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2)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2 피칸더 그리고 네 명의 화자(話者)


지난 주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여정을 시작했습니다만 한 주가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판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음악 편력이 꽤 있는 사람이지만 저의 지난 한 주간 음악적 삶을 말씀드리자면 간단합니다. 지난 화요일 선배 목사님의 차안에서 신촌블루스의 노래 몇 곡을 청해 들은 것 외에는 지금까지 칼 리히터가 58년에 녹음한 마태 수난곡만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https://youtu.be/3icLbxogeV4)글을 쓰기 전에 음반을 한 번 더 들어 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마태수난곡을 깊이 만나게 되면 일 년에 두 세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지요.


마태 수난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어느 순간부턴가는 헤어 나올 노력마저 포기한 채, 온 존재를 그 품에 맡겨 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바다의 심연과 그 풍경에 압도되어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이제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나를 오선지에 걸쳐 놓고 읽어 내듯 마태 수난곡 앞에 내가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고 그 장면을 어디서 왔는지 모를 또 다른 내가 바라보는 야릇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토벤이 바흐를 일컬어 “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바다라고 불리어져야 마땅하다)”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독일어 말장난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강원도 산골 소년이었던 저는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늘 바다를 그리워합니다. 수영은 못하지만 여름에 바다에 가면 바다 위에 가만히 그리고 하염없이 몸을 맡기고 떠 있기를 좋아합니다. 바다의 이름은 저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 때문에 싸우기도 하지만 사실 온 세상의 바닷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 바닷물이지요. 저는 이 온 세상의 한 바닷물 전체가 자신의 온 몸을 빈틈없이 꼬옥 껴안아 주는 것을 느끼면서 마치 엄마 뱃속인 양 바다 속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고 무궁무진한 바다 속에서 자신이 분해되고 녹아버려 그저 한 작은 생명이 되어 버린 그 본향의 편안함을 좋아합니다.


바흐라는 또 다른 바다 속에 갇혀 버린 저는 그렇게 조금 더 그 안에 머물러 있고 싶지만 이제는 바다의 품 밖으로 나와서 그 이야기를 여러분께 풀어 놓아야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태 수난곡에 대한 사전적 정보나 잊혀 졌다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흔한 에피소드 등도 생략하겠습니다. 굳이 제가 아니어도 조금만 관심을 두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최소화 하고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저는 목회자와 연주자의 입장에서 텍스트와 연주를 중심으로 제가 느끼는 바흐를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다소 유치한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여러분들께선 이해해 주셔야만 합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앞에서는 모든 표현이 유치할 수밖에 없고 모든 찬사가 짧기만 할 것임을 여러분들도 곧 알게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칸더와 네 명의 화자

바흐는 네 개에서 다섯 개의 수난곡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두 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마태 수난곡의 초연은 1727년 성 금요일(Good Friday)에 토마스 교회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날은 4월 11일이었습니다. 마태 수난곡은 이름 그대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의 수난 부분에 해당하는 모든 말씀 구절이 전 곡에 그대로 다 담겨있을 정도로 성경 본문에 충실한 대본을 기초로 작곡 되었습니다.


대본은 피칸더(Picander)라는 필명을 쓰는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lich Henrici)의 것으로 성경은 루터판 독일어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성경 본문을 그렇게 충실하게 따랐다면 대본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대본 작가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피칸더는 마태 수난곡의 숨겨진 주역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흐름 중간 중간에 추가되어 나오는 첨가된 가사에 있습니다.


그 첨가된 가사는 크게 두 가지의 내용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Comment’이고 다른 하나는 ‘Prayer’입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말 그대로 그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이지요. 복음서 본문이 내러티브와 대사로 이루어졌으므로 정리하자면, 마태 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와 기도가 자칫 엄숙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이 수난의 성경 본문에 ‘은혜로움’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네 명의 화자만 잘 구분해도 마태 수난곡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피칸더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지만 바흐는 그에게 크게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 수난곡 바흐 자필악보의 표지에는 피칸더의 이름이 바흐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흐 자필악보 표지

‘마태복음에 따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아래에는 ‘주님을 위한 시 헨리치 피칸더, J.S. Bach의 음악 제 1부‘ 라고 쓰여 있다.


판소리와 수난곡

얼마 전 양재훈 교수의 책 ‘판소리의 신학적 풍경’을 통해 박동진 명창의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마태 수난곡은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판소리의 구성요소는 소리(창), 아니리(사설, 말), 발림(혹은 너름새, 몸짓) 그리고 추임새인데 이런 구성요소가 수난곡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리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와도 같습니다. 발림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몸짓에서 나타나고 판소리의 추임새는 ‘코멘트’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듯이 ‘코멘트’란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기에 ‘얼씨구’, ‘좋다’, ‘그렇지’등으로 대표 되는 ‘추임새’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판소리에서의 ‘소리(창)’는 ‘기도’에 해당하는 합창과 중창, 솔로 아리아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태 수난곡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위대한 고전음악을 듣는 마음이 아니라 둘러 앉아 판소리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는 마음으로, 혹은 예배를 드리며 나지막이 ‘아멘’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사의 이해가 필수적이겠지요. 제가 이 여정 가운데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마 이 부분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판소리와 창작 성서판소리가 얼마나 귀한 우리의 예술적, 기독교적 유산인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음악인 마태 수난곡과 같은 형식을 민중예술로서, 그것도 1인극으로서 품었기에 판소리라는 우리 음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예수전’이 음악적 토착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 우리의 바흐와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에 한 가지 아쉬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칸더의 부재(不在)’입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을 작곡가 혼자 만든다고 착각하곤 합니다만, 쉬카네더 없이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없었을 것이고 하이네의 시들이 없었더라면 슈만의 아름다운 가곡들도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면 대본 작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https://youtu.be/EZLjf_m6j0A ).


피칸더는 탁월한 시인이요 대본 작가이기 전에 성서와 신학에 깊이가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마태 수난곡을 깊이 만나가시다보면 곳곳에서 그의 놀라운 가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의 가사는 종교 개혁의 정신이 한창 무르익었던 당시 사람들의 성서적, 신학적, 신앙적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은 곳곳에서 대본의 미흡함이 드러나고 너무 서둘러 완성시켰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그 명맥마저 흐려진 상태라고 하니 그 슬픔이 너무나 큽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과 신앙적인 기본기를 더욱 탄탄하게 쌓고 다져야 하는 것임을 단호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열매인 바흐와 피칸더의 마태 수난곡이 지금도 살아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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