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87 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작실 병직이 네가 이사를 갔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연극 발표 시간엔 아합 왕 역을 맡아 참 멋있고도 씩씩하게 연극을 잘 했던 병직이, 병직이 네가 문막으로 떠났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떠난 것은 의외였다. 곧 환갑의 나이. 아무래도 떠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그냥 내 논 부쳐도 남는 게 없는 판에 남의 땅 빌려 붙이려니 그 사정 오죽했으랴만, 두 사람이 이제 나가 무슨 일을 어찌 할까 짐작이 잘 안 된다. 빨갛게 잘 익은 산수유나무를 사이에 둔 아랫작실 양담말 앞뒷집이 모두 텅 비어 버렸다. 며칠 있으면 종하 네가 이사를 간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 밑에서 살던 종하 종일이 종석이가 결국은 떠나게 됐다. 다 모여야 열 명뿐인 학생부에 종하, 종일이가 빠지면 그 구멍은 휑하니 클 것이다. 재워 주는 건.. 2021. 4. 16. 새순 내게 있는 모든 의지를 떨구십니다 봄날의 꽃잎처럼 사방 흩어 놓으십니다 이 땅에 내 것이라 할 것 없는 나는 가난한 나무처럼 제 자리에 머물러 가만히 눈 감고 안으로 푸르게 깊어질 뿐입니다 2021. 4. 15. 떠나가는 손 트럭 운전석 옆에 나란히 앉은 설정순 집사님도 남편 박동진 아저씨도 모두 눈이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작실로 올라가다 만난 이사 차, 고만고만한 보따리들이 차 뒤에 되는 대로 실려 있었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문막으로 이사를 나가는 길이다. 때가 겨울, 두 분 모두 환갑의 나이, 이제 어디로 나간단 말인가. 내 땅 하나 없이 남의 땅 붙이는 것도 이젠 한계, 두 분은 떠밀리고 있었다. 드신 약주로 더욱 흐려진 아저씨의 젖은 두 눈이 안타까웠다. “건강하세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애써 웃으며 그렇게 인사할 때 두 분은 차창 밖으로 내 손만 마주 쥐었다. 뭔가 하려던 말이 주르르 흘러내린 눈물에 막히고 말았다. 마침 도로 포장을 위한 공사 중, 올라오는 차와 마주쳐 이사차가 길옆 논으로 피해 들어갔.. 2021. 4. 15. 없는 책 돈냄새가 없는 책 추천사가 없는 책 전쟁 후 서울에서 태어나 이 땅을 살아오는 동안 반평생의 구비길을 넘고 넘으며 글에서 없는 냄새를 풍길 수 있다니 글을 읽으면서 있음을 찾으려다가 이 땅에서 나를 세운 흔적이라고는 마땅히 없고 또 없어서 눈물을 지우고서 바라보는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하늘처럼 출렁이며 때론 잠잠한 맑은 글에 비추어 되돌아볼 것은 없는 나 자신 뿐이었다 , 최창남 2021. 4. 14.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시편 2편 4절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 笑蜉蝣之不知自量(소부유지부지자량)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4절에서 시인은 그 난장판의 야단법석에서 하느님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1990년 보이저 2호가 바쁜 여정을 잠시 미루어 몸체를 돌려 지구의 모습을 촬영하고는 그 사진을 지구에 전송하였지요. 61억km 떨어진 곳에서 찍은 지구는 겨우 0.12 화소에 불과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이 우주에서 인생이 몸붙여 사는 지구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더 선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임무를 제안하고 이끌었던 칼 세이건은 그 사진을 통해 얻은 감명으로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2021. 4. 14. 봄(23) 에구구 시방 사월 허구두 중순인디 이게 웬 뜬금읍는 추위라냐 꽃들이 춥겁다 여벌 옷두 읍구만 - (1996년) 2021. 4. 14. <나는 사별하였다> 읽기 곡의 여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콘서트가 있습니다. 2010년 여름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루체른 패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사라지듯 끝납니다. 작곡자는 피아니시시모, 즉 가장 작은 소리로 음악을 끝내라는 요구에 더해 ‘죽어가듯이’(ersterbend)란 악상기호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말러 교향곡 9번이 작곡자 자신의 죽음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아바도는 연주가 끝났지만 지휘 동작을 풀지 않았고, 객석에서는 박수를 중단한 채 지휘자의 두 팔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객석은 무려 180초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음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과시하듯 앙코르를 외치거.. 2021. 4. 13. 눈물의 기도 수요저녁예배. 기도 순서를 맡은 집사님이 기도를 하다 말고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에 막혀 기도가 자꾸 끊겼다. “농사는 시작됐는데.... 일꾼은 읍구..., 갈지두 못하고 있는 논밭을 보면 속이 터지구...,자식들은 모두 나가..., 곁에 읍구..., 세대를 잘못 만나...,” 뚝뚝 끊기는, 듣는 이 숨마저 따라 끊기는, 눈물의 기도. - (1992년) 2021. 4. 13. 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시편 2편 1-3절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이 사슬을 끊어버리자!” “이 멍에를 벗어버리자!” 하는구나!(《공동번역》) 何列邦之擾攘兮 何萬民之猖狂(하열방지요양혜 하만민지창광) 世酋蜂起兮 跋扈飛揚 共圖背叛天主兮 反抗受命之王 (세추봉기혜 발호비양 공도배반천주혜 반항수명지왕) 曰 “吾儕豈長甘羈絆兮 盍解其縛而脫其韁?” (왈 “오제기장감기반혜 합해기박이탈기강?”)(《시편사색》, 우징숑) 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네 세상 우두머리들이 거역의 깃발 세우고 모여서는 우리 주님 배반을 모의하는구나 벗어나자! 더 이상 말씀과 명에 잡히지 말자! 가만히 읽어보면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 2021. 4. 12. 이전 1 ··· 66 67 68 69 70 71 72 ··· 2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