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쉬운 삶 한희철의 얘기마을(133) 쉬운 삶 안갑순 속장님이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끝정자로 내려갔습니다. 아직껏 가슴이 뛴다는 속장님의 얼굴이 많이 부어있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깟 강아지 두 마리에 웬 수선이냐 할진 몰라도 이야길 들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일 년 내내 번 돈을 아껴 집사님 내외분은 강아지 두 마리를 샀습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사람 주먹보다도 작은 귀한 강아지였습니다. 그림같이 인형같이 생긴 강아지 두 마리를 방안에 키우며 며칠 동안은 고놈들 귀여운 맛에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들인 거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아지들은 귀여움 투성이였습니다. 자식 없이 살아가는 노년의 외로움을 그렇게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고가 나던 날, 마침 바깥 볕.. 2020. 11. 3. 우리는 가난합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132) 우리는 가난합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더는 허름할 수 없는 언덕배기 작은 토담집, 시커멓게 그을린 한쪽 흙벽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또렷한 글씨, 5학년 봉철이었을까, 중학교 다니는 민숙이였을까, 누가 그 말을 거기에 그렇게 썼을까? 아까운 줄 모르게 던진 나뭇단 불길이 반딧불 같은 불티를 날리며 하늘 높이 솟고,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불가로 둘러섰을 때, 불길에 비친 까만 벽의 하얀 글씨. “우리는 가난합니다.” 보건소장님의 연락을 받고 작실로 올라갔을 땐, 이미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입으로 코로 흰 거품을 뿜으며 아무 의식이 없었다. 혈압 240-140. 손전등으로 불을 비춰도 동공에 반응이 없었다. 변정림 성도. 한동안 뵙지 못한 그를 난 그.. 2020. 11. 2. 별들의 잔치 한희철의 얘기마을(131) 별들의 잔치 늦은 밤, 마당에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별들의 잔치, 별들은 ‘고함치며 뛰어내리는 싸락눈’ 같이 하늘 가득하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들의 아우성. 별자리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옆자리 별들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느라 모두들 눈빛이 총총하다. 그들 사이로 은하가 굽이쳐 흐른다. 넓고 깊은 은빛 강물, 파르스름한 물결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온 은하는 뒷동산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라진다. 이따금씩 하늘을 긋는 별똥별들의 눈부신 질주, 당신의 기쁨을 위해선 난 스러져도 좋아요,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남은 이들의 기쁨을 바라 찬란한 몸으로 단숨에 불꽃이 되는, 망설임 없는 별똥별들의 순연한 아름다움! 자리에 누워 별을 보다 한.. 2020. 11. 1. 썩은 세상 한희철의 얘기마을(130) 썩은 세상 “도둑놈을 잡아들일 놈들까지 썩었으니 퍽 썩었지? 다 썩었어.” 단강으로 들어오는 직행버스, 옆자리에 앉은 마을 노인이 장탄식을 한다. 높은 자리의 나리들은 부패로 썩고, 버려진 듯 살아가는 후미진 농부의 마음은 짓물러 썩고, 이래저래 썩은 세상, 다 썩은 세상.푸른 싹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 - (1992년) 2020. 10. 31. 끌개 한희철의 얘기마을(129) 끌개 벌써 며칠 째인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소를 끌고선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합니다. 소 등엔 멍에가 얹혔고, 멍에엔 커다란 돌멩이를 올린 나무 막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끌개’를 끌며 소가 일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등 뒤에 늘어진 끌개의 무게를 견디며 소는 묵묵히 걸어갑니다. 일소가 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게 많아 일철 앞두고 소가 일을 열심히 배우는 것입니다. 일소가 되기 위해 등 뒤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는 소, 며칠 동안 끌개를 끌며 일 배우는 소를 보는 마음이 숙연합니다. 내게 주어진 임의 밭을 갈기 위해 끌어야 할 끌개가 내게도 있습니다. 쉽지 않은 무게를 견디며 많은 시간 끌개를 끌어야 합니다. 이 밭에서 저 밭으로 소가 함.. 2020. 10. 30. 텅 빈 들판 한희철의 얘기마을(128) 텅 빈 들판 들판이 텅 비었다.볏가리와 짚가리 듬성듬성 선 들판모처럼 소들이 한가하다어미 소와 송아지가 진득이 편한 시간 보내기도 드문 일,커서 할 일 일러라도 주는 듯어미 소와 송아지가 종일 정겹다.송아지와 어미 소가 대신하는 이 땅의 평화. - (1992년) 2020. 10. 29. 변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7) 변소 언젠가 아내의 친구가 단강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와서 지내다 아내에게 화장실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더니 고개를 흔들며 “여기 아닌데” 하며 그냥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지만 허름한 공간 안 땅바닥에 돌멩이 두 개만 달랑 놓여 있었으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친구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네를 가도 익숙해졌지만 저도 단강에 처음 왔을 땐 변소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쪽 구석에 돌멩이 두 개만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다 틀리지 않게 일을 보긴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세식에 익숙해진 터에 돌멩이에 올라앉아 맨땅 위에 일을 본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편해.. 2020. 10. 28. 은희네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6) 은희네 소 은희네 소가 은희네로 온 지는 10년이 넘었습니다. 정확히 그 연수를 아는 이는 없지만 대강 짐작으로 헤아리는 연수가 십년을 넘습니다. 이젠 등도 굽고 걸음걸이도 느려져 늙은 티가 한눈에 납니다.은희네 소는 은희네 큰 재산입니다. 시골에서 소야 누구 네라도 큰 재산이지만 은희네는 더욱 그러합니다. 팔십 연줄에 들어선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고꾸라질 듯 허리가 땅에 닿을 할머니, 은희네 할머니가 온 집안 살림을 꾸려갑니다. 아직 젊은 나이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지만 그들조차도 이런 일 저런 일 크고 작은 일에까지 할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중3인 은희야 제 할 일 제가 한다 해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은옥이와 은진이 뒷바라지는 역시 할머니 몫입니다. 이런.. 2020. 10. 27. 들꽃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들꽃 단강에 와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들꽃의 아름다움입니다. 곳곳에 피어있는 이런저런 들꽃들. 전엔 그렇게 피어있는 들꽃이 당연한 거라 여겼을 뿐 별 생각 없었는데, 요즘 와 바라보는 들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쑥부쟁이, 달맞이꽃, 달개비, 미역취 등 가을 들꽃이 길가 풀섶에, 언덕에 피어 가을을 노래합니다.때를 따를 줄 아는 어김없는 모습들이 귀하고, 다른 이의 주목 없이도 자신의 모습 잃지 않는 꿋꿋함이 귀합니다. 제 선 자리 어디건 거기 넉넉히 뿌리를 내리고 꽃으로 피어나는 단순함이 또한 귀합니다. 꾸밈없는 수수함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요. 필시 우리도 들꽃 같아야 할 것, 지나친 욕심과 바람일랑 버리고 때 되면 제자리에서 피어나 들꽃처럼 세상을 수놓.. 2020. 10. 26. 이전 1 ··· 39 40 41 42 43 44 45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