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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503

순한 풀벌레 소리 신동숙의 글밭(216) 순한 풀벌레 소리 새벽녘 풀벌레 소리가 귀를 순하게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 들려오는 첫소리가 풀벌레 소리라는 사실에 문득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복을 누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는 잠자던 영혼을 깨우고 길 잃은 영혼을 부르는 태초의 종소리 같습니다. 자연의 초대는 언제나 내면의 산책길로 향해 있습니다. 잠시 앉아 있으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따스하게 차오르는 감사와 고요의 샘물이 출렁입니다. 가슴에 흐르는 지금 이 순간의 출렁임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픈 일어남이 아닌,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이미 충만해서 더 오래 머물고픈 고요함입니다. 제겐 이런 고요의 샘물과 침묵의 열매를 나누고픈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잘 익은 무화과.. 2020. 8. 20.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 신동숙의 글밭(215)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다그 사람을 마음으로 떠올리면 그 사람은 사라지고빈탕한 허공만 보인다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에서 그는 하늘을 꿰뚫어 보고 부처의 중도(中道)에서그는 하늘을 똑바로 보고 기독교의 성경에서그는 하늘을 알아보고 젊은 노비 청년에게서그는 하늘을 살피어 보고 그 어른은 치매가 와도하늘을 우러러보며 "아바지"만 부르더라 숨을 거두던 마지막 순간에도하얀 수염 난 입에선 "아바지"로이 땅에 씨알 같은 마침표를 찍고 탐진치의 거짓 자아인 제나를 비움으로투명해진 참자아인 얼나를 통하여 보이는 건 맑은 하늘 뿐 그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하늘이기에그가 거하는 곳은 이 땅을 채우는 없는 듯 계시는 하늘이기에 그의 움직임은 춤사위가 되고제소리는 하늘.. 2020. 8. 19.
신동숙의 글밭(213) 결 광목으로 만든 천가방, 일명 에코백 안에는 푸른 사과 한 알, 책 한 권,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 잉크펜 한 자루, 주황색연필 한 자루, 쪼개진 지우개 한 조각이 든 검정색 작은 가죽 필통과 칡차를 우린 물병 하나가 있습니다. 쉼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살짝 조여진 마음의 결을 고르는 일이란, 자연의 리듬을 따라서 자연을 닮은 본래의 마음으로 거슬러 조율을 하기 위하여, 여러 날 고대하던 숲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숨을 봅니다. 호흡은 평소보다 조금은 느리고 긴 호흡입니다. 호흡이 느리면 자연히 발걸음도 느릿느릿 열심을 내지도 않고 목적도 없는 그야말로 느슨한 걸음입니다. 그 느슨함이 여유와 비움으로 이어지면서 숲의 들숨은 저절로 깊어집니다. 가다가 서고 머뭇머뭇.. 2020. 8. 17.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신동숙의 글밭(212)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외국에 있는 벗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는 일에는 이왕이면 한국산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먼 타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고국에서 온 것이라면 더 소중하고, 때론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선물 하나가 마중물이 되어서, 마치 고향의 산과 들을 본 듯 그만큼 반가울 수도 있는 일이다.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달과 별처럼 작고 단순한 물건이 그리운 제 나라의 얼굴이 되고 체온이 될 수도 있기에,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찾기로 했다. 북쪽 나라에 부치던 윤동주의 귀여운 조개껍질처럼,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에서 물소리 바닷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이다. 한동안 찾았으나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고르는 일이 순조롭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 2020. 8. 15.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신동숙의 글밭(211)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장마와 폭우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삼복 더위의 징검돌로 이어지던 8월의 한 여름 빛깔이 흐지부지해지고 있다. 이미 입추(入秋)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귀를 쨍쨍 울리던 한낮의 매미 소리가 여름 하늘을 쨍 울리지도 못하고 벌써 순하기만 하다. 저 혼자서 무더운 여름 한낮에 독창을 하던 매미 소리였지만, 가슴을 뚫고 들어오던 소리와는 달리 한결 순해지고 초가을의 풀벌레 소리와 섞이어 합창이 되었다. 여름과 가을이 나란히 부르는 8월의 노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들려오는 소리도 바람의 냄새도 다른 초가을 같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삶의 모든 터전을 쓸고 간 물난리에 망연자실해 있을 이웃들의 마음이 멀리서도 무겁게 전해진다. 잠깐 쨍하고 나타난 여름.. 2020. 8. 14.
찻물의 양 신동숙의 글밭(210) 찻물의 양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분명 언제부턴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터입니다. 어쩌면 선조들의 무의식에 각인이 되어 있어서 입에 쓰지 않으면 몸에 유익함이 부족할 것이라는 믿음까지 일으키게 하는 선입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차를 자주 마시다 보니 가끔 저에게 찻물의 양을 물어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계량된 물의 양대로 맞추어야 하는지, 말하자면 이왕에 우려서 마시는 차 한 잔에서 최상의 효과까지 기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 드립니다. 목 넘김이 편안한 정도로 물의 양을 조절하시고, 우려내는 시간도 조정하시면 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계량은 참고만 하시고, 찻물의 기준은 내 몸이 되어야 .. 2020. 8. 13.
차 한 잔 신동숙의 글밭(209) 차 한 잔 빈 가슴으로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날 문득차 한 잔 나누고 싶어이런 당신을 만난다면 푸른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 품고서 때론 세상을 가득 끌어 안은 비구름처럼 눈길이 맑고 그윽한 당신을 만난다면차 한 잔 나누고 싶어 어둔 가슴에 작은 별빛 하나 품고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희미한 너를 빛나게 하는목소리가 맑고 다정한 당신을 만난다면차 한 잔 나누고 싶어 이런 당신을 만난다면하얀 박꽃이 피는 까만 밤 서로가 아무런 말없이 찻잔 속에 앉은 달빛을 본 순간 문득 고개 들어저 하늘에 뜬 달을 우리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나 이런 당신이지금 내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노랫말처럼 어느새 고요해진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 때론 별빛 하나 .. 2020. 8. 12.
사랑이 익기도 전에 신동숙의 글밭(209) 사랑이 익기도 전에 신의 첫사랑으로똘똘 뭉친 씨앗 한 알 그 씨앗 속 천지창조 이전의 암흑과 공허를 두드리는 빗소리 밤새 내린 빗물에 움푹 패인 가슴고인 눈물에 퉁퉁 불기도 전에 기도와 사색의 뿌리를 진리의 땅 속으로 깊이 내리기도 전에 푸릇한 새순이 고개 들어하늘을 우러르기도 전에 진실의 꽃대를 홀로 걸어가는 고독과 침묵의 좁은 길을 걸어 줄기 끝까지 닿기도 전에 노을빛의 그리움으로 무르익기도 전에 살갗을 태우는 여름의 뜨거움을가을날 황홀한 노을빛의 이별을가난한 마음을 노래하는 겨울을충분히 계절 속에 잠기기도 전에 사랑이 익기도 전에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씨앗들 2020. 8. 11.
"일단 사람이 살아야합니다" 신동숙의 글밭(208) "일단 사람이 살아야합니다" 제주, 부산, 광주, 대전, 천안, 인천, 서울, 철원, 영동, 하동, 구례 등 전국적으로 잇달아 올라오는 비 피해 소식에 무거운 마음으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단에 있는 하동의 화개 장터와 구례의 섬진강이 범람한 모습에 말문이 막힙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다급한 목소리가 담긴 김순호 구례 군수님의 글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이렇게 지면에서라도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지만, 수해민들에게는 무슨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 "어떤 재산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재산피해가 있어도 인명피해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야말로 초토화입니다. 처참합니다. 구례읍 봉서·봉동·계산·논곡·신월·원방, 문척면 월전·중마, 간전면 간.. 2020.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