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22)

 

‘그분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

 

 

인간의 목숨은 언젠가 끝이 있습니다. 몸은 늙고 더는 기운이 없어 무너져 갑니다. 그 몸에 담아 둔 영혼은 그래서 몸에 더 이상은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살아생전 몸이 태어나 자라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영혼도 함께 자라나고 변모하지만 몸에 끝이 오면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 이후 그 영혼이 계속 성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몸과 더불어 자란 만큼만 성장해서 그 영원한 운명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의지하자면, 그 다음에는 지금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을 입고 살아갈 테니 역시 영혼도 새로운 차원의 성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간은 바로 그 새로운 몸과 만나는 준비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않고 낡지 않으며 병들지 않고 고단하지 않는 그런 몸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아프고 때로 괴롭고 때로 다치면서 그 영혼도 함께 아프고 괴롭고 다치기도 합니다. 영혼이 몸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몸이 영혼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몸과 영혼의 불균형 상태가 지속되면 몸과 영혼 모두 비틀거리면서 헤매일 수 있습니다. 몸이 영혼을 돕고 영혼이 몸을 도우면서 서로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정작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걸 경험하게 되면, 이 몸을 벗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설 때 새로 받을 몸과 우리의 영혼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기쁠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를 넘어선 차원에서 받게 되는 몸과 이생에서 길러진 영혼이 서로 만나 알아보고 함께 더불어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이물감도 없는 감격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새롭게 사는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몸은 주어지는데 그 영혼은 그 몸에 담아낼 수 없는 지경이라면 그 몸은 괴로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 괴로움은 그 영혼을 또한 힘겹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몸과 영혼의 불균형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듯이 살아가는 길을 깨우칩니다. 몸은 이 땅에 아직 속해 있으나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그 “아직도”와 “이미”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거리가 소멸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이 있게 되면, 우리는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의 시간이 낯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는 그 너머의 세계가 두려워지고 말 겁니다.

 

믿음의 깊이를 지닌 이들이 죽음 너머의 세계와 그 시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까닭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미 저 너머의 시간과 공간을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현실의 힘에서 자유롭습니다. 어떤 권력도 그들을 무서워 떨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유혹도 그들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궁지도 그들을 곤고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의 몸과 영혼으로 이미 살아가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죽음 너머의 세계를 향해 눈을 들어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이 주는 능력과 감격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세계가 존재함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이 현실의 장벽을 뚫고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부활의 능력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은 그런 세계가 현실이 되게 하는 축복과 능력입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신앙의 가르침은 그래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로 살아가라는 것이 또한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초월성을 말하게 되면 그건 마치 현실에서 벗어나 영 다른 세계에서 노니는 것을 말하는 듯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초월성은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는 능력이며, 그래서 초월의 세계가 주는 기운을 받아 현실이 그 기운에 의해 변모하도록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믿음이 강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던지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현실에서 이길 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살리라’ 하신 것도 이렇게 해서 그 진의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 너머의 차원에 눈뜨고 그 영원의 몸과 영혼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살아가는 이들은 그 어떤 현실의 조건에 마주해도 그에 사로잡히거나 흔들리거나 안주하지 않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의 사고가 도달한 차원은 예수의 장성한 분량이요, 그 장성한 분량은 죽음을 넘어선 초월성에 있음이며 그 초월성은 언제나 현실로 돌아와 그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펼쳐보이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치유의 능력을 보이실 수 있었고 이적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드러내실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죽음 너머의 세계로부터 오는 이 놀라운 생명력에 대한 감사와 축복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죽음 너머는 죽음이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곳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렇게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질 새 몸과 새 영혼의 존재로 매일 매일 힘차게 자라나시기를 빕니다. 교회는 그 믿음의 연습장이며 실천의 자리이자 그걸 현실에서 증거 하는 하나님의 터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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