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3)


행동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믿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하느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고 말이다. 그 때 나는 ‘너와 나’라는 문구에서 ‘와’가 하느님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영어로 보면, ‘You and Me(너와 나)’에서 ‘and’ 같은 존재가 하느님으로 정의하고 싶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과 자연 그리고 영원과 순간을 연결해주는 고리로서 하느님이 의미 있다고 답변했다.


철저히 존재론의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이 있다. 어떤 개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이다. 존재의 유무에 집착하여 자신들이 믿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마련해야 안심이 되는 이들이다. 가치로서 또는 관계성으로서 가 아니라 개체성을 가지고 물질적인 형태를 지녀야 존재한다고 보는 이들이다.


어느 날 만장(萬章)이라는 이가 맹자에게 질문을 했다.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천하를 넘겨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어쩌면 그의 물음 핵심은 선양(禪讓)에 있었는지 모른다. 유가(儒家)에서는 요(堯)가 순(舜)에게 천자(天子)의 권한을 평화스럽게 넘겨주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만장의 질문 속에는 그런 자부심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답한다. 요(堯)나 순(舜)의 훌륭한 결단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하늘[天]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존재론에 집착하는 이들은 거푸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늘[天]은 어떤 존재냐고 말이다. 이에 대해 ‘요에서 순에게’의 매개주체가 하늘[天]이라 답할 수 있다. 영어식으로 말하면 ‘From Yao to Shun’에서 ‘from~ to~’가 하늘인 셈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주었다.’ 만장이 물었다. ‘하늘이 주었다는 건, 상세하게 명령했다는 겁니까?’ ‘아니다. 하늘은 말[言]로 주지 않고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줄 뿐이다.’(曰 天與之. 天與之者, 諄諄然命之乎? 曰 否. 天不言, 以行與事示之而已矣.)” - ≪맹자≫,<만장장구 상> 5장 4절


음성언어가 지배적이었던 시절에는 진리가 음성언어로 선포된다고 생각했다. 하늘께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음성으로 들려줄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높은 지배계층일수록 음성언어가 익숙하다. 명령을 내리면 아랫사람들이 기민하게 움직여주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것은 낮은 계층의 몫이고 말하는 것은 높은 계층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지시하고 명령하는 이들은 결과물에 집중한다. 자신이 내린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는지를 점검할 뿐이다. 어떤 마음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일의 결과가 산출되었는지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결과물을 잘 점검하고 그것을 확장시켜 다음 결과가 생산되기만을 기대한다. 자신의 말과 그것으로 인해 산출된 결과물이 정확히 맞았는지를 비교한다.


맹자의 말은 기존의 사고를 전복시켰다. 기존의 사람들은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하늘께서는 말만 해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늘은 황제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인 명령권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맹자는 하늘은 행동하고 실천하는 분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백성들에 의해 점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라미드 체계는 위로 올라갈수록 명령을 하달하는 개체는 줄어들고 권력은 강해지는 구조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개체 수는 많아지고 권력은 약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은 가장 낮은 단계에 위치하고 있고 하늘은 가장 높은 단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맹자는 가장 낮은 단계의 백성과 가장 높은 단계의 하늘이 하나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하셨다. 그때 유대인들이 에워싸면서 말한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고 말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임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임재할지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미리 정리해 놓고 있었다.


구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메시야의 임재 방식이 예수의 방식과 너무도 다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자신들의 논리에 의하면 메시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으로 임재하여 예전 다윗왕조의 영광을 회복시켜야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논리에 전혀 맞지 않았다. 예수의 논리는 기존의 논리 해체시켰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요한복음≫ 10장 25~27절


유대인들은 언어에 민감했던 민족이었다. 구약의 인물들이 음성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소통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모세 이후 돌이나 양피지 혹은 파피루스에 기록하는 문자언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처럼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로 바꾸는 일이 유대민족에게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이자 특권이라 생각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인식방법대로 음성언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밝혔지만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민중들과 밀접하게 소통하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구조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天子]은 높은 신분을 지녀야 하고 단지 음성으로 명령만 내리는 상부의 최고 권력층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동의 저술 ≪천 개의 고원≫을 통해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킨다. 기존의 학문체계는 나무와 같아서 수직적이며 논리적이고 위계질서가 있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수목(樹木)형 사고구조에 반(反)하는 구조가 리좀이라고 주장한다.


리좀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관계성을 맺는 수평적 구조이다. 리좀 구조에서 존재의 의미는 관계성이 얼마나 견고하고 강하게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나누어 서로의 이해가 만나고 생각이 교차되면 결정하는 의사소통구조를 가진다.


예수는 스스로를 강력한 명령권을 지닌 왕이나 절대자의 설정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관계에서 출발하여 결국에는 친구관계로 지내기를 원했다. 부모 형제와 같은 혈연관계도 같은 생각을 나누는 공동체 관계로 재정립하였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피라미드식의 수목형 구조가 아니라, 리좀과 같은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수평관계로 재영토화되기를 원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실천행동에 대해서도 의문을 지녔다. 음성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구체화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부정하려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말이냐 행동이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예수를 신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것임을 지적하였다.


예수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밝히 보이지만,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가리어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을 말씀하셨다. 무엇을 볼 것이냐 하는 것에 앞서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중대한 의미인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대상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귀한 선물일 수 있겠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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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2)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


중학생 때 프랑스로 떠났던 알고 지내던 아이가 방학이 되어 찾아왔다. 우리나라에서 너무 말썽을 피운 까닭에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 할 수 없이 부모가 낯선 땅으로 보내버렸던 아이다. 쫓기듯 떠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당당하고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내던 내내 학생들과 학교로부터 제발 곁에서 떠나달라는 요청을 받아왔던 아이였다. 잘 지내냐는 의례적 인사를 건네고 나자 그 아이는 신이 나서 지나간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랑스 가길 잘했다고 너무도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기에 도대체 우리나라와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크게 씩 미소를 짓더니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의 기를 죽이는 교육이라면, 프랑스의 교육은 아이의 기를 살리는 교육인 것이 차이점입니다.”


공자에게 가해진 질문 중에 참된 인간(군자)과 속 좁은 인간(소인)에 대한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눈에 두드러진다. 특히 ⟨안연⟩편은 이러한 물음들이 잘 집약되어 있다. 그 중에서 아름다움[美]과 그 반대인 어그러짐[惡]에 대한 구절이 눈에 뜨였다. 당시 미적 기준이 균형과 조화에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어그러짐의 개념이 선악의 개념과 상통했다.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참된 인간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어그러짐을 이루어주지 않는다. 속 좁은 인간은 그 반대다(子曰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 反是).” - ⟪논어⟫,⟨안연⟩12장 16절


참된 인간은 사람들이 조화미를 갖추도록 돕는다. 그러하기에 조화를 깨뜨려 어그러지게 만들지 않는다. 개인 내면의 조화는 물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어그러짐 없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것이 참된 인간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속 좁은 인간들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 모든 관계들이 깨지고 어그러지도록 만든다.


이 말은 ⟪논어⟫, ⟨자로⟩편의 ‘참된 이는 동일하게 만들지 않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속 좁은 이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동일하게 만들려 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구절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 억지로 획일적으로 만들고자 하면 거기에는 분명 어그러짐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동방에서는 서방의 선악 개념 대신에 미추(美醜)의 개념이 존재했다. 미추의 개념에서도 서방의 미학이 말하는 비율이나 배율과 같은 미에 대한 규정이나 산술적 법칙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이지러지거나 어그러짐 없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아름다움이라 여겼다. 동방에서는 미추 또한 존재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 하는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종종 아름답지 못한 이들을 대면한다. 내게 불편함을 주어 그를 만나거나 대화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대하면 습관적으로 그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일까를 측정하게 된다. 바탕이 나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환경이 그를 그렇게 유도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부딪힘 없이 원활한 것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가 나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어그러진 사람으로 비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사람 중에는 본질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때로는 관계가 나빠서 아름답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세기⟫ 앞부분에는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온 우주를 창조하면서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 구절이 등장한다. 너무도 흡족하고 아름다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좋았다’의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이것은 후에 선(善)하다로 확대 해석되지만, 원래 잘 어울린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에덴동산은 이런 아름다움의 집약체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운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겨났다. 상대의 마음을 의심하고 상대로부터 마음을 분리하면서 문제가 일어난다. 마음으로부터 어그러짐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당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맡기기 시작했다.


어그러짐은 얼른 회복시켜야 한다. 어그러짐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은 끔찍하다. 하나님은 어그러진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어그러짐 때문에 발생한 일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지도록 한다. 땅을 갈아야 먹고 살고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아픔을 알게 하였다. 어그러짐의 결과는 수고이고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 ⟪창세기⟫3장 22-23절


처음의 사람들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나서 인간들은 더욱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살인과 도둑질,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그러짐을 성서는 죄악이라고 한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 바벨탑의 사건, 노아 홍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추악함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사야⟫는 아름다움이 회복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이사야 35장 1-2절).


이사야는 아름다움이 회복된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묘사한다. 사람과 자연, 인간과 동물이 어울려 지내는 상태가 낙원이라고 말씀한다.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모든 어그러진 사람들을 바르고 아름답게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을 분류시키고 더욱 어그러지게 만들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단숨에 단단한 어그러짐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기 때문에 그를 향해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물론 완벽히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름다움을 회복하려 애쓰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분열과 어그러짐을 펼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습관화된 공동체는 예수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공동체에서는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사건이 꾸준히 일어나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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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1)


이 땅에 남은 자


때때마다 전쟁의 기운을 부추기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지인은 이 나라를 떠나 안전한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몇 년을 갖은 노력을 기울이더니 기어이 얼마 전 짤막한 인사말을 남기고 우리나라를 떠났다. 한결 편안해진 그는 괜히 거기 있는 이유 없다며 얼른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전자메일을 보냈다.


문득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자기 가족은 아무 문제없다며 하얀 이를 온통 드러내며 웃던 오래전 알던 이가 생각났다. 미국에 잠시 공부하러 갔을 때, 작은 아이가 태어나 그 나라 국적을 획득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 국적을 가진 이들과 그의 부모는 서울의 모 집결지로 모여 안전한 나라로 후송이 된다는 걸 엄청 자랑했다.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 ≪열왕기하≫ 24장 14절


전쟁은 땅을 황폐화 시킨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파괴하여 무기력하게 만든다. 전쟁은 훌륭한 인재들을 소멸시킨다. 쓸 만한 사람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모조리 끌려가거나, 뜨거운 마음으로 적에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거나 한다. 결국 전쟁이 지나간 뒤에는 소위 별 볼일 없는 사람들만 그 땅에 겨우 남아있게 된다.


‘장자’는 불쑥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기존 생각을 뒤엎어버린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정작 쓸 수가 없고, 쓸모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쓸 수 있다는 역설을 내놓는다. 근본적으로 과연 쓸모가 ‘있다 없다’의 핵심인 ‘쓸모’라는 게 과연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갖는다. 나아가 우리가 정작 사용하는 것이 있음[有]인가 없음[無]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는 까닭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쓸모’는 알지만 ‘쓸모없는 쓸모’는 알지를 못한다.(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 ≪장자≫, <인간세> 9장


장자는 그릇을 예로 들면서 과연 쓸모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철학적이며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그릇은 그 재질이 나무이든 금속이든 어떤 그릇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릇의 한 가운데인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 빈 공간에 음식을 담거나 물건을 담아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장자는 대나무나 금속으로 된 피리가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 대궁 자체가 아니라 피리에 뚫어놓은 빈 구멍을 통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있음[有]을 통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없음[無]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간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있음[有]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없음[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고대국가의 시스템의 하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전 분야를 떠받치고 있는 기층민에 대해 큰 관심을 두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의 눈에 이들은 그야말로 쓸모없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들 하부계층민이 없으면 곧장 국가시스템이 무너져버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부계층민이야말로 쓸모없는 쓸모였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장차 국가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리 알았고, 삶을 통해 국가의 꼴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간파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로 국가가 유지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알고 있었기에 예언자였고, 사람들의 눈치 안보고 정확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했기 때문에 참선지자였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내버리고 타국으로 가버리는 이들을 만류하기 위해 뒤따라가던 예레미야의 간곡한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아이라서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예레미야의 두려운 눈빛이 눈앞에 어른댄다. 무엇보다 이제 모두가 떠나고 짐승도 살지 않을 버림받은 땅이 될까 걱정하는 예언자의 근심어린 기도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린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 ≪예레미야≫ 31장 7-8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신다. 북방으로부터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겠다고 하신다. 그들 중에는 장애인과 여성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강하고 훌륭한 이들을 불러 모아 땅을 회복시키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약한 자 부족한 자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 1:27-28)”라는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어딜 가도 자신의 마음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날 수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 나라를 등지는 것이 더 힘든지 모른다. 이 땅에서 남은 자로 지내는 건 어떤지.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며 사는 것은 어떤지’라고 말이다. 그들은 아무 대답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땅을 떠났다.


결국 이 땅에 남은 자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가진 것 없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함을 맛보기로 했다. 동물조차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되어도 괜찮다. 비루한 존재들만이 듬성듬성 겨우 생존하는 곳이어도 괜찮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지낼 것을 다짐했다.


간혹 전자메일이 이 땅을 떠난 이들로부터 온다. 이 땅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쓸모없는 인생들이 득실대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투덜대던 이가 이제 다시 쓸모가 있음직 하니까 다시 오고 싶다고 한다. 이제 돌아와도 더 이상 쓸모 있는 자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도 굳이 이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예수께서 사람 낚는 귀재인 전문정치인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조직 또는 기획능력이 탁월한 이들을 선발하여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평생을 지낸 우직한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그의 약속대로 예수의 제자들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믿음이란 나의 쓸모없음을 들어 쓸모 있음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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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0)


일생 추위에도


봄이 오면 꽃들이 서둘러 핀다. 긴긴 겨울을 지내온 온갖 생명체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꽃들은 잎보다 먼저 피어난다. 미처 물이 오르기도 전에 서둘러 꽃봉오리를 틔우는 꽃나무들의 고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건, 이른 봄날부터 부단히 그들과 소통해온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다.


추운 겨울을 강직하게 버티어온 이들만이 봄볕의 따스함을 누릴 수 있다. 온상 속에 숨어 겨울을 비켜간 이들이나, 겨울에 굴복하여 제 몸 얼려버린 이들은 봄날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온상 속에서 자란 꽃들은 향기가 거의 없다. 드러내는 모양이나 색상은 본래와 비슷하게 구현해내지만, 보이지 않는 향기만은 그러하지 못한다.


돈이나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가볍게 여기는 이들을 본다. 비겁하거 비굴하지 않으면 돈이나 권세를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돈이나 권세를 얻을 수만 있다면 자존심을 버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들이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곡조를 품어있고, 매화는 일생 추위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 《상촌집(象村集)》, 〈야언(野言)〉


조선중기를 살았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말이다. 그는 선조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할 때, 주위에서 집을 리모델링하라고 종용했지만, 누추하기는 해도 이정도면 예(禮)를 갖추기가 충분하다며 기둥 하나 바꾸지 않은 청렴한 선비였다. 신흠은 신숭겸의 후손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대학자였지만 늘 자신을 겸손하게 다스렸던 분이다.


오동나무의 존재가치는 가구나 악기의 재료가 되는 것에 있다. 서양의 대표 악기인 바이올린과 첼로는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로 만든다. 우리의 대표적 악기인 거문고와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다. 오동나무는 가벼우면서 단단하고 뒤틀림이 적으며 화기와 해충에 강하다. 성장이 빨라 10년 정도면 가구나 악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악기의 재료가 되기 위해서는 음이 잘 전달되면서도 변형이 적어야 한다.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야 자기 음색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음향학적으로 오동나무 재질 자체가 공명(共鳴)이 뛰어나고 오동나무의 고유진동수가 거문고나 가야금의 현 진동수와 유사하여 동조(同調)가 잘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흠은 세월이 지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노욕(老欲)을 부리는 이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젊은 시기에 지녔던 강력한 패기와 날선 정의로움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퇴색하여 시대의 흐름에 쉽게 휩쓸리고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본다. 연령에 관계없이 오동나무는 악기 재료로 사용된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매화는 봄을 여는 꽃이다. 매화향이 사방 은은히 번져나면 비로소 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봄을 적확하게 말해주는 매화는 자신이 봄을 장식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둔다. 그러나 겨울이 길어 봄이 더디 오기 때문에 또는 겨울이 지루하게 머뭇거린다고 해서 서둘러 향을 함부로 내지 않는다.


불의함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향기를 내라며 엄청난 재물을 준다고 해도 매화는 억지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자연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의 힘을 빌려 억지로 피운 꽃은 제대로 향기를 피우지 못한다. 전혀 돈을 주지 않아도 올바른 시기가 되면 알아서 향기를 내놓는 것이 꽃들의 자존심이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 ⟪창세기⟫, 25장 31-34절


에서는 장자의 권한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다. 배고픔 때문에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팔아버린 어리석은 인물이다. 야곱은 치열하게 그 장자권(Primogeniture)을 가지려고 애썼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획득하려 집요하게 애썼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동생 야곱은 장자권을 획득한다. 아버지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욱 편애하였다.


장자의 권한이라는 것은 한 집안의 리더십을 의미한다. 장자는 집안을 대표하고 구성원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자기 자신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그런 태도로 한 집안의 리더가 될 수 없다. 에서는 대단히 무책임한 인물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에 대한 존중감도 충실함도 없다. 큰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자신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라 생각했다.


유목인에게 한 집안의 구성원은 숫자가 만만치 않다. 족장은 직계 가족 뿐만 아니라 방계 가족들까지 책임져야 한다. 양치기들과 종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한 많은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수월치 않은 일이다. 위협적인 대적들과 맞서야 하고 험난한 자연의 변화 속에서 결단해야할 일이 많다.


장자권 포기사건은 에서라는 한 개인의 도덕적 또는 신앙적 문제가 아니다. 한 공동체의 생존과 관계된 일이고, 그 공동체의 추진 방향과 그들의 속도를 결정짓는 리더십과 관계된 문제이다. 가벼이 자신의 권한을 팔아버리는 인물에게 장자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래서 장자 권한이 야곱에게 이양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묵인하셨나 보다.


정말 귀한 것들은 혼자 소유할 수 없다. 정말 귀한 것들은 공동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생존케 하는 구름과 공기가 그러하다. 우리를 둘러싼 계절과 우리가 살기에 적합한 온도가 그러하다.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하고,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불이 그러하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만물의 근원요소라 했다.


장자의 명분과 권한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던 야곱이나, 그것을 음식과 교환을 했던 에서, 둘 다 장자권을 소유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이 아직 그 권한이 아버지 이삭에게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매한 것은 무척 슬픈 사건이다. 장자권 매매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긴 예서와 가능하다고 믿은 야곱 간의 다툼이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온 산과 호수와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살 수 없다. 온종일 애쓴 노동의 피로를 풀어주는 달콤한 잠을 살 수가 없다. 별들의 반짝임과 자기 계절에 풍겨나는 꽃의 향기 역시 살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물질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우리 시대를 향한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다.


봄비가 내린다. 이 비 그치면 봄꽃들이 슬픔처럼 와르르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나면 태양이 기운을 높여 비로소 식물들을 생생하게 만들 것이다. 내면에 품은 향기를 함부로 내뱉을 수 없다. 꼭 필요한 시기가 되면 꼭 필요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이것이 이 시대에 향기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남은 자존심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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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9)


한 가운데 서라


처음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울 때, 넘어질까 조심하느라 페달을 세게 밟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조심하면 할수록 자전거가 자꾸 쓰러진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힘 있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갈 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자리에 멈추는 것은 곧 쓰러지는 일이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야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일을 맡았을 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게으르게 하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는 노련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일에 남보다 너무 앞서 나가도 안 되고 너무 뒤쳐져서도 안 된다고 한다. 신념과 이념에 대해서도 자신은 중도노선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이들을 본다. 중간의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충고한다.


이들이 말하는 중앙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언뜻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거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듯싶다.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중용(中庸)’이란 개념이 과연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또렷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대표적 사상 중의 하나인 ‘중용’을 언급하면서 주로 ‘중(中)’에다 방점을 두는 모습을 본다. 이는 사물의 가운데에 자신의 위치를 두는 공간적 의미로서 중(中)을 강조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중용의 개념에서 ‘용(庸)’을 배제시키면 안 된다. 여기서 용(庸)이란 어떤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시간적 단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군자는 어우르지만 휘둘리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 한 가운데 서서 기울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중용》 10장 5절


군자는 다양한 것을 아우르고 모든 사람들과 어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의견도 포용할 수 있고, 어떤 사람과도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중심이 확고하지 않아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한다.



올바른 지도자는 한가운데 서서 모든 이들의 핵심이 되고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소심하게 몸 사리는 행동을 하거나, 치우지지 않으려 가만히 아무 입장을 취하지 않고 기회만 탐색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중심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전거가 중심을 잡으려면 페달을 밟아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하듯, 중용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밟고 있는 삶의 발판을 힘차게 디뎌야 한다. 내 삶의 바탕을 면밀하게 살피고, 내가 처해있는 영역을 파악하여 자신의 입장(立場)을 공고하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내 발로 삶을 밟아나가는 실존적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위 구절 바로 앞부분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나온다.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북방의 강함인지 남방의 강함인지 되묻는다. 이어서 공자는 ‘남방의 강함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가르치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북방의 강함은 창칼과 갑옷 그리고 투구를 깔고 누워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싸우는 것만이 강함이 아님을 말했다. 상대를 포용하고 감싸 안으며 용서하는 것 역시 강함이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강함은 드러나는 외부로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아니라 내면에 세워져 있는 자기중심의 꼿꼿함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에게 유연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자기주체성 확립을 요청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려 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한 손 마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죄로 인해 병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회당의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앉아 예수의 강론을 듣고 있었다. 그의 눈이 예수와 마주쳤다. 예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아예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가운데 세웠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마가복음》 3장 3-4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총에 떠밀려 늘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병든 자를 세상의 중심에 세워놓으셨다. 당당히 모든 사람의 한 가운데 서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성서의 관심은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가 그를 주목했다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살았던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등이 굽어버렸다. 이집트인들에게 굽실거려야 겨우 생존할 수 있다는 걸 터득하고 살아왔다. 갑작스레 모세가 등장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였다. 자유를 얻으려면 쉽고 편하게 살아왔던 삶을 등지고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들은 불평으로 일관했다.


하나님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무기력한 걸음걸이를 바꾸어 올곧게 걷게 하셨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 (《레위기》 26장 13절)” 올바로 걷는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제 발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기 존재를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살아야 하는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자기의 생각을 세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기복적인 종교생활을 벗어버리고 주체적 자아로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실존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예수는 애굽의 종교생활로 복귀시키려는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항거하였다. 율법의 조항에 매여 사는 종속적인 신앙생활을 거부하였다. 신앙의 핵심은 종교적 규정에 의해 억압되고 피폐해져 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부여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선포하며 당당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였다.


좁은 골목을 지나치거나 가느다란 둑을 주저함 없이 내닫는 자전거를 본다. 불안함이 없어 보이는 자전거 탄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한다. 눈앞에 보이는 좁은 길을 두려움 없이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극복해가는 모습은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좌우의 흔들림 없이 곧바로 제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중용(中庸)의 신앙이다.


바람 불면 먼저 누웠다가 바람 그치면 먼저 일어나는 잡초들의 강한 생명력은 대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올곧은 뿌리에 있다. 보이는 줄기와 잎은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만, 결코 미동조차 않는 보이지 않는 땅속뿌리는 자기중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바람이 분다. 자전거 끌고 강변을 따라 에두르고 싶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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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8)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행사를 참여했을 때 간혹 만났던 진기한 장면들이 있다. 행사의 장(長)이 누구이며 좌우에 어떤 지위의 사람들로 위치가 정해지고 순서가 정해졌냐 하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대부분 미리 정해진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행사를 치르지만, 간혹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자신의 위치를 변경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발생하는 일이다.


따라서 행사를 준비하는 진행 팀이 정작 행사를 어떻게 의미 있게 진행할까 하는 것보다 자리를 잘못 지정하여 혹 지적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참석한 유력한 이들이 충분히 대접받는 위치에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으면 좋은 행사였다고 평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儒家)는 특히 형식에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가가 강조하는 ‘예의(禮儀)를 갖춘다’는 것은 적합한 형식을 잘 갖추어 행동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유가의 논리는 제도와 형식에 치중한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허례허식을 추방하기 위해 강력하게 반(反)-유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가에 대해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유가의 경전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단 한 번이라도 어떤 사람의 해설서가 아니라 직접 자기 스스로 유가 경전을 읽어보았다면 공자나 유가에 대해 그토록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편견이 직접 대해보지 않은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매우 강조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탕의 철학으로 인(仁)을 주장했고, 상호관계성을 위한 방법론으로 예(禮)를 주장했다. 이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관한 강조가 아니었다. 공자는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해 나갔다. 오히려 형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예식은 사치하기보다 검소해야하고, 장례는 형식 갖추기보다 슬퍼해야 한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논어》, 〈팔일〉 4장 3절


공자 당시에도 형식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시 관료들은 자신들의 집과 의복 그리고 마차 등을 화려하게 꾸며 일반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려 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관혼상제도 남들보다 능력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사치하게 행사를 치르곤 하였다. 위 문장은 행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외형에 치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근본적으로 관혼상제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공자가 말한다. 모든 행사에는 그 본래적 취지가 담겨있다. 좋은 일을 만났기에 축하하거나, 나쁜 일이 발생했기에 위로하려는 것이 기본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이러한 일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 실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다.


공자는 어떤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논어》, 〈이인〉 13장은 “예의 근본인 겸손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있겠는가(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라고 하였다. 예(禮)의 강조는 예의 틀인 예식(禮式)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예를 갖추게 만든 근본적인 정신인 겸손[禮讓]에 대한 집중이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특별한 절기가 되어 도로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걸하는 걸 목격한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이나 도움을 주는 이들이 모두 당당한 것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도움 주는 이들은 선행에 대한 자부심으로, 도움 받는 이들은 도움을 주는 자들에게 자부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또 다른 종교발생지에서는 큰 단위 액면의 지폐를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 바꿔 수십 명에게 나누어주면서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고 으쓱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구제한 사람의 수를 기억하여 나중 심판 때에 구제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죄를 감해준다는 교리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저 형식만 따라하는 한심스런 태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2절


한발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남을 돕는 일 자체를 인식하지 말라 하신다. 위 본문 다음에는“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오른손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인식 없는 구제를 하라고 한다. 은밀함을 유지 못하는 선행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 CIA 앞마당에는 ‘크립토스(Kryptos)’라 불리는 유명한 조각 작품이 있다. 미국의 CIA는 성서 구절에서 이름을 딴 조각을 앞마당에 세워놓아 자신들의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임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크립토스’라는 단어는 위 성서구절의 ‘은밀하게’의 그리스어이다.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등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단어이다.


크립토스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단어가 ‘신비동물학(Crypotozoology)’이다. 이는 미확인 동물종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과로서 각종 신화나 경전에 등장하는 신비한 생명체를 연구한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네피림(Giant)이라는 거인이나 요나를 삼켰던 거대한 물고기 등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를 연구하기도 한다.


‘은밀함’이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는 감추어져 알 수 없는 존재나 사건을 꾸며주는 말이다. 신앙적인 구제는 철저히 감추어지거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CIA 앞마당의 크립토스에 새겨진 암호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풀 수 없다고 단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신앙인의 구제는 영원한 미제(未濟)행위로 남아야 한다.


어딜 가나 끝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리에 앉으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끄는 게 싫기 때문이다. 실은 나의 존재나 흔적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나의 존재를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 속에서 취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 어떤 이는 바위에 이름을 새겨두기도 한다. 자신의 동상을 세워 길이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을 세우거나 구제기관이나 복지단체를 설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열심히 이름을 따서 지은 건물이나 구조물이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는 못한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기억보관장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의 기억에 입력이 되면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영원히 잊지 않으신다. 은밀함이란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인의 구제행위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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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7)


별을 헤아리는 까닭


안개가 짙게 낀 도로를 운전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몇 미터 앞만 겨우 보이는 상태에서 길을 더듬어 운전을 할 때면 지금 죽음의 언저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심장을 파고 든다. 안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갈 길의 앞을 조금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두렵다. 알 수 없음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움은 ‘알지 못함[無明]’으로부터 온다. 다음에 닥쳐올 위험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다면 아무리 큰 위험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작은 사건일지라도 미리 ‘알아차림[正念]’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다가오면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긴장(Suspense)과 놀람(Surprise)의 차이는 앞으로 닥쳐질 일에 대한 정보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깊은 산중의 길이라도 어디로 뻗어있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 두렵지 않다. 가벼운 길도 눈비가 심하게 오거나 나무가 우거져 한치 앞도 분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심각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때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 익숙한 낯을 하나라도 본다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주 먼 유목시절, 인류는 별을 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태양은 매 시간마다 위치를 변화시킨다. 달은 모양과 머무는 시간이 주기를 가지고 변화한다. 그러나 별은 적어도 계절이 바뀌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북극성이나 북두칠성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위치나 크기의 변화가 없다. 일 년 단위로 이동을 해야 하는 유목인들에게 별은 안정적인 푯대(Pole)이다.


역(易)은 농경민으로 정착하던 청동기시절 이전부터 존재하던 인류의 가장 오랜 철학이다. 만물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 ‘패턴(pattern)’을 파악하려 했던 역(易)철학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오르는 사상이다. 중국의 주(周)나라가 자신들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역(周易)》이란 책으로 편집하여 독점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인류의 핵심 사상이었다.


공자의 주역 해석서로 알려진 〈계사전(繫辭傳)〉은 역(易)사상이 어디로부터 출발했으며, 어떤 방법론에 입각하여 논리가 수립되었는지, 또한 장차 무엇을 탐구하기 위해 발전시킨 개념인지를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다. 공자는 역(易)을 통해 온통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와 역학관계 그리고 이들을 작동시키는 근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러러서 천문(하늘 무늬)을 관찰하고, 구부려서 지리(땅의 이치)를 살핌으로 보이지 않는 은밀한 것과 밝히 드러난 것의 원인을 안다(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知故).” - 《주역》, 〈계사전 상〉 4장 2절


찬찬히 문맥을 살펴보다보면, 자연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엄연히 규칙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설명이 마치 ‘카오스 이론(混沌理論, Chaos Theory)’과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미세한 사물의 작동원리가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와 같은 패턴과 방식이라는 면에서 ‘프랙탈 이론(回文, Fractal Theory)’과도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늘을 보는 것은 일정한 패턴[文]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신석기 수천 년을 지내온 인류는 하늘에 대한 움직임을 후대에게 구전으로 전승시키면서 통계를 축적시켜왔고, 어느 정도의 정보가 확보되자 이들을 분석하여 패턴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 앞서 파악한 패턴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정교함까지 갖추게 하여 도식화한 것이 64괘이다.




유목민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농경민인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이나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문화를 경계했다. 요셉의 공로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이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바로가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야곱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다(창세기 46장 34절)”고 답한다.


농경민인 이집트인들이 목축을 가증이 여겼기 때문에 고센 땅에서 살게 되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야곱과 그의 후손 역시 이집트에 살아감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농경문화에 젖어들까 몹시 경계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아브라함의 경우도 동일했다. 변화를 싫어하고 한 곳에 고착시키는 것을 즐기는 정주(定住)문화를 매우 위험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아브람)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창세기》 13장 14-15절, 15장 5절


‘하늘을 우러러 별을 세어보라’는 것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는 예수의 비유만큼이나 유목인에게는 익숙한 문장이다. 하늘의 패턴을 읽는 것은 지상의 복잡한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원리를 터득하기 위함이다. 수학적으로 정교한 해, 달, 별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원칙 없어 보이는 세상의 다단(多段)한 일들을 간파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조카 롯과 마음 아픈 헤어짐을 경험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나가 사방을 보라고 말씀한다. 앞이 막막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세상을 밝히 파악하는 능력을 부여하셨던 것이다. 사방을 관찰(觀察)하게 함으로 그것으로부터 매이지 않게 하셨고, 아무 것도 매이지 않음이 곧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


또한 롯이 거하는 성의 인근 성주들이 전쟁을 벌였을 때, 아브람은 훈련된 이들을 이끌고 나가 끌려간 롯과 그 성 사람들을 구출해온다. 전쟁 후 찾아올 수 있는 허탈함에 아브람이 젖을까봐 하나님은 그의 손을 이끌고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게 하신다. 별을 세어보라고 하시면서 하늘의 별들처럼 너의 후손이 이러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물론 여기서 말씀한 별의 일차적 기표는 아브람 후손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아브람 후손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이것을 메타적으로 분석하면 아브람의 후손은 유목민을 가리키는 기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별처럼 수적으로 많을 것이라는 의미 심층에는 별처럼 규칙적인 패턴을 가진, 즉 문양(文樣)을 지닌 후손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끝없이 반추하게 하였다. 반드시 그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패턴의식이다. 유목민이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떠돌아다녀 자칫 방황할 수도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어디든 떠날 수 있지만 반드시 일정한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공간에 대한 패턴의식을 훈련시켰다.


또한 하나님은 안식일 규정을 만들어 일주일이라는 개념을 알려줌과 동시에 시간에 대한 패턴의식을 심어주었다. 하루와 일주일이라는 미시적 시간패턴과 절기와 안식년이라는 거시적 시간패턴을 규정하여 이것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패턴의식으로 하여금 복잡한 세상의 사건들을 명료하게 간파하는 핵심원리로 작동하게 하셨던 것이다.


세상 일이 어지러울 때면 홀연히 별이 쏟아지는 밤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하늘 가득 흐드러진 별들을 헤아리다보면 별들이 지닌 무수한 은유를 유추해낼 것이다. 사건의 원인과 방식을 일정무늬로 구성하여 보여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일들은 스스로 해결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가끔 별을 보아야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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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6)


문장을 모두 암기한다고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던 구약학 전공자가 한 초등학교를 들렀을 때 받았던 충격을 전해주었다. 이스라엘 초등학생들은 4학년 정도가 되면 모세오경을 외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구약성서 전체를 암송한다는 것이었다. 구약전공자인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면서 이제부터 성서를 외워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비장한 태도가 내심 거슬린 나는 슬그머니 조선시대에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절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줄줄이 꿰었던 이들이었다고 말했다. 암기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실천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답했다.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정사를 맡아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신으로 가서 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외운 것이 많아도 무슨 소용 있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 《논어》, 〈자로〉5절


공자께서는 중국내에서 회자(膾炙)되는 그리고 의미 있는 시(詩) 305수를 모아 분류하고 편집하였다. 고도로 압축된 의미를 단어 속에 담아두고 비유법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이 시문장이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무수한 일들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를 파악하는 일로부터 사람들에게 임무를 주고 그것을 점검하고 결과를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모든 일들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라는 것이 언어로 시작하여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교 역시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설득과 계약 그리고 다툼과 쟁론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시구를 줄줄 외우면 언어에 대해 통달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능히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공자는 문장을 모조리 외운다고 능사가 아님을 지적한다. 이들 문장이 지닌 의미를 깊이 파악하여 그 문장대로 살아가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전 중국에서는 의미를 밀도 높게 압축해놓은 시(詩) 구절로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주고받는 것을 매우 고상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온다는 소식이 접수되면 임금은 한시(漢詩)로 응대할 수 있는 학자를 수소문했다. 조선의 한시 수준이 중국에 비해 대단히 저급하다고 자책했고, 실제로 중국 한시를 듣고 응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나이 71세 때 지은 시 〈노인일쾌사 6수 - 효향산체〉에서 ‘노인이 되어 즐거운 일 중의 하나는 붓 가는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한자의 운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까다로운 중국의 율과 격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장쾌히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한 것이다.



언어는 종종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언어에 의해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언어의 예속 사슬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비평작업이다. 비평은 언어 속에 감추어진 독재성과 억압성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저 문장을 달달 암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언어의 힘은 문장력에 있지 않다. 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는 것이 언어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언어가 힘을 얻는 것은 언어가 그대로 실행될 때 힘을 갖는다.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관념 형태의 언어가 삶 속에 구체화될 때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면서 ‘말씀(로고스)’라고 정의했다.


헬라어 ‘로고스(logos)’의 원래 의미는 ‘말’ 또는 ‘이야기’이다. 넓은 의미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끼리 결속을 이루고, 언어의 구별과 차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 분열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언어다’라고 정의했을 때 쏟아졌을 반향을 우리는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주변을 맴돌며 끈질기게 예수를 괴롭혔던 대표적인 사회계층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리새인이다. 이들은 경건주의자로서 구약의 율법에 충실했던 이들이다. 구약을 모조리 외우는 이들이었고, 그것을 해설했던 탈무드와 관례까지 정통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율법(토라)은 곧 문화였고 역사였고 언어였다. ‘예수가 언어다’라는 은유는 예수가 율법 그 자체라는 선언이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장 20~22절


어느 날 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에 대해 물었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답했다. 청년은 어느 계명이냐고 물었고, 자신은 그 모든 계명을 모두 다 철저히 지켰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모두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율법이 지닌 심층적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율법의 능력은 읽기나 암기 또는 형식적인 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실천으로부터 야기(惹起)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배드민턴을 즐긴 적이 있다. 빠른 몸놀림이 매력적으로 보여 배워보고자 했다. 라켓을 사고 셔틀콕을 샀다. 그리고 배드민턴에 관한 서적을 몇 권 구입했다. 기본자세로부터 역사와 규정, 다양한 기술들을 책을 통해 섭렵해나갔다. 누구와 배드민턴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지닐 수 있었다.


몇 번의 연습을 하고 이제 입문한지 얼마 안 된다는 연세 지긋하신 분과 코트에 마주섰다. 부지런히 사방 뛰어다녔지만 몇 점 획득하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그득한 지식들이 몸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지식을 터득하거나 적어도 몸과 머리가 동시에 습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학습(學習)이라고 한다. 학(學)은 정보 또는 지식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은 몸이 정보나 지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만 반복적으로 하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몸을 사용할 뿐이다. 학(學)에만 몰두하면 머릿속에서 지식이 맴돌다 또 다른 이론만 생산해낼 뿐이다. 신앙은 이론만도 관습만도 아니다. 신앙생활은 온전한 학습이요 공부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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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5)


무엇을 걱정하는가


걱정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을 알고 있다. 늘 각종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며 살아오신, 말 그대로 노심초사(勞心焦思)로 사신 분이다. 상당 부분의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드려도 자신이 세상의 걱정하지 않으면 사건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강박관념에 잡혀있는 그런 분이었다.


여러 해 그분을 대하다가 드디어 걱정의 절정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분의 최고 걱정은 ‘걱정 없음의 걱정’이었다. 몹시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분의 불안한 태도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지금처럼 아무 걱정이 없는 순간이 가장 힘겹다. 이렇게 걱정 없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정말 걱정된다.’고 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중국인성론사(中國人性論史)》를 쓴 대만학자 서복관(徐復觀)은 유가 특징을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환의식은 일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또는 종교적인 원죄의식이나 자기존재에 대한 부정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자기성찰을 통해 온전한 자아의 완성으로 이끄는 의식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걱정이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목표 없이 되는대로 멋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한 자극제로 작용한다면, 진리추구라는 좁고도 먼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걱정의 중요한 핵심은 과연 무엇을 걱정하며 어떻게 걱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막연히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부류의 걱정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군자는 진리를 도모하지 먹을 것을 모색하지 않는다. 농사에는 굶주림이 들어있다. 공부에는 복록이 들어있다. 군자는 진리를 걱정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 - 《논어》, 〈위령공〉 31장


위의 본문은 오해가 많은 문장이다. 본문의 방점이 진리추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을 추구하지 않음에 초점을 두어, 공부 좀 하겠다는 이들은 생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본문을 공부에 녹봉이 있고 농사에는 배고픔만 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농사 집어치우고 모두가 과거급제하려 달려들게 만들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뿐 아니라, 무엇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가를 판단케 하는 척도가 된다. 공자께서는 올곧음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군자는 모름지기 진리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사에는 늘 허기짐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두는 관심은 늘 부족함을 동반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공부에는 복됨이 있다. 본문의 녹(祿)이란 구체적으로 복록(福祿)을 의미한다. 하늘께 제사 드리는 고기와 음료를 복(福)이라 하고, 제사 후에 관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고기와 음료를 녹(祿)이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하늘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다. 군자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근심할 것이 아니라, 진리추구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 아래 서있는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지를 걱정해야지, 삶이 곤궁할 것이냐 풍성할 것이냐를 근심해서는 안 된다고 공자께서 힘주어 말한다. 삶의 곤궁함을 피하기 위해 아등바등 거려봐야 만족함은 없을 것이라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향해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고 있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하늘의 뜻을 펼치기 전,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을 했다. 음식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실시한 것이다. 온통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이면 하늘의 뜻과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속내를 간파한 시험하는 자는 그의 거리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일깨워주려 했다. 현실의 냉엄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4장 3-4절


예수의 시선은 돌덩이에 있지 않았다. 광야의 40일 내내 떡을 향해 관심두지 않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입을 통해 표출되는 진리의 말씀에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떡에 관심이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걱정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 한동안 먹을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느 날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제자들과 호수를 건넜다. 제자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떡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서로 의논하자, 예수께서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상기시키면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11)고 하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실 때, 제자들은 여전히 떡이 없다는 것을 가지고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떡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관심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제자들은 먹는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 염려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림나(merimna)’이다. ‘나누이다’, ‘분열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merizo)’의 파생어이다. 다시 말하면, 걱정이나 염려는 분열이나 나누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집중하지 못하여 생각이 흩어지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산만하게 진행하는 것이 걱정 또는 염려의 근거라는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40일 동안 꾸준히 진행된 예수의 집중력을 흩으려했다. 예수의 관심을 먹는 것으로 돌리려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시험에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다. 산만하게 흩어진 관심을 궁극적인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어떻게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세상에 대한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분열시킨다. 분열된 마음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물고 나타난다. 공자께서 농사를 짓는 것에 늘 굶주림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함에는 하늘의 은총인 복록이 있기 마련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궁극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인리히 오토’가 종교경험의 본질을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역설적인 용어로 말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진리를 향한 ‘거룩한 걱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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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4)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주 늦은 시간,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겨우 내려갈 때가 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한 한적한 밤길을 홀로 차를 운전하는 일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신이 지쳐 적적함이 극에 달할 때면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붉은 신호등이 반가울 때가 있다. 지나치는 이 아무도 없는 도로 한 복판 신호등의 멈춤 신호지만 어김없이 그의 지시를 따른다.


언젠가 동승했던 친구가 나의 그런 행동에 칭찬을 보낸 적이 있다.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은지라 내심 몹시 쑥스러워 했다. 실은 법과 규칙을 떠나 텅 빈 공간에 종일 서 있다가 나의 길을 간섭하려는 신호등이라는 존재와 이야기하고 싶어, 잠시 멈추어달라는 신호를 기쁜 마음으로 따른 것뿐이라는 걸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


유가의 대표 경전 중의 하나인 ≪논어≫는 공자의 어록집이다.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틈틈이 기억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맨 앞 책인 <학이>편은 편집자의 의도가 담뿍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던 편집자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그 장의 맨 마지막은 다음의 문구로 장식되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논어≫,<학이> 16장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식한다. 타인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를 칭찬하는 말에 주목하게 되고, 비난하는 말에 귀를 닫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이다. 누군가 알아준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일을 넉넉히 해내지만, 아무도 나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음부턴 이런 일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대학≫ 6장에 눈에 뜨이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자겸(自謙)’이란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신독(愼獨)’이라는 단어이다. 물론 자겸(自謙)은 종종 ‘자겸(自慊)’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스스로 겸손하다’는 해석보다 ‘스스로 흡족해한다’는 풀이가 다음 문구와 잘 연결되기 때문이다. 연결되는 단어가 바로 신독이다. 혼자 있어도 스스로 삼갈 줄 안다는 뜻이다.


신독은 단순히 삼간다는 소극적인 뜻보다 뭔가를 이룩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소신껏 자기 행할 바를 행해나간다는 의미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신독이다. 이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누가 보더라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이는 일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장자≫외편 <재유>편 12장을 보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기에게 동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면 기뻐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반대의사를 보이면 아무리 그 말이 옳아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 바탕에는 남들보다 뛰어나려는 욕구가 잠재해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어떤 사람을 세 번 이상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몰락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교만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려 몰락하거나, 타인의 질투와 견제를 받아 결국 몰락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칭찬에도 쉽게 휩쓸려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의 비난에도 마음 가볍게 흔들리지 않아야 참다운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골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기도라는 단어를 골방이란 단어와 연결시킨 기막힌 비유법이었던 것이다. 타인을 의식한 기도인 모범적인 기도 또는 길거리기도와 대칭되는 도발적인 수사를 구사하셨기에 둘러선 모든 이들이 예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마태복음≫ 6장 5-7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예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한다. 바리새인의 신앙적 태도는 대단히 모범적이었다. 남들이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유창한 기도를 했고 단 하나의 빠뜨림도 없이 율법을 실행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빠짐없이 지켰으며 그것을 신앙적 자부심으로 삼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도가 출발부터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바리새인 기도의 출발점은 타인이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기도를 펼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골방을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한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들어앉는 것으로 기도의 시발점을 삼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헬라어로 ‘타메이온(tameion)’이라 발음하는 ‘골방’의 어원은 조제 또는 분배라는 의미를 지닌 타미아스(tamias)이다. 따라서 타메이온은 약국, 연료실, 밀실, 저장실, 골방, 안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큰 방에 딸린 구석진 작은 방을 가리키는 골방은 원래 제사장들이 놋제단 ,물두멍, 일곱 등대, 진설병상, 분향단 같은 제사도구를 두는 조제실이었다.


결국 타메이온은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기도의 공간’을 가리키는 은유가 되었다. 골방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분리의 공간인 동시에 홀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골방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경계 공간이며, 따라서 무수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역설을 목격한다. 낮아져야 높아지고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 특유의 역설적 진리를 만날 수 있다. 눈에 뜨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열어 밝히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보여주는 기도는 별도의 상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께서는 홀로 있어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을 넘어 아예 때때로 은밀한 공간 속에 홀로 있으라고 말씀한다. 남들이 알아주는지 알아주지 않는지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넘어 아예 비밀스럽게 기도를 실행하라고 말씀한다. 단단히 단속할 수 있는 밀실로 들어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조우하라고 한다.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 점점 가속기를 세차게 밟기 마련이다. 미처 지나치는 사물을 식별할 틈이 없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내가 어디쯤을 지나치고 있는지 헛갈리기까지 한다. 이럴 때면 도로 중앙에 버티고 서서 껌뻑대는 붉은 눈을 만나고 싶어진다. 홀로 그와 조우해 멈춤의 가치를 은밀하게 이야기하고픈 마음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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