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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이들 주일 어린이 예배. 종을 쳤지만 아이들이 모이질 않았다. 늘 빠짐이 없던 은옥이와 은진이까지 안 나왔다. 녀석들이 모두 웬일일까,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 무렵 아랫말로 내려가다 은옥이 은진이 은희를 만났다. 그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온통 얼굴이 벌겋게 탔고 옷은 흙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할머니가 몸져누워 계시자 어린 그들이 할머니 대신 당근 밭을 매고 오는 길이었다. 미안했다. 놀면서 안 오는 줄 알고 섭섭하게 생각했던 내가 영 부끄러웠다. 일하는 아이들을 두고 난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 (1993년) 2021. 2. 2.
가래질 한희철의 얘기마을(219) 가래질 신작로 건너편 산다락 논. 병철 씨가 일하는 곳에 다녀왔다. 소를 끌고 쟁기를 메워 가래질을 하는 일이었다. 층층이 붙어 있는 고만고만한 논들, 작고 외지다고 놀리지 않고 그 땅을 일구는 손길이 새삼 귀하다. “이렷, 이렷” 다부지게 소를 몰며 논둑을 간다. 석석 논둑이 쟁깃날에 갈라진다. 멀쩡한 둑을 반이나 잘라낸다. 저러다 둑이 무너지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가래질을 해야 한 해 동안 논둑이 견딘다. 잘라낸 둑 부분을 물에 이긴 진흙으로 발라두어야 물이 새지 않고 둑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물로 반죽한 물컹물컹한 진흙, 허술하고 약하지 싶은 진흙들이 오히려 물을 견뎌 둑을 둑 되게 하는 것이 신기하다. 단단하고 견고한 것보다는 한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물을.. 2021. 2. 1.
아이스러움! 한희철의 얘기마을(218) 아이스러움! 근 두 달간 놀이방 점심 반찬을 놀이방 엄마들이 준비를 했다. 아내 몫이었던 그 일이 아기 출산으로 엄마들이 돌아가며 맡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 반찬을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이 구별되기도 하고, 매번 같은 걸 준비하기도 그렇고,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은 점심 반찬으로 멸치볶음이 준비되었는데 그날 아이들은 멸치를 하나도 못 먹고 남겼다. 멸치를 막 먹으려는 순간 소리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멸치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것 같아요.” 그 얘길 듣고 보니 반찬 그릇마다 멸치가 눈을 똥글똥글, 더 이상 아이들의 손이 멸치에게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러움! - (1993년) 2021. 1. 31.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신동숙의 글밭(318)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솔가지 주워서불을 살리고 밥 지어 드시던오두막의 수도승 깊은 산 속 한밤 중에 홀로 깨어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생명들 품고 품고 품다가꺾이신 설해목(雪害木) 나는 법정스님한테서십자가 예수를 본다 2021. 1. 30.
농사꾼 생일 한희철의 얘기마을(217) 농사꾼 생일 “오늘 뭐 해요?” 비가 제법 내리는 아침 병철 씨를 만났다. 아무 일 없으면 낮에 차 한 잔 하러 들르라고 하자 병철 씨가 껄껄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비 오는 날은 농사꾼 생일이잖아요.” 2021. 1. 30.
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신동숙의 글밭(317) 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교회가 맹신앙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지가 되지 않기를 - 코로나 바이러스와 탐진치 삼독의 전파지가 된 일부 교회와 선교기관들로 인해서, 교회가 더욱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한 시절 교회에 몸 담았던 나에게 있어 교회 생활은 참 달콤했다. 그런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을 비유하자면, 카필라 왕국을 떠나오던 석가모니의 일에 비할 수 있을까. 5년 동안 뿌리를 내린 교회에서, 마지막 갈등의 순간에, 지나온 과거를 깊이 되돌아보았고, 다가올 미래를 거듭 내다보며 뼛속까지 자녀들의 영혼까지 짐작해보았다. 이대로 교회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면 두 자녀들은 겉으로는 순조롭게 자랄 것이고, 우리 가정은 평안할 것이었다. 하지만 맹신앙으로 영.. 2021. 1. 29.
자기 몸집만큼만 한희철의 얘기마을(216) 자기 몸집만큼만 농활 나온 대학생들에게 병철 씨가 콩 심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 이렇게 호미로 파가지고 콩을 심는데, 한번에 5-6알씩 넣으면 돼. 그러고는 자기 발로 두 개쯤 간격을 두고 또 파서 심으면 되고.” 한 학생이 물었다. “콩은 얼마나 묻으면 돼요?”“응, 그냥 살짝 묻으면 돼. 너무 깊게 묻으면 오히려 안 되지. 옛날 어른들이 그랬어. 씨앗 크기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깨는 깨만큼 묻으면 되고 옥수수는 옥수수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씨앗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다 난다는 거지.” 자기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난다는 씨앗, 모든 살아있는 것이 그리하여 자기 몸집만큼만 흙속에 묻히면 땅에서 사는 걸, 뿌리 내리고 열매 맺는 걸, 더도 덜도 말고 자기 몸집만큼만 흙.. 2021. 1. 29.
주님의 타작 마당 주님의 타작 마당 “하나님의 말씀이 한껏 펼쳐지고 그렇게 풍성하게 전개되는 축복의 만찬에 대한 인간의 가장 깊은 그리고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가장 깊은 감사의 기도가 아닐까요? 감사 그리고 은총을 알아차리는 것 말입니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1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며칠 동안 날이 참 포근했습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 저도 모르게 교회 화단을 기웃거렸습니다. 시퍼렇게 언 채 겨울을 버틴 화초에 약간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 탓이겠지요. 지난 주일에는 모처럼 방송팀과 목회자들 이외에 10여 분의 교우들이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왠지 예배당에 생기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이전에 우리가 자유.. 2021. 1. 29.
달과 별 한희철의 얘기마을(215) 달과 별 “해는 환해서 혼자 있어도 괜찮지만, 달은 캄캄한데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봐 별이랑 같이 있는 거야?” 어둠과 함께 별 총총 돋는 저녁, 어린 딸과 버스를 함께 탔습니다. 훤하게 내걸린 달,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리가 별들과 어울린 달 얘기를 합니다. 그런 말이 예뻐, 마음이 예뻐, 눈이 예뻐 마음껏 인정을 합니다. “그래 그럴 거야.” 밀려오는 졸음 이기지 못하고 이내 품에서 잠드는 어린 딸. 캄캄한데 달 혼자면 무서울까봐 별이 같이 있는 거라면, 품에 안겨 잠든 너야 말로 내겐 별이지, 험한 세상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어야지, 왠지 모를 간절함으로 잠든 딸의 등을 다독입니다. - (1993년) 2021.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