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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

한국 신학계에 ‘첫 새벽’(원효)은 가능하겠는가?

by 한종호 2015. 3. 29.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4)

 

 한국 신학계에 ‘첫 새벽’(원효)은 가능하겠는가?

 

 

지난 글에서 한국 신학계에 원효란 인물이 배출될 수 있을까를 물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선 원효(617~686)란 인물은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러나 예서 다룰 것은 원효의 전부가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한 마음’(一心)으로 대표되는 그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비롯하여 107종 231권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저작물(지금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대략 20여 종에 머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다.)을 짧은 지면 안에 담아내기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사 여건이 된다하더라도 그 일을 할 만한 깜냥이 내게는 없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선택이란 원효란 인물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 정도일 것이다.

 

우선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이름이다. 원효란 글자 뜻은 ‘으뜸이 되는’(元) ‘새벽’(曉)이다. 아마도 원효는 자신의 이름에 ‘첫 새벽’이란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삼국유사》의 저자로 알려진 일연(一然, 1206~1289)은 원효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연고를 “부처의 지혜광음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으로 풀고 있다. 그의 해석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원효는 무언가의 첫 번째가 되고자 했던 의지를 자신의 이름에 담고 싶었던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원효는 압량군 불지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 행정 구역으로는 경북 경산에 속한다. 그가 속했던 설(薛)씨 가문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에 살고 있던 6촌 성씨 중 하나로 성골, 진골 다음으로 6두품에 속했다. 그가 태어나던 시대는 한반도의 3국이 서로 힘겨루기가 극에 달하던 때였다. 따라서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던 조금은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정국의 한 복판에서 생을 시작한 것이 바로 원효란 사내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15세 무렵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후 한곳에 머물지 않고 두루 다니며 수학했으며, 공부의 폭도 불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유교와 노장까지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지 100여 년 되었을 때였다. 신라에 들어온 불교는 처음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지배층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고유한 샤머니즘 신앙에 기초한 여러 호족 세력을 잠재우고 왕이 전권을 갖는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교의 여러 개념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 고대 인도의 이상적인 왕을 지칭하는 명칭임. 싯다르타 탄생 시 출가하면 부처가 되고, 속세에 머물면 전륜성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았다고 전해짐)이라는 개념이 그랬다. 이 땅의 왕은 그렇게 저 세상 부처의 강림 내지 아바타가 되었으며, 대중은 왕의 권력이 천상의 세계에 기인한다고 철석처럼 믿도록 교화되었다. 그렇게 불교는 지배층의 종교로, 신라의 국력신장을 위한 훌륭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력집중의 도구가 아닌 종교요 가르침의 대상으로 불교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 역시 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적지 않은 인물들이 불교사상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불교의 부파를 공부하고 돌아와 저마다 진리라 생각하는 가르침의 요체를 설파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고상하고 위엄 있는 지도층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승이든, 소승이든, 유식이든, 화엄이든 간에 대다수 민중들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집중할 수도 없는 신선들의 놀음이었고, 가진 자들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하나의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일반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는 어렵고 이해하기 곤란했던 것이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 신라의 모습이었다.

 

이때 원효는 우선 불교의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사실은 하나의 진리로 향하고 있음을 힘주어 설파한다. 그것이 바로 ‘한 마음’이며, 이를 통해 다양한 불교의 종파적 논의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 ‘화쟁사상’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불교사상의 ‘수평적 이해’이다. 원효 이전 불교의 사상적 논의를 지난하게 끌고 갔던 것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이는 불교의 여러 경전을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단계별로 줄 세우는 일종의 해석학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전과 교리가 부처의 본 가르침에 더 가까운 가에 따라 단계와 순위를 결정짓는 이 운동은 결국 불교의 교리를 ‘수직적 구조’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교상판석(교판이라고도 불림)의 자리에 도저히 낄 형편이 못되었던 대다수 중생들에게 불교의 교리는 스스로 깨우칠 수 없는 저 천상의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원효는 불교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그 유명한 ‘땅막 사건’을 통해 그의 삶 속에 강하게 간섭해 들어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효는 45세 나이에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두 번째 유학의 길에 들어선다. 당시 백제 땅을 지나 바닷길을 통해 당으로 들어가려던 원효는 비오는 밤을 맞아 근처 땅막(土龕)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밝은 빛 아래 자신들이 밤을 보낸 곳이 땅막이 아니라 무덤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다시 땅막이라 생각했던 무덤가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게 되었는데, 땅막인줄 알았을 때는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는데 그곳이 무덤이라 생각하니 제대로 잠이 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기나긴 뒤척임 속에서 원효는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결국 땅막이나 무덤을 가른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음을 증득하면서 유학을 포기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더 깊이 새겨나갔다는 이야기이다.

 

원효의 이 체험은 결국 불교의 교리를 대중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거기에 요석공주와의 스캔들까지 끼어들면서 결국 환속한 원효는 더 깊숙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무애무(無㝵舞)를 춰가며 불교의 가르침을 쉽고 단순하게 민중에게 설파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본격적으로 민중의 세계 속에 생활 종교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원효는 그 이후 70까지 여생을 보내며 자유로운 불자로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실 이렇게 역사 속에 화석화된 원효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처럼 우리의 호기심과 관심을 집중시킨다. 하지만 그가 지금 바로 우리 옆에서 활동하는 동시대인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전문 종교인이 한 여성과 스캔들을 벌이며 혼외 아들까지 두었다면. 그리고 대학의 교수까지 지낸 이가 어느 순간 랩을 읊으며 사람들과 뒤섞여 춤을 추고 상스런 단어를 뇌까리며 저잣거리의 가십거리가 되고 있다면. 이를 한국 개신교 세계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천재소리를 들으며 상당한 정도의 학문적 성과를 내던 신학대학의 한 교수가 갑자기 어느 날 묘령의 여성과 썸을 타더니 급기야 아이까지 낳게 하고, 그 이후 학교를 때려치우고 나와 이곳저곳 광장을 돌아다니며 허락받지 않은 회중 설교를 해대고 죽는 날까지 상당한 정도의 신학서와 성서주석서를 임의로 펴냈다면… 과연 교회는 그를 무어라 평할까?

 

이렇게 본다면 대단한 것은 원효가 아니다. 원효를 원효로 받아들인 신라 사회와 그 시대의 불교계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인가 이순신 장군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강연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이순신이 대단한 군인이고 지략가였고 원칙주의자였음은 분명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좌천되고 옷까지 벗겨진 그를  삼도수군통제사의 위치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준 유성룡을 비롯한 그의 동료와 벗들이요,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 조선이라는 사회가 가진 여유와 넉넉함, 그리고 관용이었다고!

하여 나는 다시 묻는다. 과연 한국 신학계에 ‘첫 새벽’(원효)은 가능하겠는가?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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