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밥 탄내 한희철의 얘기마을(181) 밥 탄내 김천복 할머니가 밭에서 참깨를 베다보니 어디선가 밥 탄내가 나더랍니다. 누구 네가 밥을 태우나, 일을 계속 하는데 그래도 탄내가 계속 났습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웬걸, 냄새는 다름 아닌 당신 코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코에서 탄내가 나도록 일한다’는, 어릴 적 처음 들었을 땐 뭘 그럴까 못 믿었던 노인들의 말을 할머니는 당신이 노인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1992년) 2020. 12. 23. 죽은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0) 죽은 소 미영이네 소가 며칠 전 죽었습니다. 소 끌러 저녁에 가 보니 소가 언덕 아래로 굴러 네 다리를 하늘로 쳐들고 죽어 있었습니다. 배가 빵빵한 채였습니다. 소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눕는데 잘못 왼쪽으로 쓰러지면 혼자 힘으로 못 일어나고 그러다 보면 10분도 못돼 숨이 멎는다고 합니다. 죽기 며칠 전 새끼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가 거짓말처럼 죽어 자빠졌으니 미영이네가 겪은 황당함이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죽은 소는 송아지 값도 안 되는 헐값에 고기로 팔렸고, 젖먹이 송아지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우유를 잘 먹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참 슬프고 속상한 얘기를 안 그런 척 합니다. - (1992년) 2020. 12. 22. 신작로 잠 한희철의 얘기마을(179) 신작로 잠 변학수 아저씨가 신작로에서 3일 밤을 잤습니다. 도로 가장자리에 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잘 잤습니다, 더위가 심해 피서 삼아 그랬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한 낭만이 고단한 이 땅에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말리느라 길에다 널어놓은 고추들. 질컥질컥 짓물러지는 병과 허옇게 대가 마르는 희한한 병들, 온갖 병치레 끝에 딴 고추를 길가에 내다 말리며 혹시나 싶어 고추 옆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하나 먹거리에 배인 손길들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가벼운 마음으론, 허튼 마음으론 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총총 별 이고 길에서 잔 변학수 아저씨. 붉은 고추 속엔 고추보다 맵고 붉은 농부의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 2020. 12. 21. 토엽과 천엽 한희철의 얘기마을(178) 토엽과 천엽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새로운 말을 배웁니다. 단강에서는 담배 잎을 처음 따는 것을 ‘토엽따기’라 합니다. 그에 비해 마지막 잎을 따는 것을 ‘천엽따기’라 합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토엽’은 ‘土葉’ 아닐지, ‘천엽’은 ‘天葉’이 아닐지 싶습니다. 토엽따기와 천엽따기.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하늘의 이치를 헤아린 옛 어른들의 삶의 자세가 문득 경이롭습니다. - (1992년) 2020. 12. 20. 뻥튀기 공장 한희철의 얘기마을(177) 뻥튀기 공장 신작로께 마을 입구에 있던 단무지 창고가 과자 공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단무지를 절이던 창고가 과자 공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과자 공장을 운영하던 이가 단무지 창고를 사 이사를 온 것입니다. 공장이래야 거창한 것이 아닌 뻥튀기를 튀기는 일이지만 나란히 줄맞춰 놓은 기계가 자동으로 돌아가고, 튀긴 뻥튀기는 또 기계를 따라 봉지에 담는 곳까지 자동으로 운반되니, 공장은 분명 공장입니다. ‘뻥!’ 하는 뻥튀기 소리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간식 삼아 싼 값에 뻥튀기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장 앞에 켜놓은 불이 마을로 들어서는 어둔 길을 비춰줘 밤마다 전에 없던 불빛이 고맙기도 하지만, 과자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그 중 반가웠던 건 마을에 사.. 2020. 12. 19. 할머니의 합장 한희철의 얘기마을(176) 할머니의 합장 한 달에 한 번씩 헌금위원이 바뀝니다. 헌금위원은 헌금시간이 되면 예배당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담긴 헌금을 헌금 바구니에 담아 제단에 바치는 일을 합니다. 지난 달 헌금위원은 허석분 할머니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사이 할머니는 헌금함에 담긴 헌금을 바구니에 담아 제단으로 가져 왔습니다. 할머니가 전하는 바구니를 받던 나는 뜻하지 않은 할머니 모습에 순간적으로, 아주 순간적으로 놀라기도 했고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헌금 바구니를 제단에 선 목사에게 전한 후 할머니는 두 손을 지긋이 모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던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지났던 건 그런 할머니 모습 대하는 순간 나도 할머니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었던, 나도 몰랐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머리 숙.. 2020. 12. 18. 빛 한희철의 얘기마을(175) 빛 “한 쪽 눈을 빼서 주겠다고, 그것도 좋은 쪽 눈을 빼서 주겠다 했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오원례 성도님은 약해진 눈에는 안 좋다는 눈물을 연신 흘리며 계속 그 얘기를 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오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와 드리는 심방 예배를 마쳤을 때, 어려웠던 순간을 회고하던 이상옥 성도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아내의 시력을 걱정하자 얘길 듣던 오원례 성도님이 끝내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당뇨 후유증으로 생긴 시력 감퇴 현상이 교통사고로 더욱 심해져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고생한 아내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눈을 감고도 지내 봤다는 말에 이어, 당신 한쪽 눈을 빼 아내에게 주겠다고, 그것도 좋은 쪽 눈을 주겠다고, 의사에게.. 2020. 12. 17. 당근 한희철의 얘기마을(174) 당근 근 한 달 동안 계속 되어온 당근 작업이 이제야 끝이 났다. 강가 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당근, 장마가 겹쳐 힘들었지만 그나마 뙤약볕보다는 비가 나았고, 덥다고 작업을 미루다간 밭에서 썩히기 십상인 일이었다. 당근 작업은 정확히 새벽 4시에 시작된다. 제법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당근 작업을 위해 새벽 4시가 되면 일할 사람을 데리러 차가 온다. 말이 새벽 4시지 4시에 출발하기 위해서는 새벽 두세 시도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다. 소죽도 써 줘야 하고 밥 한 술이라도 떠야 한다. 당근 캐고, 캔 당근 자루에 담고, 차에 날라 싣기까지의 일은 빠르면 오후 1시 늦으면 서너 시까지 계속된다. 시장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당근이지만 그 당근 속엔 새벽 고단한 잠을 일으킨 주.. 2020. 12. 15. 파스 한희철의 얘기마을(173) 파스 남편이 제약회사에 다니는 아내의 친구가 파스를 한 뭉치 보내 왔다.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혼자 사는 할머니들에게 나눠 드리기로 했다.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작실로 올라갔다. 늦게야 끝나는 일.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그 시간이 맞다. 다리 건너 첫 번째 집인 김천복 할머니네 들렀을 때,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두 분 할머니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엄마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두 분은 그렇게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한 지붕 아래에서 한 지아비와 함께 살았던 두 분이 이젠 두 분만 남아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산다. 두 분 할머니는 일을 마치고 막 돌아온 길이었다. 손이며 얼굴에 묻은 흙이 그대로였다. 얼른 씻고 저녁 상 차려야 함에도, 그러고 있으면 누가 상이나 차려올 것처.. 2020. 12. 14. 이전 1 ··· 34 35 36 37 38 39 40 ··· 1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