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부제(副題)는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다. 읽으니 우선 글이 저자의 인품처럼 잔잔하고 진진하다. 묵직한 중량감이 독서를 차분하게 한다. 인용된 예레미야 시대의 정세와 동요는 화염과 폭풍 같을지라도 그 숨 가쁜 현실을 행간에 묻어둔 채 담백하게 기록된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는 저자의 말씀을 대하는 진중한 숨결이 느껴진다.

 

실존이 놓인 현실과 더불어 가는 슬픔

 

그것은 우선 겸손한 자세다. 어떤 겸손인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4,5)”,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니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훨씬, 무한히」,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너무나 바쁘고 들떠있는 주변세상의 속력과 속도에 제압당하며 살아가는 세태 속에서, 이런 걸 느끼기도 어렵지만, 드러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자는 아마 예레미야서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걸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그것부터 느끼게 해준다. 복중에 짓기 전에, 태에서 나오기 전에,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첫마디로 지극한 슬픔을 표명한다.

 

그 슬픔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현실과 직면한 민생의 고통과 다가오는 멸망의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와 더불어 있다. 그것은 차분한 사람의 슬픔이고,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다. 그는 세상의 선지자로 나서기 전, 남에게 무언가를 표명하기 전 이런 슬픔의 고백을 품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 풍경은 그래서 읽기도 전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거라고.

 

그러나 독자들이 저자를 따라 하루하루 시간을 들여(그렇게 읽으면 좋겠다) 예레미야의 발자취를 따라가노라면 삶과 존재의 신비에 대한 경외와 실존의 고백으로부터 나오는 겸손함과 그러한 자기부인이 주는 뜻밖 은총의 휴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비일지라도 실존이 놓인 현실과 더불어 가는 슬픔이고, 피치 못하게 선택받은 선지자(先知者)의 슬픔일지라도 자기는 물론 이 세상 전체를 부인함으로써 영생을 따라가는 은총의 과정이다.(자기를 줌〔버림〕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가능의 영역에서 가능한 꿈과 비전으로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비현실의 현실을,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가능하고 소멸되지 않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의 양식(성만찬, The Holy Communion)일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저자의 손가락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관심이 늘 이 세상의 중심보다 구석진 곳, 외진 곳, 그늘진 곳, 그래서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외면당하는 곳,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무명의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고 가리켜준다.(「하나님의 방법」) 그것은 무명(無名)이나 유명(有明), 예레미야가 그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자명하다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굳이 손가락까지 짚어가며 읽음으로써 새롭게 발견하다니. 마치 본래 있던 대륙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대륙’이라 부른 사람만큼이나 신기하다.

 

저자는 그 항목의 결미에 이렇게 쓴다. ‘말을 잘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어눌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43쪽) 그러므로 그것은 「약점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낸 겸손한 사람의 의연하고 결의에 찬 선언이다.

 

예레미야가 살아간 시대에 예레미야는 지금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가 아니었다. 당대에 그는 예언자로 인정되지 못했다. 경멸받고 무시당했으며 욕설과 조롱과 투옥과 추방과 피체를 당해야 했고 원치 않는 곳(이집트)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예언의 말씀을 업으로 삼아 삶을 살아갔다. 그의 전 청춘을 다 바쳐서.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파국으로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의 예언서처럼 예레미야와 함께 우는 여정도 거기서 끝난다. 예레미야가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가 아니듯이, 예레미야와 함께 우는 독서 역시 항용 우리의 독서(우리 시대의 설교)와 같지 않는 점이 비상하다. 그 비상함은 현실을 과장하거나 소망을 부풀리거나 억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일체의 욕망과 야망과 소망과 아첨을 거부하는 예언자의 예언자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하나 결연하고 피동적이나 단호하게 행동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지시해준다.

 

겸손과 결의와 절제의 굳셈

 

설교를 업으로 삼고 사는 목사로서 동시대의 설교에 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나의 스승이지만 그 말은 다른 의미론 모두가 나의 경쟁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때론 선의의, 때론 불만족과 저항과 대립의 경쟁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의의 경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교도 그 무엇도 선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지만 설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바람직하다는 것보다 그저 어떤 사람이냐 정도의 무심함이 필요하다. 무심함이지만 과학성이 있는 무심함.

 

모두들 목표와 비전과 소망과 꿈과 야망의 구획된 프로젝트 안에서 발버둥치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만족스럽지 못한 총체적 불만이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바로 그런 분주함과 분요함으로부터 지극한 샬롬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전파해야할 교회와 교회의 설교가 그러한 불만족의 표상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나와도 열 명, 스무 명, 백 명은 나올 법 한. 그러나 저자의 예레미야 읽기는 그러한 불만족에 대한 속 시원한 해법이 아닌 그래서 더욱 불만족스러운 해법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고전적이고 너무나 겸손하고 너무나 정중한 건지도.

 

그러나 바로 그런 겸손과 결의와 절제의 굳셈이 또 다른 섣부른 분요함을 추가하는 설교가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차분함과 고요함의 미덕(美德)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심한 듯 치밀한 과학이 들어있는. 저자는 우리(나)로 하여금 예레미야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예레미야를 읽는 사람됨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가시덤불과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그 위에서 요란하게 믿음의 언구럭만 떨고 있는 것은 혹 아닐까?’(「언구럭을 떨지 말라」) 정말 싸워야할 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정말 싸운다는 건 무엇인지, 저자는 마치 말과 경주하듯 끝까지 겸손과 결의의 손가락을 떼지 않는다.

 

*

일독(一讀)을 권한다. 매 회 분량은 길지 않다. 차분한 독서. 두런두런 들려주는 진진한 음성. 우렁우렁 울리는 마음의 공명. 그리고 예화로 꺼내보는 저자의 추억의 에피소드들 속에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사랑과 맛깔스런 이야기와 빛나는 지혜가 담겨 있다.

 

동화작가이기도 한 저자를 만나면 비전(秘傳)으로 간수해온 오래된 고전의 신선함이랄까 하는 동화적(?) 발견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를 통해 독자들이 동화 속 짤랑 거리는 금화와 같은 순결한 정신의 힘을 만나게 되기를. 여러 번역을 대조하며 짚어가는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요란한 세상 가운데 본래 있는 평화를 찾아가는 좁은 문을 발견하기를. 깡그리 끔찍한 폐허일지라도, 웅덩이에 빠졌을지라도, 낮과 밤이 자신의 때를 따르는 한, 흔들릴수록 중심에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기를.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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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썽이며 조심스럽게 지구별을 거니는 사람에게

 

늘 마주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을 돋우는 디딤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의 틈새를 발견하기 쉽지 않은 이 시절, 더더욱 이런 사람 하나가 또 다른 삶을 일으킵니다. 목사님 글을 챙겨 읽으면서 마주한 듯 가까운 마음이 일곤 했습니다. 자주 생각을 돋우고 마음결을 벼렸습니다. 이름이 보이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운 벗이 보낸 편지를 읽듯, 목사님의 편지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아껴 읽었습니다.

 

생명을 우뚝 우뚝 일으키던 ‘손이 아름다운 사람 예수’를 날마다 그리며, ‘물결처럼 가벼우면서도 산맥처럼 무거운 손’을 잡고 살아오신 지난 시간이 그려지는 듯 했습니다. 일상에 담긴 성스러움, 그늘진 자리, 사람들이 귀 기울이지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곳에 먼저 눈길이 미치고, 먼저 뿌린 씨앗이 싹이 나지 않아 다시 뿌리는 ‘움씨’ 같은 심정을 읽었습니다.

 

아픔의 자리에 조심스레 다가서서 손을 내밀고 그곳에 자주 일상을 내려놓는 ‘글썽이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수백 년 고목도 해마다 여리디 여린 새순, 새잎으로 살아가듯 예민한 마음 촉수를 뻗어 아프고 설운 순간들을 고스란히 품고 ‘하루하루 중심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편지를 펴보면서 제가 만났던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오래 전 정읍에 사시는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날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멀쩡한 것도 다 내다버리고 허투루 대하는 세태를 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물건들을 한 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고약함이 서운하고 마음을 무겁게 했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버림받아 서운한 것들, 쓸모를 찾지 못하고 버려진 것들을 모으기 시작하셨답니다. 버려진 것이 제자리를 찾는 세상을 두 손으로 손수 만들기로 마음먹었던 거지요. 그리하여 그분은 천덕꾸러기로 나뒹굴던 것들의 쓸모를 찾고 구석구석 이야기를 담아 산자락 아래 작은 놀이공원을 손수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쓸모를 찾았습니다. 날마다 줍고 덧대고 잇고 꿰매고 칠해 눕히고 세우면 그 공간에서 그것들은 나름 쓸모를 찾아 소소한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쟁반과 냄비뚜껑이 악기가 되어 무대에 놓이고, 알록달록 색을 칠한 버려졌던 냉장고를 열면 장난감들이 가득합니다. 온갖 세련된 것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쓸모를 찾아 자리차지를 했습니다. 버려진 동물들도 보듬어 공원 한 쪽에 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온갖 것들이 다 제 색과 모양을 찾았습니다. 측은하고 딱한 것들이 살터와 일상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분에게서 글썽이는 마음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약한 것들을 글썽이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버려진 것에 눈길을 주고 손을 내밀었던 세월이었습니다.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품고 아우르며 사는 세상

 

다른 한 분은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중국 내몽고 사막에서 나무를 심고 있는 인위쩐이라는 분입니다. 한 행사에 초대를 받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거칠고 모진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초록의 땅으로 바꾸려는 사람, 그분은 생명의 흔적도 없는 황량한 죽음의 땅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답니다. 쉼 없이 날마다 먼지바람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나갔던 거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한 사람이 어떻게 사막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사막은 어느새 옥수수가 자라고, 수박이 넝쿨을 뻗고, 미루나무 숲에 새들이 날아오고, 동물이 깃드는 생명의 땅이 됐습니다. 날마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을 줘야 하는 나무만 2만 그루가 넘는다고 합니다. 힘겹게 가녀린 잎을 내민 나무에 그녀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옆으로 새나가면 아깝고 안타까웠답니다.

 

한국을 방문한 그녀는 눈 닿는 곳마다 초록이 가득한 이 땅이 부러웠고, 동시에 사막의 나무들이 눈물 나도록 측은하다 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고 자신의 땅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은 ‘날마다 지구에 나무를 심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땅에 붙어있으면 내 나라와 내 집 밖에는 안 보이지만, 시선을 넓혀 하늘에서 보면 지구가 바로 자신의 집이고 오로지 지구만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시작해야 두 번째 사람이 있고 세 번째 사람이 있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그녀에게 나무는 일상이고 평화이고 꿈이었습니다. 막막한 사막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에 울부짖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변화도 있었지만,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사막에 인위쩐이 아직 초록같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한결같이 풀씨를 뿌리며 나무를 심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막에 나무가 뿌리를 내려 숲의 일상을 찾아 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꿈꾸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분에게도 글썽이는 마음, 풀 한 포기를 생명 같이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편지 속에서 간절하게 절망과 두려움의 안대를 벗고 함께 일어서서 어깨동무하고 함께 걷자고 말을 거는 길동무를 보았습니다. 집착하거나 머무르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움직이며 만나는 삶을 마주했습니다. 터무니없이 뒤엉킨 세상, 막막하고 끝 모를 아픔으로 채워진 자리,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안타깝고 참담한 시간 한 복판에서 ‘작고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에 눈길을 두며’ 글썽이며 보듬어 안는 뜨거움을 읽었습니다. 목사님은 척박하고 냉담한 시절, ‘좌절과 무기력’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걸어서 길을 내고, 두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세상을 고치는’ 치열하고 뜨거운 마음에서 희망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확성기를 통한 쩌렁한 소리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건네는 말, 손으로 마음 담아 꾹꾹 눌러쓴 투박한 편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일으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상처에도 온 신경과 온 몸이 그곳에 집중되듯, 세상의 중심은 아픔이며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과 서럽고 속상한 아픔의 자리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절망의 동굴에 갇혀 있지 않고 문을 열고 나서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면 세상의 모든 숨 있는 것들이 서로에게 디딤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갖 칸막이와 담벼락이 우리를 가두거나 주저앉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눈과 입을 막아온 시간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스스로 눈멀어 두려워하며 내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했던 순간들이 가슴을 칩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때로는 스스로 쌓은 허상 같은 벽을 허무는 힘은 작은 틈을 내는 용기, 벽돌 하나 부수는 절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길을 나서면 온 대지가 내 발을 떠받치고 밀어 올리고 힘을 보태 늠름하게 길을 걷게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작은 돌멩이 하나, 길 옆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빈 가지에 깃든 새 한 마리, 작은 시내,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품고 아우르며 살게 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는 자리, 삶의 자리, 장소가 되어줍니다. 이렇게 내가 너에게 장소이며 너는 또 다른 누구에게 장소, 사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서로에게 흘러 닿습니다. 예전에는 한 아이가 커가는 동안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곳곳 모든 것이 아이에게 장소가 되어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가 뛰어다니고 뒹굴고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만났던 하나하나가 바로 아이 안에 들어찼습니다. 지금은 조각조각 나뉜 캡슐에 들어가 관계 짓는 법을 잊고 삽니다. 이렇듯 장소의 회복은 삶과 생명의 되살림이며, ‘장소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당부를 편지에서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 마음을 가로지르는 나직한 노래를 듣습니다. 편지에서 편지로 이어지는 갈피 마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 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 아파하고 견디기 어려운 낯선 상황이 몰아쳐도, 나지막한 가락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생각을 일으킵니다. 사는 동안 삿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순간마다 마음 다해 치열하게 타오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는 동안 거창한 이름표나 어떤 기념비를 앞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되지 않습니다. 허망한 일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시간과 화해하며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 것’, ‘지금에 오롯이 집중하며 날마다 삶의 기적’을 마주하는 것, 그렇게 ‘정신의 현재’를 놓치지 않는 것만이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는 얼굴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얼굴은 시간과 소통해온 기록입니다. 누군가 얼굴은 ‘얼이 들고 나는 굴’이라고 새겼는데, 지금껏 어떤 낯빛을 내보이며 살았는지 거울을 보듯 편지를 읽습니다.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

 

요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마을을 보면 참담한 마음이 듭니다. 얼마나 더 절망하고 나서야 칠흑 같은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시냇물 소리를 듣고 숲에서 달려 나온 바람 소리를 듣고 작은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어디쯤 이르러 사람 얼굴 하나하나 알아보고 제 이름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들풀 하나하나에 깃든 생명의 손을 잡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이름을 불러주게 될까요? 언제쯤 사람의 마을은 사람의 노래를 부르며 밥 짓는 냄새 고소한 하루하루를 한가로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목사님 말씀대로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며 모질게 변해버린 심성’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더더욱 욕심껏 시대를 탐하고 있습니다. 참담한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단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제어장치 없는 폭주기관차입니다.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알지 못하는 속도로만 그 얼굴을 드러냅니다. 얼굴 없는 기계장치 같은 속도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욕망의 표현입니다. 앞지르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확장하려는 욕망과 닿아 있습니다. 저마다 겪어야 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당연하게 만나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무시하고 앞지르기를 합니다. 이렇듯 설익는 과정이 이러한 마땅한 과정을 생략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파괴하고 사람다움을 상실하게 합니다.

 

‘영혼을 빼앗긴 멍한 시선’으로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며’ 휘둘리는 현실입니다. ‘적당히 적응하며 살라’는 말에 뭉툭한 생각이 되어 ‘자신을 함부로 하려는 대로 내버려둔’ 시절입니다. 편지를 읽으며 다시 마음을 벼립니다.

 

어떤 시인이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이라 했습니다. 바닥에는 몸짓이 있습니다. 온몸으로 있는 그대로 생겨먹은 대로 움직이며 말합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부둥켜안고 몸으로 흐느끼는 울음이 있습니다. ‘글썽이는 마음’이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말로 모두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온몸으로 꿈틀거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허깨비 같은 시간이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알맹이 같은 치열한 일상이 살아 움직이는 삶 말입니다.

 

편지에서 말씀하셨듯이 ‘속된 것 따로, 거룩한 것 따로인 가짜’가 아니라 ‘아프고 연약한 것이 중심인 세상’에서 ‘온 몸으로 흔들리며 걷는’ 모습을 봅니다. 역사는 누가 대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아프게 때로 참담하게 역사를 몸으로 채워갑니다. 앞뒤를 바꾸어 버리고 무엇이 소중한지 보는 눈을 잃어버린 시대는 역사의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허망한 미래를 말합니다. 숟가락으로 땅을 헤쳐 보고는 ‘물 없음’ 팻말을 세우고 떠난 사람처럼 말입니다. ‘진창 같은 역사’라도 역사의 참담한 현실에서 비켜서지 않고 정의로운 평화의 역사를 발견하고 일으켜 세우는 우리의 치열한 삶이 ‘의미의 저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끊임없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와 대화하며, 현재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며 ‘이정표’이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 지금을 살아가려 합니다. 거창할 것도 요란할 것도 없는 일상에 치열하려고 합니다. 작은 것들이 어울려 만들어 가는 힘을 믿으며, 나직하게 오롯하게 늠름하게 오로지 지금을 가로질러 가려고 합니다. 차디찬 바닥을 깨고 반란 같은 봄풀이 돋듯 일어서는 꿈을 꿉니다. 몸으로 대답을 준비하여 길을 나섭니다. ‘길은 거울 같은 것이다. 길을 나선다는 것은 자신을 길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는 말을 새기면서 식물성 속도로 천천히 숨결과 곁을 헤아리며 걷습니다.

 

김기돈/<작은것이 아름답다> 편집장

 

<희망, 그 빛깔 있는 삶의 몸부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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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교회(2)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 제 1회 임진강 민통선 생태탐방로 트레킹 후기 -

1.

날이 흐렸다. 꾸무럭한 하늘이 먹구름 새로 간간이 빗방울을 떨어뜨리는 이른 아침 식구들과 차를 몰아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일산까지 내처 달리는 동안 비가 많이 내리면 어떻게 할까 의론들을 했다. 자유로에 들어서자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고 급기야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런 낭패가 있나. 단톡방에 날씨 관계로 9km 코스를 6km로 줄였다는 임진강 트레킹 안내소 측에서 알려온 소식이 떴다. 그래도 뭐 그 정도 걸을 수만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닌가.

 

다행히 임진각에 도착할 쯤엔 비가 멎었다. 일찍 출발한 관계로 일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임진각의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몇 년 전 가족들과 와 보았다. 망배단이며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노래가 새겨진 노래비며, TV에서 많이 보았던 통일의 염원을 담은 노란 리본들이 매달린 울타리며 6.25 이후 국군 포로들의 송환을 위해 임시로 가설됐던 자유의 다리며, 탄환에 벌집이 된 채 멈춰진 녹슨 기차며 경의선 철로 분단선의 자취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벌써부터 몰려들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불어난 강물이며 강의 이쪽저쪽에 설치된 철조망 울타리며 강을 따라 펼쳐진 젖은 산과 논 다락과 마을들의 풍경은 아스라한 게 뭔가 아득한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분단이고 민간인 통제고 너무나 오래 된 나머지 자연의 일부분처럼 이제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현실이 돼버린 아득함과 아스라함이다. 철조망을 뺀다면 손에 닿는 거리에 펼쳐진 이 풍경에 이상스러운 점은 없다. 이 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저 흔한 가을 풍경일 뿐이다. 이제 경의선이 복원되고 기차가 운행된다면 이곳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까? 남과 북 모든 곳의 역사는? ‘산천(山川)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는 시조도 있지만 의구한 산천이란 눈앞의 이 산천은 아닐 것이다.

 

현재 경의선의 민통선 이남 최북단은 임진강 역이고 민통선 너머에 도라산 역이 있다. 남북한 관계자들의 통행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도라산을 지나면 비무장지대 너머 장단 역, 판문 역, 봉동 역, 손하 역 다음이 개성 역이니 하나, 둘, 셋, 넷 겨우 다섯 정거장이다. 거기서 26개의 역을 지나면 평양이다. 우리는 이 철도를 경의선이라 부르지만 북한에서는 평양과 부산을 잇는 철도라 평부선이라 한다. 이름을 뭐라 붙이든 그것이 뭔 상관이겠는가 마는, 이 작은 나라에서 분단이 이렇게 고착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의아스럽다. 작아서 가능한 것인가? 작은 것들의 고집스러움? 모든 이러한 의아스러움들아 빨리빨리 사람들의 뇌리를 흔들어다오.

 

2.

일행은 속속 도착했다. 자유인교회와 지혜교회에서 모인 사람은 35명. 이들이 ‘길 위의 교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뭘 시작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로선 막막하기도 하거니와 사실 무얼 하자는 데 목적을 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설마 무엇을 안 하자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겠나. 무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안 하자는 것도 아닌 그 사이에 무엇을 함이 있다! 있으려나? 도무지 쑥스러워 말장난 같기만 하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함과 그렇다고 무엇을 아니 하고자함도 아니라함 사이, 두 부정 새에서 모종의 긍정이 출현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길 위의 교회를 시작한답시고 길을 나선 것이 무슨 캠페인도 아니고 거창한 프로그램이랄 수도 없다. 그냥 걷는 것뿐이다. 탈(脫)예배당이라든가 탈(脫)교의라든가, 호연지기(浩然之氣)라든가 길 위의 사상, 무위(無爲)의 위(爲)라든가 하는 말들을 불가피하게 갖다 대 봤지만, 그건 그저 끌어다 붙인 것이지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길 위의 교회를 위해 그럴듯한 한마디를 내놓음으로써 걸음을 시작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한다면 또 자라목 들어가듯 난감해지리라. 그러나 사람들을 모아 길 위에 나섰으니 화두(話頭) 비슷한 걸 던져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는 조바심으로 생각해둔 게 있긴 있었다.

 

 

 대충 ‘트레킹이란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준비해 두었다. 이 뜬금없는 질문은 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누군가의 칼럼에서 표절해온 것이다. 사실 무슨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니라 길 위의 교회를 시작함에 있어, 메뚜기 한 무리 같은 우리들 모두의 조바심을 덜어주는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다른 말로 바꿔도 그 말이 그 말인 ‘트레킹이란 무엇인가?’는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다. ‘걷는다는 건 무엇인가?’ ‘길이란 무엇인가?’ ‘몸이란 무엇인가?’ ‘고독이란 무엇인가?’ 대답이 있을 리 있나. 그러나 이러한 대답 없음으로 모든 의문을 차단하고 그야말로 닥치고 걷는 행위 속에서, 과연 이러한 걸음이 쌓이고 쌓이면 거기서 뭔가 스스로 떠오르고 생각하게 되는 의미가 저절로 생겨나리라 믿고 있다.

 

예루살렘의 대회당이 아닌 광야의 한적한 길에서. 모든 앎(소유)의 서사가 끊어진 자리에서 태초와 이어지는 시원(始原)의 첩경, 그 가벼움과 신비와 신선한 상쾌함! ‘아! 이런 것도 있네.’라는 식으로. ‘아! 이런 것도 예배가 되네.’ ‘아! 이런 것도 기도가 되네.’ ‘아! 자기 발견이 곧 자기부인이네.’ ‘아! 이런 것을 통해 발견하는 재미가 있네.’ 온갖 ‘맛있군(MSG)’에 중독돼 혀의 감각을 상실해버린 사람이 어쩌다 먹게 돼버린 박한 음식에서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깨달음으로 본래 있음으로 충분한 고유의 맛을 느끼고 상실된 미각을 회복하듯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또 무슨 재주로 설명하겠는가.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아부할 대상도 없이 말장난을 해대는 아첨꾼이 되긴 싫다. 하긴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 하면 세상 어떤 사람들은 그딴 걸 이제 따라하느냐 웃을지 모르니 더욱 하기 싫어진다. 뭘 해도 새로운 걸 해보려면 이런 주눅이 든다. 무책임한 주변머리 없음이거나 실력 없는 아마추어만 같아 곤혹스럽다. 트레킹이란 고독한 것. 마음속에 있는 것. 나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임진강 올레길 안내소의 안내원이다.

 

3.

안내원들은 대개 초로(初老)의 남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해설사’라 소개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이런 해설사들을 볼 수 있다. 능숙하게 일정을 설명하더니 일행을 3열종대로 세우고 인원점검을 한다. 끼어들 여지가 없다.(그래 그냥 가자. 허전하긴 하지만 의미 진지 설명은 여기서 체념이다.) 우리 35명에 개별로 온 부부가 끼어 있었다. 트레킹을 자주 해온 듯 준비된 옷차림이었다.(한 팀이라지만 탐방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사탕을 주었을 때 손을 짧게 내밀어 받으며 고맙다 했을 뿐, 두 사람은 서로에게만 충실했다.) 일행은 가슴에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라 새겨진 노란 천을 두르고 안내원을 따라 민통선 통문으로 갔다. 철조망이 쳐진 울타리 문이 열리고 양쪽에서 소총을 멘 초병 둘이 나타났다. 철모 밑 희멀건 얼굴에 볼 살이 통통하다. 삼엄한 곳을 지키는 군인들인데 웃음이 난다.

 

강변을 따라 타작 철에 내린 비로 하루 드팀 열흘 드팀이 돼 놀고 있는 황금빛 논 다락이 펼쳐져 있다. 강둑을 따라 철조망이 쳐있고 비포장 탐방로가 개설되었다. 순례자들의 발길에 패이고 빗물이 고여 질척인다. 해설사는 앞과 뒤 두 사람이 붙었으나 서로 조율이 잘되지 않았다. 앞선 초로의 남자는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군 생활을 했다는 데 설명 해주고 싶은 열의가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비가 뿌려 대면서 우산을 펼쳐든다 비옷을 꺼내 입는다 하는 통에 대열은 길게 흩어지고 해설은 무용이 돼버렸다. 모든 게 이렇다. TV 다큐로 보았던 임진강 생태탐방로로 이미 해설은 충분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둘 삼삼오오 혹은 혼자. 일행은 추적거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걸어간다.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다. 민통선 내에는 촬영이 금지인데 누군가 사진을 찍었다! 군인 한사람이 스마트폰에서 사진을 삭제하는 걸 확인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 됐다.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굽니까? 모두의 집중된 궁금증. 접니다, 벌써 삭제했어요. 그래도 확인해야 합니다. 이 길 위에서 가끔 상영되는 소동은 오늘도 싱겁게 끝났다. ‘여군(女軍)이 다 지켜봤는가보다’며 함께 웃었다. CCTV는 여군들이 지켜보는 데 가끔 나이든 남자들이 아무생각 없이 소변을 참지 못해 아무데서나 볼 일을 보는 민망한 희극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해설사는 여군이 다 보고 있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었다. 그것도 풀 칼라(full color)로! 다시 걷기 시작. 비속의 길은 질척해 일행의 행로는 묵묵해졌다. 마치 이런 순례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다행히 6시간짜리 길을 3시간으로 단축한 트레킹은 적당한 중간에 끝났다.

 

4.

인적 없는 시골 마을 정차장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안내원 아저씨는 여기서 문산으로 퇴근한다고 했다. 또 다른 신학대학원 상담 과정을 다닌다는 안내원 여자는 금촌이 집이라 했다. 이성복의 「금촌 가는 길」이라는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그건 금촌에 대해 나만이 가지고 있는 추억이니 몰라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따라온 차를 타고 돌아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뭔가 빠진 듯 허전한 마음이 들었는지 누군가 짧게나마 설교를 해주셔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들은 설교를 중시하는 풍토로 신앙(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설교가 중요하다는 건 그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설교가 중요하다는 건 여기선 그것 말고는 별 볼일 없다는 말도 된다. 그 말은 다른 데서는 설교(만)를 뺀 나머지들이 설교를 빼고도 내세울만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10여 년간 설교(만)를 중시하는 목회를 해왔다. 그러나 이제 바로 그걸 하지 않아보려는 것이다. 설교 말고도 내세울 뭔가가 있는 게 아니라 그것마저도 내세울 게 아니다 싶어서다. 사는 데 필요한 건 설교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설교가 사는 일에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작금의 설교만 빼고 나머지가 중요해진 교회의 현실이 증거가 아닌가. 그러나 그나마 그것도 시들해져버린 지금 새로운 길은 고전적 설교의 부흥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또 이런 걸 어떻게 설명하나. 차라리 이성복의 「금촌가는 길」의 한 구절을 읽어줄까.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 깨어나야 푸른 잎사귀가 될 수 있을까

기어이 흔들리려고 나는 全身이 아팠다

어디서 깨어나야 그대 내 잎사귀를 흔들어 줄까

그대 손잡으면 그대 얼굴이 지워지고

가슴으로 걷는 길

얼음장 밑 환한 집들

 

지혜교회 정 전도사가나 대신 나섰다. 독일에서 13년 공부하고 돌아와 가까이 친하고 싶은 목사를 찾다가 발견했다. 비슷한 말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발견은 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대충 그런 길을 가는 것만 같은 것이었다. 대충 그런 길을 가는 척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여러 칭찬의 말은 민망했지만(한 팀 아닌 부부가 옆에 있어 신경이 쓰였다. 이 사람들 웃기네! 할까봐.), 고마운 부분이다. 대충 그런 길을 가는 척과 그런 길을 가는 것의 차이는 뭘까? 고독의 차이? 우리가 걷겠다고 나선 길이란 우리가 지나온 저 진흙탕 길이 아니라 본래 이런 길일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스꽝스러운 고백일지라도. 버스가 도착해 일행은 작은 버스에 꽉 기름을 짜고 들어차 마을길들을 곡예하며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임진각으로 돌아갔다. 승차장에 내리자 곧바로 우박과 함께 격렬한 비가 쏟아진다. 우리는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지혜교회 교우들은 파주시내로 자유인교회 교우들은 근처 두부집으로……. 돌아오는 길 김포로 이사 와서 새로 피자집을 연 집사님 댁에 들러 교우들과 이야기 꽂을 피웠다.

 

 

5.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라는 책이 있다. 아는 목사님이 쓰신 전도용 책이다. 신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어렵고 곤혹스러운 사람들의 시대에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신에 대한 신앙을 붙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 전신이 아플 때가 있다. 무력감과 함께 서러움이 밀려든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난 이미 다 수락했는데 계속해야만 하는 건가요? 그러면 차라리 돈이라도 주시든지. 아니면 사람이라도. 아니, 아니 용기(勇氣)라도.

 

그러나 다리가 불편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열심히 함께 걸었던 지혜교회 병관 형님 곁에서 적당히 모른 척 걸으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가슴으로 걷는 길, 고독하지만 함께 있어 따뜻한 위로가 되는, 그리하여 대충 그런 길이 아니라 그런 길을 가는.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내달 트레킹 땐 둘러앉아 한 사람 한 사람 말을 시켜보고 싶다. 살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말들에 대하여. 우리들 작고 여린 가슴들 속에 하나님으로 깃드신 하나님에 대하여.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어린 생명 다복(多福)을 위하여.

 

*다복이 엄마가 많이 아픕니다. 임신 중이라 약에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아기는 건강하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씩씩하게 건강을 회복해 아기를 잘 보호하고 순산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1. 교회, 길을 걷다 http://fzari.tistory.com/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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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교회(1)

교회, 길을 걷다

-제1회 임진강 민통선 트레킹에 부쳐-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당을 벗어나 길 위에 나서 보자고 시작한 첫 번째 시도로 임진강 민통선 트레킹에 나섰습니다. 두 교회 약 30명이 함께 합니다. 예배도 설교도 기도도 찬양도 없이 그저 함께 걸어보려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배당과 조직과 교의와 ‘이런 게 교회다운 교회’라는 지난 백년간의 철갑을 두른 틀에서 벗어나 보려고요. 아니죠. 우리가 어머니께로 나올 때 우리가 무슨 기독교도라거나 무슨 교의를 신봉함으로써 인생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후에 결국 이런 사람들이 됐을망정 사람의 본질인 영혼은 역시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도 가둘 수도 갇힐 수도 없는 것이죠. 인생의 의미란 각자의 길 위에 서서 각자의 길에 적응하는 것일 뿐. 있다면 이 길이라는 공통의 길의 법이 있을 뿐 아닌가 합니다.

 

돌이켜 보면 길에 적응하는 동안 길이 길을 열고 길을 내고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떠나고 떠나고 떠나왔습니다. 어떤 인류의 스승께서 가르쳐준 말씀처럼 ‘모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믿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깨달은 것으로부터의 자유. 도달하고 이룩한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제 교회라 불리는 모임도 길 위에 나서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안다는 아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르렀습니다. 교의가 아니고 교파가 아니고 교단이 아니고 우리가 놓인 이 공동의 생존 조건 속에서 길이 길을 가르쳐주기를, 길이 길을 열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거창할 것도 거창하게 주장할 것도 없이 두벌 옷과 지팡이를 지니지 않은 맨 몸과 빈 맘으로 나서보려 합니다. 길을 나선 우리의 몸이 맘이 각자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요? 아무 생각이 없이 걸음에 집중하게 되는 거기서부터 진정 필요한 숨과 힘이 우리의 결핍과 해답을 가르쳐 줄 겁니다.

 

 

임진강은 한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은 자연이라 그 무슨 법으로도 이념으로도 철조망으로도 댐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를 연결해주는 임진강을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를 가르는 강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렇게 믿어왔고 믿다보니 실제로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이제 오랫동안 꿈으로만 말로만 글로만 상상력으로만 꿈꾸고 말하고 쓰고 그려보던 일들이 사실은 본래 현실 그 자체라는 이 쉽고 간단한 진리를 다른 무엇이 아닌 새로운 길 위의 나선 맨몸으로 느끼고 인정해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모든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우리의 서로를 갈라놓은 거짓된 임진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겁니다. 비무장 지대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자유왕래가 시작된다니 이게 본래 그런 것이 아니고 뭣이었겠습니까. 본래 그런 것을 그런 것으로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과 참혹하고 악독한 거짓들이 벌어졌습니까? 모든 것이 그 거짓의 교의에 종사하며 모든 것이 우리를 옥죄었습니다. 정치나 이념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 종교였습니다. 모든 본래 그러한 것이 본래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기까지 우리를 가로막고 서있던 정신상의 우상.

 

 

 

지난 주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2018년 10월 22일) 목사님이 소천 하셨습니다. <미스터 선샤인>에도 나온 이 이름은 ‘고귀하고 위대한 이’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책은 단지 몇 권 읽어봤습니다 마는, 기억나는 건 세 가지쯤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20대에 처음 목사로 부임해 목회를 시작할 때, 그 교회에 가서 느낀 첫인상이 자기 목회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성도들이 한결 같이 개성이 없이 똑 같은 지. 그것이 마치 개성뿐 아니라 지성도 명철도 현명함도 눌려서 상실된 것과 같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기의 목회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것’, 그것이 되어야할 것이라고. 그렇게 10년을 했더니 그 다음에는 사람들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두 번째는 ‘이제 바쁘다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바쁘다’는 게 단지 여유를 가질 수 없이 할 일이 많은 걸 가리키는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의 문제가 된 바쁨은 오직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인식상의 고정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바쁨의 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개인의 사업을 멈추고 교회로 가서 목사를 도와 하나님의 사업(교회 일) 열심히 하라는 결론으로 갈 수가 없죠. 그 바쁨이 사회적 문제가 아닌 신학의 문제라 했을 때는 반드시 이대로는 아닌 근원적 사색과 행동을 요구하는 문제의식으로서, 우리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라 제시하는 모든 교의와 의식과 봉사와 실천의 종교 전체를 신학적으로 재검토하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 신학적 의미로 지금 교회들은 너무 바쁩니다. 그 바쁨은 게으름이기도 한 것이죠. 너무나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고 너무나 게을러서 오로지 답습의 보수 말고는 알지를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바쁜 거기에 종속돼 있는 것 말입니다.

 

셋째는 개인적인 것인데,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 하나로 ‘사모의 얼굴은 목사의 이력서’라는 말입니다. 사모뿐이겠습니까? 모든 부인들의 얼굴은 남편의 이력서지요. 또 모든 남편의 얼굴은 부인의 이력서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결국 하나입니다. 모든 인위에 지치고 피곤하고 메마르고 강퍅해지고 부패하고 오염되고 악해지고 마침내 공허해진 모든 거짓된 말들과 의식과 허세와 사업. 그 모든 이미 아는 척으로부터 모든 이들의 믿고 안다고 믿어온 거짓 종교를 해방시킬 때가 왔습니다. 아니, 2000년 전 유대 예루살렘의 젊은 스승 예수의 말씀처럼 거짓 종교에서 정직을 다해 스스로 해방될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 예배당에 갇힌 신은 신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교의에 갇힌 신도 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나누고 배제하고 배타하고 구별하고 낮게 보고 정복하고 교화시키려드는 더 강한 신들의 바쁘디 바쁜 종교사업도 더 이상 권장할 것으로 사람들 앞에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나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가장된 좋은 것입니다. 이력서는 꾸밀 수 있지만 얼굴을 바꾸진 못하죠. 얼굴은 고칠 수 있지만 영혼으로부터 발산되는 지성과 지혜와 명철의 빛은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가장 거룩함과 고결함과 장엄함을 가장하고 꾸며내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의 양심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지금 교회라 불리는 추상적 명칭과 그 추상을 힘입어 위세를 부리는 조직에는 신이 안 계시고 역사적으로도 늘 안 계셨고 본래 신께는 그런 사원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음을.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 교회라는 서사로부터 벗어나야지만 진정한 신께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아니 아니라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것임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3~36)

 

인정할 것을 인정함으로써만 우리 모두를 지금의 거짓된 현실로부터 우리들 자신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교회가 기로에 서있습니다. 부득불 불가피하게 하던 사업들을 끝내야할 때가 온 겁니다. 특히 교회는. 모든 사업(死業)을 멈추고 처음 출발했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각자의 역사를 핑계로 하나님의 뜻을 인위적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는 99.9999%가 부동산이라고. 그러니 우리의 출애굽은 건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겁니다. 건물이 만든 신과 신학과 사업들.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함께 숭배할 수 없는 거라면, 그것이 맞는다면, 우리는 서둘러야 할 겁니다. 문제라 하면서도 그대로 눌러 앉아 뭉개고 있는 신앙은 이제 내밀만한 이력서가 못될 마이너스 스펙이 될 겁니다.

 

 

아직도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오만하다고, 편협하다고, 또 사랑이 없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우리는 오히려 모든 저마다 바쁜 사람들의 대충 그러한 진리의 적이 되는 오해도 불가불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가진 것으로부터의 자유, 의지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아는 것, 가진 것, 의지하는 것에 의거해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죠. ‘가난한 너희들은 행복하다. 천국은 너희 같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니까.(누가복음 6:20)’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도 교회도 길 위에 서 있고 길을 걷도록 부르신 이것이 또한 신의 부르심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를 보다 분명한 실제의 길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아닐까요? 그러나 교황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입니다. 우리는 대통령도 아니고 군인도 공무원도 검찰도 법관도 목사도 의사도 사업가도 학생도 어린이도 노인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참되게 아무것도 아님을 알 때 우리는 참되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을 뿐. 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울 뿐. 그 길에서 평등하게 만나는 예배를 위하여. 신 없는 교회를 벗어나 사원 없는 신께 경배 드리러 예루살렘의 고루한 서사가 끊어진 광야로 나가려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야훼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사무엘상 2:10)’

 

하나님의 자녀의 출애굽(Exodus)을 가로막는 파라오는 그의 화려하고 잡다한 신전과 함께 공허하게 허물어질 겁니다. 세습까지 하며 자기들의 제단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저들의 바쁨에 비하면 얼마나 통쾌한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오직 맨 몸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우리의 전도라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한 것 없이 보수를 받은 사람처럼 행복할 겁니다. 다복(多福)과 조이(Joy)와 이수를 위하여!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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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쓰신 편지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 속에서 제 이름이라도 호명될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있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답글 한번 보내드리지 못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제 입장을 지지해주실 너그러움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의 처지를 살피는 마음이 유난하신 분이기에 제 처지는 언제나 선배님의 시야 안에 놓여 있음을 많은 편지들 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들녘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에서 유년시절에 들었던 소리들을 표현해 주셨네요. 그 대목에서 제 심장이 그 소리들을 따라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소리들을 따라가다가 그만 울컥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보글보글’ ‘자작자작’ ‘탁탁’ ‘사르륵사르륵’ ‘솨아솨아’ ‘똑똑똑’ ‘꿀꿀꿀’ ‘구구구구’ ‘컹컹’, ‘참새, 직박구리, 꾀꼬리, 뻐꾸기, 꿩, 멧비둘기, 뜸부기, 부엉이, 소쩍새 등 각종 새울음소리들’, 다듬이질 소리, 새 쫒는 소리, 알밤 떨어지는 소리, 얼음장 깨지는 소리, 문풍지 떠는 소리 …(69-72쪽).

 

어릴 적 들었던 기억속의 소리들이 거기에 있었고, 그 소리들은 단지 추억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의 모양을 만들어낸 소리들로 느껴진다는 말씀에 제 마음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소리들이 그리워 시골에 내려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소리와 함께 그 소리를 내는 어른이나 듣는 아이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농촌현실에서 절망을 느끼곤 합니다. 그 소리들은 인간의 삶의 원형에 닿아 있고 생성과 소멸 너머에서 들려지는 영원의 편린과도 같은 소리라고 해석해 주실 때는 그 그리움의 의미와 양이 배가되어 울적한 심정으로 한참 동안 마음이 정지해 있었습니다.

 

농촌에 내려와 처음 만났던 이곳의 들녘은 지금은 더 이상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죽음의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들녘에서 허리를 굽혀 일하던 농부들의 모습과 그들이 일을 하면서 서로 부르는 소리와 노래는 더 이상 들판의 메아리가 되지 못합니다. 돌담 너머로 넘나들던 소리들과 동구 밖에서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나누던 이야기 소리는 그친지 오래입니다. 농번기에는 사람을 대신하여 농기계소리가 벌판을 휘젓고 있을 뿐이지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25년 전 이 벌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만났던 어른들이 모두 떠난 지금 외로움을 벗 삼아 홀로 벌판을 지키는 심정이 참담합니다. 씨앗의 이야기는 종묘상이 빼앗고 갔고 노동의 이야기는 농기계에 빼앗겼습니다. 수확의 기쁨은 외국산 농산물에 치여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피폐해진 농촌 모습의 결론은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까지 왔습니다. 수백 수천 년 대지를 바탕으로 이어온 농민들의 이야기 소리는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그 소리들을 아직도 기억해내고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에 고요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번잡한 도심의 폭력적 소음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현실에서 그 옛날 고요함의 흔적들을 끌어올려 소란스런 일상을 정화하고 삶의 관점을 전환시키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고요함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능력 중에 어쩌면 가장 고귀한 능력일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세미한 소리 가운데 소명을 위임하시는 분 앞에서 귀가 열린 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다짐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방당한 이들의 작은 소리와 광야로 내몰린 이웃의 소리에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일이라고 일침해 주셨습니다. 상대의 말 못하는 작은 소리까지 알아들으려면 우리의 내면은 얼마나 고요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신음하는 이들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요? 정작 고요함 속에 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초월적인 평온함이 아니라 아픔을 겪고 있는 이웃의 절규인 세상이니, 그 괴로움으로 몸과 마음이 성치 않은 상태를 견뎌내야 하는 깨어있는 이들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도 됩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을 일컬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했을 때 광야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을 것인지 짐작해 봅니다. 그 소리가 세례요한의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굽은 길을 곧게 하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는 음성을 접한 사람이 어떻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명을 받는 자리에 어김없이 들려지는 소리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서의 여러 소명자들을 통해 알게 됩니다. 동포들의 애타는 절규를 결코 그 마음에서 씻어낼 수 없었던 모세에게 결국은 힘겨운 소명이 주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고요한 광야에서 일체의 번잡한 소음을 차단한 채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공생애를 시작했던 예수님의 길이 어땠는가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스러운 공간

 

보내주신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는 편지에서 공간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3초 이내에 대답할 수 있는 절실한 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마침내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 이야기가 제가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십 수 년의 노력을 지속해 오면서 공간 하나를 만들고 있는 저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우리의 사유와 삶의 방식을 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종교시설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거룩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77쪽).

 

유럽여행 중에 만난 성스러운 공간에서 마치 영혼의 고향에 당도한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지요? 그 공간을 쉽게 떠날 수 없어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고, 또한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왔고 부박한 실존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고요? 그리고 그때 하나의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네요. 들어서는 순간 신의 현존 앞에 선 듯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를 돌아보도록 만드는 공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공간을 갖고 싶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영혼의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이 세상에서 휴식처를 갈급히 찾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문명이 주는 편리함 안에서는 좀처럼 쉼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순례자들은 쉼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룩함과 고요함으로 충만하여 그 감동이 사람의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장소를 말입니다. 세상의 소요를 잠재울 만한 힘이 있고, 현재를 태초와 이어주며, 가던 길 멈추고 자신을 정비하고 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저 역시 순례자의 한 사람인 양 갈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을 짓는 목수로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그 목수’라고 불렀다고 제게 말씀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풀어주신 그 호칭의 의미를 제가 하는 일에서 다독이며 살고 있습니다. 안식을 위한 공간과 살림에 필요한 가구들을 만드는 일이 창조의 연속작업으로서 구세주가 되실 분이 업으로 삼기에 잘 어울리는 일이었겠다 싶습니다. 이름 있는 뛰어난 목수로서의 경력에 어울리게 예수님은 우리가 있을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어떤 장소를 마련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는 표현으로 구원을 일러주신 사실을 유념해 봅니다. 목수만이 쓸 수 있는 손 때 묻은 표현과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짓고 있는 많은 구체적인 ‘짓기’의 행위들 - 집짓기, 밥짓기, 옷짓기, 농사짓기, 글짓기, 이름짓기, 사이짓기, 등 - 을 통해 우리가 들어갈 구원의 집이 영원과 잇대어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분야의 장인이 된 사람이 그 정신과 그 눈으로 세상을 건설해 간다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룩된 한 공간이 아득한 옛날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느낌을 회복시키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타락한 채 낙원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한 장소가 그 낙원의 데자뷰(旣視感)가 되어 그 원 기억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오랜 노고와 깊은 정성으로 마련된 장소라면 그 곳에서 순례자는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네 세상은 그런 수고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영혼의 장인이 필요하고, 당연 그 몫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례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게 안식과 치유를 주고 새출발을 격려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는 농촌에서 목수와 농부로 사는 제가 부럽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허투루 던진 인사치레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농사의 중요성과 농사하는 이들에 대한 미안한 심정을 품고 살아간다는 고백 속에서 우리시대의 회한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시교회 설교자로서 서재에 신영훈 선생의 『한국의 살림집』이라는 두 권의 책이 꽂혀 있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것을 한옥 예배당을 지으려는 제게 선뜻 내어준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저희가 농사한 유기재배 쌀이 매주일 교인들의 공동밥상에 올려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가와 인문학자로 살아가면서 관념이 아닌 땅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근원적인 추구를 멈추지 않는 모습, 또한 이웃의 작은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한 가슴이 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글과 말이 세상에 선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성스러운 공간을 완성하기를 계속하자고요. 거룩함을 짓는 목수로 살고 싶습니다. 제 손이 닿는 장소에 고요함과 거룩함이 깃들고, 사랑과 치유의 음성이 들려지는 장소가 되도록 하는 벅찬 일에 정성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농촌에 자연스레 존재해야 할 잃어버린 소리들을 복원하는 일에도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동경하는 소리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절망하거나, 쉴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는 피곤한 일상에 포로가 되지 않고 계속하여 행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주어진 소명을 받들고자 합니다.

 

한 시대의 아픔에 동반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제가 가는 길에서 한줄기 조명이 되어 준다고 생각하니 한결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때때로 저의 시름과 기쁨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때마다 시대의 상실을 좀 더 분명히 기억하도록 일깨워주시고 또한 공동의 희망을 밝혀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평안과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정훈영/단비교회 목사

 

<희망, 그 빛깔있는 삶의 몸부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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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르러 온 불

분류없음 2018.10.17 09:49

불을 지르러 온 불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누가복음 12:49-51)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 참 솔직해서 좋다.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을 그때 얼마나 많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쳐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예수 당신의 말씀 때문에.

 

“빚이 어둠 가운데 들어오매 어둠이 빛을 싫어하더라.”

 

복음, 그것은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며 심판이다. 하느님도 이 원리를 뒤집어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 고작 하신 말씀이, “나라고 하는 돌멩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람 곧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였다.

 

      류연복 판화

 

예수님은 불이다. 태워버리는 불이다. 불이 불을 지르러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좋다가 아니다. 관용 또는 사랑이란 말로 어둠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대화라는 말로 불의한 자 곁에 들러리 서는 자가 누구냐?

 

“내가 온 것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 함이 아니다.”

 

분명한 오해의 소지를 보면서도, 이 한 마디가 당신을 미워하는 적들에게 얼마나 좋은 꼬투리가 될 것인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말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심정을, 똥물에 빠진 바퀴 눈 같은 썩은 눈으로 역사를 보아, 좋은 게 좋은 것들이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으랴?

 

아아,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최후의 불씨를 던지면서 아픔을 뼈에 새기는 이 말씀이 귀에 거슬리는 자 있거든 보리떡, 물고기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서들 가거라.

 

<기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 속담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 때문에 속상할 적이 참 많습니다.

똥을 왜 피해야 하는지요?

그게 길 복판에 있으면 마땅히

치워버려야 할 터인데 이 백성은

그저 눈길 돌리고 피하는 걸 상책으로 여겼거든요.

주님,

똑바로 보게 하소서.

더불어 싸울 우리의 적을 똑바로 보게 하소서.

 

이현주/동화작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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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시스트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 대작을 그렸다. 그는 천장을 9개의 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34개 면으로 분할하여 작업했다. 이미 ‘피에타’와 ‘다비드 상’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황과의 계약 때문에 마지못해 감당한 일이었다. 1508년에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했으니 무려 4년의 시간이 걸렸다. 위태로운 비계 위에 올라가서 거의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리느라 그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아직 종교개혁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돈과 권세를 탐닉하는 타락한 교권에 대한 저항은 저 기층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완성할 무렵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자리에 예언자 예레미야와 요나를 그려 넣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 두 예언자를 마지막에 그린 것일까? 옛 세계는 기울어진 담처럼 균형을 잃고 있었고, 새로운 세계는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은 시절이었다. 두 세계가 부딪치면서 증오와 배제의 언어가 넘실거렸다. 생각이 다른 사람, 교권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한 적대적 시선이 유럽을 내부적으로 허물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시대를 향해 참회하는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너지는 조국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슬피 울던 예레미야의 마음을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희철 목사는 “그럴 수 있다면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 실컷 울리라/여전히 젖어 있는 그의 두 눈을 보면 왈칵 눈물이 솟으리라”고 고백한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자기 시대의 모순과 어둠을 온몸으로 앓았던 예레미야의 심정에 깊이 동조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지도자라 하는 이들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잇속 차리는 일에 발밭을 뿐이다.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라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평안이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말하며 사람들을 혼곤한 잠으로 인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신 차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그 외침을 부담스럽게 여길 뿐, 삶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앞서 눈 뜬 이들은 울 수밖에 없다.

 

한희철 목사는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듣는 사람이다. 그는 이 땅 구석구석에서 자기만의 빛깔로 주어진 생명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누구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보편성의 보화를 찾아내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담배를 끊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백발노인의 회한이며, “하나님, 해두해두 너무 하십니다”라고 탄식하며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마음을 드러낸 여인, 굴참나무 껍질처럼 깊게 패이고 갈라진 틈을 따라 흙물과 풀물이 밴 손으로 땅을 만지는 정직한 농부들의 삶의 내력이 성경 이야기와 합류하고 있다. 예수는 종교적인 언어를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오롯이 드러내시지 않았던가?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볼 눈이 없다면 성경에서 거룩을 발견하는 일 또한 불가능할 터.

 

이런 시선의 따뜻함과 깊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두런두런 들려주는 예레미야 이야기는 예레미야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을 육신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도 상통하게 마련이다. 자기 시대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에 한희철의 마음이 공명하고, 그 공명이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킨다. 물결처럼 번져가는 공명, 그 깊은 울림에 우리 영혼을 잇댈 때 영혼은 깊어지고 맑아진다.

 

언어에 민감한 그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혹은 번역한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다. 자기 가슴에 깃든 생각과 마음을 뒤적이며 글을 써온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구둣점 하나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알기에 그는 정성스럽게 텍스트와 마주한다. 그리하여 텍스트 혹은 기호 속에 다 담아내지 못한 숨겨진 메시지까지 읽어낸다. 주름 잡힌 텍스트인 성경은 그 주름 속에 깃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풍성한 세계를 열어 보이는 법이다. 친절한 훈장님처럼 한자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여주는 까닭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가리켜 보이기 위함이다.

 

성경에 대한 해석 권한을 독점하려는 이들이 있다. 물론 성경을 바로 읽기 위해서는 원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텍스트가 탄생한 시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도구를 갖추었다고 하여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 속에 깃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한희철 목사의 예레미야 읽기에 동참하려는 이들은 일단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성경 해석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주체가 되기보다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늠해보려는 이들, 자기 삶을 새롭게 정위해보려는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도 좋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들춰보아도 상관없다. 그 어느 부분에서든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레미야의 마음, 그리고 한희철 목사의 마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자기 얼굴로 예레미야의 모습을 그렸다면, 한희철 목사는 예레미야의 얼굴로 자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다시는 주님 말씀 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때마다/뼛속을 따라 심장이 타들어가던” 그 마음, “애써 적은 주님의 말씀/서걱서걱 왕의 칼에 베어질 때” 함께 베이고 말았던 그 마음을 열 번 스무 번 혹은 수 백 번 더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길은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의 동행자가 될 차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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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3


홍해를 호랑이와 건너다?

시편 136:1-26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홀로 큰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 감사하여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뒤흔들어서 홍해에 쓸어버리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위대한 왕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힘센 왕들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아모리 왕 시혼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시편 136편과 ‘축의 시대’의 영성


시편 136편은 150편에 달하는 시편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역사를 회고하면서 바친 대표적인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은 감사하는 내용을 예배인도자가 읽은 후에 예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읽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네 부분을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인도자가 하느님께 ‘감사하여라.’라는 명령문으로 회중을 부르는 부분이고 4절부터 22절까지는 감사할 내용을 열거한 부분이며 23절에서 26절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예배자들이 바치는 감사의 노래가 되겠습니다.


중간 부분인 4절부터 22절까지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절부터 9절까지는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큰 기적, 곧 창조의 기적을 일으킨 분으로서 지혜로 하늘을 만드셨고 물 위에 땅을 펼쳐놓으셨으며 해와 달과 별을 지으셔서 낮과 밤을 밝히셨다고 노래합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을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치신 얘기와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갈라서 이스라엘이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서 몰살하신 기적을 노래합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서 22절까지는 광야에서 자기들을 인도해주신 은총을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 앞길을 가로막은 왕들을 죽이시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저는 이 시편의 노랫말을 여러 번 읽으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이유를 열거한 대목 가운데 창조질서를 노래한 부분과 출애굽 및 광야유랑을 노래한 부분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창조질서 부분은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과 우주 전체를 시야에 담고 노래하는데 반해서 출애굽과 광야유랑 부분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시야에 넣고 노래입니다. 창조질서의 ‘보편성’과 출애굽 및 광야유랑의 ‘국지성’ 또는 ‘특수성’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제게는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는 죽임을 당했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죽었으며 광야 유랑 시에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방해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창조질서를 노래한 부분의 시야는 넓고 보편적인데 반해 출애굽 및 광야 유랑을 노래한 부분의 시야는 오로지 이스라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한 노래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신학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요즘 저는 카렌 암스트롱이 쓴 《축의 시대》란 책을 재미나게 읽고 습니다. 그녀는 기원전 9백년 경에서 2백년 경 사이에 중국, 인도, 그리스, 팔레스타인의 네 문명권에서 인류의 정신에 지속적인 자양분이 될 위대한 철학과 종교 전통이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각각의 문명권이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선과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상이 그 시기에 탄생했다는 겁니다. 자기중심주의와 탐욕, 폭력과 무례를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개발하기 시작한 때도 그때였다는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의 작성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편은 문자로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며 불렸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문자화된 시기와 작성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시편 도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암스트롱이 말한 ‘축의 시대 영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홍해 사건의 두 가지 버전


두 번째 문제는 홍해에서 벌어진 일을 노래하는 대목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후에 곧바로 그걸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몰려오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지팡이로 홍해를 쳤고 그러자 홍해는 둘로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건넜지만 바로의 군대는 바다가 다시 합쳐지는 바람에 몰살당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인 출애굽기 15장 1절의 미리암의 노래도 이 사건을 노래합니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제가 어렸을 때는 찰톤 헤스톤이 모세 역을 맡았던 <십계>를 감동적으로 봤는데 몇 년 전에 이 영화가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을 다룬 영화 <노아>가 사건을 성서의 서술과는 달리 해석해서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달리 최근에 만들어진 <십계>는 성서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은 CG를 이용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엄청나게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입니다.



홍해바다 사건은 오래 전부터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습니다. 논란의 주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느냐 여부입니다. 한편에서는 홍해 바다가 갈라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성경이 그랬다면 그런 줄 알지 왜 시비를 거느냐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진도 앞바다도 갈라지는데 홍해라고 갈라지지 말라는 법이 있냐고 목청을 높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성서구절을 잘 읽어보면 그 안에도 몇 가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로와 홍해를 건넌 사건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홍해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성서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다룬 두 버전의 얘기가 있는데 이것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버전은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치자 쩍 하고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인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버전인 출애굽기 14장에는 “야훼께서 밤새도록 거센 동풍을 일으켜 바닷물을 밀어내시자 바다가 마른땅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지팡이로 내리치자 당장 바다가 갈라졌다는 버전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셋째로, 우리말 성서가 ‘홍해’ 곧 ‘red sea’로 번역한 단어가 원문에는 ‘얌숩’ 곧 ‘갈대바다’(reed sea)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대바다는 홍해가 아니라 수에즈만 북쪽 끝에 위치한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의 호수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건넌 곳이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였다는 겁니다. 요즘 구약학자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노래했을까?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홍해가 갈라졌다고 믿고 그렇게 노래했다는 사실입니다. 홍해사건 얘기는 성서 여기저기에 상당히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였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와 맞닥뜨려 진퇴양난이었을 때 기적적으로 바다를 갈라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셨다고 노래한 겁니다. 오늘의 본문도 하느님이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셨다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그들이 건넌 곳은 갈대바다입니까, 홍해입니까? 저는 이 물음을 포함해서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지의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유일한’ 대답이 아닌 ‘하나의’ 대답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읽었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동물들을 배에 싣고 이민을 가던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합니다. 가족들은 다 죽고 파이만 혼자 살아남아 구명보트에 올라타서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함께 표류합니다. 하지만 보트 아래에는 진짜 주인공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결국 서로 공격하다가 다 죽고 보트에는 파이와 호랑이만 살아남아 둘이 표류하며 온갖 일들을 겪은 끝에 227일 만에 구조되는 것이 이 영화의 스토리입니다.


영화는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작 소설은 무려 4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어 7백만 부 이상 팔렸고 영국의 부커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많은 감독과 제작사가 영화화하려 했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중층적 의미와 놀라운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착수하지 못했는데 그걸 이안 감독이 해낸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느끼셨겠지만 CG인 줄 알면서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화면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마지막 반전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구조된 후 파이는 일본 보험회사 사람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다 얘기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미어캣이 사는 둥둥 떠다니는 식인섬 얘기도 믿지 않았고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면서 오랑우탄이 바나나를 타고 왔다는 얘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파이에게 자기들이 회사로부터 바보 취급당하지 않도록 ‘진실’을 얘기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파이는 다른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선원과 주방장이 살아남았고 어머니가 바나나를 타고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주방장은 선원을 죽여서 그걸 물고기를 잡는 미끼로 썼고 주방장과 다툰 어머니는 상어 밥이 되어 죽었으며 자기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는 얘기였습니다. 보험회사 사람들은 이 얘기를 자기들이 바보 취급당하지 않을 ‘진실한’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작가, 곧 파이의 예기를 소설로 쓸 작가는 하이에나가 주방장이고 그에게 죽은 얼룩말이 선원이며 바나나를 타고 온 오랑우탄이 어머니이고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다름 아닌 파이 자신임을 알아 듣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더 맘에 듭니까?


얘기를 다 끝낸 후 파이는 작가에게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라고 묻습니다.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벵골 호랑이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 겁니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작가가 답하자 파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고맙다’고 말합니다. 제 가슴을 때린 대사입니다. 왜 그는 고맙다고 말했을까요? 자기 말을 믿어줘서일까요? 정말 그뿐일까요?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과 홍해바다 사건에도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노예가 남자만 60만 명이고 이들은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과 하느님이 보내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돌을 치니까 물이 터지는 기적을 겪으면서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훈련을 했고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한 버전입니다. 다른 버전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 수백 명이 밤을 노려 도망쳐 나왔는데 추격하는 이집트 군대를 얕은 늪지대인 갈대바다에서 어찌어찌 따돌려서 광야에 접어들었고 거기서 갈 바를 몰라 40년 동안 정처 없이 헤맨 끝에 가까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거기에는 이미 오랫동안 자리 잡고 살고 있던 일곱 부족이 있어서 그들과 2백 년 동안 갈등하고 싸우기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겨우 겨우 인적이 드문 산악지대에 자리 잡았다는 얘기입니다. 전자는 성서가 전하는 버전이고 후자는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자료에 근거해서 만든 버전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버전이 더 마음에 듭니까? 이스라엘은 홍해가 둘로 갈라져서 바닷길이 났다는 버전을 택해서 후대에 전했습니다.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현실성이 낮은 버전이지만 그들은 그 버전을 택했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 버전을 현실성 있게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좌우간 그들은 이 버전을 선택했습니다.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버전이 아닌 하이에나와 얼룩말과 오랑우탄과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버전을 받아들였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그 주장을 크기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매주일 설교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제 스승 안병무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의기투합’하게 된 계기도 어떤 점에서는 이야기에 관한 생각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1986년에 서울 향린교회에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서 한 모임에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목사는 설교를 잘 하는 목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분명히 ‘우리 교회에서’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는 설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변혁을 위해 실천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스승님의 그것과 일치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쓰시렵니까?


저는 지금도 제 설교가 여러분에게 큰 영향을 주거나 감명을 주거나 은혜를 끼칠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사람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말 몇 마디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강고합니까. 그래서 저는 이야기의 힘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인격을 바꿀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물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이야기 따위가 바꿀 거라고는 더더욱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이야기의 힘은 의심하지만 사람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만은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슨 힘을 발휘할 거라고는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만일 누군가가 의미 있고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그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완제품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재료’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완제품’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반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꿀 여지가 있는 물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물건이 될 수 있는 ‘반제품’ 같은 것이란 겁니다. 세상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내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로 완제품 아닌 반제품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영화에서 어느 버전이 진실일까요? 저는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버전이 실제로 파이가 겪은 ‘날 것’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진실은 호랑이와 하이에나,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만들어낸’ 진실입니다. 만일 파이가 그 얘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남았기에 호랑이 버전이 진실이 됐다고 저는 믿습니다.


파이는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이젠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이 얘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시렵니까?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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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2

아버지의 상처

창세기 22:1-19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느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그들이,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느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창세기 22:1-19).


처음에는 부녀 사이인 줄…….


오늘은 아버지주일(Father’s Day)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시편과 영화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설교하고 있어서 가급적이면 아버지날과 이 주제를 맞춰서 성서본문을 택하려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가운데서 본문 택하기를 포기하고 창세기 22장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구약성서 이야기들 중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 얘기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가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얘기할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을 맡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입니다. 저는 199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이후의 영화들, 특히 그가 감독, 주연을 동시에 맡은 영화들 중에는 좋아하는 영화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제일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네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매기가 프랭키의 숨겨진 딸인데 나중에 가서 밝혀지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던 거죠. 



한 허름한 권투 체육관을 운영하는 프랭키와 거기서 청소하면서 생활하는 스크랩은 과거에 권투경기 중에 지혈사와 선수 사이였습니다. 스크랩이 타이틀전을 하는 도중에 눈 주위에 출혈이 심해서 프랭키는 경기를 중단시켰어야 했습니다. 스크랩의 트레이너는 전날 과음을 해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므로 그 결정은 프랭키가 내려야 했는데 그는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크랩은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맙니다.


이 체육관에 서른한 살짜리 여자 매기가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운동을 합니다. 프랭키는 여자는 기르지 않는다며 냉정하게 그녀를 물리쳤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혼자 묵묵히 운동을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오빠는 감옥에 가있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조카가 트레일러에서 정부보조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매기는 열세 살부터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몰래 가져다가 먹으면서 번 돈으로 살아갑니다. 번 돈의 일부를 가족들에게 보내주면서 말입니다.


서른한 살 나이에 권투를 시작하는 건 너무 늦었다는 말에 매기는 “그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응대하고 누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훈련에 몰두합니다. 결국 스크랩이 슬쩍슬쩍 도와준 데 힘입어서 그녀는 프랭키의 지도를 받아 선수가 됩니다. 그렇게 둘은 파트너가 되어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연전연승했고 결국 타이틀전을 벌이는데 거기서 매기는 상대방의 반칙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당합니다. 병상에 누운 그녀는 다리가 썩어 들어가 한쪽 다리를 잘라내기까지 합니다. 그녀는 프랭키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사정하지만 그는 차마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두 번이나 혀를 깨물어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녀는 말도 못하게 된 겁니다. 이에 프랭키는 고민하다 그녀의 부탁대로 어느 날 밤에 몰래 병실에 가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냅니다.


영화와 성서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


이 영화에는 중간 중간에 의미 있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영화가 하려는 얘기는 매기와 프랭키가 연전연승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녀가 하반신마비가 되어 병상에 눕게 된 이후에 담겨 있습니다. 그 중 매기의 아버지가 관련된 두 가지 얘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매기가 돈을 벌어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집을 사서 선물합니다. 하지만 집을 가지면 정부보조금이 끊긴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싫어합니다. 매기는 가족들과 다투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어렸을 때 아버지가 기르던 개를 묻어준 이야기를 프랭키에게 합니다. 하루는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는 개를 아버지가 차에 싣고 나갔는데 거기 삽이 들어 있더라는 얘기였습니다. 훗날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 걸 미리 암시한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또 그녀가 병상에 누웠을 때 프랭키에게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심각한 저체중이어서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았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역시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걸 암시한 얘기였고 거기에 프랭키가 아버지 캐릭터로 연결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영화는 프랭키와 매기를 부녀 사이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영화와 아브라함, 이삭 이야기에는 연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그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차이점들이 있긴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얘기에는 단순한 아버지와 자식 관계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삭이 하느님의 약속에 의해서 부모가 매우 늙었을 때, 그래서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던 데 반해서 매기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나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고 남은 가족들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막장입니다. 하반신마비로 병상에 누워있는 매기를 찾아와 돈 문제 서류에 사인하라고 들이대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얘기는 서두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해서 사건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데 반해, 영화는 아무 이유나 목적이 없이 우연히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얘기 사이의 차이를 찾으라면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책 《알 수 없는 분》에서 창세기 22장을 각각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각에서 읽고 해석해서 썼으므로 오늘 반복하지는 않겠고 오늘은 한 가지에만 집중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침묵의 언어들


아브라함, 이삭 얘기의 정수(精髓)는 모리아 산에 이르러 수행했던 종들을 뒤에 남겨놓고 칼과 불을 든 아브라함과 장작을 멘 이삭, 둘만 산 위로 오르는 대목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라고 아브라함을 불렀고 아브라함은 “얘야, 왜 그러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들리게 이렇게 번역했지만 원문은 “내가 여기에 있다.”(Here I am)입니다. 이삭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도 묻습니다. 참 난처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아브라함은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한 다음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또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번제물을 마련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장차 일어날 일을 이미 내다보고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니면 엉겁결에 둘러댔을까요? 두 가지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갖고 대답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는 사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면서, 그리고 종들을 남겨두고 단 둘이 산에 오르면서 수백, 수천 번 생각했을 겁니다. 하느님은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 약속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하나? 이 녀석도 이상하다고 눈치 챘을 텐데 왜 이 녀석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아들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겠지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정수(精髓)는 사고 난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라고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상영시간도 그 부분이 절반 정도 차지합니다. 창세기 22장의 얘기는 15장에 나오는 얘기와 연관시켜서 읽어야 합니다. 15장에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언약 맺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거기서 하느님은 제물의 몸통을 둘로 쪼개서 서로 마주보게 차려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밤이 되자 연기 나는 화덕이 나타나서 쪼개놓은 제물 사이로 지나갔답니다. 이 얘기는 언약을 깨는 편은 쪼개진 제물처럼 처참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느님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걸 어떻게 믿겠냐고 의문을 제기한 아브라함의 요청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곧 하느님이 약속을 지킨다는 증표를 아브라함이 보여 달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란 겁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깨뜨리면 쪼개질 제물 꼴이 될 쭉은 누구입니까? 물론 양편 모두 같은 신세가 되겠지만 그래도 징표를 원한 쪽이 아브라함이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이 꼴이 될 쪽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약속을 깨면 쪼개진 짐승 꼴이 될 거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15장을 잘 읽어보면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심지어 학자들도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마 하느님이 그런 꼴이 되겠어? 그게 말이 되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창세기 22장을 15장과 연관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시험했다면 22장에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할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프랭키의 자리에 아브라함과 하느님을 대입해보다


매기와 프랭키를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입해봤습니다. 이삭은 매기에게, 아브라함은 프랭키에게 대입시켜 본 겁니다. 프랭키는 1년 반 동안 가까이서 매기를 지켜봤습니다. 그녀는 서른한 살이란 나이는 권투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에 “서른한 살이 늦었다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뭘 보나 권투는 그녀의 전부였습니다. 돈 때문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불행한 처지에서 살다가 드디어 자기가 잘 하는 걸 찾아낸 겁니다. 그녀 곁에서 아버지처럼 돌봐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습니다. 병상을 찾아와 막장을 부린 가족들은 그녀가 퇴원하면 돌아갈 현실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매기는 프랭키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키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거절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못 한다고……. 그러자 그녀는 두 번이나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젠 말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프랭키는 밤중에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갑니다. 그녀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더 빨리 잠들라고 혈관에 충분한 양의 주사액을 주입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프랭키의 자리에 하느님을 대입해봤습니다.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살리면 되지!’라고 대답할 사람과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벌어지기도 전에 모든 걸 미리 아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명령을 수행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려 했던 겁니다. 시험을 하기 전에는 하느님도 몰랐다는 겁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은 “내가 이제 알았다!”(Now I know)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프랭키였다면 어떻게 하셨을지는 여러분 각자 생각해보시고 답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뭘까요? 대체 ‘믿음’이란 게 뭡니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믿음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그게 없는 사람입니까? 또 사람들은 믿음이 ‘크다’ 또는 ‘깊다’거나 믿음이 ‘작다’ 또는 ‘얕다’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이 믿음이 크거나 깊으며 작거나 얕습니까? ‘하느님이 이런 것까지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것까지는 못 할 거야.’라거나 ‘내가 믿는 하느님이 옳고 네가 믿는 하느님은 틀렸어!’라거나 ‘내 하느님이 더 힘이 세거든!’ 따위의 생각을 올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닌데 말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곳에 있는 마음과 생각과 심정을 조금씩이나마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이 자란다고 부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느님이 어떻게 아버지더러 아들을 자기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명령은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명령을 하는 하느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 조폭 두목이 부하의 충성심을 시험해보려고 누굴 죽이라고 명령하는 그런 심정으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명령하셨을까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보는 것, 그래서 그 마음의 작은 한 구석이라도 붙잡아보는 것,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특히 마지막에 프랭키가 말도 못하는 매기의 눈을 바라보면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주사를 놓는 장면을 보면서 이삭을 향해 칼을 든 아브라함의 심정을, 더 나아가서 그런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느님의 심정을 생각해봤습니다. 그것들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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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1


노래하는 이유, 찬양하는 까닭

시편 145:1-13


“나의 임금님이신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송축하렵니다. 내가 날마다 주님을 송축하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 위대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대대로 칭송하고 주님의 위대한 행적을 세세에 선포하렵니다. 주님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내가 가슴 깊이 새기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두려운 권능을 말하며 나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렵니다. 사람들은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님의 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주님, 주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주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며 주님의 성도들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님의 위대하신 행적을 말하는 것은 주님의 위대하신 위엄과 주님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함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시편 145:1-13).


하느님은 창조 전엔 뭘 하셨을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을까요? 저는 이런 게 궁금할 때가 있는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은 이럴 때 다들 구글(google)을 검색하지요. 그래서 저도 해봤는데 실망했습니다. 구글은 성서 이곳저곳을 인용하는 것 외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군요. 그것들은 구글이 내린 대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구글이 모아놓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1장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씀’(Logos)인 예수님이 천지창조 이전에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글을 소개하더군요. 또 창세기 1장 첫 구절,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영’은 신약성서의 ‘성령’과 같다면서 창조 이전에 하느님은 성령과 함께 계셨다는 등의 답이 고작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영’(루하흐 엘로힘)을 보혜사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입니다. 구글이 인용한 두 구절을 합치면 삼위일체가 되어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로고스), 성령 하느님(하느님의 영)과 함께 계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제 질문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누구와 함께’ 계셨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인데 그에 대해서 구글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구글이 모르는 것도 있네요.


유대인들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답니다. 한 아이가 랍비에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어요?”라는, 제가 가진 것과 똑같은 물음을 했더니 랍비는 “너 같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녀석 맴매하려고 회초리를 만들고 계셨단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아이의 물음에 성의껏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교육적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농담은 아니고 ‘나름의’ 신학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쓸데없는 상상이나 추측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읽지 못하게 하는 성서구절들이 있는데 창세기 1장 1절도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그 명단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 외에 에스겔의 여러 구절이 거기 포함된다고 기억합니다. 그 구절들을 못 읽게 한다는 말은 공식적인 예배 때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읽는 것이야 막을 수 없지요.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니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가?


흔히 성서가 말하는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정말 그것을 말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은 창세기 첫 장 첫 절만 봐도 성서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욥이 “제가 왜 이렇게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하느님께 따져 물었을 때 하느님은 욥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네가 천지가 창조될 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 이렇게 물으면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 때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창조 때 아무도(nobody) 없었던 것은 맞지만 아무 것도(nothing) 없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에 나오는 ‘혼돈’ ‘공허’ ‘어둠’ ‘깊음’ 등의 말은 추상명사이니까 제쳐두더라도 ‘땅’과 ‘물’은 명백하게 물질명사입니다. 성서는 창조 때 “‘땅’이 혼돈하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창조 이전에도 뭔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적어도 ‘땅’과 ‘물’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서의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초대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내놓은 주장으로서 성서의 창조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믿어온 ‘무로부터의 창조’와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말하자면 일종의 ‘가르기’와 ‘질서 세우기’입니다. 창조 첫째 날에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나눴고 둘째 날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눴으며 셋째 날에는 육지와 바다를 나눴고 넷째 날에는 낮과 밤을 나눴으며 다섯 째 날에는 동물들을 공중동물, 육지동물, 바다동물을 나누는 등, 창조는 혼돈스럽게 뒤섞여 있던 것들을 구별해서고 나누어 질서를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조가 7일 만에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과거 어느 한 때에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과거에 완성된 채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져가는 중입니다. 오래 전 서울에 살 때 한 서점에 갔다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책이 있습니다. 유럽 신학자 에버하르트 윙(Eberhard Jüngel)엘이란 분이 쓴 <God’s Being Is in Becoming>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번역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형성되는 중이다, 만들어지는 중이다’ 쯤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책인데 성서가 말하는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가르고 나눠서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서의 창조’라는 주장도 거기서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찬양’은 예배의 필수요소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레위기를 읽으면서 제사의식, 곧 예배의 중요성과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희생제사에 관해 얘기했지만 예배에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는 ‘찬양’(讚揚, praise)입니다. 찬양의 역사는 예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됐습니다. 찬양이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에서 필수적입니다.


찬양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다릅니다. 주로 음악이 사용되지만 다른 예술형식도 사용됐습니다. 음악의 경우도 사람의 목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됐습니다. 때론 요란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하기도 했지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도 찬양했습니다. 침묵도 찬양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형식은 다양하지만 예배에서 찬양이 빠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성서의 대표적인 찬양이 시편인데 무려 150편이나 되는 많은 시편이 있다는 사실은 예배에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시편에는 가락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시편을 읽지 않고 노래합니다. 현란한 멜로디와 화려한 애드리브는 없고 음정의 높낮이 변화도 크지 않았지만 시편은 분명 노래, 곧 찬양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부른 노래라고 주장한 학자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사람의 반응, 응답, 특별히 노래로 한 응답이 시편의 찬양이라는 겁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느님이 구원사건을 벌일 때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 일이 마무리된 후에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겁니다. 하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하느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 특히 모든 장자가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 비로소 히브리인들을 내보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갈라졌을 때도 두려워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도 뿔 나팔 부는 사제들 뒤를 따라서 성 주위를 걸은 것 외에는 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느님이 일으킨 구원사건이 끝난 다음에 노래를 지어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축하했다는 것이 폰라트의 주장입니다.


그보다 약간 후대 학자인 크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시편의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감사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예배에서 했던 찬양은 과거 어느 때 벌어졌던 구원사건을 단순히 기억해서 되돌아보고 노래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세상을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사람은 타자로서 그걸 향유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은 혼돈(카오스)을 갈라내고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창조사역을 계속하고 계시고 사람은 거기에 파트너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해서도 사람은 그것과 떨어져서 객체로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동반자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마당이 바로 예배이고 그 중에서도 찬양이라고 베스터만은 주장합니다. 찬양은 늘 변조되어왔고 편곡되어 왔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같은 가락과 같은 노랫말로 반복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변조된 가락과 노랫말로 편곡하고 개사해서 부름으로써 지금 여기 자신들의 얘기를 담아냈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봤고 경험했던 겁니다.


어거스트의 음악은 곧 찬양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태어난 줄도 몰랐고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는 중에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사실은 죽지 않고 누군가에게 입양됐다가 고아원으로 옮겨져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나이 많은 원아들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자기를 데리러 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부모가 자길 찾으러 오지 않자 그는 스스로 부모를 찾아 나섭니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 이상으로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고 그 소리들을 음악으로 들을 줄 아는 비상한 탤런트를 가졌습니다. 그는 음악이 자기를 부모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많은 소리들을 듣습니다. 우연히 만난 아이를 통해 몸을 의지하러 찾아간 곳이 하필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내 ‘앵벌이’ 시키는 나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어거스트는 거기서 자신이 천재적인 음악재질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한 교회에 찾아든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하느님의 섭리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는 거기서 피부색 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 광경을 조금만 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8DwW0dCQHPQ


그가 줄리아드에 들어가고 곡을 만들어 공원에서 연주하고 그것을 통해서 부모를 만나는 줄거리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요 할리우드 스타일이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 봐도 감동적입니다.


긴 세월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 듣기 싫은 말은, 그래서 저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말이 ‘준비찬송’ 또는 ‘준비찬양’이란 말입니다. 찬양은 뭔가를 준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의 메인이벤트를 하기 전에 하는 오픈게임처럼 벌이는 행사가 아닙니다. 찬양은 말씀을 듣기 전에 예배자의 감정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벌이는 퍼포먼스도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서 무슨 말에든 ‘아멘!’ 하고 화답하게 만드는 수단도 아닙니다.


찬양은 꿈을 꾸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신다고 믿고 그 일에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이 찬양합니다. 오랫동안 이 땅의 흑인노예들이 매를 맞아가면서 ‘우린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른 것은 그 노래가 자기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고 고통을 잊게 만들어줬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찬양을 부르면서 실제로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실현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그 찬양을 부르면서 그들은 실제로 그 행진에 참여하여 그 대열 안에 있었습니다.


찬양은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시(詩)


찬양은 지금 주어진 세상(status quo)은 별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산문’(散文)의 언어가 아닙니다. 찬양은 지금 나의 삶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이고 입 다물고 사는 맥없는 산문의 언어가 아닙니다.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 하느님은 나와 세상을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바꾸시려 한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온 맘과 온 영혼과 온 몸을 바쳐 외치는 시(詩)적 언어입니다. 나의 삶은 내가 희망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터뜨리는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시적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해결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이 무겁기만 하고 그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위로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뿐인가요,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교리)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모두 ‘힐링’을 외치는데, 사실 한 주간 세상에서 부대끼면서 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못지않게, 아니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꾸겠다는 의지요 희망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입니다. 나와 내 후손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하느님나라의 이상에 좀 더 다가가고, 외롭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물질로나 정신, 영혼으로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입니다. 찬양할 때 그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찬양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노래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과 기존질서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줍니다.


어린 어거스트 러쉬는 음악에서 그걸 봤습니다. 저는 그의 천재적 음악 재능이 그걸 보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그의 천재적 재능은 부모를 빨리 만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부모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음악에 담겨 있는 찬양의 힘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찬양시간에 때로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닌 이른바 ‘세속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걸 불편해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심각하게 그에 대해 제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찬양을 찬양으로 만드는 게 뭘까? 그냥 노래와 찬양은 뭐가 다를까? 예수님, 하느님, 믿음, 은총 등의 언어가 가사에 담겨 있는 노래는 다 찬양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나라를 꿈꾸고 그걸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굳어 있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믿음을 가장 적절한 멜로디와 노랫말로 표현하는 노래가 찬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찬양시간에 더욱 힘차게, 열정적으로 찬양합시다. 그냥 노래에 취해서 찬양하지 말고 내가,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르면서 새 술을 낡은 부대에서 새 부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찬양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저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생이 달라질 겁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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