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6)


전도서에서 말하는 노동은?


종교인의 세금납부 의무를 2년 유예시키자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법안 발의를 주도한 국회의원들이 모두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종교인의 세금납부 정당성과 찬반문제를 논하기 전에 교회 공동체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수고하는 이른바 ‘목회’ 혹은 ‘교회사역’이 노동의 영역인가를 정의하는 제도권 교회의 내부적인 합의가 우선되어야겠다. ‘목회’가 ‘노동’으로 간주되면 그 대가로 발생한 소득 때문에 목회자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납부의 의무를 이행해야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몸을 움직여 일하여 필요한 물자를 얻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노력과 수고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목회활동은 노동의 영역인가? 기독교의 삶의 표준인 정경으로서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지만, 전도서가 이 노동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로운 가르침을 준다.


교회 사역과 노동 사이에서

전도서는 저세상이 아니라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 가르침의 강조점이 구원역사 보다 창조질서와 보편적 삶의 실천적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창조와 우주질서의 의미,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 곧 시장과 거리, 광장,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일상의 문제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은 코헬렛(전도자)에게 중요한 관심사다. 왜냐하면 노동은 창조자 하나님을 닮은 인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지만, 땅의 짐승들과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노동 행위로 창조되었다. 땅에 충만하여 땅을 돌보아야 하는 창조명령을 받은 인간에게 노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사명이다(창세기 1:24-28).


그러나 첫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노동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3:18-19). 땅과 흙에 기반을 둔 사람의 고된 삶의 현실을 관찰한 코헬렛은 자신의 다양한 담론 전개를 위한 화두로서 ‘노동’의 문제를 제기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3, 개역개정).


여기서 “수고”로 번역된 말은 ‘노동’이다. 히브리말 ‘아말’은 노력, 고생, 수고, 일, 노동을 일컫는다. 코헬렛이 즐겨 사용하는 ‘해 아래’ 라는 말과 함께 인류의 온갖 노동과 관련된 현상들을 포함시켜 노동의 “유익”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유익”으로 번역된 ‘이트론’은 구약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은 전도서에만 유일하게 반복 사용된 경제적인 용어다.


구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전도서는 노동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다. 코헬렛은 사람이 먹고 마시고 노동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2:24; 5:18; 9:9)라는 말을 반복하며,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죽음이 있으니 사는 동안 힘을 다해 노동할 것을 권한다(9:10). 그렇게 그는 먹고, 마시며, 노동하며 사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드높인 지혜 선생이다.


그러면 ‘목회’는 노동인가?

목회는 노동이다. 이 말이 낯설게 들리겠지만, 땅 위에서의 모든 종류의 노동은 생존을 위해 양식과 자원을 얻기 위한 행위다. 물론 이 말은 경제적인 측면이 고려된 광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코헬렛의 노동의 관점을 따라가 보면, 노동은 단지 생존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관계된 일이다(2:24; 3:13; 3:22; 5:18; 8:15; 9:9).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와 노동, 에덴 정원 관리인으로서 경작을 책임지는 노동과 애정 어린 돌봄을 수행할 사람의 이야기(창세기1-2장), 그리고 전도서에서 말하는 노동은 창조신학적인 관점에서 숙고해야할 신학적인 문제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노동을 “인간 내면의 기쁨과 세상 저변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목회자의 목회활동 역시 세상의 필요와 기쁨이 만나는 노동이다. ‘목사’는 하나님과 교회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한 개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기쁨으로 수행하겠다고 선택한 직업이다. 목회자의 일은 생존과 연결되었지만, 그 수고로움과 노동을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교회의 부름에 응답했다면,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목회자는 목회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문제를 해결한다.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는 무보수의 자원봉사가 아니라 전문성을 인정받은 수고, 곧 정신적 육체적 노동 행위에 따른 보상인 셈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제도권 교회는 목회자가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심방하고, 복음 전도하는 일련의 목회 활동을 평신도의 세속적인 노동과 구별하여 특권화 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핵심가치 중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생존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직업을 예리하게 구분했는가? 우리가 만일 이 지점에서 교회 사역을 노동이 아닌 특권화한 ‘사역’으로 간주하고, 일반적인 노동과 구별하여 성과 속의 영역으로 나눈다면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 아닌가? 목회와 노동 사이의 분명한 개념정립을 하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측면에서 나쁜 사례들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목회자를 ‘성직’이라는 미명아래 목회 ‘훈련’과 거룩한 ‘사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쉼을 허락하지 않는 노동력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서슴지 않는 목회자들 사이의 악한 관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묻고 싶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세의 천국을 소망하는 것만이 복음적인 삶인가?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새번역 주기도문; 마태복음 6:10)라고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서 다양한 직업으로 노동하며 살아간다. 때문에 신자들의 다향한 직업과 노동처럼 목회자의 ‘교회사역’도 노동이다. 신자의 세속적인 직업과 목회자의 교회사역은 동등하게 신성하다.



노동은 삶의 기쁨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촉진제

만약 우리가 목회자의 교회사역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동 자체를 천시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이 자리 잡은 것인지 모른다. 또한 목회자의 교회사역을 노동이라고 말할 때, 목회자는 ‘성직’으로 특화된 계급이 아니라 모든 신자와 더불어 동등하게 제사장적인 소명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을 완수하는 것 아닐까. 코헬렛은 먹고, 마시고 노동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밝혔다(2:24; 3:22; 5:18-19; 8:15).


때로는 노동의 유익과 가치를 보상받지 못하는 부조리하고 불편한 현실과 부딪히곤 하지만, 전도서의 가르침처럼 노동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사건들과 연결하여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노동은 신성한 사건이다. 그러하여 노동은 신학적인 문제요, 각 사람의 생존과 기쁨을 위한 삶의 문제요, 사회를 건강하게 존속시키는 기반으로서 사회적인 문제다. 노동은 단지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잠재력 발휘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촉진제가 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하늘 아래서’ 행하는 갖가지 ‘노동’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거룩한 일이 된다. 이것이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모든 신자의 ‘사명’ 아닌가.


김순영/《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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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5)


가혹한 현실과 믿음 사이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전도서 3:16, 새번역).


공의와 정의 실행으로 억울함이 없어야할 법정에서 조차 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발설한 코헬렛(전도자)의 이 말, 통탄할 일이다. 만연된 불의를 짚어낸 말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면모가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관찰하고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해하고 통찰해보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코헬렛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정직하게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예언자들처럼 시대의 악을 고발하도록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간결한 말의 세계를 음미하다보면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인 모습과 현실문제의 방관자로 있을 수 없다.



코헬렛은 ‘해 아래’ 일어나는 억압 또는 학대의 문제들을 섬세하게 살폈다. 학대당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만, 위로할 사람은 없다. 학대하는 사람이 폭력을 휘둘러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전도서 4:1). 당혹스럽지만 사실이다. 지혜자 코헬렛의 관찰처럼 지혜는 실제 사례를 바탕에 둘 때 설득력이 있다. 지혜로운 판단의 논리는 일상적인 삶의 구체성에 있다. 그가 살았던 고대 군주제의 상황이나 현대사회나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억압과 학대의 현장은 곳곳에 존재한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가정, 일터, 그리고 심지어 억울함 없이 정의가 실행되어야 할 법정도 마찬가지다.


시대를 막론하고 높은 지위와 계층에 속한 강자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이용해 약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억압과 학대의 상황을 만들곤 한다. 코헬렛은 사람의 악한 탐욕적 본성과 학대받는 자들을 위로할 사람이 없는 가혹한 현실을 꼬집었다. 비통한 현실에서 억압의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마음은 잠언의 지혜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자비를 구하지만, 무례함으로 반응하는 부자들이 존재한다(잠언 18:23)는 사실을 발설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때 진실에 가깝게 다가선다. 그러니 진실한 말은 꾸밀 필요가 없다.


코헬렛은 사물을 찬찬히 살피고, 돌아보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무심한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간을 억압하는 거센 현실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한걸음 더 들어가 ‘공의’와 ‘정의’를 짓밟고,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보아도 놀라지 말라(5:8)고 조언한다. 왜 일까? 이 말은 그의 냉철하고 예민한 사회적 통찰이 담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갖춰야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실행이었다.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나라를 튼튼히 하지만,

뇌물을 좋아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잠언 29:4, 새번역).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언 29:14, 개역개정).


고대의 왕이 겸비해야할 태도가 이러한데, 여호와 신앙을 수호했던 이스라엘의 왕과 권력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의 후손 첫 세대가 죽고, 모세 역시 광야 40년을 마무리할 즈음 광야 2세대를 향해 열렬한 가르침을 쏟아냈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곧 ‘토라’를 풀이해주는 고별설교였다. 모세는 왕과 지도자들이 행할 도(道)와 관련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전했다(신명기 1:14-18; 17:14-20).


당신들 동족 사이에 소송이 있거든, 잘 듣고 공평하게 재판하시오. 동족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동족과 외국인 사이의 소송에서도 그렇게 하시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재판을 할 때에 어느 한 쪽 말만을 들으면 안 되오. 말할 기회는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어야 하오. 어떤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시오(신명기 1:16-17, 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과 어긋난 삶은 너무 자주 불공평하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코헬렛은 정의와 공의가 짓밟힌 세상을 보아도 놀랄 것 없고, 높은 자 위에는 더 높은 재판관이 있다는 것을(5:8) 상기시킨다. 모든 일을 판결할 가장 높은 재판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희망이다. 하나님의 판결이 있을 것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라도 땅이 주는 소산으로 먹고 산다(5:9)라는 사실 역시 희망이다. 억압하는 사람이나 학대를 당하는 사람이나 결국 가장 높은 재판관 하나님 앞에서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는 ‘하늘 위에’ 계신 주권자의 통치와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땅에 속한’ 평등한 존재다.


그러면 최고 재판관의 판결 시기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장 악의 심판이 없는 ‘연기된 심판’ 앞에서 어떻게 견뎌야하는가? 코헬렛도 처벌받지 않는 악을 보며 몹시 불편했다(8:10-14). 코헬렛은 정의가 지연되는 것을 보고 ‘헤벨’을 토로하며(8:10) 허탈하고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악행에 상응하는 심판이 곧장 실행되지 않을 때 발생할 악행의 대담성을 말하기도 했다(8:11). 악행을 저질러도 장수하는 악인을 주목했다(8:12). 어디 그뿐인가. 악인이 받을 처벌을 의인이 받고 의인이 받을 보상을 악인이 받는 일도 있다. 그래서 코헬렛은 기막힌 현실세계를 향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외친다. ‘헤벨’이로다!(8:14) 세상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흑과 백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현실세계,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장막을 치신 ‘미지’의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3:11). 코헬렛은 변덕스럽고 풀기 어려운 현실 문제에 다시 삶의 즐거움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8:15), 그는 허무, 덧없음, 부조리, 수수께끼, 불합리, 무상함, 아이러니를 포괄하는 ‘헤벨’의 세상을 과감하게 발설하며 세상 문제들 앞에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는 ‘지금여기’ 신앙의 독자들을 초대한다. 현실의 모든 까다로운 문제들 앞에서 신중한 태도로 자신을 열어두도록. 고통과 환희, 실패와 성공, 눈물과 유머가 교차하는 삶의 역설과 모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규범화된 지식과 진리만이 아니라 모순투성이인 실존의 문제를 직시하도록. 그렇게 코헬렛은 오늘도 지식이 아닌 지혜로 인도되는 대화의 장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김순영/안양대 신학대학원 강사,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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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4)


경쟁이 아닌 협력과 공생을 위하여


어떤 향기도 열정도 재미도 없는 건조한 글을 꼽으라면 교과서다. 이것은 학교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며 가끔씩 무료하면 아무거나 읽던 중고등학교 시절 느꼈던 나의 생각이다. 그런 내가 마흔을 훌쩍 넘긴 세월을 지내며 십대 청소년기의 아들에게 “학교공부도 잘 해야지”라고 말하는 학부모가 되어있다. 그렇게 나는 세월과 함께 평범한 학부모의 대열에 서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공부가 시민적 교양과 덕성을 목표하는 교육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의 사람들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시대의 폭력성과 연계된 상태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지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기독교인이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부끄럽다. 그런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자들의 동맹과 힘의 위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들이 낙오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식사랑과 꿈으로 포장한 속물적 욕망 때문이다.


이 속물적 욕망을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멋지게 포장해도 소용없다. 이런 삶에 말을 걸어오는 구약 지혜서의 말씀이 ‘다른’ 대안의 삶을 꿈꾸고, 상상하라고 심장과 옆구리를 찌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혜의 가르침이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교정해야 할 책무 속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타인들과의 경쟁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려는 발버둥을 멈추고 협력과 공생의 문제를 고민하고 발설하도록 설복시켜 지혜의 말씀 곁으로 바짝 끌어들인다.



코헬렛은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고대 사회에서 살았지만, 상업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경제적인 잉여 소득을 남기려는 시대적 욕망을 지켜본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전도서는 그가 살았을 시대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곳곳에는 인간의 수고, 곧 ‘노동’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어휘와 질문들이 반복된다. 이 때문에 그의 삶의 자리를 어림할 뿐이다.


코헬렛은 위로받을 길 없는 억압적인 현실의 문제를 돌이켜 보고(전도서 4:1-3), 인간의 수고와 성공의 위력이 아니라 허상에 관심을 가졌다. 코헬렛은 누구의 위로도 얻지 못하는 온갖 억압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는 시기심, 거기서 비롯된 경쟁을 비웃는다(4:4-6). 그리고서 그는 그 허망한 수고, 또는 노동을 극복하고 함께 나누는 행복의 가치를 논한다(4:7-12). 코헬렛은 동료애는 물론 함께 나누는 행복을 수호할 가치로 여겼다. 코헬렛의 말을 한 문장 한 문장 되새김질하듯 읽다보면, 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인지 지금 나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사는 지혜 선생님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시대적 적실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코헬렛은 쉼을 모르고 일만하는 한 남자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남자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다(4:8). 이 남자의 삶을 관찰했을 코헬렛의 말은 그의 시대를 뛰어넘어 경쟁 때문에 공동체적 가치를 모르거나 외면하며 사는 지금,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향해있다. 그의 말이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하여 독자는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짧고 단순한 문장이 고요히 심장을 파고든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4:9, 개역개정)

혼자보다 둘이 낫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4:9)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하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듯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듯하겠는가?(4:11)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4:12, 새번역).



가장 좋고, 가장 많은 것을 홀로 차지하는 것이 승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눌 사람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겠는가. 불행한 노고일 뿐이다(4:9). 코헬렛이 살았을 세상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지금은 사회적인 억압과 경쟁에 내몰려 쉼을 박탈당하고, 위로해 줄 사람 없는 인생들이 허다한 세상이다. 이웃과 즐기지 못하고 수고만하며 한탄하는 한 남자의 말,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4:8, 새번역) 부자였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고독한 남자의 말이 현대인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끝없는 과잉의 수고와 거기서 얻은 부요함을 자랑하는 한 남자의 일화와 그의 질문은 현대 사회와 신앙 공동체에게 던지는 사회학적이며 신학적인 질문이다. 더군다나 코헬렛은 이것 역시 헛되고, 불행한 일이라고 판단했다(4:8). 그의 말 때문에 현대사회의 절제되지 않는 탐욕과 포장된 자아실현, 그리고 초과수익을 얻기 위한 과도한 노동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장시간의 노동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노동자의 쉴 권리를 빼앗거나 축소시킨 거대자본가의 배후에는 인간을 그저 소비재로 전락시켜버리는 탐욕적인 착취가 있다. 내적인 욕망의 분출 때문이든 외부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든 끝내 과도한 노동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연민마저 빼앗고 함께 누릴 연대의 기쁨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코헬렛의 가르침을 심장에 새긴다면, 남보다 더 높고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경쟁은 자신을 억압하는 일이지 행복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돈의 위력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타인을 짓밟는 무한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무차별적인 경쟁은 끝내 나와 타인 사이에서 갈등관계를 조장하여 공동체의 불신과 분열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지혜 선생 코헬렛은 경쟁을 권하는 사회에 무기력하게 포섭당한 개인에게 경쟁보다 나은 협력과 공생을 요청한다. 하여 오래된 그의 말씀은 소수의 우월적인 지위 확보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인 삶의 행복 실현을 요청하는 부름이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서의 정경, 전도서의 가르침과 부름에 교회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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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3)


아름다움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


인생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 인생은 덧없는가? 덧없다. 허무하다. 부조리하다. 저마다의 인생은 역설과 모순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의 인생도 세상사도 온통 아름다움과 부조리로 뒤엉켜있다. 그러하여 격한 희망에 감격하다가도 삶의 낙관은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이며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이미 간파했으니, 그는 세상사의 양극적인 현실과 역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헤벨’(헛됨, 무익함, 덧없음, 허무, 부조리)과 생의 ‘즐거움’을 말한 이유다.


전도서는 ‘헤벨’의 책이지만, 동시에 삶의 즐거움을 촉구하는 “기쁨의 복음서”다. 저자 코헬렛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삶의 기쁨을 용기 있게 확신하면서, 인생의 밝고 어두운 면을 정직하게 대면시킨다. 그는 삶과 죽음의 양극적 현실을 가로질러 삶의 온갖 양태들을 공정하게 치우침 없이 말한다. 이것은 코헬렛이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회피하지 않아서다. 그는 아무리 수고해도 결실 없는 노력과 탐구를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1:12-2:11). 그런 그가 삶의 양극적인 양태를 노래한 ‘때’에 관한 시(3:1-8)는 유명하다. 그가 살아온 세월에서 단련되었을 언어의 단아함과 경쾌함이 멋지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 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전도서3:1-8, 새번역)



이렇게 코헬렛은 삶과 죽음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관찰하여 얻은 통찰을 간결한 언어와 은유적인 심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천년 넘는 세월 지나 코헬렛의 시는 1965년 미국의 유명한 5인조 록밴드 ‘버즈’(The Byrds)가 발표한《Turn! Turn! Turn!》이라는 곡으로 재생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인생이 각자의 계획한대로 원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 않음을 보았기에,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워준 짐이라고 말했다(3:10).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요, 삶에 관한 진실이다. 코헬렛이 지은 시 때문에 삶의 어두움과 밝음의 공존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고백

‘해 아래’ 일어나는 갖가지 양극의 사건들과 삶의 짐을 사람이 통제할 수 있을까? 코헬렛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신의 결정에 대한 고백을 시로 담아냈다. 그렇다고 코헬렛이 결정론이나 숙명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문제부터 일이 성취되는 정확한 때와 순간을 결정할 권한이 사람에게 없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의 취약한 조건에 대한 깨우침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온갖 상황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역동적관계의 표명이다. 그러니까 코헬렛은 삶에서 변화무쌍함을 겪는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운명을 반전시키는 하나님의 역동성을 본 것이다. 하여 우리는 한 줄 한 줄의 시행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행동과 책임 사이의 미묘함과 섬세함을 성찰해야하는 여행길에 초대받은 셈이다. 이 노래를 그저 삶의 밝음과 어둠, 긍정과 부정의 현상만을 묘사하려고 쓴 것이겠는가. 코헬렛은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를 오가는 삶의 현실에서 ‘시간’(때)의 지배자를 생각한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시간에 소속된 사람이 모든 사건들마다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의 인식이다. 사람 나름의 똑똑함이나 온갖 사건의 인과관계 밖에서 통제하시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생각한 노래다.



그래서일까. 코헬렛은 확실히 죽음과 삶 중에서 둘 중 어느 하나를 더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하거나 아예 아직 출생하지 않은 자가 더 낫다(4:2:3)라고 까지 말한다. 반대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라며 살아있음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코헬렛은 그렇게 삶의 양극적 상황과 그것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한다. 이것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양극의 사건들과 초월적 존재 하나님이 엮어가는 운명과 역사를 보는 통찰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


“성경 전체에서 신의 섭리에 대한 가장 위대한 진술”로 극찬을 받은 코헬렛의 말이 있다. 전도서 본문이 설교되지는 않아도 설교 강단에서 인용되는 구절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3:11, 개역개정)


코헬렛의 이 말은 신앙인들의 희망을 담은 공론이다. ‘해 아래’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 사이에서 ‘헤벨’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인생에게 주는 지혜교훈이다. 오랜 세월 지나 사도 바울역시 코헬렛의 말씀을 인용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라고 전하지 않았던가. 


양극이 교차하며 반복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코헬렛의 결정적 한 마디는 더 있다. 그는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노동하며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3:13). 이것은 아름다움과 갖가지 기쁨과 사랑, 그러나 헛됨, 덧없음, 허무,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강력하고 지혜로운 행동지침으로 우리 앞에 놓여졌다. 그러니 오늘 하루 땀 흘리고 소박한 밥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다면, 이것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다. 혹시, 지혜 선생님 코헬렛의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수용하면서도 뒤끝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그 불편함의 크기만큼 시대의 욕망에 충실한 노예가 된 것인지 모른다.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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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2)


지혜는 생명나무라


구약의 지혜는?

지혜란 무엇인가? 인생의 방향을 잡는 기술인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아는 지식인가. 구약에서 지혜는 전문적이고 숙련된 기술이나 예술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출애굽기 36:1-2), 능숙한 기술보다는 앎과 태도에 강조점이 있다. 구약신학에 큰 보폭을 남긴 폰 라트(G. von Rad)는 “지혜는 사물의 근저에 하나님의 질서, 즉 조용하고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균형을 이루게 하는 질서가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과 세계 질서, 그리고 인간의 삶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한 멋진 정의다. 이것에 더해 구약 지혜서의 독특한 지혜개념은 기술이나 지식의 중성적 가치보다는 도덕화되고 신학화되었다. 왜냐하면 지혜와 지식은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잠언 1:7; 9:10; 31: 30; 전도서 12:13; 욥기 28:28).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1:7, 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9:10, 새번역)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기 28:28, 개역개정)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개역개정)


지혜의 자리는 마음에

고대 이스라엘의 현자들에게 지혜는 인간의 마음과 줄곧 맞닿아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혜가 거처하는 자리는 마음이다. 의지와 의사결정의 자리도 마음이다. 곧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예컨대 구약의 지혜자는 어리석은 자를 마음 없는 자 취급한다. “음녀”에게 유혹받기 쉬운 젊은 남자를 “지혜 없는 자”(잠언 7:7, 개역개정)라고 비웃는다. 음녀의 본래 히브리말 뜻은 ‘낯선 여자’, 또는 ‘금지된 여자’, ‘이방 여자’를 일컫는다. 모든 적법한 관계를 벗어난 여자를 지칭한 말이다. 거기다 “지혜 없는 자”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이 부족한 자’이다. 곧 “지각이 부족한”(NAS, lacking sense), 또는 “분별력이 없는”(NIV, no sense)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마음이 부족하면 지혜가 없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는 생명나무

히브리적인 사고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의 관계는 좀 더 근원적인 영역과 연결된다. 히브리말의 ‘마음’은 곧 ‘심장’이다. 심장과 마음이 같은 형태다. 때문에 마음을 잃으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잠언 7:26-27).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주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믿었다(잠언8:35). 지혜가 은, 금, 보석보다도 가치 있고 탁월한 것은 물론이고(3:14), 지혜는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3:15) 생명나무다(3:18).


‘생명나무’는 우리를 태곳적 창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남자와 여자를 떠올려 보라. 하나님은 남자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다(창세기 2:16-17; 3:11). 이때 생명나무는 직접적인 금지의 대상은 아니었다(2:9). 그저 배경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주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긴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존재 이유가 밝혀진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3:22-23, 개역개정).


우리는 창조 이야기 끝자락에 이르러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서 창조 이야기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천상의 존재들, 곧 불 칼을 든 그룹들(히브리말, ‘케루빔’)을 하나님이 에덴 동쪽에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것으로 3장이 끝난다(3:24). 하나님이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의 접근을 차단하셨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반역 때문에 생명나무에서 분리되어 영원불멸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잠언의 지혜는 창조 사건의 마지막을 뒤집고 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3:18, 개역개정).


지혜를 얻은 자에게 지혜는 생명나무다. 지혜를 얻은 자는 금지된 곳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는 생명나무’라는 은유적인 경구로 지혜가 죽음의 저주를 피할 약속처럼, 금지된 에덴에 접근할 수 있는 방편처럼 말한 것이다. 하늘의 계시를 받고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삶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진리의 말들을 생산한 지혜자에게서 ‘생명나무’에 깃든 종말론적 의미가 드러났다. 그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지혜는 생명을 약속받는 일이어서 지혜를 발견하고 명철을 얻은 사람은 복되다. 행복하다(3:13).


지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삶, 그리고 마침내

이처럼 태곳적 창조 이야기와 분리할 수 없는 지혜는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삶과 직결된다. 순리를 따르는 삶이란, 하나님이 수립하신 창조질서 원리에 맞추어 사는 삶이다. 구름이 이슬을 내리는 자연의 온화함처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처럼, 밤과 낮의 순환과 별들의 움직임처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리듬에 맞추어 일상을 질서 있게 살아가는 삶이다. 하여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의 삶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 리듬에 따라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하련다. 때로는 고된 일로, 때로는 휴식과 즐거움으로, 때로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균형 잡힌 도적적인 행위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매일의 삶을 채워가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맞서 싸우며 물신의 노예가 된 시대를 산다. 구약의 지혜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게 성공에 목말라하는 일그러진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속물적인 욕망과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시대정신을 교정해 줄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추구와 참 행복은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반역과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는 마음의 방향과 태도에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지혜는 접근금지 되었던 생명나무의 길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이것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라고 선언된 이유일 테다(고린도전서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새번역).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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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여성일지도


구약의 지혜서를 말해야하는 이유


나는 신학을 전공학문으로 결정하고 공부하고 가르쳐왔지만, 잘한 일인지 수없이 돌이켜봤다. 나는 신학하기의 영토에서 외부자이며, 방관자적인 처지에 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신학을 공부할수록 신학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학이 자칫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놀이로 그쳐버려 너절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없겠다, 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구약 지혜서 연구는 세상의 갈등과 모순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전도서는 진리와 현실 사이의 긴장된 괴리감을 좁혀 갈 수 있었던 짧지만 가장 심오한 책이요 지혜의 말씀이다.


무엇보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정경의 말씀으로서 구속 역사보다 창조의 보편적 질서에 관심을 갖도록 재촉한다. 그럼에도 A는 B다, 라는 주류 지혜 전통을 향해 A는 B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용감히 말할 줄 아는 ‘지혜자’(전도서 12:9)의 목소리가 우세한 책이다. 전도자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관찰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순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현실의 모호성을 살핀 것이며, 인류의 평등을 말하되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소외된 구약 지혜서의 진실한 목소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동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시작으로 구약 지혜서 말씀의 숲을 산책해보려 한다.



전도자가 솔로몬? 글쎄요


구약의 책들 중에서 예언서와 지혜서(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첫 장 첫 절은 ‘표제절’로서 저자 이름을 밝힌다. 욥기만 예외다. 그런데 표제절 중에서 미묘한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전도서 1장1절은 흥미롭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개역개정)


‘전도자’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의 ‘코헬렛’이다. ‘전도자’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보다는 직업이나 직책에 관계된 이름처럼 보인다. 현대 영어 번역본들도 “설교자”(NAS, KJV, RSV), “선생”(NIV)으로 번역되어 직능의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코헬렛은 자료를 “수집하다”, 사람들을 “소집하다”, 라는 “카할”동사의 여성형 분사다. 말하자면, 회중이나 공동체를 소집하는 사람, 회중의 인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번역을 피하여 히브리 성경제목을 그대로 음역한 ‘코헬렛’(공동번역, TNK)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코헬렛’은 고유명사인지 직책과 관련된 보통명사인지 논란의 대상이고, 여전히 모호하다.


나는 코헬렛이라는 명칭이 익명성을 고집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의 직능적인 정체성을 표현한 필명이지 싶다. 왜냐하면 저자 코헬렛은 책을 마무리하는 끝맺음말에서(12:9-14) 자신이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2:9-10, 개역개정)


그는 수집의 대가였고, 성문 앞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리의 말들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가르치고, 따져보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정리하여 새롭게 잠언들을 생산한 지혜자였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본문에서 솔로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전도자와 솔로몬을 동일시 해왔다. 다윗의 아들 중에 ‘코헬렛’이라는 직계 아들이나 후손이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전도자를 솔로몬과 동일시할 만한 근거는 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1:12)라는 말은 솔로몬을 명시하지 않았어도 솔로몬을 상기시킬만한 쾌락, 거대한 토목사업과 관련한 업적, 권력이 제공한 유익들을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2:1-10).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헛됨’(히브리말, ‘헤벨’)과 ‘바람 잡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2:11).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권력과 영광을 ‘무’(無)로 만들어 버린다.


위대한 지혜의 모범, 건축과 토목사업, 어마어마한 부, 수많은 처첩들에 이르는 모든 것을 솔로몬 자신의 반성적 성찰이라고 말하기에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한 마디로 고대의 지혜자 코헬렛은 솔로몬을 빗대어 ‘솔로몬 전통의 패러디’를 감행하고 지혜와 권력, 그리고 집중된 부를 문제시했다. 솔로몬의 모든 통치와 웅장함을 헛된 바람으로 일축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솔로몬을 연상시킨 위대함의 묘사들은(1:12; 2:1-10) 문학적인 픽션인 셈이다.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왕의 의상을 걸친 저자의 ‘페르소나’로서 문학적인 장치를 활용해 솔로몬의 영광을 ‘무’로 만든 것이다. 하여 자끄 엘룰(Jacques Ellul)의 말대로 “이것은 어떤 신학적 논쟁보다도 더 큰 스캔들이다.”


그러면 “신학적인 스캔들”의 발의자 전도자가 솔로몬이 아니면 누구인가? 솔로몬의 위대함을 ‘무’로 만든 지혜자는 ‘코헬렛’이라는 필명의 여성일 수 있다. 너무 과격한가? 이유는 있다. 전도자의 말(1:1)을 서술하는 “전도자가 말했다”라는 표현이 세 번 출현한다(1:2; 7:27; 12:8). ‘코헬렛’ 자체도 모호한데, “말했다” 동사는 더 애매하다. 히브리어 단어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데, 두 번의 남성 동사(1:1; 12:8)와 한 번의 여성 동사(7:27)를 사용했다. 전문적인 독자들 중에는 필사자의 실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필사자의 오류가능성, 인정한다. 그러나 말놀이를 즐기는 코헬렛의 문체를 생각하면, 이것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애매하게 수수께끼처럼 처리하려 했던 의도적인 실수는 아니었을까?


동사의 이중적인 사용은 독자의 상상력을 발동시켜 언어라는 비밀의 방을 두드리도록 유혹한다. 과도한 추측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여성 지혜자의 존재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전문성을 띤 여성 지혜자들이 존재했었다(사사기5:29; 사무엘하14:2; 20:16). 예컨대, “지혜로운 시녀들”(개역개정, 사사기5:29)은 정확하게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가 아니라 귀족 계급의 지혜로운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문성을 갖춘 조언자들이다. 또한 요시야 왕의 개혁에 앞서 성전에서 방치되었다가 발견된 율법책의 진위여부를 묻는 제사장과 왕의 사람들에게 여자 예언자 훌다가 정경성을 확인시켜주고, 하나님의 계시를 왕에게 전달했다(열왕기하 22장). 이후 요시야 왕의 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글쓰기와 읽기 능력을 갖춘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방증하는 일화다.


코헬렛이 스스로를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여성 동사를 사용했지만 여성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코헬렛이 잠언의 수집자요, 창조적인 생산자답게 말의 세계를 즐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전도서의 저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따지는 것이 해석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 다면, 나는 잠언 31장에서 왕을 교훈하는 어머니(잠언 31:1-9)와 이른바 ‘현숙한 여성’(31:10-31)을 노래한 맥락을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고리를 끊지 못한 사회에게 해독제요, 수많은 신앙의 여성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말하련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고유한 이름을 말하지 않은 ‘코헬렛’(1:1)이라는 필명의 지혜 선생(12:9-14)의 가르침이 전도서다. 우리의 삶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아서 재미와 즐거움이 있지만, 모호함과 고통이 존재한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대중이 모이는 광장과 혼란에 맞서 투쟁하는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했던 현장성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고도의 수사적 전략이 녹아든 ‘해 아래’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찰과 비평적인 코헬렛의 견해들, 곧 그의 혹은 그녀의 말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수고로운 즐거움이다. 그러나 ‘찌르는’(12:11) 고통이 있으니 조심하시길.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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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30)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믿음은 무엇인가? 누군가를 또는 누군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받드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신비지만 생각과 질문이 없으면 맹신과 미신에 빠진다. 질문이 제거된 신앙은 맹신에 빠지기 쉽다. 질문은 사유의 영역을 넓히고 사유는 진리에 이르러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킨다. 묻고 답하기를 통해 서두르지 않고 참 진리로 이끄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신약성경에 있다.


예수님이 유대 지역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는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수가’라는 마을로 들어가셨다. 이곳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깝고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요한복음 4:3-5). 구약 본문에서 야곱이 우물을 팠다는 기록이 없지만, 그가 세겜 땅을 매입한 사실이 언급되었기에(창세기 33:19; 여호수아 24:32) 우물이 있었거나 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우물은 그리심 산 기슭에 있고, 수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예수님은 피곤했고, 우물곁에 앉았다. 낮 시간 중 가장 뜨거운 정오의 시간(6절), 예수님은 지친 여행자의 모습이다. 그때였다.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7절).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저녁 때 물을 길으러 우물로 나오곤 했다(창세기24:11). 이른 아침이나 저녁시간은 더위를 피하는 시원한 시간일 테고, 음식을 만들거나 씻기 위해 물이 필요한 때다.


그런데 뜨거운 정오의 시간,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집안에 응급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적으로 자신이 이혼한 상태여서 현재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4:17) 사회적으로 외면당하는 처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뜨겁고 더운 시간을 택했나보다. 여자들이 우물가로 모여드는 시간대가 아니어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물을 길으러 온 여자에게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7절). 사마리아 여자는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독자는 기대감이 충족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우물가에서 물을 좀 달라는 요청이 뭐 그리 유별난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는 행위 자체는 뜻밖의 행동이다. 예수님이 돌출된 행동을 하고 있음이 사마리아 여자의 말에서 곧 밝혀진다. 사마리아 여자는 물을 달라고 말을 거는 예수님에게 분명하게 대답한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십니까?”(4:9)


한마디로 정리하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겁니까?”라는 물음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세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다(9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과의 반감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주전8세기 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게 되었던 시점으로 소급된다. 앗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거주하고 정착하면서 생겨난 혼혈인이 사마리아인의 기원이 된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열왕기하 17:24-41). 사마리아 여자는 남북의 기나긴 반감의 역사적 배경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알았던 터였다. 그러니 여자는 자신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 예수님이 사회적 관례를 위반했다고 말한 셈이다. 겨우 물 한 잔 달라고 했을 뿐인데. 여자의 말은 남북의 문화적인 배타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의 암묵적인 거절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 걸기는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간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더 요청하지 않았지만, 기술적으로 말을 맞받아친다. 한글번역은 상대방을 낮추는 말투로 번역했지만, 예수님이 우리말로 대화했다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와 어법을 취하지 않았을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과 당신에게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은 그에게 구했을 것이고, 그는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4:10)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답변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내포하는 “하나님의 선물”을 “생수”와 동일시했다. 물은 생명을 이어가는 절대적인 필수 요소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생수의 근원”(예레미야 2:13)이라고 표명하신 바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생수를 주는 자,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자임을 밝힌 셈이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여자는 의구심을 풀지 않은 채 질문한다.


“선생님, 당신은 물을 길어 올릴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습니다. 당신이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습니까?”(4:11)


이 질문은 아직 예수님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터라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자의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야곱의 우물에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을 마셨는데, 예수님이 말하는 이가 야곱 보다 큰 자인가를 묻는다(12절). 여자는 우물의 긴 역사성을 말하며 “그가 야곱보다 큰 가”를 묻자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과 자신이 주는 물을 비교하여 좀 더 근원적인 영역을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개역개정)


예수님은 질문하는 여자에게 하나님과 자신의 연결된 정체성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자기 자신을 고갈되지 않는 샘물, 곧 영생하는 물이라고 소개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는 분(이사야 44:3)이라는 위로의 말씀과 겹쳐진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15절)라고 요청한다. 다급해보인다. 예수님이 처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주시겠소?”(4:7)라고 했던 상황이 뒤집힌 순간이다. 그녀는 삶의 갈증이 해소되기를 간절히 바랬겠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이곳으로 물 길으러 오지 않는데 관심이 있었다. 여자는 아직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선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다. 그녀가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던 것과 지금의 남편은 내연의 남자처럼 법적인 혼인관계로 묶이지 않은 것을 알고 계셨다(15-17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과거를 들추어 부도덕한 여자라는 수치심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태도에 진정성을 느꼈을 터. 그녀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제 보니 당신은 예언자셨군요.”(19절) 여자는 완전한 진리를 향해 한걸음 차근차근 다가서고 있었다. 희미한 깨달음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는 적합한 예배 장소에도 관심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여자는 예수님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유대인들 중 한 사람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자에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민족중심적인 배타적 태도를 벗어난 예수님의 답변이 돌아왔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오.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고 당신들이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오.”(4:21)


예수님은 나름의 역사적 정통성이나 민족적인 편견을 해체시키는 발언을 하셨다. 그럼에도 “구원이 유대인에게서”(22절) 온다는 것과 예배에 관한 선언적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24, 개역개정)


예수님은 구약 전통에서 매우 희귀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다윗 왕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했을 뿐인데(시편 89:26), 예수님이 언약의 계보에 따른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사마리아 여자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가 대답한다. “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불리는 이가 오실 줄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25절) 사마리아 여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공유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순간을 포착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라.”(26절) 예수님은 찬찬히 대화를 주도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여자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시키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소외된 여자에게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이 중대한 시점,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자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27절). 랍비 저작들에 의하면, 당시 남성은 길거리에서 여성과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자기 아내와의 대화도 금기시했던 사회적 분위기였으니 다른 사람의 아내와 대화하는 것은 타인들의 공론거리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노상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누구도 예수님께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27절).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때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와서 보라! 내가 말한 사람이 그리스도 아닌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첫 마디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로 갔다(30절).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하지 못했던 여자는 구원의 선물 “생수”를 그녀의 이웃들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39절).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개인구원을 넘어 마을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발걸음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자아의 변화까지 경험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와 그녀가 속한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예수님 사역 밖의 외부자들이 아니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는 남북의 오래된 배타적이고 민족적인 감정을 넘어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탄생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뜨거운 한 낯의 열기 아래 질문을 멈추지 않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기꺼이 대답하시는 예수님. 우물곁에 있는 둘의 대화 장면이 상상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는 것, 영과 진실함으로 드리는 예배에 더해진 배움이 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는 민족적인 배타성과 사회적 통념을 깨는 만남이요, 서로 존중하는 묻고 답하기는 새로운 깨달음과 예수 공동체를 세우는 아름다운 발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맹신이 아니라 질문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요, 완고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신학적인 증오와 대립을 혁파하는 본보기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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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29)


절박했던 어머니 하갈, 하늘의 약속을 받다


살다보면 동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더러 끝내 헤어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이 당당히 국가로 발돋움하기 사백년 전쯤(창세기 15:13),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12:2). 그러나 아브람 아내의 불임은 약속을 성취하는데 걸림돌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쯤 되었을 때다. 그는 아내 사래의 여종이었던 이집트 사람 하갈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16:1-3). 사래의 제안이 먼저였지만, 사람의 계획이 어찌 자기 뜻대로 흘러가던가. 하갈이 임신하자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4절). 아브람의 두 아내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어졌고,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갈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사래에게서 도망쳐 나온다(6절).


임신 중에 도망쳐 나온 하갈이 광야의 샘 곁에 앉았을 때였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온다. 그는 여호와이며 하나님이셨다(9, 13절). 여호와는 하갈의 이름을 부르며 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시지만(9절), 아브람처럼 동등하게 대응해 주신다. 그녀의 후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10절). 약속의 내용이 아브람에게 주신 것과 비슷하다(12:2). 이뿐만이 아니다. 천사는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지어준다(11절).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16:11, 개역개정)


이른바 ‘수태고지’ 장면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영웅 탄생과 관련된다. 이후 삼손(사사기 13:3-5), 요시야 왕(열왕기상 13:2), 예수님의 탄생이 그렇다(누가복음 1:31). 하갈은 어떤가.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처음으로 유일하게 여호와의 천사가 이름을 불러준 인물이다. 더욱이 족장 아브라함처럼 태어날 아들 이름과 신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하갈이 사래의 학대로 도망쳤지만, 그녀는 천사와의 만남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얻었을 테다.


그러나 약간의 긴장은 남아있었다. 하갈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뜻의 ‘이스마엘’이 들 나귀 같아서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 것이라는 신탁의 말씀을 듣는다(12절). 약속과 신탁을 받은 하갈은 자신이 앉았던 샘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13절). 그리고서 그 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 곧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이라고 지었다(14절). 그녀가 우물에 붙인 이름은 살피시는 하나님과 약속받은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감사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아브람과 사래는 여호와로부터 약속의 확증과 함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으로 개명된다(15:5, 15). 아브라함이 75세에 후손을 약속받았지만(12:4), 백세의 노쇠해진 몸이 되어 아들을 얻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고지 받은 대로(17:19)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다(21:3). 그런데 하갈이 이스마엘 출생약속을 받았을 당시 신탁내용의 현실화 조짐이었을까. 약속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아브라함이 젖을 뗀 이삭을 위해 전치를 열었을 즈음이다. 아브라함이 86세 때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16:16) 이삭을 놀렸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청한다. 이 일은 아브라함에게 큰 근심거리였다(21:9-11). 사라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상속을 공유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삭과 이스마엘은 동거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고민을 하나님이 아셨다.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셨지만, 하갈의 아들도 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다만 여호와는 이삭이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21:12-13). 결국 다음날 이른 아침 아브라함은 빵과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이스마엘과 함께 내보낸다. 얼마나 떠나왔을까. 십대 소년 이스마엘과 하갈은 인적이 드문 ‘브엘세바’(맹세의 우물) 광야에 이르렀다. 가죽부대의 물은 바닥났다. 하갈은 아들을 관목 덤불 아래 있게 했다(14-15절). 흙먼지 날리는 건조한 땅에서 자라난 관목의 그늘이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충분히 식혀주지 못했으리라.


하갈은 아이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소리 내어 울었고, 하나님이 소년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16절). 아들이 죽을까 염려하는 절박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광야는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장소다. 해설자는 하갈의 울음만을 기록했는데, 큰 소리로 우는 엄마를 보며 아들도 울었나 보다.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들으심이 독자의 마음을 이완시킨다. 이때였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의 이름을 불렀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7-18, 개역개정).


하갈이 아브라함처럼 땅을 약속받는 것은 아니지만, 족장 아브라함이 약속을 재확인 받은 것처럼 하갈역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16:10; 21:18). 하갈이 아브라함 족장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약속의 담지자가 된 셈이다. 마치 여자 족장처럼 보이지 않는가?


바로 그때였다. 물을 찾지 못했던 하갈이 샘물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보게 하셨다. 위험한 광야길, 탈진으로 인한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이후 하나님이 소년 이스마엘과 함께 계셨고, 그는 바란 광야에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로 성장했다(20절). 아브라함 약속의 성취 과정에서 신실하지 못했던 부부 때문에 발생했던 가족갈등의 문제를 결국 하나님이 해결하셨다.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이삭만큼의 동일한 수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안에 살게 되었다. 하갈은 더 이상 사라의 종이 아니다. 자유인이다.


이후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이집트 출신 여자를 아내로 얻어주었다(21절). 하갈은 구약에서 아들의 아내를 구하는 유일한 여성이다. 아브라함이 고향 땅에 자신의 늙은 종을 보내 이삭의 아내를 구한 것처럼(24장), 하갈은 아브라함 족장의 역할과 많이 닮았다. 더욱이 하갈이 머물렀던 브엘세바는 이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왕이 서로 언약을 맺은 장소요(21:22-23),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한 장소가 된다(26:22-33; 46:1-5). 한 마디로 하갈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브엘세바’는 이후로 이스라엘 족장들이 하나님을 만나 약속을 받는 거룩한 땅이 된다.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쳐 나와 머물렀던 수르 광야의 ‘브엘라헤로이’도 마찬가지다(16:14). 이후 이곳에서 이삭이 머물게 된다(24:62; 25:11). 놀랍게도 비천한 노예출신의 하갈과 하나님이 만났던 장소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중요한 장소가 된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하갈의 인연은 간단치 않다. 하갈은 아브라함 집안의 자식을 낳아주는 대리모, 그 이상이었다. 하갈이 이집트인 종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내’(히브리말, “잇샤”, 16:3; 개역개정, “첩”)였다. 하갈은 위기 순간마다 찾아오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거듭 받았으니 아브라함과 비슷하다. 하갈이 노예 신분으로 아브라함 집안에 들어왔으나 하나님은 그녀를 자유인으로 바꾸셨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 광야에서 하갈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는 이스라엘 족장 역사에서 언약을 확증하는 신성한 장소였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남 경험은 지리적, 혈통적 경계를 넘어 이집트인 여종 하갈에게도 적용되었다. 하갈의 관점에서 약자의 편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오롯하다. 하여 하갈 이야기는 노예, 추방된 자, 여자, 과부, 억울한 자들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구속역사’라는 성경의 거대담론에서 단절과 소외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선의가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보여준 희망의 이야기다. 헤어짐이 끝이 아니라 모두의 공존이 허락되는 공존의 아름다움이 움트는 이야기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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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8)


왜 여자 예언자 훌다인가?


    한 사람의 의인이 패역한 나라에 내려질 재앙을 막을 수 있는가? 올바른 지도자 한 사람이 국가의 위기를 모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일시적이지만, 악행에 대한 심판의 연기는 가능하다. 국가적 재앙위기를 타개할 기회의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주전 7세기 남 유다 땅의 요시야 왕이 그 본보기다. 요시야 왕은 할아버지 므낫세 왕의 악행을 종결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 잘 알려졌다(주전640-609년). 그가 어떻게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을까. 왕의 과감한 개혁의지만으로 가능한가? 요시야 왕 통치시간 동안, 개혁 실행에 결정적 추진력을 제공했던 여자 예언자 훌다가 있었다. 훌다의 기록은 이스라엘 왕국 역사 한 귀퉁이 작은 일화로 존재할 뿐이지만(열왕기하22:14-20; 역대기하34:22-28), 새봄을 알리는 전령처럼 낮은 땅의 풀꽃으로 왔다갔다. 훌다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몇 안 되는 여자 예언자들(미리암, 드보라, 이사야의 아내, 노야다)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왕실의 기득권층 틈바구니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요시야 왕은 겨우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았다(열왕기하22:1). 우상숭배를 걷어내지 못한 그의 아버지 아몬 왕이 신복들의 반역으로 암살당한 이후 왕위에 올랐으니 그 길이 쉬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 눈에 정직하고, 다윗의 길로 행하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는 행보를 보여준 왕으로 평가받는다(2절). 그의 출생이 남달라서였을까? 실제로 그가 태어나기 약 3세기 전(주전10세기)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이 벧엘에 신당을 짓고 제사할 때, 그의 출생은 유다 출신 익명의 예언자에 의해 예고되었다(열왕기상13:1-2).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은 요시야가 통치한 시기, 주변 국가들의 상황은 때마침 북이스라엘을 파멸로 이끈 앗시리아가 제국의 자리에서 바벨론에 의해 퇴출당하는 위기 상황이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가나안 지역의 작은 나라인 남 유다는 일시적인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 통치의 모범이어야 할 이전 이스라엘 왕권의 타락은 국가적 파멸을 향해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었다. 때문에 왕실 권력과 종교권력의 타락을 꾸짖고 고발한 예언자들의 활동은 각종 권력의 중심부와 복잡하게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언자의 출생 예고에 따라 어긋남 없이 태어난 요시야 왕이 20세 갓 넘은 때였다. 그가 서기관 사반을 총책임자로 임명하고 성전 보수공사를 시작했다(3절).  요시야 왕의 지시에 따라 성전 보수공사를 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한 귀퉁이에서 “율법책”을 발견한다(8절). 이 책을 서기관 사반이 읽고 충격을 받아, 왕에게 가져가 왕 앞에서 낭독했다(10절). 왕은 사반이 읽어주는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으며 애통해 했다(11절). 요시야 왕은 대체 율법책의 어떤 내용 때문에 이토록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을까? 

   학자들은 이 책의 정체를 놓고 여전히 논쟁 중에 있지만, 이른바 율법서 오경을 일컫는 “그 율법 책”(히브리말, “쎄페르 핫토라”)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여호수아서, 느헤미야서에서 발견된다(신명기28:61; 29:21; 30:10; 31:26; 여호수아1:8; 느헤미야8:3). 책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지 않지만, 모세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성문화된 언약의 가르침이 오랜 동안 준수되지 않고 성전 구석에 방치된 채로 긴 세월 지나온 것만은 확실하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힐기야 대제사장과 서기관 사반, 사반의 아들 아히감,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왕의 수행원 아사야에게 명령하기를(12절), 그 책 내용에 대해 여호와께 물어보라는 것이다(13절). 그러니까 요시야는 “이 율법책”에 대한 신성한 승인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왕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여자 예언자 훌다를 찾아간다. 이 일행들 중 아히감은 이후 심판과 회개를 외치는 예레미야 체포와 기소, 살해의 위협에서 구해준다. 이때 악볼의 아들도 이 일에 관여한다(예레미야26:22, 24). 왕의 명령을 받고 훌다를 찾아간 사람들의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거짓 예언자들과 싸우며 회개를 외치는 참 예언자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지식의 사람들로 보인다. 

    이들이 찾아간 훌다는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했던 살룸의 아내였다(14절). 훌다의 남편 살룸의 직업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역대기하34:22).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의복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책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왜 그들은 훌다를 찾아 갔을까. 당시 예레미야(예레미야1:2), 스바냐 예언자가 활동하고 있었다(스바냐1:1). 이들이 여자 예언자 훌다를 찾아온 이유가 생략되었지만, 대제사장을 비롯해 왕실의 사람들이 그녀의 학자적이며 예언자적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일 테다. 남성중심의 권력 엘리트 집단에 속했던 다섯 명의 남자들이 예복 관리인의 아내였던 예언자 훌다를 찾아간 장면을 상상해 보라. 어떻든 자초지정을 들었을 훌다는 자기를 찾아온 대제사장과 왕이 보낸 사람들 앞에서 왕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다. 훌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말씀, 곧 “예언”을 정확하게 전한다. 

   훌다는 유다의 왕이 읽은 책의 내용대로 예루살렘과 그곳의 거주민들에게 재앙과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한다. 그녀는 이곳을 향해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않을 것과 그 이유를 밝힌다.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는 신탁의 말씀이다(15-17절). 그리고서 유다 왕 요시야에게 줄 신탁의 말씀은 조금 달랐다.

내가....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19-20절)


훌다 예언자는 앞으로 일어날 바벨론에 의한 멸망을 기정사실화했지만, 요시야 왕만큼은 비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러니까 심판의 때가 닥칠 것이지만, 적어도 요시야 통치기간 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로였다. 훌다가 국가적인 심판이 내려질 것을 전했지만, 국가의 최고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신실함이 심판을 연기시킬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때 훌다는 하나님 말씀의 대행자요, 성전에서 발견된 책을 판독한 해석자 곧 율법학자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열왕기와 역대기 저자에 의해 훌다는 요시야 왕이 읽은 책이 거룩한 문서라는 것을 승인한 처음 사람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제 훌다 예언자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은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의 개혁을 서두른다. 요시야 왕은 제사장들, 선지자들, 유다 모든 사람들, 곧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전으로 불러 모아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낭독한다. 거기 모인 온 회중은 여호와 말씀 앞에서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하고 언약의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한다(23:1-3). 요시야는 마치 그 먼 옛날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을 향해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6:5) 권고한 것처럼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새롭게 했다. 

    물론 반 가나안적인 개혁을 시도한 왕이 요시야만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 요아스(열왕기하12장), 예후(9-10장), 히스기야(18장)가 있지만, 성전 재정비와 함께 거룩한 문서의 발견과 승인과정은 남달랐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과 정경의 확실성을 보증한 훌다 예언자의 말을 듣고 백성들과 언약갱신의식을 행하고, 곧바로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훌다는 이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시대 개혁의 물꼬를 열어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이다. 동시대 예언자였던 예레미야와 스바냐처럼 책을 남겼거나 더 이상의 활동기록이 없지만, 요시야의 개혁에 불을 지피고 가담했을 것은 자명하다. 

    왕실권력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 역시 남성중심으로 조직화된 사회의 한복판에서 훌다는 낮은 땅에 피는 새봄의 꽃처럼 왔다가 사라졌지만 훌다의 후예들은 멈추지 않고 어두운 시대의 봄꽃을 피울 것이다. 지금도 훌다의 후예들은 남성 중심의 위계적이거나 폐쇄적인 신학의 영토에서 이름도 없고 빛난 영광도 없지만, 조용히 시대의 어둠을 뚫고 작은 촛불로 타오를 것이다. 언젠가 훌다의 후예들을 통해 조국 교회의 치우친 지도력의 불균형이 조정되는 때를 기대해본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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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7)


최초의 여성 예언자 미리암을 잊지 마오


사람이든 사건이든 기억은 약속과 다짐을 동반하곤 한다. 지나간 역사의 인물을 기억하여 지금여기로 불러내는 것은 현실의 경험을 새롭게 하여 공공의 반성적 성찰을 위함이다. 주전 8세기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미가 예언자가 기억해낸 인물들이 있었다. 12 소예언서들 중 가장 중심에 위치한 미가는 ‘남왕국의 아모스’, 또는 ‘작은 이사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남 유다의 사회정의를 파탄으로 몰고 간 당대의 정권(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 미가 1:1)을 향해 거침없는 고발을 퍼부었던 예언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변론하겠다는 여호와의 뜻을 전하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묻혔던 첫 여성 예언자 미리암의 존재를 사람들의 잠자던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모세의 누이로서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후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미리암이 거명된다. 그것도 모세와 아론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가 6:4)


이 신탁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에서 미리암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계시의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한 예언자였음을 똑똑히 밝힌다. 그러나 대체로 신앙의 독자들은 미리암을 모세의 누이로만 기억할 뿐, 그녀가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활동한 것을 지나쳐버리곤 한다.


왜 우리는 미리암을 최초의 여성 예언자로 즉시 기억해내지 못할까? 미리암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로 기록되었지만(출애굽기 15:20), 사사시대의 예언자이며 사사였던 드보라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경 이야기에서 일곱 번 등장하지만, 모두 간결하게 언급되고 무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출애굽기 2:4, 7-9; 15:20-21; 민수기 12:1-16; 20:1; 26:59; 신명기 24:8-9). 그러나 비록 작은 분량의 기록일지라도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미가 예언자의 입을 통해 다시 전해진 것처럼, 미리암의 예언자적인 사명은 가볍지 않았다.





미리암의 이름은 그녀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듯 보이는 구원의 중요한 시점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미리암의 정확한 히브리말 발음은 “미르얌”이다. ‘쓰다’ 또는 ‘모질다’라는 뜻의 “마르”와 ‘바다’라는 뜻의 “얌”의 합성된 형태가 “미르얌”이다. 출애굽기 내러티브 흐름에서 ‘물’은 중심적인 은유다. 미리암은 어릴 적부터 물과 인연을 끊을 수 없는 모질고 혹독한 바로의 폭압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성장했다. 이집트의 바로가 히브리 노예들의 폭발적인 인구성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인구 억제정책의 일환으로 태어나는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나일 강물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다(출애굽기 1:22). 바로의 영아대학살 정책이 실행되는 절체절명의 시점, 어떤 레위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2:2).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모세였다


레위인 부부는 바로의 명령에 불복종했지만, 더 이상 아기를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아기의 어머니는 갈대 상자를 만들어 방수 처리하고, 거기에 아기를 눕혔다. 그리고 남자 아기의 누이는 상자를 나일 강에 띄우고 따라가며 지켜보았다(2:4). 아슬아슬한 상황, 마음 조리며 따라갔을 아기의 어린 누이는 결정적 순간을 만나게 된다.


때마침 바로의 공주가 강가에 나와 있었다. 공주가 갈대상자에서 울고 있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를 발견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소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주에게 가서 유모를 소개하겠다고 제안한다(2:6-8). 소녀는 대담했다. 한참 후에나 이름이 밝혀질 소녀 미리암이 대화의 주도권을 갖고 공주를 설득했고, 자신의 어머니를 공주에게 소개시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지만, 소녀 미리암의 민첩한 판단력과 지혜는 장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할 어린 생명을 구했다. 그뿐인가, 단절될 뻔한 가족관계를 묶어주는 도구였다.


이후 미리암은 이야기 중심에서 사라졌다가 ‘홍해’(히브리말, “얌-쑤프”, ‘갈대의 바다’, 13:18)를 건넌 후에 다시 등장한다. 이때 미리암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했고(15:19),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15:20)으로 소개된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여성 예언자들(사사기 4:4, 드보라; 열왕기하 22:14, 훌다; 이사야 8:3, 이사야의 아내; 느헤미야 6:14, 노아댜) 중에 첫 사람이었다. 그녀는 고대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독특했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체로 결혼한 여성이며 남편과 자녀를 두었기에 이무개의 아내나 어머니로 소개지만, 미리암은 결혼한 여성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미리암은 이른바 ‘바다의 노래’(15:21)를 부르며 여성들을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예언자였고 음악가였다. 예언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탬버린)를 잡고 나서자 모든 여인들이 탬버린을 들고 동그란 원을 그리며 함께 춤췄다(15:20). 이때의 현장을 상상해 보았는가? 고단했을 두 발은 진흙으로 더러워졌지만, 구원과 자유를 얻은 최고의 순간에 미리암의 인도를 따라 모든 여성들은 춤추기로 작정했다. 이때 미리암이 회중을 향해 노래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양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1)


백성이 바다를 건넌 후 모세가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찬양하는 노래를 공동체와 함께 불렀을 때, 모세가 불렀던 첫 마디는 미리암의 노래와 같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1) “내가 찬송하리니”로 시작된 모세의 찬양은 미리암의 인도에 따라 공동체가 함께 불러야할 구원의 벅찬 감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름에 ‘바다’(“얌”)를 품었던 “미르얌”, 그녀는 히브리 노예의 어린 생명들에게 죽음의 강이었던 나일 강에서 동생 모세를 구하려고 민첩한 지혜를 발휘했던 소녀였다. 이제 그녀는 예언자가 되어 위협적인 바다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자손들과 기뻐하며 회중을 인도하고 있다. 그녀는 확실히 모질던 옛 세월과 현재의 구원을 연결시키는 물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단한 광야 여정 때문에 이스라엘 후손들이 선물로 받은 자유와 구원의 감격은 시들해졌는가. 지금까지 조화로운 지도력을 보여준 모세, 아론, 미리암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이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구스(에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취한 모세의 결혼을 비방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민수기 12:1).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족장의 딸 십보라였기에 모호하다. 마치 모세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세의 두 번 결혼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해석자들은 십보라가 구스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여겨 구스 여자와 십보라를 동일인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뒤늦게 모세의 결혼을 문제 삼았을까. 문제는 모세의 결혼이 아니었다. 아론과 미리암의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흥미롭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12:2)라고 말한다. 지도력 문제를 둘러 싼 가족 간의 갈등인 셈이다. 이 말을 여호와가 들으셨다. 이 때문에 여호와는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부르셔서 모세를 “나의 종 모세”라고 칭하시며 모세의 독보적인 지도력을 확인시키셨다(12:4-8).


아론과 미리암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피부병을 앓게 하셨다(12:9-10). 미리암은 모세의 중보로 회복되지만, 이스라엘의 캠프 밖에서 일주일 동안 격리되어야 했다. 이때 백성들은 그녀가 다시 캠프로 돌아올 때까지 행진하지 않고 기다렸다(12:15). 이후로 이스라엘이 신 광야의 가데스에 머물렀을 때 미리암이 죽고, 거기에 매장된다(민수기 20:1). 그때 거기서 마실 물이 없어 온 회중이 불평했고,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샘물이 솟아나 짐승들까지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로 아론과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통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 이른바 므리바 사건이다(20:5-13).


이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입성하기 직전 모세의 지위는 여호수아에게(신명기31:7), 아론은 엘르아살에게 계승된다(민수기 20:26). 구원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예언자였던 미리암을 누가 계승했는가? 드보라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없다. 미리암의 선지자적인 활동의 직접적인 기록이 없어 신앙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거나 기억되지 않지만, 그녀는 모세와 아론과 나란히 백성들을 인도하며 지도력을 발휘한 예언자였다. 다행히 이것을 기억한 미가 예언자의 기록이 남았기에 우리는 다시 결혼하지 않은 자매, 최초의 여성 예언자 미리암을 되짚어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미리암의 뒤를 이어 예언자적인 소명을 간직하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벗들과 구원의 감격을 구성지게 노래하고 싶다. 그때 혼돈의 바다를 마른 땅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구원을. 그 후 1,500년의 세월 지나 죽음과 어둠의 장막을 뚫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리고 또 다시 4월,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며 혼돈과 어둠의 시간을 견디는 모든 이들과 함께.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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