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6)

흩어져라! 흩어져!! 있는 듯 없는 듯

- 바벨탑 이야기 -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야훼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야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창세기 11:1-9).

1.

작년 11월 말에 한 주간 멕시코시티 장로교신학대학원에서 <구약성서와 설교>라는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다. 내가 서반아어를 못해서 통역이 도와주었다. 매일 오전에 강의하고 오후부터는 자유 시간이어서 통역해준 분과 멕시코시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말이 안 통하는 게 그렇게 답답한 일인 줄 몰랐다. 통역이 없으면 나는 완전히 귀머거리요 벙어리였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한 마디도 못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답답할 수 있을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기가 한량없었다. 손짓발짓으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말이 통해야 가능하더라.

20여 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유학 생각은 있었으면서 영어를 듣고 말하는 훈련을 전혀 안 했기에 처음엔 영어가 한 마디도 안 들렸다. 영어하는 사람 만나면 입이 얼어붙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진땀 흘린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어쨌든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게 됐다. 신대원 졸업 후 10년 만에 공부를 재개했으니 구약이니 히브리어니 다 잊어버린 건 둘째 문제였다. 교수의 강의가 거의 귀에 안 들어왔다. 종일 굶어도 배가 안 고팠고 화장실 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했던 거다. 외국여행을 하는 사람은 대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답답하고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타고난 능력의 부족을 탓해보기도 하고 잘못된 영어 교육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이를 해결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서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 영화를 보면 아직도 못 알아듣는 말이 많다. 귀가 이만저만 고생하는 게 아니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얘기에는 독특한 내용들이 많다. 여기엔 이동, 정착, 도시, 언어, 벽돌, 역청, 이름, 탑 등 문명을 상징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구약성서는 이런 문명 현상이 어디서 왔다고 말할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구약성서의 이해를 그대로 따라갈 이유는 없지만 그게 현대 문명을 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면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단순히 복고취향만은 아니란 얘기다.

2.

사람은 언제부터 언어를 사용했을까?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 거다. 언어 학자들은 기원전 3,000년 경, 지금부터 약 5,000년 전에 사람이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초의 문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자란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룩(Uruk)에서 발견된 문서로 기원전 3,100년 수메르어로 쓰였다. 앞으로 또 뭐가 발견될지는 모른다. 지금까진 그렇단 얘기다. 땅속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사람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이다. 그게 언젠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벌거벗고 도끼 들고 사냥하러 다녔을 때도 말로써 의사소통을 했다.

바벨탑 얘긴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원역사(Ur-history)를 마무리한다. 이 얘긴 널리 알려져 있고 고대 중동 문명권에 비슷한 얘기도 여럿 있다. 학자들은 이 얘기의 직접적인 배경이 메소포타미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구라트’라고 말한다.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 여러 도시에 있었던 탑 모양의 건축물로서 꼭대기에 신전이나 제단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종교적 기능을 가진 건축물로 추측된다. 성서의 바벨탑 얘기엔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얘기는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는 말로 시작된다. 모든 민족이 노아 후손에게서 비롯됐다고 서술하는 창세기 10장과 더불어 이 얘긴 인류가 본래는 동질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가나안에서 보면 메소포타미아는 동쪽에 있고 ‘시날’은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이 동쪽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면 그 배경은 기원전 2,000-1,500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는 민족의 대이동이든지, 아니면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귀환했던 시기였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얘길 훨씬 후대인 바빌론 포로 생활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원역사엔 ‘동쪽’이란 말이 세 번 나온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3:24) 나오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거주한 놋이란 곳이 에덴의 ‘동쪽’이라고 했을 때 나오며(4:16), 그 다음이 여기다. 앞의 두 경우가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됐으므로 이제 벌어질 사건도 그럴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들은 시날 들판에 자리 잡고 탑을 쌓기로 결정했는데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라고 하여 탑을 어떻게 쌓을지 밝힌 게 눈이 띤다. 왜 탑의 재료가 뭔지 밝혔을까? 건축 업자를 대상으로 한 글도 아닌데 말이다. 이것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건축 재료로서 돌과 진흙을 사용한 건축물보다 진보된 방식이고 내구성도 뛰어났단다. 얘기의 배경이 메소포토미아의 발달된 문명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일 수 있겠다.

하지만 초점은 건축 재료보다는 왜 탑을 세웠는지에 맞춰져 있다. 그 답은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라는 데서 볼 수 있다. 탑을 세우기 전에 그들은 먼저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았다. 하지만 설화자는 도시엔 관심 없고 탑에 초점을 맞춰서 얘길 진행한다. 탑을 쌓은 목적이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고래(古來)로 이 이야기의 이해를 가로막는 문제는 이게 왜 잘못이냐는 것이다. 왜 하느님은 이에 대해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을까? 도시를 세우겠다는 생각이 그랬나? 탑을 쌓겠단 생각이 그랬을까?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지 않았다면 문제없었을까? 이름을 날리려 했던 ‘교만’이 문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으려 했던 게 하느님을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가장 그럴듯하지 않은 건 도시를 세웠다는 것이겠다. ‘도시’란 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누구나 했던 것이니 말이다. 여기서 도시가 당시 바빌론에 존재했던 ‘메트로폴리스’를 가리킨다면 이스라엘이 거기서 뭔지 모를 ‘죄악’의 기운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도시에서 살아왔으니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그 다음은 ‘탑’이다. 이게 보통 탑이 아니라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려는 탑 아닌가. 우선 궁금한 건 그들은 하늘이 얼마나 낮다고 여겼기에 탑을 쌓아 거기 닿으려 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에겐 터무니없이 유치한 발상이라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데 과연 그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을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들은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해와 달과 별들이 얼마나 높이 떠있는지 몰랐으니 높이 탑을 쌓으면 하늘에 닿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레고리 라일리(Gregory Riley)는 《하느님의 강 The River of God》에서 사람이 우주의 광대함과 하늘의 무한히 높음을 알게 된 게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 했다. 그걸 알게 된 후에 비로소 하느님이 거주하는 ‘하늘’이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추상적 ‘초월’(transcendence)을 의미하게 됐다는 거다. 하지만 이건 먼 훗날 일어날 일이고 얘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 사람들은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왜 그들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했을까? 그 목적이 뭐였을까? 하느님을 보고 싶어서?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서 듣고 싶어서? 고대 해석자들 눈에는 그게 긍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와 같은 ‘순수한’ 동기에서 탑을 쌓았다면 왜 하느님 심기를 건드렸겠느냐는 거다. 그들은 하느님을 공격하거나 그 영역을 침범하려고 그랬다고 이해했다. 텍스트에는 ‘공격’을 암시하는 단서가 없다. 다만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했을 뿐, 공격이나 침범을 가리키는 얘기는 없다. 하지만 희년서, 바룩 3서 등은 그렇게 해석했다. 심지어 필로나 타르굼 네오피티(Targum Neophyti, 구약성서 아람어 번역 중 하나)는 그들이 하느님과 ‘전쟁’을 벌이려 했다고 봤다. 어떻게든 텍스트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해석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그들은 왜 자기들 이름을 내려 했을까? 텍스트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마치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하지만 우린 알 도리가 없으니 추측할 따름이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라고 한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 전에 먼저 내가 날 알려야 하는 시대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력서에 한 줄 넣으려고 스펙 쌓기에 열중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고 해외연수도 다녀와야 하며 이름난 회사에서 인턴 경력도 쌓아야 나중에 좋은 직장을 얻는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을 수 있지만 요즘은 이름 날리는 게 미덕이다. 옛날엔 하느님이나 남을 높이고 자길 낮추는 게 미덕이었다. 하지만 옛날이라고 해서 이름 날리는 게 하느님을 그 정도로 염려하게 만들었을까? 텍스트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것이 흩어지지 않으려 했다는 거다. 어렸을 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요즘은 “진보는 분열 때문에 망한다”는 말을 더 많이 듣는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모두 총화와 단결을 강조한다. 문제는 왜, 뭘 위해서 뭉치는가, 모든 분열은 다 나쁜 건가, 부득이 흩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등에 있겠다.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에 늘 위협받으며 살던 고대인에게 뭉치고 단결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왜소하고 나약했으니 집단을 이뤄서 살아야 생존할 수 있었다. 흉년이 들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때도 뭉쳐야 했다. 주거지 이동은 목숨 건 모험이었으니 생존을 위해선 뭉치는 게 필수적이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었다.

그런데 이게 왜 하느님을 화나게 했을까? 도시를 만들고 탑을 세워 그걸 중심으로 뭉치겠다는 사람들의 행위가 왜 하느님을 불편하게 했을까? 하느님 중심인 신본주의가 아니라 자기들이 세운 탑을 중심으로 삼겠다는 인본주의 때문이었나? 그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거였나? 아쉽게도 텍스트는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출처: http://www.visualbiblealive.com)

3.

하느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지켜보고 진상을 파악한 후 행동을 개시한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문제의 뿌리엔 사람의 ‘동질성’이 있다고 판단됐다. 이게 왜 문제일까? 인류가 한 백성이고 같은 말을 쓰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러면 어딜 가서 누굴 만나도 소통문제는 없을 거 아닌가. 멕시코에 가도, 러시아에 가도 말이 안 통해 답답하진 않을 거 아닌가 말이다. 언어가 같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더 평화롭지 않을까. 별 생각 다 들지만 모두 가정일 뿐, 모두 한 백성이고 언어가 하나라면 세상이 어떻게 됐을까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이 문제다. 하느님은 사람이 한 백성이고 같은 말을 쓰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누가 이 말을 했나 하면 탑을 쌓은 자들도 아니고 설화자도 아니고 하느님 자신이다. 사람이 하려고만 하면 하느님도 못 막는단 말을 다름 아닌 하느님이 했단 거다! 하느님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선언했다! 사람이 하나 되어 소통하며 탑을 쌓으면 하느님도 못 막는다는 얘기다.

이 얘기 전체를 끌고 가는 주제가 뭘까? 오랫동안 학자들은 이 얘기를 하늘에 닿으려 탑을 쌓은 사람들의 ‘교만’과 ‘신성모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했다. 오랫동안 이 얘기의 메시지는 그렇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요즘은 이 해석을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했다는 대목을 과잉 해석한 걸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걸 이 애기의 중심메세지로 받아들이기엔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거다. 게다가 하느님이 탑을 무너뜨렸다는 얘기가 없는 것도 교만이나 신성모독이 중심메시지가 아니란 해석의 간접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게 그토록 문제였다면 파괴하지 않았겠느냐는 거다.

다신교에선 신과 사람 사이를 나누는 경계선이 불분명하다. 신이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사람이 신처럼 행동하기도 하는데 그게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일신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유일신교에서도 신을 사람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람이 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은 엄격히 금한다.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다는 얘기다. 신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건 괜찮지만 사람이 신처럼 해선 안 된다. 그런데 사람이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다. 이를 보고 하느님은 사람이 하려고만 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는데 이는 탑을 쌓은 게 ‘하려고만 하면 못할 게 없는 걸’ 보여준 본보기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탑을 쌓은 걸 보니 이제 앞으론 ‘하려고만 하면 못할 게 없는 걸’ 알게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탑을 쌓은 게 물론 반가운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지만 얘기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심주제는 아니라 하겠다.

그래서 “우리(하느님과 천사들)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 대목을 원인론적(aetiological)인 얘기로 읽어왔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왜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만들어낸 얘기로 읽어왔다는 거다. 언어학자들이 들으면 실소할 얘기다. 세상에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는 이유가 이렇게 단순할 리 없거니와 이토록 단숨에 이뤄진 것도 아니다. 언어의 분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다양한 경로를 거쳐 벌어진 현상이다.

그럼 이 얘긴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걸까? 하바드대학에서 은퇴한 제임스 쿠걸(James Kugel)은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How to Read the Bible: A Guide to Scripture, Then and Now》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선 혼란된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카디아어, 히브리어, 아람어 등 셈어(Semitic languages)를 가리킨다고 말이다. 이들 언어를 배워본 사람은 무슨 얘기인 줄 짐작할 게다. 이들 언어는 본래 한 가족이었다. 동일한 뿌리에서 파생돼서 각자 다른 경로로 발전해왔다는 말이다. 이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의 관계와 비슷하다. 스페인어를 알면 포르투갈어도 어느 정도는 안다. 한 히브리어 단어의 뜻을 모를 때는 같은 어원의 아카디아어를 참조해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게 통하지 않아 낭패 보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좌우간 이 얘기는 다양한 언어의 존재를 ‘축복’이나 ‘다양성’으로 긍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징벌’이나 ‘방지책’으로 보고 있음은 분명하다.

온 세계가 하나의 촌락인 것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가리 나눠지고 찢어져서 바야흐로 ‘소통’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된 요즘은 이 얘기를 소통불능에 대한 얘기로 이해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006년 영화 <바벨>은 제목을 창세기 11장 바벨탑에서 따온 게 분명하다. 이 영화가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걸 보면 감독은 바벨탑 얘기가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고 이해했음에 분명하다.

자식을 잃고 맞은 위기를 타개해보려고 리처드와 수잔 부부는 모로코로 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한 양치기 소년이 장난으로 쏜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한다. 영화는 이 작은 사건이 몇 개 대륙에 걸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렇게 그물망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세계가 동시에 심각한 소통부재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처드 부부와 동승한 관광객들은 필경 이 총기사건이 국제분쟁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하지만 수잔이 맞은 총은 한 일본인이 모로코이 사냥하러 왔다고 모로코인에게 선물로 주고 간 총이었다. 국제분쟁이나 테러와는 아무 상관없는 우연한 사건이었던 거다.

한편 리처드와 수잔 부부가 일정대로 귀국하지 못하자 미국에 있는 그의 집안에도 문제가 생겼다.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는 유모가 자기 고향 멕시코에서 열리는 동생 결혼식 참석에 차질이 생긴 거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리처드 부부의 딸을 데리고 멕시코로 간다. 아이만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내려가는 것 어렵지 않지만 반대로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올라오는 것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합법적인 서류를 갖고 있어서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미국 국경관리는 백인 여자아이를 멕시코 여자가 데리고 있는 걸 수상히 여겨서 조사를 하는 동안 유모의 동생은 달아나고…. 영화는 이렇듯 모로코에서 생긴 작은 총기사고에 많은 일들이 얽혀 있고 그게 어떻게 악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소통장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통의 문제는 분명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요즘은 너도나도 소통을 얘기하지 않는가. 그리고 바벨탑 얘기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교만이나 신성모독이 얘기 전체의 중심 주제는 아니듯이 소통의 문제도 전체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물론 현대인에게는 가장 심각한 주제일 수 있지만 말이다.

4.

그럼 얘기 전체의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뭉치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흩으려는 하느님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얘기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띠는 단어는 ‘흩어지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푸츠’다. 이 동사는 아홉 절로 이루어진 얘기에서 세 번이나 등장하는데(4, 8, 9절)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곧 탑을 쌓으려는 목적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다고 할하고, 이에 대해 하느님은 언어를 혼란시켜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졌다’는 것이다. 단어의 빈도수가 반드시 내용을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중요한 자리에 이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에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뭉쳐야 할 이유가 분명치 않거나 힘 있는 소수를 위해 다수더러 뭉치자고 주장한다면 그 의도를 의심하는 게 맞다. 소수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와 같다고, 그게 공동선이라고 호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힘없고 가난해서 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협하고 사회분열을 조장한다는 죄 아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흔하다. 권력자들은 대중을 가능한 한 흩으려고 애써왔다. 분할해서 통치하는(divide and rule) 전략이 그것이다. 중산층과 서민을 나누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고 남자와 여자, 내국인과 외국인을 분리하면 쉽게 통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뭉쳐도 문제요 흩어져도 문제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일종의 양비론인데 이건 힘 있는 자들의 전략일 뿐이다. 과연 뭉쳐도 문제, 흩어져도 문제일까? 바벨탑 사건은 그걸 말하려는 걸까?

하느님은 흩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좋지 않게 여겼다. 진짜 문제는 도시를 만든 것도,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했던 것도, 교만하게 이름을 내려 한 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흩어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관심은 거기에 맞춰져 있다. 언어를 혼란시킨 것도 이를 위해서다. 왜였을까? 왜 하느님은 흩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굳이 흩으려 했을까? 아쉽지만 텍스트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원역사 전체를 살펴봤는데 거기서 ‘흩어짐’이 일관된 흐름임을 찾아냈다. 하느님은 1장 28절에서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했는데 사람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여 세상으로 보냈다. 흩을 준비를 한 거다. 홍수 후엔 노아의 세 아들과 그 후손들이 온 땅에 퍼졌다. 창세기 10장에는 그렇게 퍼진 노아 후손의 족보가 전해진다. 바벨탑 얘기는 바로 그 다음에 나온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오다가 시날에 도착해서 거기서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세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쌓기 전엔 ‘이동’하고 있었다. ‘흩어지고’ 있었던 거다.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그들은 흩어지고 있었다. 곧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시날에서 멈췄다. 거기서 도시를 건설했고 탑을 쌓았다. 흩어지기를 중단한 거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이들을 하느님은 어떻게 했나? 죽였나? 아니다. 탑을 무너뜨렸나? 그것도 아니다. 다만 하느님은 그들을 다시금 흩었다! 하느님은 그들은 흩었을 뿐이다. 시날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들이 해오던 일을 계속하게 했을 뿐이다. 한 백성이고 언어가 같으니까 흩어지기를 멈추자 그걸 못하게 하려고 언어를 혼란시켜 흩어버린 거다.

그 동안 이 얘긴 뭉침과 흩어짐의 대립이라는 틀 안에서 읽혀왔다. 한 백성이 여러 백성이 됐고 하나의 통일된 언어가 혼란스런 여러 언어가 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람은 뭉치려 했는데 하느님은 흩으려 했다는 거다. 그런데 얘길 잘 읽어보면 뭉침과 흩어짐이 대립하는 게 아니라 정착과 흩어짐이 대립한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이동하기/흩어지기를 바라는데 사람들은 그걸 거부하고 도시를 짓고 탑을 쌓아 정착하려 한다는 게 문제란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강제로 그들을 흩었다.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고 언어를 혼란시키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는 게 잘못이란 얘기가 아니다.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공동체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공동체를 이루고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창조됐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게 좋지 않아 하느님이 하와를 창조하지 않았나. 그 공동체가 뻗어나가지 않고 정착하려 했던 게 문제였다. 흩어지란 말은 개별적으로 살라는 뜻은 아니다. 공동체를 이뤄서 뻗어나가란 뜻이다. 뻗어나가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이다.

5.

‘흩어지는 교회’가 교회에서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던 때가 1960-70년대였으니 4-50년 전의 일이다. ‘모이는 교회’가 전부는 아니란 얘기였다. 교회는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 듣고 친교하는 공동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흩어져서 미션을 행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거다. 요즘은 ‘미셔널 처치’라는 말을 쓰던데 그게 ‘흩어지는 교회’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큰 차이는 아니라 여겨진다. 바벨탑 얘기를 ‘흩어지는 교회’라는 시각으로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로 바벨탑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통’이 뭔가 하는 점을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들이 탑 건설을 중단한 것은 하느님이 언어를 혼란시켜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언어 소통 이상의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진정한 소통이 뭔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언어로 말하는데도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나와 네가 소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귀라는 감각기관으로 소리라는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걸 뇌로 전달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여러분도 “쉐마 이스라엘!” 곧 “들어라, 이스라엘아!”란 말을 들어봤을 거다. 신명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용한 관용구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다는 건 발언된 말은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화자에 대한 진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선언되는 말이 가져올 새로운 현실에 자신을 개방하고 스스로 변화할 준비를 갖추는 걸 뜻한다. 진정한 소통은 언어적 소통을 뛰어넘어 심적 소통과 영적 소통까지를 의미하는 것일 게다.

둘째로 이 얘기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사건의 패러디다. 바벨탑 사건에서 하느님은 언어를 혼란시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했지만 오순절 사건에서는 반대로 성령의 은혜로 제자들은 방언을 말함으로써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소통했다. 바벨탑 사건이 말문이 막혀 탑 쌓는 걸 중단하고 강제로 흩어진 사건이라면 오순절 사건은 막혔던 말문이 뚫리고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져 소통이 이루어진 사건이다. 이로써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 흩어지는 공동체가 되었다. 바벨탑 때처럼 강제로 흩어진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흩어졌던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일방적으로 모이는 데 치중해왔다. ‘성장’이란 이름으로 그걸 정당화해왔다. 그 때문에 교회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지탄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는데 교회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좀처럼 바뀌려 하지 않는다. 한국출신 선교사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어떤 나라 교회보다 한국교회는 타국에 선교사를 내보내는 일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고 이태석 신부 같은 선행으로 칭찬을 받는 개신교 선교사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보이지 않는 데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 애쓰는 선교사들이 있지만 대개는 수 세기 전 서구교회가 해왔던 제국주의적 선교를 계속 하거나 선교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아 교인숫자라는 실적을 늘리는 데 열중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대형교회에는 쪼개서 몸집을 줄이는 일이 유행처럼 벌어졌다. ‘분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런 행태에 대해서도 비난과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 변형된 형태의 교세확장이란 거다.

이런 상황에서 바벨탑 얘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뭘까?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오만이 됐든 인위적인 수단으로써 하느님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됐든 탑을 쌓는 건 올바른 일이 아니다. 스스로 녹아 없어져서 물 전체를 짜게 만드는 소금처럼,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지만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사회 곳곳에 흩어져서 있는 듯 없는 듯 예수의 복음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그게 흩어지는 교회가 됐든 미셔널 처치가 됐든, 아니면 뭐가 됐든 사회 속으로 흩어져 사회 전체를 짜게 하고 부풀게 하는 역할을 우리더러 하나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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