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의 노래 신학(15)

 

어떤 바람

호시노 도미히로 시 / 한경수 곡

- 1993년 만듦, ‘신의 정원’ 음반수록 -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불면 녹색 바람이

꽃에 불면 꽃바람 되고요.

음~ 바람은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

 

시대의 죄가 사무칩니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차마 떳떳이 볼 수가 없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동그란 눈을 뜬 아가의 눈을 차마 또렷이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그 일들을 마주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 한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죽음의 나이를 센다든지,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깊은 관심과 세심한 살핌 없이는 어렵습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폭풍처럼 지나갑니다. 어제를 지나 오늘, 오늘을 건너 내일. 그냥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그냥 오늘이 아니라 백년을 걸어온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사는 인류는 ‘발전’이라는 명분과 ‘현대화’라는 무기를 앞세워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기술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부를 향해 욕망의 담을 넘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것은 탁한 공기, 썩은 물, 마른 땅, 사라지는 꽃, 갈라진 대지, 시드는 지구의 얼굴입니다.

 

이런 모순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인간이 만든 ‘모든 문명’에서 비롯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늘도 밤낮을 모르며 집을 짓고, 산을 없애고, 도로를 닦고, 강을 막고, 생산하고, 또 생산하고….

 

 

 

 

‘시대의 바람’이 지나갑니다. 각자의 인생에 ‘시간의 바람’이 불어갑니다. 이 시대는 제 숨을 쉬고 있는 걸까요. 꽃에 바람 불어도 그 향기 없고, 들판에 무명초는 춤추지 않습니다. 아침에 불어도 시작은 없고, 저녁에 불어도 쉼은 없습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지나가는 바람은 ‘다른 바람’이 됩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이 시대를 지나가는 바람은 분명,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다른 바람’이 됩니다.

 

어이없는 죽음들이 우리 앞으로 매일 밀려옵니다. 수백 가지 이유를 들먹이고 다양한 담론을 형성하고 밤을 새워 토론하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모두 ‘자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돈’이지요.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속절없는 세월 앞에 돈으로 버티고 저항하고 누리는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진리도 경전도 윤리도 ‘돈’과 ‘누리는 이익’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겁니다.

 

형언이 어려운 참담한 비극 속에서도 생색을 내려는 눈동자들은 밤에 짐승처럼 빛납니다. 자본의 제국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안간힘을 쓰는 선한 싸움 속에서도 그 음흉한 얼굴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자본의 바다에서 호사를 누리는 자들보다도 그것을 상품으로 삼아 다시 제 뱃속을 채우는 소위 바리세인, 율법주의자들(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에겐 더욱 숨이 막힙니다.

 

거대하고 막막한 괴물인 자본주의 앞에 서서, 그 끝없는 욕심과 폭력을 매일 대하며 한심한 무력감으로 비현실 같은 현실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올 묘수를 아직 찾지 못합니다.

 

오마르 카이얌의 허무에 사무친 ‘루바이야트’를 되뇝니다.

 

“아, 인생 기록을 다시 고쳐지었으면,

쓰여진 기록을 송두리째 지웠으면

이 마음에 꼭 들도록 다시 고쳐지었으면….”

 

창조 이후 세상을 다시 고쳐 쓸 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내 인생 정도만이라도, 그도 아니면 한 삼십년쯤만이라도 다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허무맹랑한 기도만은 아닙니다. 잘못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절절한 고백이요, ‘돌아봄’입니다. 이만치 와 있는 세상을 보며 멈칫합니다. 이 세상 달리는 모든 것들에게 멈추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답대신 마른 모래바람만 일고 지나갑니다. 정치도, 경제도, 예술도, 종교도 계속 걷고 싶다면 지금은 멈춰야합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다시 바라봅니다. 일제강점기는 친일의 바람으로, 전쟁은 분단의 바람으로, 독재는 기득권의 바람으로, 이 모두는 또 한데 어울려 자본주의의 바람으로 불어옵니다.

 

그러나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추하고 나쁜 것들을 다 들이마시고 선하고 좋은 것으로 뿜어내주는 나무들이 있어섭니다. 그래서 숲은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숲은 다름 아닌 예수입니다. 사람으로 오시며 고독의 바람으로, 빈들을 걸으시며 침묵의 바람으로, 빈자들에게 위로의 바람으로, 돌무덤에서 부활의 바람으로 일어나신 예수.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시여! 있는 듯 없는 듯 바람 같은 나의 님이시여!

 

이 부박한 시대를 건너가는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될까요? 역사와 시대의 쭉정이는 나중에 압니다. 오래 걸리지만 확연히 드러납니다. 연민과 진심으로 흐르는 눈물의 코드나 리듬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눈물이 이 시대를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일 할 밖에요, 농부처럼 입 다물고 허리 굽혀 일 할 밖에요.

 

아,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됐을까요?

 

덤,

 

‘어떤 바람’은 일본의 시인 호시노 도미히로가 쓴 시입니다. 그는 체육교사를 하다가 철봉에서 떨어져 평생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워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고통을 딛고 창작을 시작합니다. 입에 펜을 물어 쓴 시는 마음을 울렸고, 붓으로 그린 그림은 그 아름다움이 남다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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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4)

 

십자가 The Cross

윤동주 시 / 채일손 곡

- 1978년 만듦, ‘새의 날개’ 음반수록 -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어 있네(였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 갈 수 있을까(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람(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이) 흘리리라(겠읍니다.)

 

1941년 5월 31일. 윤동주가 원고지에 참하게 써내려간 ‘십자가’ 원본 끝에는 시를 지은 날짜가 나와 있습니다. 해방을 맞고 전쟁을 지나 40년이 흘러 이 시는 노래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백성과 세상을 향해 눈 감고 귀 닫은 교회와 국가의 태도가 그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긴 75년이 지난 현재도 우리의 시대상황은 매한가지입니다. 시인의 예민한 의식은 종교와 국가를 품고 신앙의 절정을 노래합니다.

 

쫓아오든 햇빛이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린 것은, 할 일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첨탑이 높아 오르지 못하는 것은, 할 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겠지요.

 

 

 

 

교회가 정부가 신자가 할 일을 하지 않으니 종소리도 울리지 않습니다.

 

시인은 안타까움에 서성거립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그리고 이 부박하고 심란한 시대에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차라리 행복하다고 합니다. 괴로웠던 사람 예수,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이보다 더한 역설이 있을 것이며, 이처럼 장르를 넘어선 반어법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어두어(워)가는 하늘 밑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노래합니다. 생색을 내고 홍보에 들뜬 작금의 교회를 꾸짖습니다. 최후에 흘릴 순교의 피도 모르게 흘린다는 아름다움이 여기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감동으로 다가와 마침내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하여 삶의 화두로, 지표로, 실천의 본이 된 윤동주의 ‘십자가’ 교회가 사회와 역사를 대하는 안목을 길러 주었고 속 신앙까지 눈뜨게 해준 스승 같은 시입니다. 비교적 하는 일을 감추고 이름 내기를 삼가고 묵묵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끝에서 무심하게 사라지거나 싱겁게 돌아설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 것도 이 시에게 빚 진 덕목입니다.

 

끝내, 침묵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덤,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같은 반 친구가 교회에서 배워 온 노래라고, 악보도 없이 부르는 노래를 받아쓰며 코드를 만들어 외워 놓았던 노래입니다. 10년이 지난 89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미국에서 들어온 노래들이 난무할 때 우리 언어, 우리 역사, 우리 정신이 담긴 노래였기에 첫 노래로 당당할 수 있었던 귀한 곡입니다. 윤동주의 시에 흠뻑 빠져 살던 며칠, 지어놓은 몇 곡이 더 있었지만 발표는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난 92년, 서울에서 ‘기독교문화운동협의회’라는 모임을 가질 때, 강진에서 올라오신 채일손 목사님을 그곳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분입니다. 음반을 발표하고도 얼굴도 연락처도 몰랐던 분입니다. 실제 악보도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신통한 것은 원곡과 노래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가락을 고수하며 수십 곡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배움이 컸습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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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3)

 

다함께 봄

홍순관 글

- 2007년 만듦,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

 

비록 연합이 깨어지고 약속이 어겨지고 거짓과 폭력으로 가려진 부활절 행사였지만, 그 해(2007,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정했던 공식 표어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요, 다함께 피어야 봄이지요’- 와 포스터-전체화면에 꽃 수백송이를 그렸고 그 사이사이에 남과 북 아시아 지구촌 모든 민족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그림- 는 아름다웠습니다.

 

늘 대규모 찬양대가 꾸려져 외국 곡으로 연주해왔던 예배음악을 끈질긴 설득 끝에 우리가 지은 창작곡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위의 노랫말은 주제 테마인 셈입니다.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함께 사용하여 편곡되었던 그 합창곡 다함께 봄(홍순관 글, 류형선 곡)’은 한 번 선보이지도 못한 채, 악보로만 남아 있습니다. 60년 흘러왔던 습관을 벗어보려고 했던 일입니다. 60년 동안 창작곡이 연주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화석처럼 굳어진 문화요, 관습입니다. 변하지 않으려는 보수의 마음이요, 흘러들어온 남의 문화에 대한 콤플렉스이며 권위를 앞세운 포장입니다. 몸과 옷이 따로요, 속과 얼굴이 따로이기 때문입니다.

 

 

 

 

대형화로 상징되는 번듯한 행사에서 보이는 현상들은 삶의 일상과 갱신에 땀 흘리고 집중하는 건강한 교회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여 우리 언어와 우리이야기와 우리 악기와 우리 정서의 음악을 연주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야만 외래종이 아닌 우리 땅에 맞는 씨앗이 되어 싹이 나고 꽃이 필 테니까. 몇 년이 흘렀지만 지나간 이야기라고 해버리기엔 너무나 현실적인 사건이라 봅니다.

  

만 평화라고 평화 아닙니다. 남한만 평화라고 평화 아닙니다. 북한도 평화라야 평화입니다. 아시아를 넘어 제3세계를 품고 지구촌 전체가 평화라야 평화입니다. 참 평화는 부분적인 평화가 아니요, 전체의 평화입니다.

 

신약에서 엿보이는 예수의 메타포는 조그만 씨앗, 버려진 여인, 무시당하는 아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병자, 신분과 계급으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이에게 향해 있지만, 성서전체의 관심은 민족구원 온 세상의 구원에 있습니다. 사실 꽃 한 송이와 봄은 따로가 아닙니다. 꽃이 피어야 봄이요, 봄이 와야 꽃이 핍니다. 양 한 마리와 겨자씨는 세상 전체와 다름 아닙니다. 이웃이 내 몸이라고 하셨으니 까.

 

나무 한 그루로 숲을 이룰 수 없고, 꽃 한 송이로 들판을 수놓지 못하며, 한 가지 생명으로 산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요, 전체의 구원이라야 합니다.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요, 전체의 부활이 참 부활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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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2)

 

바람의 말

홍순관 글 / 한경수 곡

- 2002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음반수록 -

 

 

떨어진 밤송이가 삐죽 웃으며 인사를 하네

제 살던 집을 떠나면서 바보처럼 웃고 있네

정답게 살던 친구들 함께 부르던 노래

지는 노을과 텅 빈 들판 이제는 떠나야지

가벼운 바람 불어와서 내게 전해 준 말

이 세상 떠날 때에 웃으며 가라네

이 세상 떠날 때에 다 놓고 가라네

 

추석을 앞에 두고 밤나무를 흔들며 밤송이를 따는 재미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긴 대나무로 때리거나, 나뭇가지를 흔들기도 하고, 어느 땐 돌멩이를 던져 맞추기도 합니다. 아이로 돌아가 나무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때를 쓰며 노는 것이지요.

 

그런데 흔들지도 않았고, 긴 나무로 치지도 않았는데 발 옆으로 후둑∼하고 밤송이 하나가 떨어집니다. 떨어진 밤송이가 나를 보고 삐죽 웃고 있습니다. 다 익어 벌어진 밤송이…. 나도 저렇게 유머를 날리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순간, 옆으로 나뭇잎 하나가 툭하고 떨어집니다. 무거워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가벼워 떨어진 겁니다. 저토록 가벼운 존재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또 생각합니다. 나비처럼 왔다 가신 그 분을 떠올립니다. 물과 피를 다 흘려 나무 위에서 바람처럼 가벼워진 그 분을 그려봅니다.

 

 

 

 

이 세상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진 그 분이 가볍게 가신 것은 역설입니다. 죄의 무게가 사해졌기 때문이요, 율법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존재로 떠난다는 것은 얼마나 홀가분하고 가뿐한 일인가요. 바람이 들려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거룩한 귀가 열린 것이지요. 바람이 가는 길을 보게 된 것은 거룩한 눈이 떠진 것이지요.

 

‘가벼워’진다는 것은 경건과 거룩함에 닿아 있습니다. 금식도 절제도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영혼의 눈을 뜨려고 하는 일입니다.

 

비만은 병입니다. 병은 고쳐야 합니다. 빼야 할 군더더기입니다. 비만을 고친다면 훨씬 몸은 건강해 질 것입니다. 버리지 못하는 군더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먹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러기에 비만은 다른 면으로는 죄일 수 있습니다.

 

남한이 좀 가벼워진다면 북한이 무게를 갖게 될 것이요, 강대국들이 무게를 좀 던다면 악소국가들이 무게를 더 가지게 될 겁니다. 나눔은 균형입니다. 저마다 조금씩 가벼워진다면 지구촌 전체가 균형을 찾게 되겠지요.

 

식량뿐 아니라 자원과 정보까지 ‘모자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눔’의 문제라는 인식을 할 때, 그래서 어리석은 공멸의 길에서 멈칫할 때, 비로소 이웃의 외침이 들리게 되고 역사의 깊은 계곡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 익은 밤송이처럼 웃으며 떠나고, 가벼워진 낙엽처럼 사뿐히 사라지는 여행은 분명, 허망한 것이 아니요, 큰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무한한 우주에 들어 가버리는 일입니다. 가벼워져 무게를 갖게 되고, 사라지며 다시 사는 역설이 신자의 삶입니다.

 

이 ‘하이유머’가 살아있는 세상이 착한 세상(하나님 나라)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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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1)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엘리스워커 시· 홍순관 류형선 개사 / 류형선 곡

(2004년 만듦,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그들이 그대의 어머니를 고문할 때

그들이 그대의 아버지를 고문 할 때

그대의 형제를 그대의 아리따운 누이를 고문 할 때

그들이 그대의 지도자를 죽인다면

그대의 눈물 같은 연인을 죽인다면

그대를 고문하여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오면

나무를 심으세요 나무를 심으세요 나무를 심으세요

나무를 고문하여 그대의 푸른 숲마저 사라지면 음~

또 다른 숲을 시작 하세요 또 다른 숲을 시작 하세요

또 다른 숲을 시작 하세요 또 다른 숲을 시작 하세요

 

 

노랫말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의 ‘고문(TORTURE)’이라는 시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잘 아는바,《컬러퍼플 The Color Purple, 1985》의 작가입니다. 2004년 5월, 그녀가 한국을 방문하여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 In Search of Our Mother’s Gardens」라는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 무대의 총연출을 부탁 받을 때 그녀는 자신의 시를 건네주며 노래로 만들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르코대극장에서 초연을 하였지요.

자서전적 소설인 《컬러퍼플》을 보면 짐작하듯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여느 -그 당시- 흑인여성들처럼 매우 불행했습니다. 시대와 정치적 배경, 혈통과 인종, 남존여비 등으로 모진 세월과 폭력을 겪었으니 이 노래는 피를 토하는 절규이며 절절한 기도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주위의 동료들의 참담한 상황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나무를 심으라고 합니다. 숲을 시작하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심으면 한 그루의 나무지만, 함께 심으면 숲이 됩니다. 독백으로 시작해 둘 셋 합창으로 이어지며 반복되는 후렴이 일품인 곡입니다.

아프리카, 미국, 남미, 중동지역 할 것 없이 지구촌 곳곳에서 저질러지는 고문행위가 한국 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생존해있는 고문피해자들은 위로도 보상도 턱없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더군다나 죄 없이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도 상당수입니다. ‘성전’인 ‘몸’을 해하는 비인도적, 비인권적, 비윤리적 행위를 교회는 반대해야 합니다. 내 몸 네 몸이 따로가 아닌 이웃이라면 나무를 심고 숲을 길러야합니다. 생명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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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0)

낯선 땅 여기는 내 고향

(원제:케이세이선)

이정미 글 · 홍순관 개사

이정미 곡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1. 무겁게 고인 강물 일렁이는 기차소리 그림자 드리우며

오늘도 달린다 낮은 철교위로 달려 가네

슬픈 케이세이선 어디로 달려가나

고향 떠나 모르는 낯선 땅으로 에헤이요 에헤헤이요

 

2. 강 건너 부는 바람 그리운 고향냄새 여기는 어디인가

흐르는 세월 속에 희미한 고향 얼굴 떠오르네

슬픈 케이세이선 어디로 달려가나

강 건너 저편에 바람만 불어 오네 에헤이요 에헤헤이요

 

3.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

넘고 또 넘어서 아라가와 강물 속에 비친 얼굴

슬픈 케이세이선 어디로 달려가나

낯선 땅 여기는 바로 내 고향

나 이제 돌아가리 그리운 내 고향

낯선 땅 여기는 바로 내 고향

 

한 아이가 일본 땅에서 태어납니다. 이 아이는 한국아이였습니다.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들은 일본 땅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이는 엄마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땅 일본이 ‘낯선 땅’이 되었지요.

아이가 자란 곳은 아라카와 강이 있는 근처였습니다. 그곳은 관동대지진 때 많은 조선인이 묻힌 비극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으로 철길이 지나가는데 바로 케이세이선(경성선京成線)입니다. 니뽀리에서 나리타로 가는 긴 철길이지요.

 


<"JNR C11 289 on Tadami line" by BehBeh. Wikimedia Commons.>

 

아이는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요, 강 건너 불어오는 바람으로 향수를 달랬을 것입니다. 아이는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나라인 조국 대한민국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엄마나라가 그만 ‘낯선 땅’이 되고 맙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일본 땅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인간이 사는 이곳 지구촌은 ‘낯선 땅’인지도 모릅니다. 길게 보아 백 년을 사는 인간의 수명입니다. 쏜살같지요. 흐르는 강물 같습니다. 다름 아닌 이내 지고 마는 꽃이지요. 노인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눈 깜짝할 사이가 평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인생입니다. 하여 어디든지 낯선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낯선 땅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엄마나라처럼 고향처럼 따뜻하게 만들 것인지가 장엄한 자유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김 준태 시인의 ‘고향’이란 시가 있습니다.

 

고향에선-

눈 감고 뛰어도

자빠지거나 넘어질 땐

흙과 풀이 안아준다.

 

교회가 흙과 풀이 되어 이웃을 안아준다면 그들의 고향이 되겠지요. 교회가 흙이요, 신자가 풀이어야 합니다. 내 이웃들이 눈 감고 뛰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안길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에 동참할 때 그곳은 ‘고향(하나님 나라)’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수렁에 빠지고 벼랑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분께서 품 안에 안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이 ‘낯선 땅’ 지구촌에서 그 분의 나라를 맛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신자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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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홍순관의 '노래 신학' 2015.02.25 18:13

홍순관의 노래 신학(9)

소리

홍순관 글 곡

- 1990년 만듦,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

 

꽃이 열리고 나무가 자라는

그 소리 그 소리

너무 작아

음∼∼

나는 듣지 못했네

 

 

이 노래에 글을 쓰고 곡을 진 시간은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 곡을 제 몸에 오래 품고 있었나봅니다.

이것은 무언가 도모하고 이루려는 꿈과, 자연을 스승삼아 기다리는 인내가 가슴과 머리에서 맞서고 있을 때 만들어진 글입니다. 일상의 물결과 바다가 만나지는 심정이라고 할까요.

‘소리’는 개인적으로 큰 화두였고 숙제였습니다. 성서 안, 잠언 말씀을 만나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언 21:13).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정작 자신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귀를 막고 듣지 않으신다면, 이 시대의 부르짖는 소리(기도)들은 어디로 갈까요.

뭇 인생의 한 가운데로, 역사의 한 복판으로, 말없이 걸어가시는 그 분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걸음걸음 고뇌에 찬 고운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종교가 진리에 귀를 닫고 정치가 백성의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강대국이 약소국가의 한숨에 귀를 막는다면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을 향해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준엄한 역사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예시의 지혜와 묵시의 소리에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귀를 닫는 것은, 마음을 닫은 까닭이요,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으려는 무관심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나이 서른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소리의 뼈’라는 시를 썼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시입니다.

김 교수가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학설을 발표하고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그러나 김 교수가 한 학기 내내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자 제각기 일가견을 피력했다.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이라고 했다. ‘숨은 의미’라고 보는 이도 있었다.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고 한 이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묵살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그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더 잘 듣게 되었다.  - 기형도 <소리의 뼈>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나,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너무 작고 너무 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꽃은 열리고 나무는 자라납니다. 역사는 흐르고 성령은 움직이십니다. 마음과 영혼의 귀가 열렸을 때, 우주를 운행하시는 그 분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부러운 마음으로 자연이 일하는 소리를 들어봅니다. 지나가는 바람을 구경합니다. 어떤 일을 이루고 사라지는 무심함의 경지는 쉽지 않습니다. 시치미를 떼며 실천하는 즐거움이 일상일 때 비로소 신자가 될 것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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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8)

대지의 눈물

홍순관 글 / 한경수 곡

- 1996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음반수록 -

 

바람이 불어 옛날은 갔는데도

기억 속에 보이는 그 분홍 저고리

눈물은 노래를 막아 부르지 못하여도

하늘의 그 손길 야윈 손잡아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다

그만 시간을 잃어 버리셨죠

다시 찾아 드릴께요 어머니

열네 살 소녀 그 어린 꿈들

이 땅에 흐르는 대지의 눈물이여

다시는 그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

눈물은 노래를 막아 부르지 못하여도

하늘의 그 손길 야윈 손 잡아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노래로 만들기엔 너무 쓰리고 상처가 깊었습니다. 아흔 번의 정신대공연’ <대지의 눈물>을 마친 후, 비로소 지을 수 있었던 노래입니다. 그것은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성경 말씀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수줍어 말라. 네가 다시는 창피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너는 처녀 때의 수치를 잊을 것이요,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라. 너의 창조주께서 너의 남편 아니시냐. 그 이름 만군의 여호와시다…… 어려서 버림받은 여자 가슴에 상처 입은 너를 여호와께서 부르신다……산들이 일어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내가 주는 평화는 결코 옮기지 않는다. 너를 불쌍히 여기시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다(이사야 54:410).

 

 

대지大地는 문학적으로 어머니입니다. 대지는 근본이요, 그래서 어머니의 눈물은 모든 생명의 눈물입니다. 또한 대지의 눈물은 이 땅의 눈물입니다. 내 나라 내 땅만의 눈물이 아니요, 지구촌 전체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대지의 눈물은 의 눈물입니다. 성서가 이르기를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으로 살았거나, 행복으로 살았거나 사람은 누구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 눈물은 이내 그쳐질 눈물이 아닙니다. 눈물의 고향을 찾아가야 그쳐질 눈물입니다. 그곳은 죽음이 아니요,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대지의 눈물은 어쩌면 평화입니다. 유머란 무릇 실컷 울고 난 후에 머금은 미소를 말하는 것이니, 눈물은 평화로 건너가는 강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눈물이 구원할 것입니다. 깊은 연민과 가없는 자비를 품은 눈물 없이는 결코 구원은 없을 것입니다.

 

  *‘대지의 눈물1995년 시작했던 정신대 할머니 돕기 모금공연’ 100교회 순회 콘서트의 이름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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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춤

홍순관의 '노래 신학' 2015.02.10 23:58

홍순관의 노래 신학(6)

푸른 춤

홍순관 글 / 한경수 곡

- 2002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음반수록 -

 


1. 춤을 추네 춤을 추네 님과 바람 입 맞추며

춤을 추네 춤을 추네 별과 태양 입 맞추며

삶과 죽음 시간 넘어 미움 사랑 남자 여자

씨와 땅이 입 맞추며 우주의 생명이 춤을 추네

 


2. 춤을 추네 춤을 추네 하늘과 땅이 입 맞추며

춤을 추네 춤을 추네 노을과 아침 입 맞추며

참과 거짓 시와 정치 시간과 역사 봄과 겨울

남과 북이 손을 잡고 우주의 생명이 춤을 추네

 

고은비 그림

 

처음부터 끝까지 ‘2분 음표(♩)’로만 되어있는 곡입니다. 작곡가는 아마 대칭을 생각했나 봅니다. 삶과 죽음, 미움 사랑, 남자 여자, 노을과 아침, 시와 정치, 남과 북…

다른 것이, 한 가지로 보인 것이지요. 극과 극이 결국은 같은 것이라 본 겁니다. 우월감이 곧 콤플렉스이니 다른 것이 없습니다. 노을과 아침이 맞닿은 것은, 죽음이 부활이라는 신자의 비밀을 상징합니다. 상대적인 것들을 같은 무게로 보고, ‘2분 음표’를 사용하여 두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무리가 아닌듯하여, 그대로 노래했습니다. 이 곡은 실제로 노래를 부르기엔 그리 재미는 없습니다. 도리어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변화가 없으니 표현도 까다롭고 기교도 힘듭니다.

사실, 똑같은 것이 ‘평등’은 아닙니다. 세상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각자 생긴 대로 사는 것이 도리어 평등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지 못하기에 불행한 것이지요.

다른 논리를 펼칠 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세상은 계급사회입니다. 나누어진 사회를 좀처럼 좁히지 못합니다. 평등을 향한 노력은 미미하고, 격차를 벌리는 방법에는 더욱 박차拍車를 가합니다.

문제는 소수의 상류계급들이 누리는 범위가 터무니없이 크다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이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각자 생각하는 인생을 누리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이 탄탄하게 섰을 때 가능합니다. 씨앗도 싱싱하고 땅도 건강해야 생명은 자라납니다. 시詩도 신랄하고 정치도 꿋꿋해야 합니다.

결국은 ‘제 숨’입니다. 제 숨을 잘 쉬면서 사는 것이 평등이요, 저마다 가진 숨으로 사는 것이 평화입니다. 남의 숨을 빼앗는 자들은 결국 제 숨도 잘 쉬지 못하게 됩니다. 인류가 만든 문명의 숨은 결국 환경을 망가뜨렸고 기근을 발생시켜 전체가 제대로 숨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지구촌은 숨을 가다듬어야 마땅합니다.

‘춤’은 신명이 나야 절로 추어지는 겁니다. 억지로 움직이는 것은 춤이 아닙니다. 신명이 나려면 자유로워야하고, 몸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흥이 돋아야 합니다. 춤과 춤꾼이 하나가 되어야 진짜 춤입니다. 이 세상 각角을 진 모든 만물이 둥근 세상으로 흥을 돋울 때 춤추는 평화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 노래 제목을 ‘푸른 춤’이라고 했지만, 춤을 추긴 어렵습니다. 매우 절제된 숨으로 가락을 타야 비로소 마음과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글쎄요, 춤이 적절하지 않은 시대상황을 노래했는지도 모릅니다. 초록별의 신명나는 푸른 춤을 꿈꾸어 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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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순관의 노래 신학(6)

깊은 인생

홍순관 글 곡 (2000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음반수록)

  

인생은 너무 깊어 때론 건널 수 없네

걸어도 걸어도 끝은 없고

쉬어도 쉬어도 가쁜 숨은 그대론데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야하나

분명 길은 있을 텐데

언덕을 너머 저 하늘의 세상

 

인생은 너무 깊어 때론 건널 수 없네

걸어도 걸어도 끝은 없고

불러도 불러도 이 노래는 그대론데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야하나

이 깊은 아픔이 징검다리겠지

저 하늘의 세상




신앙이란 신비한 것입니다
. 인생에 고비를 넘거나, 고난을 딛고 일어설 때 절대적인 힘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가져다 줄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육안으로 보면 다른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는 힘들고 아프고 낙심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는 동안 신앙의 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니 세월과 정직이 아니라면, 증명의 길은 멉니다.

인생이 깊다는 것은, 어딘지 아픈 구석이 있습니다. 삶의 벼랑 끝에서 할 바를 모를 때, 침묵에 빠져들게 되면 현명한 사람들은 어떤 지혜를 얻게 됩니다.

신자의 길은 안개 같은 현실에서 그 선명하고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불의 속에서 부를 누리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가난에 처합니다. 칼 라너의 표현대로 미화하지도 않고, 꿀도 타지 않은 일상을 거울처럼 대하며 고독한 삶을 온 몸으로 버티고 나면 또 다시 그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제 발로 걸었던 사람만이 아는 세상입니다. 스스로 걷지 않은 사람은 도 모르는 밋밋한 생을 살아갑니다.

처한 삶에 거친 광야가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길이 정직인지 거짓인지가 문제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이웃을 위한 것인지, 역사를 짚어본 삶인지가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걷게 합니다.

선명하지만 좁은 길을 걸었던 인생은, 지독한 바닥을 맛본 뒤지만 도리어 살아볼만한것이라는 역설의 증언을 토합니다. 고달팠던 삶의 마감에서 소풍이었다는 시인의 말은 시구詩句를 장식하는 문장이 아니라, 진심어린 아름다운 고백이 됩니다. 꺼내기 어려운 말이지만 역사를 향해 제 몸을 살랐던 아까운 목숨들도 눈 내려 깊은 강을 만들 듯 우리 삶에 딛고설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깊은것은 신이 우리에게 나린 숙제이며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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