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2


그를 택한 걸 후회한다!

사무엘상 15:10-11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기

오늘은 사울 이야기를 갖고 하는 두 번째 설교를 하겠습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울 이야기 첫 번째 설교에서 저는 다윗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생을 간추려 얘기하고 설교 말미에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걸 후회했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고 사실만도 놀라운데 성서는 몇 줄 아래에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는 법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를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또 몇 줄 아래서 하느님은 다시금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반복해서 말을 바꾸니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헛갈립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말을 바꾸면 신뢰를 잃고 비난받기 십상입니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한국에서 사드(THAAD) 문제에 대해서 한 후보가 말을 바꿨다고 비난받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느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을 비난하듯이 하느님을 비난했다가는 변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입을 닫고 있는 것이지, 속으로는 ‘하느님이 왜 이래?’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의 주요 맞상대는 사무엘입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이 2백년간 이어진 사사시대를 벗어나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고 사울은 첫 왕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를 잇는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요구를 백성들로부터 받습니다. 외적, 특히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전투를 이끌고 지속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를 자신의 지도력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했지만 하느님은 백성들은 사무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거부하는 거라며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후 사울이 보여준 태도와 행동을 보면 그는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서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므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적폐청산’이란 말이 유행합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폐해를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다음 정부는 과거 10년의 적폐를 청소하는 데 임기 대부분을 보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 잘 해도 비난과 욕을 먹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행기를 책임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첫 왕 사울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사사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세력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모두에게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애를 요약했는데 얼마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한다고 전제하고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울 얘기를 ‘현실적’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과 사무엘을 비롯해서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얘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고 우리는 하지 못했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단지 그들이 성서에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성서의 등장인물들은 천사가 아닌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이기심도 있고 인간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이기심과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려는 노력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선의(善意)와 이기심이 갈등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가 나의 이해(利害)와 어긋날 때 갈등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둘째, 사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독자가 사건 현장에 주인공들과 같이 있다고 상상하며 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설화자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뭘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를 다 아는 상태에서, 심지어 하느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할지도 다 압니다. 소설을 서술하는 관점에 ‘전지적 작가’의 관점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술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사실상 ‘전지적 독자’의 관점에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과 역사라는 것이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보여서 역사의 ‘법칙’까지 운운할 수 있지만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정작 벌어진 결말은 그런 가능성들 중 하나였던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선을 가급적 버리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주인공 곁에서 관찰하는 사람 입장에서 읽자는 얘기입니다.



사무엘은 왜 마음이 상했을까?

사무엘은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는 마음이 상했을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하느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였을까요? 그런데 하느님은 백성들이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이 ‘감히’ 어떻게 하느님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사사로서 누려온 권한을 남에게 넘겨야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사무엘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기꺼이 홀가분하게 자기 권력과 영향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무엘의 경우에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두 감정이 모두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반한 데 대한 분노와 자기의 영향력을 잃는다는 불안과 섭섭함이 공존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뜻이 내 이익과 어긋나는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느님은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이런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느니, 하느님 잘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만사형통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고, 만사가 형통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믿고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런 욕망을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처럼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제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나의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내 안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성자(聖者)가 아닌 한 이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우선 이런 갈등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갈등은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득도하고 해탈해서 세상 안에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떨어져서 살지 않는 한 이 갈등을 우리는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줍니다. 신앙은 ‘결코’ 우리를 만사형통한 길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런 삶은 없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그것은 대개 누군가의 아픔을 딛고 서야 가능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생이 만사형통하듯 잘 풀린다면 하느님께 감사하기 전에 혹시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힘들고 괴롭게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욕망을 누르면서 사는 것, 나의 욕망보다 이웃과 더불어 잘 살거나 공동선을 우선하고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런 삶을 즐겁게 만들거나 최소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만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의 땀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나의 노력이 이웃의 삶을 고양시킨다면 나는 거기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욕망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이 어긋날 수도 있음을 인정, 인식하고 끊임없이 둘을 조화시키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듣고 있습니까? 다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의 욕망을 공동선 아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인가, 사무엘의 말인가?

사무엘과 사울이 얽힌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후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질 세 가지 일을 예언했습니다.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줄 것이라는 것이 첫째이고,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빵 두 덩어리를 줄 것이라는 게 둘째이며, 그 후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사람들을 만날 텐데 사울도 그들처럼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할 것이라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길갈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도 뒤따라 그대에게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릴 것이니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려 주십시오. 그 때에 가서 하셔야 할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예언이 실현된 때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두 사건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상당하므로 이 예언을 전쟁에 적용하는 게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울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서로 맞서있어서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야훼 하느님이게 드리는 제사를 집전할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이른바 ‘거룩한 전쟁’에서는 싸움에 나서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장 역할을 맡은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이레를 기다렸지만 그래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이렇게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임금님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길갈에서 사무엘은 ‘내가 갈 때까지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명령 자체에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건은 ‘내가 갈 때까지’와 ‘이레 동안’이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이레가 되기 전에 사무엘에 온다면 문제가 없지만 이레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좌우간 사울은 이레 동안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자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사무엘은 자기가 한 명령이 모호하다는 걸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사무엘과 사울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모호한 명령을 한 사무엘에게도 잘못이 있고 이레를 기다렸다고 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는데 제사를 드린 사울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굳이 책임의 크기를 묻자면 사울보다는 사무엘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무엘이 길갈에서 사울에게 명령했을 때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란 언급이 없습니다. 자기의 명령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꾸중할 때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라는 명령은 사무엘의 명령입니까, 하느님의 명령입니까? 혹시 사무엘은 자기의 명령을 하느님의 명령을 혼동하는 게 아닐까요? 독자들은 사울 이야기 전체에서 대체로 사무엘은 옳고 사울은 틀렸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무엘보다는 사울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지만 성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하느님나라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 하느님/예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느님/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씀이 진정 하느님의 말씀입니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하느님의 말씀인가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얘기는 목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들 아닙니까. 우리 교회 주보표지에 ‘모든 교인’이 목회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자기의 욕망을 다 버리지 못하고 그와 배치되는 사울을 어떻게든 주저앉히려 했던 게 아닐까요. 작은 일을 트집 잡아 그를 꾸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이 제사를 집전한 사울에게 선포한 저주는 도에 지나치게 가혹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왕조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니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사울 이야기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http://fzari.com/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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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이야기 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상 9:15-17 -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오늘부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하려 합니다. 다섯 번 정도 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구약성서를 갖고 자주 설교할 생각입니다. 올해 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갖고 설교했고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합니다. 분량만 갖고 보면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의 세 배 정도 되므로 구약 대 신약의 설교 비율이 3:1이 돼야겠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이므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 신약성서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시효가 끝난 하느님 말씀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려 하는데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만 살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살았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사울의 일생은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사울의 삶은 다윗 등장 이전과 이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가문의 기스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과 결혼해서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이스보셋이라는 네 명의 아들과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둘째 부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알모니와 브비보셋이란 아들도 얻었습니다. 이런 점들만 보면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당시에는 부인을 여럿 두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이스라엘의 유력한 지도자 사무엘과 만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성서는 사울의 외모를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고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고 했습니다. 이 묘사를 사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모두 데려다 놓고 그와 비교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는 말은 사실묘사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외모가 출중했음을 보여주려는 서술일 텐데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훗날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자를 만나러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이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한 걸 떠올려보면 사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더욱 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야훼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본다는데 웬 외모타령인가 말입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려서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딸려서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귀를 찾으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못 찾아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동행한 종이 가까운 성읍에 ‘하느님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채’가 없다면서 그러기를 망설였는데 마침 종에게 은전 한 푼이 있다고 해서 그걸 갖고 하느님의 사람에게 갑니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한편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하느님에게서 그가 올 거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식탁에 초대해서 잘 대접했습니다. 그는 서른 명 쯤 초대한 식탁에서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요리사에게 특별요리를 해오라고 명하면서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사울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무엘은 특정 부위의 고기를 사울에게 주라고 했을까요? 굳이 그런 것까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훼께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때 제물 전부를 태워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중 기름이 많은 일부분을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삶아서 먹었는데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할당됐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넓적다리 부분을 사울에게 주라고 한 것은 그가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나중에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영도자로 세운 후 두 가지 예언을 한 후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는, 가는 길에 새끼 염소와 빵 덩어리와 포도주를 갖고 하느님을 뵈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사울에게 빵 두 덩이를 줄 것이니 받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일군(一群)의 사람들을 만날 터인데 그때 사울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강하게 내려와서 딴 사람이 돼서 그들처럼 예언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사울은 하느님의 영을 강하게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얘기는 그가 사람의 의도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됐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은 고작 서른 명 정도가 보는 앞에서 이뤄진 사건이었으므로 이를 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사울에 속한 베냐민지파가 뽑혔고 계속 범위를 좁혀나가니 기스의 아들 사울에 뽑혔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사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오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이라는 중책을 맡는 게 두려웠을까요? 그러니까 숨어 있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백성이 대표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왕이 됐습니다. 두 번째 즉위입니다.


이어지는 얘기는 주로 그가 치른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하고 주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무자비한 말로 위협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밭에서 소를 몰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왕이라면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왕이 돼서도 소를 몰고 다녔다니 좀 어이가 없긴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회의 발전 정도가 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울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에 전에 그랬듯이 사울에게 하느님의 영이 세차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분기탱천해서 소 두 마리를 잡아 토막을 내어 각지에 보내서 군사를 모아 암몬 사람들을 살육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냈습니다. 이 일 후에 사무엘은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길갈에 모아서 사울을 다시 한 번 왕으로 세웁니다. 사울은 이로써 세 번째 왕위에 오른 셈인데 무슨 대단한 왕위라고, 밭에서 소를 몰고 다녀야 하는 초라한 자리에 오르는 걸 세 번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그랬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긴 고별사를 합니다. 고별사는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무대에서 퇴장할 때 하는 것인데 사무엘은 고별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이런저런 식으로 간섭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더 많이 간섭하는데 그러려면 왜 고별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에게서 멀어지는 사무엘

그 다음에도 전쟁 얘기가 이어집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이번에는 사울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두 군대가 대치했는데 전력은 블레셋이 훨씬 우세해서 이스라엘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까지 있었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벌이는 게 유리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은 사무엘이 전쟁터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걸 주관할 사무엘이 안 와서 전투를 개시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제사를 주관했는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사울은 사정을 설명했지만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께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에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첫째, 제사를 반드시 사무엘이 주관해야 한다는 명령을 언제 야훼가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앞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명령을 야훼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둘째, 앞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그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넓적다리를 줬는데 그것이 그의 제사장 직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꾸중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지나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서는 이 점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블레셋과의 전투 얘기로 넘어갑니다. 사울 군대는 블레셋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했지만 아들 요나단의 습격작전이 성공해서 승리합니다. 요나단 군사의 습격을 받고 블레셋 군인들이 웬일인지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었다는 겁니다. 성서에서 이런 일은 하느님이 개입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기들끼리 싸우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 말대로 사울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들은 이겼습니다. 이긴 방법도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주는,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이 치른 마지막 전투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경우는 그 이유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그들이 길을 막고 대적했기 때문에 멸절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 어린아이든 여자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다 죽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놀랍게도 이 명령을 내린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하느님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 곧 모조리 죽이라는 ‘헤렘의 규율’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승리한 후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왔고 짐승 중에서도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다가 나중에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저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지요. 또 그는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이미 그대를 버리셨고 그대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소.”라는 최후통첩 성의 말을 했습니다.


후회하는 하느님?

여기까지가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기름 붓는 의식(儀式)은 사무엘이 행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했을 뿐, 궁극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뭘 보고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의 출중한 외모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외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야훼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가 선택됐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왕이 됐습니다. 그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비 뽑혔을 때 짐짝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누군가 그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무엘은 계속해서 그와 대립했습니다.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입장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무엘도 잃어버린 나귀 걱정을 하는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누구에게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온 집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걸고 있는 사무엘과 백성들의 기대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사무엘의 말은 야훼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각과 일부 짐승을 살려두자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하느님은 사울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왕위에 앉힌 걸 후회했다는 겁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하느님이 사울의 배신을 미리 알지 못해서 그를 왕으로 삼을 걸 후회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몇 줄 더 내려가면 사울이 자기에게 심판을 선언한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서 옷자락을 찢어졌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느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에서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는 어느 편을 믿어야 합니까?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혼란에 빠진 독자에게 설화자는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 얘기를 결론짓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야훼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다시금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은 사람과 달라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금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왜 오락가락하는 걸까요? 이 이슈는 좀 더 큰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하느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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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6)


용서의 시작과 완성

마태복음 6:14-15


먼저 사랑하는 사람과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도 아주 가끔만 일어나는 일이고 현실세계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태도를 결정하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갑이 먼저 사랑을 시작했고 을이 이에 대해 태도를 정해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여기서 갑과 을은 거래에서 사용되는 갑을관계와는 무관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갑은 왜, 어떤 이유로 을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됐을까요? 그리고 을은 어떤 경우에 갑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 걸까요?


갑이 을을 사랑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게 외모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으며 직업이나 인품, 가족배경일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사랑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해보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을의 반응입니다. 을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자기는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반응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데 나는 네게 관심이 없거든.”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사랑에 성공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일방적인 사랑이므로 실패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갑의 고백을 받은 을은 자존감이 상승할 겁니다. 자기가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을이 갑의 사랑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은 갑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을이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이 경우에 을이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을이 스스로 갑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경우 을에게 갑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나중에 오늘 하려는 얘기와 상관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라는 주제의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동안 두 번 연장했는데 오늘은 정말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말씀은 예언서가 아닌 복음서에서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어차피 대여섯 번의 설교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으니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에 집중했는데 그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어 예수님에게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사람들에게 예언자 계열에 속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니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역할 중에 예언자의 역할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예언자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이 이례적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죄의 용서라는 주제로 얘기할 때는 예수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굳이 죄 사함을 말씀하셔서....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어떤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데 그 소문을 듣고 몇 사람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침상을 들고 집 앞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집 안팎에 사람이 하도 많아서 환자를 집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거기에 구멍을 뚫고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려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보시오,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침상을 들고 온 친구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게 아니라 그를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그러자 거기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느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마음속으로 말했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그들의 속마음을 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중풍병자에게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그대의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시오.’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쉽겠소?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그대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시오.”라고 말씀하셨고 병자가 곧바로 일어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고 나갔다는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과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이 왜 첨예하게 갈등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을 참칭했기 때문이고 더 구체적으로 마음대로 사람의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지은 죄는 오직 하느님만 용서하신다고 믿었는데 목수의 아들이요 갈릴리 출신 떠돌이 주제에 감히 죄의 용서를 ‘남발’하니 유대교 권력자들은 그걸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행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오직 하느님만 갖고 있는 용서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한 것이고 둘째로, 용서 받을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줬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권력자들은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 하실 수 있고 그조차도 용서받을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예수님은 두 가지 모두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얘기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 이야기입니다. 간음은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개입된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군중들은 왠지 여자만 데려왔습니다. 남자는 어디 갔을까요? 도망쳤을까요? 군중이 일부러 여자만 데려왔을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군중에게 예수님은 한동안 아무 말씀도 않고 땅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 “그대들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불특정 다수인 ‘군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대들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특정 다수인 ‘군중’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익명성 속에 숨어서 집단적으로 가학을 즐기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개인으로서 홀로 서라고 요구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떠나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복음서 기자가 ‘하나하나’라고 전하는 데도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십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물으셨고 여자는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예수님은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음은 죄가 아니란 뜻입니까? 이런 점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이 에피소드를 복음서에 포함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요한복음 사본에 이 에피소드가 제외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시지 않았습니다. 간음이 죄가 아니라고 여기셨기 때문인지, 이 여인의 경우에만 그걸 죄로 여기시지 않은 것인지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보내셨다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신뢰를 봅니다. 이 점이 예수님에게 독특하고 비상한 점입니다. 예수님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내면의 힘에 무한한 신뢰를 갖고 계십니다. 심지어 간음현장에서 붙들려온 사람이라도 그녀의 내면에는 참회의 능력과 양심의 힘,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지향성이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죄는 오로지 하느님만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믿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여럿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용서를 구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의 용서가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용서’하는 게 권리나 권한,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 또는 ‘의무’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들이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그대들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을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들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란 하느님과 죄를 지은 사람 사이의 양자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죄를 지은 사람,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도 관여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를 테면 이는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자관계, 또는 그 이상의 다자관계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신애가 아들의 유괴살인범을 용서해주려고 교도소에 갔다가 그가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졸도한 것도 용서는 하느님과 죄인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과 가해자와 피해자(때로는 제삼자)의 삼자관계임을 보여줍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말라!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무관하게 인간관계 안에서 저질러진 죄든, 하느님이 개입된 다자관계의 죄든 용서의 과정에는 죄를 용서하는 쪽이 있고 용서를 받는 쪽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하는 쪽이 늘 도덕적으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용서받는 쪽은 낮은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전자는 ‘갑’의 위치에 있고 후자는 ‘을’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관계는 용서가 이루어진 후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쪽은 긴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용서해준 쪽을 만나면 움츠려들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용서가 이뤄졌다고 해도 관계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하는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점 말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성서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식으로 용서를 능동태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네가(또는 네 죄가) 용서되었다.”는 식으로 수동태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이 주어가 되는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서 수동태를 썼고 ‘하느님에 의해서’라는 말을 생략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점은 신약성서에서도 지속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의미로 수동태를 사용하셨다고 봅니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를 고친 얘기에서도 예수님은 “그대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를 쓰셨는데 죄의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용서의 주체를 가급적이면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곧 예수님은 용서하는 ‘갑’의 자리에 아무도 앉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아야 용서에서 갑을관계를 없앨 수 있다고 보셨던 겁니다. 용서에서 갑을관계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용서란 특정한 시점에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길고 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 소개하고 이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지푸라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은 영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하느님과 용서를 묵상하는 우리에게 좋은 내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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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5)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2)

호세아 11:8-9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는 96%가 같다고 하고 다른 연구는 98.5%가 같다고 하는데 이 차이가 과학자들에게는 의미가 클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사람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유전자는 어느 정도나 같을까요? 뜬금없는 생각이지요? 단순히 뜬금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화낼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 아닙니까? 물론 하느님에게 유전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하느님과 사람이 ‘어떤’ 성격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인간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표현해왔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외모까지 인간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가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오른팔을 높이 들거나 휘둘러서 구해주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오른팔을 갖고 계실까요? 그럼 왼팔은 어떨까요? 하느님의 오른팔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왼팔 얘기는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인간적 사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도 꿈을 꾸는지, 자의식이 있는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죽으리란 사실을 아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 반가워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강아지를 사람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지만 고양이에게는 그게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지요. 서로의 감정을 오해해서 으르렁거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따져보면 개가 반가워서 꼬리를 흔든다는 것도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따름이지 정말 그런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느님이 정의롭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분노한다거나 용서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사고하고 인간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늘에서 땅이 먼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말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도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는 생각이고 표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하는 생각도 우리가 인간임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사고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고하고 표현할 때 인간적인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비유나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이미지와 비유, 상징을 하느님에게 적용하면 빛이 바래고 말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결혼한 부부관계


지난번에 구약성서에서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저지른 잘못을 왜곡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또 할 수 있으면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이므로 용서받기 위해 ‘회개’가 강조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는 이와는 성격이 다른 용서가 있습니다. 이런 용서를 잘 보여주는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왕이나 재판관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왕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거나 재판관으로부터 판결을 받아야 하는 피고의 자리에 놓입니다. 대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한 부부관계로 표현합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설화자는 그녀를 ‘음란한 여자’라고 표현했는데 호세아가 그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그녀가 음란했는지 아닌지, 호세아는 그런 여자인지 알고 결혼했는지 아닌지, 설화자가 그녀의 행실을 보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그렇게 규정한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좌우간 그녀는 호세아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 음란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여자답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그런 고멜을 다시 불러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람이 나서 집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오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치 않은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행위는 하느님이 내린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바람을 피워서 집을 나간 여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호세아에게 그렇게 명령했으니 하느님은 당신의 계명을 스스로 어긴 셈입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비유했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관계는 나이 많은 남자가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린 소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고 돌보다가 때가 되어 결혼한 부부관계와 비슷합니다. 남자는 성숙한 어른인데 여자는 어린 소녀라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광야에서 만난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너희 조상을 처음 보았을 때에 제 철에 막 익은 무화과의 첫 열매를 보는 듯하였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9:10; 11:1-4).


사랑을 배신당한 하느님


이렇듯 하느님은 미래의 배우자 이스라엘을 애지중지 돌보고 키웠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내(하느님)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2:8)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신 바알의 축제일만 되면 그에게 향을 피우고 야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을 내쳤습니까?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 살 때로부터 주 너희의 하느님 아니냐? 그 때에 너희가 아는 하느님은 나밖에 없고 나 말고는 다른 구원자가 없었다.”(13:4-5)라면서 이스라엘을 설득합니다. 아니, 이것은 ‘설득’이 아니라 ‘애걸’에 가깝습니다. 바람나서 가출한 아내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이 애결복걸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왜,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그랬습니다. 이 점은 조건부 용서를 뛰어넘습니다. 조건적 용서에서는 용서하는 편이 용서를 구하는 편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마련인데 이 경우에는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사자처럼 되고 이제는 표범처럼 되어서 길목을 지키겠다. 새끼 빼앗긴 암곰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그들을 뜯어먹을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찢어 먹을 것이다(13:6-8).


살벌하고 폭력적이며 끔찍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이처럼 분노에 찬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정말 하느님은 굶주린 사자나 표범이 되고 새끼 잃은 암곰이 되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당신 백성에게 달려들어 염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작정인 걸까요? 암사자처럼 그 자리에서 당신 백성을 뜯어먹고 들짐승더러 나머지를 남김없이 찢어먹게 하려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화가 나서, 배신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하느님이 하신 다음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느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느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11:8-9).


우리는 여기서 자기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과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 이스라엘을 내치지 못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 그래서 애간장 끊어지는 아픔을 겪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의 결혼생황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고 그래서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사랑은 고귀한 것입니다. 특히 부부 간의 사랑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고 고결합니다. 따라서 이 고귀한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환멸스럽고 사무치게 가슴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과 호세아는 똑같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듯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의 심정을 하느님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그는 이제 나의 아내가 아니며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색욕을 없애고 그의 젖가슴에서 음행의 자취를 지우라고 하여라(2:2)!


호세아는 고멜과의 결혼과 그녀의 배신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참담함을, 그 환멸과 아픔을 호세아도 경험함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배신당한 하느님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정(compassion)하게 된 겁니다. 호세아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이 하느님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혼돈과 분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버릴 수 없는 애정을 비춰주는 거울임을 깨달았습니다.


고멜은 회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성서의 용서는 대부분이 조건부 용서입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고멜은 어땠습니까? 고멜은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까? 그녀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잘못을 회개했을 리 없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스스로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용서의 조건들 중에서 한 가지도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호세아는 이런 고멜을 두고 그녀를 용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론을박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다가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너를 버리려 해도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당사자 고멜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런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 곧 가해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역시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만 푼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 역시 해결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음을 호세아서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합니다. 성서에서 죄의 용서를 말할 때 대개는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곧 ‘내가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가 아니라 ‘네가 용서를 받았다.’(You are forgiven) 또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Your sin is forgiven)라는 식으로 씁니다. 또한 주어가 하느님인 경우에는 하느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수동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굳이 ‘하느님에 의해서’(by God)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용서의 주체가 하느님이란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역시 수동형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용하신 수동형의 경우는 하느님이 생략된 일반적 수동형의 경우와 의미가 좀 다릅니다. 다음번엔 둘이 어떻게 다른지, 왜 예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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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4)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1)

호세아 6:1-6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하느님


지난번에 서구사상의 양대 뿌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습니다. 헬레니즘에서 최고신은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고 동시에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와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적과 평화를 어지럽히는 온갖 잡다한 일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얻는 평정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 철학자 피론과 에피쿠로스가 즐겨 사용한 개념입니다. 이들은 아타락시아 상태에 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고 신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헤브라이즘의 신,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냥 관심 갖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분이요 사람과 언약을 맺고 약속을 주고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파트너가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분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야훼가 무슨 복을 주랴? 무슨 화를 주랴?”(스바냐 1:12)라고 생각하거나 “야훼는 우리를 바라보지 않는다. 야훼는 이 땅을 버렸다.”(에스겔 8:12) 또는 “야훼는 우리 고생길 따위에는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내 권리 따위는 아는 체도 않는다.”(이사야 40:27)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라고 그런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냉소하지 않았고 이런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인생사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복 줄 사람에게는 복 주고 벌할 사람은 벌하는 분이었던 겁니다. 야훼는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한 분도 아니고 이 땅을 외면하고 팽개쳐버린 분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고생길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삶에 눈 감고 계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이런 하느님을 생각할 때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이 사람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파렴치한 사람은 ‘하느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게 뭐가 이상해? 하느님이라면 죄를 회개한 사람을 옹서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아?’라고 당당하게 말할 겁니다. 하느님이라면 마땅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정도로 당당하진 않아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의 시편 노래도 여기에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시편 103:8-13).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죄를 지어놓고 용서해달라는 게 염치없지만, 또 그게 반복되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이라면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염치 있고 진지한 사람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송구한 일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는 게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용서’가 쉬운 일이 아니고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용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 어려운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을까?


2015년 1월에 한국에서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란 게 있었습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주려고 크림빵을 사갖고 귀가하던 사람을 한 운전자가 차로 치어 죽이고 뺑소니 친 사건입니다. 그는 나중에 자수했고 사망자의 아버지는 운전자가 자수한 그 날 경찰서로 찾아가 그를 위로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의 용서를 번복했습니다. 운전자가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사건 진술도 진정성 있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을 터이니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호소까지 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결론 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얘기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걸 보여주는 게 그것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을 왜곡, 축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본래대로 복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해의 원상 복구가 불가능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중보기도 시간에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위안부’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겨레 대부분은 일본 정부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으며 적절한 보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독일 정부의 그것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2차 대전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나치의 후손인 빌리 브란트 수상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쟁 중에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한 유태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습니다. 이것은 참회의 상징적 행위로서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국민화합 차원이라며 광주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일당을 사면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두환 일당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와는 다른 얘기지만 ‘용서’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거기서 주인공 신애는 아들이 유괴당해 살해된 후 기독교에 입문해서 화해와 용서를 배웠고 그래서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을 용서하러 감방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자기의 죄를 하느님이 용서해주셨다는 원장의 말을 듣고 졸도해버립니다. 어떻게 피해자(또는 피해자의 어머니)인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맘대로 가해자를 용서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따져야 할 것들


용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은 죄를 참회하면 용서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은데 용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왜 용서하는가, 무엇을 용서하는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언제 용서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등의 문제들을 따져봐야 하는데 이것 하나하나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크림빵 뺑소니사고 경우에도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용서의 전제조건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경우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자와 가까운 피해자의 부모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유태인 학살의 경우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당사자를 제외한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에게서 상당히 멉니다. 또한 과거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현 정부 책임자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책임이 있는지 문제도 따져봐야 합니다.


‘무엇’을 용서하는가와 ‘왜’ 용서하는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겁니까, 아니면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겁니까?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치에 맞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죄가 혼자 날뛰면서 행동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죄는 죄인이 짓는데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또한 개인이 죄를 짓는 경우와 집단이 죄를 짓는 경우를 나눠서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개인의 죄와 집단의 죄는 성격도 다르고 용서하는 방법도 다르니 말입니다. 또한 ‘왜’ 용서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용서의 ‘목적’ 말입니다. 용서가 뭔가를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을 사면하면서 내세운 ‘국민화합’ 같은 것 말입니다. 이 경우에 용서는 화해 또는 화합의 수단 역할을 한 셈입니다. 진정 용서는 뭔가를 위한 수단인가, 그게 아니라 용서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도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형제가 죄를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곧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용서하라는 말이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임은 모두 아실 겁니다. 문제는, 말은 쉬운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카운터 종업원이 계속해서 돈을 슬쩍 훔쳐가는 것 안다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하겠습니까? 나를 성폭행한 가해자를 무한정 용서하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 해도 그게 바람직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용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라는 데 공감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도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하는 물음만 빼면 앞에서 용서를 생각할 때 물어야 하는 문제들, 곧 왜 용서하는가, 무엇을 용서하는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언제 용서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등을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에서는 모든 게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보다 더 모호하고 확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용서가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크림빵 피해자의 아버지는 가해자를 찾아가서 용서했노라고 말했습니다. 


‘밀양’의 신애도 아들의 유괴살해자를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용서의 경우, 하느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고 그나마 주관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밀양’에서 학원 원장의 경우에서도 자기는 용서받았다고 확신을 갖고 말했지만 신애는 그걸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그랬다니까 그렇게 믿었을 뿐이지 그걸 확인할 수단이 없어 부정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모든 정황에 들어맞는 용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얘기하고 오늘 얘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용서’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성서에서 이 주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약성서에서는 물론이고 구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구약성서에서도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주제인데 그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성서는 개인의 죄와 그 용서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지은 죄와 그것의 용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개인의 죄에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주된 관심은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죄와 그 용서에 놓여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왕과 귀족,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지은 죄를 꾸중하고 질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도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로 인해 그들이 백성 전체를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구약성서는 대부분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의 용서를 말합니다. 곧 ‘조건적 용서’입니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곧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를 ‘표면적’으로 읽는다면 구약성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를 말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읽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조건적 용서를 말하는 구약성서 구절들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무조건적 용서’가 떠오릅니다.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는 용서, 충족해야 할 조건이 없는 용서, 곧 무조건적 용서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가 이 무조건적 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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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3)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

아모스 2:4-16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신

서구 사상의 양대 뿌리는 그리스 사상인 헬레니즘과 구약성서 사상인 헤브라이즘이라고 말들 합니다. 오랫동안 믿어져왔던 이 주장이 요즘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거나 철 지난 주장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두 사상에서 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다릅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를 신으로 여깁니다.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나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헬레니즘의 신입니다. 이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조화를 유지하면 됩니다.


반면 헤브라이즘, 곧 구약성서의 신은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는 자연 및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사에 개입하기도 하지요. 이 신은 기뻐할 때는 기뻐하고 섭섭할 때는 섭섭해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냅니다. 헬레니즘의 신과는 달리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위협하고 칭찬하며 위로하고 뭔가를 엄중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걸 구약성서의 하느님이 한다고 믿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명색이 신인데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다 갖고 있고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런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냐는 겁니다. 사람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볼 수 없다는 헬레니즘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편이든 입증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종류의 얘기는 아닙니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가 지금 여기 와서 저를 설득한다고 해도 저는 설득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견해와 신념을 존중하지만 그에게 설득되어 신에 대한 제 생각과 믿음을 바꾸지는 않을 거란 얘기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제 얘기를 듣고 도킨스가 설득되지도 않을 겁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게 아니라 모르면서도 믿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느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저런 일은 안 하신다 등등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실제로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의미이지 정말 하느님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은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 역시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느님은 백성들의 삶에 동행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삶의 고백인 성서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입증할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성서가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지금 우리네 삶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과 더 가깝게 살았거나 더 밀접하게 소통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때 그들이 봤던 것을 지금 우리가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들이 들었던 걸 지금 우리는 못 듣는 것도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때와 지금 다른 게 있다면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심장’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는 이를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약간은 추상적인 말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레브’는 잠시도 뛰지 않고 멈추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심장’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 ‘심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곧 하느님은 절대불변의 원리나 원칙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고 소통이 가능하며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인격으로 인식됐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제목이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인데 이는 예언자의 분노가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분노’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하느님의 분노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정념과 열정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왜 분노하실까?

예언자의 선포에서 하느님의 분노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언자 나훔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내린다. 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나훔 1:5-6).


하느님이 분노하면 산들이 진동하고 언덕은 녹아내리고 땅은 뒤집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곤두박질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진노할 때 그 앞에 버틸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은유적으로 읽으면 될까요? ‘정말 실제로 산들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겠어?’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포를 한 나훔은 현실을 과장했을까요? 그랬다면 그는 왜 과장했을까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영문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변덕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하느님의 확고한 믿음 때문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불의가 행해질 때 아파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낙심하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이런 것이며 이것들이 고스란히 예언자의 분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때론 매우 위험합니다.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악의 경계선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분노는 좋은 것이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악에 굴복할 수 있는 반면 분노를 치솟는 대로 내버려두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언 16:32)고 말합니다.


분노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일까요? 분노는 근원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분노의 반대는 자비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처럼 분노의 반대도 자비가 아니라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분노할 이유도 없습니다. 분노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습니다. 최근에 특검이 요청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첫 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적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분노할까요? 저는 만일 이재용 씨가 먼 우주 어딘가에서 값비싼 물건을 발견해서 돈을 벌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富)는 그렇게 쌓인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겁니다.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착취하고 억압해서 이룩했다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임금을 착취했고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 몰아넣어서 얻어진 재산이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분노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느님도, 예언자도 이런 불의한 일이 벌어졌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분노 속에서 자비하신 분

예언자 하박국은 하느님은 ‘진노 속에서 자비를 기억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3:2). 시편도 분노와 자비가 서로 무관한 게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시편 77:7-9)


왜 하느님은 분노하실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분노하십니다. 정의는 하느님의 분노를 헤아리는 척도입니다. 불의한 사람에 의한 잔혹한 폭력 때문에 희생당하고 상처 입은 피해자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동정이 분노를 촉발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모스 본문 외에도 예레미야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선언합니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5:26-29)?


하느님의 진노가 가져올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여전히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느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1-6)


다음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곧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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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2)


그들은 안 보이는 걸 봤을까?

예레미야 23:25-32


교황에게 거짓 예언자는 누구?

오늘은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주제의 시리즈설교 두 번째입니다. 흔히 예언자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설교자에게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언자처럼 설교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런 이분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제들만 제사장이 아니라 모두가 제사장이란 뜻으로 ‘만인제사장’을 내세웠습니다.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굳이 중재자인 사제를 찾아가지 않고 스스로 참회하고 회개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개신교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만인제사장’ 시대가 아닙니까.


동시에 지금은 ‘만인 예언자’ 시대이기도 합니다. ‘만인예언자’란 말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므로 ‘만인제사장’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엄격히 구분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언자인 시대인 겁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뭘 하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은 우리 모두가 답을 찾아야 할 물음인 겁니다.


지난 1월 11일 프란시스코 교황은 우상에 대해 잘못된 희망을 갖지 말고 환상을 퍼트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세속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짓된 희망의 무용함과 그 모순의 민낯을 파헤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준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거짓 예언자들은 돈과 권력자를 추구하고 거짓 이념이나 허망한 말을 일삼는다고 말하고 그것들에 기대서 헛된 위로를 추구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을 바라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가 제 눈에 띤 이유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언급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희망을 갖게 하고 환상을 퍼뜨리며 돈이나 권력자를 추구하게 하고 거짓 이념과 허망한 말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헛된 위로를 구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이 주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을 바라보라고 교황은 말했는데 아쉽게도 ‘복음에 주는 확실하고 위대한 희망’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짧은 기사라서 그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교황이 말한 거짓 예언자는 구약성서, 그 중에서도 특히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거짓 예언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세 가지 부류의 예언자

지난 주일에 예언자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참 예언자는 ‘하느님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 요즘 말로 하면 ‘내각회의’ 또는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해서 참석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논쟁했던 사람인 데 반해서 거짓 예언자는 그 회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참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할 수만 있으면 회피하려 했습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느님은 ‘말 잘 하는’ 아론을 그와 동행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 내려가서는 말 잘 하는 아론은 잠자코 있고 말을 못 해서 부름을 거부하려던 모세가 이집트의 권력자들을 상대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언자에게 ‘말’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와 다른 독특한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자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여부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걸 알면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의도적인 거짓 예언자’이고, 둘째는 실제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데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이며,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전하는 ‘참 예언자’입니다. 그밖에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고 믿고 전하는 사람도 논리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합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 중에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던 대표적인 예언자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5장 30-31절에서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라는 하느님의 탄식을 전합니다. 유다는 망하는 길로 치닫고 있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라는 겁니다.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거짓 예언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백성들은 그걸 좋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다는 망하는 길로 치닫는다는 것이지요. 결국 유다 망조의 궁극적인 원인은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지 알면서도 그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의도적인 거짓 예언자’는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대개 야훼가 아닌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자고 백성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므로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 아닌 다른 신을 따르거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는 대부분 둘째 부류에 속합니다. 자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지만 사실은 하느님 말씀이 아닌 말을 전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부류의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직성’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꾼 꿈이나 본 환상이나 들은 음성을 하느님의 메시지로 착각한 데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2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내가 꿈에 보았다! 내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 하고 주장하는 말을 내가 들었다. 이 예언자들이 언제까지 거짓으로 예언을 하겠으며 언제까지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 예언을 하겠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꿈에 계시는 받았다느니 마음속에서 꾸며낸 환상으로 거짓예언을 한다느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며 제멋대로 혀를 놀린다느니 하는 행위는 거짓 예언자가 자신을 속여가면서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환상을 봤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그것들은 당신의 계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착각했다는 것이지요.


이번 시리즈설교를 준비하면서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요즘 터무니없는 얘기를 쏟아놓는 한국 대형교회 목사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정말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라고 부르는 단체의 주축인 대형교회 목사들이 기이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 최초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 모여서 가칭 ‘한국교회총연합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19대 대선에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연합기관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천만 성도는 이에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새 연합단체를 결성하려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해온 기존단체 한기총이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자 새 옷으로 갈아입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연합기관 결성이 ‘하느님의 명령’이므로 천만 성도는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이 진정 하느님에게서 비롯됐다고 그들은 믿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저는 믿지 않는데 그들은 그게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믿는가 말입니다. 혹 자기들도 안 믿으면서 자기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인 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저를 속였습니다!

예언자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가리려면 두 가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첫째로 예언자 자신이 자기가 들은 음성이나 본 비전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여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듣는 청중 입장에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그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착각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첫 번째 경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두 번째 경우가 절대적으로 쉽다는 얘기는 아니고 단지 첫 번째 경우와 비교해서 쉽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는 예언자의 행실을 잘 살피라고 말합니다. 그의 행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덕스럽지 않다면 그가 하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하느님 말씀처럼 들려도 그는 참 예언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은 예언자가 자기 말이 하느님 말씀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예레미야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예레미야 20:7-9).


예레미야의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이 그를 속였답니다. 하느님에게 속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부름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에게 설득됐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어떻게 설득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그가 할 말을 그의 입에 넣어주시겠다는 말로 설득하셨습니다(1:9-10). 그런데 그가 전할 말은 심판과 파괴, 멸망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야훼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은 예레미야를 위협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름 받았을 때 받았던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당신의 말씀을 넣어주시겠고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주님이 약속을 안 지키셨으니 말입니다. 그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해도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반복해도 그의 가슴은 다짐과는 무관하게 주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는 겁니다. 주님 말씀이 그의 심장을 불태우고 뼛속까지 타들어가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백성들에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가슴을 불타게 했을까요? 어떤 점에서 주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을 불태웠는가 말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가슴속을 들여다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걸 그가 봤기 때문이란 얘기입니다. 이제부터 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갔으므로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1) 왜 하필 저입니까?http://fzari.com/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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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1)


왜 하필 저입니까?

- 출애굽기 4:10-17 -


예언자는 우리를 가장 헛갈리게 만든 사람

오늘부터 4주에 걸쳐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시리즈 설교의 제목은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가 되겠습니다. 제가 구약성서를 전공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설교주제와 본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신약성서에 치중해 왔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균형을 맞추지 않았던 겁니다. 이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는 것은 이를 ‘반성’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는 제법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에 여호수아서를 주요 본문으로 해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주제로 설교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신약성서를 본문으로 택한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예언서와 예언자를 주제로 설교하려 하니 여러분도 이번에 설교본문이 되는 예언서를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주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아모스 등을 읽게 될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빨리 읽거나 많이 읽으려 하지 말고 눈빛이 종이를 꿰뚫을 정도로, 좀 속되게 말하면 ‘잡아먹을 듯’ 읽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 이렇게 말한 예언자는 어떤 심정이었고 하느님을 어떻게 경험했기에 이렇게 말했을까?’ 등의 질문을 갖고 정독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역사에서 우리들을 가장 헛갈리게 만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들이 받은 영감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가 생겨났습니다. 그들과 그들이 남긴 책은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때 숨는 피난처 역할을 잘 해왔고 그들이 본 비전과 들은 목소리는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했을 때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줬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언자는 특별한 사람? 평범한 보통사람?

예언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마나한 얘기를 굳이 하는 까닭은 예언자를 보통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뭔가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예언자가 다르긴 했지만 ‘특별한’ 사람이거나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특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소위 ‘영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 때문에 하느님에게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에게 선택된다는 것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됐거나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기준은 당신의 계획을 잘 수행하는지 여부입니다. 예언자는 그렇게 선택됐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예언자는 위대한 사람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사람들에게 뭘 바라시는지, 세상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시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곧 예언은 하느님의 눈으로 인간과 역사를 해석하는 일인 겁니다.


예언자가 이런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을 알고 경험할 것이며 하느님을 경험하지 않고 무슨 수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도 역지사지(易地思之),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어떤 눈으로 사람의 실존을 바라보는지, 인간역사에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서는 하느님의 세계를 맛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야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


거짓 예언자는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얘기하는 사람이랍니다. 야훼의 세계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야훼의 말은 못 하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참 예언자는 ‘야훼의 회의’에 들어와서 야훼를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훼의 회의’라고 하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만납니다. 야훼의 회의가 뭘까요? 그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야훼의 회의’는 ‘하느님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생소한 개념이지만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각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은 최고신인 야훼 하느님이 하위신들(lesser gods) 또는 천사들로 구성된 어전회의를 주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앞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다고 했는데 그 경험을 남들에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여러분이 그 예언자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서 한 하느님 경험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당시 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말로 표현하려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그 경험을 표현할 방법은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그 경험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지만 말 이외에 더 좋은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야훼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과 만난 경험을 표현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 등이 그것인데 이것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수단은 고대 문화권에 널리 퍼져있던 ‘신의 어전회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여러 곳에도 어전회의에 대한 얘기가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곳이 욥기 1장입니다.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 곧 하위신들이나 천사들이 야훼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있었답니다. 여기서 ‘사탄’은 고유명사도, 악의 화신도 아닌 일종의 검사 역할을 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고 물으셨고 사탄은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야훼께서 그에게 욥을 잘 살펴봤냐고 물으시며 “이 세상에는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다는 겁니다. 이에 사탄은 욥이 공연히 하느님을 경외하겠냐고, 하느님이 온갖 복을 베풀어주셨으니 그런 거 아니냐고 일종의 딴죽을 걸었지요. 그러면서 사탄은 이제라도 야훼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없애면 그는 야훼를 저주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하느님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며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욥기 얘기를 길게 한 까닭은 구약성서가 전제하고 있고 예언자가 참여했다는 야훼의 어전회의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봤듯이 어전회의에서는 야훼께서는 누구처럼 남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고 나머지는 잠자코 수첩에 받아 적기만 하는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사탄도 야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하지 않습니까. 참 예언자는 그 회의에 참여했고 거기서 야훼와 더불어 토론을 벌였으며 야훼에게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하느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해서 토론을 벌였다니까 예언자들이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당사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언서 중에는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처럼 예언자의 소명 얘기가 전해지는 책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그들이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좋아서 펄펄 뛰며 기뻐했거나 기꺼이 그 부름에 응한 게 아닙니다. 물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응답한 이사야를 떠올리는 분이 있겠지만 그를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상 가운데 하느님을 봤습니다. 연기가 가득하고 터가 흔들리는 성전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노래하는 가운데 그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을 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하느님을 봤으니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활활 타는 숯불을 가져다가 그의 입술을 지져서 정화했습니다. 그 다음에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갈 것인가?”라고 야훼께서 사람을 찾으셨을 때 그제야 이사야가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응답했던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 유다 출신 아모스는 예언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계획표에는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떼를 치고 있던 어느 날 야훼의 영이 그를 덮쳐서 예언자가 됐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나라인 남 유다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마샤에게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예언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라고 욕먹을 만 했지요.


이런 사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후대에 올 모든 예언자의 모델이라고 불리는 모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가 어떻게든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피해보려고 애쓴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집트로 내려가서 당신 백성인 히브리 노예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자기는 말재주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누가 입을 지었느냐고, 누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고 보게 하느냐고 되물으시며 당신만 믿고 가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를 돕고 가르쳐주시겠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해서 거부합니다. 그제야 하느님은 화를 내시며 모세의 형이자 말 잘하는 아론을 그와 함께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가까스로 그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집트에 내려가서 파라오와 말로써 담판지은 사람은 아론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아론은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엄살’을 했을까요?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신 후에 그에게 말 잘 하는 은사를 주셨을까요? 그게 아닐 겁니다. 예언자에게 ‘말’이란 무엇이고 그게 그의 사역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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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대량학살(6)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2)

출애굽기 11:1-10

 

하느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가장 궁금한 질문을 다뤄보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젖먹이들까지 말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1장이 전하는 대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야훼는 정말 이집트의 장자들을 모조리 죽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그 명령을 실행했다고 말입니다. 역사의 기록자들도 그렇게 믿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역사를 썼던 사람들도 마음은 불편했던 걸로 보입니다.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 이런 흔적이 구약성서 곳곳에 남아 있다고 얘기했고 그 중 서너 군데를 찾아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들이 그렇게 믿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지금’ 우리보다는 아무래도 ‘그때’ 그들이 하느님과 더 ‘가깝게’ 지냈으니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알지 않겠나, 그래서 그들이 성서를 기록했던 게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 신앙을 그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하는 게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더 많이 안다기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시야가 그들보다 더 넓다고 말하는 게 진실에 가깝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신앙은 철저하게 ‘부족신앙’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이 나만 위해주고 우리 부족만 보호해주고 번성하게 해주고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 신앙은 이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란 생각을 그들을 가질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냥 ‘부족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천 년이 지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이 넘지 못했던 테두리를 넘어섰습니다. 우리가 잘 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우리뿐 아니라,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종족신’을 믿는 ‘종족신앙’을 넘어서서 ‘보편신’을 믿는 ‘보편신앙’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아직껏 부족신앙을 유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족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을 신앙 없다고 여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망대를 넘어뜨려 죽이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시각장애자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고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가나안 종족들을 몰살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저는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과 단지 하느님은 그럴 리 없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똑같은 얘기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인 하느님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성서는 뭐냐고, 우린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서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서를 공부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엉터리로 공부하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극히 일부만 들여다봤지만 성서에는 정말 다양한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서는 하나의 통일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겁니다.

 

 

사죄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거기 맹목적으로 순종해선 안 됩니다.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사악해집니다.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말고 하느님께 질문하고 따져야 합니다. 대체 왜 그러셨냐고, 정말 그게 하느님의 뜻이었냐고 말입니다. 이 정도를 불경한 태도라고 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가치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묻고 또 물어서 끝내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대답을 듣느냐고요?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진정 간절히 바란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 대답해주실 겁니다.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 들었던 대답이 아니라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답해주실 겁니다.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그렇지, 하느님이 그럴 리가 없지. 하느님이 대량학살 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리 없지, 없고말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일까요? 그게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얘기가 떠오릅니다. 뜬금없다고 지레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들어보십시오. 헤롯왕이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듣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아기 예수 때문에 몇 명인지 모를 어린 사내아이들이 몰살당한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이 얘기가 왜 여기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럼 이 얘기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마태는 왜 이 얘기를 다른 데가 아닌 여기 적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는 글을 아직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출애굽 때 이집트의 장자들이 몰살한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죄의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이 얘기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 아니란 얘기는 앞에서 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진실(truth)이 담겨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뭔가를 말하기 위한 전한 얘기란 뜻입니다. 물론 제 생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경험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구세주 탄생이라는 기쁜 사건을 전하면서 옛날에 있었던 일, 곧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왔을 때 벌어진 장자 몰살사건을 떠올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생각은 문서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치부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약성서 학자들도 헤롯왕의 어린아이 몰살과 예수님 가족의 이집트 피난이 출애굽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 시 벌어진 일들과 정확히 대칭됩니다. 출애굽 때는 야훼에 의해 이집트 장자들이 몰살당했지만 여기선 헤롯왕에 의해 유대인 아기들이 죽었습니다.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예수님 가족은 반대로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죠. 의도적인 서술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얘기가 어떻게 ‘참회록’이 되는지는 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들도 어찌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었을 겁니다.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이게 전부였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기 예수를 모세와 같은 반열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이 얘기가 필요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량학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사죄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해도 그게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그걸 사실로 여겨왔고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대량살상을 정당화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죄해야 한다는 겁니다.

 

1970년 12월7일 아침 7시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시던 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섰습니다. 이 탑은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 6천여 명이 참살당한 일을 추모하는 탑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서자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기고 기자들도 따라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이때 브란트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습니다. 브란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브란트는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겁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그 후에 폴란드는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누구에 의해 누구에 대해 저질러졌든지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 겨레에 의해서도 저질러졌습니다. 월남전 때 파병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양민학살 얘기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군대성노예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합니다. 정당한 요구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주장이 더 떳떳하려면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도 참회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주제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죄하자’라는 얘기입니다. 거기서 새 출발합시다. 그게 과거 잘못을 씻어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학살은 우리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죄해야 하냐고요? 거기 사죄할 필요가 없다면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해서도 사죄할 필요 없겠습니다. 우리가 학살의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본인이 왜 사죄해야 합니까? 죄지은 당사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사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기록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사죄할까요? 우리는 그걸 어떻게 후대에 기록으로 남길 겁니까? 이 글이 이렇듯 질문으로 끝나는 게 아쉽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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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대량학살(6)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1)

출애굽기 11:1-10

 

제임스 존스와 인민사원

 

제임스 워런 존스(James Warren Jone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31년 미국 대공황 중에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종교적으로 오순절파 기독교에, 사회정치적으로 책을 통해 배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목회자가 됐습니다. 그는 1954년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하느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 교회에서 설교하는 걸로 목회경력을 시작했는데 인종평등과 통합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그의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급진적이었으므로 그를 받아주는 교단이 없었답니다. 다행히 제자회 교단(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이 그를 목회자로 받아줘서 1960년에 그는 이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당시 제자회에는 회중교회 전통이 강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을 안 받은 사람도 안수해줬습니다.

 

인디애나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와 그의 교회는 다른 민권운동 단체들처럼 엄청난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65년에 다른 인종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살았습니다. 개인재산과 부동산 등을 모두 공동소유로 하고 말입니다.

 

제임스 존스는 처음엔 ‘정통’ 기독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도들이 교주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데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알려지고 언론에 노출되면서 시끄러워졌고 결국 1974년에 존스와 일부 교인들은 아프리카 가이아나에 약간의 땅을 구입해서 그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미국사회에 적대적이 됐습니다. 성서의 하느님도 ‘하늘 하느님’(sky God)이라고 부르며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폐쇄적인 ‘사교집단’이 되어간 겁니다. 그는 신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를 ‘자살’로 입증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존스의 명령에 따라 1978년 11월 18일에 어린이 276명과 성인 638명 모두 914명이 독극물을 마시고 집단 자살했습니다. 이들이 세계를 엄청난 충격에 몰아넣었던 인민사원(Peoples Temple)과 짐 존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종교가, 그것도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짐 존스가 누구이고 뭘 어떻게 했기에 9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이때 죽은 276명의 아이들은 어른들, 대개 부모들이 억지로 아이들의 입을 벌려 독약을 들이부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찰스 킴벌(Charles Kimball)은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When Religion Becomes Evil)란 책에서 종교가 악으로 변하게 되는 몇 가지 요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중 제 관심을 끈 것은 ‘절대적 진리 주장’(absolute truth claim)과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입니다. 절대적 진리 주장은 나만 옳다, 나만 진리를 갖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얘기했으므로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맹목적 순종은 교주 또는 절대자의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복종하는 걸 가리킵니다. 킴벌은 이럴 때 종교는 악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교주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잘못이란 사실은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바른 종교지도자는 신도가 자기를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서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도 스스로 서야 하지만 그보다는 신도가 스스로 서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절대자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는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내 신앙을 타락시키고 사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순종은 물론 좋은 가치일 수 있지만 거기에 ‘무조건’이란 말이 붙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신앙이 뭡니까? 종교가 뭡니까?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절대자와 소통하는 겁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대화의 목적은 서로를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나, 또는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아하, 하느님은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느님은 내게 이런 걸 바라시는구나!’라고 깨닫는 것이고, 하느님은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바라는지를 알아가면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겁니다.

 

신앙은 그 어떤 올바른 진술에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자라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사를 주관할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주관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으며 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순종이 무조건 좋다는 뜻은 아니란 뜻입니다. 더욱이 ‘맹목적’인 순종은 더욱 나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맹목적’이라면 거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소통이라고 했는데 다른 모든 소통도 마찬가지지만 하느님과 신앙의 소통을 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부정이나 무조건적 거부가 바람직하지 않듯이 맹목적 인정이나 무조건적 순종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요. 맹목적인 부정과 맹목적인 긍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인 거죠. 신앙에서 무조건적 순종은 맹목적인 부정만큼 위험합니다. 그것은 유혹하는 ‘악마의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설령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야훼 하느님과 짐 존스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겁니다. 저도 그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짐 존스가 자기 신도들에게 명령했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하실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명령을 지금 여러분이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물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고 모두 하느님의 음성일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무조건 그렇다고 전제하고 얘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느님의 명령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실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해도 사람 죽이는 짓은 절대 안 하겠습니까? 저는 할지 안 할지 결정하기 전에 일단 하느님에게 따져보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맞느냐고, 왜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다음 하느님의 명령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그래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불이익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가나안에 정착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게 자기들에게 유리했지요.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 명령을 따를까요? 아니면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 해도 남을 죽일 수는 없으니 불복종의 벌을 달게 받을까요? 저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닥쳐봐야 알 것 같습니다.

 

성서에는 이사야처럼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라고 하느님께서 사람을 찾으셨을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순종한 사람도 있지만 전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소돔 성을 살피러 가시는 하느님께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명령하신 하느님께 모세가 그랬듯이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주님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저를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 중에는 아간처럼 징벌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권력을 이용해서 범해서 결국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겁니다. 이 계명은 왕이라고 해서 어겨도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를 감추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직한 장군 우리야를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의 죽음의 책임은 그가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법이 정한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와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죽었습니다. 이것도 이해 못할 일이지만 그건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그에 대한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땔감 하러 나갔다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죽임당한 사람(출애굽기 31:15; 민수기 15:32-35 참조)과 비교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요?

 

다윗은 자기의 정욕을 채우려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해진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나안에 정착하려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종족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벌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서에서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일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게 대량학살의 문제이므로 적어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지켰을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대량학살이 벌어졌을까요? 신명기 7장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당신들을 이끌어 들이시고 당신들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당신들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셔서 당신들이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당신들은 그들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마십시오.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됩니다. 당신들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 말고 당신들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마십시오.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당신들의 아들이 주님을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들을 불사르십시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1-6절).

 

이 구절에는 ‘쫓아내다’와 ‘전멸시키다’라는 동사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쫓아낸다면 전멸시킬 수 없고(전멸시킬 필요 없고) 반대로 전멸시킨다면 쫓아내는 게 말이 안 되지만 그 점은 여기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좌우간 야훼 하느님은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멸절하라고(또는 직접 멸절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3장은 이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완수됐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를 잘 읽어보면 이 명령이 ‘완전하게’ 수행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라합을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줘서 여리고가 무너질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처음부터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겁니다. 이에 반해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헤렘의 법을 어긴 아간은 죽임을 당했고 노략물도 모두 야훼께 바쳐졌습니다(7장). 눈에 띠는 것은 가나안 종족의 일원인 기브온 사람들이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고 살아남은 사건입니다(9장). 이들은 가나안 종족의 분파였기 때문에 헤렘의 법에 따르면 모두 멸절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도 속임수를 써서 말입니다.

 

신명기 7장에 따르면 가나안 종족들이 모두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살아남으면 그들의 꼬임에 빠져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종족이 소수라도 살아남으면 이스라엘은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몰살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비록 소수지만 이들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섞여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그날부터 “회중을 섬기고 제단을 돌보는 종으로 삼아서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맡게 되었다.”(9:27)고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랬다고 했으니 적어도 여호수아서가 기록됐을 때까지는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 있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가나안 종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같이 살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27-35절). 이 대목은 살아남은 가나안 종족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라합과 기브온 사람들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명기 7장은 만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지 않고 그들의 신을 따른다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벌어진 일은 어땠습니까? 위에서 봤듯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종족을 완전히 몰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곧바로’ 멸절당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결국에는 망했지만 그것은 6백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받은 대량학살의 명령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결론내릴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처벌도 신명기 7장에 선언한 대로 이뤄지지도 않았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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