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1)


왜 하필 저입니까?

- 출애굽기 4:10-17 -


예언자는 우리를 가장 헛갈리게 만든 사람

오늘부터 4주에 걸쳐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시리즈 설교의 제목은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가 되겠습니다. 제가 구약성서를 전공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설교주제와 본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신약성서에 치중해 왔습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균형을 맞추지 않았던 겁니다. 이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는 것은 이를 ‘반성’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는 제법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에 여호수아서를 주요 본문으로 해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을 주제로 설교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신약성서를 본문으로 택한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예언서와 예언자를 주제로 설교하려 하니 여러분도 이번에 설교본문이 되는 예언서를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주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아모스 등을 읽게 될 겁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빨리 읽거나 많이 읽으려 하지 말고 눈빛이 종이를 꿰뚫을 정도로, 좀 속되게 말하면 ‘잡아먹을 듯’ 읽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 이렇게 말한 예언자는 어떤 심정이었고 하느님을 어떻게 경험했기에 이렇게 말했을까?’ 등의 질문을 갖고 정독하십시오.


우리는 인간역사에서 우리들을 가장 헛갈리게 만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들이 받은 영감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서가 생겨났습니다. 그들과 그들이 남긴 책은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때 숨는 피난처 역할을 잘 해왔고 그들이 본 비전과 들은 목소리는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했을 때 우리의 믿음을 지탱해줬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언자는 특별한 사람? 평범한 보통사람?

예언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마나한 얘기를 굳이 하는 까닭은 예언자를 보통사람과는 어딘가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뭔가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예언자가 다르긴 했지만 ‘특별한’ 사람이거나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특별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소위 ‘영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 때문에 하느님에게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에게 선택된다는 것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됐거나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기준은 당신의 계획을 잘 수행하는지 여부입니다. 예언자는 그렇게 선택됐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예언자는 누구입니까? 예언자는 위대한 사람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사람들에게 뭘 바라시는지, 세상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시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곧 예언은 하느님의 눈으로 인간과 역사를 해석하는 일인 겁니다.


예언자가 이런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을 알고 경험할 것이며 하느님을 경험하지 않고 무슨 수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네 삶에도 역지사지(易地思之), 그 사람의 자리에 서보지 않으면 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서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하느님이 어떤 눈으로 사람의 실존을 바라보는지, 인간역사에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서는 하느님의 세계를 맛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거짓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야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


거짓 예언자는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온 환상을 얘기하는 사람이랍니다. 야훼의 세계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야훼의 말은 못 하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참 예언자는 ‘야훼의 회의’에 들어와서 야훼를 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훼의 회의’라고 하는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만납니다. 야훼의 회의가 뭘까요? 그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야훼의 회의’는 ‘하느님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생소한 개념이지만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각회의’나 ‘수석비서관회의’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은 최고신인 야훼 하느님이 하위신들(lesser gods) 또는 천사들로 구성된 어전회의를 주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앞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다고 했는데 그 경험을 남들에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여러분이 그 예언자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서 한 하느님 경험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당시 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았겠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말로 표현하려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그 경험을 표현할 방법은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그 경험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지만 말 이외에 더 좋은 다른 수단은 없습니다.




야훼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과 만난 경험을 표현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꿈이나 환상,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 등이 그것인데 이것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수단은 고대 문화권에 널리 퍼져있던 ‘신의 어전회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여러 곳에도 어전회의에 대한 얘기가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곳이 욥기 1장입니다.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 곧 하위신들이나 천사들이 야훼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있었답니다. 여기서 ‘사탄’은 고유명사도, 악의 화신도 아닌 일종의 검사 역할을 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고 물으셨고 사탄은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야훼께서 그에게 욥을 잘 살펴봤냐고 물으시며 “이 세상에는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다는 겁니다. 이에 사탄은 욥이 공연히 하느님을 경외하겠냐고, 하느님이 온갖 복을 베풀어주셨으니 그런 거 아니냐고 일종의 딴죽을 걸었지요. 그러면서 사탄은 이제라도 야훼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없애면 그는 야훼를 저주할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하느님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시며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욥기 얘기를 길게 한 까닭은 구약성서가 전제하고 있고 예언자가 참여했다는 야훼의 어전회의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봤듯이 어전회의에서는 야훼께서는 누구처럼 남이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고 나머지는 잠자코 수첩에 받아 적기만 하는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사탄도 야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하지 않습니까. 참 예언자는 그 회의에 참여했고 거기서 야훼와 더불어 토론을 벌였으며 야훼에게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하느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해서 토론을 벌였다니까 예언자들이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당사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언서 중에는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처럼 예언자의 소명 얘기가 전해지는 책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 그들이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좋아서 펄펄 뛰며 기뻐했거나 기꺼이 그 부름에 응한 게 아닙니다. 물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응답한 이사야를 떠올리는 분이 있겠지만 그를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상 가운데 하느님을 봤습니다. 연기가 가득하고 터가 흔들리는 성전에서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노래하는 가운데 그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을 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하느님을 봤으니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활활 타는 숯불을 가져다가 그의 입술을 지져서 정화했습니다. 그 다음에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갈 것인가?”라고 야훼께서 사람을 찾으셨을 때 그제야 이사야가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응답했던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 유다 출신 아모스는 예언자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계획표에는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떼를 치고 있던 어느 날 야훼의 영이 그를 덮쳐서 예언자가 됐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나라인 남 유다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아마샤에게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예언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라고 욕먹을 만 했지요.


이런 사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후대에 올 모든 예언자의 모델이라고 불리는 모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가 어떻게든 야훼 하느님의 부름을 피해보려고 애쓴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집트로 내려가서 당신 백성인 히브리 노예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자기는 말재주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누가 입을 지었느냐고, 누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고 보게 하느냐고 되물으시며 당신만 믿고 가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말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를 돕고 가르쳐주시겠다며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해서 거부합니다. 그제야 하느님은 화를 내시며 모세의 형이자 말 잘하는 아론을 그와 함께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가까스로 그를 설득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집트에 내려가서 파라오와 말로써 담판지은 사람은 아론이 아니라 모세였습니다. 아론은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엄살’을 했을까요?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신 후에 그에게 말 잘 하는 은사를 주셨을까요? 그게 아닐 겁니다. 예언자에게 ‘말’이란 무엇이고 그게 그의 사역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그 얘기는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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