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87 애광원 이번 여름을 보내면서 가장 인상적인 일은 애광원을 방문한 일이었다. 거제도, 한 정치가의 고향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곳은 차로 열 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곳이었다. 지도를 펴 놓고 확인해보니 남쪽의 맨 끄트머리 한쪽 구석이었다. 춘천의 권오서 목사님과 사모님, 서울의 유경선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 다섯 명이 동행하게 되었다. 애광원은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아름답게 어울린 장승포의 한 언덕배기에 있었다. 건물자체가 애광원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 했다. 애광원은 정신지체아들을 돌보는 특수기관이었다. 물리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등 의료재활 활동과 직조·봉제·도예·조화·축산.칠보·염색·원예 등 작업재활 활동, 화훼·버섯재배·무공해 채소재배 등 자립작업장이 운영되는 애광원과, 중증 장애자를 수용하고 있는.. 2021. 4. 29. 생일 축하 엽서 "아빠, 할머니 생일은 생신이라고 하는 거야?" 어디서 들었는지 소리가 엽서 하나를 챙겨들고 와선 '생신'에 관해 묻습니다. 내일 모레가 할머니 생신, 소리는 엉덩이를 하늘로 빼고 앉아 뭐라 열심히 썼습니다. 썼다간 지우고 또 쓰고 그러다간 또 지우고, "뭐라 쓰니?" 물어보면 획 돌아서선 안 보여주고. 며칠 뒤 굴러다니는 봉투가 있어 보니 소리가 썼던 할머니 생일 축하 엽서였습니다. 할머니가 분명 고맙다 하며 엽서를 받았는데 웬일인가 알아보니, 그날 엽서를 쓰다 잘못 써서 다시 한 장을 더 썼던 것이었습니다. 엽서에는 연필로 쓴 큼지막한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할머니 생신을 축하합니다." '할머니 생신을 축하합니다'라고 쓴 엽서는 엉뚱하게도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었습니다. '소리, 규민 섰다' 기껏.. 2021. 4. 28.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2021년 새해 일지의 제목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으로 정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게 무엇을 새롭게 한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말을 떠올릴 적마다 새로운 깊은 산골 돌 틈에서 샘솟는 석간수 한 모금 마시는 듯하다 이제 머지않아 물은 오월의 신록빛으로 물들겠지 2021. 4. 28. 나는 세 번째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간다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많은 빚을 지었다. 내가 머물 곳이 없을 때 어떤 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나를 재워 주었고, 어떤 이들은 얼굴도 모르는 내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주셨다. 가난했던 나는 여러 사람들의 돌봄과 배려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상을 향해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이자를 포함해서 그 돈을 갚으면 그만이지만 나를 도왔던 많은 이들은 내게 돌려받고자 빌려준 것이 아니기에 내가 갚을 수 있는 형편이 되어도 나는 갚을 수가 없다. 그들 중 어떤 분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기에 어떤 식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와 빚이 있다. 나는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고, 이제는 가능하면 살면.. 2021. 4. 28. 방애 저녁무렵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김정옥 집사님이 교회에 들렸렀니다. 밥 해 날랐던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고, 손엔 들꽃을 한 다발 꺾어 들었습니다. 집사님은 제단의 꽃을 방금 꺾어온 꽃으로 갈았습니다. 때를 따라 다르게 피어나는 들꽃을 꺾어 집사님은 즐겨 제단을 장식하곤 합니다. 그 일을 당신의 몫으로 여기며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제단에 놓이는 들꽃은 그 수수함 하나만으로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제단에 꽃을 갈은 집사님이 예배당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어휴, 개똥!” 하며 벽돌 몇 개를 집어 들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곳이다 보니 예배당 마당엔 동네 개들도 적지 않게 모이고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개똥이 널리기 일쑤입니다. 며칠만 안 치워도 티가 날 정도입니다. 집사님은 벽돌을 가.. 2021. 4. 27. 한 점의 꽃과 별과 씨알 한 점의 꽃 한 점의 별 꽃밭에서 눈 둘 곳 잃을 때 어디 한군데 마음 둘 곳 없을 때 머리위 한 점의 별을 찾듯 발아래 한 점의 꽃을 찾는다 여기 흔한 한 점의 꽃은 낮아지고 작아진 가장 가까운 얼벗 이 땅에 흩어놓으신 별자리 오늘도 하루를 걷다가 마음이 길을 잃으면 한 점의 꽃과 별 그 사이에 사는 나를 지운다 숨으로 나를 지우며 나도 한 점이 된다 한 점의 숨으로 머문 한 점의 빛, 씨알 2021. 4. 27. 얼벗 햇살에도 찌푸릴 줄 모르는 얼굴 곱디 고운 나의 오랜 얼벗 한적한 길을 걷다가 작디 작은 얼굴이 보이면 모른 체 쪼그리고 앉아 벗님과 같은 숨으로 나를 지운다 같은 데를 바라보면 빈탕한 하늘이 있다 2021. 4. 26. 대나무도 벼과지 거제도로 떠나기 위해 가방을 꾸리며 시집 한 권을 챙겨 넣었다. 황동규의 이었다. 떠날 때마다 짐을 줄이자고, 가능하다면 불필요한 짐을 넣지 말아 가볍게 떠나자 하며 웬만한 짐은 빼 버릇하면서도, 거꾸로 챙겨 넣는 것이 시집 한 권쯤이 되었다. 잠시 짬이 날 때 끊어 읽기가 좋았고, 툭툭 끊긴 듯 이어지는 시의 이미지가 여행 분위기와 걸맞을 때가 많았다. 얼핏 서점에서 훑어본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아(사실 황동규의 시는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 셈이지만) 사서 책상에 꽂아 뒀던 책이었다. ‘몰운대행’, 떠남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더욱 쉽게 빼들었다. 차를 타고 오가며 이따금씩, 혹 날 밝아오는 새벽녘 거제의 장승포 포구를 내려다보며 베란다에 앉아 읽기도 했다. 그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 ‘대나무도 벼과(科).. 2021. 4. 26. 나는 더 먼 길을 걷는 꿈을 꾼다(2) 다음날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들어가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넘나들며 무지개 꽃을 피워낸다. 꽃천사 루루가 찾던 “행복의 무지개꽃”은 오늘 우리가 만난 햇살을 잠시 바라볼 여유만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테를링크의 책 ‘파랑새’에서도 주인공 틸틸은 결국 자신의 집에서 파랑새를 찾지 않았던가. 1코스는 접근성이 좋고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인지라 걷는 이들이 많다. 혼자 걷는 이부터 수십 명의 산악회까지 가족, 연인, 직장동료 등 길을 걷는 이들의 관계도 다양해보인다. 100년도 못사는 인생에서 우리는 참 다양한 인연의 거미줄을 치고 산다. 그 중 대부분은 돌보지 못한 세월에 사라지고, 일부는 크고 작은 풍랑에 끊기고, 남은 몇 가닥 거미줄만이 오.. 2021. 4. 25. 이전 1 ··· 63 64 65 66 67 68 69 ··· 2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