까진 백리길, 마을 보건소에라도 다시 다녀와야 되지 않느냐고 하자 집사님의 한숨이 길다. 그나마 막내 종근이가 있어.. 2021. 1. 2. 교수님께 한희철의 얘기마을(190) 교수님께 끓여주신 결명자 차 맛은 아무래도 밋밋했습니다. 딱딱할 것 같은 권위의 모습 어디에도 없어 특별히 몸가짐을 조심할 것도 없는 편한 교수실 분위기와 예의 잔잔한 교수님 웃음이 그 밋밋한 결명자 차 맛까지를 또 하나의 편함으로 만들어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작은 난로 앞, 마치 큰 추위에 쫓겨 온 사람들처럼 난로를 바짝 끼고 앉아 나눈 이야기들, 혹 나눈 이야기는 잊는다 해도 그런 분위기는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듯싶습니다. 큰 배려였습니다. 농촌에서 구경꾼처럼 살아가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그저 서툰 글로 썼을 뿐인데, 농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농촌의 바른 이해를 위해 책을 읽게 하였다는 이야기야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면서도, 그것이 다름 아.. 2021. 1. 1. 눈 비비는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9) 눈 비비는 소 소/윤여환 작 소가 눈 비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요? 소가 눈을 비비다니, 전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싶으면서도 소도 눈이 가려울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하는 거지, 막상 그런 생각을 하면 딱히 떠오르는 모습이 없습니다. 사람이야 눈이 가려우면 쓱쓱 손으로 비비면 그만이겠지만 말이지요. 소가 눈을 비비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정말 의외였습니다. 가만히 서서 뒷발 하나를 들더니(뒷발 두 개를 한꺼번에 들 수는 없겠지만) 아, 그 발을 앞으로 내밀어 발끝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덩치가 큰 소가 한 발을 들고도 쓰러지지 않는 균형감각도 신기했지만, 억척스럽게 논과 밭을 갈던 그 투박하고 뭉뚝한 발끝으로 눈을 비벼대다니, 뒷발로 눈을 비비고 있는.. 2020. 12. 31. 제야(除夜)에 한희철의 얘기마을(188) 제야(除夜)에 살되 흔들리지 말라걷되 따르지 말며날되 가볍지 말라 일어서되 감추며넘어지되 솔직하라반복하되 흉내 내지 말며쓰러지되 잠들지 말라 떠나되 사랑하며남되 용서하라촛불 타는 가슴종을 치는 사람아 살되 흔들리지 말라남되 용서하라 - (1992년) 2020. 12. 30. 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187) 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배추도 뽑고, 가을 당근도 뽑고 나면 한해 농사가 끝납니다. 그때 마늘을 놓습니다.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오지만 언제나 마늘은 늦가을, 모든 농사를 마치며 놓습니다.찬바람 속 심겨진 마늘은 그대로 겨울을 납니다. 땅이 두껍게 얼어붙고 에일 듯 칼날 바람이 불어도, 때론 수북이 눈이 내려 쌓여도 마늘은 언 땅에서 겨울을 납니다. 한 켜 겨를 덮은 채로, 맨살 가리듯 겨우 한 겹 짚을 두른 채로 긴긴 겨울을 납니다.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그냥 언 땅에 묻혀 맨 몸으로 받으며 그렇게 받아들인 추위를 매운 맛으로 익혀내는 것입니다. 그 작은 한쪽 마늘이 온통 추위 속에서도 제 몸에 주어진 생명을 잃지.. 2020. 12. 29. 이전 1 ··· 32 33 34 35 36 37 38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