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5


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사무엘상 28:3-7


사울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어 ‘인간’(人間)은 사람 ‘인’ 자에 사이 ‘간’ 자를 씁니다. 사람은 곧 사람 ‘사이’ 곧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뜻이겠습니다. 사람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사울이 누구인지 알려면 그의 외모나 특기나 취미나 취향, 그가 좋아하는 음식 등이 뭔지 아는 걸로는 부족하고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사울이 누군지 알려면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관계는 어땠고 주위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네 번에 걸쳐서 사울 이야기라는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울이 맺은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를 마감하는 마지막 글로서 하느님이라는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로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극의 흐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정도이지만 하느님은 연극을 이끌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늘은 숨은 주인공인 하느님을 살펴볼 터인데 다시 한 번 얘기하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사울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곧 ‘캐릭터’로서의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사람이 알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깊고 너무 넓고 신비한 분이기에 하느님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하느님은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방법이 성서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물론 성서가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서 이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성서가 하느님은 아는 유일한 길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길임에는 분명합니다.


성서가 하느님을 보여주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런 분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사건’이나 ‘이야기’, 또는 시적인 ‘은유’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줍니다. 이렇듯 성서는 직설적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진 않으므로 우리는 성서를 ‘해석’이라는 작업을 해가며 읽어야 합니다. 예컨대 성서가 하느님을 ‘질투’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글자 그대로 하느님이 사람처럼 질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하느님의 특정한 성격을 가리키는 ‘시어’로 알아듣고 뭘 지시하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또 성서가 하느님이 ‘오른팔을 펼쳐서 구원했다’고 말하면 ‘그럼 왼팔은 뭐에 쓰나?’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지 말고 그 행위가 뭘 가리키는 ‘지시어’인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만 바라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사울 이야기에서 보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하느님은 그 이야기를 만들어서 후대에 전한 사람들에 의해 ‘해석된’ 하느님입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새롭게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거나 문제제기할 때 우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문제제기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회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통해서 하느님께 왕을 요구한 이유는 첫째로 외국,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고, 둘째로 전쟁이 없을 때도 지속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리더가 필요했다는 데 있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요구는 이해할만 합니다.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야훼의 궤를 갖고 나갔지만 패배했습니다. 게다가 야훼의 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사무엘과 하느님은 이와 같은 백성의 요구를 각각 자신을 버린 걸로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은 백성이 자기를 버린 걸로 이해하고 마음 상한 사무엘에게 그들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느님은 백성들이 당신을 버렸다고 여겼으면서도 그들을 벌하기는커녕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는지 궁금합니다. 왕을 달라는 요구가 다른 신을 섬기겠다는 뜻은 아니므로 용납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걸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다른 신을 섬기겠다거나 우상을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느님은 사울을 택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셨습니다. 성서는 그 얘기를 두 번이나 하는데 그래서 ‘하느님도 후회라는 걸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에는 여기 말고도 하느님의 후회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여럿 더 있습니다. 십계명에 따르면 하느님은 ‘질투’도 하신다는데 그에 비하면 ‘후회’ 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후회하신다는 데 충격 받을 사람도 있겠지요.


이에 못지않게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의 후회가 정당한가, 사울은 하느님을 후회하게 할 정도로 못된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제사를 집전한 행위로 하느님을 후회하게 만들었고, 헤렘의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말대로 이레 동안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기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이게 문제였다고 해도 그 책임은 두 사람이 나눠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렘의 규율을 어긴 것도 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지난 번에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게 사울의 책임이라고 해도 거기에 대한 징벌의 강도가 적절한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잘못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징벌이 과중하다는 겁니다. 물론 사울의 불행에는 그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걸 부인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된 후로 다윗을 죽이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광기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는 뭔가에 쫓기듯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거란 얘기입니다.


성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느님은 사울을 버렸을까요? 왜 하느님은 자신의 선택을 물러가면서 사울을 버려야 했을까요? 사울 이야기는 두 가지 이유를 들지만 그것만으로는 얼른 수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서도 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만족스런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서도 답을 찾느라고 고민했다거나 성서도 답을 모르는 것 같다는 말에 어리둥절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를 모독한다고 분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서는 사람의 책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이 써서 사람이 전달한 사람의 책입니다. 문서로서의 성서는 사람이 써서 사람이 후대에 물려준 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사람의 책인 성서는 우리처럼 하느님이 누군지, 하느님의 뜻이 뭔지 알려고 갖은 고민과 온갖 실험을 하는 책입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 눈에는 왜 하느님이 사울을 버렸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성서가 확실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저 자기가 찾아낸 답의 실마리를 후대에게 남겨놓는 데 만족했던 걸로 보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두 가지 ‘불순종’이 그의 버림받음에 대한 만족스런 답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성서도 동의한다고 보입니다. 그게 정답이라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불법적으로 먹은 다윗도 거기에 맞는 벌을 받았어야 했는데 안 그랬으니 말입니다. 다윗이 벌을 받아 불행해지기는커녕 그에게 속아서 빵을 내준 놉의 제사장들만 사울의 손에 죽지 않았습니까. 사울과 다윗 중에 누구 잘못이 더 위중한지는 판단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쪽은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고 다른 쪽은 그냥 넘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사울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두 가지 면이 드러나는데 둘 다 사울이 왜 하느님에게 버림 받았나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첫째, 사울은 ‘희생양’(scapegoat)이었다는 것이고 둘째, 하느님은 사울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희생양’ 제도는 이스라엘에게 익숙합니다. 제사제도, 특히 속죄제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그 벌은 죄지은 당사자가 받아야 하지만 대신 제물로 양을 죽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가 속죄양 제도입니다. 이 이론은 르네 지라르(Rene Girard)라는 프랑스 사상가가 발전시켰고 성서학자들도 제사제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싫어서 왕을 요구했고 그것은 하느님을 버린 행위라도 이해합니다. 백성의 요구는 하느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므로 하느님 입장에서는 중대한 일탈이요 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변상황은 인간인 왕을 필요로 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현실 이치에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한 책임과 처벌을 누군가에게 부과했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사울이라는 겁니다. 사울이 이른바 ‘속죄양’이 됐던 겁니다.


속죄양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처벌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속죄양은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저지른 집단적인 죄에 대해서 공동체를 대신해서 벌을 받습니다. 사울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은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에 대한 처벌을 그가 받았던 겁니다. 사울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이 속죄양 이론을 의식적으로 그에게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벌어집니다.


둘째는, 하느님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점이 사울의 불행을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고 여기는데 사실 저는 이게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윗과 관련해서 여러 번 인용한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야훼는 다윗과 사랑에 빠진 신이다.”(Yahweh is the God who fell in love with David). 물론 이 말도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집니다. 그처럼 야훼가 일방적으로 다윗 편을 든 것은 그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란 겁니다. 곧 야훼가 다윗을 선호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편을 든 것은 사랑에 빠져서 한 것이므로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버린 것도 그에게 결격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윗을 사랑해서 그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울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정말 하느님이 이런 분일까요? 누군가를 사랑해서 다른 누군가를 버리는 분일까요? 아무도 모르지요.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니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울 이야기가 하느님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 대해 이런 느낌이 가진 적 없습니까? 하느님이 나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해서 내가 소외된다는 느낌 말입니다.


남을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다윗처럼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랑을 남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가 쯧쯧…’ 하면서 혀를 찰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남달리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딱 남들만큼만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남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저처럼 다른 사람만큼만 사랑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그도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을 남보다 덜 받거나 전혀 못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여러분 각자가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사울의 관점에서 이 얘기를 읽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분명 세 부류 중에 첫 번째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나 셋째였겠지요. 그러면 거기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울처럼 살아야 할까요? 사울처럼 다윗을 질투하면서 그를 죽이는 데 일생을 허비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자족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보다 덜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살면 안 되는 겁니까. 이게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산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은총을 나누면서 그들이 겪는 고민과 고난을 떠안으면서 살아가는 게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 아닌가 말입니다.


저는 사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 반비례해서 하느님의 편애를 받았던 다윗에게는 반감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제가 그의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울의 삶의 태도도 긍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데서 오는 좌절감과 대신 선택된 다윗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는 인생을 망쳤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영영 버리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의 생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섭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버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왕좌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데 불과합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닫는 점이 바로 이겁니다. 사울이 택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길도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영영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지라도 우리가 받은 은총을 우리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정도로는 넉넉하게 받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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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4


어쩌다 두 용사가 쓰러졌는가!

사무엘하 1:17-27


사울은 실패한 삶을 살았을까?

지난 번 글에서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을 개략적으로나 살펴봤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고 대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로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에 시달려 강박증 비슷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소개해서 다윗은 사울의 신하가 됐는데 바로 이 다윗이 사울 대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였습니다. 사울을 괴롭힌 강박증의 원인이 다윗이었는데 수금을 연주해서 그를 강박증에서 치료해준 사람도 다윗이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그 이후 얘기는 지난 글에서 얘기했으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누가 누구를 쫓는지 헛갈릴 정도로 서로 쫓고 쫓기는 삶을 살다가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가 자기 아들들이 죽고 자신도 부상당하자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9-27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지어 부른 조가(弔歌)입니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이번에는 사울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다음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여기서 하느님을 얘기할 때 그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character)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교리에서 말하는 하느님, 예컨대 전지전능하고(omnipotent) 무소부재한(omnipresent) 하느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연극에 비유하면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를 그리는 연극의 등장인물 중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이란 등장인물은 실제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하지요. 하지만 연극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등장인물 중 하나이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란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를 통해서 아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연극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하느님은 사울을 선택한 걸 후회하는 분입니다.


사울의 삶은 실패한 삶일까요? 질문이 단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사울은 실패한 사람입니까? 그의 삶을 성공한 삶으로 볼 수는 없겠습니다. 한 개인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는 없겠습니다. 또 성공한 삶은 무엇이고 실패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서가 그와 대립했던 다윗에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사울의 삶을 성공적이고 본받을만한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왜 실패했을까요? 그는 한 개인으로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왕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었기에 실패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가 처한 환경이나 외부에서 가해진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스로의 결함 때문입니까, 아니면 외적 요인 때문입니까? 둘 다 틀렸다는 양비론이나 둘 다 옳다는 양시론 모두 비겁하긴 하지만 사울의 경우에는 두 가지 요인이 모두 작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다윗에게는 ‘섭리’(providence)였던 야훼가 사울에게는 운명(fate)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짧은 문장은 얽히고설킨 두 사람의 생을 잘 요약했다고 보입니다.



그게 모두 사울 탓일까?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이기 어렵습니다. ‘나’라는 이성을 가진 주체가 사고하고 평가하고 행동하는데 어떻게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객관적’이라는 말이 당사자 아닌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평가한다는 뜻이라면 의미가 있을 겁니다. 저는 사울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읽을 생각도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사울 편에 서서, 곧 가급적이면 사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서 읽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사울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왔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는 다윗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인 관점에서 쓰였습니다. 이 입장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암하고 사울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잘못된 일의 책임을 모두 사울에게 전가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을 가급적 공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사울 편을 들려고 애를 써도 이미 사무엘과 다윗 편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1등인 다윗만 기억하고 추앙하는 현실에서 1등 아닌 사람도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사에 소홀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무엘, 또는 그가 대리한 하느님의 명령을 두 번 어겼는데 둘 다 제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에 사울만 탓하는 것은 공정치 않아 보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했는데 정작 그는 이레가 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인들이 속속 탈영하므로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는데 그걸 사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이렛날에는 왔어야 하지 않았나 말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 몰살하라는 ‘헤렘의 규율’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원해서 그랬다는 사울의 말이 거짓핑계가 아니라면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리품을 챙겨가자는 백성들의 요구를 사울이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백성들이 사무엘이 사울에게 ‘헤렘의 규율’을 지키라고 명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모든 일이 사울의 잘못이고 책임이라고 해도 그가 저지른 잘못과 그에게 부과된 처벌에 균형이 맞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제사장도 아니면서, 그것도 부정한 몸으로 먹었습니다. 이 역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였지만 그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의 예로 이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다윗의 행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윗 시대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먹는 행위는 명백히 계명 위반으로서 무거운 처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헤렘의 규율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 규율은 영구히 지켜진 ‘철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전리품을 챙겨서 부하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규율이 사울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하게 적용됐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사울에게 너무 관대한 걸까요? 다윗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합니까?


사울의 질투와 하느님의 편애

사울의 생을 비극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요인은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였습니다. 자기 대신 다윗이 왕으로 선택됐음을 알게 된 후부터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의 포로가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윗은 사울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울이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우선 능력은 사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이 월등했습니다. 사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대중적 인기도 다윗에 비하면 사울이 크게 뒤처졌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면서 여인들이 환호했을 때 사울은 질투심에 불타서 다윗을 죽일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울보다 능력도 뛰어나고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던 겁니다. 사울이 질투심을 품지 않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은 하느님이 다윗을 편애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아닌 하느님이 궁극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다윗을 더 사랑해서 자기를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질투했던 겁니다. 그러니 그는 다윗과 다투지 말고 다윗을 편애해서 자기를 버린 하느님에게 따졌어야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니 스스로 제사를 집전한 후 사울은 사무엘에게 심하게 꾸중 들었습니다. 이때 사울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는 얘기를 사무엘에게 듣습니다. 그 말은 들은 사울은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 말이 이후 그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선 사울이 사무엘의 말을 믿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을 리 없다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선언을 들은 다음에도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했으니 말입니다. 요나단의 기습공격이 효과적이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블레셋 군대가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했는데 하느님이 전투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습니까. 그러니 사울은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헤렘의 규율을 어기고도 그는 한 동안 살아있었습니다. 사무엘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을 정도로 간절했지만 그 후로도 한 동안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으니 확신과 의심 사이를 오갔을 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볼 수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 선언을 들은 후로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추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인기 높은 부하에 대한 질투심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상으로 커졌습니다. 점점 더 집요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대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누군지 모르다가 다윗임을 차차 알게 되면서 그는 어떻게 처신했어야 할까요? “이제는 네가 나대신 왕 노릇해라.”라고 선뜻 왕위를 넘겨줬어야 할까요?


만일 내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자기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사울은 다른 종류의 생을 살았을까?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실패자가 됐던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 각자 나름의 답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게 정답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버림은 경험이 있습니까? 엉뚱한 질문인가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면 왜 하느님을 예배하겠느냐고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많습니다. 뭐 큰 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별 것 아닌 것을 바랬는데, 그걸 들어주신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도 외면하실 때는 속상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을 끓이고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하,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구나.’ 하느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실 리도 없지만 반대로 내 관심과 기도에 관심도 없는 분도 아니라고 믿게 됐습니다. 다만 인생은 그런 거다, 나는 바라고 기도하지만, 그리고 하느님도 내가 뭘 바라는지 기도를 들어 아시지만 언제나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응답하시지는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거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런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이 소유한 왕권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입니다. 그의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에서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왕이 되는 걸 원치 않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에 대한 사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착이 생겼습니다. 그럴 놓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선택된 다윗을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에게서 왕권을 빼앗겠다는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왕권은 본래 사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원치도 않았고요. 그럼 그는 왜 본래 자기 것도 아닌 왕권을 그토록 내놓지 않으려 했을까요?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본래 자기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울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붙잡고 있으려다가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반면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는 사무엘에게서 자기가 사울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리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가 사무엘의 말을 어느 정도 신뢰했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윗은 자기에게 선물로 주어진 왕위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실현해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윗의 성품을 별로 좋게 보지 않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런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왕권은 사울에게도 다윗에게도 하나의 권리요 축복이자 동시에 의무요 미션이었습니다. 사울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왕의 의무와 미션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물론 그걸 모두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라는 연극에서 무대 위에 등장하지는 않고 기껏해야 목소리로만 존재하지만 그 어떤 배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울의 실패는 이런 하느님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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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3


주의 영은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오다

사무엘상 16:14-23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

오늘 설교는 사울 왕 이야기 세 번째입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이 등장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누차 얘기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에 대해 얘기했으니 오늘은 그 이후에 사울의 생이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은 내키지 않지만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지도자로서 왕을 원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백성들이 그에게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이 대리한 하느님과의 관계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은 두 번 큰 갈등을 겪습니다. 블레셋과 전쟁했을 때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사울이 직접 제사를 집전했을 때가 첫 번째이고,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했을 때 사무엘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말고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했는데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과 일부 동물을 포로와 전리품으로 가져왔을 때가 두 번째입니다. 이들 사건을 계기로 둘 사이는 틀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울을 대체할 사람으로 다윗을 선택했고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비밀리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이 일이 완수되려면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고지식하고 순진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울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음을 알게 된 후로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성격도 포악해졌습니다. 성서는 그 원인을 “사울에게서는 야훼의 영이 떠나가고 그 대신에 야훼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하고 말합니다. 사울을 괴롭힌 영은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야훼께서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사울을 괴롭힌 자는 궁극적으로 야훼였던 겁니다. 야훼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하려고만 했으면 어렵지 않게 사울을 내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악한 영을 보낸다든지 하는 복잡한 방법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울은 이후 계속해서 야훼가 보낸 악한 영에게 시달립니다. 사울을 괴롭힌 병이 뭔지 상세하게 연구한 학자도 있더군요. 저는 호기심이 일어나서 삼십 쪽 정도의 논문을 읽어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박증’이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불안장애’라고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정신분열’이라고도 주장하는데 논문 저자는 결론적으로 사울의 증상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정보가 부족해서 그의 병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잔뜩 기대하고 열심히 논문을 열심히 읽은 저는 적지 않게 실망했습니다. 논문의 저자는 성서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면 사울의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데 과연 그럴까 싶습니다. 저는 편의상 ‘강박증’으로 부르겠습니다.



수금 타는 소년 다윗과의 만남

사울이 고생하는 걸 보다 못해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소년이 있는데 그를 데려다가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이 사울을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타게 하면 나을 거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궁전에 들어온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에게서 악한 영이 떠나고 그는 제정신이 들었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군인으로 승진시켜서 곁에 두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일입니까. 물론 사울이 겪는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악한 영을 보낸 하느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해서 왕이 될 거란 사실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다윗 아닙니까! 다윗만이 사울을 강박증에서 해방시켰다는데 바로 그가 사울을 괴롭히는 강박증의 원인이었다니 말입니다.


훗날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함으로써 사울을 능가하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 여인들이 춤추며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했다는데 이것 역시 사울의 강박증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겠다는 의도를 처음 드러냈을 때가 이때였습니다. 사울은 수금 타던 다윗에게 두 번 창을 던져 죽이려 했고 이후로도 집요하게 그를 추격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배신도 사울의 강박증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는 블레셋 군인 1백 명을 죽여 그들의 양피를 가져오면 다윗에게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그를 죽이려는 미끼였습니다. 블레셋 군인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다윗은 처음엔 사양했지만 왠지 나중에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블레셋 군인 2백 명의 양피를 가져옴으로써 그의 사위가 됩니다. 하지만 장인, 사위가 된 두 사람은 사이가 나날이 나빠졌습니다. 사울은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미갈은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다윗을 탈출시킵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도 다윗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구약성서가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고 밝힌 경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둘의 사랑은 달콤했을지 모르지만(하지만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딸이 자기를 배신한 셈입니다. 아들 요나단은 또 어땠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은 요즘 학자들이 동성애 관계일 수도 있다고 추측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요나단은 왕위 계승의 상징인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넘겨줬을 정도로 다윗을 아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다윗을 위해 아버지 사울과 갈등을 빚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확인한 후 그의 도움을 받아 사울의 궁에서 탈출해서 방랑자 신세가 됩니다.


강박에 쫓기는 사울

사울 입장에서는 사무엘에게 시달림당하는 것도 벅찬데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측근들까지 자기를 배신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요나단과 미갈뿐 아니라 측근 신하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호통 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베냐민 사람들아, 똑똑히 들어라. 이새의 아들(다윗)이 너희 모두에게 밭과 포도원을 나누어 주고 너희를 모두 천부장이나 백부장으로 삼을 줄 아느냐? 그래서 너희가 모두 나를 뒤엎으려고 음모를 꾸몄더냐?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을 때에도 그것을 나에게 귀띔해 준 자가 하나도 없었다. 또 내 아들이 오늘 나의 신하 하나를 부추겨서 나를 죽이려고 매복시켰는데도 너희들 가운데는 나를 염려하여 그것을 나에게 미리 귀띔해 준 자가 하나도 없었다.


사울은 점점 더 포악해져갔습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를 피해 도망쳤을 때 놉이란 곳에 사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를 도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 성소를 섬기는 여든다섯 명의 제사장들을 포함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주민들과 동물들까지 모조리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정도면 ‘광기’(狂氣)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과거에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과 동물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사무엘의 말을 안 듣고 아말렉 왕 아각과 일부 동물들을 산채로 잡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긴 헤렘의 규율을 이때라도 지키려 했을까요, 그는 엉뚱한 경우에 그 규율을 지킨 셈입니다.


이 와중에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줬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울이 뒤를 보려고 동굴에 들어왔습니다. 부하들은 하늘이 준 기회라며 사울을 죽이자고 제안했지만 다윗은 하느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면서 그의 겉옷자락만 몰래 잘랐습니다.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음을 사울에게 알린 셈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다윗이 있는 곳을 알고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잡으러 왔을 때인데 그때도 몰래 진지에 숨어들어간 다윗은 잠든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창과 물병만 들고 나왔습니다. 동굴에서 만난 경우는 우연이었지만 이 경우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사울의 진지에 숨어들어간 것인데 왜 그냥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을 것이면 왜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에 들어갔을까요. 두 경우 모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줬음을 사울에게 통보했습니다. 이에 사울은 다시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는 이 맹세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둔 최대 악수(惡手)는 무당을 찾아간 일일 겁니다. 사무엘이 죽은 뒤 다시 한 번 블레셋 군대가 몰려오자 그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야훼께 물었습니다. 이걸 보면 사울은 여전히 야훼를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훼에게 버림받았음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 여부를 야훼에게 물었지만 야훼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야훼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무당을 찾아갑니다. 바로 앞에서 사울은 무당과 박수를 이스라엘에서 모조리 쫓아냈다고 했는데 그래도 어딘가에 숨어있던 무당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청했습니다. 이 대목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울 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좋은 얘기를 듣겠다고 그를 불러달라고 했나 말입니다. 사무엘은 역시 야훼는 사울을 떠나 그와 원수가 됐다고, 왕위를 사울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넘겨줬다고, 또한 사울을 블레셋 사람 손에 넘겨줬으므로 내일이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스올에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충격 받아 졸도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말대로 그는 다음날 길보아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당합니다. 그는 블레셋인에 의해 죽는 걸 수치로 여겼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사울 이야기를 대강만 살펴봤는데 세세하게 읽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내용은 설교에서 다룰 수는 없고 언젠가 사울과 다윗에 관한 책을 쓰게 되면 그때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은 누구입니까?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저자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1백 쪽 내외의 작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 첫 문장을 “예수는 착한 사람이었다.”라고 썼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었을 때 첫 문장에서 멈춰서 한동안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분이었다는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고 명쾌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하고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을 좋은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도 그를 좋은 사람이나 본받을만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의 생은 다윗의 그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사무엘서는 다윗에 대해 드러내놓고 호의적입니다. 그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사울에 대해서는 비호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는 사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서 사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은 확실히 전에 비해 난폭해졌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다윗을 쫓아가서 죽이는 데 전념한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 역시 순수하고 순진하게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자기가 사울 대신 왕이 될 줄 알았고 그래서 계획적으로 사울의 사위가 된 걸로 보입니다. 그 역시 적극적으로 왕위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사울이 강박증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왕위를 지키려 했고 다윗은 냉정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계획적으로 왕좌로 다가갔다는 점일 겁니다. 사울이 탐욕스러웠습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욕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달리 탐욕스러웠다고도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은근하지만 다윗이 더 탐욕스러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성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이 누구를 편애하고 누구를 버리고 누구에게 시큰둥한 게 아니라 각자가 그렇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울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원치 않았는데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그는 남달리 탐욕스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가 겪은 고통은 저지른 잘못에 비해서 도에 지나쳤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컨트롤할 수 없는, 자기보다 엄청나게 큰 힘에 의해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고도 보입니다. 이번 사울에 대한 설교는 사울처럼 하느님에게 버림받았거나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생은 운명적으로 결정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운명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보는 그리스 비극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았고 사람은 그렇게 하느님이 정한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닙니다. 사울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데는 그 자신의 결정도 큰 역할을 했던 겁니다. 이 얘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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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2


그를 택한 걸 후회한다!

사무엘상 15:10-11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기

오늘은 사울 이야기를 갖고 하는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울 이야기 첫 번째 설교에서 저는 다윗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생을 간추려 얘기하고 설교 말미에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걸 후회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고 사실만도 놀라운데 성서는 몇 줄 아래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는 법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를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또 몇 줄 아래서 하느님은 다시금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반복해서 말을 바꾸니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헛갈립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말을 바꾸면 신뢰를 잃고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한국에서 사드(THAAD) 문제에 대해서 한 후보가 말을 바꿨다고 비난받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느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을 비난하듯이 하느님을 비난했다가는 변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입을 닫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하느님이 왜 이래?’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의 주요 맞상대는 사무엘입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 2백년간 이어진 사사시대를 벗어나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고 사울은 첫 왕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를 잇는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요구를 백성들로부터 받습니다. 외적, 특히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전투를 이끌고 지속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자신의 지도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지만 하느님은 백성들은 사무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거부하는 거라며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후 사울이 보여준 태도와 행동을 보면 그는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서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적폐청산’이란 말이 유행합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폐해를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다음 정부는 과거 10년의 적폐를 청소하는 데 임기 대부분을 보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잘 해도 비난과 욕을 먹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행기를 책임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첫 왕 사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사사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세력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모두에게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애를 요약했는데 얼마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한다고 전제하고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울 얘기를 ‘현실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과 사무엘을 비롯해서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고 우리는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단지 그들이 성서에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성서의 등장인물들은 천사가 아닌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도 있고 인간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이기심과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선의(善意)와 이기심이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가 나의 이해(利害)와 어긋날 때 갈등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둘째,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독자가 사건 현장에 주인공들과 같이 있다고 상상하며 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설화자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뭘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를 다 아는 상태에서, 심지어 하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할지도 다 압니다. 소설을 서술하는 관점에 ‘전지적 작가’의 관점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술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사실상 ‘전지적 독자’의 관점에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역사라는 것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보여서 역사의 ‘법칙’까지 운운할 수 있지만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정작 벌어진 결말은 그런 가능성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선을 가급적 버리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주인공 곁에서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 읽자는 얘기입니다.



사무엘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마음이 상했을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하느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였을까요? 그런데 하느님은 백성들이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감히’ 어떻게 하느님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사사로서 누려온 권한을 남에게 넘겨야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사무엘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기꺼이 홀가분하게 자기 권력과 영향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무엘의 경우에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두 감정이 모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반한 데 대한 분노와 자기의 영향력을 잃는다는 불안과 섭섭함이 공존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뜻이 내 이익과 어긋나는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은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이런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느니, 하느님 잘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만사형통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믿고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런 욕망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내 안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성자(聖者)가 아닌 한 이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우선 이런 갈등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갈등은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득도하고 해탈해서 세상 안에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떨어져서 살지 않는 한 이 갈등을 우리는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신앙은 ‘결코’ 우리를 만사형통한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삶은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그것은 대개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서야 가능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생이 만사형통하듯 잘 풀린다면 하느님께 감사하기 전에 혹시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힘들고 괴롭게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욕망을 누르면서 사는 것, 나의 욕망보다 이웃과 더불어 잘 살거나 공동선을 우선하고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런 삶을 즐겁게 만들거나 최소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의 땀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나의 노력이 이웃의 삶을 고양시킨다면 나는 거기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날 수도 있음을 인정, 인식하고 끊임없이 둘을 조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까? 다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의 욕망을 공동선 아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인가, 사무엘의 말인가?

사무엘과 사울이 얽힌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질 세 가지 일을 예언했습니다.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줄 것이라는 것이 첫째이고,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빵 두 덩어리를 줄 것이라는 게 둘째이며, 그 후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날 텐데 사울도 그들처럼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뒤따라 그대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릴 것이니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때에 가서 하셔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예언이 실현된 때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상당하므로 이 예언을 전쟁에 적용하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울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서로 맞서있어서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야훼 하느님이게 드리는 제사를 집전할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이른바 ‘거룩한 전쟁’에서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장 역할을 맡은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이레를 기다렸지만 그래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이렇게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임금님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길갈에서 사무엘은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 자체에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건은 ‘내가 갈 때까지’와 ‘이레 동안’이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가 되기 전에 사무엘에 온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레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좌우간 사울은 이레 동안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자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사무엘은 자기가 한 명령이 모호하다는 걸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무엘과 사울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모호한 명령을 한 사무엘에게도 잘못이 있고 이레를 기다렸다고 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는데 제사를 드린 사울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책임의 크기를 묻자면 사울보다는 사무엘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무엘이 길갈에서 사울에게 명령했을 때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란 언급이 없습니다. 자기의 명령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꾸중할 때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라는 명령은 사무엘의 명령입니까, 하느님의 명령입니까? 혹시 사무엘은 자기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을 혼동하는 게 아닐까요? 독자들은 사울 이야기 전체에서 대체로 사무엘은 옳고 사울은 틀렸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무엘보다는 사울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지만 성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하느님/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느님/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씀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입니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하느님의 말씀인가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얘기는 목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들 아닙니까. 우리 교회 주보표지에 ‘모든 교인’이 목회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자기의 욕망을 다 버리지 못하고 그와 배치되는 사울을 어떻게든 주저앉히려 했던 게 아닐까요. 작은 일을 트집 잡아 그를 꾸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이 제사를 집전한 사울에게 선포한 저주는 도에 지나치게 가혹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왕조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니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사울 이야기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http://fzari.com/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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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상 9:15-17 -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오늘부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하려 합니다. 다섯 번 정도 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구약성서를 갖고 자주 설교할 생각입니다. 올해 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갖고 설교했고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합니다. 분량만 갖고 보면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의 세 배 정도 되므로 구약 대 신약의 설교 비율이 3:1이 돼야겠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이므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 신약성서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시효가 끝난 하느님 말씀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려 하는데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만 살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살았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사울의 일생은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사울의 삶은 다윗 등장 이전과 이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가문의 기스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과 결혼해서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이스보셋이라는 네 명의 아들과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둘째 부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알모니와 브비보셋이란 아들도 얻었습니다. 이런 점들만 보면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당시에는 부인을 여럿 두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이스라엘의 유력한 지도자 사무엘과 만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성서는 사울의 외모를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고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고 했습니다. 이 묘사를 사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모두 데려다 놓고 그와 비교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는 말은 사실묘사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외모가 출중했음을 보여주려는 서술일 텐데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훗날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자를 만나러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이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한 걸 떠올려보면 사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더욱 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야훼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본다는데 웬 외모타령인가 말입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려서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딸려서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귀를 찾으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못 찾아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동행한 종이 가까운 성읍에 ‘하느님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채’가 없다면서 그러기를 망설였는데 마침 종에게 은전 한 푼이 있다고 해서 그걸 갖고 하느님의 사람에게 갑니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한편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하느님에게서 그가 올 거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식탁에 초대해서 잘 대접했습니다. 그는 서른 명 쯤 초대한 식탁에서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요리사에게 특별요리를 해오라고 명하면서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사울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무엘은 특정 부위의 고기를 사울에게 주라고 했을까요? 굳이 그런 것까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훼께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때 제물 전부를 태워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중 기름이 많은 일부분을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삶아서 먹었는데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할당됐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넓적다리 부분을 사울에게 주라고 한 것은 그가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나중에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영도자로 세운 후 두 가지 예언을 한 후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는, 가는 길에 새끼 염소와 빵 덩어리와 포도주를 갖고 하느님을 뵈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사울에게 빵 두 덩이를 줄 것이니 받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일군(一群)의 사람들을 만날 터인데 그때 사울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강하게 내려와서 딴 사람이 돼서 그들처럼 예언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사울은 하느님의 영을 강하게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얘기는 그가 사람의 의도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됐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은 고작 서른 명 정도가 보는 앞에서 이뤄진 사건이었으므로 이를 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사울에 속한 베냐민지파가 뽑혔고 계속 범위를 좁혀나가니 기스의 아들 사울에 뽑혔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사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오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이라는 중책을 맡는 게 두려웠을까요? 그러니까 숨어 있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백성이 대표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왕이 됐습니다. 두 번째 즉위입니다.


이어지는 얘기는 주로 그가 치른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하고 주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무자비한 말로 위협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밭에서 소를 몰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왕이라면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왕이 돼서도 소를 몰고 다녔다니 좀 어이가 없긴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회의 발전 정도가 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울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에 전에 그랬듯이 사울에게 하느님의 영이 세차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분기탱천해서 소 두 마리를 잡아 토막을 내어 각지에 보내서 군사를 모아 암몬 사람들을 살육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냈습니다. 이 일 후에 사무엘은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길갈에 모아서 사울을 다시 한 번 왕으로 세웁니다. 사울은 이로써 세 번째 왕위에 오른 셈인데 무슨 대단한 왕위라고, 밭에서 소를 몰고 다녀야 하는 초라한 자리에 오르는 걸 세 번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그랬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긴 고별사를 합니다. 고별사는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무대에서 퇴장할 때 하는 것인데 사무엘은 고별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이런저런 식으로 간섭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더 많이 간섭하는데 그러려면 왜 고별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에게서 멀어지는 사무엘

그 다음에도 전쟁 얘기가 이어집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이번에는 사울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두 군대가 대치했는데 전력은 블레셋이 훨씬 우세해서 이스라엘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까지 있었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벌이는 게 유리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은 사무엘이 전쟁터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걸 주관할 사무엘이 안 와서 전투를 개시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제사를 주관했는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사울은 사정을 설명했지만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께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에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첫째, 제사를 반드시 사무엘이 주관해야 한다는 명령을 언제 야훼가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앞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명령을 야훼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둘째, 앞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그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넓적다리를 줬는데 그것이 그의 제사장 직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꾸중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지나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서는 이 점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블레셋과의 전투 얘기로 넘어갑니다. 사울 군대는 블레셋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했지만 아들 요나단의 습격작전이 성공해서 승리합니다. 요나단 군사의 습격을 받고 블레셋 군인들이 웬일인지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었다는 겁니다. 성서에서 이런 일은 하느님이 개입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기들끼리 싸우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 말대로 사울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들은 이겼습니다. 이긴 방법도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주는,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이 치른 마지막 전투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경우는 그 이유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그들이 길을 막고 대적했기 때문에 멸절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 어린아이든 여자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다 죽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놀랍게도 이 명령을 내린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하느님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 곧 모조리 죽이라는 ‘헤렘의 규율’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승리한 후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왔고 짐승 중에서도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다가 나중에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저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지요. 또 그는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이미 그대를 버리셨고 그대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소.”라는 최후통첩 성의 말을 했습니다.


후회하는 하느님?

여기까지가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기름 붓는 의식(儀式)은 사무엘이 행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했을 뿐, 궁극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뭘 보고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의 출중한 외모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외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야훼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가 선택됐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왕이 됐습니다. 그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비 뽑혔을 때 짐짝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누군가 그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무엘은 계속해서 그와 대립했습니다.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입장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무엘도 잃어버린 나귀 걱정을 하는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누구에게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온 집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걸고 있는 사무엘과 백성들의 기대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사무엘의 말은 야훼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각과 일부 짐승을 살려두자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하느님은 사울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왕위에 앉힌 걸 후회했다는 겁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하느님이 사울의 배신을 미리 알지 못해서 그를 왕으로 삼을 걸 후회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몇 줄 더 내려가면 사울이 자기에게 심판을 선언한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서 옷자락을 찢어졌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느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에서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는 어느 편을 믿어야 합니까?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혼란에 빠진 독자에게 설화자는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 얘기를 결론짓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야훼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다시금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은 사람과 달라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금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왜 오락가락하는 걸까요? 이 이슈는 좀 더 큰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하느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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