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0)


인간의 어리석음을 하늘의 자비하심으로


이때껏 찾은 적 없었던 ‘평화의 댐’을 걷는 기도 중에, 걸어서 처음으로 찾게 될 줄이야. 방산을 떠나 화천으로 가던 중에 ‘평화의 댐’을 지나게 되었다. 17km의 거리를 오전 내내 부지런히 걸었더니 점심때쯤 ‘평화의 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평화의 댐’은 이름과는 달리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86년 당시 건설부 장관은 모든 국민이 깜짝 놀랄 만한 성명문을 발표했다. 북한을 향하여 ‘금강산 댐’ 공사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문이었다.


평화의 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일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북한이 휴전선 북방 10㎞ 북한강 본류와 금강산이 만나는 곳에 대규모 ‘금강산 댐’을 건설하여 물을 원산 쪽으로 역류시켜 발전하는 공사를 진행 중인데, 이 댐이 완공될 경우 북한강을 통해 휴전선 이남으로 흘러오는 연간 18억 톤의 물 공급이 차단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약과였다. 온 국민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이 ‘금강산 댐’을 붕괴시켜 200억 톤의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는 이른바 수공(水攻)을 벌이면 남한은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럴 경우 물이 63빌딩 중턱까지 차오를 수 있다며 방송에서는 연일 그래프까지 동원하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방송마다 경쟁하듯이 보여주던 자극적인 영상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63빌딩이 저 정도라면… 두려움과 공포는 매우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온 나라가 물에 잠길 것 같은 두려움이 이미 물에 잠긴 것처럼 퍼져갔다. 마침 그 때가 서울에서 열리는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둔 시점,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의 책략일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생각이 보태져 급속도로 번져갔다.


세계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든 평화의 종. 

이래저래 평화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조된 분위기는 대응댐 건설 계획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수공을 막기 위한 댐을 건설해야 한다며 국민들의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부의 발표를 믿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반강제적인 할당도 적지 않았다. 각 기업은 물론 초등학교 아이들도 코 묻은 돈을 보탰다.


그렇게 모은 성금이 모두 733억 원, 정부는 이듬해 대응댐 공사에 들어갔다.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국에 대한 관심들이 온통 금강산댐으로 모아졌고, 어수선했던 모든 것들이 슬그머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잠깐 가라앉는다고 영원히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가라앉는다고 모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평화의 댐 건설 당시 모금한 성금의 사용내역과 금강산댐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일자 김영삼 대통령은 감사원에 진상규명을 지시했고, 감사 결과 금강산댐의 위협과 이를 대비하기 위한 ‘평화의 댐’의 필요성도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평화의 댐’은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대 거짓말’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대학생들로부터 2위로 꼽히기도 했고, 〈워싱턴포스트〉지에서는 ‘불신과 낭비를 상징하는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 부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평화의 댐’은 이래저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평화의 댐’에 도착했을 무렵, 왜 그런지 기운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걸음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날씨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폭염주의보가 연일 문자로 날아오고 있었다. 국민재난처였던가, 날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삼가라는 내용이었다. 머리 위에서 벌침처럼 쏟아지는 뙤약볕은 물론 도로에서 후끈 바람에 실려 올라오는 지열까지, 길을 걷기에는 분명 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날씨였다.


‘평화의 댐’에 들르려면 경사진 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그냥 지나쳐 갈까, 지친 상태였기에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옮겼다. 내가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까, 그런 생각이 걸음을 옮기게 했다.


‘평화의 댐’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미국 서부에 있는 ‘후버댐’을 본 적이 있는데, 규모면에서는 뒤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저만한 구조물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댐에서는 요란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만한 높이도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어딘가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는 것인지 댐 곳곳에 불안한 만큼 키가 큰 크레인이 세워져 있었다.


'비목'의 배경이 되는 곰삭은 나무 십자가와 그 위에 걸린 철모. 

나라를 위한 무명의 희생과 헌신을 생각하게 했다.


‘평화의 댐’을 지나 정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계단을 오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에 부쳤다. 그러면서 비목공원을 지난다. 백암산 부근에서 십자 형태의 나무만 세워져 있는,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지키고 있는 비목을 보고서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쓴 시 ‘비목’(碑木), ‘비목’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다. 저만치 세월에 곰삭은 나무 십자가 위로 녹슨 철모가 걸쳐 있는 모습이 보인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돌에 새겨져 있는 ‘비목’을 눈으로만 따라 불렀다. 세상에는 평화를 가장한 평화 아닌 것들이 참으로 많다. 간디가 자주 인용했다는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선한 동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화의 댐’은 평화에 대해서 역설적인 말을 건네고 있다 여겨졌다.


어쩌면 깨어 있는 한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는 무지한 다수의 군중을 속이는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속는 자가 다수일 경우 속는 자들은 자신이 다수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다수에 속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고 지지하며, 고민하지 않거나 고민을 외면한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를 엄격히 구분하신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세계 30여 개의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 앞에 서서 ‘평화의 댐’ 일대를 내려다보며 한 줌의 기도를 바친다.


‘댐을 만든 동기야 어떻다 하더라도 이 댐이 부디 평화를 위해 쓰이게 하소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하늘의 자비하심으로 바꾸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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