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1)


하나님의 사람 가슴에는 주판이 없다


너는 이 책(冊) 읽기를 다한 후(後)에 책(冊)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河水)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災殃) 내림을 인(因)하여 이같이 침륜(枕淪)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衰敗)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예레미야 51:63-64).


오래 전에 <마지막 교실>이라는 제목의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문을 닫게 된 수몰지역의 한 초등학교 이야기다.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날 학교 운동장, 연단에 선 교장 선생님도, 아이들 앞장에 선 세 명의 선생님도, 쪼르르 줄을 맞춰 선 스무 여명의 학생들도, 마지막으로 교가를 부르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교가를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아직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5-6학년 교실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하기만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체육시간 운동장 같았을 교실이 머리카락 한 올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아이들은 모두 제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동네를 지켜온 학교가 문을 닫게 되다니, 아이들로서도 기가 막혔던 것이다.


그 때였다. 개구쟁이 대석이가 교실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앞문을 열고 나타난 것도 대석이였다. 장난을 치려나보다 생각 했지만 대석이의 표정은 진지했고, 대석이 손에는 깨끗하게 빨아온 걸레가 들려 있었다.


대석이는 천천히 교탁을 닦기 시작했다. 교탁을 다 닦은 대석이가 미리 전학을 가 비어 있는 미경이의 책상을 닦기 시작했을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비와 걸레를 찾아 교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건성으로 청소를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창이 그렇게 깨끗한 적은 이제껏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교실로 들어서려던 선생님의 걸음이 그만 교실 문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을 통해 청소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교실 문을 한동안 열려지질 않았다. 교실 문을 사이에 두고 두 눈이 모두 젖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서로를 마주 본 채, 다음 일을 아예 잊고 있었다.



마세야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인 스라야가 시드기야 왕을 모시고 바벨론을 찾을 때의 일이다. 어쩌면 유다가 여전히 바벨론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정치적인 행차였는지도 모른다.


예레미야는 스라야 편에 책 한 권을 보낸다. 스라야는 예레미야 곁에서 일을 도왔던 바룩과 형제지간이다. 바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32:12)이 스라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과 같다.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준 책에는 바벨론에 임할 재앙의 말씀들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예레미야50:1-51:58에 기록된 내용이 책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에 도착을 하면 책에 기록된 내용을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으라고 명한다. 바벨론에 도착하면 바벨론에 임할 재앙의 내용이 담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예레미야는 책을 모두 읽은 뒤에 할 말까지 일러준다.


“주님께서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나 거하지 못하게 하며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다.”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명한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 읽기를 다 한 후에 또 할 일이 있었다. 책을 돌에 매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라는 것이다. 위험한 내용이 담긴 책을 읽었으니, 읽고 난 뒤에 그 증거를 없애라는 뜻이었을까? 그런 게 아니었다. 책을 돌에 매어 강에 던지면서 할 말을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바벨론이 나의 재앙(災殃) 내림을 인(因)하여 이같이 침륜(枕淪)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衰敗)하리라”


‘침륜’(沈淪)이라는 말은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재산이나 권세 따위가 없어지고 보잘 것 없이 됨’을 나타낸다. ‘쇠패’(衰敗)는 ‘쇠할 쇠’에 ‘깨뜨릴 패’로, ‘쇠하여 패망함’을 뜻한다.


“주님께서 이 곳에 내리는 재앙 때문에 바빌로니아도 이렇게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고 쇠퇴할 것이다” <새번역>

“이처럼 바빌론은 물에 가라앉으리라. 내가 내리는 재앙을 당한 후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공동번역>

“바빌론도 내가 그에게 내릴 재앙 탓에, 이처럼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쳐 버릴 것이다.” <성경>

“내가 내린 재앙을 당한 뒤에, 바벨론이 저렇게 바닥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메시지>


돌을 매단 책이 다시는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것처럼, 바벨론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을 일러주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전하라 하시는지 충분히 알겠다. 책에 적힌 내용도 그렇고, 책을 읽은 뒤에 하라는 말도 그렇고, 그런 뒤에 책을 돌에 묶어 강에 던지라는 것도 그렇고, 책을 던진 후에 하라는 말을 보면 그 뜻 하나하나가 명확하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따로 없다.


한 가지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결국 책은 물에 빠지고 만다. 그것도 돌에 매달아 빠지게 됨으로 그야말로 수장이 되고 만다. 나중에 누가 그 책을 꺼내 읽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책을 썼다. 물에 던져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말 책, 아무도 귀 기울여 듣는 이 없을 내용, 듣는다 해도 어디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며 웃고 말 내용, 그런데도 바벨론을 향한 주님의 뜻이 담긴 내용을 예레미야는 책에 기록했다.


어쩌면 하나님의 사람이란 내가 하는 일의 영향력을 셈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른다. 오히려 내가 계산하는 영향력에 내가 묶이거나 갇히게 될까 조심하며 나 자신을 경계하며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가슴에는 그 어떤 주판도 없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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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0)

 

백약이 무효이다

 

“처녀(處女)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乳香)을 취(取)하라 네가 많은 의약(醫藥)을 쓸지라도 무효(無效)하여 낫지 못하리라”(예레미야 46:1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새긴다. 그것이 욕심이든 근심이든 등 뒤에 메고 있는 커다란 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하면 들어갈 수가 없다고. 또 하나, 그 문은 단체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증명서 하나를 보이고 우르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결코 아니라고.

외국에 나갈 때든, 나갔다가 들어올 때든 공항에 내리면 입국심사라는 걸 한다. 여권을 내보이고 본인인지 아닌지, 입국 목적이 무엇인지 등을 확인한다. 내 나라나 영토에 아무나 함부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입국심사를 할 때 보면 줄이 두 줄이다. 내국인이 서는 줄이 따로 있고, 외국인이 서는 줄이 따로 있다. 우리 마음속 터무니없이 자리 잡고 있는 생각 중 하나가 이와 관련된 것 아닐까? 최후의 심판 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줄에 서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예 하나님 아는 척을 하지 않는 이들이 세상에는 아주 없는 것일까.

 

 

 

열국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다. 이집트(46장), 블레셋(47장), 모압(48장),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과 하솔의 나라들, 엘람(49장), 바벨론(50-51장) 등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향한 말씀이다.

 

주님의 관심이 단지 이스라엘 안에 머물러 있거나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주님의 눈길에서 벗어난 대상이나 존재는 세상에 그 무엇도 없다. 교회나 기독교가 하나님의 관심이 머무는 울타리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 갈그미스 전투에 참여했던 이집트의 왕 바로 느고의 군대를 향한다. 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곳으로 그동안 패권을 잡고 있던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바벨론과 이집트가 서로 충돌을 하던 곳이다. 그곳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중동 지역의 지배권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여호야김 제4년, 그러니까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이집트의 바로 느고를 물리친다. 이 결과는 이스라엘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동안 이집트를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다.

 

이집트 군대는 나름대로의 무기와 힘을 갖고 있었다. 큰 방패, 작은 방패, 군마, 투구, 창, 갑옷…,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가 패배할 것을 바라보고 있다. 잘 싸우는 군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친다(46:5).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서 발이 빠른 자도 도망치지 못하고, 용맹이 있는 자도 피하지 못한다(46:6). 그들은 모두 유프라테스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게 된다(46:6).

 

그들의 사방에는 두려움이 있다(46:5). ‘사방의 두려움’이라는 말은 예레미야를 괴롭힌 바스훌에게 주님이 붙인 이름이기도 하고(20:3), 사람들에게서 놀림을 받던 예레미야의 심정이기도 하다(20:10). 어디를 둘러보아도 두려움뿐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다니, 참으로 마음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집트가 입은 상처는 고칠 수가 없다. 상처 치료에 효력이 있는 유향이 나는 곳으로 유명한 길르앗에 가서 아무리 많은 유향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나을 병이 아니기에 백약이 무효일 뿐이다.

 

“처녀, 딸 이집트야, 길르앗 산지로 올라가서 유향을 가져 오너라. 네가 아무리 많은 약을 써 보아도

너에게는 백약이 무효다. 너의 병은 나을 병이 아니다.” <표준새번역>

 

“아무에게도 짓밟힌 일 없는 너 이집트의 수도야. 길르앗에 올라가 향유를 구해다가 약을 만들어 마음껏 써보아라. 공연한 노릇이리라.” <공동번역 개정판>

 

“오, 처녀 딸 이집트야, 길르앗 산지로 올라가 약제 유향을 구해보아라. 그러나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너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시지>

 

이집트는 어쩌다가 이런 결과를 맞게 되었을까?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일까?

 

예레미야 46장 2-12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이집트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으스대고 있었던 것이다(46:7-10). 이집트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오만함을 꺾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여도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꺾으신다. 교만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방의 두려움이고, 그 때 입은 상처는 너무도 깊고 커서 백약이 무효일 뿐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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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9)

 

네 생각이 틀렸다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네가 너를 위(爲)하여 대사(大事)를 경영(經營)하느냐 그것을 경영(經營)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肉體)에게 재앙(災殃)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生命) 얻기를 노략물(擄掠物)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에레미야 45:4~5).

 

큰 딸 아이 소리를 키울 때였다. 작고 외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소리는 또래가 없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흙과 풀과 꽃과 강, 강아지가 친구였다.

 

어느 해 봄날 소리와 함께 앞개울로 나가 다슬기를 잡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논둑을 걷다보니 뭔가 신기한 것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서 저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었더니 소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로 저게 개구리 알이야. 저기서 올챙이가 나오는 거지.”

 

설명을 해준 뒤에 올챙이가 커서 무엇이 되는지 아느냐 물었더니, “개구리요” 하고 자신 있게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서 다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소리가 물었다.

 

“그런데 아빠, 왜 올챙이는 커서 개구리만 되는 거예요?”

 

올챙이가 커서 왜 개구리만 되냐니, 지극히 당연한 것을 물으니 오히려 대답이 궁했다. 아이 생각에는 개구리 알이 저리도 많으니 더러는 물고기도 되고 더러는 새도 되고 더러는 다슬기도 될 것 같은 모양이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선뜻 대답을 못하자 녀석이 불쑥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것밖엔 될 게 없어서 그래요?”

 

그것밖엔 될 게 없어서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냐는 어린 딸의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 말은 의미 있게 들렸다. 아무리 알이 많아도 개구리가 낳은 알은 모두 올챙이가 되고, 올챙이가 아무리 많아도 올챙이는 마침내 개구리가 되는 것, 그 이유를 ‘그것밖엔 될 게 없어서’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이다웠다.

 

논둑을 걸어올 때 문득 마음속을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맞다, 아무리 알이 많아도 개구리 알은 올챙이가 되고, 올챙이는 마침내 개구리가 된다. 나는 과연 ‘그것밖에 될 것이 없는’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묻게 되었다. 작은 시골교회를 섬기며 내가 지금 사는 삶이 맞는 것일까, 이미 대답한 질문을 거듭 할 때가 있는 내게 어린 딸의 말은 하늘 음성처럼 다가왔던 것이었다.

 

 

 

바룩에게 주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예레미야가 바룩하게 하는 말이지만, 그 말은 곧 주님께서 바룩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때로 주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해 내게 말씀을 하신다. 들을 귀가 있다면, 분별할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주님은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내게 말씀을 하신다.

 

주님은 바룩에게 네 생각이 틀렸다고 하신다. 그동안 주님은 바룩의 탄식을 듣고 계셨다. 주님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고 말았구나, 혼잣말로 탄식을 한 것을 주님께서 기억하고 있었다(3절). 한 사람의 탄식을 기억하시는 주님! 멸망의 길로 치닫는 유대 백성들을 보며 큰 아픔에 빠져 있던 터에,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주님의 심판의 말씀을 책에 적다 보니 마음속 괴로움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것이었다.

 

바룩은 주님께서 주님이 세우신 백성을 벌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주님 앞에 가졌던 바룩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바룩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묻어난다.

 

“나는 세웠다가도 헐 수 있고 심었다가도 뽑을 수 있다.” <공동번역>

 

주님이 세운 것을 주님이 허시는 것을, 주님이 심은 것을 주님이 뽑으시는 것을 바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이 정하신 대로 하시는 것을 두고서, 주님의 뜻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바룩에게 더 이상 너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경영(經營)하지 말라 하신다.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 <새번역>

“네가 이제 큰일을 도모한다마는, 그만두어라.” <공동번역>

“너는 자신을 위하여 무슨 위대한 일들을 찾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더 이상 찾지 마라.” <성경>

“그러므로 스스로 거창한 계획을 세울 생각은 마라.” <메시지>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주님 앞에서는 내 생각일 뿐이다. 내 눈에 훌륭해 보일 뿐이다.

아무리 옳은 생각도 주님 앞에서는 내 생각일 뿐이다. 내 눈에 옳게 보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도 주님 앞에서는 내 생각일 뿐이다. 내 눈에 위대해 보일 뿐이다.

내 생각이 아무리 훌륭하고 옳고 위대해 보인다 해도 주님 앞에서 내 생각을 고집하며 내 생각을 앞세우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 위대한 일’을 찾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룩의 마음은 참으로 귀하다. 멸망의 길을 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며, 그 백성을 벌하시려는 주님께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매달리고 있으니, 어찌 거룩한 마음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앞서는 바룩을 두고 주님께서는 ‘그만 두라’ 하신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에 옳다 싶어도 주님의 뜻을 앞서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네 생각은 틀렸다고 하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겸손의 자리는 그렇게도 아뜩하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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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8)

 

누구 말이 들어맞는지

 

“그런즉 칼을 피(避)한 소수(少數)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 우거(寓居)하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者)가 내 말이 성립(成立) 되었는지, 자기(自己)들의 말이 성립(成立)되었는지 알리라”(예레미야 44:28).

 

‘콩알로 귀를 막아도 천둥소리를 못 듣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콩과 같이 작은 것이 큰 천둥소리를 막듯이, 작은 것도 잘 활용하면 큰일에 도움이 된다’고, 한 속담 사전에서는 위의 속담을 그렇게 풀고 있다. 작은 것의 유용함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볼 여지가 크다. 콩알만큼 작은 것이 귀를 막아도 천둥소리를 못 듣는다. 아무리 옳은 말이 천둥소리처럼 크다 들린다 하여도, 콩알만큼 작은 것이 귀를 막고 있으면 들을 수가 없다. 마른하늘 벼락같은 말도 콩알 만한 작은 것에 막히면 들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교만이든 걱정이든 욕심이든, 아주 사소한 것이 마음의 귓구멍을 막고 있으면 어떤 말도 들리지를 않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했던 말씀을 주님은 괜히 덧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말씀을 들으러 나올 때 귀를 집에 두고 온 자가 누가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그대로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들어도 나중에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제각기 본 것도 다르고 들은 것도 다른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어느 날의 기도’를 드리며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미리 답을 내 안에 두고서 안 그런 척 당신께 묻는 일 없게 하소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정세, 이집트로 내려갈 마음을 정하고선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나님이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실 리가 없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까지 끌고 이집트로 간다.

 

 

 

그런 백성들이었으니 이집트에서의 삶이 어떠했을지 기대할 것이 없다. 여전히 주님 보시기에 역겨운 일을 했고,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더 이상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폐허가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는데, 토한 것을 도로 삼키듯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집트에 있는 유다 사람들에게 임한다. 이집트로 내려간 유다 백성을 모두 멸절 시키겠다고, 그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며, 원망과 놀라움과 저주와 조소의 대상이 될 것이라 하신다.

 

그렇게 주님의 뜻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은 또 다시 항의를 한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라 한다.

 

그렇게 맹세하는 백성들을 두고 이제는 주님께서 맹세를 하신다. 더는 살아계신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복을 내리려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기 위해 내가 너희를 지켜보겠다 하신다.

 

백성들을 체념하고 포기하신 듯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집트를 벗어나 고국 유다로 돌아갈 자는 몇 사람 되지 않으리라. 이집트에서 타향살이하던 유다의 남은 자들은 내 말과 저희 말 중에 과연 누구의 말이 옳았는지 그 때에 가서야 알게 되리라.” <공동번역>

 

“살아서 이집트를 빠져나가 유다로 돌아갈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유다를 떠나 이집트에 살려고 온 불쌍한 무리들은, 그 때가 되어서야 모든 일의 최종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메시지>

 

“칼을 피하여 이집트 땅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집트 땅에 정착하러 들어온 유다의 남은 자들은 모두, 나와 그들 가운데 누구 말이 들어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생각 중 누가 옳은지를 가리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일까만, 모두 망한 뒤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 이 오래된 엄청난 어리석음을 우리는 언제쯤이나 버릴 수 있는 것일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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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7)

 

신앙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예레미야 44:16).

 

지내 봐야, 겪어 봐야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겉으로 봐선 모르고, 잠깐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말이 있다.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는 겉모습만 보고선 판단할 수가 없다. 말에 대해 눈 밝은 이가 있어 말의 생김새를 보고 대강의 성격이나 힘을 짐작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말을 제대로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먼 길을 가는 것이다. 먼 길을 가보면 말의 힘은 물론 말의 성질까지가 다 드러날 테니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 잠깐 보아서 좋은 사람이 나중까지 좋을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갈수록 실망을 주는 사람들도 있고, 갈수록 호감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함께 하면 할수록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지복이 아닐 수가 없다.

 

결국은 믿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잠깐 뜨거운 것이야 맘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보다 어려운 것은 한결같은 믿음이다. 변함없음 속에 믿음의 고갱이가 있다. 믿음은 결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한결같은 걸음이다.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이스라엘 땅에 남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이집트로 피신을 했다. 그게 사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뜻을 구했다. 주님의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말씀에 순종을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주님의 뜻이 전해지자 주님의 뜻을 거짓말이라 한다.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님의 뜻을 교묘하게 비튼다.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그냥 유다 땅에 머물러 살라 하셨다니, 그러실 리가 없다고,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자신들을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주어서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꾄 것이라 한다.

 

살 길을 알려주었지만 다른 살 길을 찾아 이집트로 내려간, 또 한 번 주님의 뜻을 등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있어도, 그 모습이 어떠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해진다. 이집트로 내려간 백성들에게 과연 어떤 말씀이 전해졌을까?

 

이집트 땅에 전쟁과 기근이 찾아와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결국은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라 하신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살던 이들이 이방 사람들 앞에서 저주, 놀램, 조롱, 수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 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은 항의를 한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소.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맹세한 대로 할 것이오(16절).

 

한 번 등을 돌리기가 어렵지, 한 번 등을 돌린 이가 두 번 세 번 등을 돌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굳어진다.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보다도 자신들의 입으로 한 맹세를 앞세운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그들의 왕들과 그들의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그에게 술 제물을 바치겠다고 말다. 아예 등을 돌리겠다고 선언을 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다.

 

하늘 여신을 섬길 때에는 우리에게 먹을 양식이 풍족하였고, 우리가 잘 살았으며, 재앙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일을 그치고 그에게 술 제물 바치는 일을 그친 뒤부터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게 되었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으로 죽게 되었소(17-18절).

 

두렵다.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빚어진 일을 두고서 우상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한다. 마음이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자 지난 시간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까지가 달라지고 만다. 현재를 부정할 뿐 아니라 과거까지를 부정하고 있다.

 

“당신이 야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한 말을 우리는 듣지 않겠소.” <공동번역개정판>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메시지라며 전하는 말에 전혀 개의치 않겠소.” <메시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일까 싶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도 될까, 회의감이 든다. 한 때 믿는 것은 쉽다. 한 때 뜨거워지는 것은 맘먹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결같은 걸음, 그게 신앙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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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6)

 

그럴 리가 없소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百姓)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自己)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驕慢)한 자(者)가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 거(居)하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꼬드겨서 우리를 대적(對敵)하여 갈대아인(人)의 손에 붙여 죽이며 바벨론으로 잡아가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장관(軍隊長官)과 모든 백성(百姓)이 유다 땅에 거(居)하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聽從)치 아니하고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장관(軍隊長官)이 유다의 남은 자(者) 곧 쫓겨났던 열방(列邦) 중(中)에서 유다 땅에 거(居)하려 하여 돌아온 자(者) 곧 남자(男子)와 여자(女子)와 유아(幼兒)와 왕(王)의 딸들과 시위대장(侍衛隊長)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孫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領率)하고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聽從)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예레미야 43:1-7)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농부가 어느 주일엔가 터덜터덜 예배당 앞을 지나가다가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날 목사님은 무엇이든 간절하게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설교를 했다.

 

집으로 돌아온 농부가 생각 끝에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송아지 한 마리를 보내주시면 열심히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쓰고 나니 걱정이 되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송아지를 떨어뜨리면 살 길이 없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드렸다. 송아지 살 돈 100만원을 보내주시면 송아지를 사는 수고는 자신이 하겠다고.

 

편지를 다 쓴 뒤 봉투에 담았다. 주소를 쓰는 난에는 그냥 ‘하나님 전상서’라 썼다. 편지를 분류하던 집배원이 이상한 주소가 적힌 봉투를 발견했다. 고민 끝에 우체국장에게 가지고 갔다. 우체국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필시 무슨 사연이 있겠다고 생각한 우체국장은 기도를 한 뒤 편지를 열었다.

 

기가 막힌 내용의 편지를 읽은 우체국장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절반이라도 도와주어야지 싶은 마음으로 50만원을 담아 농부에게로 보냈다. 이제나 저제나 답장을 기다리던 농부에게 답장이 왔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여니 역시 송아지 살 돈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 돈을 세어보니 50만원이 아닌가. 분명 100만원을 구했는데 말이다. 농부는 생각했다. 하나님께선 틀림없이 100만원을 보내셨는데, 중간에 우체국에서 50만원을 떼먹은 게 분명하다고. 화가 난 농부는 씩씩거리면서 우체국장에게 따지려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나 …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청하였던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다 들려주었을 때, 아사랴와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2, 새번역)

 

막막하고 위태했던 순간 백성들은 다급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대뜸 거짓말이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거짓말’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러나 그들은 망설임 없이 거짓말이라 한다.

 

기다렸던 하나님의 응답을 두고 거짓말이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게 살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그냥 유다 땅에 머물러 살라 하셨다니, 그러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바빌로니아로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 것이오.” (3, 새번역)

 

하나님의 뜻을 거짓말이라 단정한 그들은 한 걸음 나아가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면서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이대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 예레미야까지를 데리고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한 이집트 땅으로 내려간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를 때 대뜸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이라 했던 사람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었다면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이다. 비록 내 뜻과 다르다 하여도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내 생각의 체에 걸러낸다. 그 체는 얼마나 촘촘한지 내 뜻과 조금만 달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걸러내는, 고성능 고감도 필터다.

 

내가 원하던 일이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생각한 때에, 그것도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 중의 무엇 하나가 어긋나도 내 생각의 체는 하나님의 뜻을 걸러낸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들은 같은 말을 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를 리가 없다고.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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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5)

 

치명적인 실수

 

유다의 남은 자(者)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警戒)한 것을 너희는 분명(分明)히 알라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爲)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祈禱)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에게 고(告)하라 우리가 이를 행(行)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屬)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命)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고(告)하였어도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順從)치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가서 우거(寓居)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饑饉)과 염병(染病)에 죽을 줄 분명(分明)히 알지니라(렘 42:19-22)

 

한 번 중심을 잃은 팽이는 어지럽게 맴돌다가 결국은 자빠지고 만다. 외발로 서서 잠을 자듯 중심을 잡고 있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어찌 팽이만 그럴까.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 중심을 잃으면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나라를 빼앗기고 신앙의 중심이 무너지자 유다는 크게 흔들린다. 바빌로니아가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세운 그달리야와 그달리야 주변의 사람들을 죽인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암몬으로 넘어가려 하였다. 끌려가던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요하난에 의해 겨우 구조될 수가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온다.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부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도였다. 주님께 기도하여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알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묻는 것, 그것이 기도일 것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자 그동안 무시하고 괴롭혔던 예레미야를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가볍고 안쓰럽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기도하겠노라고,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모두 알려주겠노라고 대답을 한다. 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여도 그를 위한 기도를 끝내 멈추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그랬을까, 다급해서 그랬을까,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은 약속을 한다.

 

“진실하고 신실한 증인이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맹세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예언자님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예언자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시는 말씀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언자님을 주 우리의 하나님께 보내는 것은, 그분의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42:5-6, 새번역)

 

응답이 좋든지 나쁘든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한다. 그것이야말로 기도를 하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일 것이다. 응답이 맘에 들면 따르고 맘에 안 들면 따르지 않는, 그것은 기도하는 이의 자세일 수가 없다.

 

백성들이 요구했던 기도의 응답은 열흘 뒤에 임했다.(7) 다급했던 백성들의 심정대로라면 열흘이라는 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럴수록 예레미야는 열흘 동안 기도하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렸을 터, 그의 마음은 온통 주님만을 향했을 것이다.

 

기도하는 이들은 기다려야 한다. 영혼의 예민한 안테나를 주님을 향해 곧추세우며 주님이 대답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이 얼마든,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든 주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 사정이 급하다고, 응답이 더디다고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응답을 어떻게 받았을까? 약속을 한 대로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든 그대로 따랐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수를 하고 만다.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20, 새번역)

 

실수 중에는 얼마든지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실수가 있다. 애교로 보아줄 수 있는 실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실수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치명적인’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돌이킬 수 없는’ ‘만회할 길이 없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대체 무엇을 두고 치명적인 실수라 하는 것일까?

 

백성들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러분의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21, 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따르지 않는, 바로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기도의 응답을 들었으면서도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것은 가벼운 웃음으로 넘길 사소한 잘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그 응답을 무시하는 것,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돌이킬 수 없는, 만회할 길이 없는 치명적인 실수인 것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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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64)

 

흔들릴수록 중심에 서라

 

모압과 암몬 자손(子孫) 중(中)과 에돔과 모든 지방(地方)에 있는 유다인(人)도 바벨론 왕(王)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둔 것과 사반의 손자(孫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의 위에 세웠다 함을 듣고 그 모든 유다인(人)이 쫓겨났던 각처(各處)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葡萄酒)와 여름 실과(實果)를 심(甚)히 많이 모으니라 (렘40:11-12)

 

먼저 이야기를 했던 <소리새>라는 동화는 새터에 살던 새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에 없던 거센 폭풍우가 몰려왔을 때 새들은 모두 새터를 떠나고 만다.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지만 모든 나무가 쓰러지는 상황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새터에 살던 새 중에 소리새가 있었다. 몸뚱이도 작고 털의 빛깔도 우중충한, 한 마디로 볼품없는 새였다. 게다가 그는 노래도 잘 못했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새로운 노래를 신나게 불렀던 다른 새들을 두고, 소리새는 옛 조상들이 불렀다는 느리고 낮은 노래만을 고집했다. 그것도 반쯤은 쉰 목소리로.

 

어느 날 폭풍을 피해서 새터를 떠났던 새들이 새터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보니 새터의 나무란 나무는 모두 쓰러져 있었다. 새들 중에서 나이 많은 새가 새터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말했을 때, 모두들 깜짝 놀라게 된다. 모두가 같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새터를 떠날 때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새의 노래가 가슴 속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돌아온 것이었다.

 

새들은 소리새를 찾기로 한다. 산꼭대기에 이르러 거기 쓰러져 있는 한 나무에서 마침내 소리새를 발견했을 때 소리새 주변으로 몰려든 새들은 소스라쳐 놀라고 만다. 소리새는 뼈만 남은 채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놀랐던 것은 소리새의 발목이 가지 끝에 철사 줄로 동여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묶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이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소리새의 발목을 묶은 건 소리새 스스로가 한 일이었다. 소리새의 부리가 형편없이 부러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새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때 어디선가 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새의 노래였다. 새들은 소리새가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새터엔 소리새의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느라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소리새는 어디론가 다시 날아올랐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갈 때, 이스라엘 땅에 남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 퍼져간 이야기가 있었다.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빌로니아 왕이 그다랴에게 남아 있는 사람을 맡겼다는 소식이었다. 각처로 쫓겨났던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그다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폐허와 절망의 시대에 그다랴가 남아 있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된다.

 

그다랴가 백성들에게 이르는 말이 있다. 바빌로니아를 섬기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긴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의 의미를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다. 어떤 성읍에서 살든지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장하면서 살라 한다.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은 이스라엘 땅에서 나는 대표적인 농산물이었다.

 

곧 회복될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에 빠져서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지 말고, 혹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삶을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뿌리를 내리며 희망을 저장하라고 한다.

 

그다랴의 말 중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 있다. 자신은 미스바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이다.(40:10) 그다랴가 머물겠다고 밝힌 곳이 미스바다. 미스바! 그다랴가 택한 곳이 미스바였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미스바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린 곳이다.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이 공격을 하러 왔을 때, 기도로 블레셋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벤에셀이라는, 주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왔다는 의미를 담아 ‘도움의 돌’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이 미스바였다.(삼상 7:12)

 

미스바의 의미를 그다랴는 알고 있었고, 그 어려운 때 자신들이 머물 자리와 자신들이 취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선택한 결과가 미스바 아니었을까?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다랴가 미스바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미스바로 모여든다. 그들은 새로운 총독 그다랴가 택한 한 지역으로 모여든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회개의 자리로 모여든 것인지도 모른다!

 

혼란과 아픔과 절망으로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누군가 중심이 되는 사람이 필요하다.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중심과 구심점, 그것은 어느 시대이든 기도와 회개 아닐까.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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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3)

 

끝내 떠날 수 없는 땅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百姓) 중(中)에서 그와 함께 거(居)하니라”(예레미야 40:6).

 

동화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전라남도 광주, 그 외곽에 있는 송정리, 그곳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평동이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105미리 대포를 쏘는 포대였다. 상무대에서 이론 교육을 받은 이들을 위해 실제로 포를 쏘아줌으로 측지, 사지, 사격명령 등 실제적인 훈련을 받게 하는 부대였다.

 

부대 안에는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예배당이 있었다. 독립대대, 군종장교는 따로 없었다. 포다리라 불리는 포병생활과 함께 군종 역할을 맡은 나는 매주 한 번씩 광주 시내로 나가 교회를 섭외하는 일을 해야 했다. 주일 오후에 부대를 찾아와 예배를 드릴 목회자와 교회를 찾는 것이 빠뜨릴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일을 일찍 마친 어느 날 우연히 광주 계림동 헌책방을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권정생의 동화집을 만나게 되었다. ‘강아지똥’이 담겨 있는 동화집이었다. 동화가 참으로 좋은 그릇이라는 것을 권정생, 이현주, 윤기현 등의 동화를 읽으며 배우게 되었다.

 

동화는 쉰 살이 넘어야 쓰는 것이라는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고 스케치 하듯이 글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처음으로 쓴 동화 ‘소리새’였다. 한 신문사에서 동화를 공모하는 일이 있었고, 내가 쓰는 것도 동화일까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보낸 ‘소리새’가 당선작이 되었다.

 

끝내 우리가 떠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면 내 나라 이 땅과 인간다움이라는 곳 아닐까 싶다고, 당선소감의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썼다. 오래 전 일이지만 떠나지 말아야 할 곳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멸망이 찾아와 백성들이 사슬에 묶인 채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고 있을 때, 예레미야도 그들 중의 하나로 끌려가고 있었다. 백성들과 똑같이 손에 사슬에 묶인 채 끌려간다. 백성들에게 주님의 뜻을 외치는 삶을 살았지만 막상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자 고난 받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 말씀을 외친 뒤 위험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끌려가던 중 라마라는 곳에서 바빌로니아 군사령관인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발견하고 예레미야를 풀어준다. 예레미야가 물웅덩이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를 꺼내준 것은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었다. 낯선 일이다.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구한다. 동족은 하나님의 사람을 버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람을 건진다.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에게 말한다.

 

“그대의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 곳에 이런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대로 하셨소.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신 것이오. 그대들이 주님께 죄를 짓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들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보시오. 내가 지금 그대의 두 팔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 주겠소. 그대가 만일 나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면, 함께 가십시다. 내가 그대를 보살펴 주겠소. 그러나 나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소. 이 땅 어디든지, 그대가 보기에 적당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 곳으로 가시오.”(2-4) <새번역>

 

당신들은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죄를 지어 재앙을 당한 것이라고, 주님의 백성들이 이방 사람에게서 꾸중을 듣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함부로 성(聖)과 속(俗)을 구별할 일은 아니지만, 속(俗)이 성(聖)을 판단하고 걱정하는 딱한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에나 반복되지 싶다.

 

바빌로니아 군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고마운 제안을 한다. 어느 편을 택하든지 예레미야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면 자신이 기꺼이 보살피겠다고, 아니면 유다 땅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것이다. 이미 바빌로니아 왕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라고 지시를 내린 일이 있다.(39:12)

 

선의를 베풀되 강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배려다. 이방인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바빌로니아 군사령관의 제안을 들은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남기로 한다. 바빌로니아 왕이 안전과 편안을 보장한 것이기에 예레미야로서는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이 더 편하고 안정적인 삶일 수 있었지만, 망한 나라에 남아 실의에 빠진 백성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편을 택한다.

 

남기로 한 예레미야를 위해 군사령관은 양식과 선물을 주어 예레미야를 돌려보낸다. 예레미야는 미스바로 돌아가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중에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는 백성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민’(39:10)뿐이었지만, 예레미야는 그들과 함께 살기로 한다.

 

“예레미야는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찾아가, 그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는 동족과 더불어 살았다.”<새번역>

 

“예레미야는 아히캄의 아들 게달리야를 찾아 미스바로 가서 고향에 남은 백성과 어울리며 게달리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냈다.”<공동번역>

 

끝내 떠나서는 안 될 땅이 있다. 함부로 등질 수 없는 땅이 있다. 그 땅에 남아 그곳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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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2)

 

비참한 말로

 

“바벨론 왕(王)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目前)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王)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貴人)을 죽였으며 왕(王)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結縛)하였더라”(에레미야 39:6-7).

 

독일 속담 중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이다’(Ende gut, alles gut)는 속담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가벼운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속담을 보면 ‘끝만’이 아니라 ‘끝이’다. 끝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끝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할 터이지만, 무엇보다도 끝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좋게 시작을 했다가 좋지 않게 끝나는 일들이 적지가 않다.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선한 동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거니와, 좋은 말잔치로 시작을 했다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끝나는 경우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을 했다가 나중에는 좋지 않은 관계로 끝나는 경우들이 있다. 기쁨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아픔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누가 보아도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더없이 비참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신산고초(辛酸苦楚)를 겪어가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사람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이 넉넉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드기야 왕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다. 시드기야는 자기 백성들이 두려웠다. 백성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투항을 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바빌로니아에게 항복을 할 경우 바빌로니아 군대가 자신을 백성들에게 넘겨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럴 경우 백성들이 자신을 학대할 것이라고 시드기야는 생각했던 것이다.

 

시드기야의 모습이 불쌍하고 불행하다. 왕이 백성을 두려워하다니 말이다. 나라를 바로 이끌고 백성들을 사랑했다면 나라의 형편이 어찌 되든 무엇이 두려울까만, 시드기야는 자신을 백성에게 넘길 경우 백성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왕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자 예레미야가 말한다.

 

“그 사람들 손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소인이 전하는 야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래야 임금님의 앞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래야 임금님께서는 목숨을 건지십니다.” (38:20, 공동번역)

 

지금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만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인 일들을 나열했지만 왕은 끝내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왕은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며 함구할 것을 명한다.

 

시드기야의 결국이 어땠을까? 잊을 수 없는 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날을 이렇게 기록한다.

 

“시드기야 제 십일 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39:2, 새번역)

 

혼비백산 도망을 치던 시드기야는 여리고 평원에서 사로잡혀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오게 된다. 마침내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처형을 당한다.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아비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한 느부갓네살 왕은 마침내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버린다. 결국 시드기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들들이 죽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보다 더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말이 어디 있을까?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기 위하여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 앞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싶다.

 

주님의 뜻에 눈이 멀자 결국은 두 눈이 뽑히고 마는 시드기야,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 또한 비극 중의 비극, 한 사람의 말로가 이리도 비참할 수 있을까 싶어 몸서리가 쳐진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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