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저녁 연기 한희철의 얘기마을(186) 저녁 연기 겨울 해는 짧습니다. 한껏 게으름 떨던 해가 느지막이 떠올라 어정어정 중천 쯤 걸렸다간 그것도 잠깐 곤두박질하듯 서산을 넘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땅거미가 깔려들고 마을마다엔 흰 연기가 솟습니다. 기름보일러 서너 집 생기고, 연탄보일러 늘어가지만 여전히 쇠죽 쑤는 아궁이, 그 아궁이만큼 장작을 땝니다. 그을음투성이인 검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올라 마을은 저녁마다 흰 연기에 둘립니다. 보면 압니다. 바람처럼 쉬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저녁의 흰 연기는 어둠이 다 내리도록 마을을 떠나지 않습니다. 손도 없는 그놈들이 손을 마주 잡은 듯 둘러 둘러 마을을 감싸고 흐릅니다. 어쩜 저녁연기보다도 쉽게 떠난 자식들, 마른 가지 아프게 꺾는 주름진 손길을 두고, 저.. 2020. 12. 28. 순교할 각오로 한희철의 얘기마을(185) 순교할 각오로 단강으로 목회를 떠나올 때, 먼저 농촌에서 목회를 시작한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농촌목회를 잘 하려면 ‘순교할 각오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이내 실감하게 됐다. 교우 가정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 밥그릇엔 밥이 수북하게 담기곤 했다. 밥그릇도 보통이 넘어 전에 먹던 밥에 비하면 족히 배 이상이 되는 양이었다. 행여나 밥을 남길라치면 교우들은 ‘찬이 없어 그런가 보라’며 이내 섭섭한 표정이 되곤 했다. 그런 마음 알기에 밥을 남기는 일 없이 먹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젠 많은 양에 익숙해져 찬에 상관없이 밥을 제법 먹게 되었다. 순교할 각오로 먹으라. 이제쯤 생각해 볼 때 그 말은 단지 먹는 것에 관한 것이 아.. 2020. 12. 27. 마지막 5분 한희철의 얘기마을(184) 마지막 5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몇몇 친구들은 학교 도서실에 남았다가 늦은 밤 돌아오곤 했다. 학교 진입로는 꽤 긴 편이었는데 길을 따라 켜진 가로등 불빛이 참 좋았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루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죽기 5분 전에 회개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거냐고. 수원 유신고등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예배를 드렸는데, 아마 그날 설교의 내용이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난 친구의 질문 앞에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귀찮고 신경 쓰이게 하나님을 믿느니 그냥 맘대로 살다가 죽기 5분 전에 살아온 모든 죄를 회개하고 싶다고, 그래도 되지 않겠냐고.. 2020. 12. 26. 성탄인사 한희철의 얘기마을(183) 성탄인사 성탄절 새벽, 겨울비를 맞아 몸이 젖은 채로 새벽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나갈 때 끄고 나간 것 같은데 웬일일까 문을 여니 그냥 빈 방에 스탠드가 켜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스탠드엔 웬 풍선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노란색의 둥그런 풍선이었습니다. 풍선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축 성탄성탄을 축하합니다.늘 사랑합니다. -산타 익숙한 글씨.작은 산골마을에서 맞는, 눈보다 비가 내린 성탄절. 풍선 하나에 적힌 한없이 가난한, 한 없이 넉넉한 성탄 인사.그리고 사랑법. - (1992년) 2020. 12. 25. 지게 그늘 한희철의 얘기마을(182) 지게 그늘 달리는 오토바이를 핑계 삼아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아닙니다. 분명 보았지요. 유유히 강물 흘러가는 강가 담배 밭. 지난해 물난리로 형편없이 망가진 밭을 그래도 땀으로 일궈 천엽따기까지 끝난 담배 밭, 대공들만 남아 선 담배 밭 한 가운데 두 분은 계셨지요. 불볕더위 속 담배 대공 뽑다가 세워놓은 지게 그늘 아래 앉아 두 분은 점심을 들고 계셨지요. 이글이글 해가 녹고 가만히 있어도 비 오듯 땀줄기가 온 몸을 흐르는 더위. 밭 한가운데 지게를 세우고 지게 그늘 속 두 분이 마주 앉아 점심을 들 때 난 차마 두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게 그늘, 그 좁다란 그늘을 서로 양보하며 밥을 뜨는 당신들을 그냥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마.. 2020. 12. 24. 밥 탄내 한희철의 얘기마을(181) 밥 탄내 김천복 할머니가 밭에서 참깨를 베다보니 어디선가 밥 탄내가 나더랍니다. 누구 네가 밥을 태우나, 일을 계속 하는데 그래도 탄내가 계속 났습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웬걸, 냄새는 다름 아닌 당신 코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코에서 탄내가 나도록 일한다’는, 어릴 적 처음 들었을 땐 뭘 그럴까 못 믿었던 노인들의 말을 할머니는 당신이 노인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1992년) 2020. 12. 23. 죽은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0) 죽은 소 미영이네 소가 며칠 전 죽었습니다. 소 끌러 저녁에 가 보니 소가 언덕 아래로 굴러 네 다리를 하늘로 쳐들고 죽어 있었습니다. 배가 빵빵한 채였습니다. 소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눕는데 잘못 왼쪽으로 쓰러지면 혼자 힘으로 못 일어나고 그러다 보면 10분도 못돼 숨이 멎는다고 합니다. 죽기 며칠 전 새끼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가 거짓말처럼 죽어 자빠졌으니 미영이네가 겪은 황당함이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죽은 소는 송아지 값도 안 되는 헐값에 고기로 팔렸고, 젖먹이 송아지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우유를 잘 먹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참 슬프고 속상한 얘기를 안 그런 척 합니다. - (1992년) 2020. 12. 22. 신작로 잠 한희철의 얘기마을(179) 신작로 잠 변학수 아저씨가 신작로에서 3일 밤을 잤습니다. 도로 가장자리에 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잘 잤습니다, 더위가 심해 피서 삼아 그랬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한 낭만이 고단한 이 땅에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말리느라 길에다 널어놓은 고추들. 질컥질컥 짓물러지는 병과 허옇게 대가 마르는 희한한 병들, 온갖 병치레 끝에 딴 고추를 길가에 내다 말리며 혹시나 싶어 고추 옆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하나 먹거리에 배인 손길들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가벼운 마음으론, 허튼 마음으론 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총총 별 이고 길에서 잔 변학수 아저씨. 붉은 고추 속엔 고추보다 맵고 붉은 농부의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 2020. 12. 21. 토엽과 천엽 한희철의 얘기마을(178) 토엽과 천엽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새로운 말을 배웁니다. 단강에서는 담배 잎을 처음 따는 것을 ‘토엽따기’라 합니다. 그에 비해 마지막 잎을 따는 것을 ‘천엽따기’라 합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토엽’은 ‘土葉’ 아닐지, ‘천엽’은 ‘天葉’이 아닐지 싶습니다. 토엽따기와 천엽따기.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하늘의 이치를 헤아린 옛 어른들의 삶의 자세가 문득 경이롭습니다. - (1992년) 2020. 12. 20. 이전 1 ··· 33 34 35 36 37 38 39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