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

 

신앙은 투기요 모험이다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시라서…”(마태복음 25:14-30).

 

성서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 한다. 머리를 끄덕거리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금언명구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시비(是非)를 붙이는 말씀이다. 따라서 어디에다 인용을 하고 사람을 훈계하기 위해서나 겨우 성경을 뒤적거리는 일은 매우 어리석다. 더구나 누구한테나 찍어 붙여 욕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려고 성경 말씀을 끌어대는 일은 너무도 위태하다.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은 공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다. 나는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도 변통은 해서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저 자는 무엇이람? 한 달란트도 건사를 못하고 저렇게 닥달을 받는 꼴을 좀 보라지…” 이런 생각은 되도록 삼가는 편이 이롭다. 한 달란트를 받았다가 주인의 질책을 받는 사람은 우리 모두의 신세이기 때문이다.

 

 

 

 

세례 때 받은 은총(교리상으로 ‘상존은총’이라 일컫는다)을 고이 간직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일하시는 분이시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시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요새 돈으로 백만 원 단위다)를 이자 한 푼 안 붙여 둔 종이야말로 악하고 게으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낙원의 태평성대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한 번 받은 은혜를 때묻지 않게 고이 간직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유감을 당하지 않고 귀찮은 문제에 부딪치지 않고 순탄하게 사는 사람이 복 많은 것이 아니다.

 

헐벗은 거지가 지나갈 때, 내가 부리는 사람이 생활에 쪼들려 기진함을 알 때, 내 동료가 부정과 불의에 희생당함을 보고 들을 때, 집권자들과 재벌들과 그 패거리가 이 나라를 뿌리째 썩혀 쓰러뜨림을 두 눈으로 목격할 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하는가? 성당에 들러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랫사람들에게서 착취한 돈을 교회에 헌금하고, 이 나라와 동료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맡기고 나면 양심이 편해지던가?

 

신앙은 투기요 모험이다. 하느님이 셈을 하실 때는 원금은 물론 이자와 소득을 따지실 것이다. 내 개인의 구원, 내 양심의 평안만 얻는 뾰족한 수는 없다. 하느님의 백성은 함께 멸망하거나 함께 구원받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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