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6)


모든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 하와 다시 읽기


한국의 모든 교회와 신학교에 묻고 싶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한가?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가?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가? 남자와 여자를 편 가르기 하거나 여성이 남성에게 적대적 감정을 갖도록 부추기거나 남성에게는 우월감을 여성에게는 열등감을 갖도록 조장하려는 질문이 아니다. 인류를 구성하는 남자와 여자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났으며 어떻게 사는가를 다시 생각해보기를 제안하는 물음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계와 하나님의 노동으로 태어난 인류는 하나님 입으로 “좋다”(창세기1:4,10,12,18,21,25,31)라는 말을 반복할 만큼 만족스러운 걸작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일궈진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리하도록 하셨다. 태생 자체가 하나님의 노동에 근거한 사람은(2:7)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능력을 부여받았고, 애정 어린 돌봄의 대리자가 되도록 명령 받았다. 태초부터 세상을 위해 청지기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은 하나의 성(性), 남성으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대표되었다(1:27-28).


그러나 인류의 첫 번째 여성 하와의 태생을 다룬 창조 이야기 시점부터 인류로 표현되는 ‘사람’(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처음 의도는 일부 전문적인 독자들(목회자들, 또는 신학자들)에 의해 오랜 역사 속에서 오독되곤 했었다. 감히 오독(誤讀)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류 최초의 여자에 대한 창세기 본문이 가부장제를 정당화시키는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창조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것을 옹호하는 본문으로 읽혀졌다. 더욱이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는 사람으로 읽혀 여자에게 악담이 가해졌고,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는 동등한 대리자가 아니었다. 그러면 창세기 본문이 과연 이것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우주적 관점에서 창조 이야기가 기록된 창세기 1장과 달리 2장의 창조 이야기는(2:4-25) ‘에덴’이라는 장소와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남자와 여자)의 창조,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 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에서, 인류를 일컫는 남성명사 ‘아담’(사람)은 여성명사 ‘아다마’(땅)의 티끌(개역개정, “흙”)로 만들어졌다고 묘사된다(2:7). 남성명사 ‘아담’보다 여성명사 ‘아다마’가 근원적인 우선권을 갖는 셈이다. 이것은 언어유희처럼 보이지만, ‘사람’(아담)의 근본은 여성명사 ‘땅’(아다마)에 있었다. 고대 언어의 형태와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치우침 없는 중립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남성보다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해석된 이유는 여성이 두 번째 창조된 존재로 읽혔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 개역개정) 말씀하셨다. 주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suitable helper”, NIV)이 없는 것을(2:20) 안타깝게 여기셨다. 주 하나님은 ‘그 사람’(“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셔서 ‘그 사람’에게 데려오셨다(2:21-22). 그러자 ‘그 사람’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후 자기의 배우자를 향한 인류 최초의 사랑 노래를 부른다(2:2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가 남자로부터 취해졌으니 여자라(2:23)


히브리말 여자를 뜻하는 “잇샤”는 남자를 뜻하는 “이쉬”의 여성명사다. 어휘 자체에 동등함이 내포되었다. 또한 하나님이 남자에게 주신 여자, “돕는 배필”을 직역하면, 한 쌍으로서 “그의 한쪽 조력자”라는 뜻이다. 곧 동등한 자격자(counterpart)로서의 배필이다. 여자가 남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드러낸 표현이다. 더욱이 ‘배필’로 번역된 말, “에제르”는 모세가 하나님 이름을 “엘리 에제르”(출애굽기18:4)라고 고백한 이후로도 오랫동안 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곳에서 발견되는 말이다(신명기33:7, 26, 29; 시편33:20; 115:10-11; 124:8; 146:5). 이렇듯 하나님은 인류 첫 사람의 혼인을 기획하시면서 남자보다 여자를 열등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여자를 남자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향해가지만, 창조의 완성은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때문에 창조의 절정과 완성을 향하는 과정에서 여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들 중 최후의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처음에 남자를 만드시고, 마지막에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이 둘의 만남은 시작과 완성의 만남이지 처음과 두 번째라는 부차적 관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유혹자로 생각하는 본문의 오독을 따져봐야 한다. 뱀과 여자의 대화 장면을 꼼꼼히 살펴보면 여자는 유혹하는 자가 아니다. 여자는 뱀의 유혹을 받은 인류의 첫 두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창세기 3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류의 타락을 묘사하는데, 주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 중에서 뱀이 “가장 간교했다”(개역개정, 3:1). 뱀이 “간교하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되었지만, 사전적인 본래 의미는 “통찰력이 있다”, “예리하다”, “영리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과 근접한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었던 셈이다.


들짐승들 중 가장 영리한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뱀의 생김새 묘사는 없다. 그러나 여자와 매우 정교하고 능숙한 대화를 나눈 것은 분명하다. 이 둘의 대화에서 유혹을 받는 결정적인 말은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3:4)라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뱀은 금지된 열매를 먹으면 전에는 못 보던 것을 볼 것처럼, 더욱이 선악을 아는 일에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해질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우려하시는 분처럼 말했다(3:5). 유혹의 본질은 하나님의 지시와 다스림 아래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그름의 근원이 되는 자율성이었다. 곧 자신이 법이 되는 것이다. 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고 남자와 여자는 순종과 거역사이에서 흔들렸다.


여자는 뱀의 말을 들은 후 동산 중앙에 있는 금지된 나무를 보니 먹기에도 좋아 보이고, 눈을 즐겁게 하고, 지혜를 획득할 만한 무엇이 있어보였다. 이때 여자는 그 열매를 따서 먹고, 옆에 있는 자기 남자(남편)에게 주었고, 남자도 먹었다(3:6). 이 결정의 주도권이 여자에게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뱀과 여자의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남자가 줄곧 옆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먼저 들었던(2:16-17) 남자는 여자와 뱀의 대화를 듣기만 했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 남자는 침묵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후 금지된 열매를 먹은 남자와 여자는 두려움, 부끄러움, 고립감을 느껴야했다. 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을 때, 주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부르셔서(3:7-10) 이유를 물으셨다(3:11). 이때 첫 사람은 책임감을 회피하는 발언을 한다. 그렇더라도 그는 여자의 유혹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좀 더 근원적이다. 남자의 말을 정확하게 읽으면, “나와 함께 하라고 당신이 주신 그 여자가 나무의 열매를 내게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3:12)라고 대답한다. 여자는 뱀의 유혹 때문에 먹었다고 답변했다(3:13). 뱀의 유혹이 있었지 여자의 유혹은 없었다. 인류의 첫 두 사람의 불순종은 공유된 것이었다. 어느 한 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끝내 주 하나님의 심판이 뱀과 남녀에게 내려졌다. 뱀은 흙을 먹고 기어 다니는 저주 아래 놓였을 뿐만 아니라 여자의 후손의 원수가 된다. 여자의 출산의 고통은 더 커졌으며, 사람에게 축복이었던 신성한 노동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이들 부부의 절대적 동등한 관계역시 손상을 입어 지배와 종속 관계로 뒤집혔다(3:16-19). 이때 ‘그 사람’은 자기 아내(여자) 이름을 ‘하와’(생명)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여자는 “모든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3:20).


남자와 여자의 지배 종속의 문제는 죄가 가져온 결과이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다. 불순종, 곧 반역이 가져온 죄의 영향력은 땅과 사람, 사람과 사람, 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상처를 입히고 비틀어 소외를 불러왔다. 죄는 인간이 다른 동료 인간을, 땅을, 나무를, 강을, 짐승들과의 ‘샬롬’을 파괴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관계로 뒤엎었다. 그러므로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이 가져온 갖가지 지배 종속 관계는 창조의 원래 목적대로 동등한 관계와 애정 어린 돌봄으로 회복해야할 기독교인의 임무이지 옹호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혹시 농담으로라도 창세기 본문의 오독으로 여성이 열등한 존재나 유혹하는 존재로 비하되지 않아야 하며, 지배와 종속관계로 묶이지도 않아야 한다.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공적인 일에서 단지 여성이라서 부당하게 차별당하는 일이나 오해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남녀차별의 문제를 넘어 돈이나 학벌로 계급화 된 요상한 사회구조, 특정지역 폄하,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 가하는 폭력 등등의 문제까지 그 무엇이든 동료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끊어내는 출발이기 때문이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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