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5)

 

박근혜의 콧바람, 왕의 콧김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 곧 “왕”을 달리 “우리의 콧김”(개역개정), “우리의 숨결”(공동번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루아흐 압페누”를 번역한 것이나 아무래도 석연하지 않다. 즉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와 우리말 번역으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의 반응이 일치하지 않을 것 같다.

 

“콧김”이라고 하면 그것은 콧구멍에서 나오는 더운 김을 뜻한다. “콧김을 쐬다”라는 말은 어떤 물체를 코 가까이 가져다 대고 거기에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콧김이 세다”라는 말은 관계가 가까워서 영향력이 세다는 말이다. “죽은 놈의 콧김만도 못하다”라고 하면 난로나 화로에 불기운이 없어져서 따뜻한 기운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라고 하면 이것은 숨 쉬는 속도, 숨 쉴 때의 그 높낮이를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 거칠다”라는 것은 순 쉬는 소리가 고르지 않고 거센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 자체에서도 하나님의 “콧김”이라는 표현은 강한 바람을 묘사할 때 쓰인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애굽기 15:8), 때로는 “꾸지람”과 평행을 이루는 “분노”를 뜻하는 표현과도 관련되어 쓰인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밑이 드러나고”(시편 18:15). 달리 코로 숨을 쉬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기도 한다(이사야 2:22).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공동번역>이 “우리의 숨결”이라고 한 것은 <개역개정>이 “우리의 콧김”이라고 한 것보다는 낫지만, 이 문맥에서 그 표현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둘 다 충분하지 않다. “콧김”이나 “숨결”보다는 “생명(력)”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 전달이 더 정확하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의 “콧김”이나 “숨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7)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생명(력)”이다. 욥기에서 욥이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기 27:3)고 말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기운”이 바로 “하나님의 루아흐”이다. 그 “루아흐”가 그의 “코”에 있다는 것은 바로 “생명”이 아직 그에게 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엔 콧바람도 있다. 루아흐가 바람, 숨결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 콧김은 콧바람이 되기도 한다. “콧바람 좀 쐬려고”, 또는 “콧바람 싱싱” 하는 표현들은 모두 신선한 바람을 호흡하면서 육신과 영혼의 호흡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이니 성서의 쓰임과 사뭇 유사한 느낌마저 준다.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 질문을 던져보자. 콧대가 높으면 거기서 나오는 콧김, 숨결, 콧바람은 셀까?, 아닐까? “흥”하고 코웃음 치며 내는 콧김도 있다. 콧대가 높은 사람이 그러면 주변이 사뭇 싸아~ 하고 긴장될 것이다. 제 콧대가 높다고 내는 콧김, 콧바람도 셀 줄로 아는 착각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김, 숨결, 바람에는 무엇이 담겨 있지 못할까? 단언컨데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 없다. 더군다나 권력자가 그런 콧김, 콧바람을 내면 저주나 죽음이나 비난의 기운만 그득하다. 이를테면 메르스보다 더 한 세균덩어리를 공기에 퍼뜨리는 행위가 된다.

 

 

대통령 박근혜가 코에 잔뜩 힘을 주고 콧바람을 장풍처럼 낸 모양이다. 현재 탄핵으로 직무정지 상태에서 '출입기자단 신년 인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공개적으로 일방적인 언론플레이를 해, 화를 돋궈 그런 모양인데, 자기 변명의 바람은 센지 모르나 거기에는 역시 생명력이 없다. 이제 정치적 수명도 덩달아 줄어드는 건 아닐까? 이왕 내려면, 제대로 내시지. 하나님의 루아흐가 없는 왕의 콧김, 콧바람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부매랑이 되는 비운의 숨소리라는 것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일깨운 진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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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안의 혐오(嫌惡) 본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성경에 혐오 본문이 있는가?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조장(助長)하는 본문이 있는가? 있다. “진멸(殄滅, 헤렘)” 본문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시혼을 칠 때를 모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나 주 우리 하나님이 그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우리는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온 군대를 쳐부술 수가 있었다. 그 때에 우리는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다(신명기 2:33-34).

 

이스라엘이 바산 왕 옥을 칠 때를 두고도 모세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우리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한 것처럼 그들을 전멸시키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전멸시켰다(신명기 3:6).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칠 때 일을 전하는 여호수아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치고, 소나 양이나 나귀까지도 모조리 칼로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여호수아 6:21).

 

이스라엘이 가나안 북방을 칠 때도 여호수아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성들에서 탈취한 노략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차지하였고, 사람들만 칼로 쳐서 모두 죽이고, 숨쉬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여호수아 11:14).

 

이런 기록을 다 열거하자면 너무 길다. 구약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신명기,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상,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지상, 에스더기 등에서 이스라엘이 자행(恣行)한 진멸(殄滅 annihilation/ extermination)의 역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 나는 캠퍼스 안에서 아랍 친구들에게 아랍민족이 왜 이스라엘을 그렇게 혐오하고 증오하느냐고, 어리석게 물었을 때, 한 아랍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먼저 이스라엘을 증오한 것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오면서 가나안 원주민을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어린애까지 다 학살한 역사 기록은 우리 아랍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다 학살했다. 그것이 그들의 경전 히브리어 성경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네가 배우러 왔다는 그 구약에서 너도 얼마든지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신도에 따라서는, 생명을 진멸하라고 하는 그 본문마저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이성적 판단은 보류한 채,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그런 본문들을 그대로 긍정하고, 실천하는, 혹은 실천을 계획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마저 구약의 진멸(殄滅, 헤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단학살과 인종청소 같은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탈출 이후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은 유대교의 원죄다. 11-13세기 십자군의 이슬람 학살은 기독교의 원죄다. 21세기 IS의 만행에서 이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세 종교에서 유래한 혐오와 폭력은 세 종교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바울은 로마서(1:29-30)에서 인간이 지닌 스무 가지 악을 나열한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증오, 능욕, 교만, 자만, 제악도모(諸惡圖謀),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 떠난 상태에 그대로 버려두실 때 이런 악덕이 노출된다고 바울은 본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그의 저서 <악의 꽃> 서문 “나의 독자에게”에서 너나없이 인간이란 우둔, 과오, 죄악, 탐욕, 강간, 독약, 비수, 방화 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해성사를 마치고 아직 눈물도 마르기 전에 다시 진창길로 뛰어든다고, 인간의 두개골 속에는 수백만 마리의 악마의 무리가 회충처럼 빽빽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인간의 내면은 승냥이, 표범, 사냥개, 원승이, 전갈, 독수리, 뱀 등 가증스런 짐승이 우글거리는 밀림이라고, 자기 글을 읽을 독자들마저 “위선자들”이라고, 인간의 선한 의지는 사탄의 대결에서는 늘 진다고 절규한다.

 

예수가 밟은 땅이 바로 이런 사람들과 이런 종교들이 가득 찬 곳이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사탄이 지배하는 악마의 왕국일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하면서, 사람이 역사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예수는, 사탄의 승리가 기록되는 것 같은 역사에서 사탄의 패배를 실증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함을 보여주는, 약속의 징표(徵標)다. 예수 승천 후 지난 두 천 년기는, 사람과 함께 있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사람의 영성교육을 담당하는 보혜사 성령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신뢰를 쌓도록 깨우쳐 온 역사다.

 

 

 

혐오본문은 자기책임 하에서 읽고 결단할 일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 안에 있는 혐오 본문에 관해서는, 먼저 독자들이 자신에게 묻고, 자기책임하(自己責任下)에 결단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 인간에게 주신 지혜와, 예수의 부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책임 있게 읽고, 깨닫고, 결단할 일이다.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율법 조문을 찾으려 하지 말 일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성경 독자들은 각자 알아서 순종해야 할 말과 순종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고 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그런 것을 가려낼 지혜를 주신다(욥기 28:27-28). 사람이 환영하기만 하면 사람과 동거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길을 인도하신다(이사야 8:8).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이 친히 사람 되어 오셔서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가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약속해 주셨다(요한복음 14:16).

 

혐오 본문을 어떻게 읽을까? 예를 들어 본다. 출애굽기의 계약법은 “무당(sorcerer)을 살려두지 말라”고 한다(출애굽기 22:18). 신명기법은 “복술자(卜術者”(diviner), “길흉(吉凶)을 말하는 자”(soothsayer), “요술(妖術)하는 자”(enchanter), “진언자(眞言者)”(sorcerer), “신접자(神接者)”(spell-caster), “박수”(consulter of ghosts or spirits), “초혼자(招魂者 necromancer)” 등을 다 “무당”의 동류로 보고, 사회에서 제거할 것을 명한다(신명기 18:10-11). 그러나 이런 명령이 비록 기독교 경전에 적혀 있다 하더라도, 지금 기독교인 중 누가 기독교 이름으로, 혹은 성경말씀이라고 하여, 무당이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살해하는가? 과연 누가 이러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살생부를 작성하고 살생 계획을 작성하는가?(각주1)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는 견지에 서 있는 이들마저도, 기독교의 유일성은 주장할지언정, 타종교 박멸을 위한 선전포고는 하지는 않는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출애굽기 안의 계약법은 여호와숭배 이외의 다른 종교는 다 말살하라고 한다(출애굽기 20:22). 오늘날 누가 기독교 외에 타종교를 말살하려 하는가? 기독교인 중에는 한국에서 이슬람 포교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불교를 우리나라에서 박멸해야 한다는 기독교는 아직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 기독교인의 양식(良識)은 그런 무모한 짓을 허용하지 않는다.(각주2) 훼불사건이 있긴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한국교회 쪽에서는 잘못을 사과해 온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안에서는 종교들끼리는 전쟁을 하거나 순교역사를 기록할 것 같지는 않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성경 독자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성경을 읽으면서, 거의 자동적이라고 할 만큼, 이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와 거부해야 할 메시지를 이미 구분하여 선택을 하고 있다.

 

이슬람경전 코란 안에도 혐오 본문은 있다. 그러나 IS의 폭력이 마치 그 본문에 따른 실천이라고 본다면 단견이다. 테러리스트의 폭력이 그 본문에 대한 순종이라고 판단하거나, 그 폭력이 그들의 신앙적 결단이라고 보는 것은 그들과 관련된 종교에 대한 비난일 뿐이다. 혐오 본문을 거부하는 반 혐오 본문에는 불복하고 혐오 본문에만 순종하는 테러리즘을 이슬람의 신앙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그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합법화하거나, 폭력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으로서,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역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주1) 딴 길로 잠시 벗어나 쉬어가면, 우리의 주제와는 무관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마술(魔術)이나 요술(妖術)은 이미 종교의 영역을 떠나 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도 오늘날 요술(妖術)쟁이나 마술사를 위험한 종교나 미신과 관련시켜 문제 삼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회에 같ㅇ 생각해 볼만한 것이 있다. 김영훈의 생각줍기 (Cartoon Allegory) NO/473 “속이는 것은 같지만,/ ‘마술’은/ 미소 짓게 하고/ ‘사기’는/ 피눈물 흘리게 한다....// 마술은 믿지 않고, 사기는 굳게 믿기에 얻는 효과다...” (<한겨레신문> 2016년 6월 6일자 26면)

 

주2) 하나님의 과격성(過激性)과 사람의 양식(良識)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마당을 달리하여 더 논의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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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3)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골라 주신 곳(신명기 12:5, 11, 21; 14:23, 24; 16:2, 6,11; 26:2 등등)이란 표현이 구약에 여러 본 나온다. 너무 많이 나오는 말(특히 신명기에)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주의 깊은 신자들은 이 말의 뜻을 물어온다. “아무개가 어느 장소에 자기의 이름을 두다”라는 표현이 우리말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나다’라고 하면 그것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름을 날리다’라고 하면 명성을 얻을 것을 일컬음이다. ‘이름을 남기다’라는 것은 이름이 후세까지 전해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름이 붙다’라고 하면 그것은 예를 들어, 합격자 명단에 들어 간 것, 혹은 대자보에 이름이 나 붙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이름을 짓다’라는 것은 이름을 붙이거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을 팔다’라는 것은 이름이나 명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에 ‘이름을 두다’라는 말은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은 있다. 그래서인지 명산 고적을 찾다보면 그 곳을 방문했던 이들이 커다란 바위 위에 자기들의 이름을 어지럽게 남긴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어떤 곳에 ‘두신다’라는 것은 ‘어떤 곳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두거나 이름을 써 두는 것’과는 다르다.

 

‘이름을 두다’라는 히브리어 ‘르샤켄 슈모 삼’을 글자그대로 옮기면 ‘이름을 거기에 살게 하다’이다. 표현을 달리하여 ‘라숨 엣슈모 샴 르쉬크노’라고 하면 그것은 ‘그 이름이 거기에 살도록 그의 이름을 그 곳에 두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장소를 택하시고 거기에 그의 이름을 거주하게 하신다는 생각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이름’은 거의 같은 기능을 가지고 쓰이는 예가 많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은 곧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의 현존 그 자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곧 당신의 이름이 거기서 거주하도록 택하신 곳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몸소 거기 살고 계시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을 뜻한다. 우리 쪽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계시는 ‘예배처소’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란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택하신 곳’, ‘하나님을 섬기라고 택하신 곳’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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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1)

 

새벽(의) 날개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개역개정),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공동번역), 여기 시편 139편 9절에 나오는 “새벽의 날개”란 무엇인가? 이것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칸페이 샤하르”의 직역이다. 찬송가 뒤 교독문에 인용되어 있는 본문이므로 예배 때 자주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독자들의 경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것이 아마도 “새벽의 날개”라는 표현일 것이다. 날이 밝을 녘을 일컫는 신간의 한 대목에 새나 곤충이 날 때에는 펴는 신체의 한 부분을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말 독자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시편 139편 8-10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현존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을 공간적 차원을 빌어 묘사할 것이다. 제일 높은 곳 하늘 끝으로 피해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며, 제일 낮은 곳 저 땅 밑 스올로 내려가도 거기 계시고, 새벽이 열리고 동이 트는 동쪽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해가 지는 서쪽 바다 끝으로 피해 가도 거기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 “하늘 꼭대기와 땅 밑, 새벽이 밝아 오는 쪽과 해지는 먼 바다”의 네 요소는 있으나, 진술이 그렇게 명확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새벽의 “날개”라는 표현은 어쩌면 사람(시인) 이 비록 새벽이 달리는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해도 하나님께 잡히고 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문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문 비평가들이 몇 가지 해결을 시도해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미첼 다후드)를 소개한다. 고대역들, 예를 들면 70인역이나 시리아어역을 따라 “~의 날개”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 “칸페이”를 자음 본문을 바꾸지 않고 “크나파이”로 읽어 “나의 날개”라고 해석하고, “새벽”(샤하르) 은 동녘이 밝아오는 장소를 가리키는 문법적 요소로 보아 “새벽이 밝아오는 쪽 곧 동쪽에서”라고 읽으면서 곧바로 이어 나오는 “(서쪽) 바다 끝”과 대조시키는 것이다.

 

즉 “비록 내가 동쪽에서 날개를 치며 날아가 서쪽 바다 끝에 가서 자리를 잡아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바다”는 히브리어에서 서쪽을 가리킨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의 서쪽이 지중해 바다인 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케드마) 서(얌마 : 바다 쪽) 남(네그마) 북(차폰)을 둘러보아라”라고 했을 때 서쪽은 “바다 쪽”이다. ‘개역개정’ 출애굽기 10장 19절의 “서풍”(공동번역은 “해풍”) 역시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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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1)

 

새벽(의) 날개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개역개정),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공동번역), 여기 시편 139편 9절에 나오는 “새벽의 날개”란 무엇인가? 이것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칸페이 샤하르”의 직역이다. 찬송가 뒤 교독문에 인용되어 있는 본문이므로 예배 때 자주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독자들의 경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것이 아마도 “새벽의 날개”라는 표현일 것이다. 날이 밝을 녘을 일컫는 신간의 한 대목에 새나 곤충이 날 때에는 펴는 신체의 한 부분을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말 독자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시편 139편 8-10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현존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을 공간적 차원을 빌어 묘사할 것이다. 제일 높은 곳 하늘 끝으로 피해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며, 제일 낮은 곳 저 땅 밑 스올로 내려가도 거기 계시고, 새벽이 열리고 동이 트는 동쪽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해가 지는 서쪽 바다 끝으로 피해 가도 거기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 “하늘 꼭대기와 땅 밑, 새벽이 밝아 오는 쪽과 해지는 먼 바다”의 네 요소는 있으나, 진술이 그렇게 명확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새벽의 “날개”라는 표현은 어쩌면 사람(시인) 이 비록 새벽이 달리는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해도 하나님께 잡히고 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문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문 비평가들이 몇 가지 해결을 시도해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미첼 다후드)를 소개한다. 고대역들, 예를 들면 70인역이나 시리아어역을 따라 “~의 날개”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 “칸페이”를 자음 본문을 바꾸지 않고 “크나파이”로 읽어 “나의 날개”라고 해석하고, “새벽”(샤하르) 은 동녘이 밝아오는 장소를 가리키는 문법적 요소로 보아 “새벽이 밝아오는 쪽 곧 동쪽에서”라고 읽으면서 곧바로 이어 나오는 “(서쪽) 바다 끝”과 대조시키는 것이다.

 

즉 “비록 내가 동쪽에서 날개를 치며 날아가 서쪽 바다 끝에 가서 자리를 잡아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바다”는 히브리어에서 서쪽을 가리킨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의 서쪽이 지중해 바다인 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케드마) 서(얌마 : 바다 쪽) 남(네그마) 북(차폰)을 둘러보아라”라고 했을 때 서쪽은 “바다 쪽”이다. ‘개역개정’ 출애굽기 10장 19절의 “서풍”(공동번역은 “해풍”) 역시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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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0)

 

해킹, 도청하며 “벽에 소변 보는 자”

 

 

좀 지저분한 말이 되어 주저스럽지만, 서서 오줌 누는 이들 때문에 벽들이 애꿎은 수난을 당한다. 벽에다 대고 함부로 소변을 보는 것은 남자하고 개뿐이다. 아직도 서울의 으슥한 골목길 벽은 남자들의 공중 화장실이 되기 십상이다.

 

소변금지를 알리는 구호도 갖가지다. 어떤 곳에는 가위를 그려놓고 위협을 주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개 이외는 여기에 소변을 보지 마시오”라고 써서 주정뱅이 오줌싸개들을 개로 깎아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노상방뇨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또 이런 것은 동서와 고금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히브리어에서 사내를 경멸하여 일컬을 때 “벽에다 대고 오줌 누는 놈”이라고 한다. 즉 “서서 오줌 누는 놈”이란 말이다. ‘남자’나 ‘사내’라고 써도 될 곳에 이런 고약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 경우는 대개 그 사내들을 저주하는 경우이다. 씨를 말려 버린다거나 멸족시켜 버릴 사내들을 경멸조로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 구약성서에 모두 여섯 번 나온다(삼상 25:22, 34; 왕상 14:10; 16:11; 21:21; 왕하 9:8),

 

“벽에다 오줌 누는 놈”이란 표현은 실제로 벽을 향해 소변을 보았거나 보고 있는 남자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오줌 누는 자” 곧 ‘남자’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말 성서에 이 표현은 ‘남자’(개역, 개역개정), 혹은 ‘사내 녀석’(공동번역)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 의미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개역성경의 ‘남자’는 너무 완곡하여 경멸하려는 본래의 뜻을 못 살렸다. 공동번역의 ‘사내 녀석’은 그 뜻을 좀 살려 보려 했지만 히브리어 표현 뒤에 있는 해학적인 맛을 전달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렇다고 직역을 해 놓으면 이것이 정말로 벽에다 대고 소변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 버려 남자 일반을 일컫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 할 바는 남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못한다는 반어법도 있다는 점이다.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놈이 되면, 이건 노골적인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의 표현을 따지고 보면, 남자를 나타날 때 다른 성품이나 특징이 아니라 성기를 손으로 잡고 소변을 보는 자라는 점에 주목해서 그때나마 겨우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 뭐 이런 식의 경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리 치나 저리 메치나 이 표현은 상대에 대한 능멸이 담긴 것임은 틀림없다.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 좀체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는 녀석, 손해 볼 줄 알면서 기어코 직언을 하는 자, 이런 식의 사내대장부는 아닌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서에서 이 오줌 싸는 장면을 불알 두 쪽 운운하면 아마 난리가 나도 엄청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이렇게 불알 두 쪽밖에 사내임을 입증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명색이 사내라면, 남의 안방 문을 벌컥 하고 열고 들여다보는 법이 아니고, 이거 메르스 정보에요, 하면서 거기다가 이상한 장치 달아서 스마트폰을 몽땅 제 것으로 삼고 때로는 공격하지는 않는다. 도대체가 정정당당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들은 말로는 노상방뇨하면 안 되, 잡아간다, 하면서도 남들이 안 보면 저들이 먼저 벽에다가 갈긴다. 누가 센지 어디 보자, 하면서 경쟁하듯이 말이다. 뭔 이야기인지 독자들은 척 하면 척하고 알 것이다. 국정원이라는 데에서 어마어마한 해킹장비를 들여다 놓고, 쥐새끼마냥 밤 말을 듣겠다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두 쪽밖에 없는 사내놈들이 하는 짓이렸다.

 

그리고 이들 상전은 음~.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상전이라면 무지막지한 욕이 될까? 이때까지 내가 쓴 글 가운데 아마 이게 제일 성서적인 것은 아닐까? 그것도 구약성서에 여섯 번이나 나온 표현을 들고 세상에 나왔으니 말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벽에다 대고 그럴게 할 힘을 자랑할 기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내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래서 남의 스마트폰에다 제 귀를 달아 엿들을 정도는 아니로다.

 

다음에는 국정원 직원 뽑을 때, 두 쪽 말고 다른 것도 있는지 조사해 볼 일이 아닐까? 세상이 험하다보니 성서학자가 별 생각과 궁리를 다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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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0)

 

박근혜의 콧바람, 왕의 콧김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 곧 “왕”을 달리 “우리의 콧김”(개역개정), “우리의 숨결”(공동번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루아흐 압페누”를 번역한 것이나 아무래도 석연하지 않다. 즉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와 우리말 번역으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의 반응이 일치하지 않을 것 같다.

 

“콧김”이라고 하면 그것은 콧구멍에서 나오는 더운 김을 뜻한다. “콧김을 쐬다”라는 말은 어떤 물체를 코 가까이 가져다 대고 거기에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콧김이 세다”라는 말은 관계가 가까워서 영향력이 세다는 말이다. “죽은 놈의 콧김만도 못하다”라고 하면 난로나 화로에 불기운이 없어져서 따뜻한 기운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라고 하면 이것은 숨 쉬는 속도, 숨 쉴 때의 그 높낮이를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 거칠다”라는 것은 순 쉬는 소리가 고르지 않고 거센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 자체에서도 하나님의 “콧김”이라는 표현은 강한 바람을 묘사할 때 쓰인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애굽기 15:8), 때로는 “꾸지람”과 평행을 이루는 “분노”를 뜻하는 표현과도 관련되어 쓰인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밑이 드러나고”(시편 18:15). 달리 코로 숨을 쉬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기도 한다(이사야 2:22).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공동번역>이 “우리의 숨결”이라고 한 것은 <개역개정>이 “우리의 콧김”이라고 한 것보다는 낫지만, 이 문맥에서 그 표현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둘 다 충분하지 않다. “콧김”이나 “숨결”보다는 “생명(력)”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 전달이 더 정확하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의 “콧김”이나 “숨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7)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생명(력)”이다. 욥기에서 욥이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기 27:3)고 말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기운”이 바로 “하나님의 루아흐”이다. 그 “루아흐”가 그의 “코”에 있다는 것은 바로 “생명”이 아직 그에게 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엔 콧바람도 있다. 루아흐가 바람, 숨결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 콧김은 콧바람이 되기도 한다. “콧바람 좀 쐬려고”, 또는 “콧바람 싱싱” 하는 표현들은 모두 신선한 바람을 호흡하면서 육신과 영혼의 호흡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이니 성서의 쓰임과 사뭇 유사한 느낌마저 준다.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 질문을 던져보자. 콧대가 높으면 거기서 나오는 콧김, 숨결, 콧바람은 셀까?, 아닐까? “흥”하고 코웃음 치며 내는 콧김도 있다. 콧대가 높은 사람이 그러면 주변이 사뭇 싸아~ 하고 긴장될 것이다. 제 콧대가 높다고 내는 콧김, 콧바람도 셀 줄로 아는 착각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김, 숨결, 바람에는 무엇이 담겨 있지 못할까? 단언컨데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 없다. 더군다나 권력자가 그런 콧김, 콧바람을 내면 저주나 죽음이나 비난의 기운만 그득하다. 이를테면 메르스보다 더 한 세균덩어리를 공기에 퍼뜨리는 행위가 된다.

 

대통령 박근혜가 코에 잔뜩 힘을 주고 콧바람을 장풍처럼 낸 모양이다. 국민이 선출한 의원을 제 수하 거느리듯 이리 치고 저리 치다가 제 말 듣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화를 돋궈 그런 모양인데, 바람은 센지 모르나 거기에는 역시 생명력이 없다. 정치적 수명도 덩달아 줄어드는 건 아닐까? 이왕 내려면, 제대로 내시지. 하나님의 루아흐가 없는 왕의 콧김, 콧바람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부매랑이 되는 비운의 숨소리라는 것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일깨운 진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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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9)

 

뿔이 높아지다

 

 

로마에 있는 일명 쇠사슬교회라 불리는 산 피에트르 인빈콜리 성당 안에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상이 있다. 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고 왼쪽 위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힘줄이 튀어나온 팔과 다리의 근육, 긴 수염에 곱슬머리. 그런데 머리에 뿔 두 개가 솟아 잇는 것이 처음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저 유명한 <뿔 솟은 모세>다. 조각가가 모세의 머리에 뿔을 조각해 넣은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의 출애굽기 34장 29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들 설명한다.

 

 

 

 

우리말 번역의 <개역>,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은 모세가 증거판 돌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개역),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개역개정), “얼굴의 살결이 빛나게 되었다”(공동번역)라고 번역하엿다. 그러나 불가탁역에는 모세의 얼굴에 “뿔이 솟았다”라고 하였다.

 

히브리어 명사 ‘케렌’(뿔)에서 나온 동사의 뜻은 “광채가 나다”(출애굽기 34:29), “뿔이 솟다”(시편 69:32)인데, 불가탁역은 “광채가 나다”로 번역해야 할 곳에서 “뿔이 솟다”로 번역한 것이다. 같은 식의 오역은 영어흠정역 하박국 3장 4절에서도 볼 수 있다. 야훼의 손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뿔이 났다”고 번역하였다.

 

 

 

 

 

“뿔이 솟다, 뿔이 나다, 뿔이 자라다”라는 말마저도 그렇게 쉬운 말은 아니다. 뿔이 동물의 머리나 얼굴에 딱딱하게 튀어나온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말이나 히브리어나 같다. 그러나 동사로 쓰여 “뿔이 나다” 혹은 “뿔이 솟다”는 우리말은 화를 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말에서 “뿔나다”는 곧 “화가 나다”, “골이 나다”를 뜻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뿔은 힘과 존엄을 상징하기 때문에 “야훼께서 아무개의 뿔을 높이신다”거나 아무개의 “뿔이 높아지다”, “뿔이 높이 들리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말의 “뿔나다”와는 뜻이 전혀 다르다.

 

히브리어의 뜻은 차라리 뿔 달린 짐승이 약한 짐승을 성공적으로 제압하고 난 뒤에 머리를 높이 쳐들고 제 힘을 과시하는 가시적 모습에 가깝다. “높음” 혹은 “정상” 등괴도 관련된다.

 

“뿔”은 구약에서 자식들을 보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헤만에게 자식들 곧 아들 열 넷과 딸 셋을 허락하신다. 이것은 헤만의 뿔을 높이 들어 주시겠다던 약속의 성취였다(역대상 25:5). 한나가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께 바치면서 드린 기도에서 야훼 때문에 자기의 뿔이 높아졌다고(사무엘상 2:1) 고백한다. 이것은 돌계집의 부끄러움에서 벗어난 기쁨, 자식을 얻은 기쁨, 이제는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게 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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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8)

 

짐승을 가리킨 것이 성서 영감설로 오해돼

 

 

성서를 번역하다 보면 원문의 대명사를 번역문에서는 실명사로 바꾸어야만 할 때가 더러 있다. 의미전달을 빨리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때로는 엉뚱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예전에 대한성서공회 번역자 모임이 있었을 때의 일이다. 번역위원 중의 한 분이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개역’ 성서의 이사야 34장 16절을 명상할 본문으로 내놓았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 분의 말에 따르면, 단순한 독자들이 이 본문을 성서영감설과 관련시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여호와의 책’은 성서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것들’은 성서 안의 말씀들을,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는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을.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는 ‘성서는 성서로 푼다’는 성서해석의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는 성서의 말씀은 모두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란 것이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 본래의 뜻과는 너무나도 먼 것이기 때문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의 책’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 ‘이것들’이란 이사야 34장 7절 이하에서 언급된 당아,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시랑, 타조, 이리, 수염소, 올빼미, 솔개 등을 가리킨다.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암수가 다 짝이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짐승들에게 짝이 있도록 명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는 하나님의 영이 그 짐승들을 다 불러 모았다는 것이다.

 

16절 처음에 나오는 대명사 ‘이것들’을 ‘위에서 말한 짐승들’이란 실명사로 번역하기만 했어도 이런 엉뚱한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서’가 이런 오해를 제거해 주는 번역을 하였다.

 

 

“야훼의 기록을 찾아내서 읽어 보아라. 이런 모든 짐승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리라”(공동번역).

 

주님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님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새번역).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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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7)

 

아름다운 여인의 보기 좋은 이(치아)

 

 

아가서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찬양할 때마다 그 여인의 신체 부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가 눈여겨 관찰하는 여인의 신체 부위는 머리, 머리채, , , , 입술, 잇몸, , , , 젖가슴, 허리, 배꼽, 그곳, , 키 등이다.

 

그는 여인을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에서도 보고 품에 안고서도 본다. 목을 중심으로 하여 목 위가 11곳이고, 목을 포함하여 목 아래가 6곳이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본 곳은 얼굴 쪽에 집중되어 있고, 얼굴에서도 입 주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비록 목 아래 부위에 대한 언급이 얼굴만큼은 세분화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표현의 대담성이 놀랍다. 여인의 신체 각 부위의 아름다움은 은유와 직유를 함께 써 가면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치아)에 대한 묘사가 <개역성경>이든 <공동번역>의 것이든 우리에게는 명확하지 않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암양 같구나.”(아가서 4:2)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다. 여인의 이(치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목욕하고 나오는 털 깎인 암양이란 은유를 쓰고 있다. 이것은 분명 백옥같이 흰 이와 가지런하고 고르게 생긴 치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목욕하고 나온 털깎인 암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이런 은유는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에 비하면 <공동번역>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떼 같아라가 더 그럴듯하다. 털을 깎기 전에 목욕을 시켰으니 얼마나 깨끗해졌는가? 깨끗하게 씻겨 진 양털처럼 흰 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털을 깎기 전에 양들을 목욕시키지 털을 깎은 다음에는 목욕을 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여기서 <개역성경>은 오역을 보이는 반면 <공동번역>은 바른 번역을 보인다.

 

쌍태를 낳은 암양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말에도 쌍태 낳은 호랑이 하루살이 하나 먹은 셈이라고 하여, 양은 큰 데 먹은 것이 적다는 뜻을 나타내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쌍태라는 말을 보기는 했지만, 희고 고른 여인의 이를 보면서 쌍태를 낳은 암양이 쌍둥이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연상하다니 아무래도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동번역>새끼 없는 놈 하나 없이 모두 쌍둥이를 거느렸구나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여인의 이가 털 깎으려고 목욕하고 나온 양떼가 희고 흠 없는 것처럼, 위 아래 빠진 이 하나 없이 다 고르게 짝이 맞는다는 뜻을 살릴 수 있는 은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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