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이야기 1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사무엘상 9:15-17 -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오늘부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하려 합니다. 다섯 번 정도 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구약성서를 갖고 자주 설교할 생각입니다. 올해 초에 예언자와 예언서를 갖고 설교했고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를 갖고 설교합니다. 분량만 갖고 보면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의 세 배 정도 되므로 구약 대 신약의 설교 비율이 3:1이 돼야겠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이므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 신약성서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시효가 끝난 하느님 말씀이 아님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자주 구약성서를 갖고 설교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살펴보려 하는데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만 살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살았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뭘 배울 수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다.


사울의 일생은 다윗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사울의 삶은 다윗 등장 이전과 이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가문의 기스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히마스의 딸 아히노암과 결혼해서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이스보셋이라는 네 명의 아들과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둘째 부인 리스바와의 사이에서 알모니와 브비보셋이란 아들도 얻었습니다. 이런 점들만 보면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당시에는 부인을 여럿 두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는 이스라엘의 유력한 지도자 사무엘과 만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성서는 사울의 외모를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로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고 보통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고 했습니다. 이 묘사를 사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모두 데려다 놓고 그와 비교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는 말은 사실묘사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외모가 출중했음을 보여주려는 서술일 텐데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훗날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자를 만나러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 ‘이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고 말씀한 걸 떠올려보면 사울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더욱 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야훼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본다는데 웬 외모타령인가 말입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려서 사울에게 종 한 명을 딸려서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귀를 찾으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못 찾아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동행한 종이 가까운 성읍에 ‘하느님의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채’가 없다면서 그러기를 망설였는데 마침 종에게 은전 한 푼이 있다고 해서 그걸 갖고 하느님의 사람에게 갑니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한편 사무엘은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하느님에게서 그가 올 거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종을 식탁에 초대해서 잘 대접했습니다. 그는 서른 명 쯤 초대한 식탁에서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요리사에게 특별요리를 해오라고 명하면서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사울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무엘은 특정 부위의 고기를 사울에게 주라고 했을까요? 굳이 그런 것까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훼께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때 제물 전부를 태워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중 기름이 많은 일부분을 태워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삶아서 먹었는데 넓적다리 부분은 제사장에게 할당됐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넓적다리 부분을 사울에게 주라고 한 것은 그가 제사장의 자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나중에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명령대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영도자로 세운 후 두 가지 예언을 한 후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는, 가는 길에 새끼 염소와 빵 덩어리와 포도주를 갖고 하느님을 뵈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들이 사울에게 빵 두 덩이를 줄 것이니 받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소리 지르며 예언하는 일군(一群)의 사람들을 만날 터인데 그때 사울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강하게 내려와서 딴 사람이 돼서 그들처럼 예언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사울은 하느님의 영을 강하게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얘기는 그가 사람의 의도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됐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일은 고작 서른 명 정도가 보는 앞에서 이뤄진 사건이었으므로 이를 공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으니 사울에 속한 베냐민지파가 뽑혔고 계속 범위를 좁혀나가니 기스의 아들 사울에 뽑혔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사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오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왕이라는 중책을 맡는 게 두려웠을까요? 그러니까 숨어 있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백성이 대표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왕이 됐습니다. 두 번째 즉위입니다.


이어지는 얘기는 주로 그가 치른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포위하고 주민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눈을 뽑아버리겠다는 무자비한 말로 위협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밭에서 소를 몰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왕이라면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나랏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는 왕이 돼서도 소를 몰고 다녔다니 좀 어이가 없긴 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회의 발전 정도가 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사울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에 전에 그랬듯이 사울에게 하느님의 영이 세차게 내려왔습니다. 그는 분기탱천해서 소 두 마리를 잡아 토막을 내어 각지에 보내서 군사를 모아 암몬 사람들을 살육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해냈습니다. 이 일 후에 사무엘은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길갈에 모아서 사울을 다시 한 번 왕으로 세웁니다. 사울은 이로써 세 번째 왕위에 오른 셈인데 무슨 대단한 왕위라고, 밭에서 소를 몰고 다녀야 하는 초라한 자리에 오르는 걸 세 번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그랬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긴 고별사를 합니다. 고별사는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무대에서 퇴장할 때 하는 것인데 사무엘은 고별사를 한 후에도 여전히 이런저런 식으로 간섭을 합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더 많이 간섭하는데 그러려면 왜 고별사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사울에게서 멀어지는 사무엘

그 다음에도 전쟁 얘기가 이어집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이번에는 사울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두 군대가 대치했는데 전력은 블레셋이 훨씬 우세해서 이스라엘 군대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까지 있었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벌이는 게 유리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까닭은 사무엘이 전쟁터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그걸 주관할 사무엘이 안 와서 전투를 개시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제사를 주관했는데 제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엘이 도착해서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사울은 사정을 설명했지만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께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셨더라면 임금님과 임금님의 자손이 언제까지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야훼께서 영원토록 굳게 세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사무엘의 말에서 두 가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첫째, 제사를 반드시 사무엘이 주관해야 한다는 명령을 언제 야훼가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앞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명령을 야훼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둘째, 앞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그에게 제물로 바친 짐승의 넓적다리를 줬는데 그것이 그의 제사장 직을 인정한 상징적인 행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꾸중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지나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서는 이 점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블레셋과의 전투 얘기로 넘어갑니다. 사울 군대는 블레셋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력이 약했지만 아들 요나단의 습격작전이 성공해서 승리합니다. 요나단 군사의 습격을 받고 블레셋 군인들이 웬일인지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었다는 겁니다. 성서에서 이런 일은 하느님이 개입해야 가능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자기들끼리 싸우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 말대로 사울이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들은 이겼습니다. 이긴 방법도 하느님의 개입을 보여주는,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방식이었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윗이 등장하기 전에 사울이 치른 마지막 전투는 아말렉과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경우는 그 이유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그들이 길을 막고 대적했기 때문에 멸절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수백 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 어린아이든 여자든 짐승이든 가리지 말고 다 죽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놀랍게도 이 명령을 내린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하느님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 곧 모조리 죽이라는 ‘헤렘의 규율’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승리한 후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왔고 짐승 중에서도 좋은 것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을 심하게 꾸짖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다가 나중에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저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지요. 또 그는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이미 그대를 버리셨고 그대가 더 이상 이스라엘은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소.”라는 최후통첩 성의 말을 했습니다.


후회하는 하느님?

여기까지가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기름 붓는 의식(儀式)은 사무엘이 행했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했을 뿐, 궁극적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분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뭘 보고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의 출중한 외모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외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야훼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가 선택됐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왕이 됐습니다. 그는 왕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비 뽑혔을 때 짐짝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누군가 그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무엘은 계속해서 그와 대립했습니다.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입장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사무엘에게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무엘도 잃어버린 나귀 걱정을 하는 사울에게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누구에게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온 집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에게 걸고 있는 사무엘과 백성들의 기대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사무엘의 말은 야훼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각과 일부 짐승을 살려두자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하느님은 사울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왕위에 앉힌 걸 후회했다는 겁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하느님이 사울의 배신을 미리 알지 못해서 그를 왕으로 삼을 걸 후회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몇 줄 더 내려가면 사울이 자기에게 심판을 선언한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서 옷자락을 찢어졌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느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에서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므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우리는 어느 편을 믿어야 합니까? 이게 끝이 아닙니다. 혼란에 빠진 독자에게 설화자는 다윗 등장 이전의 사울 얘기를 결론짓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음부터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야훼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다시금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후회했다고 했고 그 다음으로 하느님은 사람과 달라서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금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왜 오락가락하는 걸까요? 이 이슈는 좀 더 큰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 속에서 하느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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