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26)


'큰형' 이대호의 표정


이상하게 야구를 시청하고 싶더라니. 야구를 좋아할 만큼 인내심이 있지 않은 성격임에도 이상하게 야구를 시청하고 싶더라니. 7, 03으로 일본에게 지고 있던 경기를 우연히 보고도 계속 채널을 고정하고 싶더라니. 이미 예선전에서 05로 일본에게 발렸던경기의 재방송이 될 수도 있음에도, 기꺼이 보고 싶더라니.

 

결국엔, 일을 냈다. 9회초 마지막 공격에서 43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야구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자로서의 짧은 렌즈로 봤을 때, 이 경기의 일등공신은 이대호였다. 역전 안타의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더 큰 그의 공로는 바로 표정이었다. 그는 연신 웃었다. 역전의 발판이 마련되었을 때, 웃었다. 그게 일본 야구판을 평정한 큰형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역전 기회에서도 그랬지만 위기의 순간에서도, 그는 웃었다.

 

노아웃 43의 상황, 더 득점을 낼 수 있었던 기회에서 홈런성 타구가 일본 외야수에 의해 잡혔을 때 한국 선수들 모두 아쉬운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1점 차 리드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이대호는 활짝 웃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후배(동료)들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것이 형의 역할이고, 중심의 숙명이라 알고 있는 이니까. 기(氣)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일시적 두려움이 팀을 압도할까봐,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이대호의 뒷모습. (사진=연합뉴스TV갈무리)


엉뚱하지. 그 순간 나는 왜 ‘2014 브라질월드컵이 떠올랐을까. 20대 중반의 구자철이 주장이었고, 형님 역할을 해야 했던 박주영은 만성 컨디션 난조로 자기 코가 석자인 때였다. 축구 전문가들이 이미 평했듯, 기회와 위기의 순간에 경기장에서 바라볼 형님이 없었다는 것이 16강 진출의 패착이었다.

 

영웅 박지성영웅 박찬호가 떠오른 것도 그때쯤이었다. 박찬호가 나오는 메이저리그 경기는 빼놓고봤지만, 박지성의 경기는 빼놓지 않고보았었다. (무엇보다 박찬호의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찬호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다는 이야기를 듣고, 게다가 연봉도 기부를 하고, 후배들에게 안타를 두들겨 맞을 정도의 구위로 시즌을 감내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성육신의 감동을 느꼈었다. 부와 명예, 다 쥔 그가 왜? 자신을 염원해준 한국의 야구팬들과 후배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양자물리학을 몰랐겠지만, 육감으로 그의 실력에 한국팬들의 공로가 있음을 알았다.)

 

 

최저연봉 2,400만원으로 계약하는 박찬호 선수. 그마저도 기부. (사진=한화이글스홈페이지)


박지성은, 2014년 월드컵 때 홍명보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복귀를 고사했다. 물론 이미 후배들에게 자리를 열어주고 싶다며 국가대표 은퇴식을 한 마당에 다시 번복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무릎 부상으로 인해 현역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프로의 세계에서, 그가 여론의 부름을 뿌리쳤다는 이유로 (어설픈 민족주의로) 그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당시에는 그가 없이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과론적으로 아쉽다는 말이다.


2014 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후, 고개숙인 기성용. 2018 월드컵에서 그는 '큰형'이 되어있을 것이다. (사진=MBC중계화면 갈무리)


네들란드에서 화려하게 은퇴한 박지성. (사진=아인트호벤 트위터)


어쨌든, 어제 이대호의 표정은 큰형이었다. 그이 때문에 나는 흥미를 잃었던 야구에 다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경기 후 이대호는 "후배들이 기회를 살렸기에 지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표정 하나, 말 한마디가 역사를 바꾼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하루 종일 불안한 최근의 어느 날이었다. 이사 준비과정에서 순탄하던 계약도 파기되고, 안 좋은 일만 거듭 터졌다. 힘든 사람들끼리 싸우는 걸 지켜봐야 했다. 사람들은 그냥 지켜보는 것은 쉽다고 말하는데 난 참 어렵다. ‘중도는 편한 게 아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고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불안함과 곤란함을 견뎌야 한다.

 

참 힘든 날이었다. 평소 자랑하고 자신했던 것들이 고스란히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변했다. 카톡 알림, 전화 울림에 심장이 쿵쿵 뛸 정도로 힘겨운 날이었다. 아내가 최고의 요리를 해주었으나 입맛이 없었다(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재앙수준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다 밤이 깊었을 때에 그날 처음으로 좋은 메시지’(福音)를 받았다. 카톡으로 도착한 기프티콘이었다.

, 직접 주고 싶었는데,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날도 추워지고 조금 있으면 도리(아기)도 곧 태어나니 생각났을 때 보내드립니다.’

 

메시지에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은 트릭이다. ‘직접 주고 싶었을 텐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힘들어할까봐 급하게 기프티콘으로 보낸 것이다.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 선물을 보낸 이는 지금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힘든 날을 보내고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급의 어려움에 처한 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여유가 생겼을까?

 

 

그이의 마음에는 겨자씨만한 하나님 나라가 있었던 게다.

어느 지옥 같았던 날,

그렇게 나사로 손끝의 물방울이 내 마른 혀를 적신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표정 하나, 말 한마디가 역사를 바꾼다.

 

사족 지난 주일에 만난 어떤 큰형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유쾌하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내 마음은 평안을 되찾았다. 큰형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나다. ‘만 바라보기에 이 되지 못하는. 나는 언제쯤에나 '동갑내기' 이대호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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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일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현실3

 

교회가 있으십니까?

 

어디 교회 다니세요?” 신앙인들 사이에서 흔히 주고받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로 장식된 건물, 안수 받은 목사, 성가대와 찬양대, 주일학교와 전도회와 같은 조직, 정기적인 예배가 있는 그곳을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교회라기보다는 예배당이라고 지칭해야 옳습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만나는 신앙인들 사이의 모임,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느 한곳에 고정될 수 없습니다.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유기적으로 출현하고 창조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친구간의 관계 속에서도,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도 교회는 구현될 수 있고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자들, 소집된 자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주류 문화와 주류 가치에 지배를 받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러 내셔서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 사건이 구원이고, 그 구원을 공유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절대 충성을 바칩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지상의 권력과 주권도 상대화 시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만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의 순종을 통해 현실이 되는 곳입니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말이 아닌 삶으로 살아내는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소속되어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살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울까요?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러한 참 교회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은닉되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분투하여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지상 교회에 소속된 많은 이들이 참 교회를 그리워합니다. 참 교회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짝퉁 속에서 진품을 발견하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를 쓰는 자들을 위해 종교 개혁자들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별할 수 있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첫 번째가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하고 거짓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하는 것, 참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덧붙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과 이념으로 말씀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런 태도를 통해 실상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위에 있음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분 좋게 수납할 수 있는 말씀만을 수용하고, 부담스럽거나 원하지 않는 말씀들은 삭제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그곳이 참 교회인가 거짓 교회인가를 자가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교회 모임 안에서 무엇이 선포되고 있는가 보다는 무엇이 선포되고 있지 않은가를 보면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자신의 구원받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기도의 응답은 강조하면서도 성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공평과 정의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감하며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만을 강조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순종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입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가르는 두 번째 지표는 성례를 신실하게 시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입니다. 성례는 좁혀 말하면 성찬과 세례이고, 넓혀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의 교제입니다. 소위 말하는 코이노니아가 온전히 누려지는 곳이 참 교회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지표는 참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는 이들에 대한 징계가 신실하게 시행된다는 것입니다. 지상 모든 교회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임과 동시에 여전히 세상 권세에 복속되어 있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중무장된 옛 자아를 아직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지 못한 자들이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는 세속 가치로 중무장된 자들이 교회 안에서 주인노릇하지 못하도록 교회 구성원 전체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깨어 있음의 증표가 바로 징계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의 징계를 논하는 것이 참 조심스럽습니다. 대부분 교회 문제의 주범이 목회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목회자가 저질러놓고 도리어 문제 제기를 하는 성도들을 향해 신천지네, 교회 파괴 세력이네 하면서 목회자가 징계권을 휘두르고 있으니 교회의 징계권에 대한 그 엄숙함과 존중감이 완전히 상실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참 교회가 더 그리워집니다.

위의 세 가지 기준에 근거해볼 때,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경계위에 서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교회가 있으십니까? 그 교회는 참 교회입니까? 부디 거짓 교회의 우산에서 탈출하여 참 교회의 품으로 출애굽하실 수 있기를 마음 모아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양진일/가향 공동체 목사, 하나님 나라 신학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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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일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현실(2)

신앙은 국적 교체의 사건이다

 

대학 시절,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리 똑똑하지도 총명하지도 않았던 친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권유로 이 친구가 맑스의 자본론 세미나에 참여하였고, 근현대사 공부 모임에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미나가 끝난 후부터 이 친구의 삶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제국의 음료라 하여 커피를 거부하고 민족의 차 율무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제국의 언어라 하여 영어를 거부하고 민족 음악과의 만남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집회 현장에 단골 참석자가 되었습니다. 불과 세미나 몇 시간 참여한 것 밖에 없는데 존재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친구들을 맑스의 세례를 받은 자라 칭했습니다.

맑스의 세례는 분명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자기만을 알던 존재가 맑스의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는 말끝마다 민족과 역사를 언급했습니다. 자기 한 몸을 민족과 역사의 제단에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타자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추구하며 실천했습니다. 저는 그때 맑스의 세례를 받은 자의 놀라운 변화를 목도하며 예수 세례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출처: Praytino(http://www.flickr.com/photos/prayitnophotography)

 

세례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왔던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와 함께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하고 결단하며 증거하는 의식입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앞에서 공개적인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의 사람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이 의식의 진중함과 엄중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세례 이후에 이전과는 다른 존재의 변화가 있는가를 묻게 되면 참으로 궁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예수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은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중무장된 이 시대의 주류 문화와 주류 가치에 동일하게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적 충성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외에 내 인생을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가 유일하게 존재를 다해 충성을 바칠 국가로 모시고, 예수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국적 교체와 주인 교체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되고,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들어왔을 때 당시 조선 사회는 신분제 사회였고 가부장제 사회였습니다. 그때 자신이 양반이고 남성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 사회가 추구하던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양반으로서의 특권, 가부장으로서의 특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조선의 가치와 문화,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순응하는 조선의 백성으로 충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 복음을 믿고 신앙하는 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순간, 이전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며 향유할 수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는 기독교 복음에서는 인간을 위계화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인간론의 핵심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양반도 천민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있음으로 인해 인간 모두가 존귀하고, 인간 상호간에는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수납하는 순간, 천민과 여인에 대해 그동안 취해 왔던 태도를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조선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는 양반이기 때문에 집에 있는 노비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되었고,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을 함부로 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결단하는 순간부터는 집에 있는 노비와 여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한 자세를 지속하는 것이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단순히 일요일에 어디 가서 예배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삶을 새롭게 전환시켜내는 힘인 것입니다.

양진일/가향 공동체 목사, 하나님 나라 신학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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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일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현실’(1)

신앙의 의미를 묻는다

 

겨울 한복판, 1월 중순이지만 날씨가 화창합니다. 햇살의 따사로움만으로 판단하자면 초봄이나 진배없습니다. 따스한 햇살의 기운으로 인해 몸이 노근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지 못합니다. 오늘 이 땅의 처해있는 현실과 그 안에서 표류하고 있는 교회로 인해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한국 교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굉장히 차갑고 냉소적입니다. 비판을 뛰어넘어 비난과 조소가 가득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한국 교회는 이런 신앙인들을 좋은 신앙인이라고 칭찬해 왔습니다. 교회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기도 한 번 했다고 하면 세 시간 스트레이트로 하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 거기에 전도에 대한 열심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간직한 이는 좋은 신앙인이었고, 반대의 모습을 간직한 이는 신앙이 안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준에 근거하여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신앙의 계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이 기준에 부합한 신앙 좋은 사람이 수십만, 수백 만 명은 족히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수백, 수천 번 드린 사람하고 예배를 한 번도 드려보지 않은 사람, 설교를 수백, 수천 번 들은 사람, 성경을 몇 독 한 사람하고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의 가치관이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관이 다르지 않고 물질을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이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간파한 세상은 그렇게 많은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가에 대해서 정직한 답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있는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또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고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가 변화된 사람이 너무 부재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새로워지지 못한 우리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조롱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세상은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인생의 주인 되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앙인 한 명이 탄생하는 것은 단순히 교인 한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증대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에게 폭력적이었고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과 사기를 쳤던 한 사람이 말씀에 타격을 받아서 회심하게 되면 회심한 이는 그 사람이지만 그 존재의 변화로 인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많은 유익을 누렸습니다. 그 존재의 변화로 인해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와 자녀들이 구원을 받았고, 거짓말과 사기로 피해를 입었던 친구와 이웃들이 행복해졌습니다.

신앙인이 많아진다고 해서 국내총생산량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총사랑량, 국내총자비량, 국내총긍휼량, 국내총정직량, 국내총거룩량, 이웃에 대한 배려량 등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개신교, 가톨릭 합쳐 1,500만 명 가량 되는데 그들로 인해 한국 사회의 공공선이 증대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한국 사회는 이기심과 탐욕, 욕망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회가 우리에게 신앙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주장이 아닌 삶으로 신실하게 답변해야 합니다.

 

양진일/가향 공동체 목사, 하나님나라신학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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