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61)


문제는 ‘어떤 성품이 주도하는가’이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세기 21:9-10)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모계사회의 종식과 더불어 부차적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을 생산하는 존재였고, 인간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종속된 재산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구조화되었고 문명의 생리처럼 되어갔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사렛 예수의 선교는 그러한 이스라엘 문명의 여성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들끓었다. 여인들의 고난과 천대에 대한 그의 따뜻한 다가섬이 그런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선교가 그토록 힘 있게 전개되었던 것도 짓눌림 당했던 여성들의 신앙적 각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새로운 자아상을 구성해 가면서 잃었던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중대한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온갖 굳은 일들은 여성들이 떠맡으면서도 정작 교회의 진로와 책임있는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남성들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여성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무래도 현실타파적인 공격성이 전면에 조명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이 때로 거칠어지는 점은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면을 시비 걸어 여성운동 전체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 자체가 새로운 해방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일까? 핍박받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 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일체의 위상을 그대로 보장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사라와 하갈의 대립을 목격하게 된다.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인 여성 사라가 같은 여성인 하갈에게는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가혹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갈에게 최대의 적은 사라였고, 사라에게 최대의 적은 하갈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대립이 성차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사라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갈의 존재를 주변부로 축출한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보듯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아들 이삭을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는 여인 하갈에게 가혹한 종의 주인이며,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는 악랄한 원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여인들의 닮은꼴을 보게 된다.


“저 가난한 자들의 자식과 내 아이와는 이 시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소, 저 공부 못하고 지지리도 못난 놈들과 내 아이와는 이 사회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저 출신이 미미한 여자와 내 아이와는 결혼하여 우리 집안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감히 우리와 어깨를 함께하려고 하는가? 내 자식만큼은 이 사회에서 가장 높고, 크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오.”


그렇게 해서 명문학교와 부촌 근처에는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질 수 없고,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계산 앞에서 깨지기 일쑤이며, 출신이 낮은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돈 없는 가정에서 시집 온 며느리는 구박덩이가 되고, 그 반대는 며느리가 상전이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구도가 해결되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을 지배자로 설정하고 자신의 자식도 지배자로만 키우려하는 여성이 어머니인 한, 우리 사회는 그런 ‘모성’에 기대어 자란 인간들로 계속 채워지게 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광야로 쫓겨나는 이들이 양산된다.


남성은 언제나 지배자이며 여성은 언제나 피지배자인가?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성품이 그 사람을 주도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성품이 그 사회의 구조적 중추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내정자에 대해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언급한 국민의당 이언주 원내수석부대표의 ‘성차별적인 발언’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인식이 아닐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하려는 사랑과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가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부당한 지배는 지속될 것이며, 억울하게 쫓겨나는 이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하갈에 대한 사라의 비정함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라와 그 사라에게 축출 당하고 있는 하갈, 이스마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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