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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눈 비비는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9) 눈 비비는 소 소/윤여환 작 소가 눈 비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요? 소가 눈을 비비다니, 전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싶으면서도 소도 눈이 가려울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하는 거지, 막상 그런 생각을 하면 딱히 떠오르는 모습이 없습니다. 사람이야 눈이 가려우면 쓱쓱 손으로 비비면 그만이겠지만 말이지요. 소가 눈을 비비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정말 의외였습니다. 가만히 서서 뒷발 하나를 들더니(뒷발 두 개를 한꺼번에 들 수는 없겠지만) 아, 그 발을 앞으로 내밀어 발끝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덩치가 큰 소가 한 발을 들고도 쓰러지지 않는 균형감각도 신기했지만, 억척스럽게 논과 밭을 갈던 그 투박하고 뭉뚝한 발끝으로 눈을 비벼대다니, 뒷발로 눈을 비비고 있는.. 2020. 12. 31.
제야(除夜)에 한희철의 얘기마을(188) 제야(除夜)에 살되 흔들리지 말라걷되 따르지 말며날되 가볍지 말라 일어서되 감추며넘어지되 솔직하라반복하되 흉내 내지 말며쓰러지되 잠들지 말라 떠나되 사랑하며남되 용서하라촛불 타는 가슴종을 치는 사람아 살되 흔들리지 말라남되 용서하라 - (1992년) 2020. 12. 30.
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187) 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배추도 뽑고, 가을 당근도 뽑고 나면 한해 농사가 끝납니다. 그때 마늘을 놓습니다.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오지만 언제나 마늘은 늦가을, 모든 농사를 마치며 놓습니다.찬바람 속 심겨진 마늘은 그대로 겨울을 납니다. 땅이 두껍게 얼어붙고 에일 듯 칼날 바람이 불어도, 때론 수북이 눈이 내려 쌓여도 마늘은 언 땅에서 겨울을 납니다. 한 켜 겨를 덮은 채로, 맨살 가리듯 겨우 한 겹 짚을 두른 채로 긴긴 겨울을 납니다.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그냥 언 땅에 묻혀 맨 몸으로 받으며 그렇게 받아들인 추위를 매운 맛으로 익혀내는 것입니다. 그 작은 한쪽 마늘이 온통 추위 속에서도 제 몸에 주어진 생명을 잃지.. 2020. 12. 29.
저녁 연기 한희철의 얘기마을(186) 저녁 연기 겨울 해는 짧습니다. 한껏 게으름 떨던 해가 느지막이 떠올라 어정어정 중천 쯤 걸렸다간 그것도 잠깐 곤두박질하듯 서산을 넘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땅거미가 깔려들고 마을마다엔 흰 연기가 솟습니다. 기름보일러 서너 집 생기고, 연탄보일러 늘어가지만 여전히 쇠죽 쑤는 아궁이, 그 아궁이만큼 장작을 땝니다. 그을음투성이인 검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올라 마을은 저녁마다 흰 연기에 둘립니다. 보면 압니다. 바람처럼 쉬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저녁의 흰 연기는 어둠이 다 내리도록 마을을 떠나지 않습니다. 손도 없는 그놈들이 손을 마주 잡은 듯 둘러 둘러 마을을 감싸고 흐릅니다. 어쩜 저녁연기보다도 쉽게 떠난 자식들, 마른 가지 아프게 꺾는 주름진 손길을 두고, 저.. 2020. 12. 28.
순교할 각오로 한희철의 얘기마을(185) 순교할 각오로 단강으로 목회를 떠나올 때, 먼저 농촌에서 목회를 시작한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농촌목회를 잘 하려면 ‘순교할 각오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이내 실감하게 됐다. 교우 가정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 밥그릇엔 밥이 수북하게 담기곤 했다. 밥그릇도 보통이 넘어 전에 먹던 밥에 비하면 족히 배 이상이 되는 양이었다. 행여나 밥을 남길라치면 교우들은 ‘찬이 없어 그런가 보라’며 이내 섭섭한 표정이 되곤 했다. 그런 마음 알기에 밥을 남기는 일 없이 먹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젠 많은 양에 익숙해져 찬에 상관없이 밥을 제법 먹게 되었다. 순교할 각오로 먹으라. 이제쯤 생각해 볼 때 그 말은 단지 먹는 것에 관한 것이 아.. 2020. 12. 27.
마지막 5분 한희철의 얘기마을(184) 마지막 5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몇몇 친구들은 학교 도서실에 남았다가 늦은 밤 돌아오곤 했다. 학교 진입로는 꽤 긴 편이었는데 길을 따라 켜진 가로등 불빛이 참 좋았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루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죽기 5분 전에 회개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거냐고. 수원 유신고등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예배를 드렸는데, 아마 그날 설교의 내용이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난 친구의 질문 앞에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귀찮고 신경 쓰이게 하나님을 믿느니 그냥 맘대로 살다가 죽기 5분 전에 살아온 모든 죄를 회개하고 싶다고, 그래도 되지 않겠냐고.. 2020. 12. 26.
성탄인사 한희철의 얘기마을(183) 성탄인사 성탄절 새벽, 겨울비를 맞아 몸이 젖은 채로 새벽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나갈 때 끄고 나간 것 같은데 웬일일까 문을 여니 그냥 빈 방에 스탠드가 켜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스탠드엔 웬 풍선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노란색의 둥그런 풍선이었습니다. 풍선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축 성탄성탄을 축하합니다.늘 사랑합니다. -산타 익숙한 글씨.작은 산골마을에서 맞는, 눈보다 비가 내린 성탄절. 풍선 하나에 적힌 한없이 가난한, 한 없이 넉넉한 성탄 인사.그리고 사랑법. - (1992년) 2020. 12. 25.
지게 그늘 한희철의 얘기마을(182) 지게 그늘 달리는 오토바이를 핑계 삼아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아닙니다. 분명 보았지요. 유유히 강물 흘러가는 강가 담배 밭. 지난해 물난리로 형편없이 망가진 밭을 그래도 땀으로 일궈 천엽따기까지 끝난 담배 밭, 대공들만 남아 선 담배 밭 한 가운데 두 분은 계셨지요. 불볕더위 속 담배 대공 뽑다가 세워놓은 지게 그늘 아래 앉아 두 분은 점심을 들고 계셨지요. 이글이글 해가 녹고 가만히 있어도 비 오듯 땀줄기가 온 몸을 흐르는 더위. 밭 한가운데 지게를 세우고 지게 그늘 속 두 분이 마주 앉아 점심을 들 때 난 차마 두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게 그늘, 그 좁다란 그늘을 서로 양보하며 밥을 뜨는 당신들을 그냥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마.. 2020. 12. 24.
밥 탄내 한희철의 얘기마을(181) 밥 탄내 김천복 할머니가 밭에서 참깨를 베다보니 어디선가 밥 탄내가 나더랍니다. 누구 네가 밥을 태우나, 일을 계속 하는데 그래도 탄내가 계속 났습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웬걸, 냄새는 다름 아닌 당신 코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코에서 탄내가 나도록 일한다’는, 어릴 적 처음 들었을 땐 뭘 그럴까 못 믿었던 노인들의 말을 할머니는 당신이 노인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1992년) 2020.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