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에로티시즘’이 피어난 꽃자리

 

1.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이 몸과 맘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아갈 때 그곳에 생명력과 기쁨이 있다.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생명력과 기쁨, 누구에게나 간절하다. 그래서 그 욕망과, 욕망이 추동하는 몸과 맘은 경계를 넘어선다.

 

어떤 때 경계선은 허용되는 금이다.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물으면 “꽃 찾으러 왔단다”로 답하며 오고가는 아이들 놀이의 금은 즐겁게 오가는 경계다. ‘위반자’를 환영하는 금이다. 즐겁고 유쾌하며, 그 사이 은근한 짜릿함도 있다.

 

그러나 금기의 국경도 있다. 개인이, 사회가, 나라가, 역사가, 아니 영원이 거룩함의 이름으로 불침(不侵)의 경고 푯말을 붙여 놓은 터부의 경계. 금기의 경계 저 편에는, 엄중 경고의 푯말을 넘어간 후에는, 열락의 천국이 있을까? 아서라, 그곳으로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케루빔들로, 또 움직이는 불 칼로 길목을 차단당한 곳은 단지 태초의 에덴만은 아니다.

 

헬라어 ‘에로스’는 하나 됨의 욕망을 의미한다. 영원을 향한 추동부터 인간 사이의 욕정까지, 장대하고 구구한 하나 됨의 욕망이 그 단어로 형용된다. 그 단어는 인간 삶의 위대함과 구차함 모두를 둘러싸기에, 사람살이의 구경(究竟)에 들어가는 열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열쇠를 쉽게 얻을 수 없다. 특별히 성서라는 몇 천 년 전 문서의 고고학적 층위를 조심스레 캐 가며 에로스의 흔적을 발굴하고, 거기서 얻어 낸 열쇠의 모양을 재현해 내기란 대단히 어렵다.

 

 

 

2.

 

한일장신대학교의 차정식 교수가 불쑥 탐사를 끝냈다며, 발굴 보고를 한다. 그의 학문이 단지 현하지변(懸河之辯)에 머물지 않음을 알지만, 그래도 이 탐사는 자못 놀랍다. 기왕에 알아 온 그 차 교수가 에로티시즘에 관한 책을 쓴다고 할 때, 나는 ‘햄릿이 그린 명랑 만화’를 떠올렸다. ‘신성한 괴물’(divine monster, 친한 학자들 사이에 방대한 양의 저술과 높은 질적 성취 덕분에 그가 얻은 별명)에게 그가 쓴 에로티시즘을 읽고 싶지 않다는 농담을 했다. 그는 자신의 에로틱한 ‘구석’을 주장했고,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괴물’이 지은 공저 포함 40여 권의 책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책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 교수가 조형한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무엇일까? 이 책은 에로스 또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특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가령 “에로티시즘은 그 합일을 훼방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에 이르는 모든 부정적 스캔들을 혁파하는 해체의 에너지”(250쪽)라는 정의가 있지만, 그것은 에로티시즘의 한 면을 언급할 뿐이다. 나는 일단 에로티시즘을 “한 인간이나 인간 사이의 에로스의 속내를 간파하고 드러내며, 그것의 현상과 결과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설명 사이에 드러난 생각의 꼴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하고, 이 책을 읽어 내려 한다.

 

3.

 

이 책의 진가를 단박에 알아보려는 이들에게 나는 “향유(香油)와 향유(享有)의 신학적 미학 – 예수와 한 여인의 거룩한 사치”를 읽으라고 권한다. 이 책에 만발한 꽃밭의 뿌리에 이 글이 놓여 있다. 이 이야기(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가 에로스의 정수를 드러내는 까닭은 여기에 남자/신성/천상을 향한 여인/육체성/지상의 지극한 구애와 간절한 하나 됨의 욕망이, 주위의 온갖 방해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승인된다는 데에 있다. 승인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되어야 하며, 찬미받아야 한다. 설레는 오감의 육체성이 가득한 지상의 열망은 위반과 금기의 스캔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와 신성, 그리고 천상을 향한다. 그 향함의 길에는 중층적 감정에 복받친 눈물과, 그 눈물과 함께 있었을 법한 (흐느끼는) 소리, 따사롭고 감각적인 살갗의 접촉과 열락의 향내가 가득하였다.

 

예수는 이 모든 에로스를 거절하지 않는다. 에로스의 대상인 그는 ‘여인’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여인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여인의 입술을 받아들였고, 여인의 머리카락을 받아들였다. 여인의 눈물을 받아들였고, 눈물 섞인 흐느낌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그 여인이 평생 모았을 법한 향유를 받아들였다. 아니, 수동적 받아들임이 아니다. 그는 여인의 모든 것을 향유(享有)했다. 그리하여 이 현장에서 남자와 여자, 신성과 인간성, 천상과 지상, 육과 영, 거룩함과 속됨의 황홀한 하나 됨이 탄생한다. 그것이 에로스의 궁극이고, 성서가 그려 내는 에로티시즘의 진모(眞貌)이다. 그 사이로 온갖 현란한 감각의 축제가 벌어진다. 아무리 낭비하고 사치해도 여전히 부족한 듯 보이는 역설이 생겨난다.

 

이 역설의 현장은 에로스의 대상의 죽음을 준비하는 곳이라고 선언되는데, 이로써 바타유가 말하는 에로티시즘과 죽음과의 관계가 선명히 드러난다. 이곳에서는 실선으로 되어 있는 금기의 경계를 넘는다. 죽음을 무릅쓰는 에로스 앞에 경계를 지키던 ‘타나토스’(죽음)는 잠시 그림자를 거둔다. 타나토스는 알고 있다. 굳이 그 자리에서 맞설 필요가 없다는 것! 또 에로스에 이끌린 이들은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걸어옴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끌린 예수가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보라!

 

남자/신성/천상을 향한 여인/육체성/지상의 이원론적 구분에 발끈할 필요는 없다. 비록 그것이 시대적 한계 때문에 성차별적이고, 육체 경시적이며, 지상적 삶을 부인하는 듯이 보여도 속내는 그런 것이 아니다.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의 통찰대로 이원론이나 이분법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도입된 장치이고, 이 이야기는 결코 성차별이나 영육 이원론, 내세와 이생의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문화적으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어도 이는 이른바 ‘더 높은 곳’을 향한, 아니 ‘높고 낮음’이라는 표현도 걸리적거린다면, ‘완전’ 혹은 ‘완성’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다.

 

이것은 에로스와 프시케의 헬라 신화를 떠오르게 한다. 자신의 남편 에로스와의 약속을 어긴 벌로 프시케(정신)는 갖은 고생을 다하며, 다시 남편인 에로스와 결합하고자 한다. 에로스를 향한 프시케의 고투는 금기와 경계, 그리고 죽음을 오가며 자신을 성숙과 완전으로 나아가게 한다. 헬라의 신화는 남편과 아내라는 알레고리를 차용하였다. 에로스와 프시케 신화가 “아내는 남편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과 상관없듯,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바의 골수에는 차별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러니 문자 자체에 속거나 분개하지 말아야 한다.

 

차 교수가 해설하는 향유 부은 여인 이야기에는 에로스의 정수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과정에 이르게 하는 힘, 곧 이 책의 호소력과 장점이 한껏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차 교수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에서 전통적 성서학자의 역할을 놓지 않는다. 차 교수는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에 “은폐된 전승의 곡절”을 해부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신약학자의 임무이며, 다른 분야의 학자라면 그저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본문의 형성과 구조를 분석하여 이야기의 층위를 드러낸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기본적인 힘이다.

 

차 교수는 성서 본문의 앞과 뒤, 본문과 본문 주변의 상황, 한 단어 한 문구에 맺힌 숨결과 몸짓에 민감하며, 그것의 요령(要領)을 조탁(彫琢)된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가져오고, 그것을 제 입맛에 맞게 조리하기보다는 성서의 침묵도 들으려 하는 성서학자로서의 자세와 능력이 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또한 이 책은 성서의 감각적 이미지와 표현들을 쉽게 정신화하지 않고, 반짝거리는 육감적 언어를 용감하게 사용한다. 차 교수는 근엄한 도덕에 짓눌려 신학자들이 망각한 파라다이스의 언어를 되찾아오는 임무라도 맡은 듯, 이러저러한 상열지사(相悅之詞)가 파득거리는 텍스트를 벌여 놓는다. 그 텍스트가 어떻게 가능한지 아는가? 차 교수는 발칙하고, 그 발칙함을 예수 앞에서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청년 예수의 욕망을 과감히 상상해 보기로 한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근접하면서 제 생명의 인간적 욕구에 최대한 배려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아우성치는 육신의 욕망에 따스한 위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가능했다. … 예수의 경우는 낯선 여인과의 우발적인 신체 접촉이라는 방식으로 하나의 희귀한 선례를 남겼다. …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변명 삼아 위선을 떨지 않고 그 신체적 공궤를 기탄없이 수락했다. 그만큼 그는 하루 한 시간의 감각적 ‘주이상스’(jouissance) 가운데 행복하고 자족했던 것이다”(264쪽).

 

예수가 즐긴 감각의 쾌(快)! 그 쾌를 곧바로 정신적인 것으로 전환하며 본문을 읽을 이유가 없다. 쾌는 육체의 표피적 감각 속에, 그리고 그 감각이 주는 실제와 실제에 겹친 판타지 속에 머물면서 정신화에 저항한다. 아름다움은 얼마나 자주 표피에 머무는가. 그래서 그것이 또 얼마나 덧없이 보이는가. 차 교수는 나아가 사회정의나 구제와 봉사에 갇혀서는 안 되는 복음의 생명력이 기억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에로티시즘이 없다면 복음을 마르크스주의나 도덕주의로 변환하려는 시도를 제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막 14:9)해야 한다. 이로써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복음의 주변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 속함이 천명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성서인문학의 성숙을 보여 준다. 그의 책 <신학의 스캔들, 스캔들의 신학>을 평하면서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저자의 ‘해석의 힘’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저자에게 힘 있는 ‘신학자’라는 명예를 건네려다가 그보다는 저자가 표방한 ‘성서인문학’을 떠올리며 그를 ‘성서인문학자’로 명명해 본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이고 이 시대에 불릴 만한 이름이다.” 이 성서인문학자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공감을 얻은 이론을 사용하며 성서 본문을 해석한다. 본문 해석과 무관하게 자신의 독서를 자랑하는 듯 난삽하게 이론을 치렁치렁 장식하기보다는, 본문 해석에 필요한 이론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본문의 의미를 한층 증폭시켜 준다.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에도 바쁜 이들은 다른 이들의 말을 굳이 가져올 이유가 없다. 각주가 거의 없이 쓰인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3권은 모든 학자들의 꿈에 가깝다. 저자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4.

 

흔히 서평은 책의 요약을 첨부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피할 이유는 없지만, 나는 굳이 요약을 제시하기보다는 이 책의 독법 하나를 제안하고자 한다. 내가 위에서 “한 인간이나 인간 사이의 에로스의 속내를 간파하고 드러내며, 그것의 현상과 결과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설명 사이에 드러난 생각의 꼴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로티시즘을 정의한 바를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틀에 따라 이 책을 읽으면 에로티시즘, 곧 성서가 에로스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이념과 생명력에 다가가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령 “번식과 금기, 그 위반의 경계에서 – 롯과 두 딸의 막다른 골목”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 공통의 터부와 관련된 성서 이야기를 다룬다. 롯과 두 딸이 육체적으로 합치게 되는 현상의 배후, 또 그것의 배경과 속내를 성서 저자가 어떻게 제시하는지, 그리고 터부를 넘어선 그 ‘에로스’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그 평가를 산출한 저자의 가치 체계, 다시 말해 평가의 이념이 무엇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에로티시즘'의 한 풍광을 정리해 볼 수 있다.

 

또 “관능의 춤과 좌절된 에로스 – 살로메의 춤에 대한 발칙한 상상”도 내가 제시한 틀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살로메 이야기에서는 살로메와 관련된 성서 본문이 낳은 후대의 예술적 상상력의 전후와 주석적 점검이 이루어진 후, 춤이라는 관능을 둘러싼 에로틱한 시선과 허장성세가 어떻게 억울한 파괴와 의로운 죽음을 낳았는지가 논의되는데, 저자는 이야기에 드러난 성서적 가치를 가지고 그 에로스의 후일담을 평가하고 상상한다.

 

독자들은 허무와 퇴폐, 그리고 파괴가 얽힌 그 자리에서 건강한 에로티시즘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성서의 논리를 파악하게 된다. 비록 성기기는 했지만 이 틀이, 차 교수의 유려한 언어의 숲 속에서 발견한 옹달샘과 오솔길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논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잠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요약의 도구가 될 것이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말할 학자는 없을 것이다. 학자들은 으레 ‘동의 안 해 주기’ 운동과 ‘나만의 차별성 갖기’ 운동을 겸하여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저러한 사항을 트집 잡기보다는 저자가 자신의 논지를 더 힘차게 밀고 나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차원에서 단지 두 가지 점만 언급하려 한다.

 

하나는 에로티시즘을 재빠르게 정신화하는 움직임에 저항하는 이 책의 미덕이 간혹 중지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분들은 통념적 기독교 윤리와 사뭇 다른, 짜릿한 도발과 위반이 이 책에 듬뿍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의 쾌가 발생할 때, 저자는 그것의 쾌를 속히 정신 혹은 영과 연결 짓지 않으려는, 곧 육의 쾌의 충만성을 감각적으로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간혹 저자는 에로티시즘을 성급하게 신학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때는 일반적인 감상과 반성의 수준에 머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애무의 절정에서 남자와 여자는 성기의 삽입과 흡수를 통해 접속을 완성한다. … 그러나 그 순간조차 가장 극적인 쾌락의 정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공허한 욕망의 허구렁이라는 것을 얼핏 깨닫는다. … 결국 남자와 여자는 그 뼈와 살을 물질적 매개로 자신의 영혼이 결국 하나님의 형상에 잇닿아 있음을 체감할 뿐, 그것이 이 땅에서 완성체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몸 되기의 생물학적 사실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신학적 교훈이다”(24쪽)는 김성동의 《만다라》에서 한 승려가 여인을 취한 후, 자신의 동료 승려에게 한 자조적 말과 맥락을 같이하는데, 이것은 종교적 감상이라기보다는 수컷의 허무감을 종교 언어로 가장하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또 이 책이 기왕에 위반과 금기 전반을 다루고자 했다면 요사이 한창 논란이 되는 동성애에 관련된 논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차 교수는 그럴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에로티시즘 전반이 아니라 범위를 ‘성서’로 잡는 한, 그것의 독특성은 다른 신화나 이야기와의 비교, 혹은 에로티시즘에 관련된 이론의 적용과 적용 밖에 있는 성서의 '삐짐'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창세기의 아담 창조 이야기를 풀이하면서 저자가 플라톤이 전하는 인간 창조 신화를 언급할 때(13쪽 이하), 나는 이 책이 이들 간의 비교에서 어떤 함의를 이끌어 낼지 궁금했다.

 

플라톤이 전하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세 종류로 창조되었다. 여자-여자, 여자-남자, 남자-남자. 인간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자 제우스는 그들을 절반으로 갈라 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평생토록 서로의 절반을 찾아 헤매는 데에 힘을 다 쓰게 하여 신들에 대한 반항의 싹을 죽였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것이 에로스의 기원이 된다. 서로 하나가 되고자 갈망하며 낭비하는.

 

그러나 저자는 플라톤의 신화 가운데 남자-여자의 자웅동체만을 언급한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는 것과, 단지 자웅동체만이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함의를 갖는다. 세 종류의 인간이 반으로 나뉘어 서로의 반쪽/짝을 찾아다닌다면 기계적인 산술로 동성애자의 수를 인류의 2/3으로 잡는 것인데, 이 신화 구조에 따르면 동성애가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고, 둘에게 생육과 번성을 명령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와 다르다. 두 이야기를 비교하면 성서의 이야기 구조,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성서 전승에서 동성애가 환영받지 못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성서 전통과 기독교의 교훈에서 마땅히 비판받고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동성애 논의에 뛰어든다면 이 책의 가치가 드러나기도 전에 소모적인 논쟁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보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찬사가 감소될까 걱정한 듯하다.

 

산뜻한 봄에 잘 어울리는 책이다. 불볕더위의 짙푸름과 함께할 만하며, 애상의 계절에 적합하다. 눈 속에 곱게 핀 꽃과 같이 기쁨과 힘을 주는 책이다. 성서의 지층을 우리말 지도도 없이 헤매다 나름의 길을 얻어온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이렇게 우리 삶에 아름다운 꽃자리를 펴 주었다. 유한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그 에로스의 꽃이여, 아찔한 광휘여, 우리 곁에 길이 머물라!

 

김학철/연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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