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2


그를 택한 걸 후회한다!

사무엘상 15:10-11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기

오늘은 사울 이야기를 갖고 하는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울 이야기 첫 번째 설교에서 저는 다윗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생을 간추려 얘기하고 설교 말미에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걸 후회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고 사실만도 놀라운데 성서는 몇 줄 아래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는 법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를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또 몇 줄 아래서 하느님은 다시금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반복해서 말을 바꾸니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헛갈립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말을 바꾸면 신뢰를 잃고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한국에서 사드(THAAD) 문제에 대해서 한 후보가 말을 바꿨다고 비난받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느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을 비난하듯이 하느님을 비난했다가는 변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입을 닫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하느님이 왜 이래?’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의 주요 맞상대는 사무엘입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 2백년간 이어진 사사시대를 벗어나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고 사울은 첫 왕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를 잇는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요구를 백성들로부터 받습니다. 외적, 특히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전투를 이끌고 지속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자신의 지도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지만 하느님은 백성들은 사무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거부하는 거라며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후 사울이 보여준 태도와 행동을 보면 그는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서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적폐청산’이란 말이 유행합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폐해를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다음 정부는 과거 10년의 적폐를 청소하는 데 임기 대부분을 보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잘 해도 비난과 욕을 먹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행기를 책임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첫 왕 사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사사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세력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모두에게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애를 요약했는데 얼마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한다고 전제하고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울 얘기를 ‘현실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과 사무엘을 비롯해서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고 우리는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단지 그들이 성서에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성서의 등장인물들은 천사가 아닌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도 있고 인간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이기심과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선의(善意)와 이기심이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가 나의 이해(利害)와 어긋날 때 갈등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둘째,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독자가 사건 현장에 주인공들과 같이 있다고 상상하며 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설화자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뭘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를 다 아는 상태에서, 심지어 하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할지도 다 압니다. 소설을 서술하는 관점에 ‘전지적 작가’의 관점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술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사실상 ‘전지적 독자’의 관점에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역사라는 것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보여서 역사의 ‘법칙’까지 운운할 수 있지만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정작 벌어진 결말은 그런 가능성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선을 가급적 버리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주인공 곁에서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 읽자는 얘기입니다.



사무엘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마음이 상했을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하느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였을까요? 그런데 하느님은 백성들이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감히’ 어떻게 하느님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사사로서 누려온 권한을 남에게 넘겨야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사무엘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기꺼이 홀가분하게 자기 권력과 영향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무엘의 경우에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두 감정이 모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반한 데 대한 분노와 자기의 영향력을 잃는다는 불안과 섭섭함이 공존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뜻이 내 이익과 어긋나는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은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이런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느니, 하느님 잘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만사형통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믿고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런 욕망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내 안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성자(聖者)가 아닌 한 이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우선 이런 갈등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갈등은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득도하고 해탈해서 세상 안에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떨어져서 살지 않는 한 이 갈등을 우리는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신앙은 ‘결코’ 우리를 만사형통한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삶은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그것은 대개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서야 가능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생이 만사형통하듯 잘 풀린다면 하느님께 감사하기 전에 혹시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힘들고 괴롭게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욕망을 누르면서 사는 것, 나의 욕망보다 이웃과 더불어 잘 살거나 공동선을 우선하고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런 삶을 즐겁게 만들거나 최소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의 땀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나의 노력이 이웃의 삶을 고양시킨다면 나는 거기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날 수도 있음을 인정, 인식하고 끊임없이 둘을 조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까? 다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의 욕망을 공동선 아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인가, 사무엘의 말인가?

사무엘과 사울이 얽힌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질 세 가지 일을 예언했습니다.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줄 것이라는 것이 첫째이고,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빵 두 덩어리를 줄 것이라는 게 둘째이며, 그 후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날 텐데 사울도 그들처럼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뒤따라 그대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릴 것이니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때에 가서 하셔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예언이 실현된 때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상당하므로 이 예언을 전쟁에 적용하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울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서로 맞서있어서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야훼 하느님이게 드리는 제사를 집전할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이른바 ‘거룩한 전쟁’에서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장 역할을 맡은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이레를 기다렸지만 그래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이렇게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임금님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길갈에서 사무엘은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 자체에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건은 ‘내가 갈 때까지’와 ‘이레 동안’이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가 되기 전에 사무엘에 온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레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좌우간 사울은 이레 동안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자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사무엘은 자기가 한 명령이 모호하다는 걸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무엘과 사울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모호한 명령을 한 사무엘에게도 잘못이 있고 이레를 기다렸다고 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는데 제사를 드린 사울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책임의 크기를 묻자면 사울보다는 사무엘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무엘이 길갈에서 사울에게 명령했을 때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란 언급이 없습니다. 자기의 명령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꾸중할 때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라는 명령은 사무엘의 명령입니까, 하느님의 명령입니까? 혹시 사무엘은 자기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을 혼동하는 게 아닐까요? 독자들은 사울 이야기 전체에서 대체로 사무엘은 옳고 사울은 틀렸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무엘보다는 사울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지만 성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하느님/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느님/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씀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입니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하느님의 말씀인가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얘기는 목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들 아닙니까. 우리 교회 주보표지에 ‘모든 교인’이 목회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자기의 욕망을 다 버리지 못하고 그와 배치되는 사울을 어떻게든 주저앉히려 했던 게 아닐까요. 작은 일을 트집 잡아 그를 꾸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이 제사를 집전한 사울에게 선포한 저주는 도에 지나치게 가혹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왕조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니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사울 이야기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http://fzari.com/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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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상 9:15-17 -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오늘부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하려 합니다. 다섯 번 정도 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구약성서를 갖고 자주 설교할 생각입니다. 올해 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갖고 설교했고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합니다. 분량만 갖고 보면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의 세 배 정도 되므로 구약 대 신약의 설교 비율이 3:1이 돼야겠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이므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 신약성서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시효가 끝난 하느님 말씀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려 하는데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만 살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살았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사울의 일생은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사울의 삶은 다윗 등장 이전과 이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가문의 기스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과 결혼해서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이스보셋이라는 네 명의 아들과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둘째 부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알모니와 브비보셋이란 아들도 얻었습니다. 이런 점들만 보면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당시에는 부인을 여럿 두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이스라엘의 유력한 지도자 사무엘과 만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성서는 사울의 외모를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고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고 했습니다. 이 묘사를 사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모두 데려다 놓고 그와 비교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는 말은 사실묘사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외모가 출중했음을 보여주려는 서술일 텐데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훗날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자를 만나러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이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한 걸 떠올려보면 사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더욱 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야훼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본다는데 웬 외모타령인가 말입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려서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딸려서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귀를 찾으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못 찾아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동행한 종이 가까운 성읍에 ‘하느님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채’가 없다면서 그러기를 망설였는데 마침 종에게 은전 한 푼이 있다고 해서 그걸 갖고 하느님의 사람에게 갑니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한편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하느님에게서 그가 올 거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식탁에 초대해서 잘 대접했습니다. 그는 서른 명 쯤 초대한 식탁에서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요리사에게 특별요리를 해오라고 명하면서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사울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무엘은 특정 부위의 고기를 사울에게 주라고 했을까요? 굳이 그런 것까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훼께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때 제물 전부를 태워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중 기름이 많은 일부분을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삶아서 먹었는데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할당됐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넓적다리 부분을 사울에게 주라고 한 것은 그가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나중에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영도자로 세운 후 두 가지 예언을 한 후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는, 가는 길에 새끼 염소와 빵 덩어리와 포도주를 갖고 하느님을 뵈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사울에게 빵 두 덩이를 줄 것이니 받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일군(一群)의 사람들을 만날 터인데 그때 사울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강하게 내려와서 딴 사람이 돼서 그들처럼 예언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사울은 하느님의 영을 강하게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얘기는 그가 사람의 의도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됐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은 고작 서른 명 정도가 보는 앞에서 이뤄진 사건이었으므로 이를 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사울에 속한 베냐민지파가 뽑혔고 계속 범위를 좁혀나가니 기스의 아들 사울에 뽑혔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사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오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이라는 중책을 맡는 게 두려웠을까요? 그러니까 숨어 있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백성이 대표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왕이 됐습니다. 두 번째 즉위입니다.


이어지는 얘기는 주로 그가 치른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하고 주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무자비한 말로 위협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밭에서 소를 몰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왕이라면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왕이 돼서도 소를 몰고 다녔다니 좀 어이가 없긴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회의 발전 정도가 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울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에 전에 그랬듯이 사울에게 하느님의 영이 세차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분기탱천해서 소 두 마리를 잡아 토막을 내어 각지에 보내서 군사를 모아 암몬 사람들을 살육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냈습니다. 이 일 후에 사무엘은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길갈에 모아서 사울을 다시 한 번 왕으로 세웁니다. 사울은 이로써 세 번째 왕위에 오른 셈인데 무슨 대단한 왕위라고, 밭에서 소를 몰고 다녀야 하는 초라한 자리에 오르는 걸 세 번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그랬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긴 고별사를 합니다. 고별사는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무대에서 퇴장할 때 하는 것인데 사무엘은 고별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이런저런 식으로 간섭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더 많이 간섭하는데 그러려면 왜 고별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에게서 멀어지는 사무엘

그 다음에도 전쟁 얘기가 이어집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이번에는 사울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두 군대가 대치했는데 전력은 블레셋이 훨씬 우세해서 이스라엘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까지 있었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벌이는 게 유리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은 사무엘이 전쟁터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걸 주관할 사무엘이 안 와서 전투를 개시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제사를 주관했는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사울은 사정을 설명했지만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께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에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첫째, 제사를 반드시 사무엘이 주관해야 한다는 명령을 언제 야훼가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앞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명령을 야훼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둘째, 앞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그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넓적다리를 줬는데 그것이 그의 제사장 직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꾸중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지나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서는 이 점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블레셋과의 전투 얘기로 넘어갑니다. 사울 군대는 블레셋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했지만 아들 요나단의 습격작전이 성공해서 승리합니다. 요나단 군사의 습격을 받고 블레셋 군인들이 웬일인지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었다는 겁니다. 성서에서 이런 일은 하느님이 개입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기들끼리 싸우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 말대로 사울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들은 이겼습니다. 이긴 방법도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주는,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이 치른 마지막 전투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경우는 그 이유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그들이 길을 막고 대적했기 때문에 멸절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 어린아이든 여자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다 죽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놀랍게도 이 명령을 내린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하느님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 곧 모조리 죽이라는 ‘헤렘의 규율’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승리한 후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왔고 짐승 중에서도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다가 나중에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저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지요. 또 그는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이미 그대를 버리셨고 그대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소.”라는 최후통첩 성의 말을 했습니다.


후회하는 하느님?

여기까지가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기름 붓는 의식(儀式)은 사무엘이 행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했을 뿐, 궁극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뭘 보고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의 출중한 외모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외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야훼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가 선택됐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왕이 됐습니다. 그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비 뽑혔을 때 짐짝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누군가 그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무엘은 계속해서 그와 대립했습니다.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입장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무엘도 잃어버린 나귀 걱정을 하는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누구에게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온 집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걸고 있는 사무엘과 백성들의 기대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사무엘의 말은 야훼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각과 일부 짐승을 살려두자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하느님은 사울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왕위에 앉힌 걸 후회했다는 겁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하느님이 사울의 배신을 미리 알지 못해서 그를 왕으로 삼을 걸 후회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몇 줄 더 내려가면 사울이 자기에게 심판을 선언한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서 옷자락을 찢어졌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느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에서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는 어느 편을 믿어야 합니까?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혼란에 빠진 독자에게 설화자는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 얘기를 결론짓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야훼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다시금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은 사람과 달라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금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왜 오락가락하는 걸까요? 이 이슈는 좀 더 큰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하느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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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생명나무라

분류없음 2017.06.19 09:16

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2)


지혜는 생명나무라


구약의 지혜는?

지혜란 무엇인가? 인생의 방향을 잡는 기술인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아는 지식인가. 구약에서 지혜는 전문적이고 숙련된 기술이나 예술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출애굽기 36:1-2), 능숙한 기술보다는 앎과 태도에 강조점이 있다. 구약신학에 큰 보폭을 남긴 폰 라트(G. von Rad)는 “지혜는 사물의 근저에 하나님의 질서, 즉 조용하고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균형을 이루게 하는 질서가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과 세계 질서, 그리고 인간의 삶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한 멋진 정의다. 이것에 더해 구약 지혜서의 독특한 지혜개념은 기술이나 지식의 중성적 가치보다는 도덕화되고 신학화되었다. 왜냐하면 지혜와 지식은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잠언 1:7; 9:10; 31: 30; 전도서 12:13; 욥기 28:28).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1:7, 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9:10, 새번역)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기 28:28, 개역개정)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개역개정)


지혜의 자리는 마음에

고대 이스라엘의 현자들에게 지혜는 인간의 마음과 줄곧 맞닿아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혜가 거처하는 자리는 마음이다. 의지와 의사결정의 자리도 마음이다. 곧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예컨대 구약의 지혜자는 어리석은 자를 마음 없는 자 취급한다. “음녀”에게 유혹받기 쉬운 젊은 남자를 “지혜 없는 자”(잠언 7:7, 개역개정)라고 비웃는다. 음녀의 본래 히브리말 뜻은 ‘낯선 여자’, 또는 ‘금지된 여자’, ‘이방 여자’를 일컫는다. 모든 적법한 관계를 벗어난 여자를 지칭한 말이다. 거기다 “지혜 없는 자”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이 부족한 자’이다. 곧 “지각이 부족한”(NAS, lacking sense), 또는 “분별력이 없는”(NIV, no sense)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마음이 부족하면 지혜가 없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는 생명나무

히브리적인 사고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의 관계는 좀 더 근원적인 영역과 연결된다. 히브리말의 ‘마음’은 곧 ‘심장’이다. 심장과 마음이 같은 형태다. 때문에 마음을 잃으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잠언 7:26-27).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주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믿었다(잠언8:35). 지혜가 은, 금, 보석보다도 가치 있고 탁월한 것은 물론이고(3:14), 지혜는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3:15) 생명나무다(3:18).


‘생명나무’는 우리를 태곳적 창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남자와 여자를 떠올려 보라. 하나님은 남자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다(창세기 2:16-17; 3:11). 이때 생명나무는 직접적인 금지의 대상은 아니었다(2:9). 그저 배경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주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긴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존재 이유가 밝혀진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3:22-23, 개역개정).


우리는 창조 이야기 끝자락에 이르러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서 창조 이야기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천상의 존재들, 곧 불 칼을 든 그룹들(히브리말, ‘케루빔’)을 하나님이 에덴 동쪽에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것으로 3장이 끝난다(3:24). 하나님이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의 접근을 차단하셨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반역 때문에 생명나무에서 분리되어 영원불멸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잠언의 지혜는 창조 사건의 마지막을 뒤집고 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3:18, 개역개정).


지혜를 얻은 자에게 지혜는 생명나무다. 지혜를 얻은 자는 금지된 곳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는 생명나무’라는 은유적인 경구로 지혜가 죽음의 저주를 피할 약속처럼, 금지된 에덴에 접근할 수 있는 방편처럼 말한 것이다. 하늘의 계시를 받고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삶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진리의 말들을 생산한 지혜자에게서 ‘생명나무’에 깃든 종말론적 의미가 드러났다. 그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지혜는 생명을 약속받는 일이어서 지혜를 발견하고 명철을 얻은 사람은 복되다. 행복하다(3:13).


지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삶, 그리고 마침내

이처럼 태곳적 창조 이야기와 분리할 수 없는 지혜는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삶과 직결된다. 순리를 따르는 삶이란, 하나님이 수립하신 창조질서 원리에 맞추어 사는 삶이다. 구름이 이슬을 내리는 자연의 온화함처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처럼, 밤과 낮의 순환과 별들의 움직임처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리듬에 맞추어 일상을 질서 있게 살아가는 삶이다. 하여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의 삶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 리듬에 따라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하련다. 때로는 고된 일로, 때로는 휴식과 즐거움으로, 때로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균형 잡힌 도적적인 행위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매일의 삶을 채워가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맞서 싸우며 물신의 노예가 된 시대를 산다. 구약의 지혜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게 성공에 목말라하는 일그러진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속물적인 욕망과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시대정신을 교정해 줄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추구와 참 행복은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반역과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는 마음의 방향과 태도에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지혜는 접근금지 되었던 생명나무의 길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이것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라고 선언된 이유일 테다(고린도전서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새번역).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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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6)


설교(說敎)인가 썰~교(敎)인가


- 소 모 씨의 설교를 감상하고 정신이 확 깨서 쓴다 -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사도바울


1.

월요일 산책하며 주제를 정한다. 화요일 농사를 지으며 생각을 정리 메모한다. 수요일 운동을 하면서 자료를 참고하여 거칠게 초고를 쓴다. 목요일 치료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끝까지 다 쓴다. 금요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문장의 맥락을 가다듬어 정리한다. 금요일 밤에서 토요일 새벽사이. 클럽에 전문을 업데이트한다. 토요일 놀면서 아내에게 리허설을 한다. 아내가 통과를 시켜주면 영화 한편 보고 기대하며 잘 수 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내 리허설의 맥락은 따라잡지 못하고 날 바라보는 얼굴만 점점 예뻐지면 그때는 비상이다.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새벽사이.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현장에서 벌어질 관념과 현실의 갭을 줄여본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알아듣기 쉽게 전체를 새로 쓰기도 한다.


원고 매수는 목회 초기 A4 20장에서 줄고 줄어 10년에 이른 지금은 7장까지 줄었다.(오늘 처음 8장에서 1장을 더 줄이는데 성공했다.) 목표는 4장,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 설교 시간은 처음 2시간 정도 소요됐던 것이 줄고 줄어 한 시간을 못 미쳐 지금은 50분 부근을 눈치 보며 오락가락하고 있다. 교우들의 기대는 내 설교가 부디 4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단 원고는 4장, 그동안의 의리로 봐줘도 5장, 주의 은혜로 용서해 주어도 6장 이상은 절대 넘지 말아야한다. 설교 중간에 갑자기 바다가 그립다고 삼천포 쪽으로 가서도 안 되며 새로 개발한 개인기가 아까워 요건 꼭 한번 시전하고 싶다는 유혹이 있더라도 징검다리 건너듯 훌쩍 건너뛰며 눈을 딱 감을 줄 알아야한다.


내 청중은 지난 10년간 가장 많았을 때가 30여명, 가장 적었을 때가 5,6명, 평균 15명 정도다. 거기엔 은혜가 넘치게도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5명이 기본 출석으로 포함된다. 나에겐 단 한 번의 주일예배가 목사로서의 직임을 다할 유일한 기회이므로, 이것은 일주일을 꼬박 바친 설교를 들어줄 청중들이 지난 10년간 평균 15여명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을 위해 내 설교가 바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수끼리 ‘숫자가 무슨 중요하냐’거나, 은혜가 책상만큼도 없이 ‘차라리 때려치우는 게 낫지 않느냐’는 따위의 권면은 하지 말아 달라. 그건 나를 위한 위로도 내 분투를 향한 애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2.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나는 이것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중이다. 자발은 내가 스스로 원함이요 어쩔 수 없음은 내 사명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동의가 안 된다면 나를 이대로 놔두면 된다. 기록되었으되 사도 바울의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린도전서 9:17)하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주시라.(주께서 임의로 행하는 내게 상을 주시기를!)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 만은 못하여 새로운 방문자(요즘엔 신자가 오는 게 아니다)가 올 때면 늘 ‘여기 모인 인원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는 번차례로 나온다’고, ‘이런 말이 궁색하진 않겠지’하는 부끄런 맘으로 순전히 방문자에 대한 배려가 아닌 나와 우리 성도들을 위한 자백을 한다.


물론 우리 교회는 창립 이래 전도를 위한 뭔가를 계획해 본 적이 없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 교우들도 전도를 잘 못한다. 나도 못하는 걸 남에게 하랄 수 없어 강조하지 않았더니 용불용설(用不用說)이 돼버린 건지 전도들을 못한다. 게다가 가끔 가는 소풍 말고는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이나 또 뭣이냐 수련회 부흥회 같은 일체의 프로그램이 없다. 수요일 성서학당은 인원이 너무 적어 그만 두었고 수련회는 청년들이 취직을 하니 자연 못 가게 됐다. 대략 지금까지 한 2~300여명이 방문자로 혹은 단기 체류자로 교회를 거쳐 갔는데 대부분은 이 아무 일 없는 교회에 적응하질 못한 것이다. 그들의 이동의 원인은 가장 많게는 큰 교회의 활발한 프로그램들이 아쉬워서이고, 그 다음은 담임목사의 정치적 성향(극우파는 오지 마시라), 그 다음은 결혼의 편리(?), 그 다음은 개인적 사소한 일들, 그 다음은 정말 아무 말도 없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경우들이라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참고로 나는 심방을 거의 다니지 않고(물론 장례 같은 필수사항은 제외하고라도 원하면 가지만) 정히 가려면 입원이나 개업 특별한 가족사적 필요와 원함이 있을 때만 간다. 그 외에는 각자 알아서 잘 살자고 다짐을 둔다. 오해는 마시라. 내가 이기적이라거나 냉담한 목사는 아니니까. 나도 성도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줄 누구 못지않게 아는 사람이니까.





3.

내가 가장 염두에 두는 건 설교다. 이건 나의 할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나는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맡아 해야 할 일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령 재정을 관리한다거나, 주보를 만든다거나, 피아노를 친다거나, 찬양을 인도한다거나, 반찬을 만들어 온다거나, 설거지를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 누군가 교회에서 달리 해야 할 본분이 있는 걸까? 있어야하는 걸까? 나는 그런 의구심이 든다. 그런 건 내가 생각하는 교회의 범주를 넘어가는 일이다. 성도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도 아니고 교회가 마냥 우리 자유인 교회 같이 작아서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어야한다는 말도 아니다. 뜻있는 본분은 (내가 교회에서 하듯)각자 자기의 세계에서 감당해야할 일이고, 교회는 그들이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본분을 다하도록 교회에 매어두지 말아야 한다. 사찰 같은(암자였던가?) 교회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런 개념? 혹은 사도 바울의 두란노서원처럼 학원 같은 교회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성도가 사회의 각 부분에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도록 매어 놓고 추구해야할 일과 사업과 본분이 교회에게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내가 설교에 매진하고 그것에 나를 바치는 것은 오로지 교회에서 내가 제일 나간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처럼 각 사람이 자기의 영역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사회참여의 방식이다. 이런데도 내가 과격한가. 급진적인가. 나는 헌금도 교회가 운영되고 유지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물론 아직 그게 안 된다. 그러나 억지로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각기 알아서 자기의 할 일들을 찾아 각종 자발적 본분과 사명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4.

이 작은 교회에 모여 뭔가를 해보자고 성도를 쥐어짜는 것과 비교해 어떤가. 교회가 한다면 또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정부가 세금으로 선행을 하듯 헌금으로 선행을 할 것인가. 아니다. 선행은 반드시 자기가 자발로 현장성 있게 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교회가 자기의 고유한 욕망을 갖는 것을 반대한다. 자기 확대의 야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것으로 치장하여 벌이는 사업들과 프로그램들을, 경영주와 자본가의 팽창 욕망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교회는 자유를 획득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씀의 공동체이지 모여서 뭔가 회사나 관청처럼 공적 서류를 자꾸 늘리고 불리고 쌓고 세워가는 데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성도 자신은 못 서고 목사들의 목만 세운다. 그러니 목사들이 세습을 하지 않는가. 세습할 게 없어야 세습은 사라질 것이다.


자유인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찬을 하기 위해 함께 밥을 먹기 위해서이다.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이기 때문에 내 설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번 설교하는 건 그 한 번의 설교로 충분하다는 이유 외엔 없다. 매주 돌아오는 속도에 비하면 그 한 번의 소비가 아까울 정도다. 하나를 소화하는데도 버거운데 거기에 또 뭘 더한다면 그건 낭비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가 하는 일이니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 외에는 중요한 것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어야 그 다음 성찬도 밥도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로 모일 이유가 없다. 나에게 교회에 있어 설교는 그렇게 중요하다.


나는 한 주일에 서너 번씩 설교를 하고 주일이면 몇 부에 걸쳐 강단에 재 등판을 거듭하고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설교로 불려 다니는 목사님들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설교뿐 아니라 경영도 하고 사업도 하고 건축도 하고 당회도 하고 수련회도 하고 부흥회도 하고 기도원도 가고 금식도 하고 광화문에도 모여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고 무슨무슨 사랑에 반대하는 이상한 사랑의 집회도 가고 심지어 건강을 위해 골프도 치러 다니지 않는가.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된다. 특히 설교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앵무새가 아닌가. 말쟁이가 아닌가. 무당(巫堂)이 굿을 하더라도 신명(神明)을 유지해야 작두에 오르는 것처럼 목사도 영감을 유지해야 설교를 할 것 아닌가. 영감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차분하고 침착하고 조용한 침묵과 독서와 명상과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몇 줄의 편지를 쓰더라도 종이를 몇 장은 버려야 한다. 하물며 설교를. 그렇게 많이. 그렇게 유창하게. 해대는 것은 스스로가 앵무새 말쟁이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1부의 그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쏟아낸 목사가 2부 3부의 그 시간에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하루 대여섯 번씩이나 자기표절의 감격에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연하고 오연하다 못해 오싹해진다. 그들의 설교 자체는 차치하고라도. 나는 일단 적은 횟수가 성실하고 정직한 설교를 낳는다고 믿는다. 많은 묵상과 퇴고가 좋은 설교를 낳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손님을 초대한 잔치집의 밥상과 같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말쟁이 변설가들 한국교회 10대 혹은 20대 설교가라 떠받들여 진 목사들이 다 물 흐려 놓은 것 아닌가. 그들을 정말 시대를 대표할 설교자라고 할 수 있는가.


5.

폐일 언.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설교를 하는 목사들을 강단에서 우선 퇴출시키자. 남의 설교를 작성해주는 부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은 회개하고 양심선언을 하길 바란다. 교회개혁은 설교회복이어야 한다. (케리그마의 선포로서 설교도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설교 이외에 목회를 목사는 꿈꿔선 안 된다. 그러려면 목사가 되지 말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게 여러모로 더 낫다. 교회는 목사들의 자아를 실현하는 욕망의 각축장이 아니다. 


표절이 문제가 아니다. 설교가 실종하고 말쟁이들의 말잔치가 된 강단에서 그 말쟁이들을 내쫓고 진실한 설교자를 세우는 일. 그게 개혁의 시작이다. 어디부터일까? 내가 아는가. 여러분이 잘 알 터. 사단이 사단을 내쫓는 법이 없듯 목사가 목사를 내쫓을 법이 없다면 개혁은 목사로는 안 되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고린도전서 6:2). 행동을 개시하라. 이것이 진정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도행전 29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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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62)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예수께서는 그의 선교역정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위선을 매우 강렬하게 미워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신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닌 사회적 위치와 종교적 권위가 폭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도 감히 그러한 작업을 할 용기나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적 권위에 순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종교적 선행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선전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장해주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종교생활의 기준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이유는 낙타를 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낙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순수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정직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학식이 높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희생해 왔습니다, 나는 이만큼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등등은 사실은 전부다 낙타를 삼켜먹기 위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 욕심이 없으시군요. 아,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오셨습니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오로지 높은 지혜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오셨군요.” 등의 평가를 얻어내어 낙타를 먹어치우기 위해 위장하는 자들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정치판이 벌어지면 이렇게 ‘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발전의 선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표와 자리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의 위 속에 수 십 마리 낙타가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소위 기독교 인사들이(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교단선거뿐만 아니라 연합기관이나 자신의 교단과 기관에서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실은 낙타를 겨냥하면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덕을 선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은 낙타에 가 있고 하루살이는 그걸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겠다는 이들의 말과 삶 속에서도 하루살이가 낙타를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바가 하루살이를 걸러내며 살아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욕없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과 재물과 삶의 스타일, 그 자손들의 행실은 낙타를 삼킬만한 위가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발견한다.


예수께서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시면서 ‘눈먼 인도자’라고 공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게 된다. 그가 낙타, 즉 거부하기 어려운 크기와 강도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가, 아닌가이다. 아, 이 어리석음여, 하나님 나라를 낙타에 비길까?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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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호의 너른마당(61)


문제는 ‘어떤 성품이 주도하는가’이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세기 21:9-10)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모계사회의 종식과 더불어 부차적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을 생산하는 존재였고, 인간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종속된 재산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구조화되었고 문명의 생리처럼 되어갔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사렛 예수의 선교는 그러한 이스라엘 문명의 여성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들끓었다. 여인들의 고난과 천대에 대한 그의 따뜻한 다가섬이 그런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선교가 그토록 힘 있게 전개되었던 것도 짓눌림 당했던 여성들의 신앙적 각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새로운 자아상을 구성해 가면서 잃었던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중대한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온갖 굳은 일들은 여성들이 떠맡으면서도 정작 교회의 진로와 책임있는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남성들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여성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무래도 현실타파적인 공격성이 전면에 조명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이 때로 거칠어지는 점은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면을 시비 걸어 여성운동 전체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 자체가 새로운 해방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일까? 핍박받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 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일체의 위상을 그대로 보장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사라와 하갈의 대립을 목격하게 된다.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인 여성 사라가 같은 여성인 하갈에게는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가혹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갈에게 최대의 적은 사라였고, 사라에게 최대의 적은 하갈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대립이 성차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사라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갈의 존재를 주변부로 축출한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보듯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아들 이삭을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는 여인 하갈에게 가혹한 종의 주인이며,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는 악랄한 원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여인들의 닮은꼴을 보게 된다.


“저 가난한 자들의 자식과 내 아이와는 이 시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소, 저 공부 못하고 지지리도 못난 놈들과 내 아이와는 이 사회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저 출신이 미미한 여자와 내 아이와는 결혼하여 우리 집안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감히 우리와 어깨를 함께하려고 하는가? 내 자식만큼은 이 사회에서 가장 높고, 크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오.”


그렇게 해서 명문학교와 부촌 근처에는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질 수 없고,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계산 앞에서 깨지기 일쑤이며, 출신이 낮은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돈 없는 가정에서 시집 온 며느리는 구박덩이가 되고, 그 반대는 며느리가 상전이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구도가 해결되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을 지배자로 설정하고 자신의 자식도 지배자로만 키우려하는 여성이 어머니인 한, 우리 사회는 그런 ‘모성’에 기대어 자란 인간들로 계속 채워지게 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광야로 쫓겨나는 이들이 양산된다.


남성은 언제나 지배자이며 여성은 언제나 피지배자인가?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성품이 그 사람을 주도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성품이 그 사회의 구조적 중추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내정자에 대해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언급한 국민의당 이언주 원내수석부대표의 ‘성차별적인 발언’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인식이 아닐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하려는 사랑과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가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부당한 지배는 지속될 것이며, 억울하게 쫓겨나는 이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하갈에 대한 사라의 비정함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라와 그 사라에게 축출 당하고 있는 하갈, 이스마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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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2)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


중학생 때 프랑스로 떠났던 알고 지내던 아이가 방학이 되어 찾아왔다. 우리나라에서 너무 말썽을 피운 까닭에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할 수 없이 부모가 낯선 땅으로 보내버렸던 아이다. 쫓기듯 떠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당당하고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내던 내내 학생들과 학교로부터 제발 곁에서 떠나달라는 요청을 받아왔던 아이였다. 잘 지내냐는 의례적 인사를 건네고 나자 그 아이는 신이 나서 지나간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랑스 가길 잘했다고 너무도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기에 도대체 우리나라와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크게 씩 미소를 짓더니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의 기를 죽이는 교육이라면, 프랑스의 교육은 아이의 기를 살리는 교육인 것이 차이점입니다.”


공자에게 가해진 질문 중에 참된 인간(군자)과 속 좁은 인간(소인)에 대한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눈에 두드러진다. 특히 ⟨안연⟩편은 이러한 물음들이 잘 집약되어 있다. 그 중에서 아름다움[美]과 그 반대인 어그러짐[惡]에 대한 구절이 눈에 뜨였다. 당시 미적 기준이 균형과 조화에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어그러짐의 개념이 선악의 개념과 상통했다.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참된 인간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어그러짐을 이루어주지 않는다. 속 좁은 인간은 그 반대다(子曰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 ⟪논어⟫,⟨안연⟩12장 16절


참된 인간은 사람들이 조화미를 갖추도록 돕는다. 그러하기에 조화를 깨뜨려 어그러지게 만들지 않는다. 개인 내면의 조화는 물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어그러짐 없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 참된 인간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속 좁은 인간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 모든 관계들이 깨지고 어그러지도록 만든다.


이 말은 ⟪논어⟫, ⟨자로⟩편의 ‘참된 이는 동일하게 만들지 않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속 좁은 이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동일하게 만들려 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구절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 억지로 획일적으로 만들고자 하면 거기에는 분명 어그러짐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동방에서는 서방의 선악 개념 대신에 미추(美醜)의 개념이 존재했다. 미추의 개념에서도 서방의 미학이 말하는 비율이나 배율과 같은 미에 대한 규정이나 산술적 법칙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지러지거나 어그러짐 없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아름다움이라 여겼다. 동방에서는 미추 또한 존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 하는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종종 아름답지 못한 이들을 대면한다. 내게 불편함을 주어 그를 만나거나 대화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대하면 습관적으로 그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일까를 측정하게 된다. 바탕이 나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환경이 그를 그렇게 유도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부딪힘 없이 원활한 것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가 나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어그러진 사람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사람 중에는 본질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때로는 관계가 나빠서 아름답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세기⟫ 앞부분에는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온 우주를 창조하면서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 구절이 등장한다. 너무도 흡족하고 아름다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좋았다’의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이것은 후에 선(善)하다로 확대 해석되지만, 원래 잘 어울린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에덴동산은 이런 아름다움의 집약체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운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겨났다. 상대의 마음을 의심하고 상대로부터 마음을 분리하면서 문제가 일어난다. 마음으로부터 어그러짐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당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맡기기 시작했다.


어그러짐은 얼른 회복시켜야 한다. 어그러짐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은 끔찍하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어그러짐 때문에 발생한 일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지도록 한다. 땅을 갈아야 먹고 살고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아픔을 알게 하였다. 어그러짐의 결과는 수고이고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 ⟪창세기⟫3장 22-23절


처음의 사람들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나서 인간들은 더욱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살인과 도둑질,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그러짐을 성서는 죄악이라고 한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 바벨탑의 사건, 노아 홍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추악함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사야⟫는 아름다움이 회복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이사야 35장 1-2절).


이사야는 아름다움이 회복된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묘사한다. 사람과 자연, 인간과 동물이 어울려 지내는 상태가 낙원이라고 말씀한다.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모든 어그러진 사람들을 바르고 아름답게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을 분류시키고 더욱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단숨에 단단한 어그러짐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기 때문에 그를 향해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물론 완벽히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름다움을 회복하려 애쓰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분열과 어그러짐을 펼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습관화된 공동체는 예수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공동체에서는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사건이 꾸준히 일어나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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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5)


가뭄의 의미


고라니가 마당까지 내려와 생전 먹잖던 비비추와 개망초까지 뜯어먹고 있다. 잎이 겨우 나기 시작한 고추 모종을 몽당가리로 만들어 놓은 진 오래되었다. 알뜰살뜰 부쳐놓은 싹들을 생각하니 애끓는 마음. 비를 비는 기도를 드린다. 허나 무슨 엘리야의 예지로 구름을 헤아릴까. 그보단 간절한 시절 속 태우는 가뭄이 무슨 뜻인지 하늘에 물어본다.


󰡔사무엘󰡕은 하권의 끝에(21) 다윗왕의 남은 치세를 정리한다. 소임이 끝난 창립자에게 역사가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엔 삼년 동안 비가 오지 않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결과(어떻게 물었을까?) 전왕(前王)과 그 집안이 저지른 기드온 학살사건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다. 왕은 그 하회(下回)를 희생자의 유가족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달라 요청한다.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사울왕의 고향에서 그의 완전한 종말을 선언하리라는 원한에 사무친 요청이었다. 놀랍게도, 왕은 수락한다. 사울가(家)의 자손 일곱이 목매임을 받았고 곧 비가 쏟아졌다. 복수를 완성한 비, 원한을 풀어내는 비. 과거사의 피 흘림으로부터 땅을 정화시키는 비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를 맞이하진 못했다. 오직 한 사람 사울의 미망인 리스바가 자식들의 시체 위에 내리는 비를 맞았다. 영욕의 한 시대를 고별하는 처절하고 질긴 울음과 함께. 왕은 그 시체들을 거두어 사울왕의 묘실에 정중히 매장한다. 이로써 화해와 치유가 이루어졌고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 다윗의 과거청산. 이것이 대왕의 최후 업적이라 사관(史官)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과 봄이 이어진 접경의 긴 터널이 끝나자 새로운 계절이 펼쳐진다. 신(新)정부에 거는 기대와 찬탄으로 환호하기도 한다. 이제 막 복구한 일상은 연부년 삼년의 기근 끝에 있는데, 갑자기 맥이 빠지고 무서워지기도 한다. 왜 맥이 빠질까? 무엇이 무서운 것일까? 깜빡깜빡. 우리의 가뭄이 어떤 것이었지? 세월호, 물대포, 헬조선, 각양 마피아들의 연대, 베를린 장벽보다 더 공고한 넘사벽이 되어 탈출 외에는 전망이 없으리라 던 악몽 같은 참사와 장례와 애도의 기간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는 아랑곳없이 백년까지 누리리라. 백년까지 우리를 지배하려는 가상의 왕조라도 있는 것처럼. 적대 아니면 원한뿐인 역사의 미래가 무서웠다. 꿈을 비는 마음으로 동티라도 날까 평화와 절제의 집단지성으로 천재일우(千載一遇) 겸손한 승리를 획득했다. 권력 교체를 넘어선 함께 나가는 행복의 시대를 위해. 나 한 사람 가만있으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무서움이 하나 더한 촛불들의 반전이었다. 그러니 ‘혁명은 이루지 못하고 방만 바꾸었다’는 시구처럼 이 반전이 ‘다 똑같다’는 허무주의로 돌아갈까 무서운 것이다. 해방이후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고, 4.19 이후 5.16이 터지고, 10.26 이후 12.12와 5.18이 터지고, 6.10 이후 6.29가 나온 것처럼. 말과 말이 겹치고 말과 말이 엇갈리고 말과 말이 말들을 낳기를 원하는 끝없는 스캔들. 새 부대에 새 술이 간절해진다.


거듭남. 과거의 청산. 회개와 고백이 요청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율법의 시대와 같이 보복으로 조종(弔鐘)을 울려서도 안 된다.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의 난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자발적 회개와 고백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안달도 방관도 없이. 이 변화된 시대의 의미를 묻는 회개와 고백을 선도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솔직히 말해보자. 역사가는 장차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를 어떻게 기록할까? 󰡔사무엘󰡕의 가뭄과 비는 기상이변의 기록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모르거나 알아들은 인간에게 내리는 화답이었다. 개혁도 개개인 실존의 구체성에 이르지 않고는 ‘변한 게 없다’는 허무주의로 돌아간다. 누구보다 개혁을 진리파지(眞理把持)의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허무주의부터 밝혀야 할 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유럽여행을 가는 정신으론 미진하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로마서 2:28). 대지가 기근에 시달리는 한 기드온 거민들의 영의 가뭄도 끝나지 않았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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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여성일지도


구약의 지혜서를 말해야하는 이유


나는 신학을 전공학문으로 결정하고 공부하고 가르쳐왔지만, 잘한 일인지 수없이 돌이켜봤다. 나는 신학하기의 영토에서 외부자이며, 방관자적인 처지에 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신학을 공부할수록 신학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학이 자칫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놀이로 그쳐버려 너절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없겠다, 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구약 지혜서 연구는 세상의 갈등과 모순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전도서는 진리와 현실 사이의 긴장된 괴리감을 좁혀 갈 수 있었던 짧지만 가장 심오한 책이요 지혜의 말씀이다.


무엇보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정경의 말씀으로서 구속 역사보다 창조의 보편적 질서에 관심을 갖도록 재촉한다. 그럼에도 A는 B다, 라는 주류 지혜 전통을 향해 A는 B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용감히 말할 줄 아는 ‘지혜자’(전도서 12:9)의 목소리가 우세한 책이다. 전도자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관찰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순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현실의 모호성을 살핀 것이며, 인류의 평등을 말하되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소외된 구약 지혜서의 진실한 목소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동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시작으로 구약 지혜서 말씀의 숲을 산책해보려 한다.



전도자가 솔로몬? 글쎄요


구약의 책들 중에서 예언서와 지혜서(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첫 장 첫 절은 ‘표제절’로서 저자 이름을 밝힌다. 욥기만 예외다. 그런데 표제절 중에서 미묘한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전도서 1장1절은 흥미롭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개역개정)


‘전도자’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의 ‘코헬렛’이다. ‘전도자’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보다는 직업이나 직책에 관계된 이름처럼 보인다. 현대 영어 번역본들도 “설교자”(NAS, KJV, RSV), “선생”(NIV)으로 번역되어 직능의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코헬렛은 자료를 “수집하다”, 사람들을 “소집하다”, 라는 “카할”동사의 여성형 분사다. 말하자면, 회중이나 공동체를 소집하는 사람, 회중의 인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번역을 피하여 히브리 성경제목을 그대로 음역한 ‘코헬렛’(공동번역, TNK)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코헬렛’은 고유명사인지 직책과 관련된 보통명사인지 논란의 대상이고, 여전히 모호하다.


나는 코헬렛이라는 명칭이 익명성을 고집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의 직능적인 정체성을 표현한 필명이지 싶다. 왜냐하면 저자 코헬렛은 책을 마무리하는 끝맺음말에서(12:9-14) 자신이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2:9-10, 개역개정)


그는 수집의 대가였고, 성문 앞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리의 말들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가르치고, 따져보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정리하여 새롭게 잠언들을 생산한 지혜자였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본문에서 솔로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전도자와 솔로몬을 동일시 해왔다. 다윗의 아들 중에 ‘코헬렛’이라는 직계 아들이나 후손이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전도자를 솔로몬과 동일시할 만한 근거는 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1:12)라는 말은 솔로몬을 명시하지 않았어도 솔로몬을 상기시킬만한 쾌락, 거대한 토목사업과 관련한 업적, 권력이 제공한 유익들을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2:1-10).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헛됨’(히브리말, ‘헤벨’)과 ‘바람 잡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2:11).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권력과 영광을 ‘무’(無)로 만들어 버린다.


위대한 지혜의 모범, 건축과 토목사업, 어마어마한 부, 수많은 처첩들에 이르는 모든 것을 솔로몬 자신의 반성적 성찰이라고 말하기에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한 마디로 고대의 지혜자 코헬렛은 솔로몬을 빗대어 ‘솔로몬 전통의 패러디’를 감행하고 지혜와 권력, 그리고 집중된 부를 문제시했다. 솔로몬의 모든 통치와 웅장함을 헛된 바람으로 일축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솔로몬을 연상시킨 위대함의 묘사들은(1:12; 2:1-10) 문학적인 픽션인 셈이다.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왕의 의상을 걸친 저자의 ‘페르소나’로서 문학적인 장치를 활용해 솔로몬의 영광을 ‘무’로 만든 것이다. 하여 자끄 엘룰(Jacques Ellul)의 말대로 “이것은 어떤 신학적 논쟁보다도 더 큰 스캔들이다.”


그러면 “신학적인 스캔들”의 발의자 전도자가 솔로몬이 아니면 누구인가? 솔로몬의 위대함을 ‘무’로 만든 지혜자는 ‘코헬렛’이라는 필명의 여성일 수 있다. 너무 과격한가? 이유는 있다. 전도자의 말(1:1)을 서술하는 “전도자가 말했다”라는 표현이 세 번 출현한다(1:2; 7:27; 12:8). ‘코헬렛’ 자체도 모호한데, “말했다” 동사는 더 애매하다. 히브리어 단어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데, 두 번의 남성 동사(1:1; 12:8)와 한 번의 여성 동사(7:27)를 사용했다. 전문적인 독자들 중에는 필사자의 실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필사자의 오류가능성, 인정한다. 그러나 말놀이를 즐기는 코헬렛의 문체를 생각하면, 이것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애매하게 수수께끼처럼 처리하려 했던 의도적인 실수는 아니었을까?


동사의 이중적인 사용은 독자의 상상력을 발동시켜 언어라는 비밀의 방을 두드리도록 유혹한다. 과도한 추측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여성 지혜자의 존재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전문성을 띤 여성 지혜자들이 존재했었다(사사기5:29; 사무엘하14:2; 20:16). 예컨대, “지혜로운 시녀들”(개역개정, 사사기5:29)은 정확하게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가 아니라 귀족 계급의 지혜로운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문성을 갖춘 조언자들이다. 또한 요시야 왕의 개혁에 앞서 성전에서 방치되었다가 발견된 율법책의 진위여부를 묻는 제사장과 왕의 사람들에게 여자 예언자 훌다가 정경성을 확인시켜주고, 하나님의 계시를 왕에게 전달했다(열왕기하 22장). 이후 요시야 왕의 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글쓰기와 읽기 능력을 갖춘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방증하는 일화다.


코헬렛이 스스로를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여성 동사를 사용했지만 여성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코헬렛이 잠언의 수집자요, 창조적인 생산자답게 말의 세계를 즐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전도서의 저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따지는 것이 해석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 다면, 나는 잠언 31장에서 왕을 교훈하는 어머니(잠언 31:1-9)와 이른바 ‘현숙한 여성’(31:10-31)을 노래한 맥락을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고리를 끊지 못한 사회에게 해독제요, 수많은 신앙의 여성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말하련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고유한 이름을 말하지 않은 ‘코헬렛’(1:1)이라는 필명의 지혜 선생(12:9-14)의 가르침이 전도서다. 우리의 삶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아서 재미와 즐거움이 있지만, 모호함과 고통이 존재한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대중이 모이는 광장과 혼란에 맞서 투쟁하는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했던 현장성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고도의 수사적 전략이 녹아든 ‘해 아래’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찰과 비평적인 코헬렛의 견해들, 곧 그의 혹은 그녀의 말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수고로운 즐거움이다. 그러나 ‘찌르는’(12:11) 고통이 있으니 조심하시길.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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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35)


예수는 오늘도 여전히 길인가?

- 앨버트 놀런 《오늘의 예수》-


“예수의 하나됨 체험은 하느님 아빠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느님은 아빠이시고 공중의 새, 들에 핀 나리꽃,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돌보시는 창조주시다. 예수는 당신 자신을 자연과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예수는 자연과 자신과 하느님의 완전한 조화 속에 살았다.”(210쪽)


“예수가 바란 것과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 사이에 충돌이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참자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근원적 자유는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자유이며,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기꺼이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233쪽)


193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서 태어난 앨버트 놀런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 한 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신학자이다. 그 책을 통해 놀런은 예수가 펼친 선교 사역의 정치적 맥락을 강조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 많이 소개되지 않던 80년 대 초 그의 책은 신학도들에게 큰 충격과 도전을 주었다. 《세속 도시》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그 책을 가리켜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짧지만 가장 적확하고 균형 잡힌 서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앨버트 놀런은 자족적인 강단 신학자가 아니다.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따라 말하고 실천하는 영성가이기도 했다. 때로는 예언자적 음성으로 그 시대를 질타하고, 때로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그 결과 그는 2003년에 민주주의․인권․정의를 위한 투쟁과 아파르트헤이트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던 종교 도그마에 대해 도전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남아공 정부로부터 루틀리 훈장(Order of Lutuli)을 받았다. 이 훈장은 남아공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의장이었던 앨버트 루틀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남아공의 민주화운동 하면 우리는 넬슨 만델라나 데스몬드 투투를 주로 떠올리지만 앨버트 놀런도 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출간한지 30년 후에 내놓은 《오늘의 예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를 천착한 후 그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아온 한 노신학자가 내놓은 신앙적․신학적 고백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 거대 담론의 퇴조


앨버트 놀런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징표를 살피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라야 우리에게 만 건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앨버트 놀런은 먼저 거대 담론의 퇴조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근대화와 인류의 진보라는 이상에 감동하지 않는다. 이상에 대한 열정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불안이다. 전쟁, 살인, 학대, 구조적 폭력, 테러, 환경 파괴, 지진과 쓰나미의 공포가 사람들의 의식을 옭죄고 있다. 사회이론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세계의 특징을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로 요약했다. 국민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통합과 안전을 꾀하던 ‘견고한’ 근대는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생존과 안전에만 매달리게 된다.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 언제든 쓰레기처럼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 되었다는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산되고, 삶의 자리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단 쓰레기로 분류되면 다시는 재활용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공포에 사람들은 가위 눌리고 있다.


과거에는 자기 나름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종교에 기대 이런 불확실성과 공포를 타개해나갔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먹구름이 온 세상을 뒤덮은 후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은 해체되었고, 종교조차 구체적 삶에서 유리되면서 사람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술과 약물에 의존하거나 재물과 소유를 통해 불안을 극복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의심할 수 없는 절대 진리를 제공하는 권위 아래 즐겨 복종한다. 이것이 근본주의가 득세하는 소이연이다. 어떤 이들은 영성에 탐닉한다.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 받거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 뭔가 큰 힘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빚어낸 풍경이다. 앨버트 놀런은 서구의 자기도취적 개인주의가 빚어내는 폐해와 지구적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에 특히 주목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의 조건들이 빚어낸 변종으로서의 에고 숭배에 주목한다.


그러나 절망의 조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로부터 분리된 영성의 추구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고, 미국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세계화가 세상을 약육강식의 벌판으로 만들었지만 공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반전 평화운동, 모든 희생자를 향한 연민의 세계화 말이다. 오랜 동안의 해방 투쟁의 결과로 “현실에 엄존하는 새로운 목소리, 즉 여성, 흑인, 원주민, 노동자, 소작농, 빈자,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어린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48쪽)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앨버트 놀런은 기계가 아니라 신비로서의 우주를 말하는 신과학의 등장을 반기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계론적 세계관이 쇠퇴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다.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공존하고 있는 이 시대, 불확실성과 공포의 세계화가 연민의 세계화가 더불어 길항하고 있는 이 시대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데 예수는 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앨버트 놀런은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보다는 그의 영성에 관심을 집중한다. 물론 이 둘을 칼로 베듯 가를 수는 없다.


• 예수의 영성


유다의 소농이었던 예수의 영성은 히브리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유대교나 시대정신과는 어느 정도 대척점에 서 있었다. 기존 질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불온한 사람이다. 관습적 신앙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의 이면에 있는 지배의 욕망과 탐욕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쫓겨난 이들, 갈릴래아의 비천한 이들에게서 솟아나오는 것”이다.(78쪽) 그런 열망에서 비롯된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는 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인류이다. 예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승리자가 아니라 희생자가 되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갈릴리 소작농의 눈으로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예수는 예언자의 전통 위에 서서 당시 사회와 종교 권력 체제의 관습에 대담하게 도전했지만, 그런 활동을 뒷받침한 것은 끊임없는 기도와 관상이었다. 관상을 통해 그는 자기의 에고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었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앨버트 놀런은 이것을 예수의 ‘아빠 체험’이라 요약하면서 바로 그것이 “예수의 지혜와 명료함과 확신과 근원적 자유의 원천”(95쪽)이라고 말한다. 예수에게 있어 정의와 기도, 예언과 신비는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이다. 도로테 죌레도 같은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죌레는 우리가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려면 하느님 현존의 신비를 전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혁명 곧 저항을 내포한 신비주의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항이 없는 신비주의는 자기 탐닉의 길로 인도하고, 신비 체험이 없는 저항은 메마른 경직성으로 인도하게 마련이다.


앨버트 놀런은 예수가 치유자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예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죄와 허물을 보기보다는 “상처와 낙심, 아픔, 혼란, 두려움을 보았다”(104). 그들은 길을 잃은 자들이었지 도덕적으로 단죄되어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기득권자들의 위선과 독선을 나무라셨지만 그들을 인격체로서 사랑하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예수는 그가 이방인이라 해서 또는 로마인이라 해서 백안시하지 않았다. 그들도 치유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 사역이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멀기만 한 변화의 길


예수의 영성에 대한 천착이 결국 수렴되어야 할 곳은 우리 인격과 삶의 변화이다. 저자는 ‘제3부’인 ‘인격의 변혁’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앨버트 놀런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영성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장애는 ‘분주함’이라고 말한다. 강박관념처럼 우리를 몰아붙이는 분주함은 삶의 실상과 대면하지 못하도록 한다. 저자는 예수를 따라 침묵과 고독의 장소로 가보자고 제안한다. 성찰과 기도를 통해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스며들 때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교류에서 얻는 통찰도 비로소 창조적인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3부인데, 예수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든지, 그러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지, 삶의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라든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이감을 회복해야 한다든지, 집착을 여의고 하나님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리라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이야기를 왜 오랜만에 내놓는 책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느닷없이 깨달음이 장군죽비처럼 내 의식을 강타했다. 우리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예수적 삶에 대한 이런 요약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진부해 보이는 가르침일망정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과 개방성이다. 수도회에 들어간 지 50년이 넘어 예수라는 존재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거의 마무리해야 할 노사제가 내놓는 결론을 ‘아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 아닐까?


• 하나됨을 향한 여정


마지막 장인 ‘제4부’의 핵심어는 ‘하나됨’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찢기고 갈라진 세상에서 공존과 소통을 넘어 하나됨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견 공허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저자가 일치, 화해, 조화, 평화, 사랑이라는 말 대신 하나됨oneness이라는 단어를 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치나 조화는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화해는 갈라진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반면에 “하나됨은 우리가 이미 하나였고 언제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172쪽)하기 때문에, 단순히 그 하나됨을 의식하거나 깨닫기만 하면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앨버트 놀런은 ‘하느님과 하나됨’, ‘우리 자신과 하나됨’, ‘다른 사람들과 하나됨’, ‘우주와 하나됨’을 순차적으로 짚어간다. 하느님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아빠 체험’이 보여주듯 하느님의 신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발견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자신의 약점과 한계와 부끄러움을 받아들여 자기 인격 안에 통합시킬 때 우리는 에고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참 자기와 접촉한 사람에게 남은 없다. 생명의 상호성을 알아차린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을 대상물로 다루지 않는다. 타인과의 동일시, 공감과 환대, 그리고 나눔은 그런 하나됨을 경험한 이들의 삶이 맺는 열매이다. 마침내 이런 일치가 당도하는 곳은 우주와의 하나됨이다. 삼라만상 속에 깃든 창조적 생명에 눈을 뜬 사람은 온 세상이 한 몸임을 자각한다. 그들에게 삶은 경이로움 자체이다. 오늘의 과학은 종교의 경쟁자가 아니다. 앨버트 놀런은 “과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다루면서, 더 위대한 경이와 외경과 이해를 위한 창문을 열어 준다”(214쪽)고 말한다.


이러한 다층적인 하나됨 체험은 고립된 에고의 횡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성공에 대한 미련, 주위의 평판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모두가 다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시간 여행자로 살아가는 인생의 근본 속성은 ‘불안’이다. 사람들은 그 밑도 끝도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용물을 만든다. 그런데 그 대용물을 얻을 힘이 부족할 경우, 자기에게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제도와 자기를 합일화하곤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체주의나 근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유의 길은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다. 다른 이들의 체험으로부터 배우고 지지를 받을 때 자유에의 감수성도 자란다.


그런데 자유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유는 더 위대한 어떤 것,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는 자명한 듯하면서도 모호하다. 그렇기에 오용되기 쉽다. 앨버트 놀런은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공동선’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놀라운 제안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동선이라는 용어도 오용될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억압적인 정부 혹은 기업이 개인의 권리를 짓밟거나 묵살하기 위해 ‘공공의 이익’ 운운하는 일을 너무나 자주 봐왔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마치 모든 사람을 위한 선인 양 제시되는 것이다. 저자가 어찌 보면 이미 낡아버린 그 단어를 꺼내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옮기는 데 이보다 더 나은 용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공동선을 “온 인류 가족이나 전체 생명 공동체, 광활하게 펼쳐진 전체 우주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한다(232쪽)고 정의한다. 오늘의 예수는 바로 이 지점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예수가 걸어간 길은, 우리가 하느님의 위대한 예술 작업에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창조적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로, 근원적 자유로 이끌어 주는 길이다.”(236쪽)


앨버트 놀런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할 뿐 하나님의 일은 매우 서서히 드러난다면서 미래는 안전하다고 말한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 도저한 낙관론에 쉽게 공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사제의 낙관론에 잠시나마 기대 쉬고 싶은 마음이다. 예수, 그는 여전히 우리의 길이고 구원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적인 삶으로만 할 수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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