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62)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예수께서는 그의 선교역정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위선을 매우 강렬하게 미워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신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닌 사회적 위치와 종교적 권위가 폭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도 감히 그러한 작업을 할 용기나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적 권위에 순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종교적 선행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선전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장해주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종교생활의 기준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이유는 낙타를 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낙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순수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정직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학식이 높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희생해 왔습니다, 나는 이만큼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등등은 사실은 전부다 낙타를 삼켜먹기 위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 욕심이 없으시군요. 아,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오셨습니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오로지 높은 지혜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오셨군요.” 등의 평가를 얻어내어 낙타를 먹어치우기 위해 위장하는 자들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정치판이 벌어지면 이렇게 ‘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발전의 선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표와 자리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의 위 속에 수 십 마리 낙타가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소위 기독교 인사들이(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교단선거뿐만 아니라 연합기관이나 자신의 교단과 기관에서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실은 낙타를 겨냥하면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덕을 선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은 낙타에 가 있고 하루살이는 그걸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겠다는 이들의 말과 삶 속에서도 하루살이가 낙타를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바가 하루살이를 걸러내며 살아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욕없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과 재물과 삶의 스타일, 그 자손들의 행실은 낙타를 삼킬만한 위가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발견한다.


예수께서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시면서 ‘눈먼 인도자’라고 공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게 된다. 그가 낙타, 즉 거부하기 어려운 크기와 강도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가, 아닌가이다. 아, 이 어리석음여, 하나님 나라를 낙타에 비길까?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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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호의 너른마당(61)


문제는 ‘어떤 성품이 주도하는가’이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세기 21:9-10)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모계사회의 종식과 더불어 부차적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을 생산하는 존재였고, 인간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종속된 재산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구조화되었고 문명의 생리처럼 되어갔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사렛 예수의 선교는 그러한 이스라엘 문명의 여성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들끓었다. 여인들의 고난과 천대에 대한 그의 따뜻한 다가섬이 그런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선교가 그토록 힘 있게 전개되었던 것도 짓눌림 당했던 여성들의 신앙적 각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새로운 자아상을 구성해 가면서 잃었던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중대한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온갖 굳은 일들은 여성들이 떠맡으면서도 정작 교회의 진로와 책임있는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남성들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여성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무래도 현실타파적인 공격성이 전면에 조명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이 때로 거칠어지는 점은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면을 시비 걸어 여성운동 전체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 자체가 새로운 해방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일까? 핍박받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 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일체의 위상을 그대로 보장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사라와 하갈의 대립을 목격하게 된다.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인 여성 사라가 같은 여성인 하갈에게는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가혹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갈에게 최대의 적은 사라였고, 사라에게 최대의 적은 하갈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대립이 성차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사라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갈의 존재를 주변부로 축출한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보듯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아들 이삭을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는 여인 하갈에게 가혹한 종의 주인이며,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는 악랄한 원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여인들의 닮은꼴을 보게 된다.


“저 가난한 자들의 자식과 내 아이와는 이 시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소, 저 공부 못하고 지지리도 못난 놈들과 내 아이와는 이 사회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저 출신이 미미한 여자와 내 아이와는 결혼하여 우리 집안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감히 우리와 어깨를 함께하려고 하는가? 내 자식만큼은 이 사회에서 가장 높고, 크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오.”


그렇게 해서 명문학교와 부촌 근처에는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질 수 없고,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계산 앞에서 깨지기 일쑤이며, 출신이 낮은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돈 없는 가정에서 시집 온 며느리는 구박덩이가 되고, 그 반대는 며느리가 상전이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구도가 해결되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을 지배자로 설정하고 자신의 자식도 지배자로만 키우려하는 여성이 어머니인 한, 우리 사회는 그런 ‘모성’에 기대어 자란 인간들로 계속 채워지게 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광야로 쫓겨나는 이들이 양산된다.


남성은 언제나 지배자이며 여성은 언제나 피지배자인가?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성품이 그 사람을 주도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성품이 그 사회의 구조적 중추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내정자에 대해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언급한 국민의당 이언주 원내수석부대표의 ‘성차별적인 발언’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인식이 아닐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하려는 사랑과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가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부당한 지배는 지속될 것이며, 억울하게 쫓겨나는 이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하갈에 대한 사라의 비정함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라와 그 사라에게 축출 당하고 있는 하갈, 이스마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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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역사의식

만일 유대교에서 이들의 해방절인 유월절을 과거 회고적이라고 지우자고 하면 어찌 될까? 당연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일이 민주당과 통합하는 안철수의 새정치연합 쪽에서 일어났다. 4·19와, 5·18을 비롯해서 6·15와 10·4선언을 과거 회고적인데다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정강정책에서 삭제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당장 민주당 쪽은 강하게 반발했고,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역사에는 중대한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전환점은 민족 구성원 모두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 정신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토대로 앞으로 나갈 방향을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와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과거사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과거사로 멈추지 않고 지금의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우리에게 1910년의 일본에 의한 합병과 1919년의 3·1운동에 대해 과거 회고적인 일이니 자꾸 되새기지 말고, 외교적 껄끄러움이 있으니 대충 잊고 미래를 지향하며 나가자고 한다면, 그 후안무치에 우리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특별히 민주당한테 6·15와 10·4는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향점을 일깨우는 기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정신을 가진 당과 통합한다면서 그 기둥을 송두리째 뽑자고 요구했으니 그것은 기본적인 역사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식을 접한 이들 상당수는 경악하고 있다. 여당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통합 야당의 출현에 기대를 걸고 있던 이들은,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일은 안철수와 그의 세력에게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통합 야당의 위력을 스스로 위축시키는 자충수가 되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의식과 역사적 책임과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쪽은 6·15와 10·4를 정강정책에서 삭제하자고 했다가 반발을 사자, 기껏 한다는 말이 7·4와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게 그렇게 둘러댄다고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있는가?

정강정책은 정당의 소신과 신념을 밝히는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그걸 형평성 논리를 대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겠다? 누가 이걸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며,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가? ‘새 정치’를 하겠다면서, 이처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등 부끄러운 역사의식의 부재를 날것으로 보여준다면 새 정치라는 말 자체는 우리 모두에게 재난이 될 뿐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를 썼고 희생된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삭제하자는 것은, 이들의 의식 속에는 역사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김한길, 안철수는 부랴부랴 심야회동을 통해 이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반영하기로 했다지만, 이미 드러난 의식의 공동(空洞)상태는 어찌할 것인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단지 먹고사는 문제로 격하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존감과 역사의식을 폐기하려는 자세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한다. 오래전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겠다는 믿음 하나로, 배고픔과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났다. 그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역사적 존엄성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우리를 배부른 돼지가 되려고 안달하는 존재로 취급하지 말라.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편집자 주/이 글은 2014년 3월 20일자 한겨레신문 [야! 한국사회]에 쓴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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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끙끙 앓는 하나님’과 한국교회,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보며*


한 사회의 정신적 기준으로 존재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그 사회의 가장 악취가 나는 현장의 하나가 되고, 존경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정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다. 만일 이러한 상태가 아무런 교정의 과정도 없이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덩치는 크지만 정작 그 내용에 들어가 보면 탐욕의 소굴임이 판명되는 비극을 겪을 수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이는 내 아버지의 집이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하는 일갈의 소리가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세간의 도마에 오르내리는 고질적인 목회자의 성윤리 문제는, 교회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게 되어간다는 처연한 비극이다. 이 뿐인가? ‘교회세습’이라는 교회의 지도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의 대부분은 ‘과연 기독교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자조적인 자기비하로까지 연결될 지경이다.


이렇게 교회는 어디를 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로 달려가고 있고, 단지 무화과 나뭇잎으로 살짝 덮여있을 뿐, 한번 바람이 불면 그 치부(恥部)가 그대로 드러나고 마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니 개혁의 손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의 방황과 정신적 실종 상태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신앙인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대세가 잘못된 한쪽으로 쏠린다 해도 끝까지 외롭게 그 반대편에 서 있을 수 있는 참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의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조차 기대를 저버린 지 이미 오래라는 뼈아픈 현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부터 깊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당연한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이는 마치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는 성서말씀이 응하는 현실이다.




1970년 이후 한국교회의 모토는 ‘성장’이었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 성장정책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면서, 전도의 열정과 함께 결합하여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져왔다. 경제계의 재벌과 종교계의 대형교회는 성장주의 시대의 일란성 쌍생아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형교회는 다른 무수한 교회의 선교적 모델이 되어 성장 자체가 곧 절대가치로 군림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성장하지 못하면 발언권이 없고, 성장하지 못하면 그것은 존재 이유가 없는 목회가 되고 말았다. 양적 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었고, 양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목회자가 곧 지도자가 되었다. 성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성장의 신앙적, 윤리적 기초는 성찰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회성장론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현실과 맥을 같이하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에 따른 경영방식과 지도력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성장 모델을 선택했고, 목회자는 정신적 지도력이 아니라 경영수완이 좋은 CEO와 구별이 되지 않게 되어갔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보다 많은 교인들을 교회에 들어앉게 해서 그들의 돈으로 교회를 살찌우는가에 있었다. 결국 교회는 날로 융성해져 갔지만 한국사회는 그에 비례하여 정신적 감화를 받아 순결해진 것은 아니었다. 성장은 곧 성공이었고, 성공 스트레스는 모든 교회를 압박했고 이로써 교회는 세상의 성공사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니 자연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품어안은 선교적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시장논리가 교회를 점령한 양식이었다. 시장논리란 무엇인가? 그 논리의 핵심은 수용자의 요구에 맞추고 그 대가를 현금화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교회는 무수한 문제의 덫에 걸리기 시작한다.


이기적 탐욕을 종교적으로 승인해 주는 기복주의는 공식이 되었고, 교권주의는 당연하게 통했다. 권위주의적 CEO의 지휘 아래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통용되었던 것이다. 돈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적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소멸되어 갔다. 이미 자신의 개인적 자산처럼 되어 버린 교회를 세습하려는 욕구는 그리하여 당연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사적 영역과 통하게 되었다. 재벌기업의 2세 상속과 다를 바가 없는 논리가 수용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돈의 힘과 교권적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된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은 성(性)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개인적 차이가 있다 해도, 이렇게 한국교회의 속살은 깊이깊이 썩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인들의 세속적 탐욕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면죄부를 받아 양심의 가책을 제거해 버리고, 기복의 대상이 되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들 수용자들의 요구가 충족되는 대가로 헌납한 돈을 가지고 ‘성역(聖域)으로 둘러싸인 밀실에서 무한대의 윤리적 타락’을 자행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일종의 특권이 되었고, 이 특권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도전하는 것은 종교적 불경이 되어 버렸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성장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본질적인 질문들은 억압되어 갔고, 목회자 후보생들은 이러한 굴레에 굴종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배워 가면서 영적으로 탈진해 갔고 이들이 교회를 맡을 때쯤이면 윗세대와 그리 달라질 것이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이 이어지게 될 때, 한국교회의 장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끙끙 앓는 하나님> 북토크가 저자의 바람처럼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예레미야를 읽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눈물의 땅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기 위함이다. 이 책이 그러한 길을 모색하는 이들 앞에 던져지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되면 참 좋겠다. 역사의 봄이 고샅길 저편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제 우리가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봄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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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7)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

 

겨울이 난데없이 덮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겨울은 추워야 하고, 그러면서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 익어갈 겁니다. 여름에 자신을 한껏 자랑하던 초목도 겨울에는 겸손하게 몸을 털고 벌거벗은 존재의 본래 알몸으로 돌아가 하늘의 생명을 받아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겨울이 추운 것이 정상이라도 춥지 않은 겨울을 나고 싶은 것은 사람들 모두의 마음입니다. 길거리에 내버려진 채 겨울을 나보라고 하면 누가 그걸 기꺼워하겠습니까? 누구도 돌보는 이 없이 찬 바닥에서 홀로 두렵게 잠을 자야한다면 그 또한 겨울의 잔혹함을 더욱 깊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

 

역사는 강자가 써나가는 것 같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자의 편에 붙어사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지만 성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습니다. 현실은 대세를 쥔 쪽에 서라고 하지만, 성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꾀가 많고, 강하고 부해져서 오만해진 자들이 모든 것을 쥔 것 같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현실대세로 보면 초라한 것 같고 대단할 것도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 마다 잘 될 것이라는 겁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를 비교해보면 시냇가의 나무는 아무 것도 아닌 듯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드러내 보이는 생명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축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삶을 가난하다고 여기고, 힘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버리고 맙니다. 그건 착각이 아닐까요? 강하고 부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세상에선 막강하게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

 

바람이 불면 그 운명의 실체가 폭로됩니다. 지금은 강성한 것 같지만 생명과 사랑의 바람이 불면 그 정체는 겨우 속이 빈껍데기 겨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심판 받을 그 날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의인의 모임에 들 수 없는 비극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믿는 이들은 세상의 대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강자나 부자들의 오만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적힌 바대로 그는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케 해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시편 35편에는 악한 권세를 향해 하나님의 질타가 있기를 이렇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이 구덩이를 파고 그물을 쳐서, 이유 없이 내 생명을 묻으려는 저 사람들, 저 사람들에게 멸망이 순식간에 닥치게 하시고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서 스스로 멸망하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기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하고 힘없이 희생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바라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시편 40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시고, 진흙 수렁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특별시 사람들

 

2007년에 만들어졌으나 개봉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2009년 부산 국제 영화제와 서울에서 있었던 국제 가족 영화제에서 선을 보였던 박철웅 감독의 <특별시 사람들>입니다. 강남의 고급 고층 아파트 숲 속 한 편에 있는 달동네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전혀 거칠지 않게 이 현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이들의 모습, 그러면서 이들의 처지를 이용해먹는 자들의 악덕 등이 고발되어 있습니다. 특별시에 살고 있지만 전혀 특별하지 못한 이들의 슬픔과 아우성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강하고 부한 것을 열망하면서 그 기회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탐욕과 야망과 죄와 교만과 차별 등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물망을 찢고 그로써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영혼을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런 일에는 나서지 않고 있으니 그런 교회를 향해 회의가 생기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끼리끼리 잘 모이면서, 이웃을 위해 나서야 하는 궂은 자리에는 가지 않는 이기적 신자들의 모형이 한국사회의 비신자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뼈저리게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2016년 지난해도,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힘이 없이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거처가 과연 얼마나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거대 교회, 이른바 메가 처치가 되기 위한 야망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교회는 시장이 되고, 권력이 되어가고 있으며 의로운 시인들을 추방하고 있지 않은가요?

 

악인의 삶은 아무리 유혹적이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악인의 삶일 뿐입니다. 성서의 시인들은 이 선과 악의 분별에 민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교회는 시편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 이 세상을 돌이키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영혼이 시들지 않으며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축복을 바랄 것인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추운 겨울, 봄을 맞이하는 이 생명의 마음이 매일 아름답게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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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6)

 

하나님은 ‘권력의 화신’인가?

 

정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대통령과 부역 세력들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한쪽에서는 신음과 절규가 흐르고 터지는데, 이 와중에도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들의 손익계산에 바쁜 채 서민들이 겪는 고통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가진 자와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권리와 특권과 지위와 부, 그리고 대접은 끝이 없는데, 그 밑에서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은 매일 무너져 내리고 있다. 권력과 부를 쥔 이들은 제 몫을 하나라도 더 챙기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이른바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럴 때일수록 기도하잔다, 위에 있는 권세에 더욱 복종하잔다. 그러면서 가진 자들의 자리에 서서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덕목을 가르치고 있다. 모순을 보지 말고, 성공의 사다리를 발견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것이 복 받음의 첩경이란다. 현실의 모순에 주목하는 것은 비신앙적 자세라고 교육하고 있으며, 가진 자들의 반윤리적 삶에 대한 질타를 봉쇄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 나라의 물질적 부패와 정신적 타락을 막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의도적으로 방기하고 있을 정도이다.

 

교회 자신이 부(富)를 향해 달리고, 권력을 향해 달리고, 명예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제대로 된 말씀을 쏟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한국교회 지도자 상당수가 로마서 13장 1절이 담고 있는 ‘권세에 대한 복종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여기에 저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강박적으로 강조해왔던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부도덕하고 인간의 양심을 파괴하는 권력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변호하고 정당화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권력에 영광을 바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그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그 권세에 대한 복종이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라면, 그 권세의 품성은 성령의 열매와 동일한 내용의 것이 되어야 한다. 로마서가 13장의 대목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영이 어떤 영적 결실을 맺는가를 누누이 설명하고 있으며, 그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존재의 모습을 갈파하고 있다면,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의 품성 역시 어떠해야 하는가는 이미 맥락 전체의 뜻에서 파악해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학적 요체를 근거로 삼으면 간단히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이들의 필요에 진심으로 응하며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하나님의 의에 충실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악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책임을 맡은 권세가라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령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는 한 마디로 인간에게 생명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만일 현세의 권세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권세가 아니라 사탄에게서 온 권세일 따름이다. 권력의 악마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긴다면 하나님을 도대체 어떤 분으로 고백하겠다는 것인가? 악한 권세를 가지고 선을 도모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13장 문제의 대목 바로 앞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악한 권세를 가지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고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억누르며 의를 짓밟는 권력은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지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 아니다. 악하고 폭력적인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그런 권세가라도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쓰셔서 세상의 선과 의를 도모한다? 그런 하나님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화신’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인간의 생명을 구하시는 분이지, 포악한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인간을 다스리시는 전제군주가 아니다. 예수께서 헤롯을 가리켜 ‘여우 새끼’라고 질타했던 것은 바로 부패하고 야만적인 권력의 포악한 품성에 대한 일갈이었다.

 

높은 자를 낮추시고, 강하고 부한 자들을 진토로 돌리시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권세자들을 들판에 저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억압하고 의를 무너뜨리는 권력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만일 포악하고 야만적인 권력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한다면, 모세의 출애굽 대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바로 왕의 권세도 하나님에게서 왔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강변할 것인가? 성서의 무수한 예언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대립하는 권세와 마주했던 것을 무엇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하나님의 일꾼인 권세가들과 대적한 자들이라고 할 것인가?

 

성서의 기본 정신이 깔린 맥락 전체를 보고 세상의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깨닫기보다는, 단 한 구절의 말씀을 가지고 현세의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신학은 병든 것이며, 따로 은폐하는 저의가 있는 까닭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신앙의 테두리를 정한다면,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억압하고 그 생명을 짓밟는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했던 기독교 선각자들의 행위는 모두 하나님의 뜻과 대적했던 것이 되고 만다. 혹자는 그것은 이민족과의 싸움이니 마땅하다면서, 해방 이후의 상황은 다르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이민족인가 동족인가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주시하신다.

 

한국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가지고 홍역을 치렀다. 신사참배 문제는 우상 숭배와 관련된 문제이자 일제의 지배를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결국 신사참배의 행렬에 동참해 버렸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강력한 저항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신학적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지도 세력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기득권을 보장받고 있던 친일지주 세력이 중심으로 있는 현실이 이 배경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서도 옥석을 가리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일제하 한국교회의 지도세력 가운데 적지 않은 자들이 친일 세력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주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해방 이후 두 가지 중대한 민족적 요구를 외면하고 이에 저항했다는 사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은 첫째 친일세력 청산에 반기를 들었고, 둘째 대다수 농민들의 요구였던 토지 개혁에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교회의 물적 기반을 쥐고 있는 세력이 누구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6·25전쟁 이전에 월남한 적지 않은 수의 북한 지역 기독교인들이 친일지주 계층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이들이 중심이 된 이승만 정권 이후의 초기 한국교회의 주류 세력들이 손쉽게 권력에 빌붙고 사대주의적 사고에 찌들었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 요구에 적대적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승만이 기독교 장로라는 사실 하나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옹호했고, 이후 박정희와 후속 권력자들에게 신앙 양심을 접고 머리를 조아린 것은 이들의 정신세계 속에 세상의 권세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친일 세력의 철저한 청산이 한국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병폐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한국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지향하는 질병에 걸려 있게 된 것이다. 권력에 대한 아부와 외세의 지배에 대한 변호는 거리낌 없이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는 일에는 꽁무니를 빼고 있음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시계(視界) 제로이다. 경제는 언제 어떤 지경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부동산 투기라는, 그래서 언젠가는 반드시 거품이 될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다. 1,200조 원대의 가계부채는 시한폭탄이다. 국민이 힘을 몰아주는데도 정치는 비틀거리고 있다. 이른바 ‘식물정치’이다. 정치와 경제, 이 사회의 두 가지 핵심적 기둥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것으로 희망이 질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앞날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소리 없이 선행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촛불을 들고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앞으로 진전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작은 소망을 담아, 큰 용기로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삶과 이들의 선택과 이들의 의지에 눈을 떠야 한다. 작은 불빛 하나 들고 광장의 대오에 서면, 사랑의 기운을 서로 나누는 자리를 곳곳에서 만드는 기쁨이 솟구치지 않는가.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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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48)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역사가 되어야

 

11월 12일, 촛불의 바다에서 민심은 그렇게 일렁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날을 1987년 6.10 항쟁과 비교하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년(2017년)은 6월 항쟁 민주화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치열했던 시대의 함성은 이제 역사의 육성이 되었고, 현실은 새롭게 변모했습니다. 자유는 넘쳐나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자는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이 된 듯싶습니다. 2007년의 6월은 그런 세상의 변화 앞에서 어쩌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처럼 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암울했던 시대에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누구와 손을 잡고 역사 앞에서 행동하면 되는지 모르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위협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옥문은 언제나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는 이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간 자,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처참함을 경험했고 시대 전체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총과 칼로 지켜내는 권력이 끝까지 가는 법은 없습니다. 억누른다고 다 억눌려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멩이도 소리치는 세상은 그렇게 왔습니다. 1980년 광주의 저 유혈극은 군사주의의 생명을 연장했지만, 1987년의 세상은 그 악한 권세가 조만간 운명을 달리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일깨웠습니다. 그해 6월은 뜨거웠습니다. 태양도 뜨거웠고, 거리도 뜨거웠습니다. 온 세상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 최루탄을 총처럼 쏘아대 학생들이 죽어 가고 도시는 휘청거렸습니다. 권력의 거짓과 오만은 폭력이 되어 하루하루를 지배했고, 뭔가 새로운 결단이 있지 않으면 계속 누군가는 죽어나가야 했습니다. 6월 항쟁은 그런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태였습니다. 아니, 사태라기보다는 사건이었습니다. 혁명이었습니다.

 

권력은 움츠러들었고 시민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군대가 정치를 쥐고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놓는 일은 없게 하자는 역사적 의지는 그렇게 발휘되었습니다. 군사정부의 시대는 가고, 민주주의 정부의 시대가 막을 올린 것입니다. 6월 항쟁으로 이어 등장한 노태우 정부는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시절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힘이 빠진 권력이 되어갔습니다. 시민혁명은 승리했고 권력은 국민의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오늘날 그 누구도 군대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6월 항쟁은 그렇게 역사의 루비콘 강을 건넜습니다. 과거의 암울한 시대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은 다 잘 해결된 것일까요? 시민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은 항쟁이 성공한 이후 그냥 얌전하게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을까요? 권력을 맡긴 정치인들이 다 알아서 잘 해가기를 바라면 그 뿐이었을까요? 현실은 거의 언제나 혁명을 배반합니다. 권력은 감시를 게을리 하면 오만해지고 독재하고 싶은 악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시절은 지났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보듯이 그래서 권력은 더더욱 교활해지고, 본색은 감추는 방식을 택하곤 합니다. 국민은 속고 권력은 기만적인 통치술에 능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따라서 끊임없이 지켜내지 않으면 위기에 처하고 맙니다.

 

 

 

 

1987년 6월 항쟁은 그렇게 역사의 소임을 다 마쳤다고 여기고 귀가했으나 현실은 앞서 말했듯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이전과는 다른 민주주의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권력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워지고 언론은 그런 비판을 했다고 보복당하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속삭일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있으며, 더는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 구도는 의미를 잃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고 비정규직 확대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양극화는 더더욱 심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민주주의는 왔으나 민생의 문제는 더욱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빵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며 민주주의는 더더욱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할 과제가 된 것입니다. 민주화와 반민주의 대립은 아직도 유효한 것입니다.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힘을 잃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권력을 꼬드겨 자본의 자유가 팽창되도록 만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문제를 제기하면 곤란한 지경에 처합니다. 노동자들을 비롯한 이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아직도 실현되지 못한 이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군사정권처럼 내놓고 탄압하는 경우라면 대응이 훨씬 확실할 것이나, 이제 우리는 자본의 보다 교묘한 방식의 지배 앞에서 자유는 넘쳐나나 그 자유가 소비의 자유, 굴복할 자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자유, 비판하지 않을 자유로 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동안 민주주의의 본질이 위태로워지고 있는데도 입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1987년, 이 땅의 역사를 뒤흔든 항쟁은 지금 과거형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미래의 역사를 바로 잡도록 하는 각성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더욱 깊게 성찰하여 역사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016년 11월은 6월 항쟁 그 때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새로운 결단과 의지를 다짐하는 때입니다. 그건 마치,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의 저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앞으로도 누구에게도 노예가 되지 않은 히브리 민족이 되겠다는 결의를 다진 성서의 사건과 동일합니다.

 

1987년 6월은 역사의 박물관에 박제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건 오늘도 우리에게 뜨거운 영감을 불어넣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도록 하는 힘입니다. 하여 2007년의 6월은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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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5)

 

‘쥐뿔도 없는 아모스’, ‘이름 없는 명문가’ (2)

 

아모스의 질타

 

죄를 지으면서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아모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들의 특권이 건설한 요새가 과연 안심하고 피해 있어도 될 자리인지 묻고 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을 경고한다.

 

너희는 망한다. 시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사는 자들아, 사마리아의 요새만 믿고서 안심하고 사는 자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의지하는 으뜸가는 나라, 이스라엘의 고귀한 지도자들아. 너희는 갈레로 건너가서 살펴보아라. 거기에서 다시 큰 성읍 하맛으로 가 보아라. 그리고 블레셋 사람이 사는 가드로도 내려가보아라. 그들이 너희보다 더 강하냐? 그들의 영토가 너의 것보다 더 넓으냐? 너희는 재난이 닥쳐올 날을 피하려고 하면서도, 너희가 하는 일은 오히려 폭력의 날을 가까이 불러들이고 있다. ……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야, 사라져라! 유다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말아라. 이곳은 임금님의 처소요, 왕실이다.’ 아모스가 아마샤에에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 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아모스 6:1-3, 7:12-15).

 

그런데 아모스는 정작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남쪽의 유다 출신이었다. 그러니 그가 이스라엘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하였다. ‘네 집구석이나 잘 챙겨,’ ‘네가 무언데 우리 집안을 헐뜯는가?’하는 비아양이 금세 그를 향해 반격처럼 꽂힐 그런 상황이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의 신흥 명문가 아마샤와 일대 대결을 벌이고 있으니, 이건 누가 보아도 싸움이 되지 않을 듯한 한판이다.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한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인데, 여로보암 2세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엘리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지한 예후의 자손이다. 예후는 또 누구였던가? 이스라엘의 정신적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 엘리사의 권고에 따라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그로써 바알 숭배의 근본을 뒤집어 엎어버린 인물이었다. 그로써 이스라엘은 일대 영적 개혁의 시기에 들어갔고,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새로운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이런 집안에서 자란 여로보암이기에 그에게 한 구석 기대를 걸 만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주변 제국들을 제압하는 강국으로 융성함을 떨쳤다. 그래서 여로보암 2세의 치적은 남들이 넘볼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 치적과 융성함의 이면에는 정의가 짓밟히고, 정신적 타락이 만연하며,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것이 사는 것인가 보다 했고, 여로보암식의 지배에 저항하지 못했다. 나라는 비록 분열되었으나, 그래도 여로보암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고, 강국으로 주변의 경계심까지 일으킬 정도가 되었으니 국가권력의 정통성에 도전할 세력은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새롭게 세워진 베델의 성전은 여로보암 체제를 종교적으로 옹호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아모스라는 인물이 출현한 것이다. 여로보암 2세로서는 한참 끗발 좋게 잘 나가고 있는 판국에 웬 낮도깨비 같은 자가 나타나서 잔치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아모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부정과 타락과 부정의의 죄를 신랄하게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 예언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이 따위로 살면서 온전할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리라고 여겼다가는 오산이다. 늦기 전에 돌아서라. 아니면, 모두 망할 것이다.”

 

이렇게 여로보암 가문을 비난하고 다니는 것을 아마샤가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혹세무민에다가 온갖 유언비어 그리고 왕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까지 함부로 하고 다니는 이런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의 입을 막으려 한다.

 

“유다 출신 주제에 어디서 와서 행패냐? 여긴 너 따위가 입을 벌리고 다닐 그런 땅이 아니다. 너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명문가의 왕이 계신 처소요, 왕실이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에게 반역하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정작 그는 왕이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쥐뿔도 없는 아모스’, ‘이름 없는 명문가’

 

그때 아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아마샤, 너는 베델의 명문가 제사장이라고 뻐기는구나. 그래 나는 무슨 이름난 예언자도 아니고, 또 누구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은 바도 없다. 나는 명함 한 장 없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자신을 묘사한다. ‘나는 집짐승이나 먹이고, 돌 무화과나 가꾸는 천한 놈이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그래, 나는 네가 보기에 밥이나 빌어먹게 생긴, 쥐뿔도 없는 놈이다. 그런데, 그런 천한 놈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내리셔서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내셨다.’

 

아모스는 이런 말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을 가로막느냐?’ 그가 자신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행위를 ‘붙잡아 내셔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들판에서 계속 그대로 양을 치고 과실수를 가꾸는 일에만 묻혀 있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신 하나님의 영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초라한 행색과 그 출신을 보고 능멸하였으나, 아모스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 ‘쥐뿔도 없는 아모스’가 그 대단한 명문가의 세도와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광경은 눈부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는 위엄과 생명의 영력이 그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너희의 삶이 사실은 망할 길을 재촉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의 삶이 도리어 죽을 길을 달려가고 있다는 경고’, 이것은 실로 특권에 대한 역습이다.

 

아모스는 이를 불평등이라든가 아니면 부정의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문제로 우리들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특권은 죽음이고, 특권의 폐지는 생명이다’라는 결론이다. 쥐뿔도 없는 자가 도리어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특권을 화려하게 누리고 있는 자가 이미 죽음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밥이나 우선 먹고 보자’와 ‘정의를 먼저 세우자’의 싸움이기도 했다. 배가 고플 때 정의는 사실상 생각하기 어렵다. 반면에, 배가 부르면 정의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부정의하게 유지해온 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느라고 더 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체질이 이미 그렇게 먹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정의가 없는 배부름은 모두를 결국 타락하게 하고 죽음의 길로 이끌지만, 정의가 있는 배고픔은 순결한 훈련과 감사의 과정이 되며 정작 배가 찼을 때 정의로운 능력을 지니게 된다.

 

정의를 잃어버린 풍요의 비극

 

오늘날, 이 나라의 되어가는 형편은 정의를 잃어버린 풍요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풍요조차도 지금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여 있다. 세월호 사건은 그 단적인 예이다.  정의를 떠난 풍요를 향해 온 사회가 질주하는 것은 잠시의 배부름을 가져다주고 명문가의 세도를 누리게 해주는 듯하지만 결국 죽을 길을 재촉하는 일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일깨우신다.

 

가난한 자에게 인정을 베풀고, 힘없는 자를 짓밟지 않고, 부정의한 길로 가문의 세도를 부리는 이들을 결코 존경하지 않으며, 술수와 권력과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일을 단호히 거부하고 가진 것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일을 게을리한 사회는 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여,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논리로는 그의 지위나 달성한 목표가 기준이 되지만, 진정한 기준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존재 내면에 타자에게 나누어줄 만한 인격적, 영적, 정신적 힘이 얼마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내용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그 마음이 교만하고 편협하면 그 지위는 오욕의 현장이 된다. 아무리 성취가 대단해도 그 영적 내용물이 천박하면 그는 헛살았다고 할 수 있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그가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한없이 겸허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만드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 열정이 다 식어버린 곳에 다시금 재기의 열망을 불어넣는 영적 강렬함이 있는가, 재빠른 계산과 이익에 눈이 어두운 현실에서 굳건한 양심과 순결한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나타나면 갈라졌던 이들의 사이가 하나가 되고, 그가 나타나면 침울했던 자리에 활기가 돌고 그가 나타나면 답답했던 심정이 뻥하고 뚫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멋진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무한경쟁 시대에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며 풍요와 가난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이에 실패한다면, 열매가 별로 많지 않거나 또는 그 맛이 별 볼일 없어 힘만 들고 망쳐 버린 포도농사를 한 셈이다. 포도열매를 내놓아야 할 계절이 왔음에도 내놓을 것이 없어 막막해지는 자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

 

시인 도종환은 <나리소>라는 제목의 시에서 어떤 깊고 잔잔한 못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뜻을 묻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가장 고요해지는 사랑이 깊은 사랑이다/나릿재 밑에 있는 나리소 못이 가장 깊고 고요하듯/….여울을 건너올 때 강물을 현란하게 장식하던 햇살도/나리소 앞에서는 그 반짝거림을 거두고 조용해지듯/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마음이 가장 깊고/착해지지 않으면 진짜 사랑 아니다/물빛처럼 맑고 투명하고 선해지지 않으면…” 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영혼의 선함이 같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존재에게서 나오는 힘이야말로 세상을 진실로 감동시키고 또한 새롭게 할 수 있음을 그는 믿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곳에서 요란해진다. 그곳에서 자신의 선함을 버린다. 자신의 반짝거림을 내세운다. 사랑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가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잘난 여로보암과 그 대단한 아마샤가 보기에, 아니 스스로 보기에도 내세울 것 없는 아모스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에 자신을 다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대단한 명문가처럼 여겨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음을 깨우쳐야 한다. 세상이 우습게 여겨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서 ‘이름 있다’하시면 그 이름이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인류의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명문가는 특권을 누리는 가문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이들의 집안이다. 한마디로 ‘이름 없는 명문가’이다.

 

우리 민족도 그런 비전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없는 명문가! 그것은 네모난 삼각형, 각이 진 동그라미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이다. 또다시 새롭게 주어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이름없이 빛도 없이, 바벨탑을 향한 특권을 소멸시킬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우리들이 그런 일에 의미있게 쓰이기를 기도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힘써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이름없는 자 같으나 이름있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모두를 풍요하게 하는 자요”라고.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특권의 위계질서, 이름없는 명문가(1)  http://fzari.com/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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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호의 너른마당(54)

 

특권의 위계질서, 이름없는 명문가(1)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겨울사랑>, 고정희

 

추운 시절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모닥불 하나 쬐게 해주지 않으려는 기세로 우리 앞에 있다. ‘무한경쟁’이라는 슬로건에 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은 높게만 쌓여가고 있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는 문이 잠겨 있다. 그 어디에도 치자꽃 향기 풍기지 않고, 혈관 속에 별이 운행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소백산은커녕 우리의 마음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짓만이 널려 있는 오늘이다. 그윽한 기쁨이 아니라 경박한 쾌락이 범람하며 이윽한 진실이 아니라 포장된 위선이 득세를 하고 있다. 한 번의 겨울도 제대로 버텨내기 어려운 세상인가.

 

그 여파인가. 요사이 젊은이들은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의 풍조가 만연하다고 한다. 실리우선주의가 가정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런 모습이야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무슨 대단하게 생경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과거의 경우 인생사를 살면서 지쳐버린 기성세대의 대체적인 사고방식이었는데 사랑과 패기로 살아가야 할 세대조차 그렇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회의 병든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사람보다 그 사람을 이루는 집안배경과 능력 위주로 상대를 고르는 것이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결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결혼하는 셈이니 그 조건이 변해버리면 그런 때에는 어떻게 사태를 감당하려는지 걱정이 든다.

 

사람이 좋아서 함께 만나 가정을 이루어도 어려운 고비가 무수히 있게 마련인데, 조건으로 결합한 가정이라면 헤어지는 일도 아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람이 좋아도 조건이 불편하면 사랑이 깨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깨질 사랑이면 애초에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장애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자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실리주의라는 우상숭배

 

서로 처지가 사회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면 부모들이 들고 일어나서 기를 쓰고 말리는 경우도 우리는 적지 않게 본다. 그렇게 해서 갈라놓고 손해 보지 않을 결혼, 이익이 남는 결혼을 골라서 시키느라고 혈안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괜찮아도 집안이 볼 것 없으면 일단 합격선에서 밀려나지만, 집안의 명성이 드높으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덤으로 올라간다. 이런 시각은 신앙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가치관과는 전혀 반대이다. ‘그 사람의 환경과 주변이 좋든 나쁘든 문제는 그 사람 자체이다’라는 하나님의 시선과는 딴판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과거가 혹 문제가 있다 해도 그걸 약점으로 잡아 걸고넘어지지 않으신다고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비교해보면, 그 사람이 선택한 것도 아닌 환경을 가지고 시비로 삼는 것은 실로 잔인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현실이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경쟁시대에 실리주의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의 증상이다.

 

무엇이든 그 집안의 명예와 위신을 높이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가 그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뻑적지근한 가문과 연을 맺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사회적 위상에 변화가 오는 것을 기뻐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이를 수치로 받아들여 한사코 반대하는데,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명문가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들은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내는 집안이 되면 남들이 존경해주고 알아주고 떠받들어주고, 그런 집안과 알고 지내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상 이것은 열등감의 발로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단지 혈통의 확인과 그 계보의 기록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그런 콤플렉스의 깊고 깊은 흔적이기조차 하다. 따지고 보면 허무한 치장인데도 사람들은 그런 치장으로 자신을 높일 수 있다고 여기기에 족보의 명은 길다.

 

한 가문이 권세를 잡으면 권문세가가 되어서 어이없게도, 성씨가 같다는 이유 하나로 한 시대를 호령했다. 그리고 그런 호령으로 한번 특권층이 되면 마르고 닳도록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별별 수단을 다 쓴다.

 

예전에 이완용의 후손이 땅을 찾았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말할 수 없는 수치이자, 특권구조의 강고한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여 이 특권구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후손은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그런 당당함을 용납해주고 있는 우리나라의 법이란 것, 우리 민족의 의식수준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막막해질 지경이다.

 

따지고 보면, 이완용의 집안은 당시 실로 명문가였다. 그는 당대의 천재라고 사람들이 부러워했고, 나라가 망해도 그 집안은 귀족이 되어서 권문세가의 위엄을 부릴 수가 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무수한 명문세도가들이 나라의 패망과는 상관없이 몇십 간짜리 대궐 같은 집을 그대로 움켜쥐고 자신들의 일신의 영달을 누렸고, 그 자손들은 일본, 미국, 영국 등으로 유학을 다녀와 고스란히 다음 시대의 지배자들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민중은 수탈당하고, 독립이요 뭐요 하면서 가정이 파산 나고 육신이 일그러지는 동안에 이들 명문가들은 ‘세월이 이렇게 좋을 수야’하면서 민족의 현실은 아랑곳없이 끼리끼리 연을 맺고, 특권의 바벨탑이 무너질세라 판검사를 배출하고,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박사들을 배출했다. 그 판검사들과 국회의원들과 박사들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보면, 기도 차지 않는다. 힘 좀 있다고 죄 없는 사람 가둬, 돈 없는 사람 중형을 때려, 기회만 있으면 부패와 부정을 저질러, 교묘한 말로 권세가들을 옹호해, 그렇게 살면서 밤낮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서 정력 보강하느라고 기를 쓰다가 곱게 못 늙고 날이 갈수록 추해지는 것이다.

 

 

경쟁시대, 귀족 가문의 커넥션

 

그런데 이런 으리뻑적지근한 위세를 지닌 사람들이 그 집안을 채울 때 사람들은 그런 집안을 가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집안과 연을 맺으면 덩달아 명문가가 되는 길이 열린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특권층들이 귀족가문의 커넥션으로 되어가고 있다. 깊이 들여다보면, 얼키설키 엮어져 있는 그 혼맥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중추에 누가 버티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자기들 정도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간으로 생각도 않는 그런 현실이 한쪽에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변화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종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로써 한국사회가 특권의 배분을 통해서 위계질서화하도록 만들어간다. 그래서 세상이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명문가라는 것이, 알고 보면 특권을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철벽을 쳐놓고 으스대는 이들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나라를 망하게 한 자들, 나라를 부패하게 하고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자기들 세상처럼 굴다가 민족 전체를 곤경에 몰아넣은 부류들은 대체로 이런 자들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까? 힘없는 백성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 예가 없다. 아니 나라를 망하게 할 힘조차 없는 이들이 어떻게 그리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이들은 나라의 패망 앞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나섰으면 나섰지 특권층들처럼 나라의 주인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어도 내내 1등석에 앉을 궁리나 하면서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다.

 

현대 한국사회의 특권층은 결국 중세봉건체제가 근대적 과정을 거쳐서 해체되기보다는 일제 식민지체제로 이어지면서 낡은 토지소유관계가 상당 부분 잔존하면서, 이에 기반을 둔 세력들이 한국사회의 근대사를 장악해버렸다는 점에 그 역사적 출생을 찾아볼 수가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3-4퍼센트의 인구가 전국 토지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러한 토지소유의 집중화는 특권의 질서를 견고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해방 당시, 중세봉건적 잔재와 일제 식민지시대의 토지소유관계를 일제히 정리하여 새로운 민주적 토지소유관계로 전환하는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했으나, 권력과 결탁하여 토지소유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주도하면서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심화가 확대재생산되는 사회에서 특권을 폐지하고 누구나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경제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공평무사한 경쟁의 무대를 만들어주는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정치가 그런 개혁적 방향으로 간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토지귀족이 길러낸 정치가와 산업자본가들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현대판 귀족체제를 형성하여 자신들의 배타적인 세력을 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적 활력에 상처와 절망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돈 없는 이들은 계속해서 고생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봐야 잘 살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되어 있다’는 좌절감이 깊어지면, 특권의 위계질서 자체가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는 한 사회의 건강한 결속력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부자들에 대한 무작위적인 증오를 기반으로 하여 폭력을 행사했던 사례들은 이러한 사회의 극단적인 병세라고 하겠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해방 반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보면 명문가의 허무함을 볼 수 있다. 인도의 네루 집안, 파키스탄의 부토 집안은 그 출발의 역사성과는 달리 그 자손들이 부패의 늪에 빠져 나라와 가문을 망신살 뻗치게 했다. 특권에 안주하면서 그것이 보장해주는 안전망에서 범죄적 행동을 자신의 삶의 스타일로 삼은 자들의 비극이다. 애초에는 훌륭하게 시작했던 가문이, 한마디로 집구석이 엉망이 된 것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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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3)

 

삼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돌아가신 법정 스님을 생각하면 “무소유”의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이 분 앞에서 한국교회는 “과소유”의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불교와 가톨릭계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어른들이 계신 반면에 개신교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다른 종교와의 관계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사셨던 나사렛 예수의 길을 우리가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꾸 “거탑(巨塔)”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로 그 목회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무소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종교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상숭배가 있다. 말로는, 교리적으로는 우상숭배를 배척하면서 돈이라는 맘몬 우상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한국교회는 돈, 금력이라는 우상 앞에서 매일 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축복을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그 축복의 정체가 부자 되기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이 사회의 정의를 이루는 것보다 높게 평가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불행하다. 힘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 사회의 고통을 껴안고 아파하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를 질타하고 스스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이 부하게 되는 길을 찾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짠 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다.

 

신도들이 애써 번 돈을 쉽게 가져가는 곳이 교회라면, 그래서 그 교회가 자기를 살찌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면 어찌하겠는가? 이미 큰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교회를 매일 생존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이 땅의 가난한 서민들이 어떤 눈으로 보게 될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다. 으리으리한 성전과 화려한 장식이 믿음을 길러주는 것일까? 거대한 성전의 위용이 신도들을 모으면 그곳에 예수님께서 들어서실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돈의 종교가 되고 있다하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돈을 벌게 해주기만 하면 모두 용서되는 것인가? 권력도 기업도 그리고 인물도 모두 이 돈을 위한 성공이라는 척도로 평가하면 다 끝나는 것일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로 간 것인가.

 

돈을 번다면 강도 다 파헤치고 산도 허물어버린다. 그 단적인 예가 4대강 사업이었다. 다 돈 때문이다. 이렇게 파괴된 자연을 누가 어떤 수로,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되살려 놓을 수 있겠는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동영상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보수언론은 묵묵부답이다. 한 때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비리와 불법을 폭로한 적이 있었다. 그가 펴낸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이건희 회장 일가가 얼마나 많은 비리와 불법을 자행하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는지가 다 드러난다.

 

삼성은 어떤 기업인가? 한국 최고의 세계적 기업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최악이다. 회사 돈을 자기 돈처럼 물 쓰듯 쓰고, 탈세와 탈법을 쉽게 저지른다. 삼성이 이 사회 곳곳에 처 놓은 그물망과 같은 동맹체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삼성 장학생이 줄지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사회는 부패해지고 온갖 비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벌어진다. 삼성이 한국사회의 권력이 되고 있고 그 삼성을 향한 이 사회의 신앙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삼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런 식의 복음이 퍼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건희 회장 일가의 전유물처럼 전락해버린 삼성은 그 안에 있는 무수히 정직한 이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삼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민들을 모독하고 있다. 그러면서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부정의한 생각을 유포하고 있다. 2009년 이명박 정권은 이건희 회장을 특별 단독사면했다. 법은 차별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실과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만 봐도 이는 입증된다.

 

하기사 ‘깨끗한 부자’를 설파한 어느 목사는 한 때 남강 이승훈 선생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동격의 차원에서 언급하면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님에게”라는 구구절절한 편지를 띄웠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화려한 거탑을 꿈꾸는 마음으로는 진정한 신앙은 없다. 예수님은 그 웅장한 성전이 민중들의 피를 빨고 돈으로 가득 찬 것을 알아보시고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그런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서민들의 마음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삼성의 금력이 신앙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는 예수의 삶을 다시 자신의 신앙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무소유가 어렵다면, 소박하고 간결하게 살아가는 훈련을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목회자부터 그리고 지위가 높을수록 비싼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교회가 진정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깨달아질 것이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돈의 권력이 숭상되는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는다. 십자가도 없다. 삼성과 십자가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니, 도리어 십자가는 삼성의 권력과 맞서는 이들이 지고 가는 표징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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