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6)

 

인문정신과 기독교

- 기술이 아닌 삶 자체의 사랑을 위하여 -

 

 

1.

 

인문(人文)은 결국 삶에 대한 사랑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인문학을 한다면서 인간미가 없고 사람살이에 대한 너그러움이 없고 역사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것은 결격이다. 아무리 깊다해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지식과 지성의 축적만으로는 인문이 될 수 없다. 태생적으로 우연히 획득한 고정된 신념과 그 연역적 목표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도 인문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하물며 현세에 아부하고 권력을 탐하며 관청의 높은 자리와 연회의 상석에 앉으려 하면서 인문을 논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단지 필요에 의해서만 인문을 들먹이는 것은 그 인문을 낳으려 한 알의 밀로 썩어져간 선인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선대에 집적된 역사의 질량과 무게가 있는데 후대에 그 중량에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그것은 값어치에 값하지 못하는 것으로 쳐줄 값이 없다고 해야겠다.

 

마태복음에 보면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계명 중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대목(22:35)이 나온다. 예수는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둘째도 그와 같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다는 것이다. ‘그와 같으니 곧, 하나님을 사랑함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의 이중계명, 계명 중의 계명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격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인문이 아니고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연구하고 신학을 세운다. 조목조목을 따져 이치를 정하고 틀린 것을 바로잡고 헤아려 더 깊은 의미를 살핀다. ‘그와 같으니.’ 방식에 있어 똑같고 경중에 있어 똑같다. 사람살이의 모양과 형태와 자세와 태도를 자세히 연구하고 그것을 사랑하여 더 깊이 알려한다. 부족함이 있을까 더욱 더욱 세심히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틀린 것을 틀렸다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 인문이다. 이것이 온통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란 그와 같이 애틋하게 보는 것이고 친밀하고 다정히 대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사랑이 어찌 지식과 지성의 사랑일까. 그것이 어찌 추상과 관념의 세계, 도덕과 신념의 세계일까. 그것이 어찌 현재에만 관심을 둔 사랑이며 그것이 또 어찌 과거에만 관심을 둔 사랑일까. 과거든 현재든 옛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의 뜻이 없고서야 이게 다 뭐하자는 놀음인지가 불분명해진다. 불분명한 것은 공허하고 쓸데가 없는 것이거나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란 곧 인문하는 마음이다.

 

한낱 뒷골목을 떠돌던 노래구절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진실을 발견한다. 밭갈고 김매던 사람들의 길노래 속에서도 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살려낸다. 그리워하는 것을 더욱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낯선 땅과 유적들을 찾아다닌다. 옛날에 쓰던 물건, 살면서 남긴 기록, 자취, 흔적,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까지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복원을 시키며 간직해서 붙들려고 한다. 이게 다 무얼 위한 노력이겠는가. 사랑일 뿐 아니겠는가. 그럴 때 사랑이란 또 뭐겠는가. 애틋함이다. 단순함이고 선함이다. 거기 들어있는 진실의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것이라 해도 꾸미지 않고 위선 떨지 않고 소박한 그 맛과 멋을 알아채고 기억해준다. 또 제 아무리 고관대작의 유장한 글과 소리라 해도 그들의 위선과 뻔뻔함과 몰염치까지 기억해두려 한다. 이렇게 두루 아우른 사랑이 지향하며 가는 것이 공평하신 하느님이고 평등한 하느님의 나라다. 이렇게 우리가 다 똑같이 하나라는 평등의 인식 속에서 또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해주고 진실 되게 해주고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 또한 인문일 터이다.

 

그런데 왜 인문이 쇠퇴하다 못해 팔려가려고 장에 나온 구닥다리 농짝처럼 한심한 처지가 되었을까? 왜 인문을 한다는 사람들이 점점 옹색한 형편에 몰리는 것일까. 왜 인문도 모르는 인사들이 대학(大學; 큰 학문의 자리)을 차지하고 온 나라를 차지하고 그것들을 돈으로 경영하려 하는 걸까. 사람들은 특별히 교회를 세속적이라 욕한다지만, 나는 교회 역시 인문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다 같은 한 모습일 뿐이라 생각된다. 인문정신의 후퇴는 세상 뿐 아니라 교회(모름지기 절간이나 성당) 역시 경영일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인문정신의 후퇴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인문정신의 후퇴는 곧 사랑에 대한 상실에 다름 아니다. 인문에 대한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돈에 대한 사랑이 깃든다. 그 돈에 대한 사랑이 지금 세상을 지배하듯 교회도 지배하고 있다. 돈을 잘 벌고 잘 운영하고 재테크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세상에 인문학 강좌가 넘치듯 교회 안에서도 인문학적 성경읽기가 유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진짜 인문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이다.

 

 

 

2.

 

혹 인문이란 그저 반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이라 여기는 단순한 기독교인들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아무리 변화산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형체가 변형되도록 놀라운 세계를 경험했어도 그 산정(山頂)이란 이미 지상에선 묘지이다. 거기서 더 올라가 어쩌려는가. 공기가 희박하여 숨을 쉬지 못할까 걱정될 뿐이다.

 

종교개혁은 본래 인문주의의 결과였다. 제네바의 쟝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본래 설교자가 되려고 한 게 아니라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같은 인문주의자로서 문필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고자했던 작가지망생이었다. 인문에 ‘주의’를 붙일 때라면 글쓰기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잘 쓰고 멋들어지게 쓴다는 데서가 아니라 헛되이 말로만 인문주의를 하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니 글이 없어서야 사람의 교언영색을 분별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오늘날 살아남은 인문주의란 결국 글이 되어 남겨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입으로 책을 쓰는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그 책들이 수개월만 지나도 더 이상 소장할 가치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이는 소박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만도 못한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전만 부흥 시킨 게 아니었다. 자연과학을 발전시켰고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게 했다. 그것은 또 자연과학만이 아니고 지리상의 발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멋에 대한 인식을 촉발시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걸 깨우쳐 주었다. 그러나 깨우쳐준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미 그러한 충만한 영의 갈망과 자유의 움직임 가운데 그것을 신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누가 이것을 가로막으랴 하며 거기에 순종해 나갔던 것이다.

 

3.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1912~1984)는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예술이요 그 다음은 철학이요 그 마지막은 종교’라 했다. 거꾸로 뒤집으면 가장 바뀔 줄 모르다 마지막에 한꺼번에 표변해 버리는 게 종교라는 말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사실 이 모든 노력의 마지막 절정으로 교황권만을 패퇴시킨 게 아니었다. 중세기를 지배해온 음울한 공포와 미신과 전염병인 종교 자신을 패퇴시켰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교만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기독교 역시 중세의 가톨릭처럼 시대의 기차를 타고 잠든 사람과 같다. 기차가 달리고 덜컹 거려도 그는 잠이 깨지 않고 그걸 자장가 소리로 듣는다. 그러나 기차가 멈추면 비로소 화들짝 잠이 깨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시달려 몰려가고 있는지. 자기도 거기 시달려 끌려가면서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겸손이고 착한 일이 아니다. 또 교만을 말하자면 나같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이 교만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우리는 실제 거짓말은 못한다. 부자가 부럽고 권세가 탐스럽고 편하게 살고 잘살고 큰소리치는 게 좋긴 하다. 그러나 존경스러울 건 없다. 더더욱 그 앞에서 착한 분 좋은 분 멋진 분 칭찬에 값하느라 맘에도 없는 덕담 서비스나 하는 중세기의 교구담당 목사처럼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온 몸을 바치는 사람들을 볼 때 주님께 경배 드리듯 그 발아래 엎드려 입 맞추고 싶어진다. 그 인생의 가혹함과 강도 높음 앞에 절하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해방신학을 한다고 한다던데, 그야말로 아는 것이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지 싶다. 이 모든 게 제삼공화국의 업적이 아닌가.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태복음 5:3).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그 천국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미치고 싶기도 하고 미칠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다. 시인 뿌쉬낀(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1837)처럼 ‘주여 나를 미치게 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생생한데 왜 우리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걸까? 왜 신뢰받을 건 점잖은 중립이라며 진짜 자기를 감추는 데만 익숙할까? 종교마저도 몸짓에 불과해지는 이 상황에 이르면 종교개혁전야처럼 그것이 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이지만 과연 다시 종교개혁이 가능할지조차 회의적이다. 이것이 어디 교회만의 문제일 것인가. 교회를 향하여 욕한다고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진정한 삶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인문이 사라져가고 사는 기술로서의 예능프로그램 같은 인문이 발달한 대한민국의 전체적 분위기이다. 교회 또한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4.

 

부여를 다녀왔다. 아무 작정한 것 없이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다니며 유적과 유물과 식당들과 거리와 상점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돌이켜보니 신학교를 들어간 이후로 마음에 드는 시 한편을 써보지 못했다. 문학하는 지인들을 만나면 문학의 길에서 벗어난 내가 어색하고 남의 동네 온 것처럼 불편하다. 특히 목사나 기독교라는 나의 명함은 나뿐 아니라 타인들까지도 나를 경계 짓고 구획하고 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보따리 장사라도 풀어놓을 자기살이가 있어야 동네방네 단골을 만든다. 보따리 속에는 물건만 들은 게 아니다. 세상의 소식통이 되고 사람사이의 끈이 되고 중매쟁이가 되고 치료자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친구가 된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18) 하신 그분이 또한 “하나님은 골고루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을 뿌리시고 가리지 않고 사람을 비로 적신다”(마태복음 5:45)고 하셨다. 이것이 어찌 그저 선량한 덕담이겠는가. 그것은 과학인 것이다. 그러니 과학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신명기 5:7)와 “너의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라”(마태복음 5:44)는 말씀은 하나로 만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선행을 스스로 짓밟는 모순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예언이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 소리가 어디서 올까? 곧 사는 기술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삶 그 자체에 대한 사랑, 곧 인문정신이 아니고는 과학도 정치도 종교도 기계에 불과해진다. 우리는 어느 때 삶 자체에 대한 연애와 같은 사랑을 회복할 것인가?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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