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당근 한희철의 얘기마을(174) 당근 근 한 달 동안 계속 되어온 당근 작업이 이제야 끝이 났다. 강가 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당근, 장마가 겹쳐 힘들었지만 그나마 뙤약볕보다는 비가 나았고, 덥다고 작업을 미루다간 밭에서 썩히기 십상인 일이었다. 당근 작업은 정확히 새벽 4시에 시작된다. 제법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당근 작업을 위해 새벽 4시가 되면 일할 사람을 데리러 차가 온다. 말이 새벽 4시지 4시에 출발하기 위해서는 새벽 두세 시도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다. 소죽도 써 줘야 하고 밥 한 술이라도 떠야 한다. 당근 캐고, 캔 당근 자루에 담고, 차에 날라 싣기까지의 일은 빠르면 오후 1시 늦으면 서너 시까지 계속된다. 시장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당근이지만 그 당근 속엔 새벽 고단한 잠을 일으킨 주.. 2020. 12. 15. 파스 한희철의 얘기마을(173) 파스 남편이 제약회사에 다니는 아내의 친구가 파스를 한 뭉치 보내 왔다.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혼자 사는 할머니들에게 나눠 드리기로 했다.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작실로 올라갔다. 늦게야 끝나는 일.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그 시간이 맞다. 다리 건너 첫 번째 집인 김천복 할머니네 들렀을 때,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두 분 할머니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엄마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두 분은 그렇게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한 지붕 아래에서 한 지아비와 함께 살았던 두 분이 이젠 두 분만 남아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산다. 두 분 할머니는 일을 마치고 막 돌아온 길이었다. 손이며 얼굴에 묻은 흙이 그대로였다. 얼른 씻고 저녁 상 차려야 함에도, 그러고 있으면 누가 상이나 차려올 것처.. 2020. 12. 14. 기도 덕 한희철의 얘기마을(172) 기도 덕 “사실 비가 안 와 애가 탈 땐 비 좀 오시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습니다만, 하나님, 이젠 비가 너무 오셔서 걱정입니다. 비 좀 그만 오시게 해 주시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며칠째 많은 비가 쏟아지고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 수요저녁예배를 드릴 때, 김영옥 집사님의 기도에 솔직함이 담긴다. 지긋이 하나님도 웃으셨으리라. 그날 이후 장마 곱게 지나간 데에는 집사님 기도 덕, 하나님의 웃음 덕 적지 않았으리라. - (1992년) 2020. 12. 13. 만병통치약 한희철의 얘기마을(171) 만병통치약 풀 타 죽는 약을 뿌렸는데도 풀이 잘 안 죽었다고 남철 씨는 묻지도 않은 마당 풀에 대해 변명을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일 마치고 돌아온 광철 씨 동생 남철 씨를 언덕배기 그의 집에서 만났다. “요새는 이 약 먹는데....” 남철 씨는 호주머니에서 웬 약을 꺼냈다. 알약들이 두 줄로 나란히 박혀 있었다. 보니 게보린이었다. “이가 아파요?” 물었더니 “아니요. 농약 치고 나면 어질어질 해서요. 잠 안 올 때도 이 약 먹으면 잠이 잘 와요. 히히히.” 이야기를 마치며 남철 씨는 버릇처럼 든 웃음을 웃었다. 이집 저집, 이 동네 저 동네 품 팔러 다니는 남철 씨. 그때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비상약처럼 들어 있는 게보린 알약. 농약치고 어질하면 알약 하나 꺼내 먹.. 2020. 12. 12. 할머니의 거짓말 한희철의 얘기마을(170) 할머니의 거짓말 누워 계실 줄로 알았던 할머니는 대문가에 나와 앉아 있었다. 남아 있는 독기를 빼낸다며 대야에 흙을 가득 담아 흙 속에 손을 파묻은 채였다. 좀 어떠시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할머니는 웃었지만, 흙에서 빼낸 손은 괜찮지 않았다. 독기가 검붉게 퍼진 것이 팔뚝까지 뚱뚱 부어 있었다. 서울에 있는 교회 학생부 집회를 다녀오고 나니 어두운 소식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석분 할머니가 뱀에 물린 것이었다. 뒷밭에 잠깐 일하러 나가 김을 매는데, 손끝이 따끔해 보니 뱀이었다. 얼른 흙을 집어 먹으며 뱀을 쫓아가 그놈을 돌로 짓이겨 죽였다. 입으로 물린 데를 빨았는데 입 안 가득 독기가 느껴질 만큼 독이 독했다. 괜찮겠지 참다가 시간이 갈수록 몸이 부어오르자 할 수 없이.. 2020. 12. 11. 겨릿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69) 겨릿소 내게 오라. 내가 네 겨릿소가 되어주마. 내가 네 곁에서 너와 함께 밭을 갈겠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얼마 전 예배당로 들어서는 출입문 유리에 글을 써서 붙였다. 성경말씀을 자기 생각이나 형편에 따라 바꿔 읽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은 유익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겨릿소’란 소로 밭을 갈 때 두 마리 소를 함께 부르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한 마리 소가 갈지만 때와 곳에 따라서는 겨릿소를 부리기도 한다. ‘내게 와서 쉬며 내 멍에를 매라’(마 11:28-30)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농촌 형편에 맞게 바꿔 보았다. 내가 비록 힘이 약하고 힘이 달려도 내 겨릿소인 안소가 든든하다면 그건 얼마나 큰 힘일까, 주님이 내 곁에서 내 안소가 되어 나와 함께 밭을.. 2020. 12. 10. 가난한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168) 가난한 사랑 아이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밖으로 돌아치기 일쑤고, 그나마 집에 있는 날은 뭔가를 읽고 쓴다고 방안에 쳐 박히곤 하니 같이 어울릴만한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루 종일 두 녀석이 마당에서 노는 걸 보면 은근히 마음이 아프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은 많지 못합니다. 그걸 잘 알기에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면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애써 노력을 합니다. 그중 쉽게 어울리는 것이 오토바이입니다. 혼자 타기에도 벅찬 조그만 오토바이지만 앞쪽에 규민이 뒤쪽에 소리를 태웁니다. 두 녀석은 오토바이 타는 걸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규민이는 오토바이를 탄다면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어서 떠나자고 아무나 보고 손을 흔들어 댑니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싶었던 처음과.. 2020. 12. 9. 불 하나 켜는 소중함 한희철의 얘기마을(167) 불 하나 켜는 소중함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오토바이를 타고 작실로 올랐다. 패인 길을 고친다고 얼마 전 자갈을 곳곳에 뿌려 놓아 휘청 휘청 작은 오토바이가 춤을 춘다. 게다가 한 손엔 긴 형광등 전구를 잡았으니 어둠속 한손으로 달리는 작실 길은 쉽지가 않았다. 전날 우영기 속장님 집에서 속회 예배를 드렸는데, 보니 형광등 전구가 고장 나 그야말로 캄캄절벽인지라 온통 더듬거려야 했다. 전날 형광등이 고장 났으면서도 농사일이 바빠 전구 사러 나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교회에 형광등 여유분이 있었다. 그토록 덜컹거렸으면서도 용케 전구는 괜찮았다. 형광등 전구를 바꿔 끼자 캄캄한 방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막 마치고 돌아온 속장님이 밝아진 방이 신기한 듯 반가워한다. 필요한 .. 2020. 12. 8. 공부 한희철의 얘기마을(166) 공부 교회 구석진 공간 새로 만든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빼꼼 들여다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종순이였습니다. “목사님 뭐 해요?” 열린 창문을 통해 발돋움을 하고선 종순이가 묻습니다. “응, 공부한다.” 그러자 종순이가 이내 눈이 둥그레져 묻습니다. “목사님두 공부해요?” 공부는 자기 같은 아이들만 하는 것으로 알았나 봅니다. “그럼,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거야.” 고개를 갸우뚱, 종순이가 돌아섭니다. 그런 종순이를 내다보며 미안하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농사일에 책 볼 겨를이라곤 없을 종순이 엄마 아빠 종순이에겐 미안하기도 했고, 종순이를 위해서라면 다행스럽기도 했습니다. - (1992년) 2020. 12. 7. 이전 1 ··· 35 36 37 38 39 40 41 ··· 1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