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과 영화의 만남 3


홍해를 호랑이와 건너다?

시편 136:1-26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홀로 큰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 감사하여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뒤흔들어서 홍해에 쓸어버리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위대한 왕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힘센 왕들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아모리 왕 시혼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시편 136편과 ‘축의 시대’의 영성


시편 136편은 150편에 달하는 시편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역사를 회고하면서 바친 대표적인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은 감사하는 내용을 예배인도자가 읽은 후에 예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읽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네 부분을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인도자가 하느님께 ‘감사하여라.’라는 명령문으로 회중을 부르는 부분이고 4절부터 22절까지는 감사할 내용을 열거한 부분이며 23절에서 26절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예배자들이 바치는 감사의 노래가 되겠습니다.


중간 부분인 4절부터 22절까지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절부터 9절까지는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큰 기적, 곧 창조의 기적을 일으킨 분으로서 지혜로 하늘을 만드셨고 물 위에 땅을 펼쳐놓으셨으며 해와 달과 별을 지으셔서 낮과 밤을 밝히셨다고 노래합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을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치신 얘기와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갈라서 이스라엘이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서 몰살하신 기적을 노래합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서 22절까지는 광야에서 자기들을 인도해주신 은총을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 앞길을 가로막은 왕들을 죽이시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저는 이 시편의 노랫말을 여러 번 읽으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이유를 열거한 대목 가운데 창조질서를 노래한 부분과 출애굽 및 광야유랑을 노래한 부분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창조질서 부분은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과 우주 전체를 시야에 담고 노래하는데 반해서 출애굽과 광야유랑 부분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시야에 넣고 노래입니다. 창조질서의 ‘보편성’과 출애굽 및 광야유랑의 ‘국지성’ 또는 ‘특수성’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제게는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는 죽임을 당했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죽었으며 광야 유랑 시에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방해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창조질서를 노래한 부분의 시야는 넓고 보편적인데 반해 출애굽 및 광야 유랑을 노래한 부분의 시야는 오로지 이스라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한 노래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신학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요즘 저는 카렌 암스트롱이 쓴 《축의 시대》란 책을 재미나게 읽고 습니다. 그녀는 기원전 9백년 경에서 2백년 경 사이에 중국, 인도, 그리스, 팔레스타인의 네 문명권에서 인류의 정신에 지속적인 자양분이 될 위대한 철학과 종교 전통이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각각의 문명권이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선과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상이 그 시기에 탄생했다는 겁니다. 자기중심주의와 탐욕, 폭력과 무례를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개발하기 시작한 때도 그때였다는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의 작성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편은 문자로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며 불렸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문자화된 시기와 작성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시편 도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암스트롱이 말한 ‘축의 시대 영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홍해 사건의 두 가지 버전


두 번째 문제는 홍해에서 벌어진 일을 노래하는 대목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후에 곧바로 그걸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몰려오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지팡이로 홍해를 쳤고 그러자 홍해는 둘로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건넜지만 바로의 군대는 바다가 다시 합쳐지는 바람에 몰살당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인 출애굽기 15장 1절의 미리암의 노래도 이 사건을 노래합니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제가 어렸을 때는 찰톤 헤스톤이 모세 역을 맡았던 <십계>를 감동적으로 봤는데 몇 년 전에 이 영화가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을 다룬 영화 <노아>가 사건을 성서의 서술과는 달리 해석해서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달리 최근에 만들어진 <십계>는 성서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은 CG를 이용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엄청나게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입니다.



홍해바다 사건은 오래 전부터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습니다. 논란의 주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느냐 여부입니다. 한편에서는 홍해 바다가 갈라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성경이 그랬다면 그런 줄 알지 왜 시비를 거느냐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진도 앞바다도 갈라지는데 홍해라고 갈라지지 말라는 법이 있냐고 목청을 높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성서구절을 잘 읽어보면 그 안에도 몇 가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로와 홍해를 건넌 사건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홍해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성서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다룬 두 버전의 얘기가 있는데 이것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버전은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치자 쩍 하고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인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버전인 출애굽기 14장에는 “야훼께서 밤새도록 거센 동풍을 일으켜 바닷물을 밀어내시자 바다가 마른땅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지팡이로 내리치자 당장 바다가 갈라졌다는 버전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셋째로, 우리말 성서가 ‘홍해’ 곧 ‘red sea’로 번역한 단어가 원문에는 ‘얌숩’ 곧 ‘갈대바다’(reed sea)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대바다는 홍해가 아니라 수에즈만 북쪽 끝에 위치한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의 호수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건넌 곳이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였다는 겁니다. 요즘 구약학자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노래했을까?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홍해가 갈라졌다고 믿고 그렇게 노래했다는 사실입니다. 홍해사건 얘기는 성서 여기저기에 상당히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였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와 맞닥뜨려 진퇴양난이었을 때 기적적으로 바다를 갈라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셨다고 노래한 겁니다. 오늘의 본문도 하느님이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셨다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그들이 건넌 곳은 갈대바다입니까, 홍해입니까? 저는 이 물음을 포함해서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지의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유일한’ 대답이 아닌 ‘하나의’ 대답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읽었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동물들을 배에 싣고 이민을 가던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합니다. 가족들은 다 죽고 파이만 혼자 살아남아 구명보트에 올라타서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함께 표류합니다. 하지만 보트 아래에는 진짜 주인공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결국 서로 공격하다가 다 죽고 보트에는 파이와 호랑이만 살아남아 둘이 표류하며 온갖 일들을 겪은 끝에 227일 만에 구조되는 것이 이 영화의 스토리입니다.


영화는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작 소설은 무려 4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어 7백만 부 이상 팔렸고 영국의 부커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많은 감독과 제작사가 영화화하려 했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중층적 의미와 놀라운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착수하지 못했는데 그걸 이안 감독이 해낸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느끼셨겠지만 CG인 줄 알면서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화면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마지막 반전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구조된 후 파이는 일본 보험회사 사람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다 얘기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미어캣이 사는 둥둥 떠다니는 식인섬 얘기도 믿지 않았고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면서 오랑우탄이 바나나를 타고 왔다는 얘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파이에게 자기들이 회사로부터 바보 취급당하지 않도록 ‘진실’을 얘기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파이는 다른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선원과 주방장이 살아남았고 어머니가 바나나를 타고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주방장은 선원을 죽여서 그걸 물고기를 잡는 미끼로 썼고 주방장과 다툰 어머니는 상어 밥이 되어 죽었으며 자기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는 얘기였습니다. 보험회사 사람들은 이 얘기를 자기들이 바보 취급당하지 않을 ‘진실한’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작가, 곧 파이의 예기를 소설로 쓸 작가는 하이에나가 주방장이고 그에게 죽은 얼룩말이 선원이며 바나나를 타고 온 오랑우탄이 어머니이고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다름 아닌 파이 자신임을 알아 듣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더 맘에 듭니까?


얘기를 다 끝낸 후 파이는 작가에게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라고 묻습니다.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벵골 호랑이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 겁니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작가가 답하자 파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고맙다’고 말합니다. 제 가슴을 때린 대사입니다. 왜 그는 고맙다고 말했을까요? 자기 말을 믿어줘서일까요? 정말 그뿐일까요?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과 홍해바다 사건에도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노예가 남자만 60만 명이고 이들은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과 하느님이 보내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돌을 치니까 물이 터지는 기적을 겪으면서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훈련을 했고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한 버전입니다. 다른 버전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 수백 명이 밤을 노려 도망쳐 나왔는데 추격하는 이집트 군대를 얕은 늪지대인 갈대바다에서 어찌어찌 따돌려서 광야에 접어들었고 거기서 갈 바를 몰라 40년 동안 정처 없이 헤맨 끝에 가까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거기에는 이미 오랫동안 자리 잡고 살고 있던 일곱 부족이 있어서 그들과 2백 년 동안 갈등하고 싸우기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겨우 겨우 인적이 드문 산악지대에 자리 잡았다는 얘기입니다. 전자는 성서가 전하는 버전이고 후자는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자료에 근거해서 만든 버전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버전이 더 마음에 듭니까? 이스라엘은 홍해가 둘로 갈라져서 바닷길이 났다는 버전을 택해서 후대에 전했습니다.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현실성이 낮은 버전이지만 그들은 그 버전을 택했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 버전을 현실성 있게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좌우간 그들은 이 버전을 선택했습니다.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버전이 아닌 하이에나와 얼룩말과 오랑우탄과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버전을 받아들였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그 주장을 크기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매주일 설교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제 스승 안병무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의기투합’하게 된 계기도 어떤 점에서는 이야기에 관한 생각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1986년에 서울 향린교회에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서 한 모임에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목사는 설교를 잘 하는 목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분명히 ‘우리 교회에서’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는 설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변혁을 위해 실천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스승님의 그것과 일치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쓰시렵니까?


저는 지금도 제 설교가 여러분에게 큰 영향을 주거나 감명을 주거나 은혜를 끼칠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사람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말 몇 마디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강고합니까. 그래서 저는 이야기의 힘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인격을 바꿀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물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이야기 따위가 바꿀 거라고는 더더욱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이야기의 힘은 의심하지만 사람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만은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슨 힘을 발휘할 거라고는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만일 누군가가 의미 있고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그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완제품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재료’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완제품’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반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꿀 여지가 있는 물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물건이 될 수 있는 ‘반제품’ 같은 것이란 겁니다. 세상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내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로 완제품 아닌 반제품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영화에서 어느 버전이 진실일까요? 저는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버전이 실제로 파이가 겪은 ‘날 것’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진실은 호랑이와 하이에나,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만들어낸’ 진실입니다. 만일 파이가 그 얘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남았기에 호랑이 버전이 진실이 됐다고 저는 믿습니다.


파이는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이젠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이 얘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시렵니까?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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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2

아버지의 상처

창세기 22:1-19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느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그들이,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느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창세기 22:1-19).


처음에는 부녀 사이인 줄…….


오늘은 아버지주일(Father’s Day)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시편과 영화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설교하고 있어서 가급적이면 아버지날과 이 주제를 맞춰서 성서본문을 택하려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가운데서 본문 택하기를 포기하고 창세기 22장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구약성서 이야기들 중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 얘기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가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얘기할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을 맡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입니다. 저는 199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이후의 영화들, 특히 그가 감독, 주연을 동시에 맡은 영화들 중에는 좋아하는 영화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제일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네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매기가 프랭키의 숨겨진 딸인데 나중에 가서 밝혀지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던 거죠. 



한 허름한 권투 체육관을 운영하는 프랭키와 거기서 청소하면서 생활하는 스크랩은 과거에 권투경기 중에 지혈사와 선수 사이였습니다. 스크랩이 타이틀전을 하는 도중에 눈 주위에 출혈이 심해서 프랭키는 경기를 중단시켰어야 했습니다. 스크랩의 트레이너는 전날 과음을 해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므로 그 결정은 프랭키가 내려야 했는데 그는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크랩은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맙니다.


이 체육관에 서른한 살짜리 여자 매기가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운동을 합니다. 프랭키는 여자는 기르지 않는다며 냉정하게 그녀를 물리쳤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혼자 묵묵히 운동을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오빠는 감옥에 가있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조카가 트레일러에서 정부보조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매기는 열세 살부터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몰래 가져다가 먹으면서 번 돈으로 살아갑니다. 번 돈의 일부를 가족들에게 보내주면서 말입니다.


서른한 살 나이에 권투를 시작하는 건 너무 늦었다는 말에 매기는 “그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응대하고 누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훈련에 몰두합니다. 결국 스크랩이 슬쩍슬쩍 도와준 데 힘입어서 그녀는 프랭키의 지도를 받아 선수가 됩니다. 그렇게 둘은 파트너가 되어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연전연승했고 결국 타이틀전을 벌이는데 거기서 매기는 상대방의 반칙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당합니다. 병상에 누운 그녀는 다리가 썩어 들어가 한쪽 다리를 잘라내기까지 합니다. 그녀는 프랭키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사정하지만 그는 차마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두 번이나 혀를 깨물어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녀는 말도 못하게 된 겁니다. 이에 프랭키는 고민하다 그녀의 부탁대로 어느 날 밤에 몰래 병실에 가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냅니다.


영화와 성서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


이 영화에는 중간 중간에 의미 있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영화가 하려는 얘기는 매기와 프랭키가 연전연승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녀가 하반신마비가 되어 병상에 눕게 된 이후에 담겨 있습니다. 그 중 매기의 아버지가 관련된 두 가지 얘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매기가 돈을 벌어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집을 사서 선물합니다. 하지만 집을 가지면 정부보조금이 끊긴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싫어합니다. 매기는 가족들과 다투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어렸을 때 아버지가 기르던 개를 묻어준 이야기를 프랭키에게 합니다. 하루는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는 개를 아버지가 차에 싣고 나갔는데 거기 삽이 들어 있더라는 얘기였습니다. 훗날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 걸 미리 암시한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또 그녀가 병상에 누웠을 때 프랭키에게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심각한 저체중이어서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았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역시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걸 암시한 얘기였고 거기에 프랭키가 아버지 캐릭터로 연결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영화는 프랭키와 매기를 부녀 사이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영화와 아브라함, 이삭 이야기에는 연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그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차이점들이 있긴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얘기에는 단순한 아버지와 자식 관계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삭이 하느님의 약속에 의해서 부모가 매우 늙었을 때, 그래서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던 데 반해서 매기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나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고 남은 가족들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막장입니다. 하반신마비로 병상에 누워있는 매기를 찾아와 돈 문제 서류에 사인하라고 들이대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얘기는 서두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해서 사건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데 반해, 영화는 아무 이유나 목적이 없이 우연히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얘기 사이의 차이를 찾으라면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책 《알 수 없는 분》에서 창세기 22장을 각각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각에서 읽고 해석해서 썼으므로 오늘 반복하지는 않겠고 오늘은 한 가지에만 집중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침묵의 언어들


아브라함, 이삭 얘기의 정수(精髓)는 모리아 산에 이르러 수행했던 종들을 뒤에 남겨놓고 칼과 불을 든 아브라함과 장작을 멘 이삭, 둘만 산 위로 오르는 대목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라고 아브라함을 불렀고 아브라함은 “얘야, 왜 그러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들리게 이렇게 번역했지만 원문은 “내가 여기에 있다.”(Here I am)입니다. 이삭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도 묻습니다. 참 난처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아브라함은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한 다음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또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번제물을 마련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장차 일어날 일을 이미 내다보고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니면 엉겁결에 둘러댔을까요? 두 가지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갖고 대답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는 사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면서, 그리고 종들을 남겨두고 단 둘이 산에 오르면서 수백, 수천 번 생각했을 겁니다. 하느님은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 약속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하나? 이 녀석도 이상하다고 눈치 챘을 텐데 왜 이 녀석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아들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겠지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정수(精髓)는 사고 난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라고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상영시간도 그 부분이 절반 정도 차지합니다. 창세기 22장의 얘기는 15장에 나오는 얘기와 연관시켜서 읽어야 합니다. 15장에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언약 맺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거기서 하느님은 제물의 몸통을 둘로 쪼개서 서로 마주보게 차려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밤이 되자 연기 나는 화덕이 나타나서 쪼개놓은 제물 사이로 지나갔답니다. 이 얘기는 언약을 깨는 편은 쪼개진 제물처럼 처참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느님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걸 어떻게 믿겠냐고 의문을 제기한 아브라함의 요청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곧 하느님이 약속을 지킨다는 증표를 아브라함이 보여 달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란 겁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깨뜨리면 쪼개질 제물 꼴이 될 쭉은 누구입니까? 물론 양편 모두 같은 신세가 되겠지만 그래도 징표를 원한 쪽이 아브라함이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이 꼴이 될 쪽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약속을 깨면 쪼개진 짐승 꼴이 될 거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15장을 잘 읽어보면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심지어 학자들도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마 하느님이 그런 꼴이 되겠어? 그게 말이 되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창세기 22장을 15장과 연관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시험했다면 22장에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할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프랭키의 자리에 아브라함과 하느님을 대입해보다


매기와 프랭키를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입해봤습니다. 이삭은 매기에게, 아브라함은 프랭키에게 대입시켜 본 겁니다. 프랭키는 1년 반 동안 가까이서 매기를 지켜봤습니다. 그녀는 서른한 살이란 나이는 권투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에 “서른한 살이 늦었다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뭘 보나 권투는 그녀의 전부였습니다. 돈 때문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불행한 처지에서 살다가 드디어 자기가 잘 하는 걸 찾아낸 겁니다. 그녀 곁에서 아버지처럼 돌봐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습니다. 병상을 찾아와 막장을 부린 가족들은 그녀가 퇴원하면 돌아갈 현실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매기는 프랭키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키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거절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못 한다고……. 그러자 그녀는 두 번이나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젠 말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프랭키는 밤중에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갑니다. 그녀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더 빨리 잠들라고 혈관에 충분한 양의 주사액을 주입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프랭키의 자리에 하느님을 대입해봤습니다.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살리면 되지!’라고 대답할 사람과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벌어지기도 전에 모든 걸 미리 아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명령을 수행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려 했던 겁니다. 시험을 하기 전에는 하느님도 몰랐다는 겁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은 “내가 이제 알았다!”(Now I know)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프랭키였다면 어떻게 하셨을지는 여러분 각자 생각해보시고 답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뭘까요? 대체 ‘믿음’이란 게 뭡니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믿음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그게 없는 사람입니까? 또 사람들은 믿음이 ‘크다’ 또는 ‘깊다’거나 믿음이 ‘작다’ 또는 ‘얕다’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이 믿음이 크거나 깊으며 작거나 얕습니까? ‘하느님이 이런 것까지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것까지는 못 할 거야.’라거나 ‘내가 믿는 하느님이 옳고 네가 믿는 하느님은 틀렸어!’라거나 ‘내 하느님이 더 힘이 세거든!’ 따위의 생각을 올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닌데 말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곳에 있는 마음과 생각과 심정을 조금씩이나마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이 자란다고 부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느님이 어떻게 아버지더러 아들을 자기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명령은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명령을 하는 하느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 조폭 두목이 부하의 충성심을 시험해보려고 누굴 죽이라고 명령하는 그런 심정으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명령하셨을까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보는 것, 그래서 그 마음의 작은 한 구석이라도 붙잡아보는 것,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특히 마지막에 프랭키가 말도 못하는 매기의 눈을 바라보면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주사를 놓는 장면을 보면서 이삭을 향해 칼을 든 아브라함의 심정을, 더 나아가서 그런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느님의 심정을 생각해봤습니다. 그것들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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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1


노래하는 이유, 찬양하는 까닭

시편 145:1-13


“나의 임금님이신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송축하렵니다. 내가 날마다 주님을 송축하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 위대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대대로 칭송하고 주님의 위대한 행적을 세세에 선포하렵니다. 주님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내가 가슴 깊이 새기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두려운 권능을 말하며 나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렵니다. 사람들은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님의 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주님, 주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주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며 주님의 성도들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님의 위대하신 행적을 말하는 것은 주님의 위대하신 위엄과 주님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함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시편 145:1-13).


하느님은 창조 전엔 뭘 하셨을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을까요? 저는 이런 게 궁금할 때가 있는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은 이럴 때 다들 구글(google)을 검색하지요. 그래서 저도 해봤는데 실망했습니다. 구글은 성서 이곳저곳을 인용하는 것 외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군요. 그것들은 구글이 내린 대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구글이 모아놓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1장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씀’(Logos)인 예수님이 천지창조 이전에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글을 소개하더군요. 또 창세기 1장 첫 구절,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영’은 신약성서의 ‘성령’과 같다면서 창조 이전에 하느님은 성령과 함께 계셨다는 등의 답이 고작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영’(루하흐 엘로힘)을 보혜사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입니다. 구글이 인용한 두 구절을 합치면 삼위일체가 되어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로고스), 성령 하느님(하느님의 영)과 함께 계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제 질문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누구와 함께’ 계셨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인데 그에 대해서 구글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구글이 모르는 것도 있네요.


유대인들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답니다. 한 아이가 랍비에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어요?”라는, 제가 가진 것과 똑같은 물음을 했더니 랍비는 “너 같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녀석 맴매하려고 회초리를 만들고 계셨단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아이의 물음에 성의껏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교육적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농담은 아니고 ‘나름의’ 신학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쓸데없는 상상이나 추측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읽지 못하게 하는 성서구절들이 있는데 창세기 1장 1절도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그 명단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 외에 에스겔의 여러 구절이 거기 포함된다고 기억합니다. 그 구절들을 못 읽게 한다는 말은 공식적인 예배 때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읽는 것이야 막을 수 없지요.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니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가?


흔히 성서가 말하는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정말 그것을 말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은 창세기 첫 장 첫 절만 봐도 성서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욥이 “제가 왜 이렇게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하느님께 따져 물었을 때 하느님은 욥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네가 천지가 창조될 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 이렇게 물으면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 때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창조 때 아무도(nobody) 없었던 것은 맞지만 아무 것도(nothing) 없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에 나오는 ‘혼돈’ ‘공허’ ‘어둠’ ‘깊음’ 등의 말은 추상명사이니까 제쳐두더라도 ‘땅’과 ‘물’은 명백하게 물질명사입니다. 성서는 창조 때 “‘땅’이 혼돈하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창조 이전에도 뭔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적어도 ‘땅’과 ‘물’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서의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초대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내놓은 주장으로서 성서의 창조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믿어온 ‘무로부터의 창조’와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말하자면 일종의 ‘가르기’와 ‘질서 세우기’입니다. 창조 첫째 날에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나눴고 둘째 날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눴으며 셋째 날에는 육지와 바다를 나눴고 넷째 날에는 낮과 밤을 나눴으며 다섯 째 날에는 동물들을 공중동물, 육지동물, 바다동물을 나누는 등, 창조는 혼돈스럽게 뒤섞여 있던 것들을 구별해서고 나누어 질서를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조가 7일 만에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과거 어느 한 때에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과거에 완성된 채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져가는 중입니다. 오래 전 서울에 살 때 한 서점에 갔다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책이 있습니다. 유럽 신학자 에버하르트 윙(Eberhard Jüngel)엘이란 분이 쓴 <God’s Being Is in Becoming>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번역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형성되는 중이다, 만들어지는 중이다’ 쯤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책인데 성서가 말하는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가르고 나눠서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서의 창조’라는 주장도 거기서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찬양’은 예배의 필수요소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레위기를 읽으면서 제사의식, 곧 예배의 중요성과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희생제사에 관해 얘기했지만 예배에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는 ‘찬양’(讚揚, praise)입니다. 찬양의 역사는 예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됐습니다. 찬양이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에서 필수적입니다.


찬양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다릅니다. 주로 음악이 사용되지만 다른 예술형식도 사용됐습니다. 음악의 경우도 사람의 목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됐습니다. 때론 요란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하기도 했지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도 찬양했습니다. 침묵도 찬양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형식은 다양하지만 예배에서 찬양이 빠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성서의 대표적인 찬양이 시편인데 무려 150편이나 되는 많은 시편이 있다는 사실은 예배에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시편에는 가락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시편을 읽지 않고 노래합니다. 현란한 멜로디와 화려한 애드리브는 없고 음정의 높낮이 변화도 크지 않았지만 시편은 분명 노래, 곧 찬양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부른 노래라고 주장한 학자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사람의 반응, 응답, 특별히 노래로 한 응답이 시편의 찬양이라는 겁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느님이 구원사건을 벌일 때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 일이 마무리된 후에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겁니다. 하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하느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 특히 모든 장자가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 비로소 히브리인들을 내보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갈라졌을 때도 두려워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도 뿔 나팔 부는 사제들 뒤를 따라서 성 주위를 걸은 것 외에는 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느님이 일으킨 구원사건이 끝난 다음에 노래를 지어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축하했다는 것이 폰라트의 주장입니다.


그보다 약간 후대 학자인 크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시편의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감사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예배에서 했던 찬양은 과거 어느 때 벌어졌던 구원사건을 단순히 기억해서 되돌아보고 노래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세상을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사람은 타자로서 그걸 향유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은 혼돈(카오스)을 갈라내고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창조사역을 계속하고 계시고 사람은 거기에 파트너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해서도 사람은 그것과 떨어져서 객체로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동반자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마당이 바로 예배이고 그 중에서도 찬양이라고 베스터만은 주장합니다. 찬양은 늘 변조되어왔고 편곡되어 왔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같은 가락과 같은 노랫말로 반복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변조된 가락과 노랫말로 편곡하고 개사해서 부름으로써 지금 여기 자신들의 얘기를 담아냈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봤고 경험했던 겁니다.


어거스트의 음악은 곧 찬양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태어난 줄도 몰랐고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는 중에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사실은 죽지 않고 누군가에게 입양됐다가 고아원으로 옮겨져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나이 많은 원아들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자기를 데리러 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부모가 자길 찾으러 오지 않자 그는 스스로 부모를 찾아 나섭니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 이상으로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고 그 소리들을 음악으로 들을 줄 아는 비상한 탤런트를 가졌습니다. 그는 음악이 자기를 부모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많은 소리들을 듣습니다. 우연히 만난 아이를 통해 몸을 의지하러 찾아간 곳이 하필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내 ‘앵벌이’ 시키는 나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어거스트는 거기서 자신이 천재적인 음악재질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한 교회에 찾아든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하느님의 섭리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는 거기서 피부색 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 광경을 조금만 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8DwW0dCQHPQ


그가 줄리아드에 들어가고 곡을 만들어 공원에서 연주하고 그것을 통해서 부모를 만나는 줄거리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요 할리우드 스타일이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 봐도 감동적입니다.


긴 세월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 듣기 싫은 말은, 그래서 저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말이 ‘준비찬송’ 또는 ‘준비찬양’이란 말입니다. 찬양은 뭔가를 준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의 메인이벤트를 하기 전에 하는 오픈게임처럼 벌이는 행사가 아닙니다. 찬양은 말씀을 듣기 전에 예배자의 감정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벌이는 퍼포먼스도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서 무슨 말에든 ‘아멘!’ 하고 화답하게 만드는 수단도 아닙니다.


찬양은 꿈을 꾸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신다고 믿고 그 일에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이 찬양합니다. 오랫동안 이 땅의 흑인노예들이 매를 맞아가면서 ‘우린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른 것은 그 노래가 자기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고 고통을 잊게 만들어줬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찬양을 부르면서 실제로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실현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그 찬양을 부르면서 그들은 실제로 그 행진에 참여하여 그 대열 안에 있었습니다.


찬양은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시(詩)


찬양은 지금 주어진 세상(status quo)은 별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산문’(散文)의 언어가 아닙니다. 찬양은 지금 나의 삶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이고 입 다물고 사는 맥없는 산문의 언어가 아닙니다.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 하느님은 나와 세상을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바꾸시려 한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온 맘과 온 영혼과 온 몸을 바쳐 외치는 시(詩)적 언어입니다. 나의 삶은 내가 희망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터뜨리는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시적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해결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이 무겁기만 하고 그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위로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뿐인가요,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교리)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모두 ‘힐링’을 외치는데, 사실 한 주간 세상에서 부대끼면서 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못지않게, 아니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꾸겠다는 의지요 희망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입니다. 나와 내 후손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하느님나라의 이상에 좀 더 다가가고, 외롭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물질로나 정신, 영혼으로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입니다. 찬양할 때 그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찬양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노래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과 기존질서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줍니다.


어린 어거스트 러쉬는 음악에서 그걸 봤습니다. 저는 그의 천재적 음악 재능이 그걸 보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그의 천재적 재능은 부모를 빨리 만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부모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음악에 담겨 있는 찬양의 힘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찬양시간에 때로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닌 이른바 ‘세속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걸 불편해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심각하게 그에 대해 제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찬양을 찬양으로 만드는 게 뭘까? 그냥 노래와 찬양은 뭐가 다를까? 예수님, 하느님, 믿음, 은총 등의 언어가 가사에 담겨 있는 노래는 다 찬양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나라를 꿈꾸고 그걸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굳어 있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믿음을 가장 적절한 멜로디와 노랫말로 표현하는 노래가 찬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찬양시간에 더욱 힘차게, 열정적으로 찬양합시다. 그냥 노래에 취해서 찬양하지 말고 내가,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르면서 새 술을 낡은 부대에서 새 부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찬양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저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생이 달라질 겁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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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5


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사무엘상 28:3-7


사울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어 ‘인간’(人間)은 사람 ‘인’ 자에 사이 ‘간’ 자를 씁니다. 사람은 곧 사람 ‘사이’ 곧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뜻이겠습니다. 사람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사울이 누구인지 알려면 그의 외모나 특기나 취미나 취향, 그가 좋아하는 음식 등이 뭔지 아는 걸로는 부족하고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사울이 누군지 알려면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관계는 어땠고 주위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네 번에 걸쳐서 사울 이야기라는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울이 맺은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를 마감하는 마지막 글로서 하느님이라는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로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극의 흐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정도이지만 하느님은 연극을 이끌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늘은 숨은 주인공인 하느님을 살펴볼 터인데 다시 한 번 얘기하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사울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곧 ‘캐릭터’로서의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사람이 알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깊고 너무 넓고 신비한 분이기에 하느님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하느님은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방법이 성서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물론 성서가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서 이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성서가 하느님은 아는 유일한 길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길임에는 분명합니다.


성서가 하느님을 보여주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런 분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사건’이나 ‘이야기’, 또는 시적인 ‘은유’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줍니다. 이렇듯 성서는 직설적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진 않으므로 우리는 성서를 ‘해석’이라는 작업을 해가며 읽어야 합니다. 예컨대 성서가 하느님을 ‘질투’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글자 그대로 하느님이 사람처럼 질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하느님의 특정한 성격을 가리키는 ‘시어’로 알아듣고 뭘 지시하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또 성서가 하느님이 ‘오른팔을 펼쳐서 구원했다’고 말하면 ‘그럼 왼팔은 뭐에 쓰나?’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지 말고 그 행위가 뭘 가리키는 ‘지시어’인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만 바라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사울 이야기에서 보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하느님은 그 이야기를 만들어서 후대에 전한 사람들에 의해 ‘해석된’ 하느님입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새롭게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거나 문제제기할 때 우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문제제기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회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통해서 하느님께 왕을 요구한 이유는 첫째로 외국,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고, 둘째로 전쟁이 없을 때도 지속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리더가 필요했다는 데 있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요구는 이해할만 합니다.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야훼의 궤를 갖고 나갔지만 패배했습니다. 게다가 야훼의 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사무엘과 하느님은 이와 같은 백성의 요구를 각각 자신을 버린 걸로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은 백성이 자기를 버린 걸로 이해하고 마음 상한 사무엘에게 그들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느님은 백성들이 당신을 버렸다고 여겼으면서도 그들을 벌하기는커녕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는지 궁금합니다. 왕을 달라는 요구가 다른 신을 섬기겠다는 뜻은 아니므로 용납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걸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다른 신을 섬기겠다거나 우상을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느님은 사울을 택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셨습니다. 성서는 그 얘기를 두 번이나 하는데 그래서 ‘하느님도 후회라는 걸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에는 여기 말고도 하느님의 후회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여럿 더 있습니다. 십계명에 따르면 하느님은 ‘질투’도 하신다는데 그에 비하면 ‘후회’ 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후회하신다는 데 충격 받을 사람도 있겠지요.


이에 못지않게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의 후회가 정당한가, 사울은 하느님을 후회하게 할 정도로 못된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제사를 집전한 행위로 하느님을 후회하게 만들었고, 헤렘의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말대로 이레 동안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기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이게 문제였다고 해도 그 책임은 두 사람이 나눠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렘의 규율을 어긴 것도 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지난 번에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게 사울의 책임이라고 해도 거기에 대한 징벌의 강도가 적절한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잘못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징벌이 과중하다는 겁니다. 물론 사울의 불행에는 그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걸 부인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된 후로 다윗을 죽이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광기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는 뭔가에 쫓기듯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거란 얘기입니다.


성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느님은 사울을 버렸을까요? 왜 하느님은 자신의 선택을 물러가면서 사울을 버려야 했을까요? 사울 이야기는 두 가지 이유를 들지만 그것만으로는 얼른 수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서도 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만족스런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서도 답을 찾느라고 고민했다거나 성서도 답을 모르는 것 같다는 말에 어리둥절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를 모독한다고 분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서는 사람의 책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이 써서 사람이 전달한 사람의 책입니다. 문서로서의 성서는 사람이 써서 사람이 후대에 물려준 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사람의 책인 성서는 우리처럼 하느님이 누군지, 하느님의 뜻이 뭔지 알려고 갖은 고민과 온갖 실험을 하는 책입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 눈에는 왜 하느님이 사울을 버렸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성서가 확실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저 자기가 찾아낸 답의 실마리를 후대에게 남겨놓는 데 만족했던 걸로 보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두 가지 ‘불순종’이 그의 버림받음에 대한 만족스런 답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성서도 동의한다고 보입니다. 그게 정답이라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불법적으로 먹은 다윗도 거기에 맞는 벌을 받았어야 했는데 안 그랬으니 말입니다. 다윗이 벌을 받아 불행해지기는커녕 그에게 속아서 빵을 내준 놉의 제사장들만 사울의 손에 죽지 않았습니까. 사울과 다윗 중에 누구 잘못이 더 위중한지는 판단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쪽은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고 다른 쪽은 그냥 넘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사울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두 가지 면이 드러나는데 둘 다 사울이 왜 하느님에게 버림 받았나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첫째, 사울은 ‘희생양’(scapegoat)이었다는 것이고 둘째, 하느님은 사울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희생양’ 제도는 이스라엘에게 익숙합니다. 제사제도, 특히 속죄제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그 벌은 죄지은 당사자가 받아야 하지만 대신 제물로 양을 죽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가 속죄양 제도입니다. 이 이론은 르네 지라르(Rene Girard)라는 프랑스 사상가가 발전시켰고 성서학자들도 제사제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싫어서 왕을 요구했고 그것은 하느님을 버린 행위라도 이해합니다. 백성의 요구는 하느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므로 하느님 입장에서는 중대한 일탈이요 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변상황은 인간인 왕을 필요로 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현실 이치에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한 책임과 처벌을 누군가에게 부과했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사울이라는 겁니다. 사울이 이른바 ‘속죄양’이 됐던 겁니다.


속죄양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처벌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속죄양은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저지른 집단적인 죄에 대해서 공동체를 대신해서 벌을 받습니다. 사울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은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에 대한 처벌을 그가 받았던 겁니다. 사울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이 속죄양 이론을 의식적으로 그에게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벌어집니다.


둘째는, 하느님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점이 사울의 불행을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고 여기는데 사실 저는 이게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윗과 관련해서 여러 번 인용한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야훼는 다윗과 사랑에 빠진 신이다.”(Yahweh is the God who fell in love with David). 물론 이 말도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집니다. 그처럼 야훼가 일방적으로 다윗 편을 든 것은 그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란 겁니다. 곧 야훼가 다윗을 선호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편을 든 것은 사랑에 빠져서 한 것이므로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버린 것도 그에게 결격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윗을 사랑해서 그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울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정말 하느님이 이런 분일까요? 누군가를 사랑해서 다른 누군가를 버리는 분일까요? 아무도 모르지요.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니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울 이야기가 하느님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 대해 이런 느낌이 가진 적 없습니까? 하느님이 나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해서 내가 소외된다는 느낌 말입니다.


남을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다윗처럼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랑을 남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가 쯧쯧…’ 하면서 혀를 찰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남달리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딱 남들만큼만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남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저처럼 다른 사람만큼만 사랑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그도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을 남보다 덜 받거나 전혀 못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여러분 각자가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사울의 관점에서 이 얘기를 읽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분명 세 부류 중에 첫 번째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나 셋째였겠지요. 그러면 거기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울처럼 살아야 할까요? 사울처럼 다윗을 질투하면서 그를 죽이는 데 일생을 허비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자족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보다 덜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살면 안 되는 겁니까. 이게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산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은총을 나누면서 그들이 겪는 고민과 고난을 떠안으면서 살아가는 게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 아닌가 말입니다.


저는 사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 반비례해서 하느님의 편애를 받았던 다윗에게는 반감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제가 그의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울의 삶의 태도도 긍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데서 오는 좌절감과 대신 선택된 다윗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는 인생을 망쳤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영영 버리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의 생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섭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버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왕좌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데 불과합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닫는 점이 바로 이겁니다. 사울이 택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길도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영영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지라도 우리가 받은 은총을 우리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정도로는 넉넉하게 받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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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4


어쩌다 두 용사가 쓰러졌는가!

사무엘하 1:17-27


사울은 실패한 삶을 살았을까?

지난 번 글에서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을 개략적으로나 살펴봤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고 대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로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에 시달려 강박증 비슷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소개해서 다윗은 사울의 신하가 됐는데 바로 이 다윗이 사울 대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였습니다. 사울을 괴롭힌 강박증의 원인이 다윗이었는데 수금을 연주해서 그를 강박증에서 치료해준 사람도 다윗이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그 이후 얘기는 지난 글에서 얘기했으니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누가 누구를 쫓는지 헛갈릴 정도로 서로 쫓고 쫓기는 삶을 살다가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가 자기 아들들이 죽고 자신도 부상당하자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9-27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지어 부른 조가(弔歌)입니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이번에는 사울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다음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여기서 하느님을 얘기할 때 그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character)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교리에서 말하는 하느님, 예컨대 전지전능하고(omnipotent) 무소부재한(omnipresent) 하느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연극에 비유하면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를 그리는 연극의 등장인물 중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이란 등장인물은 실제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하지요. 하지만 연극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하느님이 등장인물 중 하나이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란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를 통해서 아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연극을 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하느님은 사울을 선택한 걸 후회하는 분입니다.


사울의 삶은 실패한 삶일까요? 질문이 단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사울은 실패한 사람입니까? 그의 삶을 성공한 삶으로 볼 수는 없겠습니다. 한 개인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는 없겠습니다. 또 성공한 삶은 무엇이고 실패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서가 그와 대립했던 다윗에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사울의 삶을 성공적이고 본받을만한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왜 실패했을까요? 그는 한 개인으로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왕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었기에 실패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가 처한 환경이나 외부에서 가해진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스로의 결함 때문입니까, 아니면 외적 요인 때문입니까? 둘 다 틀렸다는 양비론이나 둘 다 옳다는 양시론 모두 비겁하긴 하지만 사울의 경우에는 두 가지 요인이 모두 작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다윗에게는 ‘섭리’(providence)였던 야훼가 사울에게는 운명(fate)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짧은 문장은 얽히고설킨 두 사람의 생을 잘 요약했다고 보입니다.



그게 모두 사울 탓일까?

사람은 누구나 객관적이기 어렵습니다. ‘나’라는 이성을 가진 주체가 사고하고 평가하고 행동하는데 어떻게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객관적’이라는 말이 당사자 아닌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평가한다는 뜻이라면 의미가 있을 겁니다. 저는 사울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읽을 생각도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사울 편에 서서, 곧 가급적이면 사울에게 우호적인 입장에서 읽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사울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왔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는 다윗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인 관점에서 쓰였습니다. 이 입장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암하고 사울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잘못된 일의 책임을 모두 사울에게 전가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을 가급적 공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사울 편을 들려고 애를 써도 이미 사무엘과 다윗 편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1등인 다윗만 기억하고 추앙하는 현실에서 1등 아닌 사람도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제사에 소홀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무엘, 또는 그가 대리한 하느님의 명령을 두 번 어겼는데 둘 다 제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경우에 사울만 탓하는 것은 공정치 않아 보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했는데 정작 그는 이레가 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인들이 속속 탈영하므로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는데 그걸 사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이렛날에는 왔어야 하지 않았나 말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 몰살하라는 ‘헤렘의 규율’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원해서 그랬다는 사울의 말이 거짓핑계가 아니라면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리품을 챙겨가자는 백성들의 요구를 사울이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백성들이 사무엘이 사울에게 ‘헤렘의 규율’을 지키라고 명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모든 일이 사울의 잘못이고 책임이라고 해도 그가 저지른 잘못과 그에게 부과된 처벌에 균형이 맞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제사장도 아니면서, 그것도 부정한 몸으로 먹었습니다. 이 역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였지만 그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의 예로 이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다윗의 행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윗 시대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먹는 행위는 명백히 계명 위반으로서 무거운 처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헤렘의 규율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 규율은 영구히 지켜진 ‘철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전리품을 챙겨서 부하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규율이 사울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하게 적용됐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사울에게 너무 관대한 걸까요? 다윗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합니까?


사울의 질투와 하느님의 편애

사울의 생을 비극으로 몰아간 결정적인 요인은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였습니다. 자기 대신 다윗이 왕으로 선택됐음을 알게 된 후부터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의 포로가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윗은 사울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울이 보기에도 그랬습니다. 우선 능력은 사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이 월등했습니다. 사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대중적 인기도 다윗에 비하면 사울이 크게 뒤처졌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면서 여인들이 환호했을 때 사울은 질투심에 불타서 다윗을 죽일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울보다 능력도 뛰어나고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던 겁니다. 사울이 질투심을 품지 않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은 하느님이 다윗을 편애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아닌 하느님이 궁극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다윗을 더 사랑해서 자기를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질투했던 겁니다. 그러니 그는 다윗과 다투지 말고 다윗을 편애해서 자기를 버린 하느님에게 따졌어야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니 스스로 제사를 집전한 후 사울은 사무엘에게 심하게 꾸중 들었습니다. 이때 사울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는 얘기를 사무엘에게 듣습니다. 그 말은 들은 사울은 기분이 어땠을까요? 그 말이 이후 그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선 사울이 사무엘의 말을 믿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을 리 없다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선언을 들은 다음에도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했으니 말입니다. 요나단의 기습공격이 효과적이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블레셋 군대가 자기들끼리 싸우고 죽이고 했는데 하느님이 전투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습니까. 그러니 사울은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헤렘의 규율을 어기고도 그는 한 동안 살아있었습니다. 사무엘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을 정도로 간절했지만 그 후로도 한 동안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으니 확신과 의심 사이를 오갔을 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볼 수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 선언을 들은 후로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추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인기 높은 부하에 대한 질투심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상으로 커졌습니다. 점점 더 집요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대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누군지 모르다가 다윗임을 차차 알게 되면서 그는 어떻게 처신했어야 할까요? “이제는 네가 나대신 왕 노릇해라.”라고 선뜻 왕위를 넘겨줬어야 할까요?


만일 내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자기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사울은 다른 종류의 생을 살았을까?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실패자가 됐던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해 각자 나름의 답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게 정답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버림은 경험이 있습니까? 엉뚱한 질문인가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면 왜 하느님을 예배하겠느냐고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많습니다. 뭐 큰 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별 것 아닌 것을 바랬는데, 그걸 들어주신다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도 외면하실 때는 속상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을 끓이고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하,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구나.’ 하느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실 리도 없지만 반대로 내 관심과 기도에 관심도 없는 분도 아니라고 믿게 됐습니다. 다만 인생은 그런 거다, 나는 바라고 기도하지만, 그리고 하느님도 내가 뭘 바라는지 기도를 들어 아시지만 언제나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응답하시지는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거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냥 그런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이 소유한 왕권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입니다. 그의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에서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왕이 되는 걸 원치 않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에 대한 사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착이 생겼습니다. 그럴 놓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선택된 다윗을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에게서 왕권을 빼앗겠다는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왕권은 본래 사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원치도 않았고요. 그럼 그는 왜 본래 자기 것도 아닌 왕권을 그토록 내놓지 않으려 했을까요?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본래 자기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울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붙잡고 있으려다가 강박증에 시달렸습니다. 반면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는 사무엘에게서 자기가 사울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리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가 사무엘의 말을 어느 정도 신뢰했는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윗은 자기에게 선물로 주어진 왕위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실현해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윗의 성품을 별로 좋게 보지 않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런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왕권은 사울에게도 다윗에게도 하나의 권리요 축복이자 동시에 의무요 미션이었습니다. 사울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왕의 의무와 미션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물론 그걸 모두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울 이야기라는 연극에서 무대 위에 등장하지는 않고 기껏해야 목소리로만 존재하지만 그 어떤 배우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울의 실패는 이런 하느님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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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3


주의 영은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오다

사무엘상 16:14-23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

오늘 설교는 사울 왕 이야기 세 번째입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이 등장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누차 얘기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에 대해 얘기했으니 오늘은 그 이후에 사울의 생이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은 내키지 않지만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지도자로서 왕을 원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백성들이 그에게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이 대리한 하느님과의 관계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은 두 번 큰 갈등을 겪습니다. 블레셋과 전쟁했을 때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사울이 직접 제사를 집전했을 때가 첫 번째이고,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했을 때 사무엘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말고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했는데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과 일부 동물을 포로와 전리품으로 가져왔을 때가 두 번째입니다. 이들 사건을 계기로 둘 사이는 틀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울을 대체할 사람으로 다윗을 선택했고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비밀리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이 일이 완수되려면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고지식하고 순진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울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음을 알게 된 후로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성격도 포악해졌습니다. 성서는 그 원인을 “사울에게서는 야훼의 영이 떠나가고 그 대신에 야훼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하고 말합니다. 사울을 괴롭힌 영은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야훼께서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사울을 괴롭힌 자는 궁극적으로 야훼였던 겁니다. 야훼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하려고만 했으면 어렵지 않게 사울을 내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악한 영을 보낸다든지 하는 복잡한 방법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울은 이후 계속해서 야훼가 보낸 악한 영에게 시달립니다. 사울을 괴롭힌 병이 뭔지 상세하게 연구한 학자도 있더군요. 저는 호기심이 일어나서 삼십 쪽 정도의 논문을 읽어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박증’이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불안장애’라고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정신분열’이라고도 주장하는데 논문 저자는 결론적으로 사울의 증상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정보가 부족해서 그의 병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잔뜩 기대하고 열심히 논문을 열심히 읽은 저는 적지 않게 실망했습니다. 논문의 저자는 성서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면 사울의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데 과연 그럴까 싶습니다. 저는 편의상 ‘강박증’으로 부르겠습니다.



수금 타는 소년 다윗과의 만남

사울이 고생하는 걸 보다 못해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소년이 있는데 그를 데려다가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이 사울을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타게 하면 나을 거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궁전에 들어온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에게서 악한 영이 떠나고 그는 제정신이 들었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군인으로 승진시켜서 곁에 두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일입니까. 물론 사울이 겪는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악한 영을 보낸 하느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해서 왕이 될 거란 사실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다윗 아닙니까! 다윗만이 사울을 강박증에서 해방시켰다는데 바로 그가 사울을 괴롭히는 강박증의 원인이었다니 말입니다.


훗날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함으로써 사울을 능가하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 여인들이 춤추며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했다는데 이것 역시 사울의 강박증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겠다는 의도를 처음 드러냈을 때가 이때였습니다. 사울은 수금 타던 다윗에게 두 번 창을 던져 죽이려 했고 이후로도 집요하게 그를 추격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배신도 사울의 강박증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는 블레셋 군인 1백 명을 죽여 그들의 양피를 가져오면 다윗에게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그를 죽이려는 미끼였습니다. 블레셋 군인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다윗은 처음엔 사양했지만 왠지 나중에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블레셋 군인 2백 명의 양피를 가져옴으로써 그의 사위가 됩니다. 하지만 장인, 사위가 된 두 사람은 사이가 나날이 나빠졌습니다. 사울은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미갈은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다윗을 탈출시킵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도 다윗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구약성서가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고 밝힌 경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둘의 사랑은 달콤했을지 모르지만(하지만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딸이 자기를 배신한 셈입니다. 아들 요나단은 또 어땠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은 요즘 학자들이 동성애 관계일 수도 있다고 추측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요나단은 왕위 계승의 상징인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넘겨줬을 정도로 다윗을 아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다윗을 위해 아버지 사울과 갈등을 빚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확인한 후 그의 도움을 받아 사울의 궁에서 탈출해서 방랑자 신세가 됩니다.


강박에 쫓기는 사울

사울 입장에서는 사무엘에게 시달림당하는 것도 벅찬데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측근들까지 자기를 배신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요나단과 미갈뿐 아니라 측근 신하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호통 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베냐민 사람들아, 똑똑히 들어라. 이새의 아들(다윗)이 너희 모두에게 밭과 포도원을 나누어 주고 너희를 모두 천부장이나 백부장으로 삼을 줄 아느냐? 그래서 너희가 모두 나를 뒤엎으려고 음모를 꾸몄더냐?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을 때에도 그것을 나에게 귀띔해 준 자가 하나도 없었다. 또 내 아들이 오늘 나의 신하 하나를 부추겨서 나를 죽이려고 매복시켰는데도 너희들 가운데는 나를 염려하여 그것을 나에게 미리 귀띔해 준 자가 하나도 없었다.


사울은 점점 더 포악해져갔습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를 피해 도망쳤을 때 놉이란 곳에 사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를 도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 성소를 섬기는 여든다섯 명의 제사장들을 포함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주민들과 동물들까지 모조리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정도면 ‘광기’(狂氣)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과거에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과 동물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사무엘의 말을 안 듣고 아말렉 왕 아각과 일부 동물들을 산채로 잡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긴 헤렘의 규율을 이때라도 지키려 했을까요, 그는 엉뚱한 경우에 그 규율을 지킨 셈입니다.


이 와중에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줬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울이 뒤를 보려고 동굴에 들어왔습니다. 부하들은 하늘이 준 기회라며 사울을 죽이자고 제안했지만 다윗은 하느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면서 그의 겉옷자락만 몰래 잘랐습니다.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음을 사울에게 알린 셈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다윗이 있는 곳을 알고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잡으러 왔을 때인데 그때도 몰래 진지에 숨어들어간 다윗은 잠든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창과 물병만 들고 나왔습니다. 동굴에서 만난 경우는 우연이었지만 이 경우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사울의 진지에 숨어들어간 것인데 왜 그냥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을 것이면 왜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에 들어갔을까요. 두 경우 모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줬음을 사울에게 통보했습니다. 이에 사울은 다시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는 이 맹세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둔 최대 악수(惡手)는 무당을 찾아간 일일 겁니다. 사무엘이 죽은 뒤 다시 한 번 블레셋 군대가 몰려오자 그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야훼께 물었습니다. 이걸 보면 사울은 여전히 야훼를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훼에게 버림받았음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 여부를 야훼에게 물었지만 야훼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야훼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무당을 찾아갑니다. 바로 앞에서 사울은 무당과 박수를 이스라엘에서 모조리 쫓아냈다고 했는데 그래도 어딘가에 숨어있던 무당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청했습니다. 이 대목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울 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좋은 얘기를 듣겠다고 그를 불러달라고 했나 말입니다. 사무엘은 역시 야훼는 사울을 떠나 그와 원수가 됐다고, 왕위를 사울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넘겨줬다고, 또한 사울을 블레셋 사람 손에 넘겨줬으므로 내일이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스올에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충격 받아 졸도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말대로 그는 다음날 길보아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당합니다. 그는 블레셋인에 의해 죽는 걸 수치로 여겼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사울 이야기를 대강만 살펴봤는데 세세하게 읽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내용은 설교에서 다룰 수는 없고 언젠가 사울과 다윗에 관한 책을 쓰게 되면 그때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은 누구입니까?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저자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1백 쪽 내외의 작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 첫 문장을 “예수는 착한 사람이었다.”라고 썼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었을 때 첫 문장에서 멈춰서 한동안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분이었다는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고 명쾌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하고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을 좋은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도 그를 좋은 사람이나 본받을만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의 생은 다윗의 그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사무엘서는 다윗에 대해 드러내놓고 호의적입니다. 그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사울에 대해서는 비호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는 사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서 사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은 확실히 전에 비해 난폭해졌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다윗을 쫓아가서 죽이는 데 전념한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 역시 순수하고 순진하게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자기가 사울 대신 왕이 될 줄 알았고 그래서 계획적으로 사울의 사위가 된 걸로 보입니다. 그 역시 적극적으로 왕위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사울이 강박증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왕위를 지키려 했고 다윗은 냉정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계획적으로 왕좌로 다가갔다는 점일 겁니다. 사울이 탐욕스러웠습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욕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달리 탐욕스러웠다고도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은근하지만 다윗이 더 탐욕스러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성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이 누구를 편애하고 누구를 버리고 누구에게 시큰둥한 게 아니라 각자가 그렇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울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원치 않았는데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그는 남달리 탐욕스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가 겪은 고통은 저지른 잘못에 비해서 도에 지나쳤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컨트롤할 수 없는, 자기보다 엄청나게 큰 힘에 의해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고도 보입니다. 이번 사울에 대한 설교는 사울처럼 하느님에게 버림받았거나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생은 운명적으로 결정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운명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보는 그리스 비극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았고 사람은 그렇게 하느님이 정한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닙니다. 사울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데는 그 자신의 결정도 큰 역할을 했던 겁니다. 이 얘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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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2


그를 택한 걸 후회한다!

사무엘상 15:10-11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기

오늘은 사울 이야기를 갖고 하는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울 이야기 첫 번째 설교에서 저는 다윗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생을 간추려 얘기하고 설교 말미에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걸 후회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고 사실만도 놀라운데 성서는 몇 줄 아래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는 법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를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또 몇 줄 아래서 하느님은 다시금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반복해서 말을 바꾸니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헛갈립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말을 바꾸면 신뢰를 잃고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한국에서 사드(THAAD) 문제에 대해서 한 후보가 말을 바꿨다고 비난받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느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을 비난하듯이 하느님을 비난했다가는 변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입을 닫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하느님이 왜 이래?’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의 주요 맞상대는 사무엘입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 2백년간 이어진 사사시대를 벗어나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고 사울은 첫 왕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를 잇는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요구를 백성들로부터 받습니다. 외적, 특히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전투를 이끌고 지속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자신의 지도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지만 하느님은 백성들은 사무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거부하는 거라며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후 사울이 보여준 태도와 행동을 보면 그는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서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적폐청산’이란 말이 유행합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폐해를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다음 정부는 과거 10년의 적폐를 청소하는 데 임기 대부분을 보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잘 해도 비난과 욕을 먹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행기를 책임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첫 왕 사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사사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세력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모두에게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애를 요약했는데 얼마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한다고 전제하고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울 얘기를 ‘현실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과 사무엘을 비롯해서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고 우리는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단지 그들이 성서에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성서의 등장인물들은 천사가 아닌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도 있고 인간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이기심과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선의(善意)와 이기심이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가 나의 이해(利害)와 어긋날 때 갈등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둘째,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독자가 사건 현장에 주인공들과 같이 있다고 상상하며 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설화자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뭘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를 다 아는 상태에서, 심지어 하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할지도 다 압니다. 소설을 서술하는 관점에 ‘전지적 작가’의 관점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술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사실상 ‘전지적 독자’의 관점에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역사라는 것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보여서 역사의 ‘법칙’까지 운운할 수 있지만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정작 벌어진 결말은 그런 가능성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선을 가급적 버리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주인공 곁에서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 읽자는 얘기입니다.



사무엘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마음이 상했을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하느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였을까요? 그런데 하느님은 백성들이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감히’ 어떻게 하느님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사사로서 누려온 권한을 남에게 넘겨야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사무엘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기꺼이 홀가분하게 자기 권력과 영향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무엘의 경우에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두 감정이 모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반한 데 대한 분노와 자기의 영향력을 잃는다는 불안과 섭섭함이 공존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뜻이 내 이익과 어긋나는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은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이런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느니, 하느님 잘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만사형통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믿고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런 욕망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내 안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성자(聖者)가 아닌 한 이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우선 이런 갈등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갈등은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득도하고 해탈해서 세상 안에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떨어져서 살지 않는 한 이 갈등을 우리는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신앙은 ‘결코’ 우리를 만사형통한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삶은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그것은 대개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서야 가능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생이 만사형통하듯 잘 풀린다면 하느님께 감사하기 전에 혹시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힘들고 괴롭게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욕망을 누르면서 사는 것, 나의 욕망보다 이웃과 더불어 잘 살거나 공동선을 우선하고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런 삶을 즐겁게 만들거나 최소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의 땀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나의 노력이 이웃의 삶을 고양시킨다면 나는 거기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날 수도 있음을 인정, 인식하고 끊임없이 둘을 조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까? 다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의 욕망을 공동선 아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인가, 사무엘의 말인가?

사무엘과 사울이 얽힌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질 세 가지 일을 예언했습니다.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줄 것이라는 것이 첫째이고,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빵 두 덩어리를 줄 것이라는 게 둘째이며, 그 후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날 텐데 사울도 그들처럼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뒤따라 그대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릴 것이니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때에 가서 하셔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예언이 실현된 때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상당하므로 이 예언을 전쟁에 적용하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울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서로 맞서있어서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야훼 하느님이게 드리는 제사를 집전할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이른바 ‘거룩한 전쟁’에서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장 역할을 맡은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이레를 기다렸지만 그래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이렇게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임금님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길갈에서 사무엘은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 자체에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건은 ‘내가 갈 때까지’와 ‘이레 동안’이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가 되기 전에 사무엘에 온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레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좌우간 사울은 이레 동안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자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사무엘은 자기가 한 명령이 모호하다는 걸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무엘과 사울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모호한 명령을 한 사무엘에게도 잘못이 있고 이레를 기다렸다고 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는데 제사를 드린 사울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책임의 크기를 묻자면 사울보다는 사무엘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무엘이 길갈에서 사울에게 명령했을 때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란 언급이 없습니다. 자기의 명령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꾸중할 때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라는 명령은 사무엘의 명령입니까, 하느님의 명령입니까? 혹시 사무엘은 자기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을 혼동하는 게 아닐까요? 독자들은 사울 이야기 전체에서 대체로 사무엘은 옳고 사울은 틀렸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무엘보다는 사울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지만 성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하느님/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느님/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씀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입니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하느님의 말씀인가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얘기는 목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들 아닙니까. 우리 교회 주보표지에 ‘모든 교인’이 목회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자기의 욕망을 다 버리지 못하고 그와 배치되는 사울을 어떻게든 주저앉히려 했던 게 아닐까요. 작은 일을 트집 잡아 그를 꾸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이 제사를 집전한 사울에게 선포한 저주는 도에 지나치게 가혹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왕조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니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사울 이야기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http://fzari.com/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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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상 9:15-17 -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오늘부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하려 합니다. 다섯 번 정도 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구약성서를 갖고 자주 설교할 생각입니다. 올해 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갖고 설교했고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합니다. 분량만 갖고 보면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의 세 배 정도 되므로 구약 대 신약의 설교 비율이 3:1이 돼야겠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이므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 신약성서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시효가 끝난 하느님 말씀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려 하는데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만 살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살았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사울의 일생은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사울의 삶은 다윗 등장 이전과 이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가문의 기스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과 결혼해서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이스보셋이라는 네 명의 아들과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둘째 부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알모니와 브비보셋이란 아들도 얻었습니다. 이런 점들만 보면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당시에는 부인을 여럿 두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이스라엘의 유력한 지도자 사무엘과 만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성서는 사울의 외모를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고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고 했습니다. 이 묘사를 사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모두 데려다 놓고 그와 비교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는 말은 사실묘사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외모가 출중했음을 보여주려는 서술일 텐데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훗날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자를 만나러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이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한 걸 떠올려보면 사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더욱 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야훼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본다는데 웬 외모타령인가 말입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려서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딸려서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귀를 찾으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못 찾아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동행한 종이 가까운 성읍에 ‘하느님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채’가 없다면서 그러기를 망설였는데 마침 종에게 은전 한 푼이 있다고 해서 그걸 갖고 하느님의 사람에게 갑니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한편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하느님에게서 그가 올 거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식탁에 초대해서 잘 대접했습니다. 그는 서른 명 쯤 초대한 식탁에서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요리사에게 특별요리를 해오라고 명하면서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사울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무엘은 특정 부위의 고기를 사울에게 주라고 했을까요? 굳이 그런 것까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훼께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때 제물 전부를 태워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중 기름이 많은 일부분을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삶아서 먹었는데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할당됐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넓적다리 부분을 사울에게 주라고 한 것은 그가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나중에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영도자로 세운 후 두 가지 예언을 한 후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는, 가는 길에 새끼 염소와 빵 덩어리와 포도주를 갖고 하느님을 뵈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사울에게 빵 두 덩이를 줄 것이니 받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일군(一群)의 사람들을 만날 터인데 그때 사울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강하게 내려와서 딴 사람이 돼서 그들처럼 예언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사울은 하느님의 영을 강하게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얘기는 그가 사람의 의도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됐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은 고작 서른 명 정도가 보는 앞에서 이뤄진 사건이었으므로 이를 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사울에 속한 베냐민지파가 뽑혔고 계속 범위를 좁혀나가니 기스의 아들 사울에 뽑혔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사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오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이라는 중책을 맡는 게 두려웠을까요? 그러니까 숨어 있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백성이 대표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왕이 됐습니다. 두 번째 즉위입니다.


이어지는 얘기는 주로 그가 치른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하고 주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무자비한 말로 위협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밭에서 소를 몰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왕이라면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왕이 돼서도 소를 몰고 다녔다니 좀 어이가 없긴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회의 발전 정도가 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울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에 전에 그랬듯이 사울에게 하느님의 영이 세차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분기탱천해서 소 두 마리를 잡아 토막을 내어 각지에 보내서 군사를 모아 암몬 사람들을 살육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냈습니다. 이 일 후에 사무엘은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길갈에 모아서 사울을 다시 한 번 왕으로 세웁니다. 사울은 이로써 세 번째 왕위에 오른 셈인데 무슨 대단한 왕위라고, 밭에서 소를 몰고 다녀야 하는 초라한 자리에 오르는 걸 세 번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그랬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긴 고별사를 합니다. 고별사는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무대에서 퇴장할 때 하는 것인데 사무엘은 고별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이런저런 식으로 간섭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더 많이 간섭하는데 그러려면 왜 고별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에게서 멀어지는 사무엘

그 다음에도 전쟁 얘기가 이어집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이번에는 사울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두 군대가 대치했는데 전력은 블레셋이 훨씬 우세해서 이스라엘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까지 있었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벌이는 게 유리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은 사무엘이 전쟁터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걸 주관할 사무엘이 안 와서 전투를 개시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제사를 주관했는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사울은 사정을 설명했지만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께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에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첫째, 제사를 반드시 사무엘이 주관해야 한다는 명령을 언제 야훼가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앞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명령을 야훼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둘째, 앞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그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넓적다리를 줬는데 그것이 그의 제사장 직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꾸중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지나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서는 이 점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블레셋과의 전투 얘기로 넘어갑니다. 사울 군대는 블레셋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했지만 아들 요나단의 습격작전이 성공해서 승리합니다. 요나단 군사의 습격을 받고 블레셋 군인들이 웬일인지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었다는 겁니다. 성서에서 이런 일은 하느님이 개입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기들끼리 싸우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 말대로 사울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들은 이겼습니다. 이긴 방법도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주는,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이 치른 마지막 전투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경우는 그 이유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그들이 길을 막고 대적했기 때문에 멸절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 어린아이든 여자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다 죽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놀랍게도 이 명령을 내린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하느님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 곧 모조리 죽이라는 ‘헤렘의 규율’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승리한 후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왔고 짐승 중에서도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다가 나중에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저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지요. 또 그는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이미 그대를 버리셨고 그대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소.”라는 최후통첩 성의 말을 했습니다.


후회하는 하느님?

여기까지가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기름 붓는 의식(儀式)은 사무엘이 행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했을 뿐, 궁극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뭘 보고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의 출중한 외모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외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야훼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가 선택됐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왕이 됐습니다. 그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비 뽑혔을 때 짐짝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누군가 그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무엘은 계속해서 그와 대립했습니다.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입장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무엘도 잃어버린 나귀 걱정을 하는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누구에게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온 집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걸고 있는 사무엘과 백성들의 기대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사무엘의 말은 야훼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각과 일부 짐승을 살려두자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하느님은 사울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왕위에 앉힌 걸 후회했다는 겁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하느님이 사울의 배신을 미리 알지 못해서 그를 왕으로 삼을 걸 후회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몇 줄 더 내려가면 사울이 자기에게 심판을 선언한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서 옷자락을 찢어졌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느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에서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는 어느 편을 믿어야 합니까?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혼란에 빠진 독자에게 설화자는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 얘기를 결론짓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야훼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다시금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은 사람과 달라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금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왜 오락가락하는 걸까요? 이 이슈는 좀 더 큰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하느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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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6)


용서의 시작과 완성

마태복음 6:14-15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도 아주 가끔만 일어나는 일이고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태도를 결정하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갑이 먼저 사랑을 시작했고 을이 이에 대해 태도를 정해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여기서 갑과 을은 거래에서 사용되는 갑을관계와는 무관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갑은 왜, 어떤 이유로 을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됐을까요? 그리고 을은 어떤 경우에 갑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 걸까요?


갑이 을을 사랑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게 외모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으며 직업이나 인품, 가족배경일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사랑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해보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을의 반응입니다. 을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자기는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반응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데 나는 네게 관심이 없거든.”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사랑에 성공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일방적인 사랑이므로 실패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갑의 고백을 받은 을은 자존감이 상승할 겁니다. 자기가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을이 갑의 사랑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은 갑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을이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 경우에 을이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을이 스스로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경우 을에게 갑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나중에 오늘 하려는 얘기와 상관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라는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동안 두 번 연장했는데 오늘은 정말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말씀은 예언서가 아닌 복음서에서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어차피 대여섯 번의 설교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니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에 집중했는데 그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어 예수님에게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사람들에게 예언자 계열에 속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니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역할 중에 예언자의 역할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예언자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이 이례적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죄의 용서라는 주제로 얘기할 때는 예수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굳이 죄 사함을 말씀하셔서....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어떤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소문을 듣고 몇 사람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들고 집 앞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집 안팎에 사람이 하도 많아서 환자를 집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거기에 구멍을 뚫고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려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보시오,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침상을 들고 온 친구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게 아니라 그를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그들의 속마음을 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중풍병자에게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그대의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시오.’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쉽겠소?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그대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시오.”라고 말씀하셨고 병자가 곧바로 일어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고 나갔다는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이 왜 첨예하게 갈등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을 참칭했기 때문이고 더 구체적으로 마음대로 사람의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지은 죄는 오직 하느님만 용서하신다고 믿었는데 목수의 아들이요 갈릴리 출신 떠돌이 주제에 감히 죄의 용서를 ‘남발’하니 유대교 권력자들은 그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행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오직 하느님만 갖고 있는 용서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한 것이고 둘째로, 용서 받을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줬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은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 하실 수 있고 그조차도 용서받을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예수님은 두 가지 모두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얘기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 이야기입니다. 간음은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개입된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군중들은 왠지 여자만 데려왔습니다. 남자는 어디 갔을까요? 도망쳤을까요? 군중이 일부러 여자만 데려왔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군중에게 예수님은 한동안 아무 말씀도 않고 땅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그대들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불특정 다수인 ‘군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대들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특정 다수인 ‘군중’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익명성 속에 숨어서 집단적으로 가학을 즐기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개인으로서 홀로 서라고 요구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떠나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복음서 기자가 ‘하나하나’라고 전하는 데도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십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물으셨고 여자는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예수님은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음은 죄가 아니란 뜻입니까? 이런 점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이 에피소드를 복음서에 포함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요한복음 사본에 이 에피소드가 제외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시지 않았습니다. 간음이 죄가 아니라고 여기셨기 때문인지, 이 여인의 경우에만 그걸 죄로 여기시지 않은 것인지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보내셨다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신뢰를 봅니다. 이 점이 예수님에게 독특하고 비상한 점입니다. 예수님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내면의 힘에 무한한 신뢰를 갖고 계십니다. 심지어 간음현장에서 붙들려온 사람이라도 그녀의 내면에는 참회의 능력과 양심의 힘,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지향성이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죄는 오로지 하느님만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믿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여럿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용서를 구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의 용서가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용서’하는 게 권리나 권한,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 또는 ‘의무’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들이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그대들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들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란 하느님과 죄를 지은 사람 사이의 양자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죄를 지은 사람,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도 관여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이는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자관계, 또는 그 이상의 다자관계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아들의 유괴살인범을 용서해주려고 교도소에 갔다가 그가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졸도한 것도 용서는 하느님과 죄인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 가해자와 피해자(때로는 제삼자)의 삼자관계임을 보여줍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말라!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하게 인간관계 안에서 저질러진 죄든, 하느님이 개입된 다자관계의 죄든 용서의 과정에는 죄를 용서하는 쪽이 있고 용서를 받는 쪽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는 쪽이 늘 도덕적으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용서받는 쪽은 낮은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전자는 ‘갑’의 위치에 있고 후자는 ‘을’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관계는 용서가 이루어진 후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쪽은 긴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용서해준 쪽을 만나면 움츠려들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용서가 이뤄졌다고 해도 관계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는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점 말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성서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식으로 용서를 능동태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네가(또는 네 죄가) 용서되었다.”는 식으로 수동태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이 주어가 되는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서 수동태를 썼고 ‘하느님에 의해서’라는 말을 생략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점은 신약성서에서도 지속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의미로 수동태를 사용하셨다고 봅니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를 고친 얘기에서도 예수님은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를 쓰셨는데 죄의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용서의 주체를 가급적이면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곧 예수님은 용서하는 ‘갑’의 자리에 아무도 앉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아야 용서에서 갑을관계를 없앨 수 있다고 보셨던 겁니다. 용서에서 갑을관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용서란 특정한 시점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길고 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 소개하고 이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지푸라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은 영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하느님과 용서를 묵상하는 우리에게 좋은 내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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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5)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2)

호세아 11:8-9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는 96%가 같다고 하고 다른 연구는 98.5%가 같다고 하는데 이 차이가 과학자들에게는 의미가 클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유전자는 어느 정도나 같을까요? 뜬금없는 생각이지요? 단순히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화낼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 아닙니까? 물론 하느님에게 유전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어떤’ 성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인간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표현해왔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외모까지 인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오른팔을 높이 들거나 휘둘러서 구해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오른팔을 갖고 계실까요? 그럼 왼팔은 어떨까요?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왼팔 얘기는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인간적 사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도 꿈을 꾸는지, 자의식이 있는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죽으리란 사실을 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 반가워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강아지를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지만 고양이에게는 그게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지요. 서로의 감정을 오해해서 으르렁거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개가 반가워서 꼬리를 흔든다는 것도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따름이지 정말 그런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느님이 정의롭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분노한다거나 용서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사고하고 인간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늘에서 땅이 먼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는 생각이고 표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는 생각도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사고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고하고 표현할 때 인간적인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와 비유, 상징을 하느님에게 적용하면 빛이 바래고 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결혼한 부부관계


지난번에 구약성서에서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저지른 잘못을 왜곡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또 할 수 있으면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이므로 용서받기 위해 ‘회개’가 강조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는 이와는 성격이 다른 용서가 있습니다. 이런 용서를 잘 보여주는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왕이나 재판관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거나 재판관으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하는 피고의 자리에 놓입니다. 대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한 부부관계로 표현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설화자는 그녀를 ‘음란한 여자’라고 표현했는데 호세아가 그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그녀가 음란했는지 아닌지, 호세아는 그런 여자인지 알고 결혼했는지 아닌지, 설화자가 그녀의 행실을 보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규정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좌우간 그녀는 호세아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음란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여자답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그런 고멜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람이 나서 집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오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치 않은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행위는 하느님이 내린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바람을 피워서 집을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호세아에게 그렇게 명령했으니 하느님은 당신의 계명을 스스로 어긴 셈입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비유했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관계는 나이 많은 남자가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린 소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돌보다가 때가 되어 결혼한 부부관계와 비슷합니다. 남자는 성숙한 어른인데 여자는 어린 소녀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9:10; 11:1-4).


사랑을 배신당한 하느님


이렇듯 하느님은 미래의 배우자 이스라엘을 애지중지 돌보고 키웠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내(하느님)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2:8)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신 바알의 축제일만 되면 그에게 향을 피우고 야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내쳤습니까?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주 너희의 하느님 아니냐? 그 때에 너희가 아는 하느님은 나밖에 없고 나 말고는 다른 구원자가 없었다.”(13:4-5)라면서 이스라엘을 설득합니다. 아니, 이것은 ‘설득’이 아니라 ‘애걸’에 가깝습니다. 바람나서 가출한 아내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애결복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왜,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그랬습니다. 이 점은 조건부 용서를 뛰어넘습니다. 조건적 용서에서는 용서하는 편이 용서를 구하는 편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이 경우에는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고 이제는 표범처럼 되어서 길목을 지키겠다. 새끼 빼앗긴 암곰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그들을 뜯어먹을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찢어 먹을 것이다(13:6-8).


살벌하고 폭력적이며 끔찍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이처럼 분노에 찬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정말 하느님은 굶주린 사자나 표범이 되고 새끼 잃은 암곰이 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당신 백성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작정인 걸까요?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당신 백성을 뜯어먹고 들짐승더러 나머지를 남김없이 찢어먹게 하려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배신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하느님이 하신 다음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느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11:8-9).


우리는 여기서 자기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 그래서 애간장 끊어지는 아픔을 겪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의 결혼생황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입니다. 특히 부부 간의 사랑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고결합니다. 따라서 이 고귀한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환멸스럽고 사무치게 가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과 호세아는 똑같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듯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의 심정을 하느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그는 이제 나의 아내가 아니며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색욕을 없애고 그의 젖가슴에서 음행의 자취를 지우라고 하여라(2:2)!


호세아는 고멜과의 결혼과 그녀의 배신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참담함을, 그 환멸과 아픔을 호세아도 경험함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배신당한 하느님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정(compassion)하게 된 겁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이 하느님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혼돈과 분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릴 수 없는 애정을 비춰주는 거울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멜은 회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이 조건부 용서입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고멜은 어땠습니까? 고멜은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까?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잘못을 회개했을 리 없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용서의 조건들 중에서 한 가지도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호세아는 이런 고멜을 두고 그녀를 용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론을박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다가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 해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당사자 고멜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런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 곧 가해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역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만 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해결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음을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합니다. 성서에서 죄의 용서를 말할 때 대개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곧 ‘내가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가 아니라 ‘네가 용서를 받았다.’(You are forgiven) 또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Your sin is forgiven)라는 식으로 씁니다. 또한 주어가 하느님인 경우에는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수동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하느님에 의해서’(by God)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용서의 주체가 하느님이란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역시 수동형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수동형의 경우는 하느님이 생략된 일반적 수동형의 경우와 의미가 좀 다릅니다. 다음번엔 둘이 어떻게 다른지, 왜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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