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9)


한 가운데 서라


처음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울 때, 넘어질까 조심하느라 페달을 세게 밟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조심하면 할수록 자전거가 자꾸 쓰러진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힘 있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갈 때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자리에 멈추는 것은 곧 쓰러지는 일이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야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종 어떤 일을 맡았을 때,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게으르게 하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는 노련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모든 일에 남보다 너무 앞서 나가도 안 되고 너무 뒤쳐져서도 안 된다고 한다. 신념과 이념에 대해서도 자신은 중도노선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이들을 본다. 중간의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고 충고한다.


이들이 말하는 중앙의 길을 걸어가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언뜻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거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듯싶다.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중용(中庸)’이란 개념이 과연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또렷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의 대표적 사상 중의 하나인 ‘중용’을 언급하면서 주로 ‘중(中)’에다 방점을 두는 모습을 본다. 이는 사물의 가운데에 자신의 위치를 두는 공간적 의미로서 중(中)을 강조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중용의 개념에서 ‘용(庸)’을 배제시키면 안 된다. 여기서 용(庸)이란 어떤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시간적 단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군자는 어우르지만 휘둘리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 한 가운데 서서 기울지 않으니 곧추섬이 강하도다(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중용》 10장 5절


군자는 다양한 것을 아우르고 모든 사람들과 어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모습을 취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의견도 포용할 수 있고, 어떤 사람과도 더불어 지낼 수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중심이 확고하지 않아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한다.



올바른 지도자는 한가운데 서서 모든 이들의 핵심이 되고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소심하게 몸 사리는 행동을 하거나, 치우지지 않으려 가만히 아무 입장을 취하지 않고 기회만 탐색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중심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한다.


자전거가 중심을 잡으려면 페달을 밟아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하듯, 중용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밟고 있는 삶의 발판을 힘차게 디뎌야 한다. 내 삶의 바탕을 면밀하게 살피고, 내가 처해있는 영역을 파악하여 자신의 입장(立場)을 공고하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내 발로 삶을 밟아나가는 실존적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위 구절 바로 앞부분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나온다.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묻자 공자는 북방의 강함인지 남방의 강함인지 되묻는다. 이어서 공자는 ‘남방의 강함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가르치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북방의 강함은 창칼과 갑옷 그리고 투구를 깔고 누워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싸우는 것만이 강함이 아님을 말했다. 상대를 포용하고 감싸 안으며 용서하는 것 역시 강함이라고 설명했다. 진정한 강함은 드러나는 외부로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아니라 내면에 세워져 있는 자기중심의 꼿꼿함이라고 강조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에게 유연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자기주체성 확립을 요청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려 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한 손 마른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죄로 인해 병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회당의 한쪽 구석에 쳐 박혀 앉아 예수의 강론을 듣고 있었다. 그의 눈이 예수와 마주쳤다. 예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아예 모든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가운데 세웠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마가복음》 3장 3-4절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총에 떠밀려 늘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병든 자를 세상의 중심에 세워놓으셨다. 당당히 모든 사람의 한 가운데 서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성서의 관심은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치유를 받게 되었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가 그를 주목했다는 것에 주목할 뿐이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애굽에서 살았던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등이 굽어버렸다. 이집트인들에게 굽실거려야 겨우 생존할 수 있다는 걸 터득하고 살아왔다. 갑작스레 모세가 등장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하였다. 자유를 얻으려면 쉽고 편하게 살아왔던 삶을 등지고 불편하고 어려운 삶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들은 불평으로 일관했다.


하나님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무기력한 걸음걸이를 바꾸어 올곧게 걷게 하셨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 (《레위기》 26장 13절)” 올바로 걷는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제 발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기 존재를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살아야 하는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자기의 생각을 세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기복적인 종교생활을 벗어버리고 주체적 자아로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실존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예수는 애굽의 종교생활로 복귀시키려는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항거하였다. 율법의 조항에 매여 사는 종속적인 신앙생활을 거부하였다. 신앙의 핵심은 종교적 규정에 의해 억압되고 피폐해져 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부여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선포하며 당당히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였다.


좁은 골목을 지나치거나 가느다란 둑을 주저함 없이 내닫는 자전거를 본다. 불안함이 없어 보이는 자전거 탄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한다. 눈앞에 보이는 좁은 길을 두려움 없이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극복해가는 모습은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좌우의 흔들림 없이 곧바로 제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중용(中庸)의 신앙이다.


바람 불면 먼저 누웠다가 바람 그치면 먼저 일어나는 잡초들의 강한 생명력은 대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올곧은 뿌리에 있다. 보이는 줄기와 잎은 바람에 쉬이 흔들리지만, 결코 미동조차 않는 보이지 않는 땅속뿌리는 자기중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바람이 분다. 자전거 끌고 강변을 따라 에두르고 싶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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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8)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행사를 참여했을 때 간혹 만났던 진기한 장면들이 있다. 행사의 장(長)이 누구이며 좌우에 어떤 지위의 사람들로 위치가 정해지고 순서가 정해졌냐 하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대부분 미리 정해진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행사를 치르지만, 간혹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자신의 위치를 변경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발생하는 일이다.


따라서 행사를 준비하는 진행 팀이 정작 행사를 어떻게 의미 있게 진행할까 하는 것보다 자리를 잘못 지정하여 혹 지적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참석한 유력한 이들이 충분히 대접받는 위치에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으면 좋은 행사였다고 평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儒家)는 특히 형식에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가가 강조하는 ‘예의(禮儀)를 갖춘다’는 것은 적합한 형식을 잘 갖추어 행동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유가의 논리는 제도와 형식에 치중한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허례허식을 추방하기 위해 강력하게 반(反)-유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가에 대해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유가의 경전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단 한 번이라도 어떤 사람의 해설서가 아니라 직접 자기 스스로 유가 경전을 읽어보았다면 공자나 유가에 대해 그토록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편견이 직접 대해보지 않은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매우 강조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탕의 철학으로 인(仁)을 주장했고, 상호관계성을 위한 방법론으로 예(禮)를 주장했다. 이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관한 강조가 아니었다. 공자는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해 나갔다. 오히려 형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예식은 사치하기보다 검소해야하고, 장례는 형식 갖추기보다 슬퍼해야 한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논어》, 〈팔일〉 4장 3절


공자 당시에도 형식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시 관료들은 자신들의 집과 의복 그리고 마차 등을 화려하게 꾸며 일반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려 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관혼상제도 남들보다 능력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사치하게 행사를 치르곤 하였다. 위 문장은 행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외형에 치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근본적으로 관혼상제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공자가 말한다. 모든 행사에는 그 본래적 취지가 담겨있다. 좋은 일을 만났기에 축하하거나, 나쁜 일이 발생했기에 위로하려는 것이 기본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이러한 일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 실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다.


공자는 어떤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논어》, 〈이인〉 13장은 “예의 근본인 겸손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있겠는가(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라고 하였다. 예(禮)의 강조는 예의 틀인 예식(禮式)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예를 갖추게 만든 근본적인 정신인 겸손[禮讓]에 대한 집중이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특별한 절기가 되어 도로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걸하는 걸 목격한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이나 도움을 주는 이들이 모두 당당한 것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도움 주는 이들은 선행에 대한 자부심으로, 도움 받는 이들은 도움을 주는 자들에게 자부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또 다른 종교발생지에서는 큰 단위 액면의 지폐를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 바꿔 수십 명에게 나누어주면서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고 으쓱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구제한 사람의 수를 기억하여 나중 심판 때에 구제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죄를 감해준다는 교리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저 형식만 따라하는 한심스런 태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2절


한발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남을 돕는 일 자체를 인식하지 말라 하신다. 위 본문 다음에는“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오른손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인식 없는 구제를 하라고 한다. 은밀함을 유지 못하는 선행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 CIA 앞마당에는 ‘크립토스(Kryptos)’라 불리는 유명한 조각 작품이 있다. 미국의 CIA는 성서 구절에서 이름을 딴 조각을 앞마당에 세워놓아 자신들의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임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크립토스’라는 단어는 위 성서구절의 ‘은밀하게’의 그리스어이다.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등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단어이다.


크립토스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단어가 ‘신비동물학(Crypotozoology)’이다. 이는 미확인 동물종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과로서 각종 신화나 경전에 등장하는 신비한 생명체를 연구한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네피림(Giant)이라는 거인이나 요나를 삼켰던 거대한 물고기 등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를 연구하기도 한다.


‘은밀함’이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는 감추어져 알 수 없는 존재나 사건을 꾸며주는 말이다. 신앙적인 구제는 철저히 감추어지거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CIA 앞마당의 크립토스에 새겨진 암호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풀 수 없다고 단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신앙인의 구제는 영원한 미제(未濟)행위로 남아야 한다.


어딜 가나 끝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리에 앉으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끄는 게 싫기 때문이다. 실은 나의 존재나 흔적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나의 존재를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 속에서 취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 어떤 이는 바위에 이름을 새겨두기도 한다. 자신의 동상을 세워 길이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을 세우거나 구제기관이나 복지단체를 설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열심히 이름을 따서 지은 건물이나 구조물이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는 못한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기억보관장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의 기억에 입력이 되면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영원히 잊지 않으신다. 은밀함이란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인의 구제행위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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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7)


별을 헤아리는 까닭


안개가 짙게 낀 도로를 운전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몇 미터 앞만 겨우 보이는 상태에서 길을 더듬어 운전을 할 때면 지금 죽음의 언저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심장을 파고 든다. 안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갈 길의 앞을 조금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두렵다. 알 수 없음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움은 ‘알지 못함[無明]’으로부터 온다. 다음에 닥쳐올 위험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다면 아무리 큰 위험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작은 사건일지라도 미리 ‘알아차림[正念]’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다가오면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긴장(Suspense)과 놀람(Surprise)의 차이는 앞으로 닥쳐질 일에 대한 정보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깊은 산중의 길이라도 어디로 뻗어있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 두렵지 않다. 가벼운 길도 눈비가 심하게 오거나 나무가 우거져 한치 앞도 분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심각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때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두려움을 느낄 때, 익숙한 낯을 하나라도 본다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주 먼 유목시절, 인류는 별을 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태양은 매 시간마다 위치를 변화시킨다. 달은 모양과 머무는 시간이 주기를 가지고 변화한다. 그러나 별은 적어도 계절이 바뀌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북극성이나 북두칠성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위치나 크기의 변화가 없다. 일 년 단위로 이동을 해야 하는 유목인들에게 별은 안정적인 푯대(Pole)이다.


역(易)은 농경민으로 정착하던 청동기시절 이전부터 존재하던 인류의 가장 오랜 철학이다. 만물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 ‘패턴(pattern)’을 파악하려 했던 역(易)철학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오르는 사상이다. 중국의 주(周)나라가 자신들의 통치 이념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역(周易)》이란 책으로 편집하여 독점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인류의 핵심 사상이었다.


공자의 주역 해석서로 알려진 〈계사전(繫辭傳)〉은 역(易)사상이 어디로부터 출발했으며, 어떤 방법론에 입각하여 논리가 수립되었는지, 또한 장차 무엇을 탐구하기 위해 발전시킨 개념인지를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다. 공자는 역(易)을 통해 온통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조와 역학관계 그리고 이들을 작동시키는 근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러러서 천문(하늘 무늬)을 관찰하고, 구부려서 지리(땅의 이치)를 살핌으로 보이지 않는 은밀한 것과 밝히 드러난 것의 원인을 안다(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知故).” - 《주역》, 〈계사전 상〉 4장 2절


찬찬히 문맥을 살펴보다보면, 자연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엄연히 규칙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설명이 마치 ‘카오스 이론(混沌理論, Chaos Theory)’과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미세한 사물의 작동원리가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와 같은 패턴과 방식이라는 면에서 ‘프랙탈 이론(回文, Fractal Theory)’과도 무척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늘을 보는 것은 일정한 패턴[文]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신석기 수천 년을 지내온 인류는 하늘에 대한 움직임을 후대에게 구전으로 전승시키면서 통계를 축적시켜왔고, 어느 정도의 정보가 확보되자 이들을 분석하여 패턴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 앞서 파악한 패턴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정교함까지 갖추게 하여 도식화한 것이 64괘이다.




유목민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농경민인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이나 이집트 지역 사람들의 문화를 경계했다. 요셉의 공로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이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바로가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야곱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다(창세기 46장 34절)”고 답한다.


농경민인 이집트인들이 목축을 가증이 여겼기 때문에 고센 땅에서 살게 되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야곱과 그의 후손 역시 이집트에 살아감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농경문화에 젖어들까 몹시 경계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아브라함의 경우도 동일했다. 변화를 싫어하고 한 곳에 고착시키는 것을 즐기는 정주(定住)문화를 매우 위험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아브람)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창세기》 13장 14-15절, 15장 5절


‘하늘을 우러러 별을 세어보라’는 것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는 예수의 비유만큼이나 유목인에게는 익숙한 문장이다. 하늘의 패턴을 읽는 것은 지상의 복잡한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원리를 터득하기 위함이다. 수학적으로 정교한 해, 달, 별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원칙 없어 보이는 세상의 다단(多段)한 일들을 간파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조카 롯과 마음 아픈 헤어짐을 경험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나가 사방을 보라고 말씀한다. 앞이 막막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세상을 밝히 파악하는 능력을 부여하셨던 것이다. 사방을 관찰(觀察)하게 함으로 그것으로부터 매이지 않게 하셨고, 아무 것도 매이지 않음이 곧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


또한 롯이 거하는 성의 인근 성주들이 전쟁을 벌였을 때, 아브람은 훈련된 이들을 이끌고 나가 끌려간 롯과 그 성 사람들을 구출해온다. 전쟁 후 찾아올 수 있는 허탈함에 아브람이 젖을까봐 하나님은 그의 손을 이끌고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게 하신다. 별을 세어보라고 하시면서 하늘의 별들처럼 너의 후손이 이러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물론 여기서 말씀한 별의 일차적 기표는 아브람 후손이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아브람 후손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이것을 메타적으로 분석하면 아브람의 후손은 유목민을 가리키는 기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별처럼 수적으로 많을 것이라는 의미 심층에는 별처럼 규칙적인 패턴을 가진, 즉 문양(文樣)을 지닌 후손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끝없이 반추하게 하였다. 반드시 그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공간에 대한 패턴의식이다. 유목민이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떠돌아다녀 자칫 방황할 수도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어디든 떠날 수 있지만 반드시 일정한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공간에 대한 패턴의식을 훈련시켰다.


또한 하나님은 안식일 규정을 만들어 일주일이라는 개념을 알려줌과 동시에 시간에 대한 패턴의식을 심어주었다. 하루와 일주일이라는 미시적 시간패턴과 절기와 안식년이라는 거시적 시간패턴을 규정하여 이것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패턴의식으로 하여금 복잡한 세상의 사건들을 명료하게 간파하는 핵심원리로 작동하게 하셨던 것이다.


세상 일이 어지러울 때면 홀연히 별이 쏟아지는 밤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하늘 가득 흐드러진 별들을 헤아리다보면 별들이 지닌 무수한 은유를 유추해낼 것이다. 사건의 원인과 방식을 일정무늬로 구성하여 보여줄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일들은 스스로 해결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가끔 별을 보아야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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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6)


문장을 모두 암기한다고


이스라엘로 유학을 갔던 구약학 전공자가 한 초등학교를 들렀을 때 받았던 충격을 전해주었다. 이스라엘 초등학생들은 4학년 정도가 되면 모세오경을 외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면 구약성서 전체를 암송한다는 것이었다. 구약전공자인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면서 이제부터 성서를 외워보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비장한 태도가 내심 거슬린 나는 슬그머니 조선시대에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활동하던 시절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줄줄이 꿰었던 이들이었다고 말했다. 암기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실천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답했다.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정사를 맡아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신으로 가서 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비록 외운 것이 많아도 무슨 소용 있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 《논어》, 〈자로〉5절


공자께서는 중국내에서 회자(膾炙)되는 그리고 의미 있는 시(詩) 305수를 모아 분류하고 편집하였다. 고도로 압축된 의미를 단어 속에 담아두고 비유법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이 시문장이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고도의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무수한 일들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를 파악하는 일로부터 사람들에게 임무를 주고 그것을 점검하고 결과를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모든 일들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사라는 것이 언어로 시작하여 언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교 역시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를 통해 설득과 계약 그리고 다툼과 쟁론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시구를 줄줄 외우면 언어에 대해 통달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능히 대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공자는 문장을 모조리 외운다고 능사가 아님을 지적한다. 이들 문장이 지닌 의미를 깊이 파악하여 그 문장대로 살아가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전 중국에서는 의미를 밀도 높게 압축해놓은 시(詩) 구절로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주고받는 것을 매우 고상한 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온다는 소식이 접수되면 임금은 한시(漢詩)로 응대할 수 있는 학자를 수소문했다. 조선의 한시 수준이 중국에 비해 대단히 저급하다고 자책했고, 실제로 중국 한시를 듣고 응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나이 71세 때 지은 시 〈노인일쾌사 6수 - 효향산체〉에서 ‘노인이 되어 즐거운 일 중의 하나는 붓 가는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한자의 운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까다로운 중국의 율과 격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면서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장쾌히 조선시를 쓴다’고 선언한 것이다.



언어는 종종 사람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언어에 의해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중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는 언어의 예속 사슬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비평작업이다. 비평은 언어 속에 감추어진 독재성과 억압성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저 문장을 달달 암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언어의 힘은 문장력에 있지 않다. 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는 것이 언어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언어가 힘을 얻는 것은 언어가 그대로 실행될 때 힘을 갖는다.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관념 형태의 언어가 삶 속에 구체화될 때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면서 ‘말씀(로고스)’라고 정의했다.


헬라어 ‘로고스(logos)’의 원래 의미는 ‘말’ 또는 ‘이야기’이다. 넓은 의미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의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끼리 결속을 이루고, 언어의 구별과 차별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 분열이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언어다’라고 정의했을 때 쏟아졌을 반향을 우리는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주변을 맴돌며 끈질기게 예수를 괴롭혔던 대표적인 사회계층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리새인이다. 이들은 경건주의자로서 구약의 율법에 충실했던 이들이다. 구약을 모조리 외우는 이들이었고, 그것을 해설했던 탈무드와 관례까지 정통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율법(토라)은 곧 문화였고 역사였고 언어였다. ‘예수가 언어다’라는 은유는 예수가 율법 그 자체라는 선언이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장 20~22절


어느 날 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에 대해 물었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답했다. 청년은 어느 계명이냐고 물었고, 자신은 그 모든 계명을 모두 다 철저히 지켰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모두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율법이 지닌 심층적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율법의 능력은 읽기나 암기 또는 형식적인 수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실천으로부터 야기(惹起)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배드민턴을 즐긴 적이 있다. 빠른 몸놀림이 매력적으로 보여 배워보고자 했다. 라켓을 사고 셔틀콕을 샀다. 그리고 배드민턴에 관한 서적을 몇 권 구입했다. 기본자세로부터 역사와 규정, 다양한 기술들을 책을 통해 섭렵해나갔다. 누구와 배드민턴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지식과 정보를 지닐 수 있었다.


몇 번의 연습을 하고 이제 입문한지 얼마 안 된다는 연세 지긋하신 분과 코트에 마주섰다. 부지런히 사방 뛰어다녔지만 몇 점 획득하지 못하고 참패하고 말았다. 머릿속에 그득한 지식들이 몸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지식을 터득하거나 적어도 몸과 머리가 동시에 습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을 학습(學習)이라고 한다. 학(學)은 정보 또는 지식을 머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은 몸이 정보나 지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습(習)만 반복적으로 하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몸을 사용할 뿐이다. 학(學)에만 몰두하면 머릿속에서 지식이 맴돌다 또 다른 이론만 생산해낼 뿐이다. 신앙은 이론만도 관습만도 아니다. 신앙생활은 온전한 학습이요 공부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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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5)


무엇을 걱정하는가


걱정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을 알고 있다. 늘 각종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며 살아오신, 말 그대로 노심초사(勞心焦思)로 사신 분이다. 상당 부분의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드려도 자신이 세상의 걱정하지 않으면 사건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강박관념에 잡혀있는 그런 분이었다.


여러 해 그분을 대하다가 드디어 걱정의 절정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분의 최고 걱정은 ‘걱정 없음의 걱정’이었다. 몹시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분의 불안한 태도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지금처럼 아무 걱정이 없는 순간이 가장 힘겹다. 이렇게 걱정 없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정말 걱정된다.’고 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중국인성론사(中國人性論史)》를 쓴 대만학자 서복관(徐復觀)은 유가 특징을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환의식은 일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또는 종교적인 원죄의식이나 자기존재에 대한 부정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자기성찰을 통해 온전한 자아의 완성으로 이끄는 의식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걱정이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목표 없이 되는대로 멋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한 자극제로 작용한다면, 진리추구라는 좁고도 먼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걱정의 중요한 핵심은 과연 무엇을 걱정하며 어떻게 걱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막연히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부류의 걱정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군자는 진리를 도모하지 먹을 것을 모색하지 않는다. 농사에는 굶주림이 들어있다. 공부에는 복록이 들어있다. 군자는 진리를 걱정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 - 《논어》, 〈위령공〉 31장


위의 본문은 오해가 많은 문장이다. 본문의 방점이 진리추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을 추구하지 않음에 초점을 두어, 공부 좀 하겠다는 이들은 생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본문을 공부에 녹봉이 있고 농사에는 배고픔만 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농사 집어치우고 모두가 과거급제하려 달려들게 만들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뿐 아니라, 무엇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가를 판단케 하는 척도가 된다. 공자께서는 올곧음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군자는 모름지기 진리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사에는 늘 허기짐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두는 관심은 늘 부족함을 동반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공부에는 복됨이 있다. 본문의 녹(祿)이란 구체적으로 복록(福祿)을 의미한다. 하늘께 제사 드리는 고기와 음료를 복(福)이라 하고, 제사 후에 관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고기와 음료를 녹(祿)이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하늘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다. 군자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근심할 것이 아니라, 진리추구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 아래 서있는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지를 걱정해야지, 삶이 곤궁할 것이냐 풍성할 것이냐를 근심해서는 안 된다고 공자께서 힘주어 말한다. 삶의 곤궁함을 피하기 위해 아등바등 거려봐야 만족함은 없을 것이라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향해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고 있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하늘의 뜻을 펼치기 전,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을 했다. 음식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실시한 것이다. 온통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이면 하늘의 뜻과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속내를 간파한 시험하는 자는 그의 거리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일깨워주려 했다. 현실의 냉엄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4장 3-4절


예수의 시선은 돌덩이에 있지 않았다. 광야의 40일 내내 떡을 향해 관심두지 않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입을 통해 표출되는 진리의 말씀에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떡에 관심이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걱정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 한동안 먹을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느 날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제자들과 호수를 건넜다. 제자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떡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서로 의논하자, 예수께서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상기시키면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11)고 하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실 때, 제자들은 여전히 떡이 없다는 것을 가지고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떡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관심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제자들은 먹는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 염려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림나(merimna)’이다. ‘나누이다’, ‘분열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merizo)’의 파생어이다. 다시 말하면, 걱정이나 염려는 분열이나 나누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집중하지 못하여 생각이 흩어지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산만하게 진행하는 것이 걱정 또는 염려의 근거라는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40일 동안 꾸준히 진행된 예수의 집중력을 흩으려했다. 예수의 관심을 먹는 것으로 돌리려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시험에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다. 산만하게 흩어진 관심을 궁극적인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어떻게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세상에 대한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분열시킨다. 분열된 마음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물고 나타난다. 공자께서 농사를 짓는 것에 늘 굶주림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함에는 하늘의 은총인 복록이 있기 마련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궁극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인리히 오토’가 종교경험의 본질을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역설적인 용어로 말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진리를 향한 ‘거룩한 걱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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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4)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주 늦은 시간,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겨우 내려갈 때가 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한 한적한 밤길을 홀로 차를 운전하는 일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신이 지쳐 적적함이 극에 달할 때면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붉은 신호등이 반가울 때가 있다. 지나치는 이 아무도 없는 도로 한 복판 신호등의 멈춤 신호지만 어김없이 그의 지시를 따른다.


언젠가 동승했던 친구가 나의 그런 행동에 칭찬을 보낸 적이 있다.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은지라 내심 몹시 쑥스러워 했다. 실은 법과 규칙을 떠나 텅 빈 공간에 종일 서 있다가 나의 길을 간섭하려는 신호등이라는 존재와 이야기하고 싶어, 잠시 멈추어달라는 신호를 기쁜 마음으로 따른 것뿐이라는 걸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


유가의 대표 경전 중의 하나인 ≪논어≫는 공자의 어록집이다.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틈틈이 기억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맨 앞 책인 <학이>편은 편집자의 의도가 담뿍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던 편집자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그 장의 맨 마지막은 다음의 문구로 장식되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논어≫,<학이> 16장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식한다. 타인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를 칭찬하는 말에 주목하게 되고, 비난하는 말에 귀를 닫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이다. 누군가 알아준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일을 넉넉히 해내지만, 아무도 나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음부턴 이런 일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대학≫ 6장에 눈에 뜨이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자겸(自謙)’이란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신독(愼獨)’이라는 단어이다. 물론 자겸(自謙)은 종종 ‘자겸(自慊)’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스스로 겸손하다’는 해석보다 ‘스스로 흡족해한다’는 풀이가 다음 문구와 잘 연결되기 때문이다. 연결되는 단어가 바로 신독이다. 혼자 있어도 스스로 삼갈 줄 안다는 뜻이다.


신독은 단순히 삼간다는 소극적인 뜻보다 뭔가를 이룩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소신껏 자기 행할 바를 행해나간다는 의미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신독이다. 이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누가 보더라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이는 일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장자≫외편 <재유>편 12장을 보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기에게 동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면 기뻐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반대의사를 보이면 아무리 그 말이 옳아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 바탕에는 남들보다 뛰어나려는 욕구가 잠재해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어떤 사람을 세 번 이상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몰락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교만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려 몰락하거나, 타인의 질투와 견제를 받아 결국 몰락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칭찬에도 쉽게 휩쓸려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의 비난에도 마음 가볍게 흔들리지 않아야 참다운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골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기도라는 단어를 골방이란 단어와 연결시킨 기막힌 비유법이었던 것이다. 타인을 의식한 기도인 모범적인 기도 또는 길거리기도와 대칭되는 도발적인 수사를 구사하셨기에 둘러선 모든 이들이 예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마태복음≫ 6장 5-7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예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한다. 바리새인의 신앙적 태도는 대단히 모범적이었다. 남들이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유창한 기도를 했고 단 하나의 빠뜨림도 없이 율법을 실행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빠짐없이 지켰으며 그것을 신앙적 자부심으로 삼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도가 출발부터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바리새인 기도의 출발점은 타인이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기도를 펼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골방을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한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들어앉는 것으로 기도의 시발점을 삼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헬라어로 ‘타메이온(tameion)’이라 발음하는 ‘골방’의 어원은 조제 또는 분배라는 의미를 지닌 타미아스(tamias)이다. 따라서 타메이온은 약국, 연료실, 밀실, 저장실, 골방, 안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큰 방에 딸린 구석진 작은 방을 가리키는 골방은 원래 제사장들이 놋제단 ,물두멍, 일곱 등대, 진설병상, 분향단 같은 제사도구를 두는 조제실이었다.


결국 타메이온은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기도의 공간’을 가리키는 은유가 되었다. 골방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분리의 공간인 동시에 홀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골방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경계 공간이며, 따라서 무수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역설을 목격한다. 낮아져야 높아지고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 특유의 역설적 진리를 만날 수 있다. 눈에 뜨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열어 밝히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보여주는 기도는 별도의 상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께서는 홀로 있어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을 넘어 아예 때때로 은밀한 공간 속에 홀로 있으라고 말씀한다. 남들이 알아주는지 알아주지 않는지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넘어 아예 비밀스럽게 기도를 실행하라고 말씀한다. 단단히 단속할 수 있는 밀실로 들어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조우하라고 한다.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 점점 가속기를 세차게 밟기 마련이다. 미처 지나치는 사물을 식별할 틈이 없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내가 어디쯤을 지나치고 있는지 헛갈리기까지 한다. 이럴 때면 도로 중앙에 버티고 서서 껌뻑대는 붉은 눈을 만나고 싶어진다. 홀로 그와 조우해 멈춤의 가치를 은밀하게 이야기하고픈 마음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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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3)

 

인생의 비밀

 

어린 시절 선친의 직업 덕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거의 3년마다 전근을 다니셨기 때문에 한 곳에서 오랜 기간을 지낸 적이 없다. 덕분에 농촌과 어촌, 산촌과 도시의 생활을 드문드문 맛볼 수 있었다. 친구를 제대로 사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종종 불평을 했지만, 성장해서 돌이켜보면 그 또한 인생의 한 가르침이었기에 감사를 드린다.

 

공자는 한 나라에 또는 한 지역에만 머물러 지내지 않았다. 55세 즈음부터 태어난 노나라를 벗어나 온 중국을 제자들과 돌아다녔다. 소위 ‘천하주유’를 하면서 엄청난 거리를 다녔다. 여러 나라를 거쳤고 여러 일들을 겪었다. 모든 국가에서 공자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군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찮게 취급당하기도 했다.

 

중국을 두루 다니면서 공자는 결코 잠자리나 먹는 것, 입는 것을 가리지 않았다. 공자가 관심 둔 것은 인간의 내면과 그로 인해 확장되는 인간의 관계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하는 공간의 문제는 그 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누구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는 장소성의 문제로 환원시켜 주목했다.

 

어떤 사람이 “거기는 누추할 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살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 ≪논어≫, <자한> 14장

 

이사하려는 곳마다 교육환경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는 젊은 남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입에서는 늘 교육환경의 문제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어디 가나 다 마찬가지라며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가면 좋겠다는 얘기도 서슴없이 해댔다. 실제로 이민을 신청하여 허가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성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고등학교 총기사고 소식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접어야겠다며 흥분해서 말했다.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라며 다독였지만 쉽게 그의 흥분을 충분히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내친김에 차분하게 그에게 장소성에 관하여 차분하게 설명했다.

 

인간은 주어진 공간에서 본능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공간이 넓거나 좁거나 또는 따뜻하거나 춥거나 하는 공간 자체의 문제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 추억이라는 형태로 쌓인 층층의 사건들과 그 속에서 이루어졌던 상호간의 관계성, 즉 장소성에 더욱 주목한다.

 

공자가 가려는 지역이 누추했기에 제자 중에 하나가 왜 그런 누추한 곳에 가려느냐고 물었다. 제자는 그 지역에 대한 공간성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이 군자였고, 군자들이 그곳에서 수양으로 하고 학문을 추구했던 곳이기 때문에 결코 누추하지 않다는 장소성에 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젊은 남성에게 좋은 곳을 찾아다니지 말고 거하는 곳을 아름다운 장소로 변화시키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된 것처럼, 처음부터 아름다운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당신으로 인해 거처하던 곳이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전의 자이다

 

신약성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사도바울이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지니고 있는 재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은 이미 신앙 안에서 모두 버렸다고 했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부족감을 자랑했으며, 이루어 놓은 모든 일은 자신이 아닌 주의 능력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주 안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남들이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거나 당대의 뛰어난 선생으로부터 배움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의 선교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가면서 체득된 것이라고 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빌립보서> 4장 11절~12절

 

바울은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여기서 자족이라는 말은 ‘스스로 만족하다’라는 의미 또는 ‘스스로 충족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족은 헬라어로 ‘아르케오(archeo)’인데 이 단어는 ‘돕는다’를 뜻하는 ‘아레고(arego)’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자족의 정확한 어원적 의미는 ‘스스로 자신을 돕는다’이다.

 

이어서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는데, 비천과 풍부 그리고 배부름과 배고픔의 양면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한다. 이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도 처할 수 있는 인생의 놀라운 비밀을 배웠다고 한다.

 

‘일체의 비결’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미에오(myeo)’라는 동사이다. 이것의 어원은 명사인 ‘미스테리온(mysterion)’이다. 신비, 수수께끼, 불가사의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미스터리(mystery)’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바울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인생의 비밀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하지 못했으면서 내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외치는 것은 거짓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능치 못함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으려면, 먼저 삶의 극단을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 처해도 낯선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두려움과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하기 싫어 제대로 암기 못하면 외조부님은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드셨다. 몸이 아파서 도저히 공부할 수 없겠다고 했다가 더욱 혼나기도 했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 외조부님의 기본 교육관이었다.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주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외부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 어떠한 상황이 주어져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꼿꼿하게 지켜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다양한 상황 속을 지내오면서 그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 또한 속사람의 강건함이 절절한 까닭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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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2)

 

선생이 되려하지 말라

 

시골 마을에서 선생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노인들은 선생에게 가서 글을 묻기도 하고 심지어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해달라고 하거나 선거 즈음엔 정치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한 때 국가가 정부시책을 펼칠 인력이 부족하면 제일 먼저 교사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나의 외조부님은 인제읍내에서 내린천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귀둔’이란 동네의 훈장이셨다. 외가댁은 그곳에서 대대로 훈장으로 지내시면서 마을의 유지로 지냈다. 외조부님은 마을의 온갖 일에 관여하시면서 마을 아이들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셨다. 덕분에 나도 어릴 적부터 외조부님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울 수 있었다.

 

맹자가 활동했던 전국시대에 무수한 선생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일어나 자기 사상을 펼쳤고 추종자인 제자들을 확보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학습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학습공동체를 형성하여 단순히 세력만 과시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결속력을 구축함으로 타학문에 대한 심각한 배타성을 띠게 되었다.

 

상대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깨뜨리기 위해 자기 논리의 날을 세우고, 자기 논리를 든든하게 하려고 치밀한 방어막을 에둘렀다. 강한 논리를 갖추었다 싶으면 군주를 찾아가 자신의 논리를 실험할 수 있는 지위를 달라고 요청했다. 재상의 자리에 앉혀주면 자신의 논리를 펴서 군주의 영토를 확장시켜주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환란은 선생노릇을 좋아하는데 있다.(人之患 在好爲人師).”

- ⟪맹자⟫, ⟨이루 상⟩23장

 

공자와 더불어 맹자가 특별히 사친(事親)을 강조하는 것은 ‘섬김’이라는 귀중한 덕목 때문이다. 자녀로서 부모를 섬기고, 신하로서 군주를 섬기라는 덕목에서 강조점은 섬김에 있다. 섬김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일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맹자는 사친(事親)과 짝을 이루는 덕목을 수신(守身)이라 했다[事親 事之本也, 守身 守之本也 - ⟨이루 상⟩19장]. 수(守)는 ‘지킴’이다. 수신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유혹과 환란으로부터 흔들림 없이 자신을 올곧게 세워놓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일이며, 자신의 존재성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섬김’이 ‘지킴’과 짝을 이루게 한 것은 섬김이 혹 비굴함이나 억지로 낮아짐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자기의 중심을 공교히 하지 않고 무조건 낮추는 것은 어리석음이나 자기비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킴이 섬김을 만나지 않으면 교만으로 변하기 쉽다. 자신을 남들 앞에 내세워 높이는 것으로부터 심각한 문제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경전의 자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지칭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마 23:3)”고 말씀하셨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에게 짐 지우면서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높은 자리를 쉼 없이 탐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마태복음>, 23장 8절

 

예수께서는 둘러선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랍비가 되지 말라고 한다. 유대인은 예나지금이나 랍비가 되는 것을 대단한 명예로 생각한다. 유대인 어린이들의 최고의 희망은 랍비가 되는 것이다. 현재 랍비라는 단어가 ‘나의 스승’ ‘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래 이 단어는 ‘크다’ ‘위대하다’는 어원에서 출발했다.

 

랍비(Rabbi)는 ‘크다’라는 뜻의 ‘라브(rab)’에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나의 주’, ‘나의 크신 분’이란 뜻이다. 처음에 랍비는 ‘크신 분’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인생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분, 내가 본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것이 점차 ‘선생’이란 뜻으로 변하여 유대인의 율법 교사를 존경하여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도 하나이고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브(ab)’이다. ‘아브’는 육친의 아버지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제사장이나 왕, 노예의 주인이나 선지자도 ‘아브’라고 불렀다. 여러 측면에서 스승을 지칭하는 ‘라브’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아브’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는 명쾌하게 결론을 짓는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13)” 위대함은 자신의 낮춤과 상대의 섬김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 지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선생이 많은 우리 시대이다. 선생 되려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배우려는 이들보다는 가르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은 시절이다. 낮음보다는 높음을 선호하는 시대이다. 타인의 머리를 밟고 서있는 쾌감을 꽤나 즐기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온갖 문제는 선생 되려는 욕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남을 밟고 일어서려는 탐욕으로부터 시작된다.

 

외조부님의 생신날은 마을 사람들의 잔칫날이었다. 특히 빈궁한 살림을 꾸려가는 이들과 병으로 인해 찌든 생명을 간신히 꾸려가는 분들을 위한 날이었다. 마당 그득 그분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모든 일가친척들은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야 했다. 철없던 시절, 굳이 저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느냐고 외조부님께 물었다가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아직 제 자신이 상당히 덜 익은 나로선 타인에게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타인을 섬길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제대로 세운 사람이다. 안으로 자기를 제대로 세운 자만이 타인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고이는 이가 진정 위대한 사람이다. 스스로 높인다고 결코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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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

 

더불어 즐거움

 

종갓집 장손(長孫)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사랑방에서 조부님과 단 둘이 겸상을 했다. 조부님이 일러주신 엄격한 격식에 따라 음식을 대해야만 했다. 숟가락과 젓가락 사용하는 방법에서 음식을 집는 법과 입속에 넣고 저작하는 방법까지 수십 가지의 식사 예절을 배우고 익혔다. 그러느라 정작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 상 위에 놓인 음식 중에 어떤 것이 맛있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안방에선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식구들이 모여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음으로 늘 안방에 모인 식구들을 부러워했다. 격식 없이 웃으며 즐겁게 식사하는 틈에 나도 끼고 싶다는 생각만 안개처럼 뽀얗게 일어났다. 때문에 철저하게 즐거움이 배제된 나의 식탁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경전의 자이다

 

맹자(孟子)는 진정한 즐거움에 대해 문왕(文王)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느 날 문왕이 아름다운 연못을 만들고 싶어 했다. 물론 두터운 담장을 휘둘러 왕 혼자 즐기기 위해 연못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도가 백성들에게 알려지자 백성들은 하던 일을 모두 집어 던지고 문왕에게 달려와 연못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마치 자식이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듯 했다고 맹자는 기술하고 있다.

 

백성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못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는지 문왕이 서두르지 말 것을 권할 정도였다. 전적으로 백성의 도움으로 연못이 꾸며졌다. 그러나 백성들이 도리어 즐거워했던 것은 문왕이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성은 문왕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서 또한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더불어 기뻐하는 이러한 상황을 맹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옛사람은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 즐거울 수 있었다. (古之人 與民偕樂, 故 能樂也)-⟪맹자⟫, ⟨양해왕 상⟩2장 3절

 

춘추전국시대의 대부분의 군주들은 작은 계산속으로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땅을 더 많이 차지하여 자산을 든든하게 만들고, 백성의 숫자를 확보하여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에 몰두하였다. 이를 위해 전쟁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찾아다녔고, 국가 시스템을 잘 구축하기 위한 방법을 항상 고민하였다.

 

백성들은 늘 통치자의 명령에 시달렸다. 땅을 경작하기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사로 동원되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들에게 기쁨,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상관없는 용어였다. 모든 즐거움은 군주가 독점하고 있었다. 백성을 동원하여 전쟁을 치르고 영토를 확장하여 경제력을 공교히 만드는 일은 군주에게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확보된 자금으로 왕궁을 화려하게 꾸미고 연일 잔치를 벌이는 일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처럼 모든 즐거움을 군주가 독점해버린 국가는 얼마 되지 않아 타국에 의해 또는 백성들의 원성에 의해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맹자는 예전 전설적인 왕들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었던 것을 동경하였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오면서 백성들의 피폐함과 귀족들의 욕심을 지켜보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를 구상하였다. 왕과 백성이 서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 애쓰는 이상적인 정치시스템을 제시하였다.

 

누가복음 15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로 생각해본다. 이 큰 덩어리 이야기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에게로 가까이 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께서 죄인과 함께(With) 음식을 먹는다고 시비를 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의 비유 속에서 자연스레 ‘그들’은 친구와 이웃(Friends and Neighbors)이 된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 덩어리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의 한 사건 속에 세 개의 작은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것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의 이야기, 다음 것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 이야기 그리고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자리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기쁨’ 또는 ‘기쁘다’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나아가 ‘기쁨’의 의미를 확장시키면 세 종류의 단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기쁨’ ‘기쁘다’라는 단어와 더불어 ‘즐겁다’ ‘즐기자’의 단어가 있다. 주목할 만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함께 즐거워하다’라는 단어이다. 놀랍게도 이들 단어는 세 이야기 속에 모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카라’라고 발음하는데, 이는 은은한 즐거움을 의미한다. 즐거움이라는 단어 역시 원어로 ‘카이로’라고 하는데 즐겁고 행복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려는 ‘함께(With) 즐거워하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슁 카이로’로 발음되고 ‘더불어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31-32).

 

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근심어린 말 속에 큰 아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 큰 아들의 잘못은 더불어 기쁨을 모른다는데 있다. 즐거움은 나누어야 한다는 작은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큰 아들에겐 기쁨을 독차지하려는 마음뿐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이야기 모두 ‘잃어버림’에서 출발하여 열심히 ‘찾아다님’ 그리고 찾아서 ‘돌아옴’과 즐거움을 ‘함께 나눔’으로 끝맺는다. 세 이야기 모두 기쁨이나 즐거움에서 출발해서 ‘더불어 즐기자’라는 단어로 끝난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누가복음 15장에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씩이나 반복한다는 것은 의미를 대단히 강조한다는 것을 말한다. 세 번씩이나 거푸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훌륭한 음식도 혼자 먹으면 너무도 맛이 없다. 여럿이 더불어 즐거움 가운데 먹는 음식은 비록 거칠어도 맛이 있다. 예수께서는 더불어 먹는 음식의 중요한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음식 나눔으로 구원의 역사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셨다.

 

즐거움은 독점하거나 사유화할 수 없다. 독점하거나 사유화한 즐거움인 이미 즐거움이 아니다. 나누고 베풀 때, 함께 공유할 때, 즐거움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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