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21)

 

이용문ㆍ박정희의 부산 쿠데타 음모

 

 

6.25 전란시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군사 쿠데타가 기도되었다. 일부 군인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장면 전 국무총리를 옹립하려는 계획이었다. 쿠데타 주동인물의 하나는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할까. 1952년 여름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고 기도하였던 박정희는 그로부터 9년 후 장면 정권을 전복하고 스스로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6ㆍ25 전란기에 첫 발을 뗀 쿠데타 모의는 길지 않은 우리 헌정사에서 몇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5ㆍ16쿠데타’와 쿠데타적 사건인 ‘12ㆍ12’, 그리고 ‘5ㆍ17 쿠데타’가 그것이다. 10월 유신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친위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몇 차례의 쿠데타와 ‘쿠데타적 사건’ 으로 현대사는 장기간의 군부통치를 겪었고, 지금까지도 그 작용과 반작용의 역학구조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52년 봄 이승만의 권력욕은 헌정질서를 유린하면서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광복 이후 첫 군사 쿠데타 기도는 바로 정치파동의 와중에서 모의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6ㆍ25전쟁 발발로 부산에 피난 때인 52년 여름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집권을 위해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 전쟁중에 터져 나온 행정상의 무능력, 부정부패,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등으로 이승만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이런 데도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의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추진하는 한편 신당운동을 통해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직선제 개헌안이 52년 1월 국회에 상정되어 재석 163명 중 가18, 부143, 기권 1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국민회ㆍ조선민족청년단ㆍ대한청년단ㆍ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 관제데모를 부추겼고, 정치깡패집단인 백골단ㆍ땃벌떼ㆍ민중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된 벽보ㆍ삐라가 부산 일대를 뒤덮었다. 이승만은 52년 4월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 그가 이끌던 신라회를 개헌지지 쪽으로 끌어들였다.

 

5월 22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ㆍ전남북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범석을 내무장관에, 원용덕을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 내각책임제 개헌추진 주동의원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26일에는 국회의원 50여 명이 탄 버스를 헌병대로 강제로 끌고 가 일부 의원에게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우기도 했다.

 

이처럼 정국의 혼란이 가중되자 6월 20일 이시영ㆍ장면 등 야당의원들과 독립운동가 김창숙 등 60여 명이 국제구락부에서 호헌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괴한들의 습격으로 무산되었다. 이때 장택상이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국무총리의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 임면,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불신임 결의권을 덧붙여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제안하였다. 개헌안은 7월 4일 경찰과 헌병대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기립투표방식에 의해 출석의원 166명중 찬성 163, 기권 3으로 통과되었다.

 

이 발췌개헌에 따라 8월 5일 대통령직선제 선거를 실시,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 내무장관으로서 개헌과정에서 이승만의 심복 노릇을 한 이범석은 자유당 공천의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 이승만은 이범석의 족청계가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 도중 무소속의 함태영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여 부통령에 당선시켰다. 이범석은 ‘토사구팽’ 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 기도는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되었다.

 

 


<육본 작전교육국 근무 시절 이용문 국장과 박정희 차장. 
출처 -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8611 >

 

육군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과 작전교육국 차장인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한 주동자다. 일본육사 50기 출신인 이용문과 57기 출신인 박정희는 특별한 연고를 갖고 있었다.

 

6ㆍ25 전 이용문이 정보국장일 때 박정희는 이 부처의 문관으로 있었고, 9사단 부사단장일 때 그의 참모장이었으며, 요직인 정보국장에 취임하면서는 박정희 대령을 정보국으로 데려올 만큼 두 사람은 끈끈한 관계에 있었다.

 

쿠데타 모의는 이용문과 박정희에 의해 주도되고 참모총장인 이종찬을 영입한다는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구체적인 작전으로는 경남 언양에 주둔하고 있던 제15연대 연대장에 유원식(5ㆍ16에 참여. 최고회의 최고위원 역임)을 임명하여 이 병력으로 부산을 점령한 뒤 해공군의 협력을 얻어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민정으로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5월 중순께로 거사일을 잡고, 제15연대 병력 2천여 명을 동원하여 원용덕 장군이 거느리고 있는 대통령 친위병력 4-5백 명을 제압하여 정권을 장악한다는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였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하여 살해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거듭되는 정치적인 실정과 헌정유린, 사병화한 군동원령 등 이미 국가원수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들은 이 대통령의 대안으로 국무총리직에서 해임당한 장면을 추대할 계획이었다. 이용문은 5월 10일 평양고보 후배로서 4월 20일 사임한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낸 선우종원을 은밀히 만나 무력혁명으로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 박사를 추대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에 선우종원은 “이 박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고 이용문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고 대답하면서, “이 거사는 이종찬 참모총장도 알고 있고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묵계도 받아두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쿠데타 모의과정에서 이 총장과 밴플리트 사령관이 어느 정도로 알고 있었고 묵계를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용문과 박정희에 의해 모의된 쿠데타 기도가 당시 정치파동에 계엄군 동원을 거부한 이 총장과는 달리 밴플리트 사령관은 묵계 또는 양해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쿠데타 기도가 장면측에 의해 거부된 직후 주한미군에 의해 다시 시도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용문으로부터 쿠데타 계획을 전해들은 장면측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이로써 장면 추대의 쿠데타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다.

 

이 쿠데타의 기도는 주한미군측이 한국군을 동원하여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쿠데타 계획이었다. 전남에 주둔한 이용문 연대에서 1개 대대, 거창의 박경원 연대에서 1개 대대를 빼내어 부산의 이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계획은 이용문ㆍ박정희의 전략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들은 2개 대대의 병력으로 원용덕 부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야당이 우세한 국회에서 이승만을 실각시킨 다음 새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정부수립 초기의 몇 차례 쿠데타 기도는 이렇게 좌절되었지만, 박정희의 야심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구체화 되어 가고 있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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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20)

 

반독재의 신호탄 2ㆍ28대구학생봉기

 

 

1950년대 한국은 전쟁과 전후의 황폐한 국토, 이승만 정권의 폭정으로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은 암담한 시기였다. 이런 속에서도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위해 정치적 폭주를 자행하고 있었다.

 

1960년 봄으로 예정된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무소불위,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했다면 이승만은 경찰을 앞세웠다.

 

기성세대들은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로 비판과 저항정신을 잃고 현실순응적인 ‘순한 양’이 되었다. 이승만 시대의 경찰은 일제강점기의 순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국민들은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가히 법위에 군림하였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유행어가 나돌만큼 국민들은 침묵이 강요되었다. 민주주의는 허울뿐이고 경찰국가체제로 국가가 운영되었다.

 

3ㆍ15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4선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였다. 자유당 정권은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대구에서는 특별한 선거전략을 짰다.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28일로 예정된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장에 정치에 민감한 고등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책에 부심했다. 그 결과 시내 고등학교장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일요일에 등교시킬 것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경북고는 학기말 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대구상고는 졸업생송별회, 대구여고는 무용발표회 등의 명목으로 28일 일요일 등교지시를 내렸다. 하나 같이 예정에 없던 일들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적 위난이 닥칠 때이면 가장 먼저 구국의 전열에 나선 것은 청년ㆍ학생들이었다. 1919년 도쿄 2ㆍ8독립선언이 고렇고, 3ㆍ1혁명도 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1919년 중국 지린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의 핵심멤버들도 청년들이었다.

 

자유당 경북도당이 학교장들에게 일요일 등교의 지침을 내린 사실을 알게 된 경북고ㆍ대구고ㆍ경북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25일 밤부터 비밀회합을 갖고 일요일에 등교하여 항의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 정권이 전국의 학생들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묶기 위해 조직한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붕괴 전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반독재 첫 봉화를 올린 것은 경북고생들이었다. 2월 28일 낮 12시 50분 교내 운동장에 모인 800여 명의 학생들은 준비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민주주의를 살리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대구시내 중심가로 행진했다.

 

대구고등학생 200여 명도 오후 2시경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를 벌이고 경북여고생 100여 명도 시위에 참여했다. 경북사대부고생들은 교사들이 시위를 눈치 채고 학생들을 강당에 가두어서 오후 늦게 시위에 나섰다. 이외에도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농업고등학교, 대구상업고등학교 등이다.

 

 


<출처: 2.28 민주운동기념사업 50년, 2010>

 

학생들은 시위에 나서기 전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밝혔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각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눈물을 많이 흘린 학도(⋯) 이 민족애의, 조국애의 피가 끓는 학도의 회침을 들어주려는가? 우리는 끝까지 이번 처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있을 때까지 싸우련다. 이 민족의 울분, 순결한 학도의 울분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

 

학생대표에 의해 ‘결의문’이 낭독되자 학생들은 의기에 넘쳐 박수와 환호성으로 답례하고, 시내로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암울했던 회색의 시대를 떨치고 학생혁명의 새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대구고등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대해 대구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북고등학교에서는 전체 학생들에게 극장단체관람을 위해 일요일인 2월 28일 하오 1시까지 등교할 것을 지시했다. 28일 상오 12시 50분까지 학교에 나왔던 2백여 명의 학생 앞에서 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 군이 공휴일에도 등교시키는 폐습을 시정하자고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일요일에 등교시킨 학교 당국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2백여 학생은 이 선동에 호응하여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경찰측의 종용으로 해산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다”(<대구매일신문>, 1960. 2. 28).

 

경찰은 이날 저녁 7시 40분경 학생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학생 30여 명 등 300여 명을 연행 했다. 연행된 학생간부들에게 경찰은 폭행하면서 배후를 캐묻고 빨갱이들의 소행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시위 확대를 우려한 자유당 중앙당의 지시로 모두 석방하였다.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이 켜든 횃불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민주당 선거강연이 끝난 후 강연회에 참석했던 1,000여 명이 “학생들은 궐기하라”, “공명선거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3월 8일에는 대전고학생 1,000여 명, 3월 10일에는 대전상고생 300여 명, 수원농고생 300여 명, 충주고생 300여 명, 3월 12일 부산해동고생ㆍ청주고생, 3월 13일 오산고생 100여 명, 3월 14일 원주농고생ㆍ부산의 동래고생ㆍ부산상고생ㆍ항도고생ㆍ테레사여고생ㆍ포항고생, 서울의 중동고생ㆍ배제고생ㆍ대동고생ㆍ보인상고생, 인천의 송도고생 등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3월 13일 서울의 고등학생들은 시내 시공관 앞ㆍ미도파ㆍ반도호텔ㆍ시청ㆍ국제극장 등까지 진출하여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면서 공명선거를 요구하고,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민주당원 30여 명이 시위한데 이어 곧 마산시청 앞에서 시민 1만여 명이 행진하고 경찰이 발포하면서 3ㆍ15의거가 진행되었다.

 

대구 2ㆍ28 학생 시위로 촉발된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이어서 마산의거, 4ㆍ19혁명으로 이어졌다. 2ㆍ18학생 의거는 단순히 일요등교 지시에 대한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시위가 아니었다. 학생들은 기성세대가 눈앞에서 벌어진 선거부정과 각종 사회악에 침묵하자 의로운 젊은 혈기로써 시대정신을 갖고 궐기한 것이다.

 

2ㆍ28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의의는 선도성(先導性)에 있다고 할 것이다. 2ㆍ28은 식민통치, 미군정, 분단국가의 수립, 한국전쟁, 이승만 권위주의 정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효능’에 회의적 태도를 내면화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2ㆍ28은 냉전체제와 분단체제를 기초로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이승만정권에 저항을 시작함으로써 체념적 순종 상태에 있던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정부 수립 이후 민주운동을 선도함으로써 2ㆍ28은 4월혁명의 횃불을 밝혔다. (김태일,<4월혁명의 출발 - 2ㆍ28 대구민주운동의 정치사적 의의>)

 

대구 2ㆍ28시위 반세기도 더 지난 2015년 초 대구 교육당국이 시내 고등학생들을 특정 영화 무료관람을 시켜서 물의를 일으켰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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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년 역사 키워드 70(19)

 

4월 혁명, 사상초유의 독재타도

 

 

우리나라 역사는 왕조창업, 반정 반란, 민란, 쿠데타, 유신 등 여러 가지 정치 변혁이 있었으나 ‘성공한 혁명’은 한 번도 없었다. 전봉준의 동학혁명과 1919년 3ㆍ1혁명은 좌절된 혁명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민중이 최초로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1960년 4월의 민주혁명은 3 ㆍ15부정선거로부터 발화되었다. 마산에서 일기 시작한 부정선거 규탄의 시민ㆍ학생시위는 쉽게 서울과 부산ㆍ대구ㆍ광주ㆍ목포ㆍ청주 등 대도시로 번졌다.

 

2월 28일 당국이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조치한 데 반발하여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을 기점으로 하여 주요도시의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에 앞장섰다.

 

김주열의 시체인양으로 마산의 2차 시위가 4월 11일에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 다시 기폭제가 되었다. 이날의 고대생 시위는 구호를 부정선거에서 독재타도로 바꾸어놓았고, 이튿날인 4월 19일을 기해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총궐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고교ㆍ대학생을 비롯해,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 시위대의 일부가 경무대로 향하는 한편,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ㆍ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 명의 시민ㆍ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의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서울에서만 이날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260명이 부상당했다. 희생자는 하층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명, 무직자 33명, 대학생 22명, 국민학생ㆍ중학생 19명, 회사원 10명, 기타 5명 등이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방지하고 파괴방지에 전념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4월 21일 내각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정권 유지를 꾀했다. 그러나 이미 혁명적인 열기에 휩싸인 민중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ㆍ15부정선거와 4ㆍ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4백여 교수들은〈4ㆍ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ㆍ25교수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시 시민ㆍ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새로 임명된 외무장관 허정, 계엄사령관 송요찬과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대통령은 4월 26일 오전 10시를 기해 발표된 하야성명을 통해,

 

1. 국민들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ㆍ15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3.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의 개헌을 하겠다.

4. 선거로 인한 모든 불만스러운 점을 없애기 위하여 이기붕 의장을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대통령의 전격적인 하야성명이 발표되기 직전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26일 아침부터 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데모를 벌이고 있던 시위군중 속에서 5명의 대표를 골라 이승만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송요찬은 이날 아침 데모군중들에 의해 탑골공원에 있던 이 박사의 동상이 파괴되고, 그 동상의 목에다 줄을 걸고 끌고 다니는 것을 목격했으며, 수십만의 군중이 경무대 어귀에 집결하는 것을 보고 이승만의 하야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 무렵 사태수습을 협의 중에 있던 국회는 3ㆍ15선거의 무효화 선언과 내각책임제의 개등을 수습방안으로 채택했다가 이 대통령의 하야소식이 발표되자 긴급회의를 소집, 이 대통령의 사임권고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회의 결의가 전달되자 이 대통령은 4월 27일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전달했다.

 

이로써 이승만의 12년 독재 통치는 종식되고, 그는 4월 28일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다가 곧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되고, 4ㆍ19혁명에 의해 두 번째 탄핵당한, 부끄러운 정치인이었다.

 

4ㆍ19혁명은 몇 갈래의 역사적 의지가 접목되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 하나는 동학혁명의 맥박이요, 다른 하나는 3ㆍ1혁명의 혼이다. 황토현에서 찢긴 민중의 혼이, 탑골공원에서 산화된 독립의 의지가 4ㆍ19에 접목되어 벽혈로 발휘되었다. 때문에 4ㆍ19의 의의를 단순 도식의 정치변혁운동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첫째, 계층ㆍ신분ㆍ지역ㆍ성별의 구분 없이 민중이 하나가 되어 일으킨 국민혁명.

둘째, 외세는 물론 특정 정치집단의 조종이 아닌 민중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주체혁명.

셋째, 반공을 분명히 하면서도 남북대화를 제의하는 민족통일정신.

넷째, 매판자본ㆍ원조물자 착복 등 전근대적인 경제질서 타파하고 산업의 근대화 제시.

다섯째, 전근대적 신민의식에서 근대적 시민의식을 고취한 시민정신.

여섯째, 정체된 사회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신생활운동.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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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사형과 진보정치 압살

 

 

6.25 한국전쟁이 겨우 정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체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들어가 죽어버렸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한반도 남쪽에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가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민주사회주의 깃발을 내걸고 진보당을 창당하여 활동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승만의 라이벌 제거와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 된 것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도전자는 죽음(죽임)이 따랐다. 제헌의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처형되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이던 김구는 암살되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병사하고, 현직 부통령 장면은 수하들이 총을 쐈지만 ‘불행히’(다행히) 죽지 않았다. 다음은 조봉암의 차례였다.

 

제2,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도전하고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정권위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정부 조각 때에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했던 사람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처형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는 이유를 댔지만 목적은 정적제거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평화통일운동과 비판세력을 종북 좌경으로 몰아붙이는 터에 당시 정적이나 비판세력에 붉은 딱지를 붙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청년 조봉암은 공산주의 사상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 삼고 사회혁명사상으로 받아들여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광복을 맞아 전향했다.

 

이승만 정권에 똬리를 튼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재빨리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면서 독립운동가ㆍ남북협상세력ㆍ반독재민주인사들에게 용공의 너울을 씌우고 더러는 형장으로 끌어갔다.

이승만 정부는 사법부를 동원하여 독립운동가이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두 번이나 지낸 사람을 용공으로 몰아 처형했다. 어김없는 ‘사법살인’이었다. 노회한 이승만은 조각을 하면서 친일파ㆍ우파 일색의 인물들만으로는 미국과 유엔의 지지가 어려울 것으로 알고 공산주의자 출신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후 전향하여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참여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친일 지주계급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견제하고, ‘이승만 정부’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로 조각되었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그를 등용했다.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천거설도 있었다.

 

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각에서 한민당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이들이 친일지주 출신들이라는 이유와 함께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견제한 것이다. 한민당을 견제하면서 시급한 현안인 농지개혁을 단행할 적임자로조봉암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 공산주의운동을 하면서 친일파 지주계급에 증오심을 갖고 있었고, 미국과 유엔 등 대외용으로도 적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가을 조봉암의 대중적 인기는 국무위원 누구 못지않았다. 국민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일제와 친일 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려 온 농민들은 정부의 농지개혁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북한에서는 이미 해방 직후에 ‘무상몰수ㆍ무상분배’의 방식으로 농지개혁이 이루어 진 터였다.

 

조봉암은 농지개혁을 서둘렀지만 한민당의 제동으로 쉽지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아가는 조봉암의 행보에 심기가 편치 않았다. 농민들은 조봉암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신의주형무소에서 손가락 일곱 마디가 잘려진 손목을 잡으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승만과 대결하게 된 것은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면서부터였다. 이후 3대 대선 때에는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표가 나왔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세력에게 조봉암이란 존재가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승산이 어려웠다. 그래서 제거공작이 시작되었다.

 

‘사법살인’에는 법조계가 동원되었다. 그들은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양심과 법률을 팔았고, 조봉암은 끝내 사형대에 서게 되었다. 그를 ‘사법살인’으로 몰아간 검사ㆍ판사 중에는 친일행위자들이 적지 않았다.

 

조봉암은 1956년 1월 26일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혁신정당의 창당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제시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통일방안이었다. 평화통일론을 제시한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위반 협의로 구속하고 진보당을 기소한 검찰은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조봉암의 제거에는 보수신문과 야당, 미국에서도 침묵 또는 ‘묵시적 동조’의 분위기여서 일을 꾸미는데 어렵지 않았다.

 

검찰은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하고, 2월 16일 조봉암과 간사장 윤길중을 비롯하여 박기출ㆍ김달호ㆍ신창균ㆍ조규희ㆍ이명하ㆍ조규택ㆍ전세룡ㆍ이상두ㆍ권대복ㆍ이동화 등을 국가보안위반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조봉암에게는 국보법 외에도 간첩죄와 무기불법소지죄 등이 병합되었다.

 

 


<재판중인 조봉암 - 위키미디어 >

 

 

자유당은 1958년 24파동을 일으켜 국보법을 개정하였다. 언론탄압과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탄압하려는 목적이었다. 구속되기 전 측근들이 조봉암을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나도 진보당 탄압의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조봉암을 죽이기로 한 이승만 정부의 음모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첩자 양명산을 내세워 불순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모략 속에서도 1심은 징역 5년을 선고하는데 그쳤다. 용공판사를 죽이라는 따위의 관제시위가 벌어지고,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세 차례나 조봉암 문제를 언급하였다. 마침내 고등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도 그대로 따랐다.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조봉암에 대한 재심청구도 기각되었다. 대법원의 주심 판사였던 김갑수가 재심의 주심이 된 것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다. 일반적으로 사형수는 몇 차례 재심청구를 하고 확정판결 뒤에도 한 두 해 정도는 형의 집행이 연기되는 것이 관례였다.

 

7월 30일 하오 3시, 재심청구 기각통보를 받은 대검은 긴급회의를 열어 이튿날 상오에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할 것을 결정,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날이 밝아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대기중인 대검검사실에 전화로 “집행하라”는 법무장관 홍진기의 서명이 떨어졌다.

 

집행관은 의례적인 절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2011년 1월 20일 사법부는 재심에서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죽은 조봉암은 살아나지 못하고, 그의 평화통일론과 진보정치는 이어지지 못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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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7)

 

날치기로 강화된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은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의 불행한 현대사를 그 날개로 온통 뒤덮고 있는 거대한 괴조(怪鳥)와도 같은 것이었다.”(박원순)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1948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보안법처럼 국내외적으로 논란과 곡절을 많이 겪은 법률도 드물 것이다. 여수ㆍ순천사건 직후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법보다 먼저 제정된 보안법은 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 60년 민주당집권 때 폐기, 군사정권에서의 강화, 91년 5월 민자당에 의한 날치기 개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경위권이 발동된 가운데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이른바 ‘보안법파동’은 자유당 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하나의 폭거였다. 그해 5ㆍ2총선거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갈수록 지지기반을 상실해간 이승만의 자유당은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부심해오던 중 60년의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전을 겨냥, 야당의 발을 묶고 언론에 재갈을 물릴 목적으로 보안법을 강화하는 데 눈길을 돌렸다.

 

자유당은 이와 같은 숨겨진 목적 아래 간첩을 색출하고 좌경세력을 발본색원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해 8월 11일 신보안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유당 지도부가 정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된 신국가보안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되,

 

①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②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③ 상고심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

 

자유당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의원들은 “간첩개념의 확대규정은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고, “변호사의 접견금지와 3심제의 폐지는 명백한 헌법위반”이라며 반대에 나섰다.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95명은 ‘국가보안법개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백남훈, 지도위원에 조병옥ㆍ곽상훈ㆍ장택상 의원을 추대하여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자유당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 장택상 의원을 회유하여 위원장으로 추대함으로서 범야 연합전선의 붕괴를 기도하면서 강행통과를 서둘렀다.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무리를 거듭하면서 이 대통령의 3선에까지 이르렀는데, 60년 봄으로 예정된 4선을 위해 또 다시 보안법으로 억압통치의 장치를 만들어서 재집권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책략에서 1958년 1월 31일 차기 대통령 선거의 강력한 라이벌의 하나인 진보당 조봉암 위원장 등 간부 7명을 간첩혐의로 구속하고, 군정법령 55호의 발동으로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는 등 치밀한 정지작업을 벌여왔다. 이 ‘괴조’는 반세기도 훨씬 지난 2014년 11월 헌법재판관들의 손을 빌어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기까지 불사조가 되어 활약하였다.

 

목표를 ‘오로지 재집권’으로 설정한 자유당은 신보안법의 강행통과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워 12월 19일 법사위에 상정하여, 야당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의원만으로 3분 만에 기습 처리하는 변칙을 보였다.

 

자유당의원들의 기습작전으로 법사위에서 허점을 찔리고 만 야당의원들은 법사위의 변칙통과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두 당에서는 협상을 벌였지만 무위에 그치고, 제1공화국의 의정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되는 12월 24일이 다가왔다.

 

자유당 정부는 강행통과를 위해서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백 명을 임시로 특채하여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위해 훈련시켰다.

 

 


(출처: http://blog.ohmynews.com/cjc4u/240145 )

 

이날 상오 10시를 기해 무술경위들은 사회를 맡을 한희석 부의장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난입하여 연 6일째의 철야농성으로 지칠 대로 지친 야당의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지하실에 감금시켰다.

 

본회의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무술경위들의 폭력으로 야당의원의 비명이 의사당 안팎에 메아리쳤다. 무술경위들에게 저항하다가 많은 야당의원들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박순천ㆍ김상돈ㆍ허윤수ㆍ유성권ㆍ윤택중ㆍ김응주ㆍ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았다.

이렇게 야당의원들을 폭행한 무술경위들이 의사당의 모든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한희석 부의장의 사회로 자유당의원들만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법절차를 무시한 채 순식간에 보안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59년도 새해예산안과 12개의 새법개정안 등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보안법이 통과된 후 지하실 한구석에 감금돼 있던 야당의원들의 ‘금족령’이 풀리자 이들은 태평로 의사당 앞에서 “보안법무효”,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지만 ‘기차’는 이미 떠나고 말았다.

 

야당과 언론규제를 목표로 하여 2ㆍ4파동을 겪어가면서 보안법을 통과시킨 자유당 정권을 법의 효력이 발생한 지 20일 만인 59년 2월 5일 서울지방법원으로 하여금 당시 야당지인<경향신문>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내게 하고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 폐간명령을 내리는 등 정권말기적인 횡포를 서슴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 민족운동(가)의 탄압을 목적으로 하여 제정한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보안법은 국가안보보다 독재정권이 정부비판자(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악용돼 왔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1월 10일 이른바 ‘종북 콘서트’를 이유로 재미동포 선은미 씨를 강제 출국시킨 것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였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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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5)

 

‘못 살겠다 갈아보자!’

 

 

한국의 민주주의는 초장부터 독재자의 몽둥이에 상처입고, 군인들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런가 하면 운도 별로 따르지 않았다. 결정적인 시기에 야당 후보가 두 번 씩이나 급사한 것이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와 제4대 부통령 선거는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후보가 직선에 의해 대결하는 ‘선거다운 선거’의 효시가 되었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을 러닝메이트로 하고, 제1야당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 혁신계의 진보당은 조봉암과 박기출로 각각 진용이 짜여졌다.

 

4사5입개헌 파동으로 이승만의 3선출마의 길을 튼 자유당은 공공연하게 이 대통령의 후계자로 등장한 이기붕을 러닝메이트로 묶어 당선시키기 위해 1년 반 동안에 걸쳐 정지 작업을 서둘러 왔다.

 

그러나 노회한 이승만은 3월 5일 실시된 지명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았음에도 불출마를 선언, “제3대 대통령에는 좀 더 연부역강한 인사가 나와 국토통일을 이룩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이렇게 되자 자유당은 각종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이승만의 번의를 촉구했다. 연일 경무대(청와대) 어귀에는 관제 데모대가 집결하여 이승만의 재출마를 탄원하는가 하면, 각급 지방당부와 지방의회로부터 재출마를 간청하는 호소문ㆍ결의문ㆍ혈서가 답지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평소에는 서울시의 통행을 규제해오던 우차와 마차를 총동원하여 “노동자들은 이박사의 3선을 지지한다”는 함성을 지르도록 하는 소위 ‘우의마의’까지 동원했다.

 

이와 같이 관제민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자 3월 23일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민의에 양보하여 종전의 결의를 번복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고 밝혀 선거전에 나서는 곡예를 부렸다.

 

민주당도 정ㆍ부통령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과 타협이 벌어졌다. 후보선정에 있어서 신익희(민국당 계열)와 장면(원내 자유당 계열)의 지지세력 사이에 심각한 대립을 나타냈으며 부통령 후보에는 조병옥과 김준연이 경합을 벌였다. 그후 몇 차례의 타협 끝에 3월 29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후보에는 구파의 신익희, 부통령후보에는 신파의 장면을 선출했다.

 

혁신계에서는 진보당추진위원회에서 대통령후보에 조봉암, 부통령후보에 박기출을 내세웠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ㆍ신익희ㆍ조봉암으로 압축된 제3대 대통령 선거전은 5월 15일을 향해 서서히 열기가 달아오른 가운데 야권후보 단일화가 추진되었다. 조봉암은 ① 책임정치의 수립 ②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실현 ③ 평화통일의 성취 등 3가지 정책을 단일후보가 수용하면 사퇴하겠다고 제의했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에서도 야당연합을 기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협상제의를 수락하고 ① 내각책임제와 경찰의 중립화 ②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③ 경제조항의 재검토 등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고 야당연합전선을 위한 담판에 나섰다. 진보당은 막바지 회담에서 “진보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포기할 테니 민주당에서 부통령 후보를 포기하라”는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20여 일을 끈 야당협상이 지지부진한 채 5ㆍ15선거전은 어느새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를 “못살겠다 갈아보자”로 내걸고 자유당의 실정과 독재, 부정부패를 공격하고 나서고,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구호로 맞서면서 조직 확장에 총력을 경주했다. 민주당의 선거 구호는 역대 선거사상 가장 탁월하고 시의에 적합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선거전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전국 각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에까지 민주당은 붐을 일으켜 지지자가 늘어나고, 정부기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이 민주당에 동조하는 논조를 보이는 등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이 같은 선거분위기를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해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서울에서는 마지막 유세를 열게 되었다.

 

 


<신익희 한강 백사장 연설 - 한강스토리>

 

 

토요일 오후 한강 백사장에 30만 인파를 불러들인 이 강연회는 선거사상 처음 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구름같이 모여든 인파 속에서 신익희 후보는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심부름꾼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주인이 갈아치우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면서 정권교체를 역설하여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한강 백사장의 강연회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신 후보는 일요일인 4일 장면 박사와 함께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 지방에 야당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이리로 향했다.

 

그러나 연일 과로가 겹친 신 후보는 선거를 10일 앞둔 5일 새벽 4시쯤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운명하고 말았다. 제1야당의 후보를 잃은 채 실시된 선거전에서 이승만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야권 단일후보가 되었으나 민주당 신파는 ‘조봉암 대통령’보다는 ‘민주당부통령’을 택하여 결국 이승만의 재집권을 허용했다.

 

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437표, 조봉암 216만 3,808표, 신익희 추모표 185만표로 집계되었다. 엄청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총투표수의 80% 이상을 획득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겨우 52% 득표율에 그쳤다. 부통령에는 장면이 401만 2,654표로 380만 5,502표를 얻는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어 자유당은 이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다시 수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해공 신익희 장례식을 맞아 이희승은〈해공의 급서를 애통함〉이란 추모시를 지었다. 제2연을 소개한다.

 

해공의 급서를 애통함

 

하늘도 무심해라

임 가시는 이 날이여

땅을 치고 몸부림해도

천지는 아득히 말이 없네

온 겨레 환호소리

터지는 마당에

임이 가다니

이역 풍상에도

꿋꿋하던 그 모습

아! 해공 선생.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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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4)

 

수학공식까지 무시된 4사5입 개헌

 

 

이승만의 권력욕이 서서히 발동하기 시작했다. 휴전 1년여 후인 1954년 9월 7일 자유당은 선거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이기붕 의원 외 135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 제2차 개헌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개헌안의 내용은,

 

① 국민투표제의 채택 -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를 채택하는 것.

②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민의원에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 임권을 부여하는 것.

③ 참의원의원은 2부제로 개선하는 것.

④ 참의원에 대법관 기타 고급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을 부여하는 것.

⑤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ㆍ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ㆍ사영원칙으로 옮기는 것.

⑥ 현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폐지하는 것.

⑦ 기타 8개 항의 개정사항을 포함한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개헌안 중에는 민주주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빚좋은 개살구격이고 핵심은 대통령의 중임을 1차에 한해 인정한 것을, 이 헌법 개정 당시의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승만에게 종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을 트자는 속셈이었다.

 

불과 2년 전 부산에게 정치파동을 일으키면서 발췌개헌으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종신 대통령을 꿈꾸면서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당의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1월 18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국회상정에 앞서 이승만 정권은 ‘뉴델리 밀담설’을 조작, 극우 반공의 본산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개헌 반대운동을 제압하고 개헌 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조작한 뉴델리 사건은, 같은 해 10월 27일 전 민국당 선전부장 함상훈이, 신익희 민국당 위원장이 1953년 6월 2일 당시 국회의장 자격으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참석한 후 귀국길에 인도의 뉴델리 공항에서 6ㆍ25 때 납북된 조소앙과 밀담하고, 비공산ㆍ비자본주의 제3세력을 규합,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한국의 중립화를 도모하기를 획책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 같은 어마어마한 사실을 날조하여 정적을 용공으로 몰아가면서 종신집권의 개헌을 감행하려고 했다.

 

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포되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은 일요일인데도 자유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3분의 2는 135이라도 무방하다는 특별성명을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전에 나섰다.

 

27일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학 수학 교수 최윤식 등의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을 착안하고, 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여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설에는 개헌안이 부결된 후 자유당 간부들이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경무대(현 청와대)로 갔더니, 이 대통령이 135표이면 4사5입하여 통과된 것이라고, 이미 어용교수의 진언을 빌어 통과를 기정사실화 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로 선포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4사5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음날 29일 최 부의장은 개회 벽두에 전차회의에서 개헌안이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번복하자, 야당의원들이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최 부의장을 끌어내리는 등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무술경위들을 동원한 폭력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반적인 수학공식까지 무시한 채 강행한 개헌으로 이승만의 종신 대통령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사사오입 발췌 개헌에 항의하는 이철승, 곽상훈 등 야당의원들, Wikimedia Commons>

 

우리 헌정사에서 여러 차례 권력 연장을 위한 개헌이 있었지만, 수학의 일반 원칙까지 무시한 채 자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헌법학자 유진오는 “각국의 전례는 이런 경우 찬성표수는 적어도 반대한 3분의 1을 기준으로 하여 그 배수, 즉 68의 배수인 136이라고 주장하며, 부결을 선포한만큼 사실의 착오가 아닌 이상, 개헌안은 부결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대법원장 김병로는 “4사5입이란 본래 남은 4를 버리는 것이지 모자라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혀 개헌안 번복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4사5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한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상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자유당 소장파 의원들의 무더기 탈당이 뒤따랐고, 민국당은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 호헌동지휘를 구성함으로써 민주당 창당의 계기가 되었다.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이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장식물이 되고, 이 같은 악습은 박정희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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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3)

 

아직까지 회수되지 못한 전시작전지휘권

 

 

이승만은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을 통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했다. 아무리 전시라고 하더라도 기한도 명시하지 않은 채 국군지휘권을 외국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것이다. 다음은 이승만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공한이다.

 

“대한민국을 위한 국제연합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내 또는 한국근해에서 작전중인 국제연합의 육ㆍ해ㆍ공군의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감(鑑)하여 본인은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오며, 여사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 내 또는 한국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여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심후하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나이다.”

 

이렇게 미군에게 넘겨준 전시작전 지휘권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수되지 못하였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측이 되돌려 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은 것이다. 박근혜대통령은 2014년 거의 무기한으로 다시 연장시켰다. 유엔회원국가 중 전작권이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되고 있다.

 

 

 

 

전쟁 중에 이승만(정부)의 행태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보호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제2국민병에게 해당하는 만 17~40세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환자가 발생했다. 이들이 부정처분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료 24억 원, 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

 

국회는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되고, 사건을 일으킨 김윤환 등 4명은 처형되었다. 국회조사단이 구성되어 국민방위군사건의 조사에 나서자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고 이기붕을 임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으나 이승만과 정부의 행태, 군부의 부패 문제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6ㆍ25전쟁을 전후하여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전국(남한) 도처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경찰, 특무대,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해 ‘빨갱이’, ‘통비분자’로 몰려 자행되고, 미군에 의해 집단 학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 있어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보도연맹은 1949년 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군ㆍ경ㆍ서북청년단 등이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예비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군ㆍ경과 우익 단체들은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 전역에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해안지방에서는 배에 실어 돌을 매달아 수장한 경우도 많았다.

 

6·25한국전쟁 기간에 남한 국민들은 북한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도 많았으나 군ㆍ경과 우익단

체ㆍ미군에 의해 희생된 경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일차적인 책임은 현지 관련자들이지만,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정부는 북한군에 밀려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했다가 1950년 8월 18일 부산으로 옮겼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략으로 선조가 국토의 최북단 의주로 피난한 이래 358년 만에 이번에는 이승만이 최남단 부산까지 피난한 것이다. 임진전쟁 때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6ㆍ25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선조는 한때 명나라로 망명을 준비하고, 이승만은 일본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피난지 부산에 내려온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의 권력욕과 자신에 대한 견제, 끝없이 이어지는 동족상잔과 거창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은폐조작 등을 지켜보면서 1951년 5월 1일〈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내고 사임서를 피난국회에 제출하였다.

 

전시하에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고 희생되고 있는데 정부관리들과 군부에서는 엄청난 부패가 자행되고 있었다. 이시영은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보면서 사임한 것이다.

 

6ㆍ25한국전쟁 발발 2년 차가 된 1952년이 되었다. 이승만의 임기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이기도 했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처음으로 휴전회담이 개최된 데 이어 10월 25일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열렸다. 전쟁은 소강상태에서 휴전(정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6ㆍ25 한국전쟁시기 이승만의 행위 중에 그나마 손꼽히는 것은 1952년 1월 18일 한반도 주변수역에 한국의 주권을 선언한 해양선인〈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즉 평화선을 선언한 일이다.

 

‘이승만 라인’이라고도 불리는 평화선은,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53해리)에 달하는 평화선을 선포한 이유는 ① 한ㆍ일간의 어업상의 격차 ②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보호 ③ 세계 각국의 영해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 ④ 일본 주변에 선포된 해역선인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따른 보완책 등에 따른 조처였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이 평화선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여러 가지로 구상을 거듭하였다. 원래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 구도였다. 그래서 짜낸 것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라도 전시하에서는 간선제로 바꾸는 것이 도리일 터인데 이승만은 거꾸로였다. 국가의 안위나 정치의 일반 상식보다 자신의 위상을 우선시하였다.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유당을 발족했다.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연맹 등의 대표들을 모아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다.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을 앞두고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악명 높은 자유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은 향후 10여 년 동안 집권당으로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1951년 11월에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952년 1월 28일 국회의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국당 등 야권은 여세를 몰아 1952년 4월 국회의원 123명이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은 5월 14일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꺼내 맞불을 놓았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 측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ㆍ땃벌떼ㆍ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리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지지 관제데모, 가두시위, 국회 앞 성토대회, ‘민의 외면한’ 국회의원 소환요구 연판장 등 광적인 이승만 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관제데모와 경찰의 방관ㆍ방조 등으로 국회와 사회의 반 이승만 정서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은 국회에 개헌정족수인 3분의 2보다 1표가 더 많은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 분위기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기울게 되자 이승만은 강압적인 수법으로 나왔다.

 

합법인 방법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월 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측근 원용덕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개헌 공작에 동원했다. 적과 대치 중인 전방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등청하는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영ㆍ김창숙ㆍ김성수ㆍ장면 등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부산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6ㆍ25기념식상에서 김시현ㆍ유시태 등의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을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발췌개헌안이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형식을 취한 내용이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ㆍ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명, 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발췌개헌은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사실상 친위쿠데타였다.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조봉암과 이시영은 각각 유효표의 11.4%, 10.7%를 획득했다. 전시하에서 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였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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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2)

전쟁통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긴 이승만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면 필연적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해서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가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소련제 T- 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전면남침 보고를 6시간 뒤에야 받은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당시 7시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듯이, 이승만은 국난의 시간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긴급 국무회의는 전쟁발발 10시간이 지난 오후 2시에 열렸다.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엉터리 보고를 하였다. 채병덕은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 중이며 곧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실제로 그 시각 제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국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군ㆍ만군 출신들로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안보는 뒷전이고 뇌물과 승진에만 혈안이 되었다. 남침 전야인 24일 저녁 군 수뇌부는 육군장교클럽 개관식을 기념하는 성대한 심야파티가 열렸다. 그리고 국군 전 장병에 대해 외출ㆍ외박과 휴가가 실시되었다. 이 파티에는 육군본부의 수뇌ㆍ미군사고문단ㆍ서울근교의 일선지휘관들이 초청되었다. 밤10시까지 파티는 계속되고, 2,3차까지 이어졌다. 채병덕도 새벽까지 술을 마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남침 보고를 받았지만 방어대책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국무회의에서는 엉터리 보고로 시종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와중에도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챙겨갔다. 직전에 국회에서는 수도사수를 결의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철수’를 통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지 30분 후에 육군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명이 수장되고, 이후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27일 밤 9시경 녹음 방송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는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허위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27일 새벽 4시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정부의 천도를 의결하고,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했는데, 이는 그대로 미 국무부에 보고되었다. 대전에서 4일을 머문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했고, 7월 2일에는 목포에 도착하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초기의 로얄 타임을 도망치느라고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특히 49년과 50년의 38선 부근은 남북 양측 군대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속출하여 준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신성모는 “아침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허언장담을 일삼고, 이승만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6.25직전 북한은 기동훈련의 명분으로 군을 38선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대도 국방당국은 근거 없는 ‘태평가’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등 군통수권자들의 무능ㆍ무책임으로 북한군은 손쉽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6.25전쟁은 몇 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겹쳐 발생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➀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➁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500명의 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 ➂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고, ➃ 1949년 12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았다.

국내적인 요인은 ➀ 김구ㆍ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정치적 암살, ➁ 농지개혁의 미진으로 농민의 불만. ➂ 반민특위 해체로 국민의 분노. ➃ 남로당의 붕괴로 남한내부의 ‘인민혁명’가능성 희박. ➄ 5.30총선(제2대 국회)의 결과로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⑥ 민족해방투쟁의 경쟁 상대로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 ⑦ 북한군에 대한 국군의 병력 열세 등이 지적된다. ⑧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이 적절한 규모의 국지전을 바라고, 남침 정보를 방치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북한군은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 - 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고 1949년 3월에는 북ㆍ소간에 군사비밀협정에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 2만 5천 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다.

남한은 1946년 1월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ㆍ해군의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 해병대, 10월에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부가 피난에 급급할 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한국시간)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9대 0으로 결의했다. 소련 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는다. 소련이 북한을 전쟁에 내세워 중국과 미국이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책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역전되었으나 초기 전세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하였다.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ㆍ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 탈환 ⟶ 38선 넘어 진격 ⟶ 평양점령 ⟶ 국군 일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 철원ㆍ금화까지 진격하고,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소련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3년 동안 전개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쌍방 360만 명의 부상자,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고, 남북에 이승만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분단체제가 더욱 굳어졌다. 이후 한반도는 동서냉전의 분계선이 되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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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2)

전쟁통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긴 이승만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면 필연적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해서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가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소련제 T- 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전면남침 보고를 6시간 뒤에야 받은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당시 7시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듯이, 이승만은 국난의 시간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긴급 국무회의는 전쟁발발 10시간이 지난 오후 2시에 열렸다.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엉터리 보고를 하였다. 채병덕은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 중이며 곧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실제로 그 시각 제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국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군ㆍ만군 출신들로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안보는 뒷전이고 뇌물과 승진에만 혈안이 되었다. 남침 전야인 24일 저녁 군 수뇌부는 육군장교클럽 개관식을 기념하는 성대한 심야파티가 열렸다. 그리고 국군 전 장병에 대해 외출ㆍ외박과 휴가가 실시되었다. 이 파티에는 육군본부의 수뇌ㆍ미군사고문단ㆍ서울근교의 일선지휘관들이 초청되었다. 밤10시까지 파티는 계속되고, 2,3차까지 이어졌다. 채병덕도 새벽까지 술을 마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남침 보고를 받았지만 방어대책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국무회의에서는 엉터리 보고로 시종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와중에도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챙겨갔다. 직전에 국회에서는 수도사수를 결의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철수’를 통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지 30분 후에 육군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명이 수장되고, 이후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27일 밤 9시경 녹음 방송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는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허위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27일 새벽 4시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정부의 천도를 의결하고,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했는데, 이는 그대로 미 국무부에 보고되었다. 대전에서 4일을 머문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했고, 7월 2일에는 목포에 도착하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초기의 로얄 타임을 도망치느라고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특히 49년과 50년의 38선 부근은 남북 양측 군대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속출하여 준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신성모는 “아침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허언장담을 일삼고, 이승만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6.25직전 북한은 기동훈련의 명분으로 군을 38선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대도 국방당국은 근거 없는 ‘태평가’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등 군통수권자들의 무능ㆍ무책임으로 북한군은 손쉽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Korean War Montage 2Wikimedia Commons.>

 

6.25전쟁은 몇 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겹쳐 발생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➀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➁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500명의 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 ➂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고, ➃ 1949년 12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았다.

국내적인 요인은 ➀ 김구ㆍ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정치적 암살, ➁ 농지개혁의 미진으로 농민의 불만. ➂ 반민특위 해체로 국민의 분노. ➃ 남로당의 붕괴로 남한내부의 ‘인민혁명’가능성 희박. ➄ 5.30총선(제2대 국회)의 결과로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⑥ 민족해방투쟁의 경쟁 상대로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 ⑦ 북한군에 대한 국군의 병력 열세 등이 지적된다. ⑧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이 적절한 규모의 국지전을 바라고, 남침 정보를 방치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북한군은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 - 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고 1949년 3월에는 북ㆍ소간에 군사비밀협정에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 2만 5천 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다.

남한은 1946년 1월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ㆍ해군의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 해병대, 10월에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부가 피난에 급급할 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한국시간)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9대 0으로 결의했다. 소련 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는다. 소련이 북한을 전쟁에 내세워 중국과 미국이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책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역전되었으나 초기 전세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하였다.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ㆍ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 탈환 ⟶ 38선 넘어 진격 ⟶ 평양점령 ⟶ 국군 일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 철원ㆍ금화까지 진격하고,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소련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3년 동안 전개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쌍방 360만 명의 부상자,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고, 남북에 이승만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분단체제가 더욱 굳어졌다. 이후 한반도는 동서냉전의 분계선이 되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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