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7)


오르막과 내리막


수피령은 정말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다. 로드맵에도 수피령을 두고는 ‘직등코스’라 적혀 있었고, 전날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눈 심마니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넘어야 한다고 일러준 터였다.


‘수피령’이라니,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물 수’(水)에 ‘가죽 피’(皮)에 ‘재 령’(嶺), ‘水皮嶺’이라 쓰고 있었다. 어찌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싶은데 함장로님은 ‘말이 씨가 되었나, 96년 대홍수 때 대성산 수피령은 온통 물을 뒤집어쓰는 대피해가 있었다.’고 수피령에 얽힌 일 한 가지를 소개했다.


이른 아침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막 퍼지기 시작하는 볕인데도 벌써 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단단히 마음을 먹으라 한 고개이니 여느 길보다도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오기였을까, 고개를 다 넘기 전까지는 쉬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힘든 길일수록 중간에 쉬면 쉬고 난 다음이 어려웠다. 배낭은 더 무겁게 느껴졌고, 걸음은 나도 모르게 무거워지곤 했다.


수피령은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웠다. 하나는 완만한 경사였고, 다른 하나는 급한 경사였다. 완만한 경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완만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완만한 경사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힘을 다 소진시키게 했다. 차라리 힘이 들어도 급한 경사를 단 번에 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어느 순간 급경사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한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경사였다. 한 번 주저앉거나 자빠지면 데굴데굴 굴러 처음 떠났던 자리로 물러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숨은 증기기관차에서 내뿜는 김처럼 뜨겁고 소리도 거칠어졌다. 심장은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라 “뻥!” 하며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한 순간에 파열될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몸의 한계였다.


마침내 나티난 수피령 정상. 고개 하나를 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가 자명하게 여겨졌다.


몸의 한계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서울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監神大)에서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학년 대항 체육대회를 했다. 과(科)라고는 달랑 신과(神科) 하나, 한 학년 학생이라고는 50명, 당시의 감신대는 마치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다.


한 학년이 50명인데다가 우리 학년은 유난스레 여학생이 많았다. 내 기억에는 16명이었지 싶다. 남학생들 중에서도 더러 군대를 가고 휴학을 하고 나면 그 수는 더 줄어들었다. 운동을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학생도 부족하다보니 나는 거의 모든 경기를 뛰어야 했다. 당시의 주종목은 배구와 농구였는데, 경기를 모두 마치는 오후가 되면 거반 녹초가 되었다.


체육대회의 마지막 종목은 단축 마라톤이었다.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마라톤도 뛰었다. 그 때 느낀 것이 몸의 한계였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한계를 마주하며 계속 달리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뭔지 모를 희열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1학년 때의 경험을 친구에게 이야기하여 2학년 때는 친구와 함께 뛰기도 했다. 수피령을 오르며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학!, 학!, 학!”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식처럼 비명처럼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때마다 단내가 확 풍겼다. 그러던 중 마침내 더는 견딜 수 없다 싶은 순간이 왔다. 고개를 넘을 때까지는 쉬지 않기로 한 다짐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목사다, 마지막 한계에 왔다 싶을 때 내뱉는 소리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학!” 소리를 “주여!”로 바꿨다. 자신이 매달릴 무거운 통나무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척거리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러다가 여러 차례 쓰러졌던 예수님을 생각했다.


내가 등에 메고 있는 것은 고작 배낭 하나, 게다가 채찍을 내리치는 로마군병도 없지 않은가, 사람들의 조롱소리가 들리는 것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겼다. 몸과 마음의 한계 속으로 누군가가 가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화천과 철원은 수피령을 경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고개는 오르기가 힘들었지 내리막길은 저절로 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견딘 것 만큼을 누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타난 정상, 고개에 올라서자마자 나는 고꾸라지듯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요새 눕기보다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 황동규 시의 한 구절일 것이다. 해발 780m 고개를 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한계가 자명하게 여겨졌다. 배낭에 기대 누워 생각하니, 고개를 다 넘은 여유 때문이었을까, 옛 시절 보릿고개를 넘는 일은 수피령 고개 넘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되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청정지역 철원입니다’


눈앞에서 반기고 있는 표지판 속 ‘철원’이라는 글자가 더없이 반가웠다. 화천과 철원은 그렇게 수피령을 경계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 정상까지 오르기가 어려웠지 그 다음은 쉬웠다. 로드맵에 적혀 있는 것처럼 ‘30리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저절로 가지 싶은 걸음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람이었다. 저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수피령을 오를 때는 없던 바람이었고, 고개를 오르느라 수고했다는 듯이 온 몸 다 젖은 땀을 내내 말려주었다.


살다보면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하고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계속 오르기만 하는 오르막길도 없고, 언제까지나 내려가기만 하는 내리막길도 없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서로 어울리며 이어진다. 오른 자만이 내려갈 수가 있다. 내리막길을 가볍게 걷는 즐거움은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른 자만이 누릴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아낸 만큼을 누리는 것이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막길을 걸을 때에 비하면 저절로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로 누군가가 내 등을 밀어주었던 때는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를 때였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가 등을 밀어주었기 때문에 벅찬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등을 밀어주는 때는 내리막길을 편하게 내려갈 때가 아니라,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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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7)


인생은 도장(道場) 깨기

-말들의 진실-


1.


공자(孔子)께서 자공(子貢)에게 말씀하셨다.


“사(賜)야, 너는 뛰어난가보구나. 나는 그럴 겨를도 없는데.”(《논어》, 「헌문(憲問)」편).


곧잘 자기의 입장에서 타인들을 평가하고 비교하길 좋아하는 의기양양한 제자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아무리 입버릇처럼 거리낌 없이 남의 비평을 해댔기로 되 주고 말을 돌려받자 한 짓은 아니었을 터. 면전에서 스승님께 정면 디스(diss)를 당했을 때 자공의 낯은 어땠을까?


자공의 뒷담화와 달리 예기치 못한 순간 상대의 안면을 직격하는 인간실격선언의 스트레이트(straight)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방망이처럼 정수리 복판에 작렬해 심장 속 양심에서 폭발한다. 위급한 마음을 모면할 길이 없어 어떤 말을 임시로 빌려다 쓰는 것도 안 될 정도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가차(假借, 한자에서 음이 같은 글자를 임시로 빌려 쓰는 방법) 없다’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 머리는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아득해지고, 가슴은 T익스프레스(T Express)가 수직 낙하하듯 고공에서 천길 아래로 떨어지고, 꼭두각시처럼 다리는 붙어있는 건지 떨어진 건지 후들거리고, 손에는 땀이 배고, 맥은 쪽 빠져 열은 위로 뻗치고, 얼굴은 백납병자처럼 창백하다가 술 취한 듯 달아오른 홍당무가 된다.


저항이나 항복을 요구하는 것도 허락하는 것도 아닌 순수한 일격이 전부인 그런 순간에 이르면 오로지 소원은 모멸과 창피가 새빨갛게 피워낸 한 송이 부끄러운 꽃이 되던지, 꺼져 사그라지지 않으며 불타오르는 한 그루 떨기나무가 되던지, 무너지지도 않은 채 변명을 아주 잊어버린 벽이 되던지, 그 벽에 뚫린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가 이 참담한 재판장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어질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제 꼴이 한심스러워지는 참담한 순간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자공보다 가진 것도 없고(그는 큰 부자<富者>였다고 한다)훨씬 어리석으면서도 곧잘 남을 비평하길 좋아하며 의기양양하게 살아온 내가 한두 번 겪어본 일이겠는가. 너희는 또 나보다 가진 게 없고 훨씬 어리석을지 모르니 그런 일을 만나거든 ‘그렇군!’하면서 벌어질 일이 벌어졌으려니 우선은 제정신부터 차릴 일이다.



세상엔 누가 시늉만 했을 뿐 아직 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카운터(counter)에 얻어맞은 것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고, 페인트(feint)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만큼 태연한 사람도 있다.(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도 태연한 것이다.) 태연한 사람은 시늉이 노리는 바를 정확히 깨달은 것이다. 세상은 상대적인 것이고 너와 남이 없이 내 판단은 다 반(半)만 맞는 것이란 말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절대가 아니란 말은 내게는 절대로 옳은 것이 상대에게는 틀린 것일 수 있고 상대의 절대로 옳은 것이 내게는 틀린 것일 수 있으며, 우리 모두의 견해가 상대적으로 절대가 아니니, 이것을 깨달으면 무엇보다 생각이 주는 고루함과 한계와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걸 두고 아는 체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 나를 괴롭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복잡함에서 내가 벗어나는 기술을 발전시켜야한다. 무엇보다 항상 ‘이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일까?’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게 좋다. 큰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벌써 당한 것처럼 스스로를 괴롭힌다면 누구 좋으라고 세상을 사는 것이며, 정말 큰일에 당해선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남을 비평하는 것이 그렇듯 참담한 순간을 겪고 이기는 것에도 오직 하나의 목적과 기술이 필요한 거라고 하겠다.


자공이 《논어》에 이 얘기를 기록해 넣은 걸로 미루어 그는 이 참담한 순간을 잘 극복하고 이겨냈을 것이다. 꽁꽁 숨겨도 시원찮을 부끄러운 일화를 자랑과 명예로 바꾸어 소중히 간직했다가 후세의 귀감으로 남겨주었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후론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잘 이겨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해도 예전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옛 경험을 창피스럽게 여기지 않고 떳떳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긍지가 거기 있다. 끝내 그 참담함 앞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뭔가를 일깨우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자공은 부끄러움에 짓눌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일생동안 선생님께 당한 창피를 숨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 진정한 실제를 볼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으로 부족함을 돌파했기 때문에, 그로써 스승의 자기를 향한 특별한 고마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었던 것. 그랬지 않았다면 공자님은 인류의 스승일지 모르나 자공에게만은 한 번의 잊지못할 언어폭력으로 평생 씻지 못할 모멸감을 가르쳐준 냉정하고 혹독한 비평가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엔 뭇 사람의 관대한 선생으로 존경을 받으면서 뒤로는 냉혹하고 혹독한 비평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선생들에게 순종한답시고 자기를 책망하여 괴롭히는 것으로 자기가 더 발전되고 나아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회개란 노상 타박할 거리를 발견해 자기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더 나아지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칭찬과 격려로도 모자랄 텐데 책망과 괴롭힘으로 어떻게 나아지겠는가.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항상 자기 곁에서 자기와 각축하며 물어뜯고 있는 이리를 선생이라 여기는 것이다.


실제 공자를 그런 도덕적 꼰대로 비평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공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공자를 그렇게 이해한 꼰대 제자들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스승의 가르침이 실제로 일어난 큰일이라도 되는 양 받아들였다. 그러니 가르침으로 생긴 가능성으로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르침에 매여 버렸던 것이다. 스승이 야단을 치지도 않았는데 늘 야단맞는 학생처럼 도덕적 훈계나 받고 있으니, 어느새 나나 남이나 여기서 벗어나 함께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려는(高飛遠走) 진취(進取)의 사람이 될까. 그런 진취적인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끌어내려 자기보단 아랫길에 묶어 두어야 마음이 안전해지고 기분이 흡족해지고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런 자들은 입만 열면 스승을 핑계로 삼고 말끝마다 스승의 말씀을 빙자하지만 스승처럼 누군가 배우려는 자를 일깨워 지금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반대로 배우려는 자를 끝내 못 배우게 막아 현재 상태에 감금시키고 그의 가능성의 무한한 자유를 박탈하는 데만 스승과 그의 말씀을 써먹는다. 그들이 항상 하는 말은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는 말 뿐이다. 그들은 자기보다 더 진취적인 사람이 주목 받는 것을 발견하면 언제나 사려 깊은 모양으로 점잖게 한마디 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위태롭다.’ 그들은 복음서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는 말은 잘도 인용하지만, 그 말이 자신이 일삼고 있는 생활태도 자체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언어폭력 정도는 폭력도 아니지. 그것이 폭력이라는 걸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점점 가식적이고 도덕적이 된다. 가식적이 될수록 도덕적이고 도덕적이 될수록 가식적이니 가식과 도덕은 마침내 그들에게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 번도 스승의 가르침을 가능성으로 삼아 고비원주(高飛遠走)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을 진리의 테두리랍시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시험하고 낙인찍고 왕따 시키고 아주 살지를 못하게 온갖 구설(口舌)로 괴롭히는 도덕적 꼰대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에 이르렀지만 기원전 479년에 돌아가신 양반이 다시 죽는다한들 스승의 가르침에 값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일깨울 수 있을까. 자공이 스승의 가르침에 붙들려 자기를 책망하며 꼼짝도 못했고 꼼짝하려는 동료들까지 책망으로 꼼짝 못하게 했다는 소린 들어보지 못했다. 자공은 더욱 더 의기양양해지려는 자기의 길을 더욱 더 의기양양하게 구축해 갔던 것이다. 그것이 자기를 향한 스승의 질책의 뜻임을 깨우쳤으니 공자의 핵심제자라 할 만한 것이다.

설마 사람들이 생각하듯 공자께서 자공의 의기양양을 시기해 ‘그냥 놔둬선 안 되겠구나’ 기세를 팍 꺾어놓으려 작심을 하시고 “사(賜)야, 너 정말 엄청 나대는구나. 아주 나를 능가하는구나.” 그러셨을까? 그런데 도덕선생들은 누군가 보기 싫은 사람(그들은 왜 보기 싫을까?)을 발견하면 이런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다. 그럴 땐 공자도 앉지 않으셨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판단하는 권위의 상석에 스스로 앉아 겸손을 가장한 훈계로 거드름을 떤다. 근엄한 목소리에 추상같은 질책을 담아 야비한 비웃음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책을 한다나!


과연 공자께서 이 말씀을 그렇게 하셨던 것일까? 그랬다면 자공이라도 ‘나에겐 내가 너무나 아까워 당신과 나는 여기까지’하면서 얼른 다른 스승을 찾았을 것이다. “사(賜)야, 너는 뛰어난가보구나. 나는 그럴 겨를도 없는데.” 공자님은 부드러움과 해학과 여유와 너그러움 가운데 제자를 향한 칭찬 감탄 격려 사랑의 가르침을 담았던 것이다.


「헌문(憲問)」편의 그 다음 말씀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己不能也)인 것은 자기를 인증하려 안달하는 제자를 향한 스승의 독려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럴 겨를도 없다는 말은 얼마나 본받아 쫓아가고 싶은 배우고자하는 사람의 달려갈 길인가. 공자가 추상같은 질책을 담아 진짜 인신공격을 하며 비웃고 미워했던 자들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2.


만장(萬章)이 물었다. “공자(孔子)께서 진(陳)나라에 계시면서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내 고향의 선비들은 과격하고 단순하고 진취(進取)하려 하되 그 초지(初志)를 잊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공자(孔子)께선 왜 진나라에 계시면서 노(魯)나라의 광사(狂士, 과격한 선비)들을 생각하셨던 겁니까?”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셨다. “공자께선 ‘중도(中道, 비진리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운 도〔진리〕)’에 부합한 제자를 얻어 가르치지 못하게 되면 나는 반드시 과격하고 고집 센 사람(광견, 狂獧)을 택할 것이다. 과격한 사람(광, 狂)은 진취(進取)적이고 고집 센 사람(견, 獧)은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所不爲)는 지조(志操)가 있으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어찌 중도의 사람을 바라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반드시 얻을 수는 없기에 그 다음(차(次), 광견)을 생각하신 것이다.”


“어떤 걸 과격하다(狂)고 하는지 또 여쭙습니다.”


“(공자의 제자들)금장(琴張), 증석(曾晳), 목피(牧皮) 같은 사람들이 공자께서 말씀하신 과격한 사람(狂者)이다.”


“어째서 과격한 사람(狂)이라고 합니까?”


“그 뜻이 크고 말이 커서 ‘옛 사람은, 옛 사람은(이랬었는데, 저랬었는데)!’하는데, 평소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 현실이)그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따라가지 못함을 늘 괴로워했다는 말). 이와 같은 과격한 사람(狂者)도 얻지 못하게 되면 불결(不潔, 더러움)을 달가워하지 않는 선비를 얻어서 가르치고자하셨으니, 이것이 (비루한 데는 가담치 않겠다는)고집 센 사람(獧)이다. 이 또한 차선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 내 집안에 들어오지 아니할 지라도 내가 조금도 유감으로 생각지 않을 사람은 오직 향원(鄕原, 시골선비(촌양반)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사이비 군자, 자기의 위선을 깨닫지 못하는 위선자를 가리킴)뿐이다. 향원은 덕(德)의 적(賊, 도둑, 해치는 자)이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을 향원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어찌 그리 매사에 뜻과 말이 큰지(항상 올바르고 도덕적인지) 어쩌자는 것인가? 말이 자기의 행동을 돌보지 않고 행동이 말을 돌보지 않으면서도 ‘옛 사람은, 옛 사람은(이랬거늘 저랬거늘)!’이라고 되뇌는 자들이다.(옛 성현들의 말씀으로 남을 깎아내리는 데만 써먹는다는 말). 하는 짓이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친근함이 없고 차가운가? 세상에 났으면 이 세상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할 말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속생각(진정한 자기 실력)을 숨기고 세상에 아첨하는 자들이 바로 향원이다.”


만장이 말했다. “한 고을 사람이 모두 원인(原人,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일컬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원인이 아닐 수 없을 텐데 공자께서 ‘덕의 도적’이라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그를 비난하려 들면 이것이라고 들게 없고, 그를 풍자하려 들면 풍자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언제나 모두에게 아첨해 책잡히지 않을 정도의 소리만 하니까.) 유속(流俗, 세상평가)과 적당히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적당히 합류하며 (행동하지 않고)가만히 있으니 마치 신뢰할 만큼 신중한 듯하고, (그런 방식으로)행동하는 것이 청렴결백한듯하여 뭇 사람들이 좋아하고 자기 스스로도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부류들과는 ‘요순(堯舜)의 도(道)(진리의 세계, 기독교에서 하나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들은 실제로 변화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없다는 말) 그러므로 덕을 해치는 자들(도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자께선 ‘나는 사이비(似以非, 비슷하나 아닌 것)한 자를 미워한다’고 하셨다. ‘가라지(莠)를 미워함은 그 곡식의 싹(苗)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말을 잘 둘러대는 자(佞)를 미워함은 그 의(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구변(口辯)만 좋은 자를 미워함(惡利口)은 그 신용(信用)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다. 정(鄭)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미워함은 아악(雅樂, 아름다운 음악)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자줏빛(紫)을 미워함은 그 붉은빛(朱)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향원(鄕原)을 미워함은 그 덕(德, 본질)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다.’ 라고 하셨다. 군자(君子)는 상도(常道, 경전(經典)의 말씀이 가리키는 도(道)의 경지를 향한 일관된 추구)를 회복할 뿐이다. (선비(지식인)들의)상도가 바르게 전파되면 서민들까지 깨어나게 되고 서민들이 깨어나게 되면 그때야 세상에 사특(邪慝, 혼란을 일으키는 요사스러움)이 없어질 것 아니겠느냐.”(󰡔맹자(孟子)󰡕 「진심(盡心)편」).


3.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 고수는 곳곳에 널렸으나 오직 한 분 스승은 마음에 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자라나는 배움의 뜻을 품었다면 도처에 스승이 아닌 게 없다. 온갖 곳에 고수와 스승이 널렸으니 인생은 ‘도장(道場) 깨기’와 같은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 검술 대가로 명성을 남긴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584~1645)는 13세부터 29세까지 60여회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벌여 이겼다고 한다. 그는 ‘천일(千日)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일(萬日)의 연습을 련(鍊)이라 한다. 이 단련(鍛鍊)이 있어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검승부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대결이다. 지금이야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사무라이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진검대결이란 자기시대를 변명과 타협으로 회피하지 않고 정직히 살아가는 오직 하나의 길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걸 현대에 비유하자면 지금까지의 전존재를 걸고 승부를 내려는듯한 삶(배움)의 태도쯤 되지 않을까.



영화 <바람의 파이터>(2004)의 모델로 ‘극진공수도’를 창시한 재일한국계 무술인 최영의(崔永宜, 최배달), 1923~1994)도 이 ‘도장깨기’로 전설이 됐었다. 그러나 그가 진짜 가르친 것은 오로지 극기(克己)였다고 한다. 온갖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 거기엔 더 이상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파이팅(fighting)이 중요하다.


굴종은 영원히 패배하고 마는 것이지만 패배는 부단히 발전해나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파이팅에 있어서는 굴종보다 패배가 차라리 낫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통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런 파이팅을 내면에 품은 굴복하지 않는 도장깨기로서의 인생수업을 권한다.


4.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본다”(잠 27:21).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다른 결점은 몰라도 사람됨이 교만한 건 죽어도 못 고친다.’


‘잘난 척하는 놈치고 끝까지 잘난 경우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신공격성 잔인한 언어폭력까지. 나는 이런 말들을 무수히 들어왔다. 깨우침은 그것을 찾는 이의 통상적 사유와 인식을 강제중지 시키는 신적(외부의) 영감이지만, 이런 영감은 원치도 않는데 찾아와 나의 목숨(역사와 전통)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테러와 같았다.


잔혹한 말들은 나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나를 해체하고 바꿨다. 내가 다시 살아가기 위해 나를 해체하고 갈아 부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왜 그런 말들을 했을까? 나는 왜 그런 말들에 괴로워하고 양심을 찔려했을까? 내가 정말 잘 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혹은 잘 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을 했단 말인가? 누군가의 인정에 그토록 기대 살았던 결과인가? 그들과 나 사이에 정말 이런 말들만큼의 중대함과 각별함이 요구될 만큼 실재한 쟁투가 있었던 것일까?


문제는 그들이 내가 나름 흰 말을 타고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던(계시록 6:2) 나의 대적이 아니라, 대개는 내 동료들이나 선생들이었다는 점에 있다. 적이 아니라 동료에게 내가 인간실격을 선고받는 전도된 상황에 직면하면 마치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그럴 때 순종은 진짜 죽음이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나는 광견(狂獧)의 기질이 있어 아주 기가 죽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학이 한 진취적이고 고집 센 동료에 대한 경계와 시기와 질투와 공격의 언어폭력으로 왜곡되는 모양들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굴복하지 않는 광견(狂獧)의 과격과 지조와 그 우월감이 나를 부단히 단련시키고 발전시켜 주었다. 내 나름대로는 도장깨기에서 그들이 패배한 것이고 내가 이긴 것이다.


공격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의 허점을 잘 안다.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상대가 더 놀라고 아프고 괴롭고 부끄럽고 두고두고 못 잊어할지를 기막히게 안다. 그러나 그걸 아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싸움에는 하나의 기술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많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그러나 많은 기술과 함께 하나의 기술이 반드시 더 필요한데 그것은 놀라지도 쓰러지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는 침착함이다. 침착은 초연이고 그것은 거기 있으면서 거기서 벗어나 있는 자유로움이다. 정신의 자유와 그 능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안다. 비유컨대 그 상태는 결투에서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일격을 가한 것과 같다. 언제나 이제는 내 차례인 것이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 나름이다. 공자님 정도라면 받아들일 만하겠지.


그러나 너나없이 도토리 키재기로 시지프스의 언덕을 기어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고만고만들의 도덕적 품평을 일일이 받아들여 그런 쩨쩨한 훈계에 행여 저촉이 될까 눈치를 보는 식으로 날마다 과격과 진취와 지조를 찍어 눌러 겸손해지려한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함께 같잖아지려는 한심한 노릇이랄 수밖에. 겸손이란 유무형의 내세워진 권위와 권력 앞에 옷깃을 여미고 밥을 굶은 듯 무기력한 게 아니라 자기를 인식하는 정직을 잃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최후의 저서에서 ‘젊은 날의 꿈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듯이, 처음 뜻(初志)을 저버린 허리굽힘이 어떻게 겸손일 수 있으랴. 그러나 함께 부단히 자라가려는 벗을 향한 이런 겸손이라면 어떠냐. ‘그대는 뛰어난 것 같구려. 나는 아직도 그럴 겨를이 없다네.’ 친구라 하고 제자라 하고 동료라 하면서 고작 비웃음과 깎아내림으로 도덕적 우위와 안전을 확보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이미 내가 그를 능가했다는 뜻이니 안심해도 되겠다. 옛날 어느 스승님께서는 누군가에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충고를 듣고는 이렇게 답했다나. ‘익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숙이는 벼는 병든 벼’라고. 대개 말과 말의 진실이 이와 같다.


5.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이다.’ 어느 영화에서 본 누군가의 묘비명이다. 거기서 말하는 주인공의 혁명이란 인식과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혁명은 너무나 급진적이기 때문에 개혁이 좋다고 한다. 그것이 어디서 왜 나오는 말인 줄 모르기 때문에 혁명이라면 겁부터 내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개혁이란 결국 아무 변화도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든 세상이든 개인이든 개혁을 말하려한다면 그것은 말할 게 아니라 내가 개혁을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너는 할 만하니까 그런 속편한 소리나 지껄인다고 나무랄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아가는 줄 아느냐고. 너도 그 속에 있다면 그런 소리는 못할 거라고. 너의 비평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얼마나 사려 깊고 진중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아느냐고. 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들에게 내가 말하는 혁명이란 굳이 당신들이 상상하는 어떤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손해가 예상되는 외부적이고 행동인 상태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과 당신의 시공간을 변화시키는 내면적 인식과 태도의 문제라고 안심을 시켜 주어야할까?


아,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 세상이 뭐라든, 어떻게 비평하든, “너희는 너희에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인해 자기를 책망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로마서 14:22). 밤새 도박판에서 영혼까지 남김없이 다 올인(All-in)하고 돌아와 속기사 앞에서 러시아 민족의 구원과 메시아적 사명을 구술(口述)하던 도스또옙스끼처럼.


“여러분은 늘 깨어 있으십시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십시오”(고린도전서 16:13).


딸들아 나의 청년아, 인생은 도장깨기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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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6)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들


뜻이 있어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걷는 기도의 일정은 열하루로 정해졌다. 주일 지나 월요일에 길을 떠났고, 길 떠난 다음 주 금요일에 말씀을 나눌 신우회 예배가 있어 목요일까지는 돌아와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열하루의 일정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성의 명파초등학교에서 파주의 임진각까지의 거리를 열하루의 일정으로 나누니 조금 무리다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거리가 아니었던 것도 일정을 정하는데 있어 큰 몫을 했다.


일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길을 떠났는데, 곰곰 그 의미를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같은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천성환 목사님은 길을 걷고 있는 내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주었다.


길을 걷다가 만난 벽화. 이불에 지도를 그리고는 옆집으로 소금을 얻으러가던,  

어릴 적 내 모습이 그림 속에 담겨 있었다.


샬롬!

폭염에 목사님 건강을 지켜 주시길 손 모읍니다. 전 요즘 성도들과 함께 민수기 말씀을 큐티하고 있는데…,


모세와 함께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데스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는데, 도중에 메추라기 일로 한 달을,,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한 일로 일주간을 광야에서 더 머물러야 했지요. 정탐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는데,,, 정탐을 고집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면서…


인간의 명석한 이성(?)이 당대와 다음 세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실감합니다.


목사님의 열 하룻길의 걸음이 제 목양 사역에 돌아가는 길이 아니길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목사님의 발걸음!》



가데스바네아는 길을 걸으며 묵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내용이었다. 주일을 맞아 혼자 예배를 드리며 가데스바네아를 생각했던 것도 천 목사님의 글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지금의 내 목회와 섬기고 있는 성지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걷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교역자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회의를 마치고 마주앉아 식사를 하던 고신복 목사님은 걷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성서원어를 공부하는 일에도 열심인 고 목사님은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꼭 걸어보고 싶다며 내가 걸었던 일정표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함 장로님이 만들어 주신 로드맵을 메일로 보냈더니 정성이 담긴 답장을 보내주었다.


들판에 서 있는 솟대. 허름한 솟대지만 그것을 세운 이의 마음은 지극했을 것이다.


샬롬

늘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로드맵을 읽으면서 처음 출발하셨던 명파초등학교가 제 장인어른이 교장으로 처음 발령 나신 곳이어서 눈길이 갔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걸으신 명파초등학교에서부터 임직각까지의 로드맵이 출애굽의 로드맵 가운데 라암셋(고센)부터 마라까지의 여정과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서 의미를 부여 해 보았습니다.


1) 여정에서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200만 정도의 사람들이 하룻길을 걸은 거리와 목사님이 하룻길을 걸은 거리가 거의 비슷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은 로드맵은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고센에서 마라까지를 제한한 거립니다. 출애굽한 백성들도 거의 하루에 평균 30km를 걸었는데 목사님도 하루에 평균 30km를 걸으셨네요.


둘째로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출발하여 마라까지 걸린 일자가 10일인데(제가 조사해 본 지금까지의 자료를 통해서 보면) 그 기간 동안 걸으셨네요. 유대의 날짜는 오후 3시를 관습에 따라서 하루를 시작하는 저녁의 시작이라고 보고 오후 6시를 저녁의 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점심 식사 후에 명파 초등학교를 출발했다고 보면 유대 날짜의 계산으로 보면 10일이 되네요.


2) 의미적으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임진각’까지 도착했을 때 많은 교훈을 얻으신 것을 교역자회의를 마치고 듣고 싶었지만 많은 것을 전해 듣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날씨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300km가 넘는 거리를 걸으시면서 많은 싸움을 하셨을 텐데 그 싸움에서 승리한 교훈을 가지신 목사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목회의 여정 속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에 앞서서 십계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교훈(법도와 율례)을 받은 곳이어서 마라가 마치 임진각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쓴 물을 달게 해 주신 후에 ‘법도와 율례’(출 15:25)를 주셨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법도(호크, ‘하카크’ <새기다> : 엄중한 계명으로 십계명 1-4번째 계명에서 표현할 때 사용)는 보통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주로 사용하고(아닐 때도 있지만), 율례(미쉬파트, ‘샤파트’ <재판하다> : 인간 사이에서 재판하는 것으로 5-10번째의 계명에 사용)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주어지는 법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제가 로드맵을 받은 후에 마음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제가 목회하면서 어떤 액티비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11일간의 수고한 여정을 제가 복사하듯이 마음에 품었다가 언젠가 한 번 시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들었습니다. 힘든 과정이겠지만 출애굽을 했던 백성들을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도 고독했을 것 같은 모세를 생각하면서 한 번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임진각에 도착했을 때 목회의 전환점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제 마음에 새겨 주실 법도와 율례를 생각하고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요즘 목회의 한계라 할까요? 많이 힘들었는데 무엇인가를 다시 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걸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볼까 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언제 멈춘 것일까, 경운기를 온통 칡순이 덮고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말해주는 것이 있다. 되늦게서야 알게 되는 의미도 있다.


생각지 못하고 보낸 일정, 그러나 두 목사님의 글은 내가 걸었던 길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우연히 정한 일정이었지만 그 안에도 얼마든지 마음에 새길 나도 모르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뒤늦게 깨닫게 되는 의미들이 있다. 돌아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H. D. 소로우가 했던 말도 어렴풋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0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 http://fzari.tistory.com/956

0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0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http://fzari.com/959

0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05. 챙기지 않은 것 http://fzari.com/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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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0)


지혜의 문장을 들어야 하는 이유


문학성과 예술성을 삭제한 논리적 용어가 학술적 가치를 드높이고 학문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가 있다. 지식을 다루는 학자들의 세계다. 그 세계의 문장들은 길고 감동 없기 일쑤다. 나도 어느새 문학적인 감수성과 예술성, 그리고 상상력을 살려내지 못하여 심미성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독자가 되어 있다. 독자로서의 시간이 길어지면 저자가 되기도 하는데, 가끔 단 한 줄 문장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할까봐 두렵다. 그럼에도 이 틈바구니에서 신학적인 것에 문학성을 녹여 서로의 자양분이 된 글쓰기를 꿈꾼다. 운율과 리듬, 비례와 조화가 어우러진 구약 지혜서 문장의 숭고한 아름다움처럼.



구약 지혜서의 문장은 오랜 세월 갈고 닦여진 함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지혜의 문장은 장황한 설명문이 아니라, 예술적인 시의 언어라서 더 매력적이다. 적은 낱말의 문장으로 많은 생각을 전한다. 글은 간결하지만, 생각의 굴곡을 만드는 문장의 예술성이 마음을 동요시킨다. 특히 구약의 《잠언》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저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수집된 짧지만 격조 있는 문장들의 모음집이다. 잠언의 표제(1:1)는 저자로 보이는 솔로몬 이름이 등장하지만(10:1; 25:1), 솔로몬 이외의 다른 저자들의 글이 포함되었다. ‘지혜자들’(하카밈)이라 불리는 집단(22:17; 24:23), 그 밖에도 아굴(30:1), 르무엘 왕의 어머니 교훈(31:1)이 지혜 잠언의 원천으로 언급된다.


무엇보다 잠언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책의 머리말처럼 글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1:2-6). 압축의 극치를 보이면서 시사성이 높다.


지혜와 훈육을 알기 위함이요

명철한 말을 깨닫기 위함이요

훈육을 받기 위함이요

정의와 공의와 공평을 꽃피우기 위함이라

(1:2-3, 필자의 번역)


잠언의 목적은 지혜와 ‘훈육’을 알고 통찰력 있는 말씀을 깨닫는 데 있다(1:2). 한 마디로 앎과 깨달음을 위함이다. 《개역개정》이 ‘훈계’로 번역한 히브리말 단어 ‘무싸르’는 ‘훈육’으로 표현함이 더 좋겠다. 훈육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훈련의 과정이 두루 포함된 말이다. 권위자의 말잔치가 아니다. 구약의 성문서 전체에서 50회 사용된 이 단어는 잠언에서만 36회 사용될 정도니 책의 성격을 규정한 셈이다. 더군다나 ‘훈육’은 ‘훈련하다’, ‘단련하다’(야싸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몸과 생각의 훈련을 일컫는다. 한 마디로 ‘훈육’은 ‘삶의 훈련’이다. 삶의 훈련은 앎과 관계된 것이면서 명철한 말을 깨닫는 것과 통한다. 그러하니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삶의 과정 안에서 터득하게 된다.


그럼에도 잠언의 목적은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분별하고 체득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잠언의 둘째 목적은 ‘정의’(쩨덱), ‘공의’(미쉬파트), ‘공평’(미샤림)을 꽃피우는 삶이어야 한다(1:3). 이것은 삶의 도리를 익혀 배양해야 할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이다. 그 목적이 ‘정의(rightness), 공의(justice), 공평(equity)’을 꽃피우는 삶이어서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법적이며 사회 공동체적인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잠언의 목적과 함께 지혜의 가르침을 들어야할 일차적인 대상은 젊은이와 어수룩한 자들이다.


어수룩한 자들에게 노련함을 주고,

젊은이에게 지식과 신중함을 주기 위함이다

(1:4, 필자의 번역).


히브리 시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오롯한 평행구문에서, ‘어수룩한 자들’(페타임)과 ‘젊은이’(나아르)는 동일시된다. ‘젊은이’는 아직 미숙하고 풋내 나는 청춘들로서 결혼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고대인들 눈에 젊은이는 경험이 부족하여 어수룩하다. 때문에 잠언 곳곳에서 젊은이들은 어수룩한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잠언을 읽어야할 독자는 단지 젊은이였나? 아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1:5, 개역개정)


대체로 나이든 사람은 젊은이가 터득하지 못한 삶의 경험에서 삶의 기술을 발휘하곤 한다. 이것은 나이든 사람의 이점이지만, 경험적 지혜를 의지하여 배움의 열정은 시들해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명철한 사람은 타인의 조언을 듣고 배움을 더해간다. 한 마디로,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경험적 지혜에 머무르지 않고 ‘들음’을 중히 여겨 거기서 “지략”을 얻는다. “지략”(타흐불로트)은 어렵고 독특한 말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방향을 잡는 기술 또는 지혜로운 조언이다. 그러니까 지략은 미숙하고 서툰 솜씨가 아니라 복잡 미묘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선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인 삶이나 지혜로움으로 잘 다듬어져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통찰이다. 그러하니 지혜로운 자는 들음의 중요성을 알기에 들음에서 신중함을 배우고 삶의 복잡 미묘한 기술까지 터득한다.



마지막으로 잠언의 목적은 “잠언과 비유,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개역개정)을 깨닫기 위함이다(1:6). 이 간결한 문장에서 잠언과 지혜자들의 말의 성격이 드러난다. 지혜자들이 생산한 짧은 문장은 오랜 세월동안 닦여진 농축된 언어다. 그 형태는 대체로 ‘풍자’와 ‘수수께끼’였던 셈인데, 구약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단어가 “비유”(개역개정, 새번역)로 번역되었다. 좀 더 정확한 히브리적인 표현을 하자면, ‘풍자’다. 풍자는 어떤 사안을 두고 빗대어서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하는 말이다. “오묘한 말”(또는 “심오한 뜻”, 새번역) 역시 희귀한 말이다. 일종의 “수수께끼”인데, “당황스러운 질문”, “불가사의한 질문”을 뜻한다. 그러니까 잠언의 목적이 당황스럽고, 불가사의한 질문을 깨닫기 위함이니 실로 인생은 수수께끼 같은 난제로 가득하다는 말로 들린다.


이처럼 잠언의 머리말(1:2-6)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와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잠언의 가치와 목적을 밝혀 지혜의 가르침을 듣도록 초청하는 부름이다. 이 부름은 들음을 통한 젊은이의 품성 교육을 위함이다. 또한 도덕성과 통찰력을 얻는 훈련이요,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지혜자의 말과 글을 깨닫고 해석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하여 고대 지혜자들의 간결한 문장들을 엮은 잠언은 수수께끼 같고 불가사의한 삶을 어떤 방향에 맞추어 살 것인가 안내하는 가르침이다.


고대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의 배움은 인격을 다듬는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갖가지 자격증과 높은 시험점수를 획득하여 경제 논리에 만족시키는 시장의 원리에 충실하다. 얼마짜리 인간을 만드느냐에 혈안이 된 교육은 학벌과 돈을 숭배하는 사회와 통한다. 우리의 배움이 구약의 잠언처럼 삶의 난제를 풀어가는 통찰력과 덕성을 키우는 삶의 훈련이면 얼마나 좋을까. 창조자이며 구속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대 지혜자의 잘 다듬어진 간결한 한 줄 문장이 읽는 이의 삶을 충만하고 아름답게 조율하듯, 우리의 배움이 구약 잠언의 목적과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옛적 말씀이 낡아보여도 그 맛은 나날이 새로우니.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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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5)


혼자 드린 예배


걷는 기도의 일정이 열하루였으니 도중에 주일이 한 번 들어 있었다. 떠나기 전부터 고민이 되었다. 주일이 되면 걷기를 멈추고 교회로 돌아와 예배를 드려야 할까, 그런 뒤에 다시 걷기를 이어거야 할까, 아니면 계속 걸을까…, 그러다가 결정을 내렸다. 계속 걷기로 했다. 주일 예배 설교를 부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래도 되는지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걱정할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또 하나 이어지는 고민, 그렇다면 걷다가 만나게 되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러다가 그것도 결정을 내렸다. 그것 또한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혼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일정을 보니 주일을 맞게 되는 곳은 화천이었다. 화천은 친구 목사가 오랫동안 목회를 한 곳으로 아는 후배 목사들이 있는 지역이었다. 잘 알고 있는 장로님들도 몇 분 있는 곳이기도 했다. 불쑥 예배 시간에 맞춰 한 교회를 찾아들어가 예배를 드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내 그건 아니겠다 싶었다.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그날 관심의 중심은 내가 되고 말 터였다.


길을 걷다가 만난 주일, 조용한 계곡에서 혼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돌아보니 혼자서 드린 예배가 아니었다.


화천을 떠나 다목리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새 아침 7시, 성지교회에서 1부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함께 마음을 모았다. 9시 즈음엔 2부 예배를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교우들의 모습이며 찬양대의 모습이며 주일에 만날 수 있는 모습들이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던 중 11시가 가까워졌다. 이왕이면 섬기는 교회의 예배 시간과 비슷한 시간에 예배하고 싶었다.


혼자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걷고 있는 도로 옆으로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었는데, 때마침 계곡으로 향하는 포장된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예사롭지 않은 오토바이에 교통경찰을 떠올리게 하는 멋스러운 옷차림, 한눈에 보기에도 오토바이 즐겨 타는 사람이다 싶었다.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파주에서 떠나 화천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훌쩍 길을 나선다고 했다. 표정에서 묻어나는 여유,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다 싶었다.


내 일정을 듣더니 대단한 결정을 했다며 마치 자기의 일처럼 좋아라 한다. 오토바이와 도보, 방법은 달라도 모두가 길을 가는 사람들, 잠깐 사이에도 왠지 모를 동류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다. 믿음과 사역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서 동류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야기를 나눈 뒤 길을 떠나는 그분께 조심해서 가시라 인사를 하며 “이 오토바이를 얻어 타면 제 목적지 파주 임진각까지 금방 갈 텐데요.” 했더니 “정말 그러네요. 그럴래요?” 하면서 호탕한 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두두두두둥…”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가 낮고 묵직하면서도 듬직했다.


새들과 계곡물이 찬송을 했고 나무들이 기도를 했다. 

뜻밖에도 축도는 바람이 맡았는데, 더없이 은혜로웠다.


가까운 곳 나무 그늘 아래 바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마음을 모은다. 혼자 드리는 예배는 얼마만인가.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드린다. 어딘지도 모르는 계곡에서 혼자 드리는 예배, 가만히 눈을 감자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도 있었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있었다.


이어 찬송 시간, 누가 찬송을 할까 할 때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는 또 다른 새소리로 이어졌다. 바로 앞 물소리도 화답을 했다. 아름다운 조화로 이루어진 훌륭한 찬송이 한참 이어졌다.


다음은 기도 시간, 누구든 기도를 하렴, 하며 눈을 감았다. 나무가 기도를 했다. 나는 오직 나일뿐입니다, 내가 선 자리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나무 다른 자리 다른 높이 부러워하지 말게 하시고 다만 내 잎과 꽃과 열매를 피워내게 하소서, 어떤 폭풍우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뿌리 깊게 내리게 하소서, 나무의 기도가 이어졌다.


다음은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가데스바네아를 생각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곳,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초입,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걸음을 되돌리고 만다. 가나안 정탐으로 인해 불거진 불순종이 그들의 걸음을 되돌리게 했다.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과 그 소리를 듣고 밤새도록 울부짖었던 백성들, 가데스바네아는 복과 화를 가르는 극명한 분기점이다.


예배 후 성찬처럼 먹은 호두과자. 

누군가의 정이 누군가에게는 성찬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아찔한 분기점에 선다. 그곳에서 어떤 이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복을 등진 채 광야로 돌아선다.


마지막 축도 시간, 눈을 감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한 바람이 계곡을 따라 불어왔다. ‘바람’은 ‘성령’과 같은 단어, 몸도 마음도 바람에 내맡겼다. 꼭 필요한 손길이 온 몸과 맘을 부드럽게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예배를 마치고는 성찬을 나누듯 호두과자 몇 알을 먹었다. 전날 화천을 찾아와 저녁을 든든하게 사 준 이 장로님이 사 온 과자였다.


조용한 계곡에서 혼자 드린 예배는 참으로 호젓하고 평온했다. 마음속 지문처럼 남을 드문 예배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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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4)


거미의 유머


익살스러운 농담이나 해학(諧謔)을 뜻하는 ‘유머’는 막혔던 숨을 탁 터뜨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싶다. 마치 물속에 잠겨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던 이가 물 밖으로 나오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그런 순간처럼 말이다.


답답하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지는 것과도 같아서 내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단번에 이해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도무지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을 웃음으로 긍정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수피령은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걸음을 이어가야 했다.


한 유머 강사는 그의 책에서 ‘당신은 테러리스트인가, 유머리스트인가?’를 묻고 있는데, 그의 질문에 의하면 유머리스트의 반대말은 재미없는 사람이나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맞겠다 싶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 실수로 선서를 잘못하는 바람에 취임식이 끝난 뒤 백악관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서를 다시 했는데, 그 때 오바마는 선서를 다시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한 번 하기로 했습니다.”


그만한 여유와 유머가 있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갔지 싶기도 하다.


열하루 동안 길을 걷다가 만난 거미의 유머가 있다. 화천을 떠나 철원으로 향할 때였다. 화천과 철원이 강원도에 있는 것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한 가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화천과 철원 사이에는 뭔가 다른 이름을 가진 어떤 지역이 자리를 잡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었다.


마침내 수피령 정상이 보인다. 정상이란 무릇 인내와 인내가 합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화천과 철원은 고개 하나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화천 다목리에서 수피령 고개를 넘으니 바로 철원 땅이었다. 물론 수피령 고개는 걸어서 쉽게 넘을 고개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고통을 내내 참으며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앞뒤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외진 길을 한참을 걸어가다가 도로 곁에 있는 밭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 외진 곳도 누군가 땅을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 보니 밭 가장자리엔 말뚝이 나란히 박혀 있었고 말뚝에는 전선이 묶여 있었다. 전기가 흐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먹을 것을 찾아 밭으로 내려오는 산짐승들을 쫓기 위한 전깃줄이다 싶었다.


우리 땅에 살면서 우리글을 모르는 짐승들만 놀라 뒷걸음질을 치겠구나 싶을 때였다. 밭이 끝나는 자리에 마지막 말뚝이 섰고 전선들도 그곳에서 멈춰 섰는데, 마지막 말뚝과 그 옆에 서 있는 자작나무 사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선들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유심히 바라보니 거미줄이었다. 마치 마지막 말뚝에서 멈춘 전선을 슬며시 잇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를 먹든 다 같이 나눠 먹지 전깃줄이 다 뭐래요, 어디선가 숨어 슬며시 건네는 거미의 유머에 피식 웃음이 났고, 수피령 험한 고개가 문득 너그럽게 여겨졌다.


크지 않은 나라, 그런데도 화천과 철원이 고개 하나로 어깨를 걸고 있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매주 <드문 손길>이라는 주보를 만든다. 우리 손 잡아주신 주님의 손이 흔한 손 아니었듯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내미는 손이 흔한 손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보 이름을 <드문 손길>이라 정했다.


주보 표지에는 짤막한 글 하나씩을 싣는다. 차 한 잔 마시듯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신앙을 일반 언어로 바꾸는 노력이기도 하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와 주보 표지에 ‘거미의 유머’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유머를 유머로 받았으면!


화천과 철원은 같은 강원도라 해도

설마 고개 하나로 이웃인 줄은 몰랐는데

수피령은 결코 만만한 어깨가 아니어서

함부로 걸어 넘을 고개가 아니었다

앞뒤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르마 같은 길을 걷다 만난 길가 밭 가장자리엔

박아 놓은 말뚝을 따라 전깃줄이 내달리고

전기가 흐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문

우리 땅에 살면서 우리글을 모르는 짐승들만

기겁하듯 뒷걸음질을 치겠구나 싶을 때

밭이 끝나는 자리 마지막 말뚝에 이르러

전선도 달리기를 멈췄는데

마지막 말뚝과 곁에 선 자작나무 사이

빛나는 선들이 아침햇살에 그네를 탄다

저게 뭘까 유심히 바라보니

멈춰선 전선을 잇듯 거미가 친 거미줄이었는데

얼마를 먹든 나눠먹지 웬 욕심이래요

어딘가 숨어 슬며시 건네는 거미의 유머에

수피령 가파른 고개가 문득 너그럽지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목사


0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 http://fzari.tistory.com/956

0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0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http://fzari.com/959

0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05. 챙기지 않은 것 http://fzari.com/961

06.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http://fzari.com/964

07.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 http://fzari.com/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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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길을 잘 일러주는 사람 http://fzari.com/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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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9)


거기 영원히 서있는 땅의 사람이여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은 시작과 끝이라는 양극성을 품고 있다. 전도서 저자 코헬렛(전도자)은 일찍이 자연세계의 순환하는 질서와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서(전도서 1:4-11) 양극의 운동을 살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양극 사이를 끝없이 오가지만 언젠가 그 끝이 존재함을 인식했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아닌가. 코헬렛은 우주와 인류 역사의 종말을(12:1-8) 내다보면서도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길과 새로울 것 없는 인류 역사의 흐름을 살펴 땅에 속한 사람이 어떠해야함을 깨우치게 했다. 그 방식은 선동적인 설득으로 굴복시키고야마는 연설이나 주입식 설교조의 말도 아니다. 간결해서 아름다운 시의 언어다.


코헬렛은 ‘해 아래’ 일어난 온갖 수고로운 일들을 조목조목 말하기 전에 자기 눈에 비친 자연현상을 시로 읊었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여전히 그대로 서있다.

해가 떠나고

해가 오지만

해는 떠났던 그곳으로 숨 가쁘게 가서

해는 거기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돌아간다.

바람은 돌고 돌아가지만

바람은 돌았던 그곳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고

강물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

거기서 돌아 흘러간다.

(전도서1:4-7, 필자의 번역)


한 세대가 가고 오는 것처럼, 해도 떠나가고 온다. 바람도 강물도 가고 온다. 코헬렛은 자연의 운동을 묘사하며 마치 푸른 지구 밖에서 자연계의 운동을 내려다본 사람처럼 간명하게 말한다. 그가 사람의 죽음을 ‘가는’ 것으로(3:20; 6:6, 9; 7:2;9:10; 12:5), 출생을 ‘오는’ 것으로(6:4) 말하듯, 자연의 세계도 가고 온다. 자연과 인간이 구별 없이 가고 오는 운동을 반복한다. 한 사람이 가면 다른 사람이 오듯,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온다.



그러나 가고 오는 인간 역사는 오묘한 역설을 품었다.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지만, 고유한 한 사람 한 사람은 한 번 가면 그뿐이다. 그런데 ‘땅은 언제나 그대로 서 있다’(1:4). 땅의 영원성과 인간의 일시성이 교차한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과 영원히 서있는 땅이 조우하면서 일시적인 사람의 한계성이 도드라진다.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가 남긴 말을 떠올려 본다. 


“세계가 시작하였을 때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고 세계가 끝날 때에도 인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와 인간을 보는 인류학자의 눈에 인류는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대를 통과하는 존재일 뿐이다.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가는 위대한 인류도 자연의 일부분인 셈이다. 자연은 사람 없이 존재하지만, 사람은 자연 없이 살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사람에게 생존을 위한 안전한 공간으로 존재한다.


코헬렛은 자연세계의 가고 오는 반복적인 운동에 마음을 두었다. 왜일까.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운동은 지루하게 반복하는 무의미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자연계의 반복 운동과 놀라운 규칙성에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자연계의 반복운동이 멈추는 순간을 생각해 보았는가? 만약 우주와 푸른 지구의 반복 운동이 멈춘다면, 온 세상은 혼돈 그 자체다.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흘러 바다를 돌아 다시 강으로 흐르는 단조로운 운동이(1:4-7) 멈춘다면, 인류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우주와 자연의 순환 운동은 사람에게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질서다. 그 질서가 사람에게 복이다. 하여 사람이 날마다 해를 보며 맞이하는 아침은 환희의 조건이요, 최고의 선물 아닌가.


해와 바람과 강물과 바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 책임을 다하니, 사람은 그 규칙적인 운동에서 창조자의 호흡과 손길을 느낀다. 사람은 피조세계에 깃든 반복 운동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 질서를 인식하고 맛본다. ‘땅이 그대로 있는’(1:4) 한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8:22). 이것은 피조세계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오늘도 피조세계의 운동과 질서를 조정하시는 창조자의 손길을 느낀다. 때문에 규칙적인 자연의 운동과 질서를 인식한 ‘사람’(human)은 자신이 ‘흙’(humus)에 기반을 두었기에(창세기2:6)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 ‘겸손’(humility)의 미덕을 실행할 테다. 사람이 물과 바람과 강물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온갖 기술과 능력을 뽐내며 관리한다한들, 사람은 ‘영원히 서있는 땅’(1:4)에 속한 존재 아니던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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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3)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깊은 산중으로 이어지는 길, 걸어도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 외진 곳에 가게가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고, 물 없이 길을 나선 나는 점점 심해지는 목마름을 어렵게 견뎌내야 했다. 원래 사람이 없는 곳인지, 날이 무더워 밖으로 나오지를 않은 것인지 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울 수가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정 안 되면 계곡물이라도 마셔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내 사람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길가 밭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외진 곳에서, 목이 말라 고통스러울 때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물 좀 마실 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나는 “안녕하세요!”나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보다도 물 얘기를 먼저 한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하던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얼른 일손을 멈추고는 얼마든지 오라며 손으로 나를 불렀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허름한 농막이었다. 얼기설기 몇 개의 기둥이 서 있고 비닐과 천막으로 하늘과 벽을 가려 볕과 비를 겨우 가릴 수 있겠다 싶은 그곳에는 몇 개의 살림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산에서 떠온 물이라 뭐가 좀 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물은 좋은 물이예요.”


긴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인데 어찌 달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염치도 없이 필시 산에서 어렵게 떠왔을 그 물을 서너 컵 연이어 받아 마셨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시듯이 고마운 마음으로 물을 마셨고, 물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목마름의 맨 밑바닥부터 채워오기를 시작했다. 시들어가던 식물이 물을 먹고 되살아나듯이 긴 목마름 끝에 물을 마시자 생기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어서,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못한 만남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연배가 비슷한 그 이가 왜 깊은 산중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를 들었고, 그는 내가 왜 먼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서 들었다.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며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이 아쉬웠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무한정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배낭을 메고 농막 밖으로 나올 때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엇 하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목사라는 것을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알릴 일도 아니다 싶어 말하지 않은 터였다.


“저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어쩐지, 느낌이 남달랐어요.”


궁금하긴 했지만 남달랐다는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따로 묻지는 않았다. 목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 마디를 했다.


“실은 저도 이곳에 들어올 때 성경책 한 권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틈틈이 읽고 있고요.”


걸음을 멈추고 더 많은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순간적으로 지났지만, 그곳 주소와 그분 이름을 수첩에 적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시 한 번 뜻밖의 만남이 주어져 심중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시간이 은총처럼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낯선 길을 걷다보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보였다. 저 많은 벌통을 두고 어디로 간 것인지 주인은 보이지를 않았다.


폭염주의보는 거의 날마다 날아왔다. 날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한결같은 내용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야외활동이 아니라 실내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아재개그를 건네며 불볕더위가 주는 고통과 염려를 물리고는 했다.


지친 이에게는 작은 고개 하나를 넘는 것도 벅찬 일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하며 파포(巴浦)와 봉오(峰吾)를 지나 그날의 목적지인 다목리를 향해 걸었다. 다목리는 작가 이외수 씨가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곳이다. 젊은 시절 그의 글을 눈여겨 읽기도 했으니 얼마든지 이외수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좋겠다 싶었지만, 그보다는 ‘다목리’가 왜 ‘多木里’가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다목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다목초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사람을 찾았지만 역시 보이지를 않았다. 가다보면 사람을 만나든지, 아니면 표지판을 만나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길가 둔덕 위에 자리 잡은 동네 노인정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노인정 옆 정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길을 물었다. 길을 가르쳐주던 그가 거기 서서 그러지 말고 올라와서 물이나 한 잔 하고 가라며 권했다. 쉬지 않고 내처 걸었더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시간의 여유도 있어 정자 위로 올라갔다.


허름하고 편안한 옷차림을 한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심마니였다. 혼자 깊은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심마니, 심마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주로 그가 이야기를 했고 나는 들었지만 이야기는 재미도 있었고 유익하기도 했다. 전혀 모르는 세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2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이 있다. <교차로>라는 생활정보지 ‘아름다운 사회’란에 매주 한 편씩 칼럼을 쓴다. 전국 길가에 꽂혀 누구라도 꺼내보는 정보지, 세상과 신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캐나다로 이민을 간, 우리 아이들 어릴 적 피아노 레슨을 한 선생님이 그곳에서 우연히 칼럼을 읽게 되었다면서 전화를 한 일도 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야 하는 일, 그 일을 22년째 이어오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아찔하다. 무엇보다도 미련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싶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와 칼럼을 쓰며 심마니 이야기를 썼다. 얼마든지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심마니의 자존심’은 교차로 칼럼으로 썼던 글이다.


심마니의 자존심


그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DMZ 인근마을을 따라 혼자 걷기 위해 나선 열하루의 길, 이레째 되는 날의 목적지는 화천 다목리였습니다. 작가 이외수 씨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동네였지요.


날이 얼마나 뜨거운지 벌써 며칠 째 국민안전처에서 폭염주의 경보를 보내오고 있었습니다. 날이 너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삼가라는 경보 문자였습니다. 날이 뜨거운 것이야 길을 걸어보니 알겠는데, 그 정도가 야외활동을 삼가야 할 수준이라는 것을 경보문자는 확인시켜 주었는데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열하루 동안 걸어갈 길이 정해져 있기도 했거니와, 걷기 시작한 지 둘째 날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한 것도 적잖은 이유가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던 진부령을 걸어서 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경험하고 나니 어떤 악천후도 이겨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다목리로 가는 오후, 이글거리는 땡볕 때문인지 한참을 걸어도 밭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보이질 않았습니다. 길을 물으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데 아무도 보이질 않으니 내심 당황스러웠는데, 그를 만난 것은 그렇게 길을 물을 사람을 찾던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길가 옆 정자에 앉아 있어 길을 물었더니, 길만 묻지 말고 올라와서 물 한 잔이라도 하고 가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꺼이 정자 위로 올라갔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처음 만난 사이, 하지만 이야기는 시간을 잊고 이어졌습니다. 마침 다목리도 멀지 않았고, 예정보다는 여유 있게 온 것이어서 마음도 편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심마니라 소개를 했습니다. 혼자서 산을 다니며 산삼을 캐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만 들었지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산에서 그 중 위험한 것이 멧돼지나 뱀보다도 벌이라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계곡에 들며 막대기로 나무를 쳐서 탁 탁 소리를 내면 멧돼지나 뱀은 자리를 피한답니다. 그러나 잘못 벌집을 건드려 쏘이면 그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삼 씨에 대한 이야기도 귀했습니다. 산에서 만나는 산삼은 오래 전 누군가가 씨를 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새에 의해 삼이 자라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는 것이지요. 그걸 잘 알기에 자신도 기회가 될 때마다 누군지 모르는 이를 위해 삼 씨를 심는다고 했습니다.


그 날 나눈 이야기 중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그가 지키고 있는 자존심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좋은 삼을 구해서 팔면 전문가들도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 누군가를 속이면 큰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몇 뿌리가 되었든 자신이 캔 삼을 정직한 값에 팔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아껴 키운 멋진 삼을 만나기를 바란다는, 헤어지며 전한 인사 속에는 그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다 담겼답니다. -‘아름다운 사회’ (2017년 7월 12일)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의 하나는 뜻밖의 만남이 허락된다는 것임을 배운 날이었다. 농막에서 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나 정자에 앉아 심마니와 나눈 이야기는 분명 내 마음속 빛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맞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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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0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http://fzari.com/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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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챙기지 않은 것 http://fzari.com/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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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 http://fzari.tistory.com/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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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2)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


단순한 실수가 중요한 실수가 될 때가 있다. 가볍고 단순하다 싶어도 실수의 결과가 치명적인 것들이 있다. 그 날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화천에서의 숙소는 생각지 못한 곳으로 정해졌다. 화천읍내에 도착을 해서 보니 거리마다 군인들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군인들끼리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면회를 온 애인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들이 흔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무슨 큰 훈련을 마친 뒤여서 그렇게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외박을 나온 것이라 했다. 


거리만이 아니었다. 후배 목사를 만나기 위해 잠깐 찻집에 들렀을 때, 찻집 안을 가득 채운 것도 군인들이었다. 애인과 마주앉아, 아니면 옆자리에 앉아 마음에만 두었던 이야기와 쟁여둔 그리움을 풀어내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면회를 온 여자 친구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보다는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모습이 더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졌다. 어디에 앉느냐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게 하는구나!


화천에는 그냥 지나가면 서운해 할 이들이 몇 명 있지만,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었다. 주일을 앞둔 토요일이어서 행여 그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를 따로 만나는 것은 조심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많은 군인들로 화천 인근의 숙박업소가 이미 꽉 찼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길가 철물점 주인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런 일을 자주 경험을 하는 것인지, 화천읍내 인근의 숙소가 다 찼다는 말을 하면서도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투였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새삼스러웠다.


할 수 없이 후배 이 목사에게 전화를 했고, 얼마 후 이 목사를 찻집에서 만났다. 이 목사는 내 전화를 받고는 교우가 하는 숙소에 연락을 했고, 마침 빈 방이 있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두 가지 점에서 다행이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숙소가 정해져서 다행이었다. 없는 숙소를 찾으려면 그 또한 많은 시간과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우가 하는 숙소가 다음날 가야 할 길 쪽에 있다는 점이었다. 지치고 피곤했기 때문일까, 걸어가야 할 길을 차로 대신할 마음은 없었지만 막상 숙소가 그렇게 정해지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제법 터가 넓은 <시아네 펜션>은 깨끗했고 조용했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도 누렸다. 무엇보다도 숙소 앞 개울에 다슬기가 많고 덕분에 반딧불이도 많이 볼 수 있다는 말이 반가웠다. 
<시아>는 손녀 이름이라 했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 그 하나만으로도 물씬 느껴진다. <시아네>는 <詩안에>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묵었던 시아네 펜션.
집 앞 개울에 다슬기가 많고 덕분에 반딧불이가 많다는 말이 반가웠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길을 떠나며 물을 챙기지 못했다. 물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길을 가다가 가게를 만나면 물을 사야지 했던 것이었다. 늘 그렇게 다녔으니 그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문제였다.


가도 가도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외지고 한적한 길, 가게가 나타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이 없다는 것을 알자 괜히 목이 더 마른 것 같았다. 한 번 목이 마르다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자꾸 침을 삼키게 되었고, 목마름은 더욱 심해졌다.

 

길을 걷다가 만난 버스 정류장.
버스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지만 버스 정류장은 혼자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목마름이 엄살만은 아닌 것이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된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금방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게는 아니더라도 동네가 나타나면 물을 얻어 마셔야지 했지만 동네도 보이질 않았고, 모처럼 만난 동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누구 한 사람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집이나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물을 달라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도 그렇지만, 목마름을 참으며 길을 걷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 단순한 일, 왜 물을 챙기지 못했을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


먼 길을 걸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겨야 했던 날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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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8)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


사물을 판단하는 가장 우선적인 신체기관은 눈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자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혜 탐색도 먼저 눈에서 시작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지혜의 자리로 알려진 ‘마음’의 눈은 사물과 사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다. 코헬렛(전도자)이 그러했다. 그는 덧없는 날을 살면서 ‘해 아래’ 일어나는 온갖 일을 살펴보고 “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게다가 그의 지혜의 말들은 학술적인 논리어가 아니고 일상의 언어다. 그 말들의 자유로운 어울림은 독자로 하여금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무엇보다 그는 ‘개념의 감옥’에 갇혀있지 않아 지혜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그는 자유롭다. 그 내공과 자유로움은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전도서 7:16)는 말에서 드러난다.

 


코헬렛은 지혜가 한계에 봉착하는 현실과 정의가 한계에 직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발설한다. 그는 그의 말처럼 ‘덧없는’ 날을 사는 동안 보고 느낀 불편한 현실과 진실 말하기에 숨김이 없다. 솔직하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도서 7:15, 개역개정).


우리는 의로움과 악행에 따른 상벌을 기대하지만, 삶은 자주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질서와 순리를 거스르는 모순과 역설로 얽혀있다. 시편의 시인들도 코헬렛처럼 불편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발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전도서 7:12-13, 개역개정).


나는 고대 히브리 시인과 지혜자의 언어에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그들은 삶의 모순을 보고 자유롭게 말했다. 때로는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하다. 그러하여 희망과 현실의 괴리를 과감하게 말하는 그들의 언어는 참신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순에 찬 현실에서 희망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편 37:1-2, 개역개정).


이처럼 구약 지혜 전통의 가르침과 믿음에서 하나님의 복은 의로운 자들을, 저주는 악한 자들을 향해 있다. 이것이 지혜 가르침의 보편화된 공리다. 그러나 코헬렛은 지혜전통을 수렴하고 유지하되 보는 눈과 생각의 결이 조금 남달랐다. 인간의 지혜도 의로움도 완벽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지혜의 반성적 성찰이 시작된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했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했다(7:23)라는 고백과 함께 지혜는 너무 멀고, 깊어 누가 그것을 발견하겠는가?(7:24) 말했던 것처럼, 결정적으로 지혜 자체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이듯(욥기 28:12-13), 그는 지나치게 지혜로운 것과 지나치게 의로운 것을 경계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도서 7:16, 개역개정).


지나친 악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7:17). 그것이 무엇이든 ‘지나침’은 위험하다. 때문에 그는 지혜로움과 의로움의 과잉을 문제 삼았다. 과잉, 곧 ‘지나침’은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이 자각은 과도한 자기 확신을 피할 수 있다. 의롭지 말라거나 지혜롭지 말라는 조언이 아니다. 의로움의 자만심을 피하라는 뜻이다. 그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7:18, 새번역)라고 말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양 극단을 피한다(7:18)라고 했는데, 지나친 의로움과 지혜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의로움과 지혜가 모자란 것도 문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명문장이 통용되긴 하지만, 코헬렛의 ‘지나침’을 경계하는 교훈이 동양 철학의 ‘중용’과 비슷하다. 중용은 중간적인 입장이나 중간 지대가 아니다. 가치판단을 삭제한 기계적인 혹은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이다. 양비론이 아니다.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참된 마음과 태도다.


동양의 사상가 순자(기원전 298-238)의 말에 따르면, 중용은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리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중용의 철학’도 비슷하다. 중용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극단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동서양의 고전 철학이 모두 ‘지나침’을 멀리하는 절제와 넘나듦의 삶, 그리고 바른 마음을 추구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악에서 멀리하라(잠언 4:27)는 지혜 교훈 역시 지나침과 모자람을 경계한다. 코헬렛은 일찍이 모든 것의 ‘덧없음’(헤벨)을 발설하며 ‘해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자각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적절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았다. 때문에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을 자랑하거나 빛내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맑고 깨끗한 체하며 도도하게 행동하지 말고, 분별하여 포용하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리라. 코헬렛이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7:20, 새번역)라고 말한 이유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욥 역시 “죽을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는가?”(욥기 9:1)라고 말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후, 사도 바울이 욥과 코헬렛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했던 것일까. 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는 것은 ‘지나침’이 가져올 자기 자랑과 그 위험을 자각한 균형 감각이요, 절제와 넘나듦의 자유를 표방한 가르침이다.


김순영/《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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