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30)

 

저 어스름 때야말로 나의 명함

 

 

나는 돌파 속에서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모든 활동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돌파 속에서 나는 모든 피조물을 능가합니다.

돌파 속에서 나는 피조물도 하나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있던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

앞으로 영원히 있을 나입니다.

 

어느 젊은 여자가 수도원의 대문을 두드리며 엑카르트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문지기가 물었다.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어째서 그걸 모른단 말이오?”

“저는 소녀도 아니요, 아줌마도 아니요,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인도 아니고, 미망인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며, 또 신사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고, 일꾼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문지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엑카트르가 머무는 방으로 갔다.

 

“선생님, 좀 나오셔서 선생님을 뵙고 싶다는 이 희한한 방문객을 만나보시지요.”

 

엑카르트는 곧 문을 열고 나가 누가 자기를 만나고자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그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다시 늘어놓았다.

엑카르트는 깊이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여자는 자기가 열거한 그 모든 역할 중 그 어느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어느 것 중의 하나도 아니랍니다.”

 

엑카르트는 나중에 신도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인간이 여기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서로 명함부터 내민다. 명함에는 대개 과거에 지녔던 혹은 현재 지니고 있는 사회적 직함이 빼곡 적혀 있다. 명함에 적힌,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이런저런 기능들이 한 인간을 지시할 수 있을까. 인간이 단지 어떤 ‘기능의 소유자’일 뿐일까.

 

이야기 속의 무명의 여인은 그럴 수 없다고, 인간은 이런저런 기능의 존재 이상이라고 말한다. 무명의 여인은 소위 누구에게 내밀 명함 따위를 가지고 아예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여인은 어떤 외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표상한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순수한 인간’이란 엑카르트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지위, 혹은 어떤 기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그 속박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지상에 머무는 동안 수레처럼 굴려가는, 명함에 넣을 수 있는 이름들보다 큰 존재가 아닌가. 우리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는 까닭은 그분이 숱한 이름과 형상의 감옥에서 자유로운 분이기 때문이 아닌가.

 

누가 당신에게 누구냐고 물으면 당신은 어떤 명함을 내밀건가.

 

시인은 정현종은 자신이 지닌 명성 따위 짓뭉개고, 저물녘 ‘어스름’을 자신의 명함으로 쓱 내민다.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들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름 때야말로 항상

나의 명함이리.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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