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김기석 목사님 신간 《아! 욥》-

1.

김기석 목사님의 「욥기 산책」 《아! 욥》을 일부러 느리게 읽는다. 나는 요즘 속력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고 있다. 속도가 만드는 이차적 징후들. 주마간산(走馬看山). 모든 것이 최소화다. 생사사생, 성사사성(生事事生 省事事省), 부끄러운 일이지만 매사 어찌하면 힘을 덜 쓰나하는 게 일상이 된 것 같다. 우선 몸이 아팠고(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이명(耳鳴)이 심하고 머리가 꽉 막혀 쓰러질듯 어지럽다.) 그래서 늘 피로해 뭔가 힘을 쏟아 집중한다는 게 힘겨웠다.

 

연암선생(朴趾源, 1737~1805)이 그랬다지. 한 달 보름씩 세수도 수염도 깎지 않고, 누구볼 일 어디 갈 일, 인사치레 체면치레, 일가친척 사람노릇까지 팽개치고, 그저 툇마루에 앉거나 벌러덩 누워 하릴없이 묏풍경이나 바라보고 있던가, 갈 길이 멀고 바쁜 박물장수를 공연히 불러다 앉히고 객쩍은 세상 이야기나 엿들으면서, 그런 자신을 또 한심해하기도 하고 다행으로 여기기도 하고.

 

나는 그 정도까진 못되어 자주 피로한 몸을 누이고 쉬면서 몸의 고통을 줄여 보느라 뉴욕의대 존 사노 박사의 《통증혁명》에서 읽은 대로 TMS(Tension Myositis Syndrome, 긴장성 근육통 증후군)개념을 내 몸에 대입시키느라 또 남은 힘을 쏟아보곤 하였다. 보내주기로 약속한 책들 약속도 못 지키고, 써주기로 약속한 글도 못쓰고(생각해 보니 사람 노릇이 아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도 건성건성, 글을 쓰는 것도 건성건성, 아내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대충대충인 식이었다. 이 건성건성과 대충대충이 무서웠다. 대충 듣고 건성으로 알아들은 척 하며 ‘응응 그래그래 그렇죠 뭐 세상일이 별거 있나요 허허허…’ 하면서 하루가 일주일이 휙휙 지나가는 그 속력이 무서웠다.

 

 

 

 

2.

구약성경 「창세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만물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기인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나타난 모든 것은 지어짐으로 말미암았고, 그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가 계신다는 유일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런 공허한 말이 또 무슨 대수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당신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이 사실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공통의 이해력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원리로 승인될 수 있고, 이 공통의 원리가 가장 실용적이며 가장 최고로 요청되는 지혜이며, 윤리적 선이 된다는 사실뿐이다.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 계신 하나님. 수천억 원을 쏟아 부은 포스트모던의 건축물 가운데 현대식 영광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 그대로 베들레헴 말구유에 소박하고 가난한(벌거벗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신학적 성찰을 지배하는 기초적인 원리’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교의의 사원에 안치된 최고신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을 향한 겸손의 가슴에 깃든 서로에 대한 존경 속에 숨은 신이시다.

 

「욥기」는 성서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실지라도, 신학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실지라도, 교조화된 교의신학이 인간의 부조리한 현실을 다 설명해 줄 수 없음을 고발하고 있다. 주인공 욥(그의 이름은 아카드어로 ‘내 아버지는 어디 계신가?’라는 의미를 지녔다)은 전통적이고 교의신학적인 지혜론을 펼치는 친구들과 달리 철저한 부정신학적 입장에서 교의신학에 대한 무용론내지는 반박론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욥이 그러한 입장에 서게 된 배경은 말할 것 없이 그가 직면한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들의 입에 발린 칭송으로서의 교의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하여 정당하고 정직한 대면의 언어로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어찌 됐든 「욥기」의 텍스트 안에서 그것은 여전히 난해한 의문을 그대로 남겨놓기는 했지만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논쟁하는 욥과 그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욥의 말의 정당함을 선언하셨다.)

 

《아! 욥》에서 저자는 이렇게 이미 밝혀진 「욥기」의 텍스트를 가지고 벌어지는 현대의 욥과 욥의 친구들 간 제2라운드의 논쟁을 보여주려고 한다. 어쩌면 「욥기」의 해설 보다 더 중요한 저자의 관점과 수고가 깃든 작업이 이 부분일 거라고 생각된다. 「욥기」의 텍스트는 완결 됐어도 ‘우리의 공통의 이해력 안에서 우리의 존재의 원리로 승인될 수 있고, 이 공통의 원리가 가장 실용적이며, 가장 최고로 요청되는 지혜이며 윤리적 선이 된다는 사실’을 교회조차(혹은 교회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러한 몰이해는 세월호로 대표되는 우리시대의 모든 욥과 그의 가족들과 고통에 대하여 교회가 여전히 교의신학적 폭력을 휘두르는 괴물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쓰나미가 몰아쳐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을 때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했다는 설교 내용을 매스컴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남아시아를 휩쓴 지진과 해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피해를 본 그 지역은 모슬렘과 불교도들이 주를 이루고, 기독교를 박해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또 세계적인 휴양지인 그곳은 사람들이 몰려와 향락과 마약을 즐기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기사를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심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한 정신,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의 말입니다.”(《아! 욥》, 84쪽)

 

이 책이 설교임을 감안하더라도, 나는 실제 김 목사님에게서 이렇게 격렬한 파토스를 좀처럼 보질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격렬함 보다는 가령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할 때, 나는 김 목사님의 온유한 성품이 표현할 수 있는 갑작스런 파격(그 파격의 온유함!)을 생각하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다.

 

욥에게는 친구의 불행 앞에서 칠 일 밤낮을 함께 울어준 벗들이 있었지요? 지난 시간에 나는 ‘그만 한 우정이 또 있겠는가’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그런데 그들은 정말 우산을 내던지고 욥과 함께 비를 맞았나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산을 접어 욥을 두들겨 팹니다.(《아! 욥》, 80-81쪽)

 

누가, 무엇이, 왜, 이 온유한 시인으로 하여금 충격적인 괴물을 발견하고 그 괴물에게 격렬한 인간의 파토스를 토해내게 하는가? 우산을 내던지고 함께 비를 맞기는커녕 오히려 우산을 접어 비를 맞는 친구를 두들겨 패는 자들. 그런 상황. 그런 신학. 그리하여 이런 부분은 이 책에서 기억하고 넘어가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욥기의 탁월함은 이 대목에 있습니다. 욥의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는 친구들, 더구나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는 친구들의 존재는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철저히 뒤집히고 맙니다. 이 대목은 욥기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친구들을 욥의 적대자로 돌변시켰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아! 욥》, 65쪽)

 

우리는 세월호 사건 이후 일체화된 충격과 연민과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언뜻 난해할 정도로 돌변해가던 적대를 경험했다. 이 대목은 우리사회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비극성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대목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사람들을 희생자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의 적대자로 돌변시키는 것일까?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모두를 이 질문 앞에 한 사람 예외 없이 몰아세우려 한다. 저자는 「욥기」의 주제를 하나님에 대한 공소한 정의증명이 아닌 인간의 책임으로서 하나님 존재증명에 위치시키려 한다. 저자의 설교적 지향이 주인공 욥보다도 조연격인 욥의 친구들을 향해 있는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이 점 여타의 전통적이고 변증적인 「욥기」 해설서들과 이 책의 가장 큰 변별점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간과해선 안 될 이 중요점은 남미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 1928~ )가 그의 「욥기」 연구서 《무고한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말씀》에서 정리한 ‘고난당하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란 관점과도 차이가 난다. 사실 어느 시대인들 마찬가지겠지만, 욥을 향하고 욥의 입장에서 욥의 편에서 말하는 것의 근원적 중요성보다, 특히 우리들의 시대는 괴물로 변해가는 욥의 친구들에게 더 시급히 말해야할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고, 설교자로서 저자는 이 점을 가장 긴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3.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는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는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느낀다.(고전 13:9) 하나님이든 지식이든 한 인간이 하나님이라도 된 듯 전체를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에 대한 겸허한 깨우침이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무오류의 앎을 가능케 하는 신학이란 불가능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과제이다. 어떻게 그러할까? 불가능하다는 것은 교의신학적 차원의 정직한 진실이고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부정신학적 차원의 희망에 대한 긍정이다.

 

저자는 이 부정신학적 가능성을 ‘말이 끊어진 자리’의 ‘침묵’이라 설명한다. 이것은 「욥기」가 고통 받는 인류에게 선사하는 최후의 용기이고 고귀한 인간성이고 신의 선에 대한 변증법적 반항이자 믿음일 것이다. ‘말이 끊어진 자리’와 그 ‘침묵’. 얼마나 눈물이 나도록 멋진 표현인가! 미스테리, 수수께끼, 그러나 완전히 감추어지지 않는. 그것은 정연한 신정론(神正論)이 아니라 말이 끊어진 침묵의 자리에서의 신비(神秘)다. 거기서 울려 나오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해답으로서의 말은 아니지만 더 이상 논리도 해명도 필요없이 너무 충분한 해답이 된다. 저자는 하나님의 대답에 얽힌 무수한 억측과 도돌이표로 돌아가 버리는 신정론적 정답의 들끓는 요구들에 대하여 말 끊긴 자리의 침묵으로 대답하려한다. 어쩌면 김기석 목사님 자신의 말 끊긴 자리의 침묵으로.

 

“…욥은 모른다. 신이 하필이면 왜 그를 선택했는지. 욥은 벗들에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오로지 신하고만 대화하고 싶을 뿐…”〔비스바와 쉼보르스카, 「개요(Streszczenie)」, 본문 중 인용된 시〕(《아! 욥》, 408쪽)

 

신비와 함께 산다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를 말한다. 저자는 이미 책을 시작할 때 밝혔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할지가 아니라 읽지 말아야할지를. 여기서 저자가 성찰하는 신비의 갈피를 느리고 차분한 사색의 분별력으로 가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욥기를 읽어나갈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 욥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욥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친구들의 말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발화된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발설되는 상황이나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다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이다.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넷째,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라.”(《아! 욥》, 31-34쪽)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신비란 얼마나 외롭고 슬픈 일인가! 더구나 이러한 신비에 대하여 연구하고 상상하고 음미해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부조리한 고통 속에서 할 말과 도움 받을 말, 마침내 요구할 말조차 끊어진 침묵의 자리,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살아가려는 사람의 신비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하나님의 편에도 서지 않고, 반드시 올바른 것도 아닌 말들의 배경을 조응하며, 하나의 결론을 고집하고 않고, 모든 부조리한 오늘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나는 과연 우리 시대에(「욥기」를 관통하는 삶을 지닌) 그런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보다, 그런 사람(삶)을 생각하는 것조차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마치 옛날 보았던 영화 <마농의 샘>에서 막힌 수도(水道)를 뚫고 우물을 파고 물을 구하려 애쓰다가 마침내는 당나귀로 물을 실어 나르다 죽는 어린 마농의 아버지 곱추와 같이 삶의 무게에 비틀리고 휘어진 형상의 삶. 그의 과묵함과 침묵이 이 세상의 부조리 너머로 응시하는 하나님. 목사님이 제 1강에서 언급했던 기형도의 시를 읽어본다.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 기형도(1960-1989)

 

어쩌면 우리 동네 목사님은 김기석 목사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 내 모습이기도 할까? 오십세. 나는 이제 세상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신학교의 교의신학도 깨우쳐주지 않았던 슬픈 천명(天命)이란 것을 스스로 깨쳐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하물며 목사노릇으로 강단에서 설교하기 너무나 자주 자괴감에 시달리는 바벨론 유수와 같은 날들이다. 김 목사님께 곧잘 이런 저런 대드는 말도 해보곤 하는 나이지만, 솔직히 길을 물어보고 싶다. 저 이제 어디에 밑줄을 쳐야할까요? 역시 다정하고 겸손히 빙그레한 웃음으로 ‘나도 당신과 같은데 뭘∼’ 끝내 대답은 안 해주실 줄은 안다.

 

나도 모르겠다. 숨은 신이 멸시 당하고 우상신이 득세하며 교의신학은 만연하지만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설명이 안 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를 이 시대. 나는 가난한 천막교회 목사 같은 처지에 또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 어느 생활에 밑줄을 쳐야할까? 누구를 향하여 「욥기」의 소감을 피력해야할까? 모든 이슈가 블랙홀처럼 세상의 부패와 부정의 폭로에 말려들어간 이 연말에, 그래도 코밑에 닥쳐온 성탄절과 세모(歲暮)에, 욥은 누구이고 욥의 친구들은 누구이고 우리들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 것인가?

 

김 목사님의 빼곡한 독서와 사색의 책갈피에서 지천명(知天命)의 내 의문에 대한 한 대답이듯 이런 생각이 난다. ‘불행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 행복한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글을 쓴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는 다면 그것은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다.’(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모르겠다는 말은 그만하자. 모르긴 뭘 모르는가? 우리는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욥기」는 그런 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욥이 오직 신과만 말하려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론 신은 오직 욥과만 말씀하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가 막혀 할 말이 끊어진 침묵의 자리에서 오직 신과만 대화하는 사람. 그래서 제목이 이렇게 나왔을까? 《아! 욥》.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꽃자리>의 종횡서해(26)

 

살라! 그리고 살려내라!!

 

책을 읽는다는 것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이 문장 앞에서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바다는커녕 나태하고 안일한 일상조차 깨뜨리지 못하는 책을 꾸역꾸역 써대는 이들도 있지 않던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삶의 안정을 교란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라면서 결국 독서란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이라 말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위험한 일이다. 책장을 여는 순간 평온한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한 권의 책을 반복하여 읽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무슨 일일까요?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중략) 그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세계의 성립 근거를 찾아 아무리 성서를 읽어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77-80쪽).

 

그가 말하는 ‘이 세계의 질서’는 물론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교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옭죄고 그들의 일상을 쥐락펴락하는 종교적 위계질서의 근거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교권체제는 허공 위에 세워진 집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걸 보는 순간 루터는 현기증을 느꼈다. 세계의 진정한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권력이 아닌가? 그 결론은 너무 무섭다. 그렇기에 그는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미친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서운 질문 끝에 그는 변혁에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이다. 별 생각 없이 문자만 따라 읽는다면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 년에 성경 몇 독(讀)을 하는지가 아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고갱이와 접속해 우리 삶을 변혁하는 것이다. 그 고갱이에 자기 삶을 버무리기 시작하는 순간 성경은 우리 무의식을 쥐어뜯을 뿐만 아니라 애써 봉인해 놓았던 부끄러움의 민낯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끼날이 된다. 성경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그렇기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야 한다. 성경이라는 광맥을 통과해 나가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이들이 참 많다.

 

백소영 교수는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길 안내자이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그는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눈은 대중들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대중들의 욕망이 오롯이 투영된 다양한 문화 현상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풀어내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그에 못지 않게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성경 속에 깃든 가장 심오한 진리를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이다.

 

 

 

 

《삶, 그 은총의 바다》는 CBS TV의 ‘성경 사랑방’에서 패널들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그는 비범한 이야기를 본래의 의미를 훼손함 없이 평범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인신제물을 받곤 하던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다.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출구를 찾을 수 없어 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테세우스를 연모했던 크레타의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실 한 타래를 주면서 그 실을 풀면서 미궁에 들어가라 이른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자기가 풀어놓았던 줄을 따라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성경을 미궁에 비유할 일은 아니지만 그 심오한 세계를 탐험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백소영 교수의 책은 그런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다.

 

텍스트가 발생한 자리

 

성경에는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숨결이 켜켜이 배어있다. 소멸의 운명에 매인 인간은 누구나 불멸을 동경한다. 불멸은 물론 시간의 영원한 연장이 아니다. 섬광처럼 열리는 영원의 빛 안에 서는 순간 소멸에의 공포는 스러진다. 성경은 소멸과 불멸, 순간과 영원이 교직하면서 만들어낸 일종의 태피스트리이다. 그 무늬는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분명한 것은 이런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성경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문학양식과 시대 배경, 저자들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시, 역사서, 예배서, 신학적 고백…, 언어의 양식도 다양하고 문학 장르도 풍부한 것이 성경입니다”(21쪽).

 

백소영에게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이 많은 텍스트’이다. 강물에 떠밀려온 퇴적물들이 이룬 섬처럼 성경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단순한 퇴적물이 아닌 것은 각 시대의 이야기를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초점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이다. 구원 이야기는 ‘구원이 필요한 특수한 상황’을 전제한다. 설교자들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그래야 구원이 필요성을 회중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에 몰린 이들의 절박함을 두루뭉수리로 뭉개고 만다. 백소영은 성경을 “인류 역사상 ‘을 공동체’의 체험이 세계적인 주류서적이 되어버린 아주 독특한 책”(13쪽)이라고 말한다.

 

위계질서가 엄연했던 세상에서 그 질서의 맨 밑바닥에 처했던 이들은 억압과 착취를 숙명인양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러나 야훼는 그런 질서는 숙명이 아니라 불의임을 일깨움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대한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위계사회에서 벗어난 탈출공동체는 가히 ‘을의 공동체’라 할만하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이라 해서 다 의롭거나 깨끗하지는 않다. 아름다운 꿈도 세월과 더불어 퇴색되고, 불씨처럼 숨겨져 있던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순간 역사는 또 다시 퇴행하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숨바꼭질이라 말하기도 한다. 저자가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굴곡진 삶을 자세히 살피는 것은 그 속에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안적 비전이 현실의 욕망과 맞닥뜨리면서 어떻게 제한받고 때론 좌절되고 또 종종 배반되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건들을 통해 조명해 보았습니다”(13쪽).

 

인물들이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는 각기 다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리사니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백소영은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에 주목한다. 옛 사람들은 공부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박이약지(博而約之)라 했다. 제 아무리 폭넓게 섭렵한다 해도 그것을 하나의 초점으로 모을 수 없다면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을 일이관지하는 핵심 메시지가 창조주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잘 살아야 한다는 첫째 명령인 ‘창조(존재)명령’에 더하여 혼자서는 못 사는 데데한 생명체를 보듬어서 잘 살게 해주라는 ‘구원 명령’을 하나 더 받은 셈입니다”(32쪽).

 

창조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절 속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숨을 받은 존재인 만큼 제 숨을 쉬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구원 명령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존재를 ‘다스리라’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것은 뭇 생명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거나 지배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두 명령은 생명을 풍성하게 ‘살아내라’는 말과 미약한 존재들을 '살게 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자기 생을 긍정하며 철저하게 살아내는 동시에 연약한 생명을 돌보아 살게 하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기초이다.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 알아차리기

 

《삶, 그 은총의 바다》의 가장 큰 미덕은 성경 이야기가 탄생한 맥락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그것은 저자가 다양한 성서 해석 방법론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이한 언어로 기술되고 있는 저자의 성서 해석은 실은 역사 비평, 양식 비평, 전승 비평, 문학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 등을 거친 결과물들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까닭은 해석에 이르는 긴 사유의 과정을 저자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맥락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성경 속에 감춰진 숨은 메시지와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원역사에 속하는 타락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이스라엘이 왕정체제로 돌입한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출애굽 공동체의 이상이었던 평등공동체의 꿈은 어느덧 망실되고,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가 공고해지면서 ‘살아내라’와 ‘살게 하라’는 하나님의 원초적 명령은 잊혀지고 말았다(38-39쪽). 권력을 독차지한 이들이 약자들을 억압하는 현실에 맞서 성서기자는 타락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삶의 토대가 흔들릴 때마다 근본으로 돌이켜야 하기 때문이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벽돌’이다. 바벨탑 이전까지는 건물을 지을 때 자연에서 얻거나 채취한 돌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규격의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고안되면서 힘을 가진 이들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남과 구별되는 건축물을 짓고 싶은 욕망이 커지면서 그들은 거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노동력을 얻는 데 골몰한다. 전쟁처럼 좋은 수단이 없다. 미국의 문명비평가인 루이스 멈퍼드는 고대인들이 전쟁을 수행한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영토 확장, 인력 수탈, 노역으로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약탈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문명이 국가 내부에서 촉진하는 동시에 격렬하게 억압한 국내적 충돌을 외부로 방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루이스 멈퍼드, 《인간의 전환》, 박홍규 옮김, 텍스트, 2011년 8월 5일, 70쪽). 바벨탑 이야기는 약소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제국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자기들을 신격화하려는 왕과 귀족들에 대한 경계였다. 저자는 여리고 성 함락 이후에 그 성을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야훼의 엄중한 경고(여호수아 6:26)를 동일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성곽을 쌓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순간 또 다시 권력관계가 발생하여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비인간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맥락화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중요한 가르침을 다루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저자의 시선이 성경 속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성경을 통해 열린 눈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현실을 살핀다. “성경 읽기에서 ‘맥락화(contextualization)’는 매우 중요”(191쪽)하다. 그래서일까?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던 히브리인 ‘아브람’ 이야기는 돌연 21세기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무차별 폭격으로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신산스런 처지와 연결된다(88쪽). 오직 하루분만 거둘 것을 요구받았던 광야의 ‘만나 이야기’는 투기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십계명 역시 고리타분한 옛 규범이 아니라 지금도 생생하게 적용되어야 할 삶의 원리가 된다. 저자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렇게 ‘맥락화’ 하고 있다.

 

“‘거짓 증거’라고 하니까 우리가 꼭 법정에 설 일이 있어야만 저지르는 행위 같지만, 실상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강요받는 크고 작은 ‘거짓 증거’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내부자들끼리 거짓증거물들을 모으고 거짓증거에 동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의료 사고 같은 것 말입니다. 전문가 집단인 의사들이 증거를 조작하면 평범한 일반인인 환자들로서는 진위를 파악하기 참 어렵습니다. 나는 그저 인턴일 뿐인데, 지도교수님이 하라는데, 할 수 없지, 뭐. 이렇게 정당화하면서 병원의 편에 서기 쉽습니다”(195쪽).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부하직원의 실적을 내 것으로 슬쩍 둔갑시키는 것, 시간 외로 일을 시키고 업무 범위 외의 일을 명령하는 것, 이런 것들도 다 ‘도둑질’입니다”(195쪽).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성경이 왜 여전히 우리 삶의 ‘척도’인지를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낮은 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삶, 그 은총의 바다》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천대받는 이들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만났던 하갈, 생명을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 출애굽 공동체의 숨은 리더 여선지자 미리암, 약속의 땅에서 땅을 분깃으로 받지 못할 처지가 되자 회막 앞에 나와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마침내 땅을 약속받았던 슬로브핫의 딸들, 여리고라는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기꺼이 동참했던 기생 라합 등이다. 그들은 대개 검질긴 생명력으로 ‘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부응한 이들인 동시에, ‘살리라’는 구원명령에도 충실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생명 살림의 길은 자신들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살리는 역할도 수행했다. 일종의 ‘사이-존재’인 그들은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가장 예리하게 알아차리곤 한다. 고대 세계에서 여성들은 약자 중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벽 위에서 살았던 라합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성벽은 성 안과 성 밖의 경계 지역이다. 성 안에도 속할 수 없고, 성 밖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 지역에서 살았기에 라합은 체제의 모순을 온 몸으로 실감했던 것이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성들에게만 땅이 분배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당연'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땅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약속의 실현을 의미한다면 남성 가장이 없다 하여 자기 집안을 배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런 정당한 이의 제기를 하나님은 귀히 보셨고 법 자체를 바꾸도록 명령하셨다(민수기 27:6-9).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들이 없는 집이면 딸에게 먼저 여호와의 분깃이 가야 된다’는 법 조항을 만들게 한, 굉장히 놀라운 공동체적 변화를”(269쪽) 이루어냈다.

 

백소영은 성경의 난제들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불뱀을 만나 어려움을 겪던 탈출공동체는 그 뱀을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한다. 하나님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 이르신 후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 말씀하셨다. 자칫 잘못하면 그 구리뱀이 우상으로 숭배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시를 내리신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문제는 해석이다. 백소영은 이 문제를 역시 생명 살림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구리뱀은 아직 안 물린 사람들이 아니라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에 대한 처방전이었습니다. 사랑의 상징이죠. 자기만 살겠다고 여호와 앞에 나온 건강한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는 구리뱀을 통해 가르치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함께, 다 사는 길을…”(256쪽).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대목은 적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헤렘)는 명령이다. ‘사는 것’과 ‘살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하신 하나님이 정말 다른 생명을 잔혹하게 죽이라 하셨을까?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문제를 그냥 덮어두고 갈 수도 없다. 백소영은 그것을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고대 세계의 문화적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무오류의 책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이어 ‘진멸하라’는 명령 속에 담긴 숨겨진 의미에 주목한다.

 

“헤렘의 명령에는 가나안적인 습속과 행위를 따라 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을 탐하고 더 소유하려 하고 비윤리적인 종교의례를 따라하는 삶의 가능성을 ‘헤렘’하라는 것이 여호와의 본뜻이었다고,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313쪽).

 

백소영의 성경 해석은 생명 살림의 지혜와 새로운 세상의 꿈과 늘 접속되어 있다. 그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니지만 독자들은 그런 해석을 통해 성경을 읽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1꼭지의 글로 구성된 이 책이 마치 독자들에게 조근조근 말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구어체로 기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하나의 해석을 강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게 아닐까요?’ 하고 말함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여유를 가지고 성경 이야기와 실존적으로 만나도록 주선하고 있다. 2권과 3권으로 이어질 그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구원(救援)의 지평, 기어서 넘기

- 김기석 목사의 《아슬아슬한 희망》 -

 

 

가을의 끝자락, 초겨울의 문턱에서 김기석 목사의 열 번째 책 《아슬아슬한 희망》을 만났다. 꽃들은커녕 곱게 단풍이 든 나뭇잎들에게조차 암담한 계절, 이제는 추운 바람과 눈서리 겪는 일만 남은 계절에, 이 책은 ‘아슬아슬’하게 우리에게 왔다. 이기적으로 저만 챙기게 태어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신학을 하면서 겨우겨우 애써가며 배워온 것들을, 김기석 목사는 그냥 ‘타고난’ 것 같다. 조개 잡고 갈매기 쫓으며 팔랑팔랑 뛰어다니느라 바닥 볼 일 없이 바빴던 어린 시절 나의 개펄에의 추억이 무색하게도, 그는 어려서부터 시선을 바닥에, 땅에 두며 살았다. “온 몸으로 바닥을 기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상한 연민”(12쪽)이 있었다 한다. 개펄에 난 게의 흔적, 신작로에 남겨진 지렁이가 기어간 길, 그 흔적들이 말해주고 있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에의 몸부림이 애처롭고 처연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보다. 김기석 목사는 이 책 가득히 ‘포월(匍越, 기어서 넘기)’의 삶을 사는, 살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땅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구원의 발걸음은 초월(超越)이 아니라 포월(匍越)이라고, 김 목사는 고백한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늘 슬픔으로 지켜본 ‘땅의 사람’이라서, 그러나 한편으로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던” 신앙인이요 목회자였기에(13쪽), 그는 결국 이 땅의 삶을 하루씩 ‘기어서’ 하늘에 닿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기어서 넘기가 어디 만만한가? 에녹이,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듯 천군천사가 양팔 잡고 병거 타고 훨훨 날아,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훌쩍 뛰어넘는 구원을 성취하자고 말해야 그나마 솔깃할 세상에서, 그는 ‘기어서 넘는’ 구원으로, 천천히 하루씩 성실히 일상을 살아내는 그 어려운 길로, 기어이 우리를 이끈다.

 

  

그도 안다. 기어서 넘기가 얼마나 고단한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어려운지. ‘기어서 넘기’에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악한지.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열심히 ‘기어’ 버텼으나 끝내 ‘넘지’ 못한 인생들을 안타까이 기억한다. “일그러진 자본”의 악한 모습이 앗아간 생명, 태안군 의향리 어민 이영권 씨(114쪽), 팽목항에서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피에타들”(215쪽), 미움도 분노도 없이 오히려 “죄송합니다” 공손히 글을 남기고 스러진 송파구 세 모녀의 생명!(207쪽)

 

성경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무정하고,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고, 절제가 없고, 난폭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말세의 징조라고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우리 시대를 비껴가는 것이 없다.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58쪽)

 

그래서 그는 마냥 서정적인 아름다운 에세이를 쓸 수 없었다. 하늘의 희망을 품고 성실히 땅을 ‘기어’ 살아가던 민초들이 끝내 ‘넘지’ 못하고 죽어가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이요 목회자인 그는 저 슬프고 아픈 이름들을 새기며 그 이름들을 “자기 확장 욕망에 사로잡힌 교회[와 사회]에 대한 기소장”으로 읽어낸다.(211쪽) 그래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의 언어들은,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아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는 그의 목표는, 그의 꿈은, 그의 소망은 “우리 현실 속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이고 싶은”(13쪽) 것이었으니까.

 

가당키나 한가? ‘우리 현실’이 지금 어떠한데? 꿈을 꾸어야하는 청춘조차 ‘너머’의 세계를 그리는, 그리워하는 것이 사치라고 말하는 시절 아니던가. 시인의 언어를, 예언자의 소리를 들려줘도, 그런 것들은 ‘정규직’이 되는 일에도 돈을 버는 일에도 쓸모가 없다며 들으려하지 않는 시절인데, 언감생심 오늘 이 자리에 ‘하늘의 빛’을 끌어오겠다니!

 

눈물이 났다. 실은 나도 그런 어이없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서, 그럼에도 현실의 힘에 눌려 가끔 그 꿈을, 그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옴을 경험하기에….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새삼 감사했다. 하나님 나라, 인간이 내는 견적으로는 도저히 이 땅에 도래할 것 같지 않은 그 ‘동아리’에서, 묵묵히 앞서가는 선배(先輩)의 뒷모습을, 발자국을 발견한 기쁨 때문이었다. 이 책은 ‘관계의 그물망’이다. 혼자서는 어림없는, 혼자 하다 자꾸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이 외로운 싸움에서 “우리가 허무의 물결에 실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137쪽) 따듯하고 탄탄한 그물망이다.

 

또한 정화된 영혼으로 숱한 제자들과 순례자들의 발길을 닿게 했던 베네딕도의 동굴처럼(146쪽), 문풍지가 되어 겨울바람을 막아내고 계셨던 어머니처럼(274쪽), 익지 못한 감 열매도 채 자라지 못한 참외조차도 버리지 않고 살뜰히 챙기신 아버지처럼(117쪽), ‘기어 넘는’ 우리 인생이 품은 ‘아슬아슬한 희망’에 버팀목으로 연대하려는 몸짓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근원 앞에서 홀로 앉도록” 초청하고, 그 힘으로 마주 앉고, 둘러앉음으로, 모든 생명이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는”(78쪽) 것이 필요하다고, 가능하다고 외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66쪽)이기에 그것은 누구도 대신 못할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일상 가운데 치열하게 성실하게 살아내며 만들어갈, 우리의 몫이다. 바람타고 날아와 예배당 뒤편 흙 둔덕에서 피어났으나 하얀 뿌리를 드러내고 아슬아슬 생명을 버텨내는 위태로운 소나무의 모습이 안타까워 대나무를 잘라 울타리를 만들고 흙을 덮어주고 날마다 물을 주며, 그 소나무 이름을 “아슬아슬한 희망”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한 후배 목회자의 이야기를 전하며(65-66쪽)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희망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완제품이 아니라 삶으로 구현해야 할 과제이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어나 안녕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저항과 연대와 연민을 통해 역사의 봄을 선구한다.(67쪽)

 

자본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힘은 협동과 섬김과 돌봄과 비움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그 수가 적어도, “바늘로 우물을 파는 것” 같더라도(98쪽), 희망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우리의 일상은, 인생은 가능성이다. 이상주의라고? 그 꿈으로 치자면 성서의 인물들만 할까? 김 목사도 말하듯이 성서에는 전쟁의 한 중간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꿈,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노는 세상을 꿈꾸었다.(193쪽) 예수의 꿈은 어떤가? 삶과 죽음의 매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도래케 하는, 하나님 나라 통치 질서를 이 땅에 오게 하려는 꿈을 꾸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은 꿈꾸는 자들이다. 그리고 꿈대로 사는 자들이다.

 

때문에, 김기석 목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순천(順天)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모두가 발을 맞추어 행진하는 대열에서 벗어나 딴 길로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대는 세상의 북소리가 아닌 하늘의 북소리를 듣는 이들을 부르고 있다. 굳게 붙잡고 있던 욕망의 바위를 놓고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순천(順天)의 사람들이야말로 새 시대의 주역이다.(29쪽)

 

결국은 한 걸음씩이다. 기던 걷던, 단 하루도 건너뛰고 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여 일상에서 하늘의 빛을 담아내지 못하고서 구원은 없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말한다.

 

삶이란 오늘의 점철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70쪽)

 

그 성실성으로 김기석 목사는 익명성의 거대 공간 도시 한가운데서 순간순간 스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진심으로 마주하며 ‘화살기도’를 날린다.

 

“저 학생의 가슴 속에 하늘의 따뜻한 기운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저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부디 건강 잃지 않게 지켜주십시오.” “저 가슴에 깃든 어둠이 있다면 그것을 빛으로 바꿔주십시오.” “저 할머니의 느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랑의 샘이 솟아나게 해주십시오.” 시인의 화살기도는 타자를 함부로 대하고 생명을 유린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멈추지 않는다. “저분들도 생명의 신비에 눈뜨게 해주십시오.”(21-25쪽)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그들조차도 그리스도는 문을 두드리시며 들어가길 원하시는 기적 같은 생명 아닌가.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나!

 

김기석 목사는 평화주의자다.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와 나의 ‘선배’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셨으니… 그러나 그 평화가 땅의 권세가들과의 공모나 묵인으로 오는 상태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아는 진정한 평화주의자이다. 하여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한 멕시코 혁명가의 결기는 이 책 갈피갈피마다 묻어난다. 그가 싸우는 대상은 참으로 크다. 강하다. 자본이 ‘주의’가 된 세상, ‘정규직’이 꿈이 된 세상, ‘무한경쟁’이 삶의 가치가 된 세상, 개별화가 당연이 된 세상, 끝없는 탐욕이 능력이 된 세상. 이 세상과 싸우자하니 그의 평화는 피 흘림 없이, 상처 없이 도래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게 피 흘리는 그의 언어들은 이 책에서 그 싸움을 싸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되 인간 본래의 생명이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히 ‘기어서 넘는’ 인생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짖밟는 구조악에 한판 싸움을 걸면서, 샬롬의 그날을 꿈꾼다.

 

그래서 희망이다. 우리 현실이, 인생이 비록 ‘아슬아슬할’ 지언정, 끝내 포기하지 않고 평화의 꿈을 꾸며 오늘 하루씩 겨루어내는 이 ‘기어감’이 결국은 이 생명 경시의 세상을 ‘넘어’가도록 만들 테니까. 한 명, 또 한 명, 이렇게 ‘살림’의 방향으로 연대하여 ‘기어가는’ 신앙의 사람들이 늘어가는 그 나라를, 그래서 예수는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이었겠지. 김 목사는 이 책을 “멋진 소식으로 이 세상을 방문한 외손녀 예빈이에게” 주고 싶다(15쪽)고 했다. 나도 그렇다. 책 읽기를 마치고서 나는 밑줄 가득한 이 책을 나의 미래인 내 아이에게 건넸다. 내 아이가, 우리의 아이들이 ‘기어서 넘는’ 세상은 견딜 만 하도록 땅을 고르고 장애물을 치워줄 몫이 나에게, 우리에게 있다는 걸 다시 다짐하면서.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통령의 입이 무서운 시절에 이런 속담이 딱!

 

 

속담이나 우리말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리네 삶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가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 옛 어른들은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실 때 나는 냄새’라 했다. 생각해보면 그윽하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옛 어른들에게 석 달 동안 가뭄이 든다는 것은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곡식이 될만한 풀포기는 모두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논바닥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졌을 터.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길이 보이지 않으니 농부의 마음은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 깊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루하루 애(창자)가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하늘,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천둥소리가 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천둥지기’라 했다)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를 대 로 마른땅을 적시며 스민다. 그때 피어나는 냄새는 세상 그 어떤 냄새와도 비교할 수 없는 냄새였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하늘 은총의 향기였을 터이니 말이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환경과 일상의 삶 등을 녹여 낸 197개의 속담과 생소한 29개의 우리말에 대한 간결한 해설과 마음에 새길 교훈이 담겨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서운 시절이다. 옛 어른들의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아무리 무섭다 하여도 호랑이 입은 한 번에 사람 한 명이나 동물 한 마리밖에는 물지를 못한다. 아무리 재빠르고 사납다하여도 한꺼번에 사냥감 둘을 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입은 다르다. 말 한 마디로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잘못된 말 한 마디로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을 다치게 하거나 쓰러져 죽게 만든다. 사람의 입이 호랑이 입보다 무섭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아 세상 평온해질까.

 

 

 

그 외에 이 책에 수록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

시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물을 채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시루에 물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시루에 물을 채우는 일보다도 어려운 것이어서, 불가능의 끝이라 여겨진다.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고 죽으면 만 냥이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모습을 철없는 자식들은 서푼의 초라함으로 보곤 한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모습이 서푼이 아니라 만 냥이었음을, 만 냥이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때쯤 어머니는 이 땅을 떠나시고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다 씻어 먹어도 물은 못 씻어 먹는다”

다른 것이 더러워지면 물에 씻으면 되지만 물이 더러워지면 물을 씻을 것은 따로 없다. 이 말 속에는 무엇이 우리 삶의 최후 보루인지가 담겨 있다. 자연과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그 어떤 말보다도 깊은 울림을 가진 잠언으로 다가온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

이 말은 단지 냇물을 건널 때만 필요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우리 인생을 위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겉모습만 보고 ‘얕은 내’로 여겨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그렇게 하면 실수하게 되고 결국 좋은 사람을 놓치게 된다는 엄한 가르침으로도 다가온다. 누구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그윽한 가르침을 옛 어른들은 냇물 이야기로 편하게 했지 싶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것은, 먼 길을 나설 때는 눈썹조차도 빼놓고 가라는 뜻이다. ‘눈썹조차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다 빼놓고 가라는 것이다. 온갖 것을 다 챙겨가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네 삶에 눈썹의 무게 이야기는 얼마만한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을지.

 

“흉년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

흉년 때에는 손님이 찾아오는 것보다도 왔던 손님이 가는 것이 더 반갑다는 뜻이다.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는 것이 아름다운 법, 남는 것보다도 떠나는 뒷모습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

물 때 물을지언정 함부로 짖지 않는다. ‘받는 소는 소리치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다. 일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은 공연히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속이 허전한 이가 요란할 뿐 정말 능력이 있고 속이 알찬 사람은 대개가 말이 없다. 무림의 고수가 언제 함부로 제 실력을 입방아로 대신하고, 함부로 칼을 빼들던 가.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는 말이 있거니와, 말 많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더욱 가볍게 하지는 말 일이다.

 

“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재미있고, 통쾌하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급하다고 아무도 안 본다고 앞 뒤 가림 없이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우물에 똥을 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는 이 없다고 슬쩍 쓰레기를 버리거나, 돈에 눈이 멀어 비 오는 날 하수구에 독성이 있는 공해물질을 함부로 흘려버리거나, 화가 났다고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든지, 그 때는 편할지 몰라도 그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생님은 늘 애가 타고 속이 썩는다. 애가 타고 속이 썩는 사람이 눈 똥이 다른 사람이 눈 똥과 같을 수가 없다. 아무리 먹을 게 궁한 개에게도 훈장이 눈 똥은 쓰디써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개도 그랬을까,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은 선생님 노릇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거지가 빨래하면 눈이 온다”

거지가 빨래를 하면 눈이 온단다. 거지가 눈 오는 날을 용케 알아맞힌다는 게 아니다. 거지가 빨래를 하는 날은 날이 푹한 날이고, 그런 날은 눈이 올 가능성이 많을 뿐이다. 거지가 빨래하는 모습을 본 지가 오래 돼서 그러는 것일까, 이제는 날씨의 징조도 신문이나 방송의 일기예보에 의존을 하며 살아간다. 거지의 빨래에서 눈을 짐작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린 이 시대에 시대의 징조를 헤아리는 눈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봄비는 일비고 여름비는 잠비고 가을비는 떡비고 겨울비는 술비다”

내 인생의 계절이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건강하고 여유 있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마음 아닐까? 언제 어떤 비가 오면 어떠랴, 은총으로 받으면 모두 은혜의 단비인 것을….

 

“삼 년 가는 거짓말 없다”

거짓말로 잠깐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아주 속일 수는 없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을 속일 수는 없다. 결국은 모두 드러난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음보다도 악함 때문이다.

 

“좋은 목수한테는 버리는 나무가 없다”

좋은 목수는 무엇보다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나무를 안다. 꼭 필요한 나무를 꼭 필요한 곳에 쓴다. 그러기에 좋은 목수는 그 어떤 나무도 함부로 버리지를 않는다. 다른 사람이 버리는 나무라 할지라도 그 나무를 잘 보관하였다가 그 나무의 소용에 꼭 맞는 곳에 사용을 한다. 버리는 나무가 없는 목수가 좋은 목수다. 버리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정성만 있으면 앵두 따 가지고 세배 간다”

아무리 때가 늦었다 하여도 정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음을 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때를 놓쳤다고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비춰 생각해 보면 때를 놓친 것보다는 정성이 부족한 경우가 더 많다. 부족한 정성을 때 놓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못된 버릇이다.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 벼슬길에 오를 길이 막막하니, 혹시 역모라도 일어나 그 참에 벼슬자리나 얻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을 두고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고 했다.

 

"속 빈 자루는 곧게 설 수 없다"

자루는 제 스스로는 힘이 없어 무엇인가로 채워지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시절 아마도 이 속담은 먹는 것과 관련하여 ‘굶주린 사람은 체면을 차리고 올바로 살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오늘날은 다르지 않을까? 마음이 비면 똑바로 설 수가 없다. ‘비면’이라는 말은 ‘비우면’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마음을 스스로 비우면 천국이려니와, 있을 게 없어 속이 비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결국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산이 울면 들이 웃고 들이 울면 산이 웃는다”

어떤 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즐거워하는 이가 있으면 괴로워하는 이가 있는 법이다. 내가 즐거워할 때 혹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이기적인 기쁨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눈물 흘릴 때 혹 누군가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반보기’

반보기란 시집간 딸과 친정의 가족들이 양가의 중간쯤에서 만나 그리움과 정담을 나누는 풍습이었다. 친정으로 가지 않기 때문에 시댁의 가사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고, 또한 친정 갈 때 준비해가야 하는 음식(그것을 정받이 또는 정성이라고 불렀다)도 장만하지 않아도 되고, 당일로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풍속으로 이용되었다. 서로 반쯤 다가가 눈물겨운 만남을 가졌던 반보기, 옛 시집살이는 그만큼 섧고 고달팠던 것이리라.

 

‘집손’

‘집손’이란 허술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밥 도 얻어먹고 잠자리도 얻어서 자는 사람인데, 겉모습만으로 보면 거지와 다름없지만 그냥 밥을 얻어먹고 잠만 얻어 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을 통해 그 집에 있는 문제를 꿰뚫어보면서 넌지시 해결책을 일러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없이 허술한 차림으로 바람처럼 살아가지만 어디에도 속해있지를 않으면서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 티내는 일없이 구원의 빛과 길을 전해주는 사람, 그들을 ‘집손’이라 한다고 했다.

 

‘언구럭’

‘사특하고 교묘한 말로 떠벌리며 남을 농락하는 짓’이다. ‘괜히 죽는 소리를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떠보는 일’을 ‘언구럭을 떤다’고 한다.

 

‘땅 타박’

말 그대로 ‘땅이 나쁘다고 타박하는 것’을 말한다. ‘타박’이란 말이 ‘허물이나 결함을 잡아 핀잔하거나 탓함’을 뜻하니, 땅 타박이란 공연히 땅만 나쁘다고 땅만 야단치는 경우를 말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상사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하늘 탓을 한다면 그야말로 땅 타박을 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돌이마음’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묵무덤’

‘오래도록 거두지 않고 내버려두어서 거칠게 된 무덤’이 란 뜻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김남주, 또 그렇게 눈물이 쏟아진다

- 시인과 나 -

 

1.

 

김남주(金南柱, 1946년 10월 16일~1994년 2월 13일) 시인의 시와 생애를 담은 《김남주 평전》(김삼웅 저, 꽃자리, 2016) 출판기념회에 갔다. 서울의 초입(初入)이 늘 그렇듯 정체가 심했다. 전화가 왔다. 함께 가기로 약속한 친구 J전도사였다. 각자 길이 막혀 전화로 수다를 떨기로 했다.

 

“형님, 그런데 전 사실 김남주 시인 선생님이 누군지 몰라요.”

 

허걱!

 

“......”

 

“전 사실 교회 안에서 신학공부에만 매달려 왔잖아요. 성서신학 외에는 아는 게 없으니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시 허걱! 난감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 대답해 주어야할까? 80년대 군사독재의 학살과 억압에 온몸으로 시로 저항한 불멸의 시인? 남민전 사건의 해방 전사? 15년형을 받은 감옥살이 13년? 그의 영화 같은 결혼에 얽힌 이야기?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노동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그의 아들의 이름 김토일(金土日)?

 

 

 

 

J전도사의 솔직 담백한 고백에 우선 생각나는 얘기 한토막이 떠올랐다. 언젠가 송경동 시인의 강연에서 들은 얘기다. 그가 상경해 공장생활을 할 때 노동자 문예 창작 교실이 열렸다. 강사가 유명한 시인인데 김남주라 했다. 송시인은 그 김남주라는 시인이 여성시인 김남조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거기가면 그 유명하다는 김남조 시인을 볼 수 있겠구나’하며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김남조가 아닌 김남주를 만나게 됐다고.

 

구글 검색에 김남주를 치면 우선 무수히 나오는 웹페이지들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여배우 김남주다. 신동엽을 검색하면 맨 먼저 개그맨이 나오는 것과 같다. 나는 우선 김남조 얘기부터 해주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허걱! 그는 김남조도 몰랐다!

 

“아니, ‘겨울바다에 갔었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하는 김남조를 모른다구요?”

 

“몰라요. 형님.”

 

그랬다. 허허허. 나는 그가 김남주를 모를 뿐 아니라 김남조도 모른다니까 일종의 쎔쎔이다는 다행스런 통쾌함까지 느껴졌다. 시인의 생애에 관한 기본적인 얘기를 들려주고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 떠오르는 대로 읊어주었다. 그 첫 번째 시가 <종과 주인>이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성서신학에 몰두해온 순수한(?) 그에게 이보다 임팩트 있는 성서 신학적 시가 있을까? 과연 J전도사는 잠시 할 말을 잃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한숨을 지었다.

 

“형님, 지금 뭔가 신구약성서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신학적 영감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인이 계셨다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새로 발견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인이 새로 발견되는 것도 의미가 깊겠지요.”

 

2.

 

내가 알기로 김남주는 압도하는 직관과 통찰의 시인이었다. “몸매가 작아 내 누이 같고/허리가 길어 내 여인 같은 나라여”(<학살1>)할 때 벌써 전 역사가 두 줄에 압축된다. 이 서정미가 격렬한 말들에 앞서 그 자체로 무엇보다 격렬하다.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유약하게 늘어져 유약한 척으로 사는 의식생활을 일깨우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핵직구를 먹였다. 상대를 봐가며 살살 잽으로 간부터 보는 게 아니라 연달아 훅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컷을 면상에 작렬시킨다.

 

그러면 또 그의 시를 읽는 방식도 있다. 즉 그 한방에 즉각 나가 떨어져야지 그걸 맞고도 안 맞은 척 맞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고상하게 버텨서는 말이 안 된다. 이런 경우 나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 굳게 믿는다. 차라리 말을 말지 뭐 점잖은 척 사려 깊은 척 뒤로 빼고서 하는 말이나 투는 맘에 맞지 않는다. 콩깍지가 씌워 연애에 빠지듯 나에겐 이런 건 이래야만 할 것 같다. 김남주 같은 시인은 그렇게 대해줘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얘기가 되지 않는다. 가령 톨스토이가 가장 경멸해 마지않던 지적 허위의식으로 톨스토이를 모독하듯이. 시인은 그의 시 앞에 누구나 기냐 아니냐를 선택할 것을 비타협적으로 제시한다. 변명할 필요는 없다. 아니면 벌써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음성과 닮아있다. J전도사가 내가 들려준 몇 편의 시에서 선지자의 서정을 직감했던 것은 순전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한편 그러한 강렬한 직관과 통찰의 절대언어는 당장 거기 굴복하기에 유약한 사람에겐 불편한 압력일 수도 있다. 체질상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구나 아예 반대로 부자청년처럼 가진 게 너무 많아 버리기 싫고 버릴 수도 없는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시인의 시적 독재에 더욱 반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미적지근 찬동한 사안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것처럼. ‘시적 독재’라고 쓰고 보니 더욱 그럴 듯하다. 선지자들과 예수가 배척받으신 이유도 바로 그 ‘시적 독재’(영감적 독재)에 있었으니까.

 

여기엔 또 하나의 순진할지 모를 오해가 있다. 너무 그렇게 즉각적 전적으로 일체화될 수 없다고 일단 뒤로 빼기 거부부터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럴 때 전적으로 그래야만 된다고 지나치게 압박을 받는 것도 오해다. 인간적이지 않다. 그저 함께 느끼고 인정해주면 된다. 느끼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 서정적 변화도 함께 올 것이고, 비유의 원관념도 밝혀져 나갈 테니까. 이데올로기적 철저함과 엄밀함이 사람을 질식시키는 건 이런 오해로부터 기인한 미친 정신 때문이 아니던가.

 

어찌하랴. 이렇게 과학을 넘어섰기 때문에 더욱 고도로 과학적인 기묘한 부분은 설명이 전혀 안 된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3:14). 안 들리는 사람에게 소리를 설명해봐야 헛일이고 안 보이는 사람에게 색깔을 설명해봐야 헛일이다. 더구나 이 태초 아담의 자기분열로부터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 분열되고 분화돼온 정신의 꽉막힌 일방성일까. 오죽하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하셨을까. 그러니 시인이든 예언자든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싫어할 소리를 해야만 하는 운명은 일반이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시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3.

 

교회의 예배당에서 밤에 열린 참으로 소박한 기념회였다. 저자이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김남주 시인의 부인이신 박광숙 선생님을 직접 뵙고 책에 공동 사인도 받았다. 김남주 시인의 평전 출판 기념이라면 의당 동료문인들이 대거 참가했어야 했을 텐데. 패널로 참가하신 분들이 생전의 시인을 직접 만나본 분들도 아니었다. 시인의 불멸의 명성을 생각할 때 송구스럽고 아쉬운 일이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의 시인을 향한 뜨거운 애정과 독자들의 존경이,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성서신학자인 J전도사가 김남주의 삶과 시편에서 성서적, 신학적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쁘고 흐뭇했다. (이렇게 좀 즉각적으로 통하는 게 있어야지.)

 

끝나고 뒤풀이를 갔다. 내 차로 조수석에 사모님을 모시고 갔다. 옛날 책에서 읽었던 분을 직접 뵈니 감격이라고 우스갯소리 좀 섞어 말해볼까? 얼마 전 뉴스에 나왔던 아드님의 소식을 물어볼까? 내가 김남주라는 시인에게서 받았던 위로와 용기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릴까? 그러나 왠지 송구스러워 숙맥처럼 머뭇대다 기회를 놓쳤다. 사람들이 간혹 시인이 오늘날의 한심한 꼴을 보지 않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게 도리어 다행이라 말들을 하기도 한다는데… 이해할만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모님은 다행히 얼굴빛이 따뜻하여 짐작에 삶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뭔가 나도 드리고 싶었던 마음 한 조각 결국 못 전한 게 아쉽다. ‘김남주와 나’라고 하고픈 기억의 한 토막.

 

4.

 

모스크바에 유학할 때 일이다. 겨울이었다. 한국 책이 읽고 싶어지면 한국 공보원 도서관에 가 새로 온 읽을 만한 책이 있나 뒤지곤 했다. 그 때 나는 교회에 다시 다니며 오래 방황했던 마음의 상처에 개인적 위로를 삼고 있었다. 그 신앙 덕분에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신경정신과 약도 끊었고 아내도 만났다. 고골 공부를 하려던 애초 계획을 수정해 톨스토이로 주제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건강하고 싶었다. 신앙은 내게 용서와 사랑, 평화와 안전에 대한 개인적 신뢰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날, 눈이 엄청 쌓인 날인데, 책을 빌리러 공보처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찮게도 김남주 시인의 특집이 실린 문학잡지를 발견했다. 근간에 나온 거였는지 좀 묵은 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보처 도서관 구석에서 어느 페이지를 펼쳐 놓고 얼마나 흐느껴 울었던 지. 근무하던 고려인 여자가 와서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프냐고 놀라서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페이지에 실렸던 시는 그의 시비(詩碑)에도 새겨졌다는 <노래>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錄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시인의 부인께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때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를 읽을 때 왜 갑자기 그렇게 설움이 쏟아졌는지. 나는 그가 지금의 세월을 보지 않고 죽어서 다행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왜 그렇게 살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고 있다. 괜찮다. 꼭 그렇게 살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 시는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신동엽, <산에 언덕에>

 

이런 생각을 하려니 지금도 눈물이 쏟아진다. 그래, 꼭 그렇게 살진 못해도 괜찮다. 돌아와 《김남주 평전》을 읽는 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꽃자리의 종횡서해(21)

 

목사와 기자의 러브레터, 가슴 시린 이유는?

 

칼 바르트의 권고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신학 하는 동네에서는 유명한 말이다. 스위스 출신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이 발언은 신학이 추상과 관념의 세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살아 있는 생생한 현실과 만나라는 권고였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신문’이 현실을 바로 보여주는 걸 전제로 한 이야기렷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세상과 맨몸으로 만나서 그 세상에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교회주의에 안주해서 자신을 살찌우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 종교는 예수가 오래 전 말했듯이 ‘맛을 잃은 소금’이리라.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대부분 바로 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그걸로 신도를 모으고 자본의 성채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요즘 신도들은 소금의 짠맛을 싫어한다나 어쩐다나, 하는 핑계를 대면서.

 

부당한 현실과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예언자적 소명을 가진다든가, 십자가로 압축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죽음을 불사하는 격렬한 도전과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 지내려는 의지는 이런 교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에 대해 거론하면, 복음을 세상의 그림자로 가리려 든다고 비난하고 정의를 외치면 그건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쌍심지를 세우고 배척한다.

 

강도의 소굴이 된 한국교회

 

하지만 이런 교회일수록 기회만 생기면 정치적 욕심을 드러내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부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복음의 순결을 가장한 저열한 장사를 하는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향한 예수의 일갈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에 집약된다. 한국교회에는 간판만 교회이고 그 속은 강도의 소굴이 허다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성서와 신문이 하나가 되어 현실을 말하는 기독교가 되라고 촉구했지만, 그러자면 우선 성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바로 서야 한다. 하지만 강도의 소굴에서 성서는 시장에서 영업 활동의 도구로 전락했다. 적지 않은 수의 목사들의 설교는 현실의 기만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른바 성공주의의 마술을 전파한다. 예수는 이런 종교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런 한국 교회의 한복판에서, 당대의 기자와 당대의 목회자가 만났다. 신문장이와 성서 해설자의 조우이자, 두 ‘진지남’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담아낸 고준담론이다. 성품이 진지한 것에 고준담론까지라니 너무 진지해서 숨 막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예술적 영혼의 여유를 가진 이들이다. 둘 다 한때의 문학청년이고(안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만은) 지금껏 그 문학의 숨결을 여전히 섬세하게 지니고 있는 문장가들이니 당연하다.

 

 

 

김인국 신부의 감탄사

 

여전히 청년 같기만 한 60대의 기자와 목사가 서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나이는 목사가 조금 위다. 서로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애정이 듬뿍 담기면서도 오늘의 시대와 교회를 깊이 성찰하는 이 두 사나이의 편지는 살갑기 짝이 없다. 닭살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음성이 낮으면서도 준엄하고 높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 책의 마무리에 글을 올린 김인국 신부는 기자와 목사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읽고 이렇게 감격해한다.

 

편지를 읽는 내내 두 분의 말씀을 숫돌로 삼아서 제 무디고 무디어진 영혼을 새롭게 벼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대화는 판소리 명창과 고수의 호흡처럼 그 노래와 추임새가 척척 감기며 어우러지다가도 어느 대목에서는 ‘어째서 교회가 죄 경영을 일삼는가?’ ‘믿는다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치 시퍼런 칼날이 내 뺨을 스칠 때의 서늘한 감촉처럼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 자체가 한여름의 폭포소리처럼 시원하고 통쾌하였습니다. 어째서 이리도 당연한 물음을 피해가면서 그렇게 어리고 모질게 살았는지 원통할 지경입니다. 번번이 공손하되 단호한 물음이었고 답변 또한 그에 못지않게 선명하고 뚜렷하였습니다. 결코 얼버무리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변증으로 봉합하거나 슬쩍 덮어버리는 재주 따위는 두 분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맨살로 예리한 창끝을 맞받겠다는 듯 성경의 본뜻과 오늘 교회의 삶이 얼마나 지독하게 어긋나 있는지 하나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자신 온 몸으로 못된 세력이 쥐고 있는 현실에 돌진하면서 살아온 김인국 신부의 이 글은 손석춘과 김기석이 나눈 이야기들이 얼마나 이 시대에 절실한 울림을 주고 있는지를 증언해준다. 그에 더해 김인국 신부의 글 솜씨가 이 정도일 줄이야, 새삼 놀랐다. 다음에는 기자, 목사, 신부, 스님 다 나오라고 하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자본의 성채가 된 교회

 

오늘의 교회가 보여주는 실상에 대한 손석춘의 질타는 맵다.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교회가 다수입니다. 김 목사님이 지적했듯이 “목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교회를 성장시키려”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당을 짓고, 많은 땅을 사서 기도원을 짓고, 묘지를 조성하고, 큰 차를 타고 다니고, 기득권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적지 않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김 목사님은 자본의 논리를 비판하는 게 ‘주님의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주님은 자본이 자본을 낳는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계 교회협의회는 부자나라에게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해주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어 간단하지만 명토 박아 쓰셨더군요. “기독교인은 자본의 논리를 내세우는 사회체제에 저항할 책임이 있다.”

 

솔직히 말씀드려 참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목사님도 지적했듯이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본에 종속돼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회에서 언론과 종교는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함에도 언론에 이어 종교마저 빛을 잃고 소금은커녕 되레 썩어가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싸움꾼 예수

 

김기석은 뭐라고 답하는가?

 

기존 질서에 순응할 수 없었다는 측면에서 예수는 타고난 싸움꾼입니다. 모름지기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리 속에 박제화 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살아가신,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삶 속에 끝없이 화육해 들어오는 예수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예수는 점잖은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고통의 한 복판에 서 계셨습니다. 불의한 성전 체제와 싸우고, 비인간화된 삶을 강요하는 현실과 싸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삶의 결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히 구원을 가리키는 기표가 아닙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라는 젊은이의 선연한 핏방울이 아로새겨진 십자가에 던져진 장미꽃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싸움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한사코 그런 유혹을 뿌리칩니다. 미운 놈은 미워하는 게 정의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게 우리의 도덕 감정에도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해서는 정의가 수립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대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기도 하고, 약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기대고 있는 힘은 물리적 힘(force)이 아니라, 내면의 힘(power)이었습니다. 답답하게 여겨질지라도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고독한 두 남자, 그러나 의기투합의 힘

 

긴 인용이 되었지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때로 동의, 때로 반론, 그리고 때로 공분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편지글을 읽다보면 기자와 목사가 아니라 두 문학청년, 또는 두 수도자가 서로 나누는 정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김기석의 어느 날 쓸쓸함에 대한 단상이다.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손 선생님께 이렇게 목사다운 인사를 드리는 게 합당한 일인지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넵니다. 지난 달 잠시 만나 뵙고 돌아오는 길에 효창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비가 내린 후 맑게 갠 하늘빛이 아름다웠고,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살이 싱그러웠습니다. 물기를 머금고 번지는 흙내음도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쓸쓸함이 몰려왔습니다. 왜 착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이토록 어렵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손 선생님의 모습과 음성에 담긴 쓸쓸함과 따뜻함, 그리고 세상의 어둠을 헤쳐 나가느라 겪어낸 시간의 갈피를 언뜻 본 듯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손석춘은 또 어떤가?

 

편지를 쓰는 지금 창밖에선 번개가 번쩍이고 곰비임비 천둥이 칩니다. 제가 글을 쓰는 공간에 지난해 느닷없이 벼락이 때려서일까요. 우르릉 소리가 다가오면 그날 마치 대포알처럼 굉음으로 터졌던 순간이 엄습하며 몸이 저절로 움찔해집니다. 목사님은 편지에서 “어쩌면 지금 하염없이 전국을 적시는 장맛비는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고 쓰셨지요.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비를 좋아해 창가에 의자를 바투 놓고 차창에 부서지는 빗발을 자주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민중의 눈물로 특정지은 경험은 없었습니다. 다만 “세상은 여전히 아프고, 눈물의 강은 우리네 삶을 관통하며 유유히 흘러간다”는 말씀에서 우리 시대를 올곧게 걸어가는 목회자의 고독한 심경을 읽을 수 있었지요.

 

도처에 잠언 같은 문장들과 생각들이 번뜩인다. 생각은 핵심을 날카롭게 뚫고 나가는 칼이나, 말은 우리의 심성을 감싸는 체온이 있다. 이게 바로 오늘의 예수가 보여주는 복음이다. 이게 바로 오늘의 언론이 깨우쳐야 할 철학이다.

 

기자와 목사, 두 바보가 아니라 사실은 두 ‘지혜자’가 들려주는 기쁜 소식이 이 시대에 희망을 길어 올리게 할 것이다. 부디 그 자신이 길 잃은 양이 된 교회가 이로써 일상의 세계에서 복음을 발견하는 길에 눈 뜨기를.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꽃자리의 종횡서해(20)

 

어떤 축복

 

 

옛날 옛날 성인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숲 속에 한 나무꾼과 그의 아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숲 속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매우 행복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자기 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무리 조그만 물건이라도 나누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살아가는 것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저녁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이토록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오두막집에 찾아와 말을 걸었습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입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실 수 없겠소?”

 

나무꾼의 아내는 자기가 먹을 것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게 많은 양을 덜어서 할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그녀가 준 음식을 다 먹은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입니다. 과연 생각하던대로 당신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군요. 당신들이 이렇게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니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난 나무꾼의 아내는 무척 기뻐하면서 물었습니다.

 

“그 특별한 은총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지금부터 당신과 당신의 남편이 바라는 것 세 가지는 무엇이든 그대로 실현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나무꾼의 아내는 너무나 기뻐서 소리쳤습니다.

 

“남편이 여기 계셔서 할아버지가 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면!”

 

마지막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나무꾼이 도끼를 손에 든 채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무꾼은 자기가 왜 집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껴안으면서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아내가 세 가지 소원 가운데 하나를 무익하게 허비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들, 얼마나 좋은 것을 이룰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속이 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내에게 대해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어리석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소원 가운데  하나를 그렇게 쓸모없이 낭비해 버리다니, 이제 남은 거라곤 두 가지 밖에 없잖아. 당신 귀가 당나귀 귀만큼 커졌으면 후련하겠소.”

 

나무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의 귀가 자라났습니다. 그러더니 계속 자라서 끝이 뾰족하고 털이 덮인 당나귀 귀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나무꾼의 아내는 손을 들어 자기의 귀를 만져 보고 사태를 짐작했습니다. 그녀는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꾼은 화가 나서 엉겁결에 저지른 자신의 행동이 정말로 부끄럽고 미안해졌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가서 위로했습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무슨 수가 있겠지 울지 말아요.”

 

이때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할아버지가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당신들 둘은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서 결코 다투어 본 일이 없소. 그러나 부자가 될 수도 잇고 권력을 쥘 수도 있다는 생각들이 당신들 두 사람을 변하게 만들었소. 잘 알아 두시오. 당신들에게는 이제 한 가지 소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오. 무엇을 원하시오? 부자? 아름다운 옷? 아니면 하인들? 그도 아니면 권력이오?”

 

나무꾼은 아내를 꼭 껴안고서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제 아내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커지기 전에 누렸었던 행복과 기쁨뿐입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의 당나귀 귀가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왔습니다. 나무꾼과 그의 아내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탐욕과 욕심에 어두웠던 저희들의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온갖 행복에 대해 감사드렸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전래동화’에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꽃자리>의 종횡서해

 

헬조선이라고 하는 우리사회에서 출애굽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출애굽 사건은 부활 사건과 더불어 성경의 핵심이라고 본 저자는 고통을 보시고”,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근심을 아시는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애굽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헬조선이라고 하는 그런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규정한다.

 

“ ‘애굽은 지금 우리 속에도 있고, 우리 세계 속에서 엄연히 존재한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곳에서 애굽은 발생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야말로 애굽의 모형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제시하는 행복의 신기루를 바라보고 걷는 동안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욕망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기에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 가운데 살아남으려면 경쟁의식을 내면화하고 살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이긴 이들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경쟁에서 떠밀린 이들의 가슴에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는다. 안식과 평화를 향한 인류의 오랜 꿈은 퇴색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보편적 격률은 가뭇없이 스러진다.

 

 

 

 

이런 시대에 출애굽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에 머물면서 존엄한 인격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이들의 신음소리를 차마 뿌리치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굽의 전제정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사람들을 찾아오셨고, 그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릇된 권력에 의해 짓눌린 이들 속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셨다.

 

물론 그 길은 붉은색 카펫이 깔린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광야로 이어진 길이었다.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탈출 공동체는 매혹의 옷을 입고 찾아오는 옛 삶을 그리워했다. 광야, 그곳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몸과 마음속에 배어든 노예적 습기習氣와 결별할 것을 요구받는 학교였다.“

 

지금 우리는 “‘애굽가나안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하는 저자는 이 시련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내야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 속에 끊임없이 불안감을 주입함으로 그 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출애굽 사건이 그러하고,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러하다. 불안감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극복된다. 그런 신뢰가 회복될 때 비로소 이웃 사랑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유입된다. ‘너와 나가 서로에게 공속된 존재임을 깨닫고 상대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려 할 때 거룩한 백성이 창조된다.

 

출애굽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오래된 인류의 꿈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꿈은 인류의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로의 애굽으로 상징되는 강고한 벽에 틈을 만들어 역사의 봄을 선구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지은이의 바람처럼 오늘 우리는 이 멋진 일에 부름 받고 있기에 이 책이 역사의 긴 겨울에 지친 누군가에게 봄이 반드시 온다는 메시지로 읽혀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저자의 스승이신 민영진 박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는 추천의 글에서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저자는 출애굽기를 읽는 21세기 독자들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탈출을 감행해야 할 자리라는 것을 발견하도록 촉구한다. 지금의 히브리인들, 지금의 파라오와 그들의 추종세력,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히브리인의 하나님 ”(I AM),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 발전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 악마적 세력을 희화戱畵하여 민중의 희망을 북돋게 하는 해학과 풍자, 열 번씩이나 꼬꾸라지는 우둔한 허상을 비웃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광야 체험에서 배우는 평등주의 경제 질서, 하나님의 통치 윤리인 십계명과 계약법, 탈출 공동체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속시키는 성막/회막 건설, 제사장 나라의 비전, 지도자의 은퇴와 지속되는 하나님의 임재로 새롭게 열리는 역사의 새 마당. 이 모두는 탈출 없이는 불가능한 역사의 진로다. 탈출은 부활로 계속된다.

 

이 책의 구성은 전작인 요한복음 묵상집인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처럼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16편의 출애굽기의 현재적 메시지를 깔면서 그 사이사이에 또 다른 56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현장성을 잃지 않으면서 출애굽기의 주요 주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꽃자리의 종횡서해(19) 

 

평화를 향한 생명 사랑의 노래신학

- 나는 내 숨을 쉰다속의 시선과 만나다 -

 

 

시선에 관하여

 

한 사람 속에 수천의 층이 있듯이 한 권의 책은 저자의 내면세계의 무수한 층들을 담고 있다. 홍순관의 나는 내 숨을 쉰다를 읽으면서 나는 이 책에 담긴 저자 홍순관의 시선들을 곳곳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나의 이 글은 이 책을 통하여 내가 만나게 된 홍순관의 시선(gaze)에 대한 글이다. 한 사람의 시선은 그 사람이 생각하고 꿈꾸는 세계, 타자에 대한 이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신에 대한 이해를 담아낸다고 나는 본다.

 

나는 사람이 각기 지니고 있는 그 시선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시선이란 쓰여 진 언어나 말해지는 언어체계를 넘어서서 그 사람의 이 세계 안에서의 존재방식의 무수한 다층적 결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과 말로 아무리 사랑, 정의, 평화, 또는 타자들과의 상호연관성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타자와 이 세계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그러한 가치들이 녹아있지 않은 경우 그 사람이 강조하는 중요한 가치들의 강조는 종종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 사람들을 만날 때에 늘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중의 하나가 그 사람의 시선이다. 타자를 보는 시선,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을 보는 시선, 먼 타자를 보는 시선,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이들을 보는 시선 그 시선에서 따스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으면, 아무리 정의를 외치고 인권을 외치는 이들이라도 감동을 전하지 못한다. 나는 내 숨을 쉰다가 담고 있는 홍순관의 시선을 통해서 내가 다시 확인하게 되는 점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시선과 목소리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제도화된 종교의 울타리 너머에서 존재한다. 그러한 제도적 울타리 너머에서 그가 그의 시와 목소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제도화된 종교가 아니라, 생명 사랑과 연민의 종교의 모습이다.

 

 

 

 

정의에의 예민성

 

예수가 지닌 독특한 시선은 언제나 중심부만이 아니라 주변부를 본다는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키 작고, 온전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삭개오, 군중들로부터 동떨어져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삭개오를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예수만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 살아가는 삭개오를 본다. 그 예수의 따스한 시선에서 비로소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전적인 변혁의 주체가 된다. 삭개오를 자신의 삶의 변혁의 주체자로 만든 것은 예수의 설교도 아니고 강연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회개하라는 질책도 아니었다. 예수가 한 것은 무엇보다도 따스한 포용의 시선으로 삭개오를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함으로서 삭개오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고귀한 인간으로 대한다.

 

공적인 공간에서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삭개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주는 첫 경험이었을 것이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삭개오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라는 평등과 정의에의 요구였을 것이다. 그 예수의 따스한 시선이 바로 삭개오를 새로운 존재로 변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삭개오를 보는 예수, 바로 홍순관이 바라보는 예수(46)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늘진 곳을 보는 이가 바로 정의와 평화에의 예민성을 체현해 낼 수 있는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한 살의 소년 홍순관의 시선은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권위가 주어진 중심부에 있는 이가 아니라, 오로지 걸레질할 때에만 강단에 올라갈 자격이 주어지는 청소하는 사찰집사의 부인을 향한다(6).

 

교회를 포함해서 다양한 제도들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어떠한 종류의 개혁이며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에 대하여는 별로 설득력 있는 제안을 만나기 어려운 이 시대에, 이렇게 그늘진 곳,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제시하는 개혁이야말로 진정한 정의로운 개혁이 아닌가. 교회의 사찰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있는 사찰집사의 부인, 사찰집사라는 공식적 직함조차 주어지지 않은 비존재로서 살아가는 이 사찰집사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뭉클해 지지 않을 수 없다. 홍순관의 시선은 개혁의 꿈을 지닌 이들은 이렇게 그늘진 곳들을 보면서 그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여야 하는 것임을 전한다.

 

연민의 시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가 부재할 때,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그 자체의 권력 확장과 유지에 연연한 제도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쌀 한 톨에도 천지의 노래가 들어있고, 아이의 웃음소리에 우주가 진동(7)하는 것을 느끼는 그 시선은 사실상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그리고 인류의 생존에 가장 필요조건인 연민의 시선이다. 연민(compassion)이란 함께 고통함(suffer-with)을 의미한다.

 

우리 각자가 만약 쌀 한 톨 에서 천지의 노래를 듣는 섬세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111), 그리고 한 아이의 웃음소리 속에서 우주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그 깊은 마음이 있다면, 평화의 세계를 만드는데 요청되는 그 연민의 시선을 체현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쌀 한 톨이나 아이의 웃음소리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은, 보이는 업적과 개인의 이득이 공공의 선보다 언제나 우선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종교를 끄집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다.

 

기복 신앙의 예식으로서의 기도는 지극히 이기적인 예식이 되어버렸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입시를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하는 기도들에는 정작 예수 믿음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부재하다. 그러한 자본주의화 된 이기적 기도들에는 타자의 아픔도,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대한 고뇌도, 지금보다 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도 들어가 있지 않다.

 

홍순관은 이러한 기복 신앙의 예식이 되어버린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의 기도에는 지구와 우주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분리되지 않고, 가족과 이웃, 교회와 세상이 따로 분리되지 않으며, 지구의 이편과 저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극한 연민을 품고(123) 기도할 뿐이다. 기도는 이 세상과 타자들에 대한 연민을 품어내고, 자기를 돌아보는 신과의 대화의 시간이며 비판적인 자기 성찰의 예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홍순관은 절절하게 외친다.

 

 

 

 

 

종교의 진리가 아닌 생명 사랑의 진리

 

종교와 세계를 성과 속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 근대의 산물이다. 성서는 신이 이 세계를 사랑하므로 인간 속으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즉 신의 성육사건은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의 세계를 홀연히 넘어서는 사건인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서 종교적 교리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사랑이 바로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의 경험을 홍순관은 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새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12)이라고 전한다. 종교가 아니라 생명사랑이 바로 예수의 진리임을 홍순관은 자신의 노래를 통해서 이 세계에 선포하는 것이다. 천국의 자유가 춤추(17)는 것을 온 존재로 느끼고 노래하는 이들이 바로 진정한 종교인이다.

 

그 종교 속의 신은 이 땅을 살아가는 생명들과 상관없이 역사 저편에서 저 멀리에 있는 전적 타자로서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의 (12)이며,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17) 함께 땀 흘리는 존재이다. 또한 그 신은 그 어떠한 근거에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끌어안고 포용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이다(18). 홍순관이 노래하는 신은 더는 가부장제적인 신이 아니며,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복적인 왕과 같은 신이 아니다. 홍순관의 신은 우리와 함께 춤추고(19), 큰 바다와 같이 우리를 끌어안고(25),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는 포용과 연민의 신, 바로 생명사랑의 진리의 현현으로서의 신이다.

 

탈권력의 종교

 

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종류의 권력을 지니게 되면, 그 권력의 확장과 유지를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있다. 점점 커지는 교회건물, 교인 수를 늘이기 위한 전문적인 인력관리, 목회자들의 재정적 집착과 욕구는 모두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권력종교의 모습이다. 홍순관은 이러한 권력종교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종교의 탈권력화를 노래한다. 냇물이 높은 곳으로 가는 일은 없다(23)냇물과 같은 예수의 길(24)을 따라야 한다고 외친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그 심오한 의미가 교리화된 틀 속에서 그만 상실된다. 예수가 따르라고 한 길은 사실상 단순한 종교의 길이 아니라 소외되고 아픈 이들과 함께하는 길이라는 것을 홍순관은 상기시킨다. 윤동주의 십자가(33), 산 밑의 예수(44), 고립된 낮은 곳의 예수는 냄새나는 일상, 즉 추함, 가난함, 소외가 엉클어진 일상의 세계 바로 그곳에 서 있는 예수(46)이다. 현대의 교회들이 이러한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모든 종류의 권력들을 단호히 내려놓는 탈권력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생명 사랑으로서의 종교

 

홍순관은 종교의 본질이란 바로 생명 사랑에 있음을 절절히 노래한다. 무수한 어이없는 죽음들,기술문명과 발전의 이름으로 무수하게 죽어가는 생명들에 대하여 아파하는 그는, 꽃에 바람이 불어도 그 향기 없고, 들판에 무명초는 춤추지 않는다(39)고 아파한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늘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안식과 휴식을 주는 평화의 공간을 마련하는 나무(22)를 바라보는 그는 진정한 평화란 다양한 모습의 생명들에 대한 지순한 사랑이 지닐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란 결국 이러한 생명사랑의 공동체이며,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구체적인 생명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삶임을 홍순관은 상기시킨다.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누구나 우러러보는 산꼭대기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인 산 밑에서살겠다고(44) 다짐하는 그는, 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의 절절한 노래로 제시한다. 평화를 향한 삶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육화되어야 한다. 즉 평화 자체가 그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사랑에의 열정, 헌신, 그리고 실천에서 비로소 평화가 공기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간혹 평화가 아닌 평화에 대한 일자체가 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홍순관은 지적한다(130). 평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살아가는 것, 즉 생명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살아내는 것, 그 길에 자연스럽게 평화가 있는 것이다.

 

배부르고 성공하고 편하게 지내는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 자살 직전의 사람, 사업 망한 사람(136)에게 들리는 노래란 어떤 노래일까. 생명이 소중함에 대한 절절함, 가식 없는 진정한 가슴속의 노래, 이러한 노래야말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절절하게 다가가는 노래일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의원이 필요 없고 아픈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한 예수의 말처럼, 홍순관의 노래는 실패하고 아픈 이들에게 다가간다. 새로운 희망과 삶의 에너지를 가지고 그 아프고 실패한 사람들의 손을 가만히 따스하게 잡아주는 희망과 진정한 치유의 노래로 다가가는 것이다.

 

신학의 부재, 철학의 부재, 그리고 상투성과 경박성이 난무하는 노래들이 복음성가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인들로부터 사유와 고민하는 공간들을 박탈하고 있다. 그 복음성가의 가사들은 복음의 지나친 단순화를 반복하면서 사유하는 종교인들을 배제시킨다. 교회들에서 불리는 찬송가나 복음성가들의 가사들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아무런 연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의, 평등, 평화와 같은 예수에게 중요한 가치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나,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개입이 부재한 가사들을 지닌 노래들이 설사 성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그것이 거룩성을 지닌 성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홍순관의 노랫말이 담고 있는 신학은 이러한 복음의 상투화와 단순화 그리고 왜곡화에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부언할 필요없이, 진정한 노래하기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이의 정신과 영혼과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올 때, 비로소 듣는 이에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진정한 감동을 전한다. 노랫말이 담긴 정신과 철학을 체현하는 노래는 그 노래를 듣는 이들을 단지 즐겁고 흥겹게만 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래들은 깊은 사유의 세계로 초대하는 힘을 지닌다. 나는 홍순관의 노래와 그 노래에 담긴 시들에 나, 타자,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게 하는 철학이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사유의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서 자본주의화 된 이기적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생명 사랑과 평화를 이루는 여정에 서 있는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 나가게 되지 않을까.

 

강남순/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TCU)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꽃자리의 종횡서해(18)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져버린 세상에서

 

 

이름 석 자로도 충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있지요. 그의 이름 속에 그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경우입니다. 제게는 홍순관이라는 이름이 그렇습니다. 이름 뒤에 그 무슨 호칭이나 설명을 따로 붙이지 않아도 이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홍순관이라는 이름 속에는 그가 걷는 길과, 품은 꿈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과, 그러면서도 지금의 자신이 맞는지에 대한 아픈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홍순관이라는 이름 뒤에 집사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집사라는 호칭으로 교회라는 틀 안에 묶어두려는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행여 집사 위에 목사를 두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호칭이라는 것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틀이라 한다면, 집사님이 교회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학생 때부터 교회에서 살고, 금식을 하고,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집사님이 서 있는 바탕은 분명 교회를 향한 애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래된 익숙함보다는 집사님의 바탕을 공감하는 마음이 제가 부르는 집사라는 호칭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 나는 내 숨을 쉰다를 읽으며, 잘 알고 있다 싶은 사람의 새로운 면을 대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처음으로 목욕탕에 같이 들어가 목욕을 하며 지낼 땐 몰랐던 아름다운 몸매와 근육, 생각지도 못했던 상처들을 처음으로 대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집사님이 부른 25개의 노래에 대한 짤막한 단상은 분명 글이었지만 한 편 한 편의 조각 작품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사님이 직접 쓴 노랫말이 그랬고, 노랫말에 대한 설명이 그랬습니다. 집사님은 언어로 조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가사든 곡이든 허투루 노래를 만들지 않는 장인 정신이 있기에 내겐 언어가 노래보다 앞서죠!’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그것이 신앙이든 일상이든 군더더기를 모두 버리고 나면 꼭 필요한 것만 남게 되겠지요. 그런 점에서 집사님은 풍경보다는 여백을, 소리보다는 침묵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의 노래가 향하고 있는 시선도 다시 한 번 새로웠습니다. <새의 날개>처럼 자유를 꿈꾸기도 하고, 하나님과 하나 된 교회 이웃과 하나 된 교회 말씀과 하나 된 신자가 추는 <천국의 춤>을 꿈꾸기도 하고, 기도할 때 큰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마침내 기도가 되는 <나무>를 꿈꾸기도 하고, <은혜의 강가로> 나가 하나님의 원 안에 머무는 시간을 꿈꾸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윤동주의 시선을 따르기도 하고,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되었을지 <어떤 바람>을 바라보기도 하고,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며 높은 곳이 아니라 <산 밑으로> 향하기도 하고, 하늘나라를 <여행> 하기 위해 일부러 발아래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기에 <민들레 날고>처럼 다른 이에게서 빌린 옷이 아니라 내 옷을 입고 <나는 내 숨을 쉰다>고 노래하며, 온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는 <쌀 한 톨의 무게>를 재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천진함을 따라가는 <저 아이 좀 봐>는 지극함을 향하고 있고, 아흔아홉 번 정신대할머니들의 눈물을 마주한 뒤에야 부를 수 있었던 <대지의 눈물>은 뻔뻔한 이들이 어물쩍 덮으려 하는 질곡의 골짜기를 보듬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집사님의 노래와 노랫말에 관한 단상을 두고 노래신학이라 했습니다. 억지와는 거리가 먼 집사님의 성품을 잘 아는 저에게는 그 말이 외로운 항변처럼 들립니다. 신학은 결코 신학자만의 점유물일 수 없어 누구라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신앙과 접목시킬 수 있고, 그것이 신학을 윤택하고 풍성하게 하는 길이라 여깁니다. 그런 점에서 집사님이 노래를 통해 길어낸 사유는 신학의 큰 자양분이 되겠지요.

 

굳이 드러내지 않음으로 마땅히 드러낼 것을 드러내는 집사님의 삶과 노래를 두고 볼 때 노래신학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도 흔하지도 않은 노래를 별난 것으로 밖의 것으로 가벼이 함부로 대하는 풍조 앞에서의 조용한 분노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집사님, 너무 외로워하지는 마세요. 작고 나직한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세상이 온다면 분명 집사님의 노래는 신학이라는 울타리까지 넘어서는 하나의 강으로 자리매김이 될 테니까요.

 

저는 그동안 부른 노래에 관한 집사님의 글(특히 ’)도 좋았지만 지강유철 씨와 9시간 넘게 나눈 속 깊은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갑니다. 그야말로 집사님의 속살을 대하는 듯싶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꾸밈이 없지만 더욱 집사님의 민낯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깜짝 놀란 대목이 몇 군데 있습니다. 당대를 주름잡던 레코드 사장 앞에서 70곡의 노래를 연속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는 놀람보다는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개런티가 있는 초청보다는 노 개런티의 초청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어렴풋 짐작했던 일이었습니다. 저 또한 원고료와 상관없이 글을 쓰는 일이 적지 않아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게도 됩니다.

 

책을 통해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집사님이 노래를 택한 이유였습니다. 미술, 서예, 조각, 무대미술 등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관심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다 싶으니까요.

 

노래를 좋아하고 잘해서 노래의 길을 걷는 것 아닐까, 막연하게 가졌던 생각은 책을 읽으며 보기 좋게 깨어졌습니다. 노래를 택한 이유를 집사님은 단언을 하듯 교회개혁 때문이라 했지요. 오랫동안 꿈꿔오며 준비해온 이탈리아 국립미술원 까라라 아카데미유학을 포기할 만큼 집사님에게 교회는 너무도 매력적인 곳이라 했습니다. “내겐 가수로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것보다도 교회개혁이, 세상개혁이 더 중요했어요.”라고도 했습니다.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꿈을 접었던 이유가 교회개혁을 위해서였고, 교회개혁을 위해 선택한 것이 노래였다는 말은 얼마나 놀랍고 생경스럽게 다가오는지요. 목회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만한 고민과 결단이 있는 것인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다른 가능성을 접고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노래를 택했다는 집사님의 선택은 비장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집사님이 걷는 길을 생각하면 외로움, 무모함, 어리석음, 외고집 등이 떠오릅니다. 어찌 노래가 교회개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 싶고, 그렇게 생각했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 생각을 삶으로 밀고 나갈 엄두를 냈을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국민들 중 10.2%만이 기독교인을 신뢰한다는, 결국은 기독교인마저도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얼마 전 보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나의 성소에서 멀리 떠나가게 하고 있다”(에스겔 8:6) 하신 주님의 탄식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주님을 주님의 성소에서 멀리 떠나가게 한 것은 주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담벽을 헐고 보니 그 안에서 역겹고 가증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요. ‘벽을 헐고 보니말이지요. 70명의 장로들이 우상의 방을 만들어 놓고 우상에게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상의 방 벽에는 온갖 벌레와 불결한 짐승 등 우상들이 사방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말입니다. 생선가시 목에 걸리듯 담벽을 허니’ ‘어둠 속에서라는 말이 걸립니다. 여인들은 바벨론의 농경신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을 하고 있었고, 주님을 등지고 동쪽의 태양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리게 하고, 표가 없는 이들을 가차 없이 치라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고 두려운 것은 심판을 명하시며 우선 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에스겔 9:6)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피할 길 없는 무서운 심판을 죄가 가득한 아골 골짜기에서가 아니라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명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개혁을 위해 집사님이 택한 도구가 노래라 했을 때 저는 그것을 결코 유약한 선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노래가 우리가 잃어버린 염치를 되찾게 해주는 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집사님이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곪고 병들고 비뚤어진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며 슬퍼하고 탄식하는 일들이 나타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집사님의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집사님의 책 발간을 축하하며 열린 북 콘서트 자리, 집사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야기 손님들이 저마다 집사님에 대한 공감과 격려와 지지의 마음을 쏟아놓았을 때, 노래를 부르러 나온 집사님은 그 시간을 두고 견디기 힘든 고문이라 했지요. 모두들 웃었지만 마음은 아팠습니다. 착한 사람 어깨에 무거운 바윗돌을 얹고 있다고, 이야기 손님 중의 하나였던 저 또한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낙숫물이 섬돌을 뚫는다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매번 산산이 깨어져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을 견딘 결과가 섬돌을 뚫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 모든 과정을 당연한 듯 견디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말 중에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리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목회할 자리가 없다고 걱정하는 신학교 후배들에게 정말로 없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이 책에서 인용한 밴드 플레밍 유스의 <Ark Two>에 실린 ‘The Planets’에 나오는 노랫말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린 때의 진상이란 이렇다.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아무 것이나 무엇이든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진 세상의 참 모습은 아무 것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아무렇게나 함부로 쉽게 믿는 것,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왜 가벼운 것인지를 아프게 돌아보게 됩니다. 아무 것이나 무엇이든 믿는,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한없이 가벼워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싶습니다.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린 시대, 그럴수록 한 구절 한 구절 정직한 마음을 담아 부르는 집사님의 노래가 더욱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그래야 주변에서 일어나는 역겨운 일을 두고 슬퍼하고 신음하는 일이 가능하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소에서부터 쫓겨나고 있는 이 시대, 집사님의 노래가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모시옷을 입고 허리에 먹통을 찬 서기관의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집사님의 마음에 또 하나의 바윗돌을 얹는 일이 아니기를 빕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