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8)

신탁통치 안, 해방정국의 블랙홀

 

1945년 12월 말 미ㆍ영ㆍ소 3국의 대표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의 신탁통치 안을 결정했다. 한반도의 신탁통치 방침은 2차 대전 중 미국에 의해 구상되고 카이로, 테헤란, 얄타회담 등에서 제안된 바 있었다.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고 한반도는 미ㆍ소 양군이 분할점령하게 되자 관련국들은 한반도 문제 처리를 위해 모스크바 3상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한국인의 참여가 극히 제한된 ‘통일 시정기구’를 설치하여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 위원회에서 권한을 수행할 것”과 “탁치 기간은 5년을 넘지 않을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은 “한국의 독립을 부여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과 그 전제로서 미ㆍ소 공동위원회 설치” 등 4개항의 수정안을 냈다. 회의는 소련의 수정안을 약간 손질하여 최종결정으로 채택했다.

신탁통치 안을 요약하면 ①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②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ㆍ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③ 미ㆍ영ㆍ소ㆍ중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반도 5년 신탁통치 안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면서 남한의 정국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신탁통치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이란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외신 보도의 형식이었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 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 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서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면서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큰 제목을 달아 보도하였다.

이 보도를 근거로 이승만과 한민당,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반탁운동에 동조하였다. 즉각적인 자주독립만을 기대했던 독립운동가와 국민에게 신탁통치란 상상할 수 없는 날벼락이었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여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공산당과 조선인민당도 반탁대열에 섰다. 좌익세력의 경우 1946년 1월 2일부터 공식적으로 찬탁의 입장을 취할 때까지 개별적으로는 반탁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모스크바 3상 회담이 진행 중인 시점에서 반탁운동에 불을 지른 이 기사는 3상 회담의 내용을 신탁통치만으로 국한시키면서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전한 잘못된 기사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12월 25일자 미국발 기사라면서 정확한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 기사가 나가게 된 배경을 놓고 당시 국내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 당국의 단순 실수설, 반소ㆍ반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국내외의 모종의 음모설 등이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동아일보>의 이 기사와 관련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조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기사를 조작한 자는 누구였나? “워싱턴 25일 발 합동”이라는 걸 보면 합동통신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봐야 할 텐데 워싱턴의 어느 매체에 누가 쓴 글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민당 대표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조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가 주범이란 것은 증거가 분명한 사실인데, 범죄의 성격으로 보아 단독범행은 아니다. 공범 내지 공모자를 밝히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용욱은 <태평양 성조기>지 12월 27일자에 같은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맥아더 사령부 개입의 개연성을 밝혔고, 이 허위기사의 유포가 방치된 사실로 보아 군정청의 작용을 시사했다. 완벽한 실증적 증거는 아니라도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개연성을 보인다(김기협,《해방일기》2).

그러니까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 세력이 협력하여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임시정부는 12월 28일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김구와 김규식의 명의로 “4개국 원수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각계 대표 70여 명으로 탁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강력한 반대 투쟁을 결의하고 김구ㆍ김규식ㆍ조소앙ㆍ김원봉ㆍ유림ㆍ신익희ㆍ김붕준ㆍ엄항섭ㆍ최동오 등 9인을 탁치반대총동원위원회 ‘장정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날 채택한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성명서

“우리는 피로서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 5천 년의 주권과 3천 만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 자기의 정치 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치 세력을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의 일치로서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1개 신문의 잘못된 신탁통치 보도는 해방 정국의 황금과도 같은 시간을 이 문제로 온통 블랙홀로 만들었다. 모든 이슈가 이곳으로 빨려들어 갔다. 해방정국의 최대 이슈는 통일정부 수립과 미ㆍ소 양군의 철수 그리고 친일 민족반역자 처벌이었다. 하지만 탁치 문제는 이 같은 민족사 절체절명의 과제를 뒤로 한 채 찬반 투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찬반 운동이 어느새 이념대결로 대치되었다. 이 같은 공작을 꾸민 세력은 쾌재를 불렀을 터였다.

사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에는 활용하기에 따라 우리에게 유리한 조항도 없지 않았다. 민족지도자들이 좀더 진지하게 이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결집된 역량으로 대치했으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민족 진영은 반탁운동에 참여하면서 미ㆍ소 열강의 대립과 이에 추종하는 사대주의 세력준동을 지켜보면서 한없는 무력감에 빠졌다. 그리고 즉각적인 자주독립정부 수립 운동에 나섰으나 세가 불리하여 역부족이었다.

한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분단과 함께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봄이 왔으나 봄은 아니었다(春來不似春).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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