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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순례자 한희철의 얘기마을(162) 순례자 된 소나기가 한참 쏟아진 지난주일 오후, 한 청년이 찾아 왔습니다. 비를 그대로 맞은 채였습니다. 단강으로 오는 차편을 잘 몰라 중간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했습니다. 그날 청년은 세례를 받았다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처음 믿음을 잘 지켜 신부님께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그러다가는 뛰고 그러다간 불쑥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뒀던 단강을 무작정 찾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잠깐 인사하고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서는 길, 비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우산 하나 전하며 빗속 배송합니다. 불편한 걸음걸이. 세례 받은 날 먼 길을 고생으로 다녀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세례의 의미를 마음속 깊이 새기는 순례자의 모.. 2020. 12. 3.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한희철의 얘기마을(161)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대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작실서 섬뜰로 내려오는 산모퉁이 길, 아침 일찍 커다란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책가방 등에 메고 준비물 손에 든 5학년 병직이입니다. 하루 첫 햇살 깨끗하게 내리고, 참나무 많은 산 꾀꼬리 울음 명랑한 이른 아침, 씩씩한 노래를 부르며 병직이가 학교로 갑니다.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 (1992년) 2020. 12. 2.
제비집 한희철의 얘기마을(160) 제비집 사택 지붕 아래 제비가 집을 지었습니다. 며칠 제비 울음 가깝더니 하루 이틀 흙을 물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벽돌 중 조금 튀어나온 부분을 용케 피해 집 자리로 잡았습니다. 언제 부부의 연을 맺었는지 두 마리의 제비는 보기에도 정겹게 바지런히 집을 지었습니다. 진흙을 물어오기도 하고 지푸라기를 물어오기도 하며 제비는 하루가 다르게, 낮과 저녁이 다르게 집을 지었습니다. 전깃줄에 새까맣게 앉곤 했던 어릴 적과는 달리 해마다 수가 줄어드는 제비가 내가 사는 집을 찾아 집을 짓다니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유심히 집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언제 어디서 배운 것인지 며칠 사이로 봉긋 솟은 모양의 제 집을 제비는 훌륭하게 지었습니다. 지나가던 승학이 엄마가 제비집을 보더.. 2020. 12. 1.
결혼식 버스 한희철 얘기마을(159) 결혼식 버스 단강이 고향인 한 청년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전화를 주기도 하는 가족인데다, 애써 주일을 피해 평일에 하는 결혼식인지라 같이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대절한 관광버스가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잔치가 있는 날에는 의례히 대절하는 버스입니다. 한번 부르는 값이 상당하면서도 버스 대절은 잔치를 위해선 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바쁜 농사철, 게다가 애타게 기다렸던 단비마저 내려 버스엔 전에 없던 빈자리도 생겼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차 안의 스피커에선 신나는 음악이 쏟아지듯 흘러나옵니다. 그 빠르기와 음 높이가 여간이 아닙니다. 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이 바쁜 철 잔치를 벌여 미안하고.. 2020. 11. 30.
막연함 한희철 얘기마을(158) 막연함 귀래로 나가는 길, 길 옆 논둑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군데군데 거름 태운 자국이 버짐처럼, 기계충처럼, 헌데처럼 남아있는, 풀 수북이 자라 오른 논 한 귀퉁이, 처박듯 경운기 세워두고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 퍼지는 담배 연기 따라 함께 퍼지는, 왠지 모를 안개 같은 막연함. - (1992년) 2020. 11. 29.
사라진 참새 한희철 얘기마을(157) 사라진 참새 교회로 들어오는 입구 양쪽으로는 향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향나무는 참새들의 놀이터다. 바로 앞에 있는 방앗간에서 놀던 참새들이 쪼르르 날아와 향나무 속에서 뭐라 뭐라 쉴 새 없이 지껄여대곤 한다. 다투는 건지 사랑고백을 하는 건지. 서재에 앉으면 그런 참새들의 지저귐과 푸릅 푸릅 대는 힘찬 날갯짓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게 된다. 그런 참새들의 모습이 얼마나 정겨운지. 며칠 전엔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땅거미가 깔려드는 저녁 무렵이었다. 예배당 마당에 서 있는데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은 새 한 마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와, 훅 향나무 속을 훑으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참새들의 비명소리도 잠깐, 순간적으로 향나무를 빠져 날아간 검은 새의 발톱엔 어느새 .. 2020. 11. 28.
할아버지의 눈물 한희철 얘기마을(156) 할아버지의 눈물 정작 모를 심던 날 할아버지는 잔 수 모르는 낮술을 드시곤 안방에 누워버렸습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달랠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모를 심기 훨씬 전부터 할아버지는 공공연히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심는 날을 일요일로 잡았고, 흔해진 기계모를 마다하고 손모를 택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일곱 자식들이 며느리며, 사위며, 손주들을 데리고 한날 모를 내러 내려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두 노인네만 사는 것이 늘 적적하고 심심했는데 모내기를 이유로 온 가족이 모이게 됐으니 그 기쁨이 웬만하고 그 기다림이 여간 했겠습니까. 기계 빌려 쑥쑥 모 잘 내는 이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논둑을 고치고 모심기 알맞게 물을 가둬놓고선 느.. 2020. 11. 27.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한희철 얘기마을(155)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약주만 들면 교회에 들르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꼬부랑 할아버지입니다. “내가 슬퍼.” 마음 아픈 일들을 장시간 이야기하기도 하고, 당신 살아온 이야기 하며,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나를 향한 호칭도 전도사님에서부터 목사님, 약주가 과한 날은 조카, 때론 자네가 되기도 합니다. “난 자네가 좋아. 아들 같어.” 평소엔 일마치고 돌아올 무렵 주머니 가득 달래를 캐가지곤 “이런 거 어디 나는지 모를 것 같아 캐 왔다.”시며 건네주곤 하는데, 약주를 하시면 약주 기운에 “난 자네가 좋다.”고 그 어려운 사랑고백 술기운에 기대 하듯 거듭거듭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날 좋아한다는 고백이 누구로부턴들 반갑지 않겠습니까만 한 할.. 2020. 11. 26.
남모르는 걱정 한희철 얘기마을(154) 남모르는 걱정 종하가 산토끼를 또 한 마리 잡았습니다. 올 겨울 벌써 일곱 마리째입니다. 토끼를 잡아들이는 종하를 종하 할머니는 걱정스레 봅니다. 먼저 간 아들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종하 아버지도 산짐승 잡는 덴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종하 아버지가 마흔도 못 채우고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아버질 닮아 토끼 잘 잡는다고 동네 사람들은 종하를 신기한 듯 말하지만 할머니, 종하 할머니는 남모르는 걱정을 혼자 합니다. - (1992년) 2020.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