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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독주를 독주이게 하는 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80) 독주를 독주이게 하는 것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유튜브 영상을 통해 듣는다. 듣는다 생각했지만 실은 보고 듣는다. 연주와 함께 연주자와 지휘자 혹은 청중의 표정을 대하면, 소리만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느끼게 된다. 연주 현장에 있다는 느낌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흡을 같이 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고 마침내 지휘자 옆에 서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던 바이올린 솔리스트가 연주를 시작한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들을 때면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문득 눈보라가 치는 광활한 시베리아 대지 위에 서 있는 듯하다. 화가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다면 작곡가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한다.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2020. 5. 12.
말로 하지 않아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9) 말로 하지 않아도 비가 오는 토요일, 교우와 점심을 먹고 예배당으로 돌아올 때였다. 예배당 초입 담장을 따라 줄을 맞춰 걸어둔 화분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얀 비닐 우비를 입고 있어 누군지를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사무실 간사인 장 집사님이었다. 비를 맞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었더니, 화분 아래에 구멍을 뚫어주고 있다고 했다. 비가 오자 화분마다 물이 차는데, 그러면 꽃의 뿌리가 썩어 죽는다는 것이다. 화분에는 물구멍이 두 개가 나 있지만 화분의 흙이 구멍을 막아 물이 제대로 빠지지를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침 화분에는 구멍을 뚫을 자리가 몇 개 더 있다면서 일일이 송곳으로 화분 아래에 구멍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손이 많이 갈 텐데요.” 우비를.. 2020. 5. 11.
700일이 넘었어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8) 700일이 넘었어도 지난 6일은 친구가 이 땅을 떠난 날이었다. 그가 살던 미국의 시간으로 하면 5월 5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우리 곁을 떠났다. 어쩌면 아이처럼 살다가 아이처럼 떠난 것이었다. 하긴, 살아 있을 적에도 그는 훌쩍 어딘가로 떠나기를 좋아했고, 불쑥 예고도 없이 나타나기를 좋아했었다. ‘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쓰는 마음이 아프다. 1주기 때에는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올해는 그냥 지나기로 했다. 시간이 그만큼 더 흘러서는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이 멈춰선 이 때, 굳이 모이는 것을 친구도 난감해 할 것 같았다. 내 핸드폰에는 친구 집에서 찍은 옛 사진이 들어 있다. 그 사진을 꺼내본다. 1978년 서울 냉천동 .. 2020. 5. 10.
고마운 집, 고마운 사람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7) 고마운 집, 고마운 사람들 어버이날을 앞둔 월요일, 두 어머니를 모시고 인우재에 다녀왔다. 사돈끼리의 동행이지만 함께 한 오랜 세월, 두 분 모두 어색함이 없으시다. 인우재 마루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 어머니가 인우재와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독일에서 목회할 기간에 있었던 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특히 마음에 와 닿은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핸가 인우재 근처에서 산불이 났다. 한창 농사철이서 바쁘게 일하던 마을사람들이 불을 보고는 한달음에 인우재로 달려왔다. 산 바로 곁에 자리 잡은 인우재가 불에 타지 않도록 물을 길어다 뿌리는 등 정말로 많은 수고를 했다. 덕분에 주변의 산은 새까맣게 탔지만 인우재는 불길에서 자신을 지켰다. 그 일이 너무나 고마워.. 2020. 5. 9.
시절인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6) 시절인연 인우재에 있는 화장실은 자연에 가깝다. 통을 땅에 묻어 사용하는, 재래식이다. 통이 차면 차가 와서 통을 비워야 하는, 이른바 푸세식이다. 화장실은 통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벽은 더욱 그렇다. 목제를 켜고 남은 죽대기로 벽을 둘렀다. 숭숭 바람이 통하고 햇빛도 통한다. 아랫집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화장실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렸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인우재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죽대기 사이로 바깥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 바로 옆에는 여물통이 있다. 쇠죽을 담아두던 낡은 통을 그곳에 두고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담아두었다. 동네 집을 헐며 나온 기와, 인우재를 오르내리며 만난 사기그릇 조각들, 버리기에는 아깝.. 2020. 5. 8.
참았던 숨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6) 참았던 숨 꽃을 보는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러다가 미안했다. 잔뜩 쌓인 마른 가지들 틈을 헤치고 붉은 철쭉이 피어 있었다. 지난해 나무를 정리하며 베어낸 가지들을 한쪽에 쌓아둔 것이었는데, 그 자리에 철쭉이 있는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켜켜 쌓인 마른가지들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철쭉은 해맑게 피어 환히 웃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마른 가지들을 옮기고 주변에 피어난 풀들을 뽑아주자 온전한 철쭉이 드러났다. 철쭉이 마침내 후, 하며 그동안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그런 철쭉을 보며 생각한다. 거둬내야 할 마음속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내 걷는 길이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비로소 숨을 쉬는 저 철쭉을 만.. 2020. 5. 7.
소리까지 찍는 사진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5) 소리까지 찍는 사진기 인우재에서 하루를 보낸 후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실을 찾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밤기도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더니 공기는 상쾌하고 달은 밝다. 사방 개구리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가 합창의 베이스라면 당연 솔리스트는 소쩍새다. 청아하고 맑다. 마당에 서서 밤의 정경에 취한다. 이 순간을 남길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기도실 창문과 달은 찍었는데, 개구리 울음소리와 소쩍새 노랫소리는 담을 길이 없다. 소리까지 찍는 사진기는 없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지난다. 2020. 5. 6.
공공장소 흡연 범칙금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4) 공공장소 흡연 범칙금 이야기는 마음속에 시간 속에 묻혀 있던 많은 기억들을 불러낸다. 운전 중 교통경찰에게 걸리면 면허증 뒤에 오천 원을 함께 건네던, 그러면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였다.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자 별별 경험담들이 이어졌다. 같은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어 나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단강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원주에서 단강으로 들어오는 길 중의 하나는 양안치 고개를 넘는 것이었다. 지금은 터널이 뚫리고 길이 시원하게 뻗었지만, 당시만 해도 구불구불 뱀 지나간 자리 같았다. 막 고개를 넘어서서 내리막길을 탔을 때 내 차를 가로막은 것이 느릿느.. 2020. 5. 5.
어려운 숙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3) 어려운 숙제 동그랗게 몽우리 진 작약 꽃봉오리에 붉은 빛이 감돈다. 사방의 나뭇잎과 풀이 그러하듯 작약의 이파리도 초록색, 줄기도 초록색, 꽃받침조각도 초록색인데, 벙긋 부푼 꽃봉오리에 비치는 것은 붉은빛이다. 작약은 온통 초록의 바다 어디에서 저 빛깔을 만나 불러낸 것일까. 어디에서 저 빛깔을 찾아 꽁꽁 제 안에 품고 있는 것일까. 작약은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어려운 숙제를 준다. 세상 누구도 모를 뜨거운 마음일랑 어디에서 찾아 어떻게 품는 것인지를 물으니 말이다. 2020.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