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말아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인 줄 몰랐습니다. 

밑 빠진 둑에 물 붓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탓이 어디 있다고 보느냐?” 


“그야, 있다면 저한테 있겠지요.” 


“옳은 말이다만, 정직한 대답은 아니구나.” 


“……” 


“탓이 너한테 있다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네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밑 빠진 독 같아서 그래서 힘들다는 얘기 아니냐?” 


“그렇군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사랑받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탓’이 너한테 있다는 말이 옳다고 한 것이다.”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잘못한 것 없다.” 


“그런데 왜 이토록 힘들지요?” 


“너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했다. 그걸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니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이 힘든 것이다.”

“예?” 


 “사랑은 누가 누구에게 주거나 누가 누구한테서 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주고받으며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그런 사랑을 누구에게 주고 또 받으려 하니, 그것은 마치 사람이 땅을 어깨에 메고 다니려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거늘, 어찌 힘들지 않겠느냐? 하면 할수록 힘들 것이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루아침에 사랑을 깨칠 수 있겠느냐? 조급하게 굴지 말아라, 지금 잘하고 있다.” 


“……” 


“봄이 되면 땅이 새싹을 땅거죽 위로 밀어올리느냐?” 


“그건 아니지요. 그렇지만 땅이 없으면 어찌 새싹이 돋겠습니까?”


“사랑이 그와 같다.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이 사랑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는 하겠습니다만,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다지 않았느냐? 

하늘이 모든 것을 덮는다는 말은 그 어느 것도 바꿔놓거나 젖혀두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하늘과 같다. 

땅이 모든 것을 싣는다는 말은 그 어느 것도 싫어하거나 밀쳐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땅과 같다. 

해와 달이 모든 것을 비춘다는 말은 그 어느 것도 등지거나 외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일월과 같다.” 


“그렇지만, 분명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그를 덮어주고 실어주고 감싸주어야 합니까?” 


“전에 내가 들려준 ‘집 떠난 아들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둘째 아들이 아비의 집을 떠날 때 아버지는 그의 가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또한 그의 귀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다.” 


“선생님의 집 떠난 아들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몸은 떠나 있었지만 마음은 늘 아들 곁에 있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억지로 아들을 집에 붙잡아두거나 아들을 따라서 도시로 갔다면, 그렇게 해서 아들을 자기 곁에 두거나 아들 곁에 있기를 고집했다면, 그것은 아들의 ‘출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요, 따라서 아들은 끝내 귀향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 


“지금 누가 네 눈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기억해 두거라, 그는 그렇게 ‘잘못된 길’을 갈 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버지 품 아닌 데가 없어서, 어느 누구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걷는 길은 짧게 보면 출가행(出家行) 또는 귀가행(歸家行)으로 두 길이 서로 반대 방향이지만, 그러나 길게 보면 출가는 귀가의 씨앗이요 귀가는 출가의 열매일 뿐이고 따라서 모든 길이 결국 귀로(歸路)인 것이다.” 


“……” 


“누구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냥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없이, 소리 없이, 흔적도 없이, 아무 바라는 것도 없이 그와 함께 있어라, 

거듭 말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곁에 없는 듯 있는 것이다. 

하늘이 땅을, 땅이 초목을, 일월이 만물을 대하듯이 그렇게, 아무 바라는 것 없이…” 


-이아무개 지음, 『지금도 쓸쓸하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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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현경장(解弦更張)


굳이 프랙탈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는 우리의 일생을 닮게 마련이다. 인생은 오늘의 점철이라지 않던가?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얼굴 하나 보러 왔지,/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우리 삶이지.” 요즘 들어 함석헌 선생의 시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삶이 부박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만히 앉아 살아오는 동안 마주쳤던 그 많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맑고 고운 얼굴, 따뜻하고 고요한 얼굴, 수심 가득한 얼굴, 비굴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독기 어린 얼굴…. 그러다가 문득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아뜩해진다. 누구나 한번쯤은 길을 걷다가 창문에 얼비친 자기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던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설명한 분도 계시지만, 우리 얼굴은 정확하게 우리 내면을 반영한다. 옛날 초상화가들은 대상의 외모만 그린 게 아니라, 그들의 내면의 풍경까지도 그리려 했다 한다. 전신사조(傳神寫照)가 그것이다.


말이 장황해졌지만 내게도 아름다운 얼굴이 한 분 계시다. 민영진 박사님(이하 민영진)이다. 20대 초반에 만나 60대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 얼굴은 내게 시종 맑고 환하게 기억된다. 민영진은 학문의 즐거움과 엄정함을 가르치면서도, 학생들로부터도 배우려는 태도를 시종 견지하신다. 그런 학생 정신이야말로 그 얼굴에 깃든 맑음의 뿌리인지도 모르겠다.


몰강스러운 세태조차 민영진을 후락(朽落)의 자리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어지간하면 열정 따위는 시드럭부드럭 스러질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과 표현의 욕구는 줄어들지 않으신 듯하다. 성서신학자와 성경번역자로 살아오는 동안 누구보다도 언어에 예민하였기에, 그 여정이 시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시인들은 일상적인 언어를 재배치하여 놀라운 이미지와 의미의 세계를 드러낸다. 언어의 올가미로 영원을 잡아채는 것, 바로 그것이 시적 순간이다.


민영진의 시는 과잉을 모른다. 놀랍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심상에 떠오르는 것들을 관념으로 비틀거나 베일로 가리지 않고 직정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고 하여 나이브하지 않다. 그 언어는 정갈하고 고요하다. 성품이 시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에게 시는 삶의 진실과 진정을 드러내는 통로이고, 삶은 시의 자양분이 된다. 지금 민영진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과 일상의 성스러움, 성경, 언어 등이다.




민영진의 삶은 아내인 김명현과 함께 빚어온 작품이다. 그에게 아내는 “하나님의 숨/흙에 닿아 한 점 혈육/우주 바꾸고 몸 바꾸어”(<만물의 어머니> 중에서) 나타난 존재이다. 함께 걸어온 긴 세월을 민영진은 기꺼움과 고마움으로 돌아본다. 유학생활 중에 잃었던 태중의 아기에 대한 기억과 슬픔이 그 둘을 든든하게 이어주는 정서적 밑절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일어날 법한 소소한 일상을 엿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것은 그 속에 담긴 따스한 정과 유머 때문이다. 깔끔한 아내와 털털한 남편, 추위 타는 남편과 더위가 싫은 아내, 사랑의 표현을 갈구하는 아내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남편은 늘 티격태격한다. 손톱 발톱을 깎다가 궤도를 이탈한 녀석 때문에 방청소를 하던 아내에게 지청구를 듣고, 한밤중에 소변을 보고 변기 깔개를 내려놓지 않았다가 타박을 당할 때면 남편은 애꿎은 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여보, 당신도 알지 그 친구,

거 왜 가끔 그 모임에 나오는 그 키 큰 친구

요즘, 손톱 발톱이 다 빠졌대

면역력 결핍증이라나 뭐라나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겠대, 멀쩡했잖아,

손톱 발톱이 없으니까

손가락도 발가락도 제 구실을 못하고

폐인(廢人) 같아 보여

- <손톱 발톱> 중에서


여보, 당신, 내 친구 김 아무개 알지?

비만이라고 걱정하던

그 친구 요즘 소변을 못 본대

터질 듯 마려운데 안 나온다나?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바지가 다 젖어있다나 뭐라더라?

- <쉬> 중에서


나이 듦의 애잔함이 능청스러움과 버무려져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소소한 일상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장성한 자식들과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온 그 놀라운 손님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자못 따스하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신비이다. 손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한 편의 시(詩)”(<손자>)이고, 손녀는 “당신 품에 안고 있던 딸/예쁘게 키우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존재(<편지>)이다. 아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태에서 태어난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아이들아>)이다. 아이들은 생명의 신비함과 거룩함을 가리키는 징표로 우리 가운데 있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 안에서라면 늙어감조차 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회한조차 없을 수는 없다. 주어진 시간을 한껏 살아내기는 했지만, 어떤 일도 완전할 수는 없기에, 못다 한 일에 대한 회한이 그림자처럼 영혼에 드리우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성경번역자로 살아온 민영진은 맡겨진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하나님이 툭 치고 지나갈 때마다 익숙했던 모국어가 서툴러지고, 그 때문에 메시지를 적절한 언어로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청중들에게 익숙한 구문론이나 문법을 지킬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음과 하기 싫음 사이의 경계선에서 바장이다가 그는 자신이 “늘 모국어를 배반하는 설교”를 해왔다고 자책한다(<날 건드리더라>). 짐짓 해보는 겸양의 말이 아니라, 준엄한 자기 성찰에서 빚어진 말이다.


그는 “광야의 포효(咆哮)”가 되지 못하고, 볼모로 잡혀온 이후부터 “침묵한 덕분에/운 좋게도 도살만은 피했”(<볼모>)다고 말한다. 민영진은 ‘그래도 이만하면 잘 해온 것 아닌가’ 하는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엄정한 심판관이 되어 자신의 허물을 폭로한다. 그는 “번역자는/오늘도/의미의 바다를 표류한다”(<표류>)고 노래한다.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의미의 심연을 드러낼 적절한 언어를 찾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막막함을 견디며 그는 살아왔다.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떠날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산다. 인생의 마지막 날은 유예된 집행일 뿐, 그날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울 때는 울면서 왔었습니다만

돌아가는 날은

당신을 부르며 갈 것입니다

당신께서 오라 하실 때

쇠약해진 이 몸 당신 품에 안기어

깊은 잠, 푹 들게 하여 주십시오

- <새 하늘, 새 땅> 중에서


시인은 이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것들임을 절감하며 만물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 식물, 동물, 바위, 흙과의 대화를 꿈꾸는 것이다. 우주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처럼 그는 삼라만상에 빼곡히 적힌 글을 해독하고 싶어 한다(<사파리>). 그것은 인간의 오염된 언어 혹은 분절된 언어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어 너머의 언어가 필요하다. 구상 시인은 마음의 눈만 뜬다면 “어느 곳에나 신비는 충만하고/어느 곳에나 생명은 약동한다.//베란다의 봄 국화가 시든 화분에/제풀에 돋아난 애기똥풀이나/그 옆 수챗구멍 질척한 쇠그물에/오물거리는 새끼 지렁이를 보려므나!//어느 곳에나 신비는 충만하고/어느 곳에나 생명은 약동한다”고 노래했다(<마음의 눈만 뜬다면>). 민영진이 당도한 세계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에게 세계는 신비의 정원이다. 마음의 눈이 열리자 늘 밥상에 오르는 각종 나물이 희생제물임을 깨닫게 된다(<나물>). 몸 안에 들어와 우리의 몸을 이루니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나물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호명 행위를 통해 그 나물들은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라 생명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 된다. 보아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때가 되면 피어났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스러지는 야생화 역시 그 생명 세계의 일원이다. “부레옥잠화, 금낭화, 물봉선화, 모싯대 꽃, 노루귀꽃, 등(燈)꽃….” 낯설기는 해도 그 귀한 야생화가 그곳에 있기에 세상이 온전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시인은 은근한 소망을 피력한다. “구름패랭이, 꿩의비름, 말나리 꽃, 뻐국나리, 솔나리, 금꿩의 다리, 천일홍(天日紅)…/내 이름도 너희들 사이 어디쯤에 넣어볼까/다시 태어나는 날, 한번쯤은/너희들과 함께 야생초이고 싶다”(<야생화>).


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고쳐 맨다는 뜻이다. 시와 더불어 그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시작(詩作)은 그에게 다른 중요한 일들 사이에 부룩 박은 또 다른 일이 아니라, 성서신학자이자 성경번역자로 살아온 민영진의 삶의 여정 끝에 당도한 세계이다. 하이데거도 생의 말년에 시의 세계에 빠져들지 않았던가? 합리적 언어 혹은 학문적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오직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이는 신비한 세계가 그의 시를 통해 오롯이 드러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세상은 한결 풍요로워질 것이다. 상투적인 종교 언어에 식상한 이들의 눈이 민영진의 시를 통해 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 한희철/ 말씀은 다시 한 번 사람의 몸을 입고http://fzari.tistory.com/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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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1968년에 결혼한 후 5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둘만 있어도 깔깔대며 잘 웃는다. 우리 부부의 웃음 묻은 이야기를 가끔씩 이야기하면 재미있다고 글로 써서 책을 내라는 사람도 있고 나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그동안 『민영진 어록』을 발표하라고 한다. 이것이 언제 책이 출간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어 독자 여러분에게 웃음을 드리고 싶다. 우리의 이런 꾸밈없는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흠이 될지 욕이 될지도 모를 것 같아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의 삶이요 나의 사랑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냥 웃음을 선사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44년생이고 그이는 40년생이니 나는 그이보다 네 살이나 더 어리다. 결혼 후, 첫 새해를 맞아 남편은 갓 결혼한 새댁을 어른들께 인사시키고 싶었나보다. 어른들께 세배를 간다기에 치마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차려 입고 거기에 걸맞도록 머리를 위로 올리는 업스타일을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다녔다. 그이는 동안이고 날씬해서 어리게 보였고 나는 살이 통통(?)해서인지 더 늙게 보였나 보다. 택시기사가 나보고 누나냐고 묻는 게 아닌가! 난 너무 당황하고 화나고 기분이 안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에게 내가 간 빼 놓고 살아서 아마 늙어졌나보다며 이제부터는 당신이 간 빼 놓고 살라고 명령(?) 하였다. 그랬더니 그이 하는 말 “지금 누나 정도면 괜찮은 거지, 우리가 이 다음에 더 늙게 되면 제자들이 와서 “민 선생님, 어머님이 꽤 젊으시네요.” 할 때가 올 거란다. 그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그이의 머리에는 은가루가 해를 더해갈수록 자꾸 자꾸 많이 뿌려진다. 난 너무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절대 염색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은 머리가 희어갈수록 멋도 더해진다고 아주 근사하다고 속삭여준다. 바로 로맨스 그레이 그 자체라고.


그이는 한복 입기를 즐겨 해서 신정이면 두 주간을 거의 한복을 입는다. 교회 갈 때도 마찬가지고, 어느 주일날 그이가 한복을 입으니 나도 한복을 입었다. 예배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힘들게 한복 입었는데 그냥 집으로 가기는 아까우니 근사한데 가서 커피라도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어느 고급 호텔의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여기저기 사방을 보니 선보는 팀들이 많았다. 수상한 관계의 남녀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이에게 “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하고 물었다. 그이의 말 “목사와 여신도 사이로 보겠지.”


《지구별에서 노닐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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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대만신학자 송천성은 어머니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라 말했다. 생명을 낳아 기르는 행위의 소중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날이 갈수록 그 말이 실감난다. 현대문명은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의 폐쇄회로에 갇힌 이들은, 기쁨을 누릴 줄 모른다. 이웃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합리성과 효율이 최상의 가치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삶은 부박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마음 내려놓을 곳을 몰라 방황한다. 고향 상실, 안식 없음이 지금 우리 삶의 실상이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여성적인 것이 대체 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관계 지향적인 공감능력을 가리킨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시절 여성들은 주체로 살기보다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객체처럼 살아왔다. <씨알의 소리> 1978년 5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목은 “나야 뭐“였다. 함 선생은 아내 황득순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의 삶을 ‘나야 뭐’라는 말로 요약했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으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여인들의 삶이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지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 말이다. 지금은 세월이 달라졌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객체의 자리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주체가 된다는 것이 곧 외로운 단자로 살아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주체는 다른 이들과의 창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던가.



김명현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주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부한 신학을 자양분 삼아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지속해왔다. 교회갱신을 위한 헌신, 여성들의 권익과 지도력 개발을 위한 활동에서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긴장을 해소시키는 건강한 유머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정생활이야말로 바깥에서의 활동을 가능케 한 생명의 묘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속성을 돌봄, 존경, 지식, 책임이라 했다. 김명현 선생님은 그러한 사랑의 좋은 예이다. 가끔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표정과 말 속에 배어있는 남편에 대한 아낌없는 신뢰와 사랑은 곁에 있는 이들을 가만히 미소 짓게 만든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어야 한다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이다. 두 아들에 대한 존중과 신뢰,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실답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사는 것은 어쩌면 이 가없는 사랑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어제도 오늘도 마을 어귀를 지키며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맞아주는 품 넓은 느티나무를 닮아가고 있다.


민영진 박사님과 함께 걸어온 50년의 세월을 회고하고 또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이 글 모음집에는 배꼽 빠지게 만드는 웃음, 아련한 아픔,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가 넘실거린다.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비근한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장엄한 명분을 붙드는 것보다 거룩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도 일상의 일들 속에서 깃든 하늘나라의 광휘에 주목하시지 않았던가. 코헬렛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도서 5:18).


우리의 영원한 중심이신 그분의 마음에 당도하기까지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빌고 또 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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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다시 한 번 사람의 몸을 입고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1978년 서울 냉천동 감신대에 입학하여 신학의 걸음마를 배울 무렵, 저는 선생님께 구약을 배웠습니다. 과목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몇 과목이나 되었는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저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선생님께 배운 가장 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목회의 길을 걸으며 내내 마음에 두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수도원을 연상시킬 만큼 강의실 분위기는 진지했는데, 말씀 한 구절을 읽는 모습을 통해서도 말씀을 허투루가 아니라 공손하게 대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을 대하는 가장 마땅한 자세가 경외심이라는 것을 저는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얼마 전 이야기입니다.

두어 해 전 감신대 동기들이 선생님 내외분을 모시고 남해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학생들의 머리에도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그날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었지요. 그날 우리는 밤이 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살아갈수록 모르겠는 것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들이 늘어나는데 딱히 물어볼 만한 분이 궁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진솔한 대답을 들려주셨고요. 경청과 진솔함이 가장 좋은 대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덤처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마감하며 드렸던 마지막 질문은 “그동안 가장 이기기 힘들었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나요?”였습니다. 선생님은 잠깐의 생각 끝에 대답을 하셨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너무도 뜻밖이었습니다. “내가 가르치거나 전하는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인지, 지금도 고민을 합니다.” 세 번이라 하셨던가요,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쫓겨난 적이 ‘겨우’ ‘세 번밖에 없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와락 웃었지만 제게는 너무나도 큰 찔림이었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동이 틀 때까지 천사와 씨름을 했던 야곱처럼 평생 말씀을 붙들고 씨름을 하셨구나, 나도 모르게 선생님의 어깨에 눈길이 갔습니다.



오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이 쓴 시를 읽습니다. 식물과 곤충과 동물, 온갖 나물과 야생화, 나무와 물과 공기, 심지어는 방사능까지, 그 모든 것을 향해 건네는 언어의 수화(手話)를 지나, 가족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인사와 축원을 지나, 마침내 <초상(肖像)>에 이르렀을 때, 저의 글 읽기는 점점 더뎌지다가 굳어지다가 마침내는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텅 빈 여물통과 가득 찬 여물통’의 만남을 ‘즐거운 해후’(邂逅)(<범일동 아이>)라 했지만, 그 기가 막힌 역설에도 차마 웃을 수는 없었습니다. 피난 시절 먹을 것을 찾아 취사장 구정물이 쏟아지는 수챗구멍을 뒤지던 하얄리아 캠프, 기차에서 뛰어내릴 때를 놓쳐 결국은 군수품 도둑이 되고, 어쩔 수 없이 경험해야 했던 통역을 동반한 문초, 그 때 그 일을 성서 번역자로서의 첫 걸음으로 인식하는 모습 앞에서 말씀을 모시는 근원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 땅의 숱한 아픔과 상처와 모순을 말씀으로 품어 오신 이유를 짐작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 마음은 말씀의 오지를 향하게 되고, 한국의 영진(泳珍)은 라오스의 영진(永珍), ‘아잔 비엔티나’(Mr. Vientiane)란 빛나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영진>).


‘무덤에서 돋는 연한 풀을 뜯어먹으려고 아무데나 주둥이를 박는’ ‘입이 말은 못해도 포식 기능은 완성한’ 눈 먼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풀 뜯는 설교자>는 영락없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 손사래를 치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아픈 초상이었습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직시하며 한 자 한 자 적는 설교가 얼마나 웅숭깊고 향기로울까 싶은데도 밀려오는 메시지를 도저히 언어로 바꾸지를 못한다며 ‘내 설교는 늘 모국어를 배반한다’(<날 건드리더라>)고 고백할 때, ‘스스로 실성하여 침묵한 덕분에 운 좋게도 도살만은 피한’(<볼모>) 제물(祭物)로 스스로를 자책할 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한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만나는’(<장수>) 즐거움을 누릴 때, 평생 연구하고 기록해 온 자료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을 텐데도 저울에 올려놓아도 아무런 무게 없는 입김과 속임수로 돌리며 ‘날 떠난 너 흙과 물에서 노닐다가 문득 바람 속에서 낯익은 먼지 하나 만나거든 옛날 옛적이었다고 해라’(<문패>) 하며 평생의 수고를 흔쾌하게 비울 때, ‘번역은 말씀의 빙산일각(氷山一角)’이어서 ‘의미의 바다를 표류’하지만 ‘이 작업도 힘겨울 때는 당신 품에 안기렵니다’(<생일유감>) 겸허하게 기도할 때, 시(詩) 속에 담긴 선생님은 다른 말로는 대체할 수가 없는 ‘말씀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곁을 말씀으로 찾아오신 한 사람을 압니다. 그 분은 말씀이 곧 삶이었고, 삶이 곧 말씀이었습니다. 평생을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오신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람의 몸을 입은 말씀을 봅니다. 사람의 몸을 입은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삶이 얼마나 지극하고 지순해야 비로소 말씀이 몸을 입는지를 배웁니다. 시(詩)와 삶이 얼마든지 말씀이 될 수 있음을, 아니 그리 되어야 함을 나직한 목소리로 일러주시는 선생님, 지구라는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과 고마움이 이리도 큽니다.


한희철/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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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9)


예수는 먹보요, 술꾼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태복음 11:18-19)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때는 저의 대학원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때 조교장이던 한 선배의 물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학기 초가 되면 조교장이 있는 방에서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전체 조교 회의가 열립니다. 당시 막 대학원생이 된 저는 처음으로 학과 조교를 맡게 되었고, 당연히 조교장이 있던 연구실에 처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교 연구실은 5~6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선배의 책상 앞에 걸려있던 예수님 초상화가 제 눈에 빨릴 듯 밀려들어왔습니다.


선배의 책상 앞 예수의 초상화는 제가 보아오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예수는 아끼던 송아지를 후한 값에 팔아넘기고 시원한 음료 한 잔 걸친 시골 아저씨처럼 호탕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저는 선배에게 그림의 진원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배가 말하기를, 그 예수님 초상화는 미술을 전공하는 동생이 연필로 그려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는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 선배의 자리를 노려보고 있던 그 호탕한 예수의 모습은 제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았고, 기존 예수의 대한 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림이 제게 준 충격은 작지 않았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지 제가 품고 있던 예수의 이미지는 언제나 근엄했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교양을 갖추신 분이고, 머리에는 언제나 빛나는 아우라가 자리하고 있어 뭍 시장잡배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분이며, 얼굴에는 모나리자의 뺨을 때릴 정도의 은은한 미소가 가득하며, 또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인류를 향한 고귀한 슬픔마저 마다치 않는 납덩어리처럼 무겁고 쓸쓸한 모습의 사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선배의 앞자리에 걸려있던 예수의 초상은 그런 기존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림 속 예수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쉽게 만나는, 골목길 어귀에서 늘 마주치는, 공원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우리 이웃의 얼굴이었습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회색빛 가득한 쉽게 범접하기 곤란한 심각한 분이 아니라, 언제나 쉽게 그리고 가벼이 스치듯 만날 수 있는 예수의 얼굴이 그 그림 속에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집으로 돌아와 복음서를 뒤적이며 그 안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열심히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 속에 너무도 생생한 그분의 얼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언제나 예수의 주변엔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와 거리의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정기적으로 금식하기는커녕 신랑과 함께 있는 자의 즐거움으로 포도주와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분, 예수를 복음서 기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타고난 질박한 심성은 언제나 주변에 아이들이 끊이질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소박하고 맑은 심성을 지닌 이들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그늘진 모습으로 얼굴에 쌍 십자를 그리고 있는 이들에게 좀 채 아이들은 마음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은 저마다 한 목소리로 자신의 자녀에게 축복을 빌어주길 원하여 아이들을 예수에게로 데려오던 부모들의 극성을 절대로 막지 않았던 예수의 너그러움을 적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하기는커녕, 그들을 막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는 그의 다정함을 성서는 증언합니다.


또한 그분은 유머와 재치가 넘쳐나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넘쳐흐르는 수많은 예화를 생각해 봅시다. 마치 시인처럼, 때론 연인처럼 그분은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의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웃기고 또 울렸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그는 일장의 연설을 토해냅니다.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때문에 고민하는 목자, 헌데 얼마 못가 그 잃은 양을 찾고 감격하는 기쁨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은화를 다시 찾고 행복해 하는 한 부인네의 심정을,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후 손가락의 가락지를 빼어 그의 손에 끼우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던지시는 그 분의 감각!(누가복음 15:1-32)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의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험상궂은 원성을 앞에 두고도 몸을 굽혀 땅위에 천연덕스럽게 낙서를 하시는 그분의 여유! 그 밖에도 많은 곳에서 그는 웃고 마시고 즐길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의 얼굴로 우리 앞, 뒤, 옆에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어떤 예수의 이미지를 전해주건 간에 우리는 또 여전히 그늘진 예수를 고집하려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의 고집스러운 성향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의 고정된 신앙관 속에 형성된 선입견이 오히려 생생한 예수의 모습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의 웃음 가득했던 즐거운 모습은 뒤로 한 채 오로지 ‘그에 대한 우리의 포장’만이 남아 납덩이처럼 무거운 그분의 겉모습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저의 신학교 생활은 이러한 기억들의 확인으로 연속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한 청년들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혹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의 모범이 그러한 것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람들은 이내 목사가 되고 맙니다. 깔끔한 짙은 색 계통의 양복에 반짝이는 구두에 화려한 넥타이로 온 몸을 치장하고, 이미 음성은 하늘의 목소리인양 저음만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도 시정잡배들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수준으로 ‘형제님, 자매님’을 연신 되 내이며 틀에 박힌 일정한 멜로디 섞인 음정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학교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 교회에서도 이와 동일한 모습은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저는 이 자리에서 그 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폐지를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의 모습과 행위에만 집중되는 우리의 자세는 고쳐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는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정직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언어도, 어떤 행위도 그 정직한 고백 위에 서지 못하면 맹목적일 따름입니다. 저는 단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어설픈 선입관이 우리가 예수의 참된 모습을 읽는데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상대방 군인의 부상당한 귀까지 치유해주는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고민을 들으시고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심성을 어루만져 위로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로는 가식 없는 순수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지, 정형화된 행위의 형식이 제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우리에게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와 평강은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의지하는 그분의 곧고 분명한 신앙이 그분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강의 설교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설픈 형식이 아니라, 그분의 철저한 ‘하나님 신앙’이며 또한 ‘자유와 평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고난절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으시던 그분의 신음소리를 흉내 낼 것입니다. 때로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손에 못을 박으며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닮은 언덕길을 잘 가꾸어진 나무를 쪼개어 만든 십자가를 지고 오를 것입니다. 때로는 노래로 구슬프게 그분의 고난을 설명할 것입니다. 혹자는 두툼한 헌금봉투로 나를 위하여 받으신 그분의 아픔에 감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또 우리는 열심히 전혀 그분이 아닌 그분, 우리의 습관과 선입관 속에서만 살고 있는 그분의 이미지 만들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편짜기와 편 가르기에 열중하며, 신앙이 좋고, 나쁘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그러네 하며 ‘예수의 포용’과는 정반대의 길을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또 다시 고난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또 예수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짐짓 슬픔의 얼굴을 하고 사정없이 가슴 아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굳게 다시 한 번 동여매는 넥타이 속에 예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타인과 같지 않고 오늘도 정해진 언어와 행위 속에 자신을 지켜 가는 멋진 솜씨에 감복할 것입니다. 짐짓 금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때로는 신중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며 분위기 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시 수난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수난만을 고집한 채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웃음의 의미를 잊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고난 바로 뒤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겼던 그분 예수의 유쾌한 모습 또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도 같은 세상에 끈질긴 유머와 유쾌함으로 지친 세상의 영혼들을 위로한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당한 수난이 바로 고난절입니다.


유대인은 고난의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가 초지일관 고난과 수난의 상징으로 그들 옆에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설사 경건의 극치를 달렸더라도 그들은 예수를 또 처단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사도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귀신이 들렸다 하면서 그를 처단했습니다. 이를 마태는 장터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곡조에 따라 춤추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비유 삼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진중함 없이, 신중치 않게 그저 주변 환경의 변화와 옆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반성 없이 따라가는 사람들이 결국 요한과 예수님을 내치고 말았습니다. 앞에 서신 분의 참 모습을 살피며 따라가려하기 보다는 기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선입견에 끼워 맞춰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에만 충실하고 속에는 무감한 이들. 예수님의 참 모습보다는 포장되고 각색된 이미지에만 충실한 우리들의 모습도 저들 유대인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진지함도 받아내지 못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유쾌함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먹기를 탐하며 포도주를 즐기던 분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던 ‘경건’과는 너무도 큰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예수를 포기합니다.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예수를 처단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위한 구세주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외치는 사이비 하나를 처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만의 고집과 선입견 속에 구축한 신앙관에 의해 처단한 그분,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또 다시 고난의 날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고정된 우리의 선입관으로 또 다시 예수를 다시 십자가, 고난의 길로 몰아세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또 다시 고난절입니다. 유쾌했던 예수의 참 의미가 우리 가슴에 진득이 묻어나길 기원합니다. 단지 고난만 남고 그의 오신 참 뜻은 실종되는 수난절이 아니라, 주께서 왜 우리와 함께 계셨고, 무엇을 위해 우리 곁에 계셨고,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의 모든 것을 내 몸과 심장 안에 새겨보는 속 찬 고난의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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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7)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8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칸더와 바흐는 이 부분에 알토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그 여인의 마음을 남깁니다. 알토 솔로의 서창은 코멘트 역할을 하고 있고 이어지는 아리아는 ‘기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시인과 작곡가가 이루어낸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콜라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레치타티보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 예수와의 ‘Ich und du’의 관계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이 레치타티보 가사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부디 나에게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이 가사를 처음 본 순간 저는 완전 무방비상태에서 충격을 받고 왈칵 눈물을 쏟고야 말았습니다.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바흐의 교회음악에 이토록 깊은 감성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격적이고 감성적이고 표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과 예수의 사랑의 관계를 몰랐기에 이 여인의 행위를 물질적으로만 해석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제자들처럼 여인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이니 뭐니 하면서 이 여인이 깨뜨린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지 않았던가요? 아니면 은근히 헌금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사용하지 않았던가요? 이 여인의 향유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발단된 회개가 마음을 찢을 때 흘러내린 진심어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뿌려 준 향유였고, 자신을 친구로 대해 주었던 단 한 사람 예수를 위해 모든 계산을 뛰어 넘어 내어준 사랑의 보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준 그 분의 사랑의 향기로 남기에 합당한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That’s why


문득,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 한 자락이 떠오릅니다. ‘You gave me Love’라는 곡으로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미국의 팝 가수 B. J. Thomas의 곡입니다. 대중적 인기의 허무함을 느낀 그가 예수를 친구로 만난 은혜를 노래한 곡이지요. 이 베다니 여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You gave me time when no one gave me time of day

당신은 내게 시간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무도 내게 시간을 주지 않을 때에


You looked deep inside while the rest of the world looked away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외면했을 때에


You smiled at me when there were just frowns everywhere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모든 이가 나를 행해 얼굴을 찡그릴 때에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That's why I call You Saviour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 call You Friend

그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You touched my heart

당신은 내 마음을 만지셨고


You touched my soul

당신은 내 영혼을 만지셨습니다


And helped me start all over again

그리곤 내가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셨죠


That's why I love You, Jesus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That's why I'll always care

그것이 바로 내가 항상 간직하는 이유입니다


You gave me love when nobody gave me a prayer

당신은 내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날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에


플롯이 흘리는 눈물방울 소리


이어지는 아리아는 두 대의 플롯이 시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흐는 왜 이 아리아에서 플롯을 사용했을까요? 그 비밀은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아리아의 가사를 함께 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

6

기도

알토

아리아

Buß und Reu

Knirscht das Sündenherz entzwei,

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

Treuer Jesu, dir gebären.

참회와 후회의 마음이

죄지은 이 마음을 짓이기고 찢을 때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

오 신실하신 예수여, 당신께 드립니다.


그 날, 베다니 시몬의 집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전주가 흐릅니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거룩함이 혼재된 그 방의 공기가 아리아의 전주에 스며있는 듯합니다. 노래 중간 부분에서 ‘그렇게 떨어진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Daß die Tropfen meiner Zähren Angenehme Spezerei,’라고 노래하는 부분의 기악파트를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의 놀라운 영감에 바흐가 더 놀라운 음악적 영감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두 대의 플롯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향유와 여인의 눈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마태수난곡 악보에는 이 페이지 위편에 ‘아, 지고한 아름다움이여!’라는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알토아리아 악보 중 ‘나의 눈물방울이 고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라고 노래하는 부분. 맨 위 스타카토로 표현된 부분이 플롯 파트임.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태수난곡을 재생시켜야 할 음악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아름답기 때문에 텍스트와의 조화를 생각하지 못하고 이 곡을 매우 빠른 템포로 끌고 갑니다. 성악가 입장에서도 이곡은 빠른 템포가 노래하기 좋습니다. 그러나 이 곡의 핵심은 눈물방울이 한 방울 씩 떨어지는 플롯 파트입니다. 예수와 이 여인만이 알고 있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함과 그 여인의 진지함과 아름다운 사랑의 동작에 압도되어 얼어 버린 제자들이 만들어 낸 적막 속에서 귀한 향유가, 회개의 눈물이 예수의 머리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똑 똑 떨어집니다. 이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템포를 매우 늦게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표현한 것은 칼리히터의 58년 음반뿐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이며 영적 메신저였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노래는 원전연주로서 이 곡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연주입니다. 원전 연주에서는 바흐시대의 전통을 따라 여성 알토 대신 남성 카운터 테너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아래에 링크한 칼 리히터의 58년 음반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https://youtu.be/y5Xuc_Q4IW4 (안드레아스 숄이 노래하는 ‘Buß und Reu’)

https://youtu.be/8y6x1wj0bxM (칼리히터의 58년 음반, 17분27초에 시작)


첫 목회지에서 헌금 봉투를 만들어야 했을 때 마태수난곡의 이 구절을 빌렸습니다. 재생지로 만든 봉투였는데 그 앞면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이 향유는 나의 눈물 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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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7 예수를 위한 대명사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 부터 2018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년 뒤에 끝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매 년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 순례를 계속해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몇 분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조용히 따라 걸으며 마태수난곡을 묵상하려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올해에는 다소 갑작스레 평화교회연구소의 요청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40일간의 영적순례’라는 작은 사순절 묵상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마태수난곡 전 곡을 QR코드를 통해 들으며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나누는 것만큼의 이야기를 이 작은 묵상집에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의 전 곡을 만나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순례를 위한 작은 가이드북으로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순례의 길로


그럼, 계속해서 순례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될 곡은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오늘은 이에 대한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만나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마태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며 오늘의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성부는 알토입니다.


알토의 목소리


여성 목소리의 저성부인 알토는 모성과 슬픔과 공감과 눈물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인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서 소프라노가 여성성과 기쁨과 사랑과 미소를 상징하고 테너가 열정을, 베이스가 남성다움과 진중함을 표한 것처럼 마태수난곡에서도 각 성부의 음색은 고유한 표현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녀에 대해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인지 비슷한 별개의 사건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7장 37절은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좀 더 상세하게 그녀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적 약자로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의 장면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알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화자를 이 베다니 여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수난곡에서의 각 성부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감성적 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5번

5

코멘트

레치타티보

알토

Du lieber Heiland du,

Wenn deine Jünger töricht streiten,

Daß dieses fromme Weib

Mit Salben deinen Leib

Zum Grabe will bereiten,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의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이 고귀한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당신 몸의 장례를 준비한 것을 막았지만

부디 제게는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방울들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du’의 시적의미와 관계적 의미


레치타티보의 시작 부분에서 노래하는 이는 예수를 ‘Du lieber Heiland du/사랑하는 구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와 예수가 이미 구원을 통한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문자적인 우리말로는 이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습니다만 독일어 가사에는 ‘너/당신’에 해당하는 의미인 ‘du'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먼저, 시적인 면에서 화자는 ‘du’를 두 번 강조하여 표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구원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예수뿐이라는 표현이지요.


관계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예수를 대명사 ‘du’를 사용하여 칭했다는 것이 의미가 깊습니다. 영어에서는 2인칭 대명사가 ‘you’하나 뿐이지만 독일어에서는 우리말의 ‘너’와 ‘당신’의 차이처럼 2인칭 대명사로 ‘du/두’와 경어 ‘Sie/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노래 알토의 코멘트에서는 예수님께 경어체인 ‘Sie’ 대신 ‘d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풍경입니다. 하지만 ‘du’라고 해서 우리말과 같은 반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du’는 친근함의 표현, 관계가 맺어진 사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du'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와 그로 인한 경직성은 엄격한 존댓말 때문에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를 닉네임이나 영어이름으로 편안하게 부르면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맥락이 아님에도 예수라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거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높이기 위한 그 분들의 신앙과 정성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럴 때면 굳이 그분들을 설득하거나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뒤에 무조건 ‘님’을 붙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예수와의 친밀함의 관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실재로 ‘님’자에 집착하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권위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님’자에 대한 집착이 단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기독교의 가장 특별하고도 경탄스러운 부분은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신과 대결을 하든, 불교처럼 자기 수행을 통해서든, 무속신앙처럼 무엇을 바치거나 간절한 기도를 하든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노력 없이, 오직 은혜로 신이 인간을 향에 먼저 내려온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이토록 가깝게 연결된 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놀라운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십자가의 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 배신, 홀로됨, 인간으로서 인간이 받아야할 극도의 고난을 주님께서는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헨리 나우엔의 표현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친구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여러분과 공통분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 공통분모를 통한 공감이 우정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부사이 보다 더 비밀이 없는 관계가 친구사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이유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부활하신 이유도 우리에게로 내려 오사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본디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기독교는 원래 이처럼 세상의 생각을 뒤집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내는 품격 있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8:17)과 모세(출 33:11)를 친구처럼 대하셨듯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와 친구 되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시편 25편 14절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구절을 ‘God-friendship is for God-worshipers’ 라고 읽었습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은 말 그대로 ‘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서상 ‘하나님과의 우정이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있음이여‘라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상사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데 한국 이름에는 그 뒤에 직함과 ‘님’자를 꼭 붙여야 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프랜드쉽’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도무지 깨닫기 힘들어하는 이 관계를 우리는 알고 체험해야합니다.


마르틴 부버는 그 유명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짧은 책을 통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와 ‘나와 너/ich und du’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부버는 ’만남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부버의 방식으로 생각 해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예수를 만났고 그 만남과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을 통해 그와 ’나와 너/ich un du'의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시작에서 ‘Du lieber Heiland du’라고 ‘du’를 두 번 강조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님’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다보면 예수와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신’과 ‘하찮은 피조물’과의 관계인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베다니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곡의 다음 장면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부를 때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끝까지 예수를 ‘du'로 만나지 못했고 ‘es'로 대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잘못은 여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와 어떤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남이고 관계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위한 ‘es'입니까? 아니면 아직 친밀함의 관계에 이르지 못한 ‘Sie’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du’로 만나고 그렇게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조건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친밀함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합니다. 'es'도 아니고 ‘Sie'도 아닌 ’du'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 만남은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성육신 사건과 그 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죽음의 과정까지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와 ‘ich und du'의 관계를 맺기 위한 선제적인 다가오심이었습니다. 이 수난곡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친구, ‘du’로 만나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앞서 우정에 관해 말씀드렸듯이 당신과의 친밀함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기 위해 예수는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고귀한 여인/fromme Weib’


이 레치타티보에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노래하는 이가 이 여인을 ‘고귀한 여인/fromme Weib’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은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수난곡에서는 ‘고귀한 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을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기독교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는 예수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만나 그것을 ‘프렌드쉽/friendship’이라 하건 ‘우정’이라 하건 ‘친밀함’이라 하건 간에 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어떤 비밀도 서로 없는 대화를 나누고 공감대를 나누는 가운데 현실로 펼쳐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거하는 상태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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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삭개오의 계산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 19:1-10)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삭개오입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의 첫발을 디딜 때 한 번쯤은 꼭 들어보는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입니다. 때로는 노래의 주인공으로, 때로는 예화의 단골손님으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흔히 듣고 또 알고 있는 이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오직 한군데, 즉 오늘 본문으로 잡은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을 적은 4복음서의 많은 내용들이 서로 중복되고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주인공 삭개오는 아주 적은 부분에만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신앙의 세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키가 작고 세리라고 하는 그의 삶이 극적이고, 또 예화로 들기에도 좋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오늘 우리의 주인공 삭개오는 세리의 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계신 분은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구세주이신 이상 그 분이 가는 곳마다 구원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하여 자신의 구원사업의 성공을 만 천하에 공언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저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 주어진 본문에 의지하여 예수께서 생각하시고 또 선포하신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9절과 10절에 거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러한 예수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명 삭개오의 구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삭개오가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나 인격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받았다 하면서도 그의 행실이나 인격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의 구원은 가식이거나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삭개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고백 직후,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이 삭개오의 고백이 그의 구원받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이 고백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삭개오는 세리였고, 그것도 장급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이방인보다도 더 멀리하는 비난대상 1호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지배자 로마에 기대어 동포의 혈세를 뜯어낸 데에도 기인하지만, 그들이 비난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세리들에게는 월급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된 세금을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여 그 만큼만 총독부를 통해 로마로 보내면 그만입니다. 따라서 월급이 없던 세리들은 자신들이 거두어들여야 할 세금 그 이상을 추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천원 낼 사람은 만원을, 천원 낼 사람은 십만원을 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세리들의 수고비로 어느 정도 더 받아내는 것은 수긍이 가긴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항상 필요 이상의 돈을 동포로부터 뜯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족이면서도 비난과 질시의 대상 1호가 되었고, 로마군인의 도움이 없이는 폭행당할 우려 때문에 거리를 신나게 활보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그러한 세리들 중에서도 장급이며, 또 재산도 많았다 하니 그의 악랄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삭개오의 모든 재산은 사실 그의 부정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이며, 따라서 모두 토색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공언한 약속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자신의 약속을 모두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보다 4배 이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산은 초등학교 정도의 산수실력이라도 금방 나올 수 있을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공약 이후에 예수는 엄청난 선포를 하십니다.


“드디어 이 집에도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그것이 잘못된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런 공언을 하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오늘 우리는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누가는 19장의 서두에 삭개오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를 통해보건대, 그는 부자이고 세리장이었으며 또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누가의 이런 묘사를 통해 우리는 삭개오가 당시 유대인들 공동체에서는 철저히 소외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신체적 특징은 어릴 적부터 그로 하여금 심한 조롱을 당하게끔 하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체의 이상을 죄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삭개오의 유소년 시절은 ‘어두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동족에 대한 증오감이 점점 깊어져 가장 악랄한 세리 중의 하나로 자기 자신을 키워갔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돈에 대한 애착이 커갔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어받은 삭개오는 불행하게도 ‘하나님 없는 삶’에 더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음’을 실감해 가며 또 묵인해 갔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포들의 눈길 속에서 점점 삭개오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끼워주지 않는, 그야말로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를 우리는 이 누가복음의 행간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소문이 유대 땅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과도 잘 어울리며, 창녀와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까지 친구라 칭하며,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며, 병든 자들 고쳐주며, 전하는 말씀도 힘이 있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심지어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은 자신과도 같은 세리출신도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을 접한 후 삭개오는 이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흥분과 긴장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됩니다.


‘세리를 제자로!? 남들은 그렇게 비난하며 틈만 나면 잡아먹을 기세를 하고 있는 세리마저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삭개오는 계속 흥분합니다. 그 동안 동족에게 놀림을 당하고 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동족을 괴롭히며 받아야했던 자신만의 고민을 기억하며 그는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 수 없는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데 나를 이처럼 동요케 하는가?’


삭개오에게 있어서 예수란 존재는 ‘잊혔던 모든 것’을 회상하게끔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삭개오의 심장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까마득히 잊혔던 사랑이니, 가족, 친구, 이웃, 정,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단어들이 새삼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 고민의 연속 중에 그는 예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기 위해 삭개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돈 많은 세리장이 군중들 사이에 낀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죽음을 각오한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그의 신체적 특징으로 인하여 쉽게 사람들 눈에 뜨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수일 밤을 고민하다 결심합니다.


“그래도 난 예수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그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키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이웃들의 놀림의 대상이었던 이놈의 작은 키가 다시금 예수로 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무겁게 합니다. 건장한 장년들 틈바구니 속에서 삭개오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을 발견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삭개오는 군중의 동요를 금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쏟아질 자신에 대한 비난과 질시, 조롱 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롱이 이내 성난 군중들의 폭력으로 자신을 위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도 이번은 거의 마지막입니다. 정말 예수가 죄인들의 친구이며 세리마저 제자로 삼은 사람인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염치며 체면, 비난, 질시, 조롱 그리고 생명의 위험마저 모두 팽개치며 생애 최고의 도박을 감행합니다.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해 옆에 있던 뽕나무를 탑니다.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를 타자 동시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웅성거립니다.


“아니 저거 삭개오 아냐? 저 도적놈이 여기는 왜 나타나 가지고 기웃거리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세금이라도 거두려고 그러나? 아니 그런데 왜 나무는 타고 난리야…”


삭개오의 나무 타기는 뒤통수를 치는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과 더불어 이루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인간이라, 자신들과 같은 동포라, 친구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접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도…


단지 그는 눈으로 예수의 모습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죄인의 친구로 불리는지, 단지 그것만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 후에 그가 받게 될 질책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을 끊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그의 삶에 이번이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가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 씨, 어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루 묶고 싶군요.”


차분한 예수의 한마디가 삭개오를 비롯한 당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의 말씀을 접한 삭개오의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을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해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공포합니다.


“이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 동안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겠다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결심합니다. 바로 삭개오의 그 결심 안에 이미 구원의 싹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잃어버린 이웃을 돌려줍니다.


예수는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도, 이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면 오로지 그에게는 맘몬, 즉 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는 선포하십니다.


“삭개오 당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잃어버린 친구와 이웃을 회복하십시오. 여기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사람들 즉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다 하면서 여전히 혼자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는 그의 가족을 찾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이웃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삭개오로 하여금 잘못된 계산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의 잘, 잘못은 뒤로하고, 그의 고백이 말해주는 바는 곧 그가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았음을 보여줍니다. 돈이라 하는 것도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은 수단이지 가족과 이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가족이, 자신을 버렸던 이웃이 ‘자기에게 와 있음’ 그것뿐이었습니다.


오늘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계속 곱씹어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과연 건강한 것인가를… 삭개오에게 “당신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라고 선포하신 예수의 의미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

이웃 없이 살던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서 이웃을 발견하는 일

가족 없이 살던 사람이 바로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임을 깨닫는 일


바로 그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구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외롭거나, 외롭다거나 혹은 외로움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는 구원사역과는 너무도 먼 것들입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하나님, 이웃, 그리고 우리의 가족을 되찾으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 ‘하나 됨’, 바로 그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도 잃어버린 자가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로 인하여 혹은 나 때문에 소외받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낙오됨이 없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 가족과 같이 지내며 그 안에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가 구원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선물’이 함께 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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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다 보면, 어느새

내 바구니에 풍요로운 결실이 가득하다


- 김기석의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고


믿음


김기석의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묻기만 해온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책의 저자에게서 대화의 상대가 되어, 혹은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해묵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을 수가 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혹은 ”믿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눅 18:8) 예수께서 그의 청중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리스어 본문은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당신이 올 때 이 세상에 과연 “믿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나, 당신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진정한 “믿음”을 보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나 다 같은 말이다.


예수 당시는 이미 그가 살던 땅이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종교가 하나 더 늘어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퍼져 종교 인구는 더 많아졌다. 7세기에는 같은 뿌리에서 이슬람 종교까지 나와 아랍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예수가 당신이 다시 이 땅에 올 때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한 말은 종교 인구의 감소를 걱정하신 것이 아니고 종교의 풍요 속에 믿음의 부재를 걱정하신 말일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걸어오는 저자의 주변 인물들, 저자의 편지를 읽는 폭넓은 수신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한 반성이다. 이것을 한 말로 요약한다면, 이 땅에 다시 오신 예수가 그렇게 찾으려 했던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화

저자의 대화 상대자는 아버지와 인생문제 신앙문제를 논할 만큼 성장한 자식이거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신학대학 동기생 친구이거나, 교회 안에서 생각이 깊은 청년 교인들이거나, 이 땅, 이 세상에서 살면서 걱정이 점점 많아지는 일반 교인이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과 기독교를 싸잡아 비판적으로 웅시하는 예리한 여성이거나 [이 책의 제목 “인생은 살만한가”는 바로 이 여성이 저자와 대화하다가 제기한 예정에 없던 질문이다. 고위공직자의 자살을 두고서 죽음과 살인과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보면서 “인생은 살만한가”를 묻고 있다], 질문이 많은 한창 때의 학생이거나, 저자와 함께 살면서 저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아내다. 대화 상대자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늘 당면한 문제를 숨기지 않고, 불편하지만 꺼내어 가지고 저자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독자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살피고, 자신들의 믿음을 살피고,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더 넓고 깊게 파악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다보면,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단계로 스스로 승화하는 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이든,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뇌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같은 문제로 고심하던 작가들이나 신앙인들의 의견을 그들의 작품(시, 소설, 미술, 기타 장르)을 통해서 듣다가 보면 대화는 어느새 상상도 못한 차원으로 옮겨진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이 대화에 스스로 참여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벧전 3:21)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확신까지 가지게 된다.


편지

이 책을 읽다보면 남의 대화를 엿듣고, 남의 편지를 엿본다는 어색한 부담은 금방 사라진다. 엿보라고 엿들으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가 정확히 누군지 잘 기억은 안 되지만, 내 확신으로는, 냉천동 신학대학의 어느 신약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내 연구실로 찾아 온 그는 내가 신약성서 중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는 것을 보더니, “왜 남의 편지를 읽어요?” “남의 편지라니?” “지금 읽고 계신 그 편지 수신자가 누군지 모르세요? 선생님께 온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로마에 살고 있던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잖아요?” “그러게, 정말. 내게 온 편지가 아니네.” 그는 웃자고 한 얘기였겠지만, 그 이후, 사도들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그 젊은 후배 교수의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우리의 저자 김기석은 이미 편지 문체의 기원과 기능을 잘 알고 있다. 자기의 독자 일반을 다 수신자로 보고, 그들에게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의 독자가 알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대화든 편지든 이 모든 과정에 평생 수많은 세계의 지성들과 지적 대화를 하면서 말씀 전달자 역할을 해 온 저자 김기석의 지혜나 관조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의 시각을 바꾸고, 자숙과 참회와 자정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이들이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나, 아예 모든 문제에는 감각이 없는 둔감한 이들도 위로와 격려를 받고, 각성과 책임의 도전을 함께 받게 된다.


결실

나는 이런 “대화” 속에서, 그리고 “편지”를 읽으면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인 것”과 “믿음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혹은 “믿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자료를 이 책에서 넉넉히 얻는다. 개인이나 한국교회의 믿음의 좌표를 그릴 수도 있다.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지적하거나 암시하는 것은 이 저작의 공헌이다.


이삭줍기

저자 서문 격인 “책을 열며”를 읽다가 보면, “울가망해지다” “묵새기다” “괴덕부리다” “깨단하다” “암암하다” “설면하다” “께느른하다” 등, 저자가 자유롭게 부리는 우리의 토박이말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그의 풍성한 독서량이 그대로 노출되는 글 인용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네 쪽짜리 서문에 벌서 오르한 파묵의 글 내용이 요약되어 소개되고 있고, 나희덕의 시 단편이 인용되기도 한다. 나는 김기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소식이나 메시지를 듣기 보다는 이번 작품에서도 또 어떤 새롭게 구사된 우리말 어휘들을 만날 수 있을지, 그가 인용하는 어떤 작가들을 얼마만큼 만날 수 있을 지부터 기대하며 읽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것은 독서가 아니고, 저자와의 대화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만 채굴하여 장바구니에 담는 장보기에 불과할 때도 있어서 죄송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수확도 외면할 수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엿듣고, 엿보다 보면, 이미 내 장바구니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대화자들이나 수신자들과 함께 거두는 풍요로운 결실이 가득 찬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편집자 주/ 이 글은 <기독교타임즈>에 실린 글입니다.


* 지강유철/ 긴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 http://fzari.tistory.com/1053

* 천정근/ 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http://fzari.com/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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