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

개그만도 못한 진실
-친애하는 아우님에게-

 

봄밤이 깊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어요. 의사는 저에게 자중자애하고 몸을 아껴 큰일에 쓸 에너지를 비축해 두라 하는데, 들을 때는 정말 그런 듯 싶다가도 또 그걸 못하니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된장 담그려고 겨우내 걸어두었던 메주들을 내려놓고 항아리를 몇 개 구입해 깨끗이 소제해 둔지가 벌써 일주일째인데, 날마다 ‘해야지, 해야지’하면서 바라만 보고 있소.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는지, 이것이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만 나는 게 영 부지런한 삶이 되질 않습니다. 부지런한 삶이랄 게 무어 있겠습니까. 하루 살고 하루 죽는 거지요. 아침이면 일어나 하루를 부지런히 시작하여 딴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주님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는 자리에 쏙 들어가 불 끄고 자버리면 되는 것을. 하지만 소박이 진짜 어려운 것인 줄은 분명한 듯합니다.

최근에는 틈틈이 운동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조금 마음을 멀리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선거 이후 뉴스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소마는, 요즘 전쟁이 나려는지 안 나려는지 하는 이야기도 다 내 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들으니 우리 국민들이 안보 불감증에 걸렸다고 소위 보수 언론이라는 데서 연일 수위가 높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는데, 내 참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지, 옛날 초등학교 시절처럼 머리에 띠 두르고 궐기대회라도 열라는 건지, 혹은 라면이라도 박스째 비축하면서 자기들의 난리에 호응하라는 건지, 그런 태도들이 더욱 더 위태롭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가장 좋고 유익한 해결책이야 결국은 옛날 전(前)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담판하듯이 누군가 중재라는 것을 해야 할 것 아니겠소. 그러나 그렇게 꼭 바다건너 사람들이 나서서 우리 사이를 중재해 주어야만 하는 꼴이란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요. 틈틈이 운동하고, 세상일에는 조금 거리를 두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서부터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바라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어 이렇게 늘 회개하고 회개하는 마음뿐이라오.

요즘 아내는 요가를 배우고 있는데, 몸이 부쩍 날렵해지고 건강이 좋아지고 있어요. 친구들을 만나도 가까이 지내는 목사들을 만나도 온통 건강 이야기 뿐입니다. 그러니 입으로야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결국은 건강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 아니겠소. 필경은 늙어서도 건강한 목사만이 이 중차대한 복음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겁니다! 아내가 나에게도 운동을 하라고 강권을 해서 저도 운동을 해보려 합니다. 아우님도 기대하시오. 어느 날 내가 몸짱이 되어 알량한 복근을 자랑하며 건강의 복음을 설파할 날이 올 지도 모르겠소이다. 아마 미국의 복음 전도자는 휘트니스 트레이너들일거요.

그러나 한편 저는 가끔은 죽음이라도 받아들일만한 마음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사실 많은 일로 상처를 받았고 ―엄살이라고 할까봐 걱정이 들긴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제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 같고, 나 하나 만으로도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짐이 지워진 것 같아 세상에 나서 무슨 일을 도모해 보리라는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이 아예 사라질 적도 많았답니다. 혼자 눈물 흘리며 운적도 많고, ‘하나님 왜 나의 길을 내셨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무슨 대단한 인물도 못되는데 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그저 아이들과 아내와 행복하게 살면 그뿐인데요.’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아직도 저는 그 해답을 모르겠어요. 역설이지요. 가장 고통스러운 그 속에 오히려 복음의 진리가 눈에 들어오고, 마음이 밝아지고, 희망이 생기니 미웁고도 감사할 일입니다.

옛날 쓴 일기에 이런 글이 있습디다. 지금 읽어보니 재미도 있어요.

K금식 기도원이라는 곳에 가서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보고 넋이 반쯤 나갔다. 임모(某) 라는 목사가, 대전 어딘지 제법 큰 교회 담임이라는 데, 자칭 세계적인 부흥사라면서 하는 설교가 어찌나 가소롭고 비루한지 가히 눈뜨고 볼 수 없고 귀 열고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모인 400명은 족히 될 만한 사람들이 두 손을 쳐들고 열광하며 아멘을 연호하는 장면을 보니 기가 차고 맥이 다 풀려버리는 것이었다. 암 투병중인 권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려고 함께 갔으나 나는 감히 그 자리에서 권사님을 붙들고 기도하려던 마음까지 달아나버려 냉랭하게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읽은 본문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의 장면이고, 설교의 제목은 “불 받으라”였다. 불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면서, 임재의 불, 치유의 불, 인도의 불… 하는 가소로운 해석을 구구이 늘어놓더니, 나중에는 이 나라를 공산당이 장악했다면서 두 번에 걸친 정권이 다 빨갱이였으니 나라가 망했다고 광증을 떠는 것이었다.

설교를 마치고 연단에 앉아있는 양복입고 넥타이 맨 그의 모습을 보니 한편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목사가 안 되었으면 깡패나 되었을 것이라는 그 사람은 자기가 여전히 동네깡패인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래 그 때 성령만 받지 않았어도 이런 흉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었는데’하는 생각이 들고, 성령이 뭔지도 모른 채 전도사가 되어 동네 사람들을 패주는 깡패 전도사였다던 그가 도대체 애초에 어떻게 전도사가 되었던 것인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곳 기도원이 그 정도로 심각한 곳인 줄은 몰랐다. 돌아올 때 다산(茶山) 생가에 들러 조금이나마 마음을 씻을 수 있었던 것만이 다행이었다.

저는 요즘 개그 콘서트에서 ‘~~하면 뭐하겠노. ~~했다고 소고기 사묵겠지.’하는 프로를 재미나게 봅니다. 이 개그야말로 내 마음과 같습디다. 다들 소고기 사먹는 놀음에 정신이 팔려 그 놀음의 허무를 인식하지 못하잖아요. 종교야말로 이 시대에 그걸 일깨워주어야 할 텐데 개그 프로가 그걸 말하고 있으니, 개그만도 못한 진실이 지금 기독교의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얼마든지 충분하게 욕망 덩어리고, 위선 덩어리고, 죄의 덩어리 입니다. 더욱 그걸 부추겨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예전부터 꿈을 이야기하고 비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토록 대단한 꿈이나 비전이라면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네 자신이 한번 꾸어 보지 그러는가’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지요. 자기는 그걸 만들지 못하면서 남에게 그걸 말함으로써 곁다리로 자기의 꿈이나 비전을 이루려는 자들은 목사가 아니라 사기꾼이 아닐까요? 혹은 그리스도를 위한 야망이라 하겠지만, 우리 선수들끼리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맙시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그러한 야망을 비전이니 꿈이니 리더십을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아우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더욱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환기시키는 일입니다. 어떤 환기냐? 벗어던지는 환기입니다. 벗어던질 수 있는 환기입니다. 최근에 저는 어떤 교회 담임 목사의 표절문제로 이런저런 소리가 시끄러운 어떤 사이트에 가 보았는데 게서 발견한 것은 아직도 그 사람들은 그 교회가 뭐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해 못할 바 아니건만 아쉬웠습니다. 거기서는 이런 풍경이 안 보일 겁니다. 대단하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겠다고 하는 겁니다. 대단한 것을 대단하게 유지해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데, 저는 그만 염증이 나더군요.

제가 보기에 그들이 그렇게 힘과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에 그 능력을 다른 일에 쏟는다면 주님의 일에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진지한 신자들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만 한다면야 그 대단하다는 곳은 금세 시시한 곳이 될 것이고, 유치하고 어리석은 인간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그걸 때려 부수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금방 시들어 버릴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정한 자유는 행사하지 않고 그 명성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환기가 필요한 일입니까?

예전 신학교 시절 개강 심령 수련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우님도 기억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때 어떤 성경 공부 모임에 들어있었는데, 사실 그 모임은 우리 신학교에서 가장 활발하고 규모가 있었지요. 그날은 마침 저녁에 각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이라 우리는 많은 신입생들이 모임에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강사로 오신 분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이셨어요. 그분이 강단에 올라가셔서 하시는 첫 말씀인즉 이랬습니다. “신학생 여러분, 제가 지금부터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유일한 길을 제시해 주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하고 담대한 발언인지 모르겠습디다. 그분의 말씀인즉 제자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 중 요즘 문제가 되는 목사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었던 같아요. 제자 훈련에 목숨을 건 훌륭한 지도자로 자랑스러워 하셨지요.

저는 그때 속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학교로 말할 것 같으면 고(故) 박윤선 박사의 숭고한 학문과 경건을 모토로 하고 있는 신학교인데 한낱 제자 훈련 프로그램을 가지고 신학을 가르치려 들다니, 어불성설이 지나친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옥 목사님 개인은 훌륭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너무나 과한 자존감을 가지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 열정과 확신은 칭찬할만하다고 할지라도, 그 과신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해서 오히려 위태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동아리 모임에서 다시 한 번 제자 훈련의 위력과 위태로움을 확인해야만 했던 겁니다. 신입생들의 거의 전부가 제자 훈련 동아리로 갔고, 우리 성경 공부 모임에 온다고 약속했던 전도사들도 오지 않았지요. 과연 옥 목사님의 유일한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은 저에게는 유감이었지만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 자신이 선견지명 있음을 자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한들 얼마나 한심한 유치함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옥한흠 목사님은 대단하신 설교자요 목회자로 존경하고 있지만, 그분은 다른 측면에서 종교를 잘못 가르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증거가 그분이 자랑하시던 제자들과 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교회를 바로 세우고 개혁하겠다는 의지 속에서도 보입니다. 일종의 구획된 엘리트주의에 오염되어 있어서 전체로서의 세상을 향한 교회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할까요. 그래서 정말로 이 시대에 시세를 분변하며 고뇌하는 목회자들이 고군분투하는 그런 교회들로 잦아들기를 거부하고 어찌하든지 그 터전에 머물러 그 명성과 전통과 세력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과감하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주지 못하는 걸까요?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들여진 줄도 모르지요. 그들은 광야에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온 줄을 모르고 있어요.

아우님 잘 아시겠지만, 저는 복음에 있어서 가장 진실한 힘은 진리의 아나키즘적인 성질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히 두드러진 사단은 조직과 세력에 대한 권위입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교회 어디서든지 보는 것은 목회자들의 관료화입니다. 목사들이 관료가 되면 그걸로 복음은 끝입니다. 신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 교육은 관료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관료들은 관변적인 말과 제스처밖에는 할 줄을 모릅니다. 신중한 듯 행동하지만 그들은 위선자들일 뿐입니다. 위선자들이란 성경 속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같이 고대문서 속에나 등장하는 죽은 인간들이 아닙니다. 자기의 처세를 짐짓 고민스러운 듯 하면서 결국엔 언제나 세상과 묻어가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럴 바에는 어찌 목회자가 되었으며, 그럴 바에는 어찌 설교를 하려고 했을까요? 그런데도 책임 있는 성도들이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런 자들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그런 자들에 붙어서 은근히 자신들의 결단을 모르쇠하고 있으니, 그것은 사실 위선의 합작입니다. 물론 그 자신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점잔은 줄을 알겠지만 말입니다.

아프지 마시오.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힘을 기릅시다. 아마도 스스로 사는 일에 굳건해 질 때만이 우리는 이 길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나 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길이 아니겠소. 병상에 있다는 소식 듣고 전화도 못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늘 생각하고 있다오. 우리 끝까지 신의로 삽시다. 훗날에도 서로 어울려 아름답게 우리의 이야기를 마칩시다. 그러려면 건강해야 됩니다. 어서 힘을 내시오. 내 주변 사람들의 덕담처럼 제가 큰일을 할지 못할지는 모르겠소만,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감동 있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사실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매우 낙천적인 사람입니다. 언제나 기도하기는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일관된 주제가 들어있어요. 나는 그것에 ‘시원(始原) 상쾌함’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쉽고 단순하고 착하고 아름답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어린 시절 에덴동산 같은 평화와 기쁨을 주는 세계입니다. 주께서 진리를 탐구함으로 시원의 상쾌한 길에 이르는 비밀의 첩경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찬미 예수. 양지에서. 그대의 좋은 벗 천 목사 드림.

*이 글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우에게 지난 봄에 쓴 편지입니다. 그가 많이 아팠었는데 저도 아파서 그만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봄을 기다리며.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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