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이 깡패다

분류없음 2015.05.16 18:28

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4)



거룩이 깡패다

 

 

 

얼마전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에게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옹호했던 저의 군 복무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매일아침 성경을 읽는 부시의 판단이 항상 옳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후세인으로부터 고통 받는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경찰인 미국이 나서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여러 게시판에 이런 저의 비장한 입장을 적어 도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 뒤에야 쪽팔림을 알고 다 지우러 다녔는데요. 어딘가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북한미녀로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조명애 씨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조명애의 아름다움 뒤 숨은 음모라는 따위 제목으로 여기저기 게시판을 도배하였죠. 군 생활을 할 때였으니 정훈교육을 잘 받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왜 저렇게 비장했을까요. 저도 10여 년 전 제자신이 이해가 안 됩니다. 천천히 복기해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비장한 근본주의자들과 일베들의 정신구조를 보게 될지.

 

제 입장에 반기를 든 건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공익근무요원이었죠. 애국심이 반분되었기에 저의 거룩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의 의견은 무고한 생명이 너무 많이 죽어간다였습니다. 민간인 사상의 피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전쟁고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감정에 호소하였습니다.

 

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설피 들었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모든 반론을 흡수하고도 남았습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관철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떠올려보세요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은 슬프지만이라고 운을 뗐으나,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라라는 우상신을 버리고, 야훼 하나님을 믿기 바라는 마음에 가슴이 벅찼거든요.

 


'북한 미녀' 조명애. 드라마 <사육신>에서 김종서의 딸로 활약했다.

 

 

세월호 유족들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제가 조명애를 의심했던 사람이라 압니다. 저 역시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압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겠습니다. 304명이 죽었지만 전혀 슬프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유가족이 거룩한 정부를 뒤흔드는 세력으로 보이는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돈 받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말하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네 자식이 죽었어도 그럴 거냐?”라고 반문하곤 하는데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대응입니다. 사실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 죽으면 돈 더 받으려고 시위할 사람들이거나) ‘거룩한 정부를 위해 자식 죽음에 관한 진실쯤은 땅에 묻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투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지하철택배하면서 책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매형이 군대로 보내준 책들이었는데, 그중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간디 자서전(나의진리실험이야기)은 나의 종교관’ ‘신앙관을 송두리째 뒤집었습니다. ‘종교보다, ‘기독교보다, 하나의 생명이 무엇보다 귀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생명보다 귀한 게 없다는 선포가 바로 복음(기쁜 소식)임을 그제야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아무 명분 없는 전쟁이었음이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어린 생명, 연약한 생명이 그렇게 숨을 멈추었습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4080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가늠이 잘 안 되시죠?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잘못 없이 죽었는데요. 몰랐다고요? 알았지만 선교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냥 당연하다 여겼던 겁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만 4080명으로 집계된다.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이다.


 

사람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나요?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있나요? 세월호 엄마 아빠들은, 생명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죄처럼 여겨지는 유족입니다. 자녀들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 살아있는 것조차 죄로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 생명이 귀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글 '잔인한 장면이 필요하다' 참고)

 

워낙 무딘 탓에, 저는 유가족과 얼굴을 대면하고서야 슬픔이 몸으로 전해졌습니다. (욥기의 동화 같은 결말에 문제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자식들은 죽고 없는데, 새 자식이 많이 생겼다고 위로가 된단 말인가?) 그들의 웃음에서도, 이제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전해져 슬펐습니다. 어쩌면 욥의 결핍도 절대 채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불가능하죠. 애통함의 깊이만큼 기쁨도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이내 롤러코스터처럼 추락을 경험하고 아마 그랬겠죠


우리는 무엇으로도, 이들의 움푹 파인 슬픔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벼슬로도, 힘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듯, ‘한 생명’의 공백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월호 이야기를 이제 그만하라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요. 노란리본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는 생명을 모르는 교회가 아닌가요? 복음을 모르는 목사가 아닌가요? ‘거룩이 깡패가 되었습니다. 비장하고 거룩한 것들에 눈이 가리어진 바리새인들처럼 생명을 보지 못하니 주여 주여하지만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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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 <성서조선>, 19403월호 -

해가 바뀌는 즈음이라 그런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음에 가득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가다보니 어느 덧 안산 하늘공원이다. 가늘게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맞으며 홀로 서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 앞에 마주했다. 한 이름, 한 얼굴씩 눈에 새기고 마음에 담으면서 기도하며 한 걸음씩 움직이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안타까움이 클수록 또 분했다. 어이없는 죽음이라서, 너무 어린 죽음이라서, 무엇보다 어른들의 탐욕과 부정직함과 무책임이 빚은 참사라서, 기성세대로서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납덩이처럼 마음을 짓눌렀다.

어느덧 저 아이들은 마치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김교신의 표현이다. 1940, 일제 치하의 막바지에 김교신은 한 일본 무교회 잡지를 읽다가 큰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시즈오카에 사는 한 일본인 쌀장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선인 근로자들이 주요 고객이었는데 주로 일거리를 따라 1~2년씩 거주하다가 타지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들은 모두 마지막 쌀값을 갚지 않고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쌀장수들은 조선인들에게 쌀을 팔 때에는 아예 그것을 계산에 넣고 저울추를 속여서, 그러니까 말을 적게 되어서 쌀을 팔았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었던 그 쌀장수는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어서 그냥 정확하게 되어 쌀을 팔았고, 언제나 마지막 쌀값은 받지 못한 채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인가 놀라 일본에 있는 지인에게 물은 뒤 김교신의 통탄어린 글이 이러하다.

혹시나 하여 쿠와나시 거주의 지우에게 물었더니 바로 그대로이고, 그 중에는 상당한 자산을 만들어 고향에 토지를 살 정도의 여유가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역시 최후의 쌀값은 미불한 채 도망치는 동포가 상당히 많고, 그 때문에 정직한 사람끼리 누명을 쓰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실로 기막힐 소식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쌀알 하나하나가 지금 성스러운 하나님 앞에서 외친다. 쌀알 하나하나의 대가가 지불되어 이 소리가 멈출 때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라? 김교신은 정통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네!’라며 비난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현재적 차원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교신의 저 통탄에 찬 외침은 예수께서 성전 중심의 속죄제의 의식을 무력화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과 우러름(信仰))이 구원의 삶을 얻게 할 것이라선언하신 참 의미와 맞닿아 있다.

 

 

예수 당시 평범한 유대인들은 참으로 궁핍하고 처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에도, 유대 지방 정부에도, 그리고 유대교 성전에도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하는 까닭에 일상이 늘 빚쟁이이던 삶이었다. 변변치 않은 벌이에 강제로 걷어가는 세금을 채우자 하니 안식일이라고 쉴 형편이 아니었다. 안식일 법을 철저히 지키고 나는 경건하다 떳떳이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은 소위 있는 자들뿐이었다.

누군들 쉬고 싶지 않겠나!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숨을 돌리게 하라는 지상명령 아니었나. 숨이 무엇인가? 루아흐, 생기, 하나님께서 무릇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에게 불어넣어주신 그 숨을 돌릴 틈을 주는 것, 그게 안식일의 정신이었는데. 예수 시절, 하나의 형식적 규례로 굳어진 안식일 법은 오히려 그 법으로 가여운 평민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숨통을 조이는 올무가 되었다. 죄를 지었으니 죄사함을 위한 제의를 드려야 할 터. 하여 속제제의를 위한 제물이라도 준비하려면 그게 또 돈이다. 준비한 제물이나마 제사장들이 고이 받아주면 좋으련만, 이 양은 흠이 있다. 이 비둘기는 결격이다. 이리 퇴짜를 놓으며 미리 뒷돈을 받은 장사치에게로 이 가여운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여 죄사함을 받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시세보다 더 많이 주고 제물을 사야하는 사람들. 그만큼의 돈이 없으면 그냥 죄인으로 고개 숙이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예수 당시의 이웃들이었다.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죄인 만드는 성전 제사장들을 향하여 예수는 분노하셨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소리치시고, 장사판을 다 뒤엎으셨다. 죄의 용서는 사랑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얻을 것이요, 구원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겠다는 회개그것 하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에게 선포된 구원(소테리아)은 그가 주여, 제가 남에게 부당하게 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나이다.” 결단했을 때 도래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하나하나여, 여호와 앞에 호소하기를 잠시 유예하여 다오. 그대들에게 모조리 ・・・ 대가가 지불될 때까지 우리는 천국에의 입장권도 유예하여 노력하리라. 주 예수의 복음에 그 힘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오늘 우리가 저 하늘에, 꽃이 되고 별이 된 아이들에게 해야 할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김교신의 절절한 고백은 식민사관의 연장선에서 한국인들의 민족성이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아니었다. 자신의 구원까지도 유예하면서 노력하겠다는 그의 각오는 회개(돌이킴)’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구원의 여정과 무관치 않음을 보여준다. 다시 볼 일 없다고 제 몫의 삶을 정직하게, 책임 있게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구원받은 이의 삶일까! 비단 그리스도인들만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무책임한 삶, 비도덕적인 행위, 탐욕스런 실천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억울한 희생이 있다면, 그 하나하나를 갚아낼 때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적 삶을 그치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예수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서이미 대가를 지불하신 구원을, 무슨 이유로 천국 입장권마저 유예하며 노력을 하나? 모르는 소리다. 예수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서 이미 지불하셨던 것은 유대교적 속제제의가 담보한다는 죄의 용서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용서를 위해 제의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는 막 살아도 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이로써 합당한 삶, 자신이 그동안 이웃에게 행해온 부당함과 억울함을 갚아주고 다시는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하나님의 방향으로 삶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구원의 삶일진대, 오늘 우리가 한 생명 한 생명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쌀알은 세월호 아이들이고 송파 세 모녀이며, 곧 그처럼 될 만큼 삶이 위태로운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들의 ’()을 도적질하거나 방관하는 한 우리도 구원의 삶에서 멀리 있다. 예수의 복음이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려면, ‘나만 구원받는 사적이고 이기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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