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4)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주 늦은 시간,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겨우 내려갈 때가 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한 한적한 밤길을 홀로 차를 운전하는 일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신이 지쳐 적적함이 극에 달할 때면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붉은 신호등이 반가울 때가 있다. 지나치는 이 아무도 없는 도로 한 복판 신호등의 멈춤 신호지만 어김없이 그의 지시를 따른다.


언젠가 동승했던 친구가 나의 그런 행동에 칭찬을 보낸 적이 있다.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은지라 내심 몹시 쑥스러워 했다. 실은 법과 규칙을 떠나 텅 빈 공간에 종일 서 있다가 나의 길을 간섭하려는 신호등이라는 존재와 이야기하고 싶어, 잠시 멈추어달라는 신호를 기쁜 마음으로 따른 것뿐이라는 걸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


유가의 대표 경전 중의 하나인 ≪논어≫는 공자의 어록집이다.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틈틈이 기억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맨 앞 책인 <학이>편은 편집자의 의도가 담뿍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던 편집자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그 장의 맨 마지막은 다음의 문구로 장식되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논어≫,<학이> 16장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식한다. 타인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를 칭찬하는 말에 주목하게 되고, 비난하는 말에 귀를 닫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이다. 누군가 알아준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일을 넉넉히 해내지만, 아무도 나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음부턴 이런 일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대학≫ 6장에 눈에 뜨이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자겸(自謙)’이란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신독(愼獨)’이라는 단어이다. 물론 자겸(自謙)은 종종 ‘자겸(自慊)’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스스로 겸손하다’는 해석보다 ‘스스로 흡족해한다’는 풀이가 다음 문구와 잘 연결되기 때문이다. 연결되는 단어가 바로 신독이다. 혼자 있어도 스스로 삼갈 줄 안다는 뜻이다.


신독은 단순히 삼간다는 소극적인 뜻보다 뭔가를 이룩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소신껏 자기 행할 바를 행해나간다는 의미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신독이다. 이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누가 보더라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이는 일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장자≫외편 <재유>편 12장을 보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기에게 동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면 기뻐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반대의사를 보이면 아무리 그 말이 옳아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 바탕에는 남들보다 뛰어나려는 욕구가 잠재해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어떤 사람을 세 번 이상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몰락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교만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려 몰락하거나, 타인의 질투와 견제를 받아 결국 몰락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칭찬에도 쉽게 휩쓸려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의 비난에도 마음 가볍게 흔들리지 않아야 참다운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골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기도라는 단어를 골방이란 단어와 연결시킨 기막힌 비유법이었던 것이다. 타인을 의식한 기도인 모범적인 기도 또는 길거리기도와 대칭되는 도발적인 수사를 구사하셨기에 둘러선 모든 이들이 예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마태복음≫ 6장 5-7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예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한다. 바리새인의 신앙적 태도는 대단히 모범적이었다. 남들이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유창한 기도를 했고 단 하나의 빠뜨림도 없이 율법을 실행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빠짐없이 지켰으며 그것을 신앙적 자부심으로 삼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도가 출발부터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바리새인 기도의 출발점은 타인이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기도를 펼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골방을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한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들어앉는 것으로 기도의 시발점을 삼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헬라어로 ‘타메이온(tameion)’이라 발음하는 ‘골방’의 어원은 조제 또는 분배라는 의미를 지닌 타미아스(tamias)이다. 따라서 타메이온은 약국, 연료실, 밀실, 저장실, 골방, 안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큰 방에 딸린 구석진 작은 방을 가리키는 골방은 원래 제사장들이 놋제단 ,물두멍, 일곱 등대, 진설병상, 분향단 같은 제사도구를 두는 조제실이었다.


결국 타메이온은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기도의 공간’을 가리키는 은유가 되었다. 골방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분리의 공간인 동시에 홀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골방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경계 공간이며, 따라서 무수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역설을 목격한다. 낮아져야 높아지고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 특유의 역설적 진리를 만날 수 있다. 눈에 뜨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열어 밝히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보여주는 기도는 별도의 상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께서는 홀로 있어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을 넘어 아예 때때로 은밀한 공간 속에 홀로 있으라고 말씀한다. 남들이 알아주는지 알아주지 않는지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넘어 아예 비밀스럽게 기도를 실행하라고 말씀한다. 단단히 단속할 수 있는 밀실로 들어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조우하라고 한다.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 점점 가속기를 세차게 밟기 마련이다. 미처 지나치는 사물을 식별할 틈이 없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내가 어디쯤을 지나치고 있는지 헛갈리기까지 한다. 이럴 때면 도로 중앙에 버티고 서서 껌뻑대는 붉은 눈을 만나고 싶어진다. 홀로 그와 조우해 멈춤의 가치를 은밀하게 이야기하고픈 마음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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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 여정의 시작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독일로 날아가 종교개혁의 현장을 천천히 순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기왕이면 독일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5월이면 좋겠습니다. 제게 있어 종교개혁의 성지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연관된 곳들입니다. 왜냐하면 요한 세바츠찬 바흐의 음악은 종교개혁이 진리와 진실의 힘에 이끌린 성공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종교개혁이 열매 맺은 가장 아름다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꿈속에 조금 더 머물자면, 라이프치히 시내의 집을 빌려서 잠시나마 바흐의 이웃이 되어 살고 싶습니다. 그가 산책했던 길,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며 머물렀던 곳들, 커피칸타타가 초연되었던 침머만 커피하우스 근처의 커피집에서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도 싶고 무엇보다 그가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토마스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려보고 싶습니다.

한참 동안 구글어스를 통해 라이프치히 거리를 누비며 바흐 씨의 이웃이 되는 꿈에 머물다가 다시 자판에 손을 얹습니다. 그래도 마냥 행복합니다. 시내를 이리저리 걷는 동안 흥얼거렸던 바흐의 ‘Schafe können sicher weiden/양들은 평안히 풀을 뜯으며-BWV 208 사냥칸타타 中 ’가 여전히 귓전을 맴돌고 있습니다. ( https://youtu.be/B1nyzGR3tUE )

 

지난 해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았습니다. 사진으로 수 없이 보았지만 하늘 층층이 자리한 살아 있는 그 모습은 실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느 관광코스처럼 빨리 흘러가버렸고 저는 넋을 빼앗긴 채 시간을 잊고 예배당에 머물러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오자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행들의 엄청나게 따가운 눈총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바티칸, 아니 이탈리아에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에 연신 죄송함을 표현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소 지으며 뿌듯해 했습니다.

 

미켈란젤로, 그리고 천지창조… 서양 음악의 영역에서 이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바흐와 마태 수난곡일 것입니다. 깊은 신앙심, 종교성, 예술가적 고집, 천재가 장인이 되었을 때의 시너지, 작품에서의 입체감, 후세의 평가 등 그러고 보니 미켈란젤로와 바흐는 많이 닮았습니다.

 

예술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천지창조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이탈리아 로마로 가야합니다. 사진기나 화면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그 실재의 느낌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스틴 예배당에서 그 그림을 보는 그 거룩한 공간적 느낌도 사진이나 화면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그런 면에서 축복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접근 방법이 너무나도 쉬워서 우리가 그 귀함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대에 다닐 때 2주에 한 번 저만의 성사가 있었습니다. 압구정동 어느 교회건물에 있던 S레코드 음반가게에 들르는 것이었습니다. 늘 새로운 음반이 들어와 있었고 직접 들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상업적이지 않은 마이너 레이블 음반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약간 어둡고 오래된 유럽호텔의 서재와 같은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매 번 음반 한두 개를 작은 비닐봉지에 들고 나올 때면 얼마나 설레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새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늘 손 언저리에 머물게 되자 저의 성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숙사로 들어와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고 첫 소리를 기다릴 때의 그 설렘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CD 이전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교시절 첫 오페라를 보러 간 때가 생각납니다. 가족끼리 잘 알고 지내던 목사님 사모님이 딸과 함께 보라고 표를 마련해 주셨었습니다. 첫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이것저것 옷을 입어보던 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20년이 지났어도 그날 입은 옷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곡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정성으로 준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음악을 듣기 편한 세상이 오게 되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음악에 대한 고마움과 예의를 잃어버린 듯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음악회를 앞두고 옷을 고르는 정성으로, 평소 가고 싶었던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떨림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비견되는 서양음악사 최고의 명작과 조우하는 설렘으로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종편 뉴스의 앵커가 마감멘트에서 자주 쓰는 말인데, 이런 식상한 표현이 이토록 무게감 있고 멋있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상식과 기본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이 뒤틀린 시대가 주는 작은 축복인가 봅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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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0)

 

 금식의 날은 축제의 날이 되어, 에스더(2)

 

하나님의 부재는 현존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했던가. 때로는 보응의 원리와 도덕적 확신마저도 깨뜨리시며 철저히 자유로우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일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유일한 원인자 아니신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시고,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사야 45:7; 욥기 5:18),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다(사무엘상 2:6-7). 그 하나님이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아래 억압받는 소수민족 유대인의 남은 삶을 어떻게 이끄실 것인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교수대를 만든 그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아 궁중실록을 읽게 했다. 이때 왕은 자신을 향했던 암살 음모와 그 일을 고발한 모르드개의 기록을 듣게 된다(6:1-2). 왕이 측근 신하들로부터 모르드개를 위한 어떤 보상도 없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즈음, 때마침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한 허락을 받으려고 궁 바깥뜰에 와있었다(3-5절). 왕은 하만에게 특별 대우할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자 하만은 그 수혜자가 자기 자신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6절). 그러나 운명을 가르는 반전의 상황이 일어났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은 그렇게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정되는 것일까.

 

착각에 취한 하만은 의견을 내놓았다. 왕이 높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왕복과 왕관을 씌우고 말에 태워 거리를 누비며 왕의 존귀를 입은 사람은 이런 처우를 받게 됨을 알리라는 것이다(8-9절). 왕은 즉시 하만에게 명령을 내린다.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왕의 옷과 관을 씌우고 말에 태워 거리로 나가 모르드개가 존귀한 자임을 외치라는 것이다(10-11절). 하만에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 놓였다.

 

하만은 왕과 함께 예정되었던 에스더의 잔치에도 참여해야 했다(7:1). 왕은 술 마시며, 왕후 에스더에게 이전처럼 소원을 묻는다(2절). 에스더는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린 만큼 기회를 지혜롭게 적극 활용했다. 그녀는 정중했다.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다면…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3절).

 

에스더는 진실을 말할 때를 놓치지 않았다. 탄원에 가까운 청원이었지만 처음부터 하만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 먼저 왕의 이름으로 공포한 칙령을 인용하여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4절; 3:13)을 당하게 된 자신과 민족의 현실을 호소했다.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다면 잠잠하였으리이다…(4절).

 

 

 

에스더는 차라리 노예로 팔렸다면 침묵했겠지만, 왕에게 큰 손실이 될 것처럼 정치적인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인양 노련했다. 그리고서 에스더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릴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린다. 그런 일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밝히라는 왕에게 비로소 에스더는 대답했다. “대적과 원수는 악한 하만입니다.”(6절) 왕은 노하여 잔치 자리를 떠났고, 하만은 왕후의 자비를 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때였다. 왕의 내시들 중 한 사람이 왕의 암살음모를 고발한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하만이 준비한 교수대가 있음을 보고한다. 보고를 들은 왕은 즉시 명령을 내렸고, 하만은 자기가 만든 장대에 매달려 죽게 되었다(7-10절). 자신이 판 웅덩이에 자신이 빠지고 말았다.

 

 

왕은 하만의 재산을 몰수하여 왕후에게 주고, 왕은 하만에게 주었던 인장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맡겼다(8:1-2). 그러나 하만에 의해 이미 작성된 유대 민족 학살 칙령은 해결 과제로 남았다. 에스더는 왕의 발 앞에 엎드려 하만의 악한 음모가 실행되지 않도록 탄원한다(3절). 그녀는 왕에게 “나의 겨레가 화를 당하고, 나의 친족이 망하는 것을 어찌 눈뜨고 볼 수 있겠습니까”(6절)라며 용감하게 말했다. 에스더 왕후의 말을 듣고 왕은 행정 권력을 모르드개에게 이양하여 새로운 법령을 위한 조서를 작성하게 했다(8절). 이것은 곧바로 왕의 서기관들에 의해 기록되어 인도에서 이디오피아에 이르는 127지방에 흩어진 유다 사람들과 대신들, 총독들, 귀족들에게 신속하게 보내졌다(9-10절). 유대 민족의 죽음을 알리는 칙령은 생명을 구하는 조서로 바뀌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고, 죽음의 날은 생명의 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권력구조는 언제든 변경될 수 있고, 확실해 보였던 어떤 힘도 영구적일 수 없다.

 

이 사건은 유대 민족에게 합법적인 원수 갚는 날을 준비하는 칙령이 되었다(13절). 왕명을 시행하는 12월 13일, 이날은 본래 하만에 의해 유대인들이 죽게 되었던 날이었지만, 모든 상황은 역전되었다. 고대 이스라엘 지혜자의 말처럼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었다(잠언 16:33). 유대 민족이 페르시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신앙적인 용기, 지혜, 올곧음은 민족의 안전과 운명을 바꾸는 도구였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돌봄이 사람의 협력과 만나는 지점이었다. 온당치 못한 힘의 사용은 꺾였고, 사익추구가 아니라 민족의 위기를 위해 지혜롭게 사용된 힘은 선한 일들을 창조해냈다.

 

이렇게 학살 위기를 넘긴 유대 민족은 12월 14일을 공휴일로 제정하고 구원을 경험한 축제의 날로 삼았다(9:17-18). 공포의 13일은 뒤바뀐 운명 속에서 안전하게 지나갔다. 하만의 악한 음모는 도리어 유대인들의 연대의식과 공동체성을 강화시켰다. 하만이 유대인을 진멸하려고 “푸르”(제비, 또는 주사위; 개역개정, “부르”)를 뽑던 날, 에스더 왕후는 왕 앞에 용감하게 나섰고, 하만의 악한 음모를 폭로하고 뒤엎어 그를 나무에 매달은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모든 가족과 모든 세대는 해마다 이 날을 지키기로 했다(20-27절).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전권을 가지고 “푸림”(“푸르”의 복수형)에 관련된 글을 써서 아하수에로가 다스리는 제국의 127지방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보냈다. 그들의 언어는 평화와 진실한 언어였다. 이 사건은 법적으로 인증되고 문서화되었다(28-31절). 이렇게 왕후 에스더의 요구에 따른 유대 민족이 금식과 탄식의 시간은(4:16) 삶을 경축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날이 되었다.

 

“푸림”축제를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은 아니지만, 모세 또는 기름부음 받은 거룩한 대리자를 통해 수립된 것도 아니지만, 에스더의 명령에 따라 법규로 정해진 이 기록은 절망과 애통의 날이 축제가 된 일을 기억하게 하는 증언이 되었다(9:20, 26. 29, 32). 에스더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을 사는 수동적인 소녀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급격한 변화와 성장을 경험했다.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문화에서 그녀는 남성이 지배하는 체제를 노련하게 이용하여 목적을 성취했다. 에스더서는 에스더의 지혜롭고 능숙한 행위들을 언급할지언정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진술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진전시키는 일을 수행한 셈이었다. 하여 에스더는 억압 받는 소수를 위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유대인의 영웅으로 기꺼이 채택된 것이다. 물론 현대의 시각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의 사용은 비난받을 일이지만, 에스더가 살았던 시대적 환경에서 직면해야 했던 일이었다.

 

모든 지리적 경계를 넘어 신앙의 후속 세대들은 에스더의 이야기를 통해 이전 세대가 경험한 구원을 기억할 것이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출애굽처럼 가시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혁혁함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과 곤란함 중에 있을 때 거기 함께 계셨다는 것을. 하여 하나님은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사람들을 통해 조용히 완벽하게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끝내 악한 대적자의 식탁은 엎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고통의 현장이 축제의 자리로 바뀌는 날이 되도록 누군가는 지혜와 신앙적인 용기를 삶의 덕목으로 삼고 실천할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 그러하기를.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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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3)

 

인생의 비밀

 

어린 시절 선친의 직업 덕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거의 3년마다 전근을 다니셨기 때문에 한 곳에서 오랜 기간을 지낸 적이 없다. 덕분에 농촌과 어촌, 산촌과 도시의 생활을 드문드문 맛볼 수 있었다. 친구를 제대로 사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종종 불평을 했지만, 성장해서 돌이켜보면 그 또한 인생의 한 가르침이었기에 감사를 드린다.

 

공자는 한 나라에 또는 한 지역에만 머물러 지내지 않았다. 55세 즈음부터 태어난 노나라를 벗어나 온 중국을 제자들과 돌아다녔다. 소위 ‘천하주유’를 하면서 엄청난 거리를 다녔다. 여러 나라를 거쳤고 여러 일들을 겪었다. 모든 국가에서 공자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군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을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찮게 취급당하기도 했다.

 

중국을 두루 다니면서 공자는 결코 잠자리나 먹는 것, 입는 것을 가리지 않았다. 공자가 관심 둔 것은 인간의 내면과 그로 인해 확장되는 인간의 관계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하는 공간의 문제는 그 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누구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는 장소성의 문제로 환원시켜 주목했다.

 

어떤 사람이 “거기는 누추할 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살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 ≪논어≫, <자한> 14장

 

이사하려는 곳마다 교육환경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는 젊은 남성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입에서는 늘 교육환경의 문제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어디 가나 다 마찬가지라며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가면 좋겠다는 얘기도 서슴없이 해댔다. 실제로 이민을 신청하여 허가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성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고등학교 총기사고 소식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접어야겠다며 흥분해서 말했다.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라며 다독였지만 쉽게 그의 흥분을 충분히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내친김에 차분하게 그에게 장소성에 관하여 차분하게 설명했다.

 

인간은 주어진 공간에서 본능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공간이 넓거나 좁거나 또는 따뜻하거나 춥거나 하는 공간 자체의 문제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 추억이라는 형태로 쌓인 층층의 사건들과 그 속에서 이루어졌던 상호간의 관계성, 즉 장소성에 더욱 주목한다.

 

공자가 가려는 지역이 누추했기에 제자 중에 하나가 왜 그런 누추한 곳에 가려느냐고 물었다. 제자는 그 지역에 대한 공간성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이 군자였고, 군자들이 그곳에서 수양으로 하고 학문을 추구했던 곳이기 때문에 결코 누추하지 않다는 장소성에 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젊은 남성에게 좋은 곳을 찾아다니지 말고 거하는 곳을 아름다운 장소로 변화시키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된 것처럼, 처음부터 아름다운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당신으로 인해 거처하던 곳이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전의 자이다

 

신약성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사도바울이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지니고 있는 재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은 이미 신앙 안에서 모두 버렸다고 했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부족감을 자랑했으며, 이루어 놓은 모든 일은 자신이 아닌 주의 능력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주 안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남들이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거나 당대의 뛰어난 선생으로부터 배움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의 선교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어가면서 체득된 것이라고 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빌립보서> 4장 11절~12절

 

바울은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여기서 자족이라는 말은 ‘스스로 만족하다’라는 의미 또는 ‘스스로 충족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족은 헬라어로 ‘아르케오(archeo)’인데 이 단어는 ‘돕는다’를 뜻하는 ‘아레고(arego)’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자족의 정확한 어원적 의미는 ‘스스로 자신을 돕는다’이다.

 

이어서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는데, 비천과 풍부 그리고 배부름과 배고픔의 양면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한다. 이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도 처할 수 있는 인생의 놀라운 비밀을 배웠다고 한다.

 

‘일체의 비결’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미에오(myeo)’라는 동사이다. 이것의 어원은 명사인 ‘미스테리온(mysterion)’이다. 신비, 수수께끼, 불가사의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미스터리(mystery)’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바울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인생의 비밀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하지 못했으면서 내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외치는 것은 거짓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능치 못함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으려면, 먼저 삶의 극단을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 처해도 낯선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두려움과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하기 싫어 제대로 암기 못하면 외조부님은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드셨다. 몸이 아파서 도저히 공부할 수 없겠다고 했다가 더욱 혼나기도 했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 외조부님의 기본 교육관이었다.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주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외부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 어떠한 상황이 주어져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꼿꼿하게 지켜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다양한 상황 속을 지내오면서 그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 또한 속사람의 강건함이 절절한 까닭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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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57)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

 

겨울이 난데없이 덮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겨울은 추워야 하고, 그러면서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 익어갈 겁니다. 여름에 자신을 한껏 자랑하던 초목도 겨울에는 겸손하게 몸을 털고 벌거벗은 존재의 본래 알몸으로 돌아가 하늘의 생명을 받아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겨울이 추운 것이 정상이라도 춥지 않은 겨울을 나고 싶은 것은 사람들 모두의 마음입니다. 길거리에 내버려진 채 겨울을 나보라고 하면 누가 그걸 기꺼워하겠습니까? 누구도 돌보는 이 없이 찬 바닥에서 홀로 두렵게 잠을 자야한다면 그 또한 겨울의 잔혹함을 더욱 깊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

 

역사는 강자가 써나가는 것 같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자의 편에 붙어사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지만 성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습니다. 현실은 대세를 쥔 쪽에 서라고 하지만, 성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꾀가 많고, 강하고 부해져서 오만해진 자들이 모든 것을 쥔 것 같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현실대세로 보면 초라한 것 같고 대단할 것도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 마다 잘 될 것이라는 겁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를 비교해보면 시냇가의 나무는 아무 것도 아닌 듯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드러내 보이는 생명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축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삶을 가난하다고 여기고, 힘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버리고 맙니다. 그건 착각이 아닐까요? 강하고 부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세상에선 막강하게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

 

바람이 불면 그 운명의 실체가 폭로됩니다. 지금은 강성한 것 같지만 생명과 사랑의 바람이 불면 그 정체는 겨우 속이 빈껍데기 겨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심판 받을 그 날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의인의 모임에 들 수 없는 비극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믿는 이들은 세상의 대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강자나 부자들의 오만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적힌 바대로 그는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케 해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시편 35편에는 악한 권세를 향해 하나님의 질타가 있기를 이렇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이 구덩이를 파고 그물을 쳐서, 이유 없이 내 생명을 묻으려는 저 사람들, 저 사람들에게 멸망이 순식간에 닥치게 하시고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서 스스로 멸망하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기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하고 힘없이 희생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바라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시편 40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시고, 진흙 수렁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특별시 사람들

 

2007년에 만들어졌으나 개봉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2009년 부산 국제 영화제와 서울에서 있었던 국제 가족 영화제에서 선을 보였던 박철웅 감독의 <특별시 사람들>입니다. 강남의 고급 고층 아파트 숲 속 한 편에 있는 달동네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전혀 거칠지 않게 이 현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이들의 모습, 그러면서 이들의 처지를 이용해먹는 자들의 악덕 등이 고발되어 있습니다. 특별시에 살고 있지만 전혀 특별하지 못한 이들의 슬픔과 아우성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강하고 부한 것을 열망하면서 그 기회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탐욕과 야망과 죄와 교만과 차별 등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물망을 찢고 그로써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영혼을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런 일에는 나서지 않고 있으니 그런 교회를 향해 회의가 생기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끼리끼리 잘 모이면서, 이웃을 위해 나서야 하는 궂은 자리에는 가지 않는 이기적 신자들의 모형이 한국사회의 비신자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뼈저리게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2016년 지난해도,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힘이 없이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거처가 과연 얼마나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거대 교회, 이른바 메가 처치가 되기 위한 야망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교회는 시장이 되고, 권력이 되어가고 있으며 의로운 시인들을 추방하고 있지 않은가요?

 

악인의 삶은 아무리 유혹적이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악인의 삶일 뿐입니다. 성서의 시인들은 이 선과 악의 분별에 민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교회는 시편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 이 세상을 돌이키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영혼이 시들지 않으며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축복을 바랄 것인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추운 겨울, 봄을 맞이하는 이 생명의 마음이 매일 아름답게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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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0)

 

백약이 무효이다

 

“처녀(處女)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乳香)을 취(取)하라 네가 많은 의약(醫藥)을 쓸지라도 무효(無效)하여 낫지 못하리라”(예레미야 46:1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새긴다. 그것이 욕심이든 근심이든 등 뒤에 메고 있는 커다란 보따리를 내려놓지 못하면 들어갈 수가 없다고. 또 하나, 그 문은 단체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증명서 하나를 보이고 우르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결코 아니라고.

외국에 나갈 때든, 나갔다가 들어올 때든 공항에 내리면 입국심사라는 걸 한다. 여권을 내보이고 본인인지 아닌지, 입국 목적이 무엇인지 등을 확인한다. 내 나라나 영토에 아무나 함부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입국심사를 할 때 보면 줄이 두 줄이다. 내국인이 서는 줄이 따로 있고, 외국인이 서는 줄이 따로 있다. 우리 마음속 터무니없이 자리 잡고 있는 생각 중 하나가 이와 관련된 것 아닐까? 최후의 심판 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줄에 서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예 하나님 아는 척을 하지 않는 이들이 세상에는 아주 없는 것일까.

 

 

 

열국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다. 이집트(46장), 블레셋(47장), 모압(48장),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과 하솔의 나라들, 엘람(49장), 바벨론(50-51장) 등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를 향한 말씀이다.

 

주님의 관심이 단지 이스라엘 안에 머물러 있거나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주님의 눈길에서 벗어난 대상이나 존재는 세상에 그 무엇도 없다. 교회나 기독교가 하나님의 관심이 머무는 울타리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 갈그미스 전투에 참여했던 이집트의 왕 바로 느고의 군대를 향한다. 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곳으로 그동안 패권을 잡고 있던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바벨론과 이집트가 서로 충돌을 하던 곳이다. 그곳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중동 지역의 지배권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여호야김 제4년, 그러니까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이집트의 바로 느고를 물리친다. 이 결과는 이스라엘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동안 이집트를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다.

 

이집트 군대는 나름대로의 무기와 힘을 갖고 있었다. 큰 방패, 작은 방패, 군마, 투구, 창, 갑옷…, 그러나 하나님은 이집트가 패배할 것을 바라보고 있다. 잘 싸우는 군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친다(46:5).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서 발이 빠른 자도 도망치지 못하고, 용맹이 있는 자도 피하지 못한다(46:6). 그들은 모두 유프라테스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게 된다(46:6).

 

그들의 사방에는 두려움이 있다(46:5). ‘사방의 두려움’이라는 말은 예레미야를 괴롭힌 바스훌에게 주님이 붙인 이름이기도 하고(20:3), 사람들에게서 놀림을 받던 예레미야의 심정이기도 하다(20:10). 어디를 둘러보아도 두려움뿐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다니, 참으로 마음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집트가 입은 상처는 고칠 수가 없다. 상처 치료에 효력이 있는 유향이 나는 곳으로 유명한 길르앗에 가서 아무리 많은 유향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나을 병이 아니기에 백약이 무효일 뿐이다.

 

“처녀, 딸 이집트야, 길르앗 산지로 올라가서 유향을 가져 오너라. 네가 아무리 많은 약을 써 보아도

너에게는 백약이 무효다. 너의 병은 나을 병이 아니다.” <표준새번역>

 

“아무에게도 짓밟힌 일 없는 너 이집트의 수도야. 길르앗에 올라가 향유를 구해다가 약을 만들어 마음껏 써보아라. 공연한 노릇이리라.” <공동번역 개정판>

 

“오, 처녀 딸 이집트야, 길르앗 산지로 올라가 약제 유향을 구해보아라. 그러나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너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시지>

 

이집트는 어쩌다가 이런 결과를 맞게 되었을까?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일까?

 

예레미야 46장 2-12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이집트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으스대고 있었던 것이다(46:7-10). 이집트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오만함을 꺾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여도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을 꺾으신다. 교만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방의 두려움이고, 그 때 입은 상처는 너무도 깊고 커서 백약이 무효일 뿐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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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19)

 

에스더, 민족의 위기 앞에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1)

 

고대 이스라엘 포로기 역사 속에 ‘하닷사’라는 이름을 가진 영웅적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별’이라는 뜻의 페르시아 식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녀의 히브리 식 이름 ‘하닷사’는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꽃을 피우는 화석류 나무를 뜻한다. 향을 품은 이 나무는 잎을 찧을 때 향기를 뿜어내는 허브 종류의 관목이다. 이 나무는 백향목, 소나무와 함께 종말론적 희망과 회복을 상징하는 식물로 언급되기도 한다(이사야 41:19; 55:13).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 아하수에로 왕(주전486-464)의 왕후 와스디가 왕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불복종 때문에 폐위당한 후 왕의 분노가 누그러지는 시점에 등장한다(에스더 2:1). 자기애로 가득 찬 경박한 왕의 권력에 불복한 와스디가 폐위되고, 이후 왕의 젊은 측근 관료들은 왕을 기쁘게 해줄 새 왕후를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곧바로 관료들은 아리따운 젊은 처녀를 찾기 위해 미인대회를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절대 권력자 아하수에로 왕의 지혜로운 통치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에스더 이야기 역시 앞선 와스디 왕후의 일화만큼이나 정치적 풍자가 농후하다.

 

에스더의 등장에 앞서 바벨론 느브가넷살 왕이 유다 왕 여고니야를 포로로 잡아갈 때 예루살렘을 떠나야했던 베냐민 자손의 유대인이 등장한다. 모르드개다. 그는 사울 왕의 아버지였던 기스의 증손이고(사무엘상 9:1), 사울 왕을 열렬히 후원했던(사무엘하 16:5) 시므이의 손자이며, 여일의 아들이었다(5절). 이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모르드개의 사촌 여동생이 에스더이다. 에스더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했다. 에스더는 용모가 곱고 아름다운 젊은 처녀였다(7절). 에스더의 아름다운 외모 묘사는 제국의 왕실이 주관하는 미인 대회의 자격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슬쩍 제시한 셈이다.

 

드디어 왕의 측근들이 기획했던 미인대회 조서가 반포되었고, 에스더 역시 지원자로 나섰으며, 선택된 여러 젊은 처녀들과 함께 12개월 동안 궁녀를 관리하는 헤개의 수하에 있게 된다. 헤개는 7명의 시녀를 에스더에게 붙여주고, 가장 좋은 숙소를 제공하는 등 무슨 이유로 에스더를 남다르게 대우했는지 알 수 없으나 히브리 소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9절).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행하시는 신실한 사랑과 친절을 이방인 관리가 실행한 셈이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지시대로 자신의 국적에 따른 출신성분을 밝히지 않았고(10절), 다른 소녀들과 함께 왕 앞에 가기 위한 절차들을 따랐다(12-14절). 그러니까 페르시아 제국의 궁에서 자신의 민족적, 신앙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숨긴 셈이다. 이후 에스더가 왕 앞에 가게 된 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 7년째였다(16절). 왕후 와스디가 폐위 된지 4년 후쯤이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완전히 압도당했다. 왕은 그 어떤 젊은 여자들보다 에스더를 사랑했고, 에스더는 왕의 총애와 은총을 받고 와스디를 대신해 왕후가 된다(17절).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권력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에스더의 아름다움이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왕은 에스더를 위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왕은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해줄 뿐만 아니라, 이 날을 공휴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18절). 제국의 왕과 포로민 유대 소녀와의 결혼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이것은 요셉이 바로의 궁으로, 다니엘이 느브가넷살의 궁으로 들어간 일들처럼, 에스더 역시 억압 받는 신분으로서 왕과 긴밀한 관계로 묶여진 사건이다. 이렇게 포로민이며 고아였던 유대인 젊은 여성과 이방 왕의 결혼은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이어간다. 유대인 젊은 여성을 왕후로 맞이한 왕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쳤다. 때마침 모르드개가 왕을 암살하려는 가신들의 음모를 듣게 되고(21절), 모르드개는 이 일을 에스더에게 알렸다. 에스더는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조사를 착수하게 했고, 암살 음모는 좌절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의 드라마를 만들어 가는 중대한 동인이 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왕은 대신들 중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를 가장 높은 장관으로 임명한다(3:1). 이때 궁궐 문의 모든 신하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만에게 엎드려 절했지만 모르드개만은 예외였다(2절).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지나친 충성을 요구하는 명령을 부당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명령에 불복종했다. 단지 이것 때문이었을까? 하만의 조상 아각은 아멜렉의 왕이었고, 아각이 모르드개의 조상 사울의 대적이었던 것도(사무엘상 15장) 한몫했으리라. 하만은 모르드개를 향한 치밀어 오르는 개인적인 분노를 민족적인 혐오로 확대시켜 잔인한 방식으로 발산한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는 모든 나라에 흩어진 유대 민족을 파멸시킬 대량학살을 획책한다. 이때가 아하수에로 왕 통치 12년째 되는 해였다. 페르시아의 궁정은 연례적으로 상서로운 달을 결정하는 제비뽑기 행사를 열었는데, 하만도 참여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왕에게 접근해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 민족이 있다는 거짓되고 악의적인 보고를 한다(5-8절).

 

거기다 하만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금고에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하니(8-9절). 왕은 인장 반지를 하만에게 내주면서 행정적인 최고권위를 부여한다. 권력을 거머쥔 하만은 왕의 칙령을 선포하는데, 이것은 서기관에 의해 작성되고, 각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국에 반포되었다. 그 칙령 내용은 12월 13일 하루 동안 유대인이라면 젊은이, 늙은이, 여인,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하라는 것이었다(10-13절). 유대인을 증오하는 잔혹한 권력자의 손에 유대인의 운명이 기로에 놓였다. 무자비한 권력 때문에 대량학살 위기에 처해진 유대 민족은 슬픔과 공포의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이때 모르드개는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공개적인 장소인 성문 앞 광장 에서 대성통곡했다(4:1). 각 지방의 유대인들은 납득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조복을 걸치고 울부짖으며 금식했다(3절). 이때 왕후 에스더는 시녀와 내시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듣는다. 또한 왕에게 자비를 구하여 민족을 살릴 수 있도록 탄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모르드개의 말을 전해 듣는다(4-9절). 상황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에스더는 30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않은 상황이었고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왕 앞에 나갈 수 없었다(10-12절).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절)라는 말을 전했다.

 

이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전한 회신 내용은 민족의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운명을 걸고 용기와 믿음으로 맞서는 말과 행동계획이었다. 에스더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3일 동안 금식을 요청하고, 자신도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규례를 어길지언정 왕에게 나갈 결심을 전했다(13-16절). 이제 주도권은 모르드개가 아닌 에스더에게로 넘겨졌다. 수산 궁 안에 있는 에스더는 궁 밖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와 함께 금식하면서 잔혹하고 부당한 일 앞에 침묵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설 것을 밝힌 것이다. 이제 유대 민족의 유일한 희망은 이 젊은 여인에게 달렸다.

 

금식 3일째 되는 날, 에스더는 왕의 명령 없이 왕 앞에 나섰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왕후의 예복을 갖추고 왕궁 뜰로 갔다. 왕은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고 기뻐했고. 오랜만에 왕후를 만난 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주겠다(5:1-3)라며 과장된 말로 자신의 권력 자랑도 모자라 사랑마저 과시한다. 에스더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잔치에 왕을 초대하고 싶다면서 자기 민족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 하만의 동행을 요청한다. 왕은 그녀의 요청대로 하만이 잔치에 참여하게 했다(4-5절). 왕은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왕이 와스디 왕후를 왕의 잔치에 초대했던 것과 대조적인 상황이다.

 

잔치는 시작되었다. 술 마시며 잔치가 무르익어갈 즈음, 왕은 에스더의 소원을 묻고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에스더는 왕에게 내일 다시 여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여하면, 소원을 말하겠다는 것이다(6-8절). 에스더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을까. 에스더의 숨은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한 하만은 무엇인가 대단히 착각하고 마음이 흐뭇해져 궁을 나선다. 하만은 가족들에게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왕과 함께 초대받은 것을 자랑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모르드개의 행동은 여전히 눈에 거슬렸다. 때마침 이것을 지켜보던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이 조언한다. 그들의 조언은 23미터 높이의 장대에 모르드개를 매달도록 왕에게 청하고 잔치를 즐기라는 것. 하여 하만은 곧바로 교수대가 될 장대를 세웠다(9-14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끼어들었다.

 

에스더의 이야기에는 인간의 행위만 있을 뿐,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는다. 여호와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율법, 언약, 성전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페르시아 제국 수산 궁의 에스더, 모르드개, 그리고 유대민족의 운명을 누가 알겠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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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2)

 

선생이 되려하지 말라

 

시골 마을에서 선생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한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노인들은 선생에게 가서 글을 묻기도 하고 심지어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해달라고 하거나 선거 즈음엔 정치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한 때 국가가 정부시책을 펼칠 인력이 부족하면 제일 먼저 교사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나의 외조부님은 인제읍내에서 내린천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귀둔’이란 동네의 훈장이셨다. 외가댁은 그곳에서 대대로 훈장으로 지내시면서 마을의 유지로 지냈다. 외조부님은 마을의 온갖 일에 관여하시면서 마을 아이들에게 한자와 한글을 가르치셨다. 덕분에 나도 어릴 적부터 외조부님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울 수 있었다.

 

맹자가 활동했던 전국시대에 무수한 선생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일어나 자기 사상을 펼쳤고 추종자인 제자들을 확보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학습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학습공동체를 형성하여 단순히 세력만 과시한 것이 아니라, 강한 결속력을 구축함으로 타학문에 대한 심각한 배타성을 띠게 되었다.

 

상대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깨뜨리기 위해 자기 논리의 날을 세우고, 자기 논리를 든든하게 하려고 치밀한 방어막을 에둘렀다. 강한 논리를 갖추었다 싶으면 군주를 찾아가 자신의 논리를 실험할 수 있는 지위를 달라고 요청했다. 재상의 자리에 앉혀주면 자신의 논리를 펴서 군주의 영토를 확장시켜주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환란은 선생노릇을 좋아하는데 있다.(人之患 在好爲人師).”

- ⟪맹자⟫, ⟨이루 상⟩23장

 

공자와 더불어 맹자가 특별히 사친(事親)을 강조하는 것은 ‘섬김’이라는 귀중한 덕목 때문이다. 자녀로서 부모를 섬기고, 신하로서 군주를 섬기라는 덕목에서 강조점은 섬김에 있다. 섬김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일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맹자는 사친(事親)과 짝을 이루는 덕목을 수신(守身)이라 했다[事親 事之本也, 守身 守之本也 - ⟨이루 상⟩19장]. 수(守)는 ‘지킴’이다. 수신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유혹과 환란으로부터 흔들림 없이 자신을 올곧게 세워놓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일이며, 자신의 존재성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섬김’이 ‘지킴’과 짝을 이루게 한 것은 섬김이 혹 비굴함이나 억지로 낮아짐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자기의 중심을 공교히 하지 않고 무조건 낮추는 것은 어리석음이나 자기비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킴이 섬김을 만나지 않으면 교만으로 변하기 쉽다. 자신을 남들 앞에 내세워 높이는 것으로부터 심각한 문제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경전의 자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지칭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마 23:3)”고 말씀하셨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에게 짐 지우면서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높은 자리를 쉼 없이 탐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마태복음>, 23장 8절

 

예수께서는 둘러선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랍비가 되지 말라고 한다. 유대인은 예나지금이나 랍비가 되는 것을 대단한 명예로 생각한다. 유대인 어린이들의 최고의 희망은 랍비가 되는 것이다. 현재 랍비라는 단어가 ‘나의 스승’ ‘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원래 이 단어는 ‘크다’ ‘위대하다’는 어원에서 출발했다.

 

랍비(Rabbi)는 ‘크다’라는 뜻의 ‘라브(rab)’에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나의 주’, ‘나의 크신 분’이란 뜻이다. 처음에 랍비는 ‘크신 분’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인생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분, 내가 본받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것이 점차 ‘선생’이란 뜻으로 변하여 유대인의 율법 교사를 존경하여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도 하나이고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브(ab)’이다. ‘아브’는 육친의 아버지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제사장이나 왕, 노예의 주인이나 선지자도 ‘아브’라고 불렀다. 여러 측면에서 스승을 지칭하는 ‘라브’와 아버지를 지칭하는 ‘아브’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는 명쾌하게 결론을 짓는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13)” 위대함은 자신의 낮춤과 상대의 섬김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 지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선생이 많은 우리 시대이다. 선생 되려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배우려는 이들보다는 가르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은 시절이다. 낮음보다는 높음을 선호하는 시대이다. 타인의 머리를 밟고 서있는 쾌감을 꽤나 즐기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온갖 문제는 선생 되려는 욕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남을 밟고 일어서려는 탐욕으로부터 시작된다.

 

외조부님의 생신날은 마을 사람들의 잔칫날이었다. 특히 빈궁한 살림을 꾸려가는 이들과 병으로 인해 찌든 생명을 간신히 꾸려가는 분들을 위한 날이었다. 마당 그득 그분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모든 일가친척들은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야 했다. 철없던 시절, 굳이 저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느냐고 외조부님께 물었다가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아직 제 자신이 상당히 덜 익은 나로선 타인에게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타인을 섬길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제대로 세운 사람이다. 안으로 자기를 제대로 세운 자만이 타인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고이는 이가 진정 위대한 사람이다. 스스로 높인다고 결코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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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5)

 

박근혜의 콧바람, 왕의 콧김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 곧 “왕”을 달리 “우리의 콧김”(개역개정), “우리의 숨결”(공동번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루아흐 압페누”를 번역한 것이나 아무래도 석연하지 않다. 즉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와 우리말 번역으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의 반응이 일치하지 않을 것 같다.

 

“콧김”이라고 하면 그것은 콧구멍에서 나오는 더운 김을 뜻한다. “콧김을 쐬다”라는 말은 어떤 물체를 코 가까이 가져다 대고 거기에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콧김이 세다”라는 말은 관계가 가까워서 영향력이 세다는 말이다. “죽은 놈의 콧김만도 못하다”라고 하면 난로나 화로에 불기운이 없어져서 따뜻한 기운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라고 하면 이것은 숨 쉬는 속도, 숨 쉴 때의 그 높낮이를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 거칠다”라는 것은 순 쉬는 소리가 고르지 않고 거센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 자체에서도 하나님의 “콧김”이라는 표현은 강한 바람을 묘사할 때 쓰인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애굽기 15:8), 때로는 “꾸지람”과 평행을 이루는 “분노”를 뜻하는 표현과도 관련되어 쓰인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밑이 드러나고”(시편 18:15). 달리 코로 숨을 쉬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기도 한다(이사야 2:22).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공동번역>이 “우리의 숨결”이라고 한 것은 <개역개정>이 “우리의 콧김”이라고 한 것보다는 낫지만, 이 문맥에서 그 표현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둘 다 충분하지 않다. “콧김”이나 “숨결”보다는 “생명(력)”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 전달이 더 정확하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의 “콧김”이나 “숨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7)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생명(력)”이다. 욥기에서 욥이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기 27:3)고 말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기운”이 바로 “하나님의 루아흐”이다. 그 “루아흐”가 그의 “코”에 있다는 것은 바로 “생명”이 아직 그에게 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엔 콧바람도 있다. 루아흐가 바람, 숨결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 콧김은 콧바람이 되기도 한다. “콧바람 좀 쐬려고”, 또는 “콧바람 싱싱” 하는 표현들은 모두 신선한 바람을 호흡하면서 육신과 영혼의 호흡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이니 성서의 쓰임과 사뭇 유사한 느낌마저 준다.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 질문을 던져보자. 콧대가 높으면 거기서 나오는 콧김, 숨결, 콧바람은 셀까?, 아닐까? “흥”하고 코웃음 치며 내는 콧김도 있다. 콧대가 높은 사람이 그러면 주변이 사뭇 싸아~ 하고 긴장될 것이다. 제 콧대가 높다고 내는 콧김, 콧바람도 셀 줄로 아는 착각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김, 숨결, 바람에는 무엇이 담겨 있지 못할까? 단언컨데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 없다. 더군다나 권력자가 그런 콧김, 콧바람을 내면 저주나 죽음이나 비난의 기운만 그득하다. 이를테면 메르스보다 더 한 세균덩어리를 공기에 퍼뜨리는 행위가 된다.

 

 

대통령 박근혜가 코에 잔뜩 힘을 주고 콧바람을 장풍처럼 낸 모양이다. 현재 탄핵으로 직무정지 상태에서 '출입기자단 신년 인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공개적으로 일방적인 언론플레이를 해, 화를 돋궈 그런 모양인데, 자기 변명의 바람은 센지 모르나 거기에는 역시 생명력이 없다. 이제 정치적 수명도 덩달아 줄어드는 건 아닐까? 이왕 내려면, 제대로 내시지. 하나님의 루아흐가 없는 왕의 콧김, 콧바람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부매랑이 되는 비운의 숨소리라는 것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일깨운 진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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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44)

 

김광석 21주기, 그 노래 그 사람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로 시작되는 그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젖어들게 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도 그의 이 노래는 마치 우리 모두가 함께 통과해온 시간들에 대한 깊은 추억처럼 남게 됩니다. 그의 특이하게 애조 띤 목소리와 아무런 꾸밈없이 말하듯 다가오는 가사, 그리고 소박한 풍경화 같은 곡들은 한 시대의 눈물과 사랑을 일깨운 것입니다.

 

“김광석” 우리 노래의 역사 속에서 너무도 일찍 아쉽게 사라진 하나의 별 같은 존재. 그의 21주기가 바로 오늘입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배우 송강호가 북한 인민군 장교로 나와, 남한 군과 어울려 이 노래를 듣다가 “광석이 갸는 와 길케 일찍 갔네?”하고 난데없이 슬프게 읊조릴 때 관객들은 모두 그 말에 하나가 되고 맙니다. <이등병의 편지> 마지막의 “이제 다시 시작하자 젊은 날의 꿈이여”가 열창되는 순간, 어느 누구의 청춘도 결국 남루해지지 않게 됩니다.

 

 

 

 

그의 노래 <내 사람이여>는 이런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 줄 수 있다면/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너 가는 길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겠네./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 줄 수 있다면/이름 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음 눈물이 고운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내 가난한 살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

 

“김광석”은 그렇게 자신의 시와 노래와 눈물, 그리고 사랑이 그득히 담겨 있는 영혼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떠났습니다. 1964년 생으로 1996년에 세상과 작별을 고했으니 겨우 서른넷이라는 젊디젊은 나이였습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아 인생을 좀더 맑게 살아야겠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서 지내야겠구나, 이 세상에 사랑해야 할 것이 이리도 많은데, 라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입에서 창과 칼이 뿜어져 나오는 가시 돋친 설전에 익숙해가고, 침략자를 닮은 눈매를 따라 배우며 날이 갈수록 초라해져가는 영혼의 실상에 눈이 멀어가는 그런 시대를 어루만지며, 조용한 음성으로 일으켜 세우는 힘을 가진 한 청년 예술가가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이 세월이 살만한 보람이 있는 듯싶습니다. 무대 위에서 잠시 객석을 흥분시키며 난무하는 춤은 있으나 오래도록 기억되어 따스한 피로 흐르는 몸짓은 보기 드물고, 열광하는 인기에 스스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들 역시 많으나 시간이 갈수록 도리어 뚜렷해지는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는 이는 또한 흔하지 않습니다.

 

노래 <내 사람이여>에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내가 너의 사랑이 될 수 있다면, 이름 없는 한 마리 새가 되어도 좋겠네. 너의 새벽을 날아다니며 내 가진 시를 들려 주겠네…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그는 지금 자신의 시를 들려주는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작은 새가 되어 우리 곁을 날아다니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받고 비틀거리며 아파하는 이들 모두에게 그의 노래가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는 그런 신비스러운 진동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좋은 노래가 살아있는 마을은 결코 황폐해지지 않습니다. 그 노래를 기억하고 부르는 이들이 많을 때 세월은 우리를 속이거나 배반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때로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우린, 웅크리고 숨을 죽이다가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일은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 젊은 날의 꿈이여”라는 그 애절한 열창이 못내 귀에서 맴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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