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3)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예레미야 1:6).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예레미야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슬픕니다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슬프다니!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예언자가 보인 반응이라 하기에는 어이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믿음이 적고 약해 보인다.

위대한 주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할렐루야!” 하며 두 손을 들든지, “영광입니다!” 하는 뜨거운 반응을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사막 동굴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자를 사탄이 찾아왔다. 빛의 천사를 가장하고서. 사탄은 수도자에게 나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내서 온 빛의 천사입니다라고 했다. 그 때 수도자는 잘못 찾아왔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낼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사탄은 즉시 그를 떠나갔다고 한다.

어쩌면 예레미야의 그런 점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신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직하다는 것이야말로 진실함의 근거,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그 마음이 진실하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사람 앞에서는 잠깐 대단한 도구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정직한 영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릇 됨을 보신다. 그릇의 크기는 외양의 크기가 아니라 나를 얼마나 비워냈느냐 하는 것이다.

슬픕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흐인데, 좋지 못한 일을 만났을 때 놀라고 당황하여 탄식하며 내뱉는 외마디 소리라 한다. 같은 말을 에스겔 414절에서는 오호라로 번역했다.

그러고 보니 히브리어 아하흐와 우리말 오호라가 비슷하게 들린다. 어느 시대나 사람의 탄식은 비슷한 유형, 비슷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탄식부터 한 예레미야는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고 대답을 한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말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하신다.

사람이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심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누군가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말을 잘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입에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시기 때문이다.

말을 잘 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어눌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그런데 보라.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 앞에 말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사람들 또한 말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따른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기셨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 시대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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