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3


주의 영은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오다

사무엘상 16:14-23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

오늘 설교는 사울 왕 이야기 세 번째입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이 등장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누차 얘기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에 대해 얘기했으니 오늘은 그 이후에 사울의 생이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은 내키지 않지만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지도자로서 왕을 원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백성들이 그에게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이 대리한 하느님과의 관계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은 두 번 큰 갈등을 겪습니다. 블레셋과 전쟁했을 때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사울이 직접 제사를 집전했을 때가 첫 번째이고,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했을 때 사무엘은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말고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했는데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과 일부 동물을 포로와 전리품으로 가져왔을 때가 두 번째입니다. 이들 사건을 계기로 둘 사이는 틀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울을 대체할 사람으로 다윗을 선택했고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비밀리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이 일이 완수되려면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고지식하고 순진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사울은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음을 알게 된 후로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떨기 시작했고 성격도 포악해졌습니다. 성서는 그 원인을 “사울에게서는 야훼의 영이 떠나가고 그 대신에 야훼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하고 말합니다. 사울을 괴롭힌 영은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야훼께서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사울을 괴롭힌 자는 궁극적으로 야훼였던 겁니다. 야훼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하려고만 했으면 어렵지 않게 사울을 내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악한 영을 보낸다든지 하는 복잡한 방법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울은 이후 계속해서 야훼가 보낸 악한 영에게 시달립니다. 사울을 괴롭힌 병이 뭔지 상세하게 연구한 학자도 있더군요. 저는 호기심이 일어나서 삼십 쪽 정도의 논문을 읽어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박증’이라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불안장애’라고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정신분열’이라고도 주장하는데 논문 저자는 결론적으로 사울의 증상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정보가 부족해서 그의 병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잔뜩 기대하고 열심히 논문을 열심히 읽은 저는 적지 않게 실망했습니다. 논문의 저자는 성서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면 사울의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데 과연 그럴까 싶습니다. 저는 편의상 ‘강박증’으로 부르겠습니다.



수금 타는 소년 다윗과의 만남

사울이 고생하는 걸 보다 못해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소년이 있는데 그를 데려다가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이 사울을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타게 하면 나을 거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궁전에 들어온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에게서 악한 영이 떠나고 그는 제정신이 들었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자기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군인으로 승진시켜서 곁에 두었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일입니까. 물론 사울이 겪는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악한 영을 보낸 하느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해서 왕이 될 거란 사실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다윗 아닙니까! 다윗만이 사울을 강박증에서 해방시켰다는데 바로 그가 사울을 괴롭히는 강박증의 원인이었다니 말입니다.


훗날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함으로써 사울을 능가하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 여인들이 춤추며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했다는데 이것 역시 사울의 강박증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겠다는 의도를 처음 드러냈을 때가 이때였습니다. 사울은 수금 타던 다윗에게 두 번 창을 던져 죽이려 했고 이후로도 집요하게 그를 추격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배신도 사울의 강박증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는 블레셋 군인 1백 명을 죽여 그들의 양피를 가져오면 다윗에게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그를 죽이려는 미끼였습니다. 블레셋 군인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다윗은 처음엔 사양했지만 왠지 나중에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블레셋 군인 2백 명의 양피를 가져옴으로써 그의 사위가 됩니다. 하지만 장인, 사위가 된 두 사람은 사이가 나날이 나빠졌습니다. 사울은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미갈은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다윗을 탈출시킵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도 다윗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구약성서가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고 밝힌 경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둘의 사랑은 달콤했을지 모르지만(하지만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딸이 자기를 배신한 셈입니다. 아들 요나단은 또 어땠습니까. 다윗과 요나단은 요즘 학자들이 동성애 관계일 수도 있다고 추측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요나단은 왕위 계승의 상징인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넘겨줬을 정도로 다윗을 아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다윗을 위해 아버지 사울과 갈등을 빚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확인한 후 그의 도움을 받아 사울의 궁에서 탈출해서 방랑자 신세가 됩니다.


강박에 쫓기는 사울

사울 입장에서는 사무엘에게 시달림당하는 것도 벅찬데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측근들까지 자기를 배신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요나단과 미갈뿐 아니라 측근 신하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호통 친 적도 있었습니다.


이 베냐민 사람들아, 똑똑히 들어라. 이새의 아들(다윗)이 너희 모두에게 밭과 포도원을 나누어 주고 너희를 모두 천부장이나 백부장으로 삼을 줄 아느냐? 그래서 너희가 모두 나를 뒤엎으려고 음모를 꾸몄더냐?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을 때에도 그것을 나에게 귀띔해 준 자가 하나도 없었다. 또 내 아들이 오늘 나의 신하 하나를 부추겨서 나를 죽이려고 매복시켰는데도 너희들 가운데는 나를 염려하여 그것을 나에게 미리 귀띔해 준 자가 하나도 없었다.


사울은 점점 더 포악해져갔습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를 피해 도망쳤을 때 놉이란 곳에 사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그를 도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 성소를 섬기는 여든다섯 명의 제사장들을 포함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주민들과 동물들까지 모조리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정도면 ‘광기’(狂氣)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과거에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과 동물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사무엘의 말을 안 듣고 아말렉 왕 아각과 일부 동물들을 산채로 잡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긴 헤렘의 규율을 이때라도 지키려 했을까요, 그는 엉뚱한 경우에 그 규율을 지킨 셈입니다.


이 와중에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줬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한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울이 뒤를 보려고 동굴에 들어왔습니다. 부하들은 하늘이 준 기회라며 사울을 죽이자고 제안했지만 다윗은 하느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면서 그의 겉옷자락만 몰래 잘랐습니다.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음을 사울에게 알린 셈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다윗이 있는 곳을 알고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잡으러 왔을 때인데 그때도 몰래 진지에 숨어들어간 다윗은 잠든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창과 물병만 들고 나왔습니다. 동굴에서 만난 경우는 우연이었지만 이 경우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사울의 진지에 숨어들어간 것인데 왜 그냥 나왔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을 것이면 왜 위험을 무릅쓰고 거기에 들어갔을까요. 두 경우 모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줬음을 사울에게 통보했습니다. 이에 사울은 다시는 그를 죽이려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는 이 맹세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둔 최대 악수(惡手)는 무당을 찾아간 일일 겁니다. 사무엘이 죽은 뒤 다시 한 번 블레셋 군대가 몰려오자 그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야훼께 물었습니다. 이걸 보면 사울은 여전히 야훼를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야훼에게 버림받았음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 여부를 야훼에게 물었지만 야훼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야훼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무당을 찾아갑니다. 바로 앞에서 사울은 무당과 박수를 이스라엘에서 모조리 쫓아냈다고 했는데 그래도 어딘가에 숨어있던 무당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청했습니다. 이 대목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울 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좋은 얘기를 듣겠다고 그를 불러달라고 했나 말입니다. 사무엘은 역시 야훼는 사울을 떠나 그와 원수가 됐다고, 왕위를 사울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넘겨줬다고, 또한 사울을 블레셋 사람 손에 넘겨줬으므로 내일이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스올에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 말을 듣고 충격 받아 졸도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말대로 그는 다음날 길보아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당합니다. 그는 블레셋인에 의해 죽는 걸 수치로 여겼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사울 이야기를 대강만 살펴봤는데 세세하게 읽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내용은 설교에서 다룰 수는 없고 언젠가 사울과 다윗에 관한 책을 쓰게 되면 그때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은 누구입니까?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저자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1백 쪽 내외의 작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 첫 문장을 “예수는 착한 사람이었다.”라고 썼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었을 때 첫 문장에서 멈춰서 한동안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분이었다는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고 명쾌한 진실을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하고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을 좋은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도 그를 좋은 사람이나 본받을만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의 생은 다윗의 그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사무엘서는 다윗에 대해 드러내놓고 호의적입니다. 그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사울에 대해서는 비호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는 사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서 사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은 확실히 전에 비해 난폭해졌습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다윗을 쫓아가서 죽이는 데 전념한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윗 역시 순수하고 순진하게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자기가 사울 대신 왕이 될 줄 알았고 그래서 계획적으로 사울의 사위가 된 걸로 보입니다. 그 역시 적극적으로 왕위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사울이 강박증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왕위를 지키려 했고 다윗은 냉정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계획적으로 왕좌로 다가갔다는 점일 겁니다. 사울이 탐욕스러웠습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욕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달리 탐욕스러웠다고도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은근하지만 다윗이 더 탐욕스러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성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이 누구를 편애하고 누구를 버리고 누구에게 시큰둥한 게 아니라 각자가 그렇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울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원치 않았는데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그는 남달리 탐욕스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가 겪은 고통은 저지른 잘못에 비해서 도에 지나쳤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컨트롤할 수 없는, 자기보다 엄청나게 큰 힘에 의해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고도 보입니다. 이번 사울에 대한 설교는 사울처럼 하느님에게 버림받았거나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생은 운명적으로 결정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운명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보는 그리스 비극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았고 사람은 그렇게 하느님이 정한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닙니다. 사울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데는 그 자신의 결정도 큰 역할을 했던 겁니다. 이 얘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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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5)


챙기지 않은 것


배낭에 이런저런 짐들을 챙기며 일부러 까지는 아니라도 굳이 따로 챙기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도였다. 지도를 챙기지 않는 일은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DMZ을 따라 걷는 길은 짧지도 않고 단순한 길도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길이 낯설 것이었다. 길과 지명과 하천과 산과 고개 등이 상세하게 적힌 지도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알아보지 않았고, 구하지 않았고, 챙기지 않았다. 성격이 꼼꼼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다가오는 불확실성과 한계를 직접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미리 챙기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숙박 장소였다. 열하루의 일정이니 열흘은 어디선가 잠을 자야 한다. 걷다가 날이 저물거나 걸음을 더 옮길 수가 없게 되면 그곳이 어디라도 잠을 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숙소를 확인하고 정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일 수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로드맵. 그래도 길을 걷는 내게는 가장 좋은 지도였다.


하루 종일 걸었으니 씻기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다음날 떠날 준비도 해야 할 것이었다. (막상 걷다보니 숙소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몸을 챙기는 일이었다. 발가락과 발바닥에 생긴 물집을 처치하는 일 하나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런데도 어디에 어떤 숙박 시설이 있는지를 알아보지 않았고, 당연히 예약을 한 것도 아니었다. 혹시라도 한뎃잠을 자는 경우가 생기는 것 아닐까 싶어 배낭 바닥에 조금 두툼한 겉옷 하나를 챙겨 넣었을 뿐이었다.


거동이 수상한 자로 신고가 되어 자주 군부대에 끌려가게 될 것 같다고 농 반 진 반으로 걱정을 하는 친구에게, 그것은 걱정이 안 되는데 갑자기 멧돼지 떼가 검문을 하자고 길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 된다고 농 삼아 대답을 하기도 했다.


알면서도 허술하게 떠나려고 했던 데에는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광복 장로님이 적어준 로드맵이었다. 열하루 동안의 일정이 적힌 로드맵에는 내가 걸어가야 할 동네와 동네의 이름, 동네에서 동네로 이어지는 길, 어디쯤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지 잠을 자야 하는지, 이따금씩은 어떤 식당이 맛이 있는지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것을 신뢰하기로 했다. 프린트한 로드맵만을 들고 낯선 길을 장시간 걷는 것이 무모하다 싶으면서도 그것만을 의지해서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DMZ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 혼자 걷는 나를 위한 세심한 배려가 담긴 코스와 일정, 그보다 좋은 지도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로드맵을 손에 들고 길을 걷다가 문득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삶에도 로드맵이 있다면 과연 그 로드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얼마든지 각자가 다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성경이 로드맵이 아닐까 싶었다. 삶의 걸음을 이끄는 로드맵이 되기에 충분하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은 이내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로드맵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은 위태한 것, 맨 몸으로 맨 끝에 서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과 넌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을 나눈 뒤 그들이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이 바라는 것이 넌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이 바라는 것보다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볼 때 훨씬 세속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믿음 생활을 하는 부모들이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 부모들보다도 실제적으로는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로드맵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욕심을 따라 살면서, 그것을 정당화해주고 실현시켜 주는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걷기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이들 중에는 함 장로님이 작성한 로드맵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아까운 자료, 혹 다음번 같은 길을 걸을 누군가에게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 장로님께 말씀을 드리니 그리 꼼꼼한 자료가 아니라면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러라 하신다. 평생 기자의 길을 걸어오며 누구보다 분단의 그 땅을 많이 밟으신 장로님, 그 또한 장로님의 백발과 호방한 웃음과 잘 어울리는 일이다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http://fzari.tistory.com/956

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http://fzari.com/959

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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