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이 깡패다

분류없음 2015.05.16 18:28

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4)



거룩이 깡패다

 

 

 

얼마전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에게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옹호했던 저의 군 복무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매일아침 성경을 읽는 부시의 판단이 항상 옳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후세인으로부터 고통 받는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경찰인 미국이 나서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여러 게시판에 이런 저의 비장한 입장을 적어 도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 뒤에야 쪽팔림을 알고 다 지우러 다녔는데요. 어딘가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북한미녀로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조명애 씨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조명애의 아름다움 뒤 숨은 음모라는 따위 제목으로 여기저기 게시판을 도배하였죠. 군 생활을 할 때였으니 정훈교육을 잘 받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왜 저렇게 비장했을까요. 저도 10여 년 전 제자신이 이해가 안 됩니다. 천천히 복기해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비장한 근본주의자들과 일베들의 정신구조를 보게 될지.

 

제 입장에 반기를 든 건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공익근무요원이었죠. 애국심이 반분되었기에 저의 거룩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의 의견은 무고한 생명이 너무 많이 죽어간다였습니다. 민간인 사상의 피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전쟁고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감정에 호소하였습니다.

 

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설피 들었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모든 반론을 흡수하고도 남았습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관철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떠올려보세요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은 슬프지만이라고 운을 뗐으나,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라라는 우상신을 버리고, 야훼 하나님을 믿기 바라는 마음에 가슴이 벅찼거든요.

 


'북한 미녀' 조명애. 드라마 <사육신>에서 김종서의 딸로 활약했다.

 

 

세월호 유족들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제가 조명애를 의심했던 사람이라 압니다. 저 역시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압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겠습니다. 304명이 죽었지만 전혀 슬프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유가족이 거룩한 정부를 뒤흔드는 세력으로 보이는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돈 받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말하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네 자식이 죽었어도 그럴 거냐?”라고 반문하곤 하는데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대응입니다. 사실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 죽으면 돈 더 받으려고 시위할 사람들이거나) ‘거룩한 정부를 위해 자식 죽음에 관한 진실쯤은 땅에 묻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투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지하철택배하면서 책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매형이 군대로 보내준 책들이었는데, 그중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간디 자서전(나의진리실험이야기)은 나의 종교관’ ‘신앙관을 송두리째 뒤집었습니다. ‘종교보다, ‘기독교보다, 하나의 생명이 무엇보다 귀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생명보다 귀한 게 없다는 선포가 바로 복음(기쁜 소식)임을 그제야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아무 명분 없는 전쟁이었음이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어린 생명, 연약한 생명이 그렇게 숨을 멈추었습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4080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가늠이 잘 안 되시죠?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잘못 없이 죽었는데요. 몰랐다고요? 알았지만 선교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냥 당연하다 여겼던 겁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만 4080명으로 집계된다.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이다.


 

사람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나요?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있나요? 세월호 엄마 아빠들은, 생명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죄처럼 여겨지는 유족입니다. 자녀들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 살아있는 것조차 죄로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 생명이 귀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글 '잔인한 장면이 필요하다' 참고)

 

워낙 무딘 탓에, 저는 유가족과 얼굴을 대면하고서야 슬픔이 몸으로 전해졌습니다. (욥기의 동화 같은 결말에 문제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자식들은 죽고 없는데, 새 자식이 많이 생겼다고 위로가 된단 말인가?) 그들의 웃음에서도, 이제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전해져 슬펐습니다. 어쩌면 욥의 결핍도 절대 채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불가능하죠. 애통함의 깊이만큼 기쁨도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이내 롤러코스터처럼 추락을 경험하고 아마 그랬겠죠


우리는 무엇으로도, 이들의 움푹 파인 슬픔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벼슬로도, 힘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듯, ‘한 생명’의 공백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월호 이야기를 이제 그만하라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요. 노란리본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는 생명을 모르는 교회가 아닌가요? 복음을 모르는 목사가 아닌가요? ‘거룩이 깡패가 되었습니다. 비장하고 거룩한 것들에 눈이 가리어진 바리새인들처럼 생명을 보지 못하니 주여 주여하지만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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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을(乙)의 지형학
-「조선지리소고」 1934. 3 -

 

김교신의 전공은 지리 박물이었다. 19274월 함흥의 영생여자고등학교를 첫 부임지로 하여 이후 양정고등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마지막 송도고등학교까지 약 15년 간 강단에 섰다. 양정에서의 12년이 가장 긴 시간이었고, 사상이 의심된다거나 불온하다는 눈초리를 받다 결국 1942<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되면서 교사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

그에게서 지리 박물을 배운 학생들은 회고하기를 그저 딱딱한 지형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지리를 배울 때면 각 지역에 얽힌 조상들의 얼을 함께 가르쳤으며, 일제가 한글 수업을 금지했음에도 당당하게 조선말로 조선혼을 심어주셨다고 전한다. ‘무레사네라는 모임을 통해 우리 강과 산을 학생들과 함께 탐사하며 땅에 스며든 민족정기를 느끼도록 애쓰기도 했다 한다. 지리 전공자로서 조선의 산천을 바라보며 그가 남긴 짧은 논문인 조선지리소고는 그가 가르치고 싶었고 결국에는 세상에 내어놓고 싶었던 조선의 정신을 노래한 연가(戀歌).

우황 산세와 평야의 배열 균형의 미를 논할진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화에나 비할까, 뉴욕 부두에 높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에다가 비할까. 낭림산 머리 위에 하늘을 향한 좌완을 백두산 저편까지 높이 뻗치고 장산곶 끝까지 우완을 드리워 어루만지려는 듯, 우각의 태백산은 거제까지 굽혀 올리고 좌각의 소백산은 진도까지 뻗쳐 디딘 듯. 지구대는 허리에 잘룩하고 금강산은 가슴에 드리운 노리개인 듯, 몸을 가리운 능라(綾羅)가 동풍에 나부끼어 녹색 평야를 이루었으니 엷고도 가볍다. 선녀 바야흐로 구름 위로 솟아오르려는 자태인가 혹은 자유의 여신이 대륙을 머리 위에 이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는 형상인가.

나는 전공자가 아니니 김교신의 한국 지형학에 대해 학문적 판단을 할 재량은 없다. 또한 페미니즘적 잣대를 들이대어 여성과 땅의 타자화운운 할 생각도 없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내 마음에 박힌 것은 지배적인 식민사관 아래 한반도의 지형조차 부정적으로 평가받던 시절에, 같은 지형을 저리 아름답고 찬란하게 응시할 수 있었던 김교신의 소망스러움이다. 왜곡이나 맹목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지형에 담은 소망이었다. 땅의 협소함이나 백성 수의 적음, 평야의 부족함과 산천의 작은 규모에 대해서는 부정보다 달리봄을 택했다.

 

대동여지전도 (소장: 숭실대학교 박물관, 연대: 1860년대(김정호 제작), 형태: 목판본, 보물 제850호)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해안선에 대한 묘사에서도, 온대지방에 위치하여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음에도, 김교신은 하나님께 감사에 감사를 더 했다. 아니, 실은 이미 감사하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시선이었다. 강수량이 빈핍한 까닭에 서양보다도 200여년이나 앞서 측우기를 발명할 수 있었고, 공중에 운량(雲量)이 희박한 까닭에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되었다며, ‘화를 복으로 이용하는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칭찬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형론이 흥미롭다. 지정학적 결정론도 아니요 정신의 승리만을 외치는 관념론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우리의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이 땅에 살고 있음으로 해서 겪는 모든 일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복된 땅을 만들자는 주장이니 말이다. 김교신의 지형론은 소위 반도론이다. 반도로서의 우리 땅은 결코 대륙에 붙어 큰 외세에 의지해 살아야만 하는 비주체적 공간도 아니요, 섬나라 일본의 대륙진출 야망에 길목을 내어주는 도구적 공간도 아니다. 고대의 희랍-이태리 반도가, 근대 초기의 덴마크 반도가 가졌던 소통의 활발함을 상기시키며, 김교신은 근대 사상사에서 한반도가 갖는 지형론적 소명을 굳게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다. 겁자에게 안전한 곳이 없고 용자에게 불안한 땅이 없다고.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굴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영일이 없었다 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 만약 눈을 돌려 정신적 소산, 영적 생산의 파악에 향한다면 반도에는 특이한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상이나 발명은 모르나 지고한 사상, 즉 신의 경륜에 관한 사상만은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생래의 교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에게만 계시되는 듯하다.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주집(湊集)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 낸 엑기스(精素)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제국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이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단짝이었던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를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스무 개의 시리즈 논문으로 <성서조선>에 실었던 함석헌의 한국사 풀이가 진행된 시점이 19342월부터이니, 동인이요 편집장이었던 김교신이 함석헌이 주장하는 고난의 메시아적 해석을 함께 나누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함석헌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세계열강의 침략 대상이 되어온 한국의 역사를 세계사를 위해 대신 진 가시면류관으로 표현했었다. 현재의 한반도는 욕심투성이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이 퍼다부은 쓰레기들이 모여 들어오는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말했다.(전집1: 73) 뜻 모르고 겪는 고난은 재난이지만, 악이 응집된 이 땅에서 이를 그치려는 정신으로 고난을 승화시킬 수 있다면 이 고난은 옥을 닦는 돌이요 세계를 구하는 힘”(전집1: 303)이 될 것이라, 함석헌은 그리 믿었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없다는 김교신의 선언이나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 낸 엑기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는 그의 당찬 소망은 함석헌이 믿었던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의 메시아적 선포와 맞닿아 있다.

한 마디로 김교신의 한반도론은 ()의 지형학이다. 그러나 이유 불문 꿇어야하고 제 뜻은 없애고 강자에게 귀속되는 그런 이 아니다. 김교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른 사상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는 질서에 대한 사상이라면, 이를 상상해내고 깨달을 인식론적 특권은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생래의 교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들만이 누리는 것임을!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삶의 자리가 의 자리인가? 그렇다면 기뻐하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대에게 더 가까이 있다. 오늘날의 한국 땅이야 말로, 일찌감치 사라졌어야할 봉건주의적 잔재와, 사람을 갈아 끼우는 기계 부속품쯤으로 여기고 효용가치에 따라 쓰고 버리면서 이를 고용 유연성이라 이름하는 투자-금융자본주의의 폭력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어서 세속적 욕망을 포장하는 기업-교회들의 구조적 불의가 그야말로 집약되어 작동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더 이상 물러나 은둔할 공간도 없지 않나. 주저앉아 넋 놓고 당하면 재난이지만, 애통하고 연대하는 주체로 서서 이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현재의 시스템을 극복할 사상을 내어놓을 수만 있다면, 지금 우리들 의 위치는 은혜다. 감사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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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70’(2)

 

815해방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독립행진곡

 

우리에게 815는 이중성이 겹친다. 1945년의 815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국토분단의 날이고, 1948년의 815는 단독정부 수립과 더불어 북쪽에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민족분열의 날로 기억된다.

 

이렇게 이중적인 815는 이후 한반도 전체는 물론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성격을 규정하는 족쇄가 되었다. 1민족 2국가의 원천적인 비극은 미일의 해양세력과, ()의 대륙 국가 사이에서 대리전이라는 동족상잔을 겪게 되고, 분단외세지향의 세력이 남북에서 각각 지배 주류가 되는 역설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1945년의 815는 본질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전후 동아시아체제의 구축에 결정적인 계기가 성립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전범(戰犯) 국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8151948년 남북에 분단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해방절로 불리다가 이후 남한에서는 광복절’, 북한에서는 민족 해방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염치없게도 종전 기념일로 불린다. 그들은 패전이라는 용어 대신 종전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 전력을 은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승전 기념일로 부른다.

 

일왕 쇼와는 1945814일 밤 1125분부터 궁내성 내정 청사 2층에서 이른바 옥음 방송을 녹음하였다. 4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 선언이지만,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 조서815()로 되어서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815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노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것이었다. 말과 글과 역사를 빼앗기고, 성씨를 비롯해 전통과 문화를 박탈당하고, 인력과 자원물산을 수탈당하는, 민족 말살 바로 그것이었다.

 

 

(출처: InSapphoWeTrust(http://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일제에 짓밟힌 시기는 말이 36년이지, 1910829일 국치일로부터는 만 3411개월 보름만이고, 187622일 강압에 의해 체결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으로부터 기산(起算)하면 69, 실질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19051117일의 을사늑약으로 치면 40년이.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광명이고 부활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훼절하지 않고 광복의 날을 맞았던소설 임꺽정을 썼던 홍명희는눈물 섞인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함석헌은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술회했지만,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일제와 싸우면서 해방을 준비하였다. 특히 김구김규식 등이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의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한편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지 이틀 후에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광복군은 미군 OSS부대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할 날을 기다리며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때를 놓치고 말았다. 김구 주석이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환호감격보다 우리가 크게 한 일이 없는데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개탄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김구가 우려한 대로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데다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해방의 날은 왔으나 완전한 해방이 되지 못하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고사 그대로였다. 친일파들에게는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봄 잠에 취해 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할 것이다.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채 그날이 오면을 애타게 그리다가 젊어서 숨진상록수의 작가 심훈의그날이 오면에는 모든 항일 운동가와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으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815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채택한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구현하는 민주적 삼균주의의 실천이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분단주의자, 친일파, 외세추종자들이 주류가 되고, 독립 운동가민족주의자남북협상파는 암살되거나 제거되고 말았다. 변통세력이 정통세력을 짓밟고 이 땅의 주역이 된 것이다. 따라서 815 해방정신은 실종되고, 815 세력이 득세하는 민족모순역사모순이 자리잡게 된 셈이다.

 

해방 70주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3대 미해결의 모순이라면 친일파 미청산 분단 미해결 군사독재 잔재 미청산이라 할 것이다. 이런 잔재들이 상호연대연계하면서 한국사회의 주류가 되고 세습을 하면서 역사를 오도하고 민주주의를 짓밟는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나라의 정치는 그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명박근혜정권이 지난 8년 여 동안 저지른 반통일, 반민주, 반서민의 퇴행은 세계 제2위의 대학진학률, OECD 가입국가의 형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반유신 항쟁으로 박정희,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을 몰아낸 한국 국민이다. 민주화와 평화통일은 여전한 국민적 과제가 되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크게 불렀던해방의 노래이다.

 

해방의 노래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하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조선음악동맹 찬, 김순남 작곡)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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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

 

응답하라. 2015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1927년으로부터 온 편지

- <성서조선> 창간사 -

 

19277, 6인의 조선 젊은이들이 <성서조선>이라는 동인지를 창간했다.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되어버린 세월호 참사 이후 나라의 현재를 암담해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이 시절보다도, 더 희망이 없던 일제치하였다. 동인 중 하나였던 함석헌의 표현처럼 끌려가듯일본 땅에서 낯선 타자로 살며 바다 건너 조국을 지켜보자니, 젊은 지식인이요 신앙인인 이들의 참담한 마음이 더욱 깊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걱정을 같이 하고 소망을 일궤에 붙이는 우자(愚者) 5-6인이 동경 시의 스기나미촌에 처음으로 회합하여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고 매주 때를 기하여 조선을 생각하고 성서를 강해하면서 지내온 지 반년에 누가 동의하여 어간의 소원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개하려 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도다. 명명(命名)의 우열과 시기의 적부(適否)는 우리의 불문하는 바라. 다만 우리 염두의 전폭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신의 선물을 성서 한 권 뿐이니 둘 중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기원은 이를 통하여 열애의 순정을 전하려 하고 지성의 선물을 그녀에게 드려야 함이로다.” (<성서조선> 창간사 중)

 

 

 

 

그랬다. 주저앉아 울 수도, 숨어 탄식만 할 수도 없었던 조선의 청춘 여섯(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두 존재를 삶의 기반으로 양 손에 꼭 쥐고 하루씩 살아냈고, 그 치열함을 글로 담아 조국에 선물했다. 자기 실존 안에서 주체적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스승 우치무라 간조가 두 개의 ‘J’(저팬과 지저스)를 꼭 붙들었듯이, 조선의 젊은이들은 성서조선그 사이에 어느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실은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할 수 없어서 두 단어 사이에 라는 접속사마저 허락지 않았던 절절한 사랑을 <성서조선>에 담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낭만적일 수 없었다. 때론 폭력으로 때론 회유로, 일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철저히 막으며 제국이 만든 동질적 시스템에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었으므로・・・ 하여 <성서조선> 동인들은 자신들의 외침이 열매 맺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이 걸릴 지를 이미 예감했었나 보다.

 

<성서조선>,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 사람을 기다려 면담하라. 상론(相論)하라. 동지를 한 세기 후에 기()한들 무엇을 탄할 손가( <성서조선> 창간사 중).

 

하루를 버텨내기 힘들었을 그 시절에 김교신과 <성서조선> 동인들은 한 세기 후의 동지를 기다리며 인내했다. 그리고 이제 2015년이다. 김교신이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렸던 우리다. 한 세기 후의 동지들이다. 지금 우리의 시절은 어떠한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지배로부터는 독립을 하였으되, 금융 자본주의적 질서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새로운 제국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노동 없는 부()와 정의 없는 권력이 득세하는 이 세상은 여전히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김교신의 시절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있었다면, 우리 시절에는 갑과 을이 있다. 그 시절에 일본인이 판단하고 조선인이 따라야했다면,

 

 이 시절에는 갑이 판단하고 을은 따라야한다. 꿇지 마라! 자유혼으로 스스로 서라! 우리가 아는 성서의 핵심 메시지는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인간이 어찌 다른 인간들의 판단과 명령에 의해 자기 존엄성을 포기하겠느냐. 혁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다. 자유를 빼앗기고 존엄성을 상실한 이 땅 조선에서, ‘성서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새기고 또 새기며 자아의 혁명을 시작하자. 이것이 김교신과 동인들이 <성서조선>을 시작하며 동포에게, 이웃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성서조선>,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들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 창간사 중)

 

뜨끔할 일이다. 어찌 한 세기전 외침일까. 오늘날 한국 교회를 돌아보아도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가 넘쳐나질 않던가! 스스로 기도하고 생각하며 팔딱팔딱 오늘로 살아 돌아오는 말씀을 찾아내려는 주체적 신앙 없이, 그저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전통이 그렇게 가르치니까하며 앵무새처럼 남의 신앙만 반복하는 행태를 향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성서조선>발의 먼지를 털며그런 자들과는 관계없음을 선포한다.

 

<성서조선>,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성서조선> 창간사 중)

 

 

 

 

성서를 평신도에게 건네기 위해, 이를 금하던 교황청을 피해 다니며 죽을힘을 다해 영어 성서를 번역했던 윌리엄 틴데일은 자신했었다. 불가타(라틴어역 성서)를 독점하고 평신도에게 성서 읽기의 권위를 허락지 않았던 교회를 향하여 당당하게 선포했다. 성서를 모국어로 번역하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달하겠노라고, 결국 시골의 소 모는 목동조차도 교황보다 성서의 핵심 메시지를 더 잘 알게 만들 것이라고! 김교신의 소망이 다르지 않았다. 성서는 중심으로 위로 좁아드는 메시지가 아니다. 변방으로, 지평으로 퍼져나가는 자유의 소리다. 그걸 독점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에 반()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건물에 갇힌 교회교인들의 울타리를 넘어 훨훨 날아라. 하나님은 교회보다 크시다!

 

이 자유의 외침이 선포된 것이 1927년이다. 이 멋진 외침을 외친 산 신앙인들은 백 년 뒤의 동지를 기다렸다. 이들의 메시지가 제국의 기반을 흔든다고 직감하고 1942년 잡지를 강제로 폐간하고 이들을 투옥했던 일본 순사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성서조선> 젊은 신앙인들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산 신앙이, 민족혼이 백년 뒤, 아니 5백년 뒤에라도 싹틀 기반을 마련하는 고약한 놈들이라고 말이다. 그 터를 놓은 신앙의 선배 김교신이 우리를 부른다. 기다렸노라고, 얼굴을 마주하자고, 성서를 논하자고그의 부름은 낡지 않았다. 시대는 여전히 악하므로그러니 응답하라. 2015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여!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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