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5)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2)

호세아 11:8-9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는 96%가 같다고 하고 다른 연구는 98.5%가 같다고 하는데 이 차이가 과학자들에게는 의미가 클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유전자는 어느 정도나 같을까요? 뜬금없는 생각이지요? 단순히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화낼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 아닙니까? 물론 하느님에게 유전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어떤’ 성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인간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표현해왔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외모까지 인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오른팔을 높이 들거나 휘둘러서 구해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오른팔을 갖고 계실까요? 그럼 왼팔은 어떨까요?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왼팔 얘기는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인간적 사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도 꿈을 꾸는지, 자의식이 있는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죽으리란 사실을 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 반가워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강아지를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지만 고양이에게는 그게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지요. 서로의 감정을 오해해서 으르렁거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개가 반가워서 꼬리를 흔든다는 것도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따름이지 정말 그런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느님이 정의롭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분노한다거나 용서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사고하고 인간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늘에서 땅이 먼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는 생각이고 표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는 생각도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사고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고하고 표현할 때 인간적인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와 비유, 상징을 하느님에게 적용하면 빛이 바래고 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결혼한 부부관계


지난번에 구약성서에서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저지른 잘못을 왜곡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또 할 수 있으면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이므로 용서받기 위해 ‘회개’가 강조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는 이와는 성격이 다른 용서가 있습니다. 이런 용서를 잘 보여주는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왕이나 재판관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거나 재판관으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하는 피고의 자리에 놓입니다. 대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한 부부관계로 표현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설화자는 그녀를 ‘음란한 여자’라고 표현했는데 호세아가 그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그녀가 음란했는지 아닌지, 호세아는 그런 여자인지 알고 결혼했는지 아닌지, 설화자가 그녀의 행실을 보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규정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좌우간 그녀는 호세아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음란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여자답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그런 고멜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람이 나서 집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오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치 않은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행위는 하느님이 내린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바람을 피워서 집을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호세아에게 그렇게 명령했으니 하느님은 당신의 계명을 스스로 어긴 셈입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비유했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관계는 나이 많은 남자가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린 소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돌보다가 때가 되어 결혼한 부부관계와 비슷합니다. 남자는 성숙한 어른인데 여자는 어린 소녀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9:10; 11:1-4).


사랑을 배신당한 하느님


이렇듯 하느님은 미래의 배우자 이스라엘을 애지중지 돌보고 키웠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내(하느님)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2:8)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신 바알의 축제일만 되면 그에게 향을 피우고 야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내쳤습니까?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주 너희의 하느님 아니냐? 그 때에 너희가 아는 하느님은 나밖에 없고 나 말고는 다른 구원자가 없었다.”(13:4-5)라면서 이스라엘을 설득합니다. 아니, 이것은 ‘설득’이 아니라 ‘애걸’에 가깝습니다. 바람나서 가출한 아내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애결복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왜,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그랬습니다. 이 점은 조건부 용서를 뛰어넘습니다. 조건적 용서에서는 용서하는 편이 용서를 구하는 편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이 경우에는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고 이제는 표범처럼 되어서 길목을 지키겠다. 새끼 빼앗긴 암곰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그들을 뜯어먹을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찢어 먹을 것이다(13:6-8).


살벌하고 폭력적이며 끔찍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이처럼 분노에 찬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정말 하느님은 굶주린 사자나 표범이 되고 새끼 잃은 암곰이 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당신 백성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작정인 걸까요?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당신 백성을 뜯어먹고 들짐승더러 나머지를 남김없이 찢어먹게 하려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배신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하느님이 하신 다음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느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11:8-9).


우리는 여기서 자기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 그래서 애간장 끊어지는 아픔을 겪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의 결혼생황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입니다. 특히 부부 간의 사랑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고결합니다. 따라서 이 고귀한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환멸스럽고 사무치게 가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과 호세아는 똑같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듯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의 심정을 하느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그는 이제 나의 아내가 아니며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색욕을 없애고 그의 젖가슴에서 음행의 자취를 지우라고 하여라(2:2)!


호세아는 고멜과의 결혼과 그녀의 배신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참담함을, 그 환멸과 아픔을 호세아도 경험함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배신당한 하느님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정(compassion)하게 된 겁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이 하느님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혼돈과 분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릴 수 없는 애정을 비춰주는 거울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멜은 회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이 조건부 용서입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고멜은 어땠습니까? 고멜은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까?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잘못을 회개했을 리 없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용서의 조건들 중에서 한 가지도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호세아는 이런 고멜을 두고 그녀를 용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론을박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다가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 해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당사자 고멜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런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 곧 가해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역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만 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해결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음을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합니다. 성서에서 죄의 용서를 말할 때 대개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곧 ‘내가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가 아니라 ‘네가 용서를 받았다.’(You are forgiven) 또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Your sin is forgiven)라는 식으로 씁니다. 또한 주어가 하느님인 경우에는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수동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하느님에 의해서’(by God)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용서의 주체가 하느님이란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역시 수동형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수동형의 경우는 하느님이 생략된 일반적 수동형의 경우와 의미가 좀 다릅니다. 다음번엔 둘이 어떻게 다른지, 왜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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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4)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1)

호세아 6:1-6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하느님


지난번에 서구사상의 양대 뿌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습니다. 헬레니즘에서 최고신은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고 동시에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와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적과 평화를 어지럽히는 온갖 잡다한 일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얻는 평정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 철학자 피론과 에피쿠로스가 즐겨 사용한 개념입니다. 이들은 아타락시아 상태에 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고 신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헤브라이즘의 신,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냥 관심 갖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분이요 사람과 언약을 맺고 약속을 주고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파트너가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분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야훼가 무슨 복을 주랴? 무슨 화를 주랴?”(스바냐 1:12)라고 생각하거나 “야훼는 우리를 바라보지 않는다. 야훼는 이 땅을 버렸다.”(에스겔 8:12) 또는 “야훼는 우리 고생길 따위에는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내 권리 따위는 아는 체도 않는다.”(이사야 40:27)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라고 그런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냉소하지 않았고 이런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인생사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복 줄 사람에게는 복 주고 벌할 사람은 벌하는 분이었던 겁니다. 야훼는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한 분도 아니고 이 땅을 외면하고 팽개쳐버린 분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고생길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삶에 눈 감고 계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이런 하느님을 생각할 때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이 사람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파렴치한 사람은 ‘하느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게 뭐가 이상해? 하느님이라면 죄를 회개한 사람을 옹서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아?’라고 당당하게 말할 겁니다. 하느님이라면 마땅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정도로 당당하진 않아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의 시편 노래도 여기에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시편 103:8-13).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죄를 지어놓고 용서해달라는 게 염치없지만, 또 그게 반복되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이라면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염치 있고 진지한 사람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송구한 일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는 게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용서’가 쉬운 일이 아니고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용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 어려운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을까?


2015년 1월에 한국에서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란 게 있었습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주려고 크림빵을 사갖고 귀가하던 사람을 한 운전자가 차로 치어 죽이고 뺑소니 친 사건입니다. 그는 나중에 자수했고 사망자의 아버지는 운전자가 자수한 그 날 경찰서로 찾아가 그를 위로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의 용서를 번복했습니다. 운전자가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사건 진술도 진정성 있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을 터이니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호소까지 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결론 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얘기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걸 보여주는 게 그것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을 왜곡, 축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본래대로 복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해의 원상 복구가 불가능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중보기도 시간에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위안부’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겨레 대부분은 일본 정부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으며 적절한 보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독일 정부의 그것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2차 대전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나치의 후손인 빌리 브란트 수상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쟁 중에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한 유태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습니다. 이것은 참회의 상징적 행위로서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국민화합 차원이라며 광주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일당을 사면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두환 일당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와는 다른 얘기지만 ‘용서’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거기서 주인공 신애는 아들이 유괴당해 살해된 후 기독교에 입문해서 화해와 용서를 배웠고 그래서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을 용서하러 감방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자기의 죄를 하느님이 용서해주셨다는 원장의 말을 듣고 졸도해버립니다. 어떻게 피해자(또는 피해자의 어머니)인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맘대로 가해자를 용서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따져야 할 것들


용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은 죄를 참회하면 용서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은데 용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왜 용서하는가, 무엇을 용서하는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언제 용서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등의 문제들을 따져봐야 하는데 이것 하나하나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크림빵 뺑소니사고 경우에도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용서의 전제조건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경우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자와 가까운 피해자의 부모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유태인 학살의 경우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당사자를 제외한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에게서 상당히 멉니다. 또한 과거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현 정부 책임자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책임이 있는지 문제도 따져봐야 합니다.


‘무엇’을 용서하는가와 ‘왜’ 용서하는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겁니까, 아니면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겁니까?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치에 맞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죄가 혼자 날뛰면서 행동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죄는 죄인이 짓는데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또한 개인이 죄를 짓는 경우와 집단이 죄를 짓는 경우를 나눠서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개인의 죄와 집단의 죄는 성격도 다르고 용서하는 방법도 다르니 말입니다. 또한 ‘왜’ 용서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용서의 ‘목적’ 말입니다. 용서가 뭔가를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을 사면하면서 내세운 ‘국민화합’ 같은 것 말입니다. 이 경우에 용서는 화해 또는 화합의 수단 역할을 한 셈입니다. 진정 용서는 뭔가를 위한 수단인가, 그게 아니라 용서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도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형제가 죄를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곧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용서하라는 말이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임은 모두 아실 겁니다. 문제는, 말은 쉬운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카운터 종업원이 계속해서 돈을 슬쩍 훔쳐가는 것 안다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하겠습니까? 나를 성폭행한 가해자를 무한정 용서하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 해도 그게 바람직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용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라는 데 공감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도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하는 물음만 빼면 앞에서 용서를 생각할 때 물어야 하는 문제들, 곧 왜 용서하는가, 무엇을 용서하는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언제 용서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등을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에서는 모든 게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보다 더 모호하고 확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용서가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크림빵 피해자의 아버지는 가해자를 찾아가서 용서했노라고 말했습니다. 


‘밀양’의 신애도 아들의 유괴살해자를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용서의 경우, 하느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고 그나마 주관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밀양’에서 학원 원장의 경우에서도 자기는 용서받았다고 확신을 갖고 말했지만 신애는 그걸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그랬다니까 그렇게 믿었을 뿐이지 그걸 확인할 수단이 없어 부정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모든 정황에 들어맞는 용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얘기하고 오늘 얘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용서’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성서에서 이 주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약성서에서는 물론이고 구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구약성서에서도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주제인데 그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성서는 개인의 죄와 그 용서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지은 죄와 그것의 용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개인의 죄에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주된 관심은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죄와 그 용서에 놓여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왕과 귀족,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지은 죄를 꾸중하고 질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도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로 인해 그들이 백성 전체를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구약성서는 대부분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의 용서를 말합니다. 곧 ‘조건적 용서’입니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곧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를 ‘표면적’으로 읽는다면 구약성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를 말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읽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조건적 용서를 말하는 구약성서 구절들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무조건적 용서’가 떠오릅니다.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는 용서, 충족해야 할 조건이 없는 용서, 곧 무조건적 용서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가 이 무조건적 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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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3)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

아모스 2:4-16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신

서구 사상의 양대 뿌리는 그리스 사상인 헬레니즘과 구약성서 사상인 헤브라이즘이라고 말들 합니다. 오랫동안 믿어져왔던 이 주장이 요즘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거나 철 지난 주장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두 사상에서 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다릅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를 신으로 여깁니다.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나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헬레니즘의 신입니다. 이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조화를 유지하면 됩니다.


반면 헤브라이즘, 곧 구약성서의 신은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는 자연 및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사에 개입하기도 하지요. 이 신은 기뻐할 때는 기뻐하고 섭섭할 때는 섭섭해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냅니다. 헬레니즘의 신과는 달리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위협하고 칭찬하며 위로하고 뭔가를 엄중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걸 구약성서의 하느님이 한다고 믿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명색이 신인데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다 갖고 있고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런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냐는 겁니다. 사람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볼 수 없다는 헬레니즘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편이든 입증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종류의 얘기는 아닙니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가 지금 여기 와서 저를 설득한다고 해도 저는 설득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견해와 신념을 존중하지만 그에게 설득되어 신에 대한 제 생각과 믿음을 바꾸지는 않을 거란 얘기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제 얘기를 듣고 도킨스가 설득되지도 않을 겁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게 아니라 모르면서도 믿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느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저런 일은 안 하신다 등등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실제로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의미이지 정말 하느님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은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 역시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느님은 백성들의 삶에 동행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삶의 고백인 성서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입증할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성서가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지금 우리네 삶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과 더 가깝게 살았거나 더 밀접하게 소통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때 그들이 봤던 것을 지금 우리가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들이 들었던 걸 지금 우리는 못 듣는 것도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때와 지금 다른 게 있다면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심장’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는 이를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약간은 추상적인 말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레브’는 잠시도 뛰지 않고 멈추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심장’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 ‘심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곧 하느님은 절대불변의 원리나 원칙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고 소통이 가능하며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인격으로 인식됐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제목이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인데 이는 예언자의 분노가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분노’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하느님의 분노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정념과 열정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왜 분노하실까?

예언자의 선포에서 하느님의 분노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언자 나훔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내린다. 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나훔 1:5-6).


하느님이 분노하면 산들이 진동하고 언덕은 녹아내리고 땅은 뒤집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곤두박질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진노할 때 그 앞에 버틸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은유적으로 읽으면 될까요? ‘정말 실제로 산들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겠어?’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포를 한 나훔은 현실을 과장했을까요? 그랬다면 그는 왜 과장했을까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영문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변덕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하느님의 확고한 믿음 때문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불의가 행해질 때 아파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낙심하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이런 것이며 이것들이 고스란히 예언자의 분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때론 매우 위험합니다.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악의 경계선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분노는 좋은 것이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악에 굴복할 수 있는 반면 분노를 치솟는 대로 내버려두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언 16:32)고 말합니다.


분노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일까요? 분노는 근원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분노의 반대는 자비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처럼 분노의 반대도 자비가 아니라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분노할 이유도 없습니다. 분노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습니다. 최근에 특검이 요청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첫 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적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분노할까요? 저는 만일 이재용 씨가 먼 우주 어딘가에서 값비싼 물건을 발견해서 돈을 벌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富)는 그렇게 쌓인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겁니다.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착취하고 억압해서 이룩했다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임금을 착취했고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 몰아넣어서 얻어진 재산이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분노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느님도, 예언자도 이런 불의한 일이 벌어졌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분노 속에서 자비하신 분

예언자 하박국은 하느님은 ‘진노 속에서 자비를 기억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3:2). 시편도 분노와 자비가 서로 무관한 게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시편 77:7-9)


왜 하느님은 분노하실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분노하십니다. 정의는 하느님의 분노를 헤아리는 척도입니다. 불의한 사람에 의한 잔혹한 폭력 때문에 희생당하고 상처 입은 피해자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동정이 분노를 촉발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모스 본문 외에도 예레미야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선언합니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5:26-29)?


하느님의 진노가 가져올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여전히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느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1-6)


다음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곧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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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2)


그들은 안 보이는 걸 봤을까?

예레미야 23:25-32


교황에게 거짓 예언자는 누구?

오늘은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주제의 시리즈설교 두 번째입니다. 흔히 예언자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설교자에게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언자처럼 설교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런 이분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제들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두가 제사장이란 뜻으로 ‘만인제사장’을 내세웠습니다.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굳이 중재자인 사제를 찾아가지 않고 스스로 참회하고 회개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개신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만인제사장’ 시대가 아닙니까.


동시에 지금은 ‘만인 예언자’ 시대이기도 합니다. ‘만인예언자’란 말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므로 ‘만인제사장’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언자인 시대인 겁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뭘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은 우리 모두가 답을 찾아야 할 물음인 겁니다.


지난 1월 11일 프란시스코 교황은 우상에 대해 잘못된 희망을 갖지 말고 환상을 퍼트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세속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짓된 희망의 무용함과 그 모순의 민낯을 파헤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준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거짓 예언자들은 돈과 권력자를 추구하고 거짓 이념이나 허망한 말을 일삼는다고 말하고 그것들에 기대서 헛된 위로를 추구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을 바라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가 제 눈에 띤 이유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언급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희망을 갖게 하고 환상을 퍼뜨리며 돈이나 권력자를 추구하게 하고 거짓 이념과 허망한 말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헛된 위로를 구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이 주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을 바라보라고 교황은 말했는데 아쉽게도 ‘복음에 주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짧은 기사라서 그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교황이 말한 거짓 예언자는 구약성서, 그 중에서도 특히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거짓 예언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세 가지 부류의 예언자

지난 주일에 예언자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참 예언자는 ‘하느님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 요즘 말로 하면 ‘내각회의’ 또는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해서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논쟁했던 사람인 데 반해서 거짓 예언자는 그 회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참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할 수만 있으면 회피하려 했습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느님은 ‘말 잘 하는’ 아론을 그와 동행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 내려가서는 말 잘 하는 아론은 잠자코 있고 말을 못 해서 부름을 거부하려던 모세가 이집트의 권력자들을 상대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언자에게 ‘말’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와 다른 독특한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자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여부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걸 알면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의도적인 거짓 예언자’이고, 둘째는 실제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데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이며,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참 예언자’입니다. 그밖에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고 믿고 전하는 사람도 논리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합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 중에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던 대표적인 예언자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5장 30-31절에서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라는 하느님의 탄식을 전합니다. 유다는 망하는 길로 치닫고 있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라는 겁니다.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 예언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백성들은 그걸 좋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는 망하는 길로 치닫는다는 것이지요. 결국 유다 망조의 궁극적인 원인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지 알면서도 그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의도적인 거짓 예언자’는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대개 야훼가 아닌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자고 백성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므로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 아닌 다른 신을 따르거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는 대부분 둘째 부류에 속합니다.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지만 사실은 하느님 말씀이 아닌 말을 전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부류의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직성’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꾼 꿈이나 본 환상이나 들은 음성을 하느님의 메시지로 착각한 데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2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꿈에 계시는 받았다느니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예언을 한다느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며 제멋대로 혀를 놀린다느니 하는 행위는 거짓 예언자가 자신을 속여가면서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환상을 봤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그것들은 당신의 계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착각했다는 것이지요.


이번 시리즈설교를 준비하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요즘 터무니없는 얘기를 쏟아놓는 한국 대형교회 목사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정말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라고 부르는 단체의 주축인 대형교회 목사들이 기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최초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 모여서 가칭 ‘한국교회총연합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19대 대선에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연합기관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천만 성도는 이에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새 연합단체를 결성하려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온 기존단체 한기총이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자 새 옷으로 갈아입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연합기관 결성이 ‘하느님의 명령’이므로 천만 성도는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이 진정 하느님에게서 비롯됐다고 그들은 믿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저는 믿지 않는데 그들은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믿는가 말입니다. 혹 자기들도 안 믿으면서 자기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인 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저를 속였습니다!

예언자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가리려면 두 가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언자 자신이 자기가 들은 음성이나 본 비전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여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 입장에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그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착각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첫 번째 경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두 번째 경우가 절대적으로 쉽다는 얘기는 아니고 단지 첫 번째 경우와 비교해서 쉽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는 예언자의 행실을 잘 살피라고 말합니다. 그의 행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덕스럽지 않다면 그가 하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하느님 말씀처럼 들려도 그는 참 예언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예언자가 자기 말이 하느님 말씀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예레미야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예레미야 20:7-9).


예레미야의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이 그를 속였답니다. 하느님에게 속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부름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에게 설득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어떻게 설득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그가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주시겠다는 말로 설득하셨습니다(1:9-10). 그런데 그가 전할 말은 심판과 파괴, 멸망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야훼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예레미야를 위협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름 받았을 때 받았던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당신의 말씀을 넣어주시겠고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주님이 약속을 안 지키셨으니 말입니다. 그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해도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반복해도 그의 가슴은 다짐과는 무관하게 주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는 겁니다. 주님 말씀이 그의 심장을 불태우고 뼛속까지 타들어가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백성들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가슴을 불타게 했을까요? 어떤 점에서 주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을 불태웠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가슴속을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걸 그가 봤기 때문이란 얘기입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갔으므로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1) 왜 하필 저입니까?http://fzari.com/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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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1)


왜 하필 저입니까?

- 출애굽기 4:10-17 -


예언자는 우리를 가장 헛갈리게 만든 사람

오늘부터 4주에 걸쳐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시리즈 설교의 제목은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가 되겠습니다. 제가 구약성서를 전공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설교주제와 본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신약성서에 치중해 왔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균형을 맞추지 않았던 겁니다. 이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는 것은 이를 ‘반성’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는 제법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에 여호수아서를 주요 본문으로 해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주제로 설교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신약성서를 본문으로 택한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예언서와 예언자를 주제로 설교하려 하니 여러분도 이번에 설교본문이 되는 예언서를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주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아모스 등을 읽게 될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빨리 읽거나 많이 읽으려 하지 말고 눈빛이 종이를 꿰뚫을 정도로, 좀 속되게 말하면 ‘잡아먹을 듯’ 읽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 이렇게 말한 예언자는 어떤 심정이었고 하느님을 어떻게 경험했기에 이렇게 말했을까?’ 등의 질문을 갖고 정독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역사에서 우리들을 가장 헛갈리게 만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들이 받은 영감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가 생겨났습니다. 그들과 그들이 남긴 책은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때 숨는 피난처 역할을 잘 해왔고 그들이 본 비전과 들은 목소리는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했을 때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줬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언자는 특별한 사람? 평범한 보통사람?

예언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마나한 얘기를 굳이 하는 까닭은 예언자를 보통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뭔가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예언자가 다르긴 했지만 ‘특별한’ 사람이거나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특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소위 ‘영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 때문에 하느님에게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에게 선택된다는 것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됐거나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기준은 당신의 계획을 잘 수행하는지 여부입니다. 예언자는 그렇게 선택됐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예언자는 위대한 사람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사람들에게 뭘 바라시는지, 세상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시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곧 예언은 하느님의 눈으로 인간과 역사를 해석하는 일인 겁니다.


예언자가 이런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을 알고 경험할 것이며 하느님을 경험하지 않고 무슨 수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도 역지사지(易地思之),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어떤 눈으로 사람의 실존을 바라보는지, 인간역사에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서는 하느님의 세계를 맛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야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


거짓 예언자는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얘기하는 사람이랍니다. 야훼의 세계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야훼의 말은 못 하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참 예언자는 ‘야훼의 회의’에 들어와서 야훼를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훼의 회의’라고 하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만납니다. 야훼의 회의가 뭘까요? 그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야훼의 회의’는 ‘하느님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생소한 개념이지만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각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은 최고신인 야훼 하느님이 하위신들(lesser gods) 또는 천사들로 구성된 어전회의를 주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앞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다고 했는데 그 경험을 남들에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여러분이 그 예언자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서 한 하느님 경험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당시 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말로 표현하려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그 경험을 표현할 방법은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그 경험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지만 말 이외에 더 좋은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야훼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과 만난 경험을 표현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 등이 그것인데 이것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수단은 고대 문화권에 널리 퍼져있던 ‘신의 어전회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여러 곳에도 어전회의에 대한 얘기가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곳이 욥기 1장입니다.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 곧 하위신들이나 천사들이 야훼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있었답니다. 여기서 ‘사탄’은 고유명사도, 악의 화신도 아닌 일종의 검사 역할을 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고 물으셨고 사탄은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야훼께서 그에게 욥을 잘 살펴봤냐고 물으시며 “이 세상에는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다는 겁니다. 이에 사탄은 욥이 공연히 하느님을 경외하겠냐고, 하느님이 온갖 복을 베풀어주셨으니 그런 거 아니냐고 일종의 딴죽을 걸었지요. 그러면서 사탄은 이제라도 야훼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없애면 그는 야훼를 저주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하느님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며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욥기 얘기를 길게 한 까닭은 구약성서가 전제하고 있고 예언자가 참여했다는 야훼의 어전회의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봤듯이 어전회의에서는 야훼께서는 누구처럼 남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고 나머지는 잠자코 수첩에 받아 적기만 하는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사탄도 야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하지 않습니까. 참 예언자는 그 회의에 참여했고 거기서 야훼와 더불어 토론을 벌였으며 야훼에게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하느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해서 토론을 벌였다니까 예언자들이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당사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언서 중에는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처럼 예언자의 소명 얘기가 전해지는 책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그들이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좋아서 펄펄 뛰며 기뻐했거나 기꺼이 그 부름에 응한 게 아닙니다. 물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응답한 이사야를 떠올리는 분이 있겠지만 그를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상 가운데 하느님을 봤습니다. 연기가 가득하고 터가 흔들리는 성전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노래하는 가운데 그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을 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하느님을 봤으니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활활 타는 숯불을 가져다가 그의 입술을 지져서 정화했습니다. 그 다음에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갈 것인가?”라고 야훼께서 사람을 찾으셨을 때 그제야 이사야가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응답했던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 유다 출신 아모스는 예언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계획표에는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떼를 치고 있던 어느 날 야훼의 영이 그를 덮쳐서 예언자가 됐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나라인 남 유다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마샤에게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예언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라고 욕먹을 만 했지요.


이런 사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후대에 올 모든 예언자의 모델이라고 불리는 모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가 어떻게든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피해보려고 애쓴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집트로 내려가서 당신 백성인 히브리 노예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자기는 말재주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누가 입을 지었느냐고, 누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고 보게 하느냐고 되물으시며 당신만 믿고 가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를 돕고 가르쳐주시겠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해서 거부합니다. 그제야 하느님은 화를 내시며 모세의 형이자 말 잘하는 아론을 그와 함께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가까스로 그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집트에 내려가서 파라오와 말로써 담판지은 사람은 아론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아론은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엄살’을 했을까요?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신 후에 그에게 말 잘 하는 은사를 주셨을까요? 그게 아닐 겁니다. 예언자에게 ‘말’이란 무엇이고 그게 그의 사역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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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대량학살(6)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2)

출애굽기 11:1-10

 

하느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가장 궁금한 질문을 다뤄보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젖먹이들까지 말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1장이 전하는 대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야훼는 정말 이집트의 장자들을 모조리 죽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그 명령을 실행했다고 말입니다. 역사의 기록자들도 그렇게 믿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역사를 썼던 사람들도 마음은 불편했던 걸로 보입니다.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 이런 흔적이 구약성서 곳곳에 남아 있다고 얘기했고 그 중 서너 군데를 찾아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들이 그렇게 믿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지금’ 우리보다는 아무래도 ‘그때’ 그들이 하느님과 더 ‘가깝게’ 지냈으니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알지 않겠나, 그래서 그들이 성서를 기록했던 게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 신앙을 그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하는 게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더 많이 안다기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시야가 그들보다 더 넓다고 말하는 게 진실에 가깝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신앙은 철저하게 ‘부족신앙’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이 나만 위해주고 우리 부족만 보호해주고 번성하게 해주고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 신앙은 이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란 생각을 그들을 가질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냥 ‘부족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천 년이 지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이 넘지 못했던 테두리를 넘어섰습니다. 우리가 잘 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우리뿐 아니라,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종족신’을 믿는 ‘종족신앙’을 넘어서서 ‘보편신’을 믿는 ‘보편신앙’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아직껏 부족신앙을 유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족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을 신앙 없다고 여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망대를 넘어뜨려 죽이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시각장애자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고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가나안 종족들을 몰살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저는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과 단지 하느님은 그럴 리 없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똑같은 얘기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인 하느님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성서는 뭐냐고, 우린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서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서를 공부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엉터리로 공부하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극히 일부만 들여다봤지만 성서에는 정말 다양한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서는 하나의 통일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겁니다.

 

 

사죄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거기 맹목적으로 순종해선 안 됩니다.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사악해집니다.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말고 하느님께 질문하고 따져야 합니다. 대체 왜 그러셨냐고, 정말 그게 하느님의 뜻이었냐고 말입니다. 이 정도를 불경한 태도라고 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가치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묻고 또 물어서 끝내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대답을 듣느냐고요?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진정 간절히 바란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 대답해주실 겁니다.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 들었던 대답이 아니라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답해주실 겁니다.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그렇지, 하느님이 그럴 리가 없지. 하느님이 대량학살 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리 없지, 없고말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일까요? 그게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얘기가 떠오릅니다. 뜬금없다고 지레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들어보십시오. 헤롯왕이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듣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아기 예수 때문에 몇 명인지 모를 어린 사내아이들이 몰살당한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이 얘기가 왜 여기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럼 이 얘기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마태는 왜 이 얘기를 다른 데가 아닌 여기 적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는 글을 아직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출애굽 때 이집트의 장자들이 몰살한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죄의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이 얘기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 아니란 얘기는 앞에서 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진실(truth)이 담겨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뭔가를 말하기 위한 전한 얘기란 뜻입니다. 물론 제 생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경험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구세주 탄생이라는 기쁜 사건을 전하면서 옛날에 있었던 일, 곧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왔을 때 벌어진 장자 몰살사건을 떠올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생각은 문서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치부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약성서 학자들도 헤롯왕의 어린아이 몰살과 예수님 가족의 이집트 피난이 출애굽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 시 벌어진 일들과 정확히 대칭됩니다. 출애굽 때는 야훼에 의해 이집트 장자들이 몰살당했지만 여기선 헤롯왕에 의해 유대인 아기들이 죽었습니다.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예수님 가족은 반대로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죠. 의도적인 서술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얘기가 어떻게 ‘참회록’이 되는지는 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들도 어찌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었을 겁니다.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이게 전부였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기 예수를 모세와 같은 반열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이 얘기가 필요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량학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사죄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해도 그게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그걸 사실로 여겨왔고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대량살상을 정당화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죄해야 한다는 겁니다.

 

1970년 12월7일 아침 7시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시던 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섰습니다. 이 탑은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 6천여 명이 참살당한 일을 추모하는 탑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서자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기고 기자들도 따라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이때 브란트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습니다. 브란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브란트는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겁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그 후에 폴란드는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누구에 의해 누구에 대해 저질러졌든지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 겨레에 의해서도 저질러졌습니다. 월남전 때 파병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양민학살 얘기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군대성노예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합니다. 정당한 요구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주장이 더 떳떳하려면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도 참회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주제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죄하자’라는 얘기입니다. 거기서 새 출발합시다. 그게 과거 잘못을 씻어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학살은 우리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죄해야 하냐고요? 거기 사죄할 필요가 없다면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해서도 사죄할 필요 없겠습니다. 우리가 학살의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본인이 왜 사죄해야 합니까? 죄지은 당사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사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기록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사죄할까요? 우리는 그걸 어떻게 후대에 기록으로 남길 겁니까? 이 글이 이렇듯 질문으로 끝나는 게 아쉽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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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대량학살(6)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1)

출애굽기 11:1-10

 

제임스 존스와 인민사원

 

제임스 워런 존스(James Warren Jone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31년 미국 대공황 중에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종교적으로 오순절파 기독교에, 사회정치적으로 책을 통해 배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목회자가 됐습니다. 그는 1954년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하느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 교회에서 설교하는 걸로 목회경력을 시작했는데 인종평등과 통합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그의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급진적이었으므로 그를 받아주는 교단이 없었답니다. 다행히 제자회 교단(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이 그를 목회자로 받아줘서 1960년에 그는 이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당시 제자회에는 회중교회 전통이 강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을 안 받은 사람도 안수해줬습니다.

 

인디애나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와 그의 교회는 다른 민권운동 단체들처럼 엄청난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65년에 다른 인종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살았습니다. 개인재산과 부동산 등을 모두 공동소유로 하고 말입니다.

 

제임스 존스는 처음엔 ‘정통’ 기독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도들이 교주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데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알려지고 언론에 노출되면서 시끄러워졌고 결국 1974년에 존스와 일부 교인들은 아프리카 가이아나에 약간의 땅을 구입해서 그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미국사회에 적대적이 됐습니다. 성서의 하느님도 ‘하늘 하느님’(sky God)이라고 부르며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폐쇄적인 ‘사교집단’이 되어간 겁니다. 그는 신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를 ‘자살’로 입증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존스의 명령에 따라 1978년 11월 18일에 어린이 276명과 성인 638명 모두 914명이 독극물을 마시고 집단 자살했습니다. 이들이 세계를 엄청난 충격에 몰아넣었던 인민사원(Peoples Temple)과 짐 존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종교가, 그것도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짐 존스가 누구이고 뭘 어떻게 했기에 9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이때 죽은 276명의 아이들은 어른들, 대개 부모들이 억지로 아이들의 입을 벌려 독약을 들이부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찰스 킴벌(Charles Kimball)은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When Religion Becomes Evil)란 책에서 종교가 악으로 변하게 되는 몇 가지 요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중 제 관심을 끈 것은 ‘절대적 진리 주장’(absolute truth claim)과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입니다. 절대적 진리 주장은 나만 옳다, 나만 진리를 갖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얘기했으므로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맹목적 순종은 교주 또는 절대자의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복종하는 걸 가리킵니다. 킴벌은 이럴 때 종교는 악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교주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잘못이란 사실은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바른 종교지도자는 신도가 자기를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서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도 스스로 서야 하지만 그보다는 신도가 스스로 서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절대자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는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내 신앙을 타락시키고 사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순종은 물론 좋은 가치일 수 있지만 거기에 ‘무조건’이란 말이 붙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신앙이 뭡니까? 종교가 뭡니까?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절대자와 소통하는 겁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대화의 목적은 서로를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나, 또는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아하, 하느님은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느님은 내게 이런 걸 바라시는구나!’라고 깨닫는 것이고, 하느님은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바라는지를 알아가면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겁니다.

 

신앙은 그 어떤 올바른 진술에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자라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사를 주관할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주관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으며 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순종이 무조건 좋다는 뜻은 아니란 뜻입니다. 더욱이 ‘맹목적’인 순종은 더욱 나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맹목적’이라면 거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소통이라고 했는데 다른 모든 소통도 마찬가지지만 하느님과 신앙의 소통을 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부정이나 무조건적 거부가 바람직하지 않듯이 맹목적 인정이나 무조건적 순종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요. 맹목적인 부정과 맹목적인 긍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인 거죠. 신앙에서 무조건적 순종은 맹목적인 부정만큼 위험합니다. 그것은 유혹하는 ‘악마의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설령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야훼 하느님과 짐 존스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겁니다. 저도 그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짐 존스가 자기 신도들에게 명령했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하실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명령을 지금 여러분이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물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고 모두 하느님의 음성일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무조건 그렇다고 전제하고 얘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느님의 명령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실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해도 사람 죽이는 짓은 절대 안 하겠습니까? 저는 할지 안 할지 결정하기 전에 일단 하느님에게 따져보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맞느냐고, 왜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다음 하느님의 명령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그래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불이익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가나안에 정착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게 자기들에게 유리했지요.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 명령을 따를까요? 아니면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 해도 남을 죽일 수는 없으니 불복종의 벌을 달게 받을까요? 저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닥쳐봐야 알 것 같습니다.

 

성서에는 이사야처럼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라고 하느님께서 사람을 찾으셨을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순종한 사람도 있지만 전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소돔 성을 살피러 가시는 하느님께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명령하신 하느님께 모세가 그랬듯이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주님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저를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 중에는 아간처럼 징벌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권력을 이용해서 범해서 결국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겁니다. 이 계명은 왕이라고 해서 어겨도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를 감추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직한 장군 우리야를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의 죽음의 책임은 그가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법이 정한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와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죽었습니다. 이것도 이해 못할 일이지만 그건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그에 대한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땔감 하러 나갔다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죽임당한 사람(출애굽기 31:15; 민수기 15:32-35 참조)과 비교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요?

 

다윗은 자기의 정욕을 채우려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해진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나안에 정착하려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종족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벌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서에서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일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게 대량학살의 문제이므로 적어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지켰을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대량학살이 벌어졌을까요? 신명기 7장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당신들을 이끌어 들이시고 당신들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당신들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셔서 당신들이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당신들은 그들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마십시오.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됩니다. 당신들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 말고 당신들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마십시오.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당신들의 아들이 주님을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들을 불사르십시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1-6절).

 

이 구절에는 ‘쫓아내다’와 ‘전멸시키다’라는 동사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쫓아낸다면 전멸시킬 수 없고(전멸시킬 필요 없고) 반대로 전멸시킨다면 쫓아내는 게 말이 안 되지만 그 점은 여기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좌우간 야훼 하느님은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멸절하라고(또는 직접 멸절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3장은 이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완수됐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를 잘 읽어보면 이 명령이 ‘완전하게’ 수행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라합을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줘서 여리고가 무너질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처음부터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겁니다. 이에 반해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헤렘의 법을 어긴 아간은 죽임을 당했고 노략물도 모두 야훼께 바쳐졌습니다(7장). 눈에 띠는 것은 가나안 종족의 일원인 기브온 사람들이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고 살아남은 사건입니다(9장). 이들은 가나안 종족의 분파였기 때문에 헤렘의 법에 따르면 모두 멸절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도 속임수를 써서 말입니다.

 

신명기 7장에 따르면 가나안 종족들이 모두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살아남으면 그들의 꼬임에 빠져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종족이 소수라도 살아남으면 이스라엘은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몰살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비록 소수지만 이들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섞여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그날부터 “회중을 섬기고 제단을 돌보는 종으로 삼아서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맡게 되었다.”(9:27)고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랬다고 했으니 적어도 여호수아서가 기록됐을 때까지는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 있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가나안 종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같이 살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27-35절). 이 대목은 살아남은 가나안 종족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라합과 기브온 사람들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명기 7장은 만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지 않고 그들의 신을 따른다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벌어진 일은 어땠습니까? 위에서 봤듯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종족을 완전히 몰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곧바로’ 멸절당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결국에는 망했지만 그것은 6백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받은 대량학살의 명령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결론내릴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처벌도 신명기 7장에 선언한 대로 이뤄지지도 않았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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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3)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욕망과 지배

마지막 계명 역시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마음에 품고 있는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성서에서 ‘욕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인 창세기 3장 16절이란 사실을 아셨습니까?

 

한글성경이 이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해서 원래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영어성경을 참고해야겠지요. 우선 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은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고 번역했습니다. 후반절은 모두 남편의 지배를 받으리라는 뜻이지만 상반절의 경우는 개역개정판은 ‘남편을 원한다’고 번역해서 ‘남편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번역한 나머지 두 번역본과 내용이 다릅니다. 어느 번역본을 택하느냐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예외 없이 “너의 갈망은 네 남편을 향하겠고(또는 위한 것이고)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yet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트슈카’는 ‘너의 갈망’(your longing, desire)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남녀평등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절로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구절은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를 읽었을 때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쓰였을 당시에는 중동지역 어디서도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사정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서 적어도 문명사회에서는 대놓고 남녀불평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성서시대처럼 사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서를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읽으려면 오늘의 상황에 맞춰서 새롭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드러난 ‘욕망과 지배’의 관계입니다. 곧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라는 말과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두 서술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첫째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병렬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둘이 어떤 식으로든 묶여 있지 않고 전혀 별개란 얘기입니다. 원문에서 둘은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해석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둘째로, 둘 사이의 연결사를 ‘그러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또는 ‘그러나’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너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은 너는 지배할 것이다.”로 읽힙니다. 아내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이 아내의 욕망을 누르며 지배할 거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셋째로, 흔치는 않지만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왜냐하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남편을 욕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너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듯 연결사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문장의 뜻이 달라집니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는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쪽을 택해야겠지요.

 

어느 편을 택하든 이 구절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체로 네 가지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하는 경우, 둘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받는 경우, 셋째는 때에 따라 지배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지배받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네 해석이 모두 가능하지만 저는 영화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욕망과 지배의 역설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네 번째 경우로 읽었습니다.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펑크 그룹 ‘시티 데스’(City Death)의 공연으로 시작됩니다. 젊은 관객들은 보컬 아르투르의 열창에 열광합니다. 그는 십계명을 어기라고 노래합니다. “살인하라, 살인하라! 간음하라, 간음하라! 남의 물건을 훔쳐라….” 이때 카메라는 손을 흔들며 관객을 뚫고 그에게 다가가려 애쓰는 한 중년 남자를 비춥니다. 그는 아르투르의 형인 저지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동생에게 전하려고 애써 관객을 뚫고 그에게 다가갔던 겁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형제는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왔습니다. 장례식 후 형제는 아버지가 살던 아파트에 갔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파트에 뭐가 남아 있는지 보려 했던 겁니다.

 

아파트 문은 여러 개의 자물통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겨우 열고 들어가니 요란하게 알람이 울립니다.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 웬 자물통이 그리 많은지…. 아파트 안은 매우 더러웠고 어항 속 물고기는 굶어 죽어 있었습니다. 창문은 못질을 해서 열지 못하게 해놨고 캐비닛이 몇 개 있는데 그것들 역시 다수의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형제는 기대를 갖고 캐비닛을 열었습니다. 혹시 보석 같은 것이 있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보석은 없고 몇 권의 우표 책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형제가 값나가는 것이 있나 아파트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아버지에게 꿔준 돈이 있다며 돈 대신 물건으로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형은 적당히 둘러대서 그를 돌려보내는데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아버지의 우표를 처분할 생각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때까지도 형제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우표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아버지가 우표 수집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후 몇몇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이 아버지가 소장하던 한 우표세트를 아들에게 줬는데 아들은 그걸 가치 없는 우표 수백 장과 바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우표세트는 매우 값비싼 게 아닙니까. 아들은 모르고 그걸 무가치한 우표들과 바꾼 거죠. 그는 우표상에게 가서 항의했지만 주인은 정당한 거래였다며 물러줄 수 없다고 합니다. 동생도 기이한 일을 겪습니다. 그가 우표수집상 쇼에서 우표수집협회장을 만났는데 그는 아버지가 수집한 우표들을 살펴보고 나서 그것들이 엄청난 가치를 가졌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의 수집한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된 형제는 도둑맞지 않으려고 아파트의 보안을 강화했습니다. 알람을 새로 설치하고 사나운 개까지 사들였습니다. 우표를 제값을 받고 팔려면 우선 그걸 잘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은 멋진 계략으로 아들이 싸게 판 우표를 돌려받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오스트리아 로즈 머큐리 우표에 대한 얘기를 듣습니다. 세 장짜리 세트 중 두 장은 아버지가 갖고 있고 한 장은 자기가 갖고 있는데 세 장을 모두 모아서 팔면 가치가 엄청나게 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한 장은 돈 받고 팔지 않겠고 대신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자기 딸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사람에게 그걸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검사해보니 형의 신장을 이식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형은 고민 끝에 자기 신장을 수집상의 딸에게 기증했습니다. 그 동안 아파트는 줄곧 동생이 지켰지요. 형이 수술에서 회복한 후 둘이 아파트에 가보니 도둑이 들어 모든 걸 훔쳐간 다음이었습니다. 도둑은 능숙한 솜씨로 보안장치를 무력화한 후 모든 걸 훔쳐갔습니다. 무섭고 사나운 개도 소용없었습니다. 둘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도둑맞은 우표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형은 왜 개가 짖지 않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혹시 개가 아는 사람이 훔쳐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형은 동생을 의심하게 됐고 반대로 동생도 형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따로 경찰을 만나 형제가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불신의 벽이 생긴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이 각각 거리를 걷다가 아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걸 보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다던 사람, 우표수집상협회장, 아들에게 우표를 사들인 사람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호화롭게 차려입고 형제가 사 놓은 개와 똑같은 개를 데리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형제는 진상을 파악합니다. 그들 모두가 짜고 우표를 털어갔던 겁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크게 웃는 것으로 끝납니다.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와에게 내려진 징벌은 산고(産苦)와 남편에 지배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과 지배 사이의 관계를 봅니다.

 

욕망은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유해서 지배하고 싶은 게 욕망입니다. 하지만 욕망이란 게 묘해서 소유하고픈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욕망이 채워지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새로운 욕망은 본래 갖고 싶던 것을 갖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걸 갖게 된 다음에 새롭게 생겨난 새로운 욕망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을 채우려 합니다. 절대 채워지지 않기에 욕망에는 종착역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게다가 욕망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건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욕망이 사람을 소유하고 있고 지배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이 사실을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빗대서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형제는 아버지가 수집한 우표의 가치를 알기 전엔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된 후엔 달라졌습니다. 우표의 금전적 가치에 주목해서 그걸 가급적이면 더 큰 돈에 팔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우표세트의 빠진 한 장마저 구해서 더 비싸게 팔려고 신장 하나를 ‘기증’(?)하는 모습은 사람이 얼마나 쉽게 탐욕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줍니다. 사람은 굳이 비장하지 않고 웃으면서도 탐욕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도 웃고 남도 웃기면서도 탐욕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비극을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뭔가를 욕망하여 그걸 소유하고 지배하려 애쓰다가 결국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지경에 다다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겁니다. 욕망에 대한 사람의 지배가 사람에 대한 욕망의 지배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렇듯 욕망은 사람의 의지와 힘만으로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운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우리 사회에는 욕망을 북돋우고 마음껏 발휘하라고 불 지르는 것이 있는데 ‘시장경제의 꽃’이라고 불리는 ‘상품광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이 뭔가가 필요해서 구입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필요’가 느껴질 때까지 사람을 가만히 놔두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를 자극하는 사회, 나아가서 필요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광고는 필요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계와 같습니다. 상품경제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전에 필요부터 먼저 만들어내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고되는 상품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핍감을 느낍니다.

 

이런 현실에 중독된 결과 사람은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뭔지 망각하게 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과 진정 필요한 걸 구별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상품광고는 끊임없이 나와 이웃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이웃이 갖고 있는 것을 알면 결핍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기계가 시장경제의 상품광고입니다. 그것은 ‘탐욕’을 ‘야망’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사치’를 ‘필요’와 혼동하게 만듭니다. 욕망이 없다면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없고 더 좋은 삶을 살 수 없다고 주입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탐욕 없이도 행복한 사람들

 

뭔가를 갖고 싶어 하고 남이 갖고 있는 걸 자기도 가지려 하며, 심지어 욕망을 욕망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가 되겠습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서 흥미로운 칼럼을 읽었습니다(권태선 칼럼, ‘행복지수가 두려워서야’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31일). 경제상황이나 교육, 의료제도 등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들을 분석해서 나라의 행복지수를 발표하는 기관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와 영국 레스터 대학이 각각 2008년과 2006년에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덴마크가 모두 1위였답니다. 한국은 앞의 조사에서는 62위를, 뒤의 조사에서는 102위를 차지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3-40위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국민의 행복지수는 국민소득에 비해 무척 떨어지는 셈입니다.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라고 할 때 많은 부자나라들을 제치고 인구 1천 만 명도 안 되고 천연자원도 별로 없으며 경제의 대외의존도와 직업 불안정성이 높은 수준인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의외입니다. 노동유연성(달리 말하면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정도)은 높지만 이 나라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이유는 철저한 직업교육과 사회안전망 덕에 쉽게 새 직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병에 걸려도 거의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료제도가 완벽하고 은퇴 후 생활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금 부담이 매우 높지만 세금으로 낸 돈이 복지로 환원되는 비율이 워낙 높아서 국민들은 불만이 없다는 겁니다.

 

덴마크의 교육현황을 보면 이상세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유아원 아이들은 모두 집에서 간식을 갖고 가는데 먹을 때는 음식을 모두 모아놓고 나눠 먹는답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하는데 이 기간에는 시험이 없고 수업은 토론식이라네요. 프랑스 영화 <클래스 The Class>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에서 교사는 끈질기게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갑니다. 제 눈에는 학생들의 태도가 너무 방자해서 화날 정도지만 교사는 화를 내지 않고 토론을 이끕니다. 이 모습에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런 교육이 경쟁 아닌 연대를 만들어내고 갈등과 투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냈겠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덴마크가 이와 같은 복지제도의 근간을 구축한 때는 대공황이 닥친 1930년대였다는 사실입니다. 파이가 커야 나눌 것도 커진다는 말은 적어도 덴마크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2006년에 실시한 행복지수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바누아투’라는 이름도 못 들어본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호주 시드니에서 동북쪽으로 2,500km쯤 떨어진 남태평양 해역에 산재한 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약 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미니 군도국가랍니다.

 

이 나라의 통계를 보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국민의 취업률은 7% 정도인데 취업자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최고 빈곤국 중 하나인 바누아투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900달러로 전 세계 233개국 중 207위랍니다. 아무리 행복이 물질적인 부에 의해 결정되진 않는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 한 관리는 바누아투 국민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물질이 풍부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직접 와서 느끼면 삶을 조금 알게 될 거라고 대답했답니다.

 

바누아투에는 약 사십 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떤 분이 한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바누아투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소박하고 서로 나누고 존중하는 생활방식 때문이랍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중대한 사회문제인 자살이 이 나라에선 지난 5, 6년 동안 단 한 건도 없었다가 얼마 전에 한 건 있었답니다. 자살자가 없는 이유는 공동체가 개인 삶에 든든한 의지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각 섬의 족장과 연장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가 개인의 삶을 지지하고 있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중미의 코스타리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나라는 영국 신경제재단의 최근 조사에서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조사는 국민이 자신의 생활만족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수명, 의식주를 위해 자원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등의 변수로 측정됐습니다. 이 나라가 1위를 차지하는 데는 환경과의 친화성이 큰 요인이 됐답니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나라라는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예일대학과 컬럼비아대학 전문가들이 발표한 ‘2010년 환경성과 지수’에서 163개국 중 3위를 차지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코스타리카가 친환경적 태도와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이며 덜 물질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일상이 단순해지고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리하여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 나라라고 설명합니다.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이 나라가 취한 조치는 가히 획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나라는 그 어떤 선진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개발도상국으로는 처음으로 2021년에 탄소중립국을 이루겠다고 선언했고 대규모 식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삼림이 국토의 20%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1997년에는 이산화탄소세를 앞장서서 도입하여 이를 재원으로 산림보존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에너지 공급원의 90% 이상이 재생가능 자원이란 사실에 이르러서는 탄성이 나옵니다.

 

마지막 웃음, 그것은 희망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는 <십계명> 영화 열 편 가운데서 유일한 블랙코미디입니다. 다른 영화들은 모두 심각한데 마지막 에피소드인 이 영화만은 웃게 만듭니다. 저는 영화 제목이 왜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고대 희랍철학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철저하게 구별했습니다. 그 중 어떤 분파(分派)는 몸을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봤습니다. 영혼은 몸에 갇혀 있는 동안 자유롭지 못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지(靈知 Gnosis)를 얻으면 몸이 죽는 순간 영혼은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신약성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영지주의와 대립하고 싸웠지만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싸우면서 영향 받았던 거죠.

 

영지주의 가르침 중에는 관심이 가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들이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방식 중에는 잘못된 것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상황 속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 중 하나는 구약성서가 전적으로 물질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본 겁니다. 구약성서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하게 구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물질적인 차원에만 매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희랍철학처럼 둘을 철저하게 구별하진 않지만 물질의 차원을 벗어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탐심을 규제하는 십계명 중 마지막 두 계명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명이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규제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의 내면을 규제하려 했다는 사실은 구약성서가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전부는 아니라고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성서는 겉으로 드러난 육체와 행위와 연관되어 있는 내면의 무엇이 존재함을 전제합니다. 그걸 ‘영혼’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께서 십계명을 극단으로 몰고 가거나 내면화하신 일도 전례가 전혀 없진 않습니다. 계명은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내면 또는 영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웃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형제는 자기들이 서로 의심했음을 무언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빕니다. 탐욕에 대한 탐욕을 이기지 못해서 모든 걸 잃어버렸음을, 그래서 엉뚱한 사람들의 욕망을 채운 걸 알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습니다.

 

이 웃음은 뭘 의미할까요? 어떤 약점을 갖고 있든지,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실패를 했든지, 얼마나 많은 계명을 어겼든지 사람에게는 새로 시작할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저는 이들의 웃음에서 그런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탐욕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려 했다가 오히려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됨을 경험한 후 애초부터 자기 게 아닌 것에 대한 미련과 탐욕을 버리고 새로 삶을 시작하면서 웃는 웃음 말입니다.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은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탐욕을 채워서 행복해지려 한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탐욕은 채우면 채울수록 새로운 탐욕이 새롭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탐욕이란 채우고 또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지수에 대한 조사는 행복해지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덴마크 식으로 철저한 사회보장제도가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누아투 식으로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소박하고 서로 나누고 존중하는 생활방식이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식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세 나라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란 사실이 놀랍지만 공통점이 보입니다. 세 나라가 방법은 다르지만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그걸 제도와 문화로 제어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덴마크는 세금을 통한 재분배제도로, 바누아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윤리로, 코스타리카는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는 자세로 말입니다.

 

이런 걸 보면서 행복은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행복은 혼자 누리려 해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이런 점에서 여전히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계명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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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대량학살(5)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여호수아 10:1-15

 

만일 정말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하느님이 이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 난 그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고 주장한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하느님께서 내게 이러저러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지만 하느님이 남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실 리 없다고 생각하지요? 현대사회에선 국가가 사법권을 갖고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조차 법률의 판단을 받지요. 그러니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신념이 있다고 해도 사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신념이 존중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 십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그랬을까요? 그때 거기서도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믿음이 행위에 대한 평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걸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게 사실입니다. 적어도 ‘정신병자’ 취급은 안 받았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예언자라고, 하느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는 사람 치고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했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뭘 보고 그의 진정 하느님의 예언자인지 구별하겠는가 말입니다. 신명기와 예레미야서에는 진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를 판별하는 기준이 나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당신들이 쫓아낼 민족들은 점쟁이나 복술가들의 이야기를 듣지만 주 당신들의 하느님은 당신들에게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주 당신들의 하느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들이 호렙 산에서 총회를 가진 날에 주 당신들의 하느님께 청한 일입니다. 그 때에 당신들이 말하기를 '주 우리 하느님의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여 주시며 무서운 큰 불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한 말이 옳다. 나는 그들의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 그가 내 이름으로 말할 때에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벌을 줄 것이다. 또 내가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예언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신명기 18:14-22).

 

긴 얘기를 짧게 줄이면, 참 예언자는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의 입에 담아준 사람이고, 거짓 예언자는 야훼께서 당신 말씀을 입에 담아주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말하거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언자가 한 말이 야훼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려면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명기 18장이 말하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지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지 여부, 둘째로 야훼께서 그의 입에 담아준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말하는지 여부, 셋째로 그가 한 말이 성취되는지 여부가 그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대표적인 구절이 예레미야 23장입니다. 좀 길지만 예언자를 분별하는 데 관한 대목을 인용해봅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그들은 나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한다.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이런 예언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 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 그들이 나의 회의에 들어왔다면 내 백성에게 나의 말을 들려주어서 내 백성을 악한 생활과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 꿈을 꾼 예언자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말을 받은 예언자는 충실하게 내 말만 전하여라…. 그러므로 보아라, 내 말을 도둑질이나 하는 이런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는 자들이다. 나 주의 말이다.”(16-32절)

 

 

요약하면, 거짓 예언자는 첫째로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하는 자, 둘째로 야훼 하느님의 회의(council)에 들어와 보지 못한 자, 셋째로 야훼에게 보냄을 받지 않은 자, 넷째로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 다섯째로 야훼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상당히 격식을 갖춘 기준이 되겠습니까? 언뜻 보면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이 기준의 문제는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본인 이외에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언자임을 주장하는 자가 한 말이 야훼의 입에서 나왔는지 자기 맘대로 말하는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야훼의 회의에 들어가 봤는지, 그가 야훼에게 보냄을 받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제삼자에게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본문은 꿈은 계시의 전달 수단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야곱 같은 사람은 꿈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해보면 신명기와 예레미야가 제시하는 참 예언자과 거짓 예언자의 기준은 객관적,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얘기가 곁길로 많이 갔습니다.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보편적인 윤리기준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진 신학에 부합한다면 그가 참 예언자임을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을 겁니다. 곧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명에 부합하는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보냄을 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윤리이거나 이스라엘 안에서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온 가르침이므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편윤리나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져 왔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거나 그것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을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정말 그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그것들과는 다른 내용을 전하라고 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많은 경우에 ‘상식’에 어긋나는 분이기도 하므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대량학살의 경우가 여기에 속합니다.

 

 

보편윤리가 늘 옳지는 않다

 

보편윤리나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가르침이라도 예외 없이 늘 옳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은 보편윤리에서나 성서의 전통에서나 모두 옳지만 상황에 따라서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2차 대전 중에 나치군인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유대인을 색출하고 있었습니다. 찾으면 수용소로 보내서 결국 죽이려는 겁니다. 우리 집에 유대인 어린아이 하나가 숨어 있었는데 나치군인이 우리 집에 와서 “여기 유대인 없어?”라고 물었다고 칩니다. 이때 없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실대로 있다고 말해야 합니까?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게 되고 있다고 말하면 유대인 어린이는 죽을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게 옳습니까? 대답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거짓말보다는 살인이 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서 어떤 국가고시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면접에서 국정교과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말했다가는 십중팔구 불합격할 텐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정교과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해서 불합격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너희들 속셈이 뭔지 잘 아니까 내가 이번엔 거짓말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바로잡으리라.’라고 다짐하며 “국정교과서,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해야 할까요? 알쏭달쏭하지요? 앞에서 얘기한 유대인 어린아이의 경우보다는 더 결정하기 어렵지요?

 

911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칩시다. 비행기를 탈취한 테러범이 대량살상을 저지르려 한다면 그 비행기를 격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거기에 많은 어린이들이 타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영화에서는 비행기를 격추하기 전에 어디선가 영웅이 나타나서 테러범을 소탕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듯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굳이 하느님을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 대량학살을 직접 명령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직접 하느님이 대량살상을 저지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느님이 그런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구약성서 학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그런 무지막지한 명령을 내렸을 리 없고 또 실제로 대량학살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성서는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고 이스라엘은 그걸 수행했다고 말할까요? 이에 대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잘못 알았고 잘못 믿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믿고 행했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닌데 그렇게 오해했다는 것이지요.

 

이 대답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량학살의 경우에만 하느님을 잘못 믿은 것이 아니라 그게 그 시대의 한계였다고 지난 글에서 얘기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종족의 신앙은 종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종족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은 제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종교학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말입니다. 다만 구약성서의 종교에 이 개념을 적용한 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종교를 종족신앙으로 보는 것이 그걸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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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스라엘이 면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대량학살(정말 저질렀다면)은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냥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죄악이죠.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들도 혼란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문제라고 느꼈다는 얘기입니다. 옳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게 야훼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더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하느님과 ‘정의’의 문제를 두고 한판 맞장을 떴던 욥이 등장하려면 수백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라는 야훼의 명령과, 그들과 비슷한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웃인 가나안 종족들을 어떻게 멸절할 수 있겠냐고 하는 보편윤리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갈등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다뤘던 역대기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아온 에돔 군인 일만 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인 얘기와 다윗이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성전을 지을 수 없었다는 얘기는 그들이 가나안 종족을 죽이는 문제를 두고 얼마나 깊이 고뇌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의 본문인 여호수아 10장도 비슷한 예입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고 평화조약을 맺은 기브온 주민 얘기가 나옵니다. 기브온은 가나안의 일곱 종족 중 하나인 히위 족속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가나안 종속의 일원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멸절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여호수아를 속여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과정이 여호수아 9장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 성을 멸절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자기들도 죽게 됐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으려고 꾀를 냈습니다. 거지꼴로 이스라엘을 찾아가서 자기들은 먼 곳에서 왔다면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행색을 보아하니 먼 곳에서 온 것 같지 않아서 의심했지만 이들이 자기들을 믿고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에게 묻지도 않고 이들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조약을 맺고 맹세했기 때문에 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10장은 가나안 종족들이 소문을 듣고 기브온에 쳐들어왔다고 이에 이스라엘이 기브온 주민을 도와 싸웠다고 전합니다.

 

이 에피소드가 뭘 보여줍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나안 종족을 모조리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브온 주민은 문명 가나안 종족의 일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더욱이 이게 유일한 예외도 아입니다.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 이와 비슷한 얘기들, 곧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걸 다 찾아 읽을 시간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가나안 종족을 ‘내쫓으라’는 명령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쫓아내든 죽이든 둘 중 하나를 해야지,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기 사는 종족들을 다 몰아내겠다고 말씀했다고도 전합니다. 이런 모순과 불일치에서 우리는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는 명령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고뇌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더 큰 문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대로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성서가 이집트의 장자들을 몰살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고, 하느님이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몰살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믿으라는 겁니다. 대량학살을 명령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상당히 많습니다. 모호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명명백백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걸 의심하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도 야훼의 명령이 무자비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그렇게 명령했다면 거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숨 쉬는 것은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성서에 적혀 있는 대로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저지르면 안 되는 막중한 범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살인 금지가 모두 마찬가지로 보편윤리에 속하지만 유아살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살인에 정상이 참작되는 경우가 있지만 유아살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도 어린이를 우선적으로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서대로라면 야훼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무자비한 신이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행위를 명령한 신이 되는 겁니다. 하느님이 이런 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물론 하느님이 하시는 일 중에는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이해할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몰살하는 행위에 대해 이해해야 할 뭔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선을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이 왜 그런지 설명을 해주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 살인은 죽는 사람뿐 아니라 죽이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첫 번째 글에서 얘기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인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 하라고 명령했다면 이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정신과 영혼에 엄청난 상처를 준 셈입니다. 그게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하느님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까? 만일 그럴 줄 몰랐다면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의 정신과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줘가면서 다른 종족을 몰살하라고 명령하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바른 신앙은 무균실 안에 안전하게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왜 가나안 종족을 죽이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성서는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하는데 신명기 20장 16-18절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에 있는 성읍을 점령하였을 때에는 숨 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면 안 됩니다. 곧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은 주 당신들의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온갖 역겨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느님께 죄를 짓게 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을 몰살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고 온갖 역겨운 일들을 그들에게 배워서 죄를 지을 터이니 모조리 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종족은 일종의 ‘전염병’ 같은 존재로 여깁니다. 같이 있으면 몹쓸 병이 전염되니까 없애버리라는 겁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웬만한 병은 스스로 극복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을 때마다 ‘그럼 야훼 신앙은 가나안 종족의 신앙보다 약하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훼 신앙이 얼마나 연약하면 가나안 종족의 신앙은 접촉도 하지 말라고 했는가 말입니다. 가나안 종족의 신앙이 악하다면 올바른 야훼 신앙으로 그걸 극복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굳이 그들을 내쫓거나 죽여야 하는가 말입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게 아니라 선으로 악을 극복해야 한다면 가나안 종족을 몰살하는 게 결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겁니다.

 

올바른 신앙이 뭔지를 생각해봅니다. 이른바 악한 것들을 다 없애버리고, 다 쫓아내거나 죽여 버리고 무균실 같은 데서 고고하게 사는 게 좋은 신앙일까요?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더럽고 때 묻은 세상에서 존속할 수 없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일까요?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뭔가를 얘기하셨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거기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산 아래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럽기 때문에 거기에 살면 내가 더러워진다고 해도 거기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로 내려와야 했던 겁니다.

 

좋은 종교가 뭘까요? 올바른 신앙이 뭡니까? 더럽고 추한 것 모두 없애버리고 세상을 무균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절대 무균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예수의 제자는 자신이 더러워지는 걸 감수하고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정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의롭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더러 가나안 종족들을 멸절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조건 잘못 믿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믿었든 그것과 상관없이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은 그런 명령을 주실 리 없습니다. 다음번에는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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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대량학살(4)

 

내쫓으란 말인가, 죽이란 말인가?

신명기 7:1-6, 16-24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

 

두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좋아합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인 두 남학생은 같은 여학생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보하기는 싫습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지요. 한 녀석이 별똥별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내 친구가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

 

많이 듣던 얘기지요?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두 남학생은 아주 친한 친구인데 같은 여학생을 좋아하니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리 친해도 좋아하는 여학생을 양보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서로 경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별똥별이 떨어질 때 빈 소원이 “내 친구가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나쁜 놈이면 맘 편하게 여학생에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친구가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어서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너도 그 얘를 좋아한다면 내가 포기할게.’라고 생각하게 한 친구 말입니다.

 

제 경우엔 대개 설교를 준비하다 영화나 드라마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드라마의 장면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족이 떠올랐습니다.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들이 야훼로부터 멸절하라고 명령받았던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관계가 두 남학생 관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친구처럼 가까웠는데 어쩔 수 없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여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들이 나쁜 놈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그들 땅을 차지하는 게 덜 미안할 터이니 말입니다.

 

보통 기독교인 정도의 구약성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 얘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과 친하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둘은 철천지원수 아냐?’라면서 말입니다. 구약성서를 조금 더 아는 사람은 터무니없다고 여길 겁니다. 그는 구약성서가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서술하는지 알기에 제가 지나친 상상력을 펼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구약성서 전문가라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들 중에는 제 얘기를 흥미로워 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들도 야훼가 가나안 사람들을 모조리 멸절하라고 명령했다는 데에 의문을 갖고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제 얘기가 그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전문가들 중에도 제 얘기에 분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느님 말씀의 권위를 깎아내린다고 말입니다.

 

 

 

사람 죽이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왜 저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람들이 친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친하다는 말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둘 사이가 철천지원수였다고 여기는 것도 지나친 생각입니다. 우선 내가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를 얘기해보겠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나 수단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걸 갖고 있으면 쉽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은 정서적, 감정적, 정신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그 후로도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사람 하나 죽이는 일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하물며 수백, 수천, 수만 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대량학살은 오죽하겠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느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요?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라고 명령했을까요? 성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명령했다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가나안 족속을 몰살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합니다.

 

둘째로 구약성서 학자들 중에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대량학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학자가 아닌 한 대개가 그렇습니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이 가나안에서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 숫자라든가 여자와 어린아이와 짐승까지 몰살했다는 성서의 진술 그대로 전쟁이 벌어졌다고 믿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성서의 진술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짐작할만한 이유가 성서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는 앞으로 차차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가정하고 얘기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면 제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 명을 죽이는 짓을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냉정하게 저지를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면 그들은 무척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최근 이라크나 아프간 전쟁에 다녀왔던 군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시달리는 걸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사람을 죽였으면 얼마나 죽였겠습니까. 그런데도 그토록 심각한 증상에 시달리는데 이스라엘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몰살했다면 오죽했겠습니까. 비록 성서에는 그런 얘기가 없더라도 그랬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짐작하는 게 맞습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는 불협화음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또한 역대기에 나오는 두 얘기를 갖고 불협화음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한편에는 수많은 에돔 사람들을 전쟁에서 죽인 것도 모자라서 포로 1만 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으스러뜨려 죽인 유다군인들의 행위를 허용 또는 묵인한 하느님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다윗이 너무 많은 피를 묻혔으므로 성전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은 분명 피 흘리는 일에 부정적입니다. 해서는 안 되거나 적어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두 하느님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습니다. 하나가 화음이면 다른 하나는 불협화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이와 같은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이면 누구나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보편윤리와 종족신앙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신학, 곧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종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우리만 위해주는 나/우리만의 하느님, 나/우리 종족만의 안위를 지켜주고 축복해주는 하느님, 다른 종족의 생존과 안위와 번영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로지 나/우리 종족만을 위해주는 하느님, 종족신앙이라고 불리는 이 종교를 당시 모든 족속들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어느 종족도 종족신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신,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인 신(universal god)이란 개념은 당시 사람들 생각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미개한 종족들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당시에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도 예외 없이 종족신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고요. 이스라엘이 여타 종족과 다른 점은 그들은 야훼 하느님 한 분만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런 종족신앙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3천 년 전 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앙을 21세기 사람들이 여전히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고 리영희 교수께서 20여 년 전에 <말> 지에 쓴 글을 저는 아직껏 기억합니다.

 

리영희 교수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양심수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성서를 여러 번 읽었고 예수의 교훈과 삶은 깊이 공감하고 신뢰하지만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통역장교였답니다. 그는 치열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을 앞에 두고 군목이 전투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념이 달라서 벌이는 이 전쟁에서 과연 하느님은 어느 편을 들까? 하느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줄까? 이렇듯 자기만 위해 달라는 사람들의 기도를,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줘서 한 편을 이기게 하는 신이라면 과연 그를 하느님이라고 믿을 수 있겠나?’ 그는 서로 이겨서 이익을 차지하려고 치고받는 전투에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기독교에 환멸을 느꼈다는 했습니다. 이것도 종족신앙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종족신앙이 아니면 대체 뭐가 종족신앙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여기서는 야훼가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멸절하라고 명령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 문제는 다음에 따져보고 오늘은 야훼에게 그런 명령을 받았다고 믿었던 이스라엘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떤 정신 상태로 그들을 죽였을까요?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가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으로도 쉽지 않습니다. 살인의 경험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에 깊은 상흔(傷痕)을 남깁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럴진대 대량학살의 경우는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대량학살 했을 때 정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는 그들이 제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휘파람 불면서 칼춤 췄을 걸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생각을 해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처음 들은 분이 대부분이고 그래서 혼란스러울 겁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을 겁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하는 얘기는 대체로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성서 텍스트 상의 근거가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죽이면서 혼란스러웠을 거라느니 측은한 마음을 가졌으리라느니 하는 얘기는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상태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성서 텍스트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추측에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직접적인 근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종족들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별개의 종족이 아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보면 적어도 물질문명에 관해서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종족 사이에 어떤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거방식도 같았고 도구와 토기들도 똑같았다고 합니다. 구약성서를 제외하고 고고학 연구결과만 놓고 보면 둘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한편이 다른 편을 인종청소 하듯이 몰살했다는 얘기는 ‘정말 그랬을까?’ 싶습니다.

 

둘째로, 오늘의 신명기 본문에 나타나 있듯이 가나안 종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성서의 진술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는 그들을 ‘내쫓으라’고 말하는데 반해 다른 곳에서는 ‘몰살하라’고 말합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쫓는 것과 몰살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또한 그들의 종교시설을 다 헐어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내쫓든 몰살하든 목적이 뭔지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의 종교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가 불분명합니다.

 

이렇듯 일관성 없는 서술의 원인이 뭘까요? 그것은 가나안 종족을 몰살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척 당황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야훼로부터 받은 명령에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는지를 이런 방식으로 남겨놓았다는 겁니다. 가나안 종족을 모두 몰살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걸 그들도 알았지만 그들이 신앙이 종족신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답을 찾지 못했던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음번에는 이런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내린 야훼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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