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발로 선 시간의 은총


한희철 목사가 DMZ 380km를 열하루 동안 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얼마나 괴로웠으면…’이었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일까지도 길 위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심증이 확증이 되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글의 도입부를 읽으면서 가슴이 저릿해졌다. ‘이 착한 사람이 견디기 어려웠구나.’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그 너른 가슴으로 덥석 품어 안더니, 벽 같은 현실 앞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무모한 여정에 나선 것일까. 그것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올레길이나 순례길이 아니라 분단의 상흔이 고스란히 새겨진 접경 지역을 말이다. 왠지 그 아픔을 알 것도 같기에 선뜻 그 글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글을 읽기 시작했고, 멈출 수가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글을 다 읽고 나니 리베카 솔닛의 말이 떠올랐다. 리베카는 걷기는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라고 말한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 문장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등을 떠민 것은 절벽 같은 현실과 그로 인해 마음에 드리운 무거운 구름이었다. 폭우 속을 걷고, 또 폭양 속을 타박타박 걷는다는 것, 그것은 자기 육체를 극한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했을 때,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 이에게 길은 언제나 숨기고 있던 오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 예기치 않았던 이들과의 만남, 어떤 깨달음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그는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난 수많은 이들을 기억 속에 호출한다.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현존한다. 걷는 사람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이라 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떠올리고 함께 겪었던 시간을 회상하는 것 자체가 기도이다. 걷는 기도를 통해 호흡이 가지런해졌을 때 한희철 목사는 자기 발이 땅에 닿은 것 같았다고 말한다.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의무의 감옥에 갇혀 사람들을 대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그는 허공 위를 허정거리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던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의 발이 땅에 닿았다. 가속의 시간 속을 걸어가느라 허둥거리던 발걸음이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발걸음으로 변하자, 적절한 삶의 속도를 깨닫게 되었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내 발이 내 땅에 닿았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제대로 된 속도가 보였다.”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복이 이런 것일 게다. 홀로 걷는 이가 누리는 복은 또 있다. 마주 잡을 손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느꺼움 말이다. 나희덕은 <산속에서>라는 시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소중히 여긴다고 노래한다.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맞잡을 손 하나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위로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 터벅터벅 갈라진 땅을 깁고, 찢어진 마음을 깁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불원천리 하고 찾아와 함께 만남의 기쁨을 나눴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손이 된 이들이 아니겠는가.


길을 걸었기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은 여전히 지속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 몸으로 그 먼 길을 걸었던 이는 더 이상 그 현실 앞에서 울지 않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그는 홀로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이 내내 동행하고 계심을 알았을 테니 말이다.


글을 읽는 내내 탄식시를 떠올렸다.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의 바람을 뒤흔들고 때로는 흉포하게 찢어놓는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히브리 시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억눌린 함성을 토해냈다. ‘어찌하여’ 혹은 ‘언제까지’ 이런 일이 지속되는 것이냐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푸념은 언제나 가장 곤고했던 시간에 동행해주시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이끌었고, 그 기억이 회복되었을 때 팥죽처럼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새로운 신뢰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Solviture Ambulando’,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햇볕에 바래고 이끼가 달라붙은 낡은 표지판을 보며 한희철 목사가 드렸던 ‘어느 날의 기도’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폭풍 속 흔들려도

꺾이지 않게 하시고

외발로 선 시간

막막하지 않게 하소서.


그를 두고 지금 내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그는 기도의 마지막 연에서 이런 염원을 아뢰고 있다.


머무는 이 없어도 좋습니다.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갈림길 끝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가야 할 곳 제대로 가리키는

바른 표지판이게 하소서.


아우 한희철 목사, 그대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표지판이라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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