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64 할머니의 식사 윤연섭 할머니는 무섭게 일을 합니다. 그야말로 쉴 틈이 없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도 그렇고 넉넉히 사는 자식들 살림도 그렇고 이젠 일 놓아도 될 법 한데, 일하는 할머니 손길은 변함이 없습니다. 열흘이 넘게 걸리는 고된 당근 일에도 빠짐이 없고, 혼자 사는 집 좁은 마당과 방안엔 언제라도 일감들이 널려 있습니다. 모처럼 쉬는 겨울, 아주 쉴 수는 없다는 듯 산수유가 잔뜩 입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혼자 식사를 합니다. 식사 하러 방안으로 들어가는 할머니 두 손엔 밥과 짠지가 들렸습니다. 한 손엔 밥 한손엔 짠지, 그뿐입니다. 쥐코밥상도, 그 흔한 쟁반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두 손으로 밥과 짠지를 날라 맨바닥에 놓고 한 술 밥을 뜹니다. 어둘 녘에야 끝나는 일, 찬밥일 때가 많습니다. 그게 .. 2021. 4. 18. 어정쩡함 씨가 굵게 잘 내렸는데도 값은 평당 500원. 허석분 할머니의 탄식이 길다. 강가 밭 당근이 전에 없이 잘 되었는데도 값이 곤두박질,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 탄식 앞에 난 괜히 송구할 뿐이다. 윗작실 정영화 씨는 강가 밭에 배추를 심었다. 그런대로 잘 되어 통이 굵은 배추가 나란히 보기도 좋았다. 뜸하던 장사꾼이 그나마 들어오더니 밭 전체에 22만원, 그러니까 포기당 100원 꼴에 팔라고 했다. 화가 난 정영화 씨는 안 팔고 말았다. 여차하면 밭에서 얼려 죽이고 말일. 그래도 씨 값도 안 되는 그런 값엔 차마 팔 수가 없었다. 몇 군데 연락을 취했고 다행히 배추를 사겠다는 분들이 나섰다. 차를 마련해 원주 시내까지 싣고 나가야 한다. 여기저기 차편을 알아보고 사려는 이들과 값과 날짜를 맞춘다. 그러.. 2021. 4. 17. 창조적 공생의 세상을 향하여 “고난 앞에서 모른 체 돌아설 권리는 없다. 불의 앞에서 사람들은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고난이 그에게 우선권을 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의무이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286에 인용된 엘리 비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사이 제가 아침저녁으로 걷는 효창공원에 흰철쭉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질서 있게 자리바꿈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산수유꽃이 다 떨어지고 복사꽃이 시들해.. 2021. 4. 16. 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작실 병직이 네가 이사를 갔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연극 발표 시간엔 아합 왕 역을 맡아 참 멋있고도 씩씩하게 연극을 잘 했던 병직이, 병직이 네가 문막으로 떠났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떠난 것은 의외였다. 곧 환갑의 나이. 아무래도 떠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그냥 내 논 부쳐도 남는 게 없는 판에 남의 땅 빌려 붙이려니 그 사정 오죽했으랴만, 두 사람이 이제 나가 무슨 일을 어찌 할까 짐작이 잘 안 된다. 빨갛게 잘 익은 산수유나무를 사이에 둔 아랫작실 양담말 앞뒷집이 모두 텅 비어 버렸다. 며칠 있으면 종하 네가 이사를 간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 밑에서 살던 종하 종일이 종석이가 결국은 떠나게 됐다. 다 모여야 열 명뿐인 학생부에 종하, 종일이가 빠지면 그 구멍은 휑하니 클 것이다. 재워 주는 건.. 2021. 4. 16. 새순 내게 있는 모든 의지를 떨구십니다 봄날의 꽃잎처럼 사방 흩어 놓으십니다 이 땅에 내 것이라 할 것 없는 나는 가난한 나무처럼 제 자리에 머물러 가만히 눈 감고 안으로 푸르게 깊어질 뿐입니다 2021. 4. 15. 떠나가는 손 트럭 운전석 옆에 나란히 앉은 설정순 집사님도 남편 박동진 아저씨도 모두 눈이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작실로 올라가다 만난 이사 차, 고만고만한 보따리들이 차 뒤에 되는 대로 실려 있었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문막으로 이사를 나가는 길이다. 때가 겨울, 두 분 모두 환갑의 나이, 이제 어디로 나간단 말인가. 내 땅 하나 없이 남의 땅 붙이는 것도 이젠 한계, 두 분은 떠밀리고 있었다. 드신 약주로 더욱 흐려진 아저씨의 젖은 두 눈이 안타까웠다. “건강하세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애써 웃으며 그렇게 인사할 때 두 분은 차창 밖으로 내 손만 마주 쥐었다. 뭔가 하려던 말이 주르르 흘러내린 눈물에 막히고 말았다. 마침 도로 포장을 위한 공사 중, 올라오는 차와 마주쳐 이사차가 길옆 논으로 피해 들어갔.. 2021. 4. 15. 없는 책 돈냄새가 없는 책 추천사가 없는 책 전쟁 후 서울에서 태어나 이 땅을 살아오는 동안 반평생의 구비길을 넘고 넘으며 글에서 없는 냄새를 풍길 수 있다니 글을 읽으면서 있음을 찾으려다가 이 땅에서 나를 세운 흔적이라고는 마땅히 없고 또 없어서 눈물을 지우고서 바라보는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하늘처럼 출렁이며 때론 잠잠한 맑은 글에 비추어 되돌아볼 것은 없는 나 자신 뿐이었다 , 최창남 2021. 4. 14.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시편 2편 4절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 笑蜉蝣之不知自量(소부유지부지자량)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4절에서 시인은 그 난장판의 야단법석에서 하느님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1990년 보이저 2호가 바쁜 여정을 잠시 미루어 몸체를 돌려 지구의 모습을 촬영하고는 그 사진을 지구에 전송하였지요. 61억km 떨어진 곳에서 찍은 지구는 겨우 0.12 화소에 불과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이 우주에서 인생이 몸붙여 사는 지구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더 선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임무를 제안하고 이끌었던 칼 세이건은 그 사진을 통해 얻은 감명으로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2021. 4. 14. 봄(23) 에구구 시방 사월 허구두 중순인디 이게 웬 뜬금읍는 추위라냐 꽃들이 춥겁다 여벌 옷두 읍구만 - (1996년) 2021. 4. 14. 이전 1 ··· 63 64 65 66 67 68 69 ··· 2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