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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장님에겐 눈물이 기도입니다 새벽 세시 넘어 일어나 세수하면 그나마 눈이 밝습니다. 성경 몇 줄 읽곤 공책을 펼쳐 몇 줄 기도문을 적습니다. 머릿속 뱅뱅 맴돌 뿐 밖으로 내려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서툰 기도 몇 마디, 그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두 방울 물 받듯 적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그걸 모아야 한 번의 기도가 됩니다. 흐린 눈, 실수하지 않으려면 몇 번이고 읽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때마다 흐르는 눈물. 옆에서 자는 남편 놀라 깨기도 하고, 몇 번이고 눈물 거둬 달라 기도까지 했지만 써 놓은 기도 읽기만 해도 흐르는 눈물, 주체 못할 눈물. 실컷 울어 더 없을 것 같으면서도 기도문 꺼내들면 또 다시 목이 잠겨 눈물이 솟습니다. 안갑순 속장님의 기도는 늘 그렇게 준비됩니다. 다음 주 속장님 기도입니다, 알려드리면 한 주일은.. 2021. 10. 2.
무심한 비는 그칠 줄 모릅니다 찬비가 종일 내리던 지난 주일은 윗작실 이한주 씨 생일이었습니다. 이하근 집사의 아버님이신 이한주 씨가 73세 생일을 맞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양말을 포장하여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집 뒤론 산이 있는, 윗작실 맨 끝집입니다. 방안에 들어섰을 때 마을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들고 있었습니다. 상을 따로 차리신다는 걸 애써 말려 같이 앉았습니다. 비만 아니었다면 모두 들에 나갔을 텐데 내리는 비로 일을 쉬고 모처럼 한데 모인 것입니다. 비꽃이 피듯 이야기꽃이 피어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갑니다. 장에 다녀온 얘기하며 비 맞아 썩고 싹이 나고 하는 곡식 얘기하며, 몸 아픈 얘기하며. 그중 치경 씨 얘기엔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바로 그날, 어릴 적 식구들과 흩어져 소식이 10년 넘게 끊겼던 치경 씨.. 2021. 10. 1.
문향(聞香) 하얀 박꽃이 더디 피고 하얀 차꽃이 피는 시월을 맞이하며 하얀 구름은 더 희게 푸른 하늘은 더 푸르게 무르익어가는 이 가을 하늘이 먼 듯 가까운 얼굴빛으로 다가오는 날 들음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하늘문을 그리며 문향(聞香) 차꽃의 향기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올해도 감사히 모든 꽃들이 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음은 꽃들을 둘러싼 없는 듯 있는 하늘이 늘 쉼없는 푸른 숨으로 자신의 향기를 지움으로 가능한 일임을 2021. 10. 1.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 2021. 9. 30.
치화 씨의 가방 치화 씨가 교회 올 때 가지고 다니는 손가방 안에는 성경과 찬송, 그리고 주보뭉치가 있습니다. 빨간 노끈으로 열십자로 묶은 주보뭉치, 한 주 한 주 묶은 것이 제법 굵어졌습니다. 주보를 받으면 어디 버리지 않고 묶었던 노끈을 풀러 다시 뭉치에 챙깁니다. 아직 치화 씨는 한글을 모릅니다. 스물다섯, ‘이제껏’이라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집안에 닥친 어려움으로 어릴 적부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찬송가 정도는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곡조도 따라합니다. 반의 반 박자 정도 늦은, 그렇게 가사를 찾는 그의 안쓰러운 동참을 하나님은 기쁘게 들으실 겁니다. 주기도문도 서툴지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글을 모르지만 차곡차곡 주보를 모으는 치와 씨, 치화 씨는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모으고 있.. 2021. 9. 30.
하룻강아지 ‘한국전기통신’이라는 사보(89년 3월호)를 보다보니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글이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하룻’이라는 말은 ‘하릅’이 맞다는 것이다. ‘하릅’이라는 말은 소나 말, 개 등의 한 살 된 것을 뜻하는 말이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그래서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라면 범이 아니라 세상 아무리 무서운 게 있어도 무서워할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하루보다는 한 살 된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함이, 타당성이 있지 싶다. 점점 외래어로 대치되어가는 순 우리말, 말에도 생명이 있다던데 같이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열 살까지의 동물의 나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살(하릅), 두 살(이릅), 세 살.. 2021. 9. 28.
푸른 명태찜 한가위 명절 마지막 날 늦잠 자던 고1 딸아이를 살살 깨워서 수운 최제우님의 유허비가 있다 하는 울산 원유곡 여시바윗골로 오르기로 한 날 번개처럼 서로의 점심 때를 맞추어 짬을 내주시고 밥도 사주신다는 고래 박사님과 정김영숙 언니 내외 끓는 뜨거운 돌솥밥과 붉은 명태찜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간직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언니와의 첫만남에서 서로가 짠 것도 아닌데 둘 다 윤동주와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똑같이 챙겨온 이야기 그것으로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우리는 단번에 첫만남에서부터 바로 자매가 된 이야기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수운님의 한시를 풀이해서 해설서를 적으신 고래 박사님의 노트 이야기 청수 한 그릇 가운데 떠놓고 모두가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천도교의 예배와 우주의 맑은 기운을 담은 차 한.. 2021. 9. 28.
석 삼 방문이 활짝 열리며 아들이 바람처럼 들어와 누웠는 엄마 먹으라며 바람처럼 주고 간 종재기 푸른 포도 세 알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누가 한국 사람 아니랄까봐 피 속에 흐르는 석 삼의 수 더도 덜도 말고 석 삼의 숨 하나 둘 셋 하늘 땅 사람 2021. 9. 27.
그리움 좀체 마음 내비치지 않던 산이 찾아온 가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골짝마다 능선마다 붉게 타올라 지켜온 그리움 풀어헤친다 사람의 마음도 한때쯤은 산을 닮아 이런 것 저런 것 다 접어놓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붉은 빛 그리움으로 번져갈 수 있었으면 - 1989년 2021.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