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할머니의 바람 한희철 얘기마을(142) 할머니의 바람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얼었던 호박이 서너 번 녹은 꼴’이라고 빗대시는 김천복 할머니는 올해 일흔 일곱입니다. 참 고우신 얼굴에 이젠 정말 주름이 가득합니다. 장에 다녀오는 길, 양말 두 켤레 사가지고 사택에 들리신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그러십니다. “목사님, 딴데루 가면 안 돼. 내가 죽을 때 까정은, 목사님이 날 묻어줘야지.” 작고 주름진 할머니 손을 웃음으로 꼭 잡을 뿐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나도 할머니의 바람을 꼭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 (1992년) 2020. 11. 12. 우리를 필요로 하는 주님 한희철의 얘기마을(141) 우리를 필요로 하는 주님 매주 목요일마다 원주 자유시장 뒤편 ‘태자’라는 찻집에서 성서연구모임이 열립니다. ‘목요성서연구모임’입니다. 요즘은 마가복음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지난 주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말씀을 읽고, 지금 나를 제자로 택한다면 뭘 보고 무엇 때문에 택하실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땅한 대답도 쉽지 않았고, 또 그런 대답이 은근히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도 같아 망설이고 있는데 같이 참석했던 한 군인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아마 나를 운전수로 쓰실 것 같아요. 그 당시야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차가 필요하실 테니까요.” 그 군인은 운전병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난처했던 질문을 쉽게 해 주었고, 말씀 속에서.. 2020. 11. 11. 창(窓) 한희철의 얘기마을(140)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을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을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 (1994년) 2020. 11. 10. 강가에서 한희철의 얘기마을(139) 강가에서 점심상을 막 물렸을 때 어디서 꺼냈는지 소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아빠, 바다에 가자.” 하고 졸랐습니다. 무슨 얘긴가 싶어 사진을 봤더니 언젠가 강가에 나가 찍은 제 사진이었습니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소리는 아직 강과 바다를 구별 못합니다. 얼핏 내다본 창 밖 봄볕이 따사롭습니다. “좋아, 가자.” 신이 난 소리가 벌써 신발을 챙겨 신고 문을 나섭니다. 아내가 규민이를 안고 나섰습니다. 흐르는 냇물을 따라 강가로 갑니다. 냇물 소리에 어울린 참새, 까치의 지저귐이 유쾌하고, 새로 나타난 종다리, 할미새의 날갯짓이 경쾌합니다. 서울에서 있는 결혼식에 대부분의 마을 분들이 올라간 탓에 그 넓은 강가 밭이 모처럼 한적합니다. 파란 순이 돋아 나온 마늘밭이 당근 .. 2020. 11. 9. 우리 엄마 한희철의 얘기마을(138) 우리 엄마 종일이가 전화를 겁니다. 종일이는 이따금씩 교회의 공중전화를 찾아와 전화를 겁니다.아빠 돌아가시고선 시내로 나가 새 살림 차린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엄마 좀 바꿔 줘.” 자기 엄마를 새엄마로 갖게 된 꼭 자기만한 계집애였을까, 누군가 전화를 받았을 때 종일이는 대뜸 ‘우리’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가을의 찬비가 며칠째 내리는 쓸쓸한 저녁, 우연히 듣게 된 ‘우리 엄마’를 찾는 종일이의 전화에 확 두 눈이 뜨거워집니다. - (1992년) 2020. 11. 8. 엄마 젖 한희철의 얘기마을(137) 엄마 젖 “아무리 추운 날 낳았다 해두 송아질 방으로 들이면 안돼유. 그러문 죽어유. 동지슷달 추운 밤에 낳대두 그냥 놔둬야지 불쌍하다 해서 굼불 땐 방에 들이문 오히려 죽구 말아유.” 송아지를 낳은 지 며칠 후, 속회예배를 드리게 된 윗작실 이식근 성도님은 이렇게 날이 추워 송아지가 괜찮겠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송아지는 낳아 어미가 털을 핥아 말려 주문 금방 뛰어댕겨유. 낳자마자 엄마 젖을 먹는데, 그걸 초유라고 하지유. 그 초유를 먹으문 아무리 추운 날이래두 추운 걸 모른대유, 초유 속에 추위를 이기게 해주는 그 무엇이 들어있대유.” 아무리 날이 추워도 갓 태어난 송아지가 어미 젖을 빨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신기하고도 귀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모두가 .. 2020. 11. 7. 어떤 축구 선수 한희철의 얘기마을(136) 어떤 축구 선수 가끔씩 떠올리는 축구 선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중요한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영 자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실수로 경기를 놓칠 것 같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고민 하던 그가 그만의 방법을 생각해 냈고, 운동장에 들어간 그는 열심히,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란, 공 없는 데로만 뛰어다니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수를 미리 피하기 위해 그는 공 없는 곳으로만 열심히 뛰어다닌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냐며 웃지만, 사실 우리들의 삶이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실수가 두려워서 삶을 피해 다니는 안쓰러운 모습들. 실수를 두려워하여 삶을 외면하는 자는.. 2020. 11. 6. 밤은 모두를 재워 한희철의 얘기마을(135) 밤은 모두를 재워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말은 멍석 펼치듯 노을도 없는 어둠산 그림자 앞세우며 익숙하게 밀려왔다. 차라리 밤은 커다란 솜이불모두를 덮고 모두를 집으로 돌린다.몇 번 개들이 짖고 나면 그냥 어둠 뿐,빛도 소리도 잠이 든다. 하나 둘 별들이 하늘로 돋고대답하듯 번져가는 고만고만한 불빛들저마다의 창 저마다의 불빛 속엔저마다의 슬픔이 잠깐씩 빛나고그것도 잠깐 검은 바다 흐른다. 그렇다.밤은 모두를 재워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날마다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킨다.검은 바다를 홀로 지나 것들을. - (1992년) 2020. 11. 5. 먼 곳에서 벗이 찾으니 한희철의 얘기마을(134) 먼 곳에서 벗이 찾으니 막 수요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낯선 청년 세 명이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뒤편 한 구석에 배낭을 벗어 놓더니 나란히 뒷자리에 앉는다.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며, 설교를 하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짐작 가는 데가 없다. 누굴까, 누가 단강을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릴까, 궁금증이 들쑥날쑥 머릿속을 드나들었다. 설교를 마치고 성도의 교제시간, 소개를 부탁했다. 단강이 그리워서, 단강교회 교우들이 보고 싶어서 왔노라고 했다. 짧은 소개를 박수로 받았다. 예배를 마치고 모두들 난롯가에 둘러앉았다. 멀리 울산에서 올라왔다는 말보다는, 교우들을 소개 했을 때 익히 알던 분을 만난 듯 익숙한 이름을 되뇌는 청년들의 모습에 교우들이 .. 2020. 11. 4. 이전 1 ··· 38 39 40 41 42 43 44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