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삭개오의 계산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 19:1-10)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삭개오입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의 첫발을 디딜 때 한 번쯤은 꼭 들어보는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입니다. 때로는 노래의 주인공으로, 때로는 예화의 단골손님으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흔히 듣고 또 알고 있는 이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오직 한군데, 즉 오늘 본문으로 잡은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을 적은 4복음서의 많은 내용들이 서로 중복되고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주인공 삭개오는 아주 적은 부분에만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신앙의 세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키가 작고 세리라고 하는 그의 삶이 극적이고, 또 예화로 들기에도 좋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오늘 우리의 주인공 삭개오는 세리의 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계신 분은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구세주이신 이상 그 분이 가는 곳마다 구원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하여 자신의 구원사업의 성공을 만 천하에 공언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저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 주어진 본문에 의지하여 예수께서 생각하시고 또 선포하신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9절과 10절에 거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러한 예수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명 삭개오의 구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삭개오가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나 인격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받았다 하면서도 그의 행실이나 인격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의 구원은 가식이거나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삭개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고백 직후,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이 삭개오의 고백이 그의 구원받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이 고백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삭개오는 세리였고, 그것도 장급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이방인보다도 더 멀리하는 비난대상 1호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지배자 로마에 기대어 동포의 혈세를 뜯어낸 데에도 기인하지만, 그들이 비난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세리들에게는 월급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된 세금을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여 그 만큼만 총독부를 통해 로마로 보내면 그만입니다. 따라서 월급이 없던 세리들은 자신들이 거두어들여야 할 세금 그 이상을 추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천원 낼 사람은 만원을, 천원 낼 사람은 십만원을 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세리들의 수고비로 어느 정도 더 받아내는 것은 수긍이 가긴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항상 필요 이상의 돈을 동포로부터 뜯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족이면서도 비난과 질시의 대상 1호가 되었고, 로마군인의 도움이 없이는 폭행당할 우려 때문에 거리를 신나게 활보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그러한 세리들 중에서도 장급이며, 또 재산도 많았다 하니 그의 악랄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삭개오의 모든 재산은 사실 그의 부정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이며, 따라서 모두 토색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공언한 약속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자신의 약속을 모두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보다 4배 이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산은 초등학교 정도의 산수실력이라도 금방 나올 수 있을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공약 이후에 예수는 엄청난 선포를 하십니다.


“드디어 이 집에도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그것이 잘못된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런 공언을 하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오늘 우리는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누가는 19장의 서두에 삭개오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를 통해보건대, 그는 부자이고 세리장이었으며 또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누가의 이런 묘사를 통해 우리는 삭개오가 당시 유대인들 공동체에서는 철저히 소외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신체적 특징은 어릴 적부터 그로 하여금 심한 조롱을 당하게끔 하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체의 이상을 죄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삭개오의 유소년 시절은 ‘어두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동족에 대한 증오감이 점점 깊어져 가장 악랄한 세리 중의 하나로 자기 자신을 키워갔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돈에 대한 애착이 커갔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어받은 삭개오는 불행하게도 ‘하나님 없는 삶’에 더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음’을 실감해 가며 또 묵인해 갔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포들의 눈길 속에서 점점 삭개오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끼워주지 않는, 그야말로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를 우리는 이 누가복음의 행간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소문이 유대 땅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과도 잘 어울리며, 창녀와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까지 친구라 칭하며,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며, 병든 자들 고쳐주며, 전하는 말씀도 힘이 있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심지어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은 자신과도 같은 세리출신도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을 접한 후 삭개오는 이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흥분과 긴장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됩니다.


‘세리를 제자로!? 남들은 그렇게 비난하며 틈만 나면 잡아먹을 기세를 하고 있는 세리마저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삭개오는 계속 흥분합니다. 그 동안 동족에게 놀림을 당하고 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동족을 괴롭히며 받아야했던 자신만의 고민을 기억하며 그는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 수 없는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데 나를 이처럼 동요케 하는가?’


삭개오에게 있어서 예수란 존재는 ‘잊혔던 모든 것’을 회상하게끔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삭개오의 심장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까마득히 잊혔던 사랑이니, 가족, 친구, 이웃, 정,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단어들이 새삼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 고민의 연속 중에 그는 예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기 위해 삭개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돈 많은 세리장이 군중들 사이에 낀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죽음을 각오한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그의 신체적 특징으로 인하여 쉽게 사람들 눈에 뜨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수일 밤을 고민하다 결심합니다.


“그래도 난 예수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그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키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이웃들의 놀림의 대상이었던 이놈의 작은 키가 다시금 예수로 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무겁게 합니다. 건장한 장년들 틈바구니 속에서 삭개오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을 발견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삭개오는 군중의 동요를 금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쏟아질 자신에 대한 비난과 질시, 조롱 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롱이 이내 성난 군중들의 폭력으로 자신을 위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도 이번은 거의 마지막입니다. 정말 예수가 죄인들의 친구이며 세리마저 제자로 삼은 사람인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염치며 체면, 비난, 질시, 조롱 그리고 생명의 위험마저 모두 팽개치며 생애 최고의 도박을 감행합니다.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해 옆에 있던 뽕나무를 탑니다.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를 타자 동시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웅성거립니다.


“아니 저거 삭개오 아냐? 저 도적놈이 여기는 왜 나타나 가지고 기웃거리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세금이라도 거두려고 그러나? 아니 그런데 왜 나무는 타고 난리야…”


삭개오의 나무 타기는 뒤통수를 치는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과 더불어 이루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인간이라, 자신들과 같은 동포라, 친구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접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도…


단지 그는 눈으로 예수의 모습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죄인의 친구로 불리는지, 단지 그것만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 후에 그가 받게 될 질책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을 끊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그의 삶에 이번이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가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 씨, 어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루 묶고 싶군요.”


차분한 예수의 한마디가 삭개오를 비롯한 당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의 말씀을 접한 삭개오의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을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해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공포합니다.


“이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 동안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겠다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결심합니다. 바로 삭개오의 그 결심 안에 이미 구원의 싹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잃어버린 이웃을 돌려줍니다.


예수는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도, 이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면 오로지 그에게는 맘몬, 즉 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는 선포하십니다.


“삭개오 당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잃어버린 친구와 이웃을 회복하십시오. 여기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사람들 즉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다 하면서 여전히 혼자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는 그의 가족을 찾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이웃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삭개오로 하여금 잘못된 계산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의 잘, 잘못은 뒤로하고, 그의 고백이 말해주는 바는 곧 그가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았음을 보여줍니다. 돈이라 하는 것도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은 수단이지 가족과 이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가족이, 자신을 버렸던 이웃이 ‘자기에게 와 있음’ 그것뿐이었습니다.


오늘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계속 곱씹어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과연 건강한 것인가를… 삭개오에게 “당신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라고 선포하신 예수의 의미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

이웃 없이 살던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서 이웃을 발견하는 일

가족 없이 살던 사람이 바로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임을 깨닫는 일


바로 그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구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외롭거나, 외롭다거나 혹은 외로움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는 구원사역과는 너무도 먼 것들입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하나님, 이웃, 그리고 우리의 가족을 되찾으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 ‘하나 됨’, 바로 그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도 잃어버린 자가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로 인하여 혹은 나 때문에 소외받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낙오됨이 없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 가족과 같이 지내며 그 안에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가 구원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선물’이 함께 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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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다 보면, 어느새

내 바구니에 풍요로운 결실이 가득하다


- 김기석의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고


믿음


김기석의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묻기만 해온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 책의 저자에게서 대화의 상대가 되어, 혹은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해묵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을 수가 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혹은 ”믿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눅 18:8) 예수께서 그의 청중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리스어 본문은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다. 당신이 올 때 이 세상에 과연 “믿는 사람”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나, 당신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진정한 “믿음”을 보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나 다 같은 말이다.


예수 당시는 이미 그가 살던 땅이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종교가 하나 더 늘어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와 유럽까지 퍼져 종교 인구는 더 많아졌다. 7세기에는 같은 뿌리에서 이슬람 종교까지 나와 아랍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예수가 당신이 다시 이 땅에 올 때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한 말은 종교 인구의 감소를 걱정하신 것이 아니고 종교의 풍요 속에 믿음의 부재를 걱정하신 말일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걸어오는 저자의 주변 인물들, 저자의 편지를 읽는 폭넓은 수신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한 반성이다. 이것을 한 말로 요약한다면, 이 땅에 다시 오신 예수가 그렇게 찾으려 했던 “믿음”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화

저자의 대화 상대자는 아버지와 인생문제 신앙문제를 논할 만큼 성장한 자식이거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신학대학 동기생 친구이거나, 교회 안에서 생각이 깊은 청년 교인들이거나, 이 땅, 이 세상에서 살면서 걱정이 점점 많아지는 일반 교인이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과 기독교를 싸잡아 비판적으로 웅시하는 예리한 여성이거나 [이 책의 제목 “인생은 살만한가”는 바로 이 여성이 저자와 대화하다가 제기한 예정에 없던 질문이다. 고위공직자의 자살을 두고서 죽음과 살인과 그것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보면서 “인생은 살만한가”를 묻고 있다], 질문이 많은 한창 때의 학생이거나, 저자와 함께 살면서 저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아내다. 대화 상대자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늘 당면한 문제를 숨기지 않고, 불편하지만 꺼내어 가지고 저자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독자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살피고, 자신들의 믿음을 살피고,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더 넓고 깊게 파악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다보면,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단계로 스스로 승화하는 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이든,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뇌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같은 문제로 고심하던 작가들이나 신앙인들의 의견을 그들의 작품(시, 소설, 미술, 기타 장르)을 통해서 듣다가 보면 대화는 어느새 상상도 못한 차원으로 옮겨진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이 대화에 스스로 참여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벧전 3:21)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확신까지 가지게 된다.


편지

이 책을 읽다보면 남의 대화를 엿듣고, 남의 편지를 엿본다는 어색한 부담은 금방 사라진다. 엿보라고 엿들으라고 내놓은 것이니까.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가 정확히 누군지 잘 기억은 안 되지만, 내 확신으로는, 냉천동 신학대학의 어느 신약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내 연구실로 찾아 온 그는 내가 신약성서 중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는 것을 보더니, “왜 남의 편지를 읽어요?” “남의 편지라니?” “지금 읽고 계신 그 편지 수신자가 누군지 모르세요? 선생님께 온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로마에 살고 있던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잖아요?” “그러게, 정말. 내게 온 편지가 아니네.” 그는 웃자고 한 얘기였겠지만, 그 이후, 사도들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그 젊은 후배 교수의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우리의 저자 김기석은 이미 편지 문체의 기원과 기능을 잘 알고 있다. 자기의 독자 일반을 다 수신자로 보고, 그들에게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그의 독자가 알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대화든 편지든 이 모든 과정에 평생 수많은 세계의 지성들과 지적 대화를 하면서 말씀 전달자 역할을 해 온 저자 김기석의 지혜나 관조는 대화에 참여한 이들의 시각을 바꾸고, 자숙과 참회와 자정의 경지로 이끄는 힘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이들이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나, 아예 모든 문제에는 감각이 없는 둔감한 이들도 위로와 격려를 받고, 각성과 책임의 도전을 함께 받게 된다.


결실

나는 이런 “대화” 속에서, 그리고 “편지”를 읽으면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인 것”과 “믿음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혹은 “믿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자료를 이 책에서 넉넉히 얻는다. 개인이나 한국교회의 믿음의 좌표를 그릴 수도 있다. “믿음”과 “믿음이 아닌 것”을 지적하거나 암시하는 것은 이 저작의 공헌이다.


이삭줍기

저자 서문 격인 “책을 열며”를 읽다가 보면, “울가망해지다” “묵새기다” “괴덕부리다” “깨단하다” “암암하다” “설면하다” “께느른하다” 등, 저자가 자유롭게 부리는 우리의 토박이말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그의 풍성한 독서량이 그대로 노출되는 글 인용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네 쪽짜리 서문에 벌서 오르한 파묵의 글 내용이 요약되어 소개되고 있고, 나희덕의 시 단편이 인용되기도 한다. 나는 김기석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소식이나 메시지를 듣기 보다는 이번 작품에서도 또 어떤 새롭게 구사된 우리말 어휘들을 만날 수 있을지, 그가 인용하는 어떤 작가들을 얼마만큼 만날 수 있을 지부터 기대하며 읽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것은 독서가 아니고, 저자와의 대화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만 채굴하여 장바구니에 담는 장보기에 불과할 때도 있어서 죄송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수확도 외면할 수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엿듣고, 엿보다 보면, 이미 내 장바구니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대화자들이나 수신자들과 함께 거두는 풍요로운 결실이 가득 찬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편집자 주/ 이 글은 <기독교타임즈>에 실린 글입니다.


* 지강유철/ 긴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 http://fzari.tistory.com/1053

* 천정근/ 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http://fzari.com/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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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5)


“음녀”도 “이방계집”도 아니에요


기존 언어에 동의하지 않고 말하는 것, 용기를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그 언어가 소수의 목소리일 때는 비난 받을 각오까지 한다. 힘의 위계질서에서 약자의 말은 묵살당하기 쉽다. 약자의 말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설명과 증명이 필요하다. 연일 쏟아지는 ‘미투’(Me too)운동을 보며 마음이 무겁다. 용감히 나서 잘못된 사회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응원하면서도, 돌덩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느껴서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성의식 문제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할 공적인 자리가 여전히 권력사회의 강자인 남성중심의 편파적 권력구조가 빚어낸 불합리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 집단인 검사 조직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집단 내부의 크고 작은 권력은 여성을 소외시킨 남성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그렇다. 다수가 여자 성도들로 구성된 한국교회지만 제도권 교회의 권력 상층부는 학벌이나 재력을 동원한 남자들을 위한 권력 재편의 자리다.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를 위해 여기저기 교계의 변화와 개선을 외치는 소수의 남녀 목소리들이 있지만, 제도권 교회의 힘 있는 남자들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목소리들이 모아지고 또 모아지면, 더디더라도 변화의 새벽은 올 것이다.


말이 길어졌다. 본래 구약성경 〈잠언〉 본문 중에서 불편한 번역, 여성비하처럼 소비될만한 말이 발견되어 짚어보려 했다. 잠언은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고 깨닫기 위해 지혜 추구를 목표하는 책이다. 잠언은 실용적이면서도 교육적이고 신앙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엇보다 ‘주님 경외’(잠언 1:7; 9:10)라는 신학화된 개념이 가장 센 억양이다. 지혜는 인간을 밝게 비추어 자신을 깨닫게 하는 것이어서 지혜 추구의 목소리가 잠언 전반부에서(1-9장) 유력하게 드러난다. 지혜가 진귀한 귀금속들보다 귀하고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장수와 부귀, 즐거움, 행복, 그리고 ‘샬롬’, 곧 완전한 복지를 약속하기 때문이다(3:13-17). 더군다나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조성하실 때, 최고의 조력자였다(3:19-20; 8:22-31). 이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부모(또는 지혜 선생)는 아들에게 지혜 추구를 촉구한다.



그런데 지혜 추구와 그 유익을 말하는 본문에서 불편한 낱말이 포착된다. “음녀”와 “이방계집”(2:16; 5:20 개역개정)이라는 말이다. 이 둘은 본래의 히브리말 뜻을 과도하게 해석한 번역자의 통념이 반영되었다. 한국기독교가 가장 많이 애독하는 성경을 비교해봤다.


지혜가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2:16, 개역개정)


지혜가 너를 음란한 여자에게서 건져주고

너를 꿰는 부정한 여자에게서 건져줄 것이다

(2:16, 새번역)


또 슬기는 너를 낯선 여자에게서,

매끄러운 말을 하는 낯모르는 여자에게서 구해준다.

(한국천주교 성경, 2:16)


개역개정과 새번역 성경은 다른 듯 비슷하지만, 천주교 성경은 많이 다르다. 그러면 “음녀”와 “이방계집”(개역개정), “음란한 여자”와 “부정한 여자”(새번역), “낯선 여자”와 “낯모르는 여자”(천주교 성경)가 어떻게 다른가? 사전적인 뜻을 따지기 전에 번역어의 뉘앙스 차이가 마음에 먼저 도착한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의 공통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성향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도 “음녀”의 뜻을 질문했다. 음란하고 부정한 여자나 창녀 또는 매춘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음녀”라는 말은 이미 음탕한 여자 정도의 성적인 의미로 수용되었기에 도덕적인 판단이 내려진 답변이다.


그러면 자기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가 “음녀”인가? 아니다. “음녀”로 번역된 ‘잇샤 자라’는 ‘낯선(생소한) 여자’, ‘이방 여자’, ‘다른 여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여자’를 뜻한다. 천주교 성경이 히브리말을 그대로 번역한 셈이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또는 ‘타국의’, ‘다른’, ‘불법의, ‘금지된’ 이라는 히브리말 여성 형용사 ‘자라’가 구약 다른 본문에서 성적인 모티프로 사용된 예는 없다. 그럼에도 성적인 부도덕성을 함축한 말로 번역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17절에서 ‘낯선 여자’를 설명할 때,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2:17)라는 말에 근거한 것일까? 그렇다면 젊은 시절의 남편과 이혼한 모든 여자는 부정하고 음란하고, 음탕한 여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음녀”라는 번역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성적인 모티프에 강세를 준 셈인데, “음녀의 입술”(5:3), “음녀”, “이방계집”(5:20), “음녀의 골목”(7:8)으로 반복된다. ‘창녀’를 언급하는 히브리말 ‘잇샤 조나’(6:26)라는 말이 있지만, 똑같이 “음녀”(개역개정)로 번역하여 ‘낯선 여자’(‘잇샤 자라’)와의 구별을 없앴다. 더군다나 단지 ‘한 남자의 아내’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아내’(6:26)를 뜻하는 ‘에쉐트 이쉬’를 “음란한 여자”(새번역), “음란한 여인”(개역개정)으로 번역했다. 설령 이것이 시행 첫 소절의 “창녀”와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고려한 것이라 해도, 본래 언어의 뜻을 삭제한 번역자의 해석이 강하게 적용된 셈이다.


그러나 “음녀”로 번역된 본문의 맥락은 지혜를 추구하고, 여호와 경외를 요청하면서(2:1-11), ‘악한 길’에 있는 남자와 패역을 말하는 남자에게서 지혜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2:12-15) 조언의 문맥을 이어간다. “음녀”로 번역된 ‘잇샤 자라’(낯선 여자‘)는 합법적인 관계 밖에 있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허락되지 않은 금지된 관계로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또는 ‘금지된’ 이라는 말의 위험성이 레위기 본문에서도 발견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여호와가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 죽었다(레위기10:1). 금지된 “다른” 불은 생명을 앗아갈 정도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부모(또는 지혜 선생)가 아들을 교훈하며 “남의 아내와 통간 하는 자”(7:29), “여인과 간음하는 자”(7:32)를 언급한 것처럼, 합법적인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가져올 위험성을 언급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음녀”로 번역하면, 조언을 듣는 아들, 혹은 남자는 여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개념화시키기 쉽다. 또 신앙의 독자가 “음녀”를 창녀로 이해하면, 이 구절을 돈으로 거래되는 성관계 금지 교훈으로만 축소시켜 오해할 수 있다.


“이방계집”(2:16; 5:20, 개역개정)의 번역도 문제다. 여성비하적인 표현이다. “계집”은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본래 히브리말도 여자를 낮추는 저속한 말로 기록되었나? 아니다. “음녀”라고 번역된 말이 본래 자기 아내를 제외한 합법적인 관계 밖의 여자, 낯선 여자, 혹은 생소한 타국인 여자를 일컫는 것처럼, “이방계집”은 히브리말 ‘노흐리야’라는 말로서 ‘낯선’, ‘이방의’, ‘타국의’라는 뜻의 여성 형용사다. 첫 소절의 ‘여자’(‘잇샤’)가 생략되었지만, 단지 ‘낯선 여자’, 또는 ‘이방 여자’라는 말이다. 이방 여자를 낮잡아 보는 속어, “계집”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방계집”이라는 말은 타국인 여자를 낮추어 대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되지 않겠는가? 언어 사용과 표현에는 통념이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어서 암암리에 권력관계로 묶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언어 선택의 신중함과 적실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음녀”와 “이방계집”이라는 말이 이후 개정작업에서 논의되길 바란다. 단지 이 두 개의 낱말 이외에도 다양한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장구한 역사를 거쳐 우리말 성경에 이르기까지 번역의 과정에서 말 못할 사정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구약의 오경이 기록되었을 시점부터 지금까지 35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최초의 기록 언어와 지금 언어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간격을 번역으로 메꾸는 것은 간단치 않다. 성경을 현재의 수용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문제는 다양한 간격과 무게를 아는 학자들의 치밀한 연구뿐만 아니라 남녀학자들의 동등한 협업을 통해 좀 더 섬세하고 세심한 성경번역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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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를 홀로 걷는 한 마리 벌레에게


벌레 한 마리,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걷는다.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까지 약 380km의 길을 열하루 동안 걷는다. 병상에 눕는 대신 걷는 것을 택한다. 걸어야 그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지혜를 얻겠기에….


길거리와 광장에서 사람을 부르던 그 “지혜”(호크모트, 잠언 1:20)가 이번에는 잘린 허리 상처 난 길에서 그를 부른다. 최선을 다하고도 배신과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을 지혜는 인적 드문 비무장지대로 불러낸다. 지혜는 하나님의 현신이다(욥기 28:27). 성지교회에서 가까운 인천에도 불러낼 곳이 많은데, 가까이 서울에도, 경기도 인근에 도 불러낼 곳이 없지 않은데, 지혜는 행정구역이 아닌, 여전히 긴장이 감도는 분단을 실감하게 하는 현장으로 그를 불러낸다.


그는 늘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 이겨내고 오히려 더 잘 선용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 일 뿐”(시편 22:6)이라고 하는 시편 시인의 한탄을 그에게서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늙은 시므온이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가리켜 “장차 이 아기는 성장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아들이 비방 받는 표징이 될 때 당신은 가슴이 칼에 찔리듯 할 것”(누가복음 2:35)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면서, 오히려 큰 위로가 이상하게 물밀 듯 밀려오기도 한다.


한희철 목사는 DMZ를 따라 걸으며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고 하지만, 그 DMZ의 열하루는 그가 뭘 간구하는 “기도”의 시공(時空)이었기보다는 분단의 역사 현장에서 그분과 만나 인간 역사와 하나님의 통치를 명상한 대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열하루 동안 DMZ를 걸으며 그에게 수납(受納)된 말씀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치환(置換)되기까지의 그 시간은 누구도 계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받은 말씀을 그는 두고두고 음미하여 끝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우리의 문법으로 그 말씀을 전달해주기까지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열하루 동안의 DMZ 380km 도보횡단은 그의 말대로 “무탈”(頉)로 끝나긴 했지만 “무리”(無理)한 시도였음이 틀림없다. 굴곡된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학(自虐)으로, 혹은 무모한 반항(反抗)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계획이었는데, 그를 인도하시는 분께서는 당신의 종을 위해 한 천사를 시켜 로드맵을 준비시키신다. 한 마리 벌레와 동행하며 그 피조물을 지켜주시려는 그분의 첫 번째 배려는 바로 이 로드맵 작성으로 시작된다.


“지혜”가 보낸 이 로드맵 천사는 걷는 이가 걷기를 마칠 때까지 원격조정을 하며 지켜보고 있다. “걸어서 휴전선”이란 로드맵을 작성하여 걷는 이에게 주고 줄곧 교신하는 그는 걷는 이에게 자기를 “컨트롤 타워”로 생각하라고 한다. “걸어서 휴전선”이란 로드맵을 보고 있으면, 별도의 지도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다. 누구나 이것 하나 만으로도 휴전선 따라 도보 동서횡단을 시도해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각자가 자기의 한계를 고려하여 횡단기간을 20일 혹은 30일로 늘려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걷기 체험기를 읽으면서 나는 휴전선 동서횡단 도상실습을 함께 한다.


한 마리 벌레처럼 기어가는 길, 부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기를 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길, 그럴수록 그분이 동행하시기를 바란다. 길에서 만나게 될 모든 한계상황들, 길 끝에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한 마리 벌레처럼」에서).


이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된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돕겠다.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 너를 속량한다’고 하셨다”(이사야 41:14).


그는 이사야의 이 신탁을 확신하고 있다. 그가 DMZ를 걸으면서, 이사야의 이 신탁 말고, 호세아의 비전도 공유했을까?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 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호세아 2:18).




아직 나는 이 책의 첫 부분을 읽고 있을 뿐이다. 그와 함께 걸어 본다. 그의 배낭에는 필기를 할 수 있는 세 권의 노트가 들어 있다. 들리는 말씀을 받아 적어야 하니까 노트는 넉넉해야 안심이 될 터. 가벼운 휴대용 노트북 생각은 안 했을까? 간단한 메모는 휴대폰의 노트패드를 이용할 생각도 안 하고? 하지만 더 편한 것이 수기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도 걱정도 하던데, 민통선이나 비무장지대 근방에서는 휴대폰에 여러 지도가 뜨지 않는가? 민통선 부근에서 내비게이션 작동이 멈춘 경험은 내게도 있다. 그가 열하루 길을 걸으면서 같은 기간 동안 머물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는 것은, 길을 떠나서 숙소를 찾는 것이 시간 낭비뿐 아니라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를 알기에, 숙소를 예약하지 않는 여정이 나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대목이었다. 아마도 도보여행이었기에 어떤 변수를 미리 예상한 조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는 열하루 동안 혼자 걷는 길에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고린도후서 11:26). 그러나 우리의 보행자는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며, 그들을 만나 도움과 위로와 격려를 받은 이야기를 군데군데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혼자 보낸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하는 것을 우리의 보행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 하나는 뜻밖의 만남이 허락된다는 것임을 배운 날이었다. 농막에서 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나 정자에 앉아 심마니와 나눈 이야기는 분명 내 마음속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심마니의 자존심」)라고 말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린다.


나의 경우, 늙은 어머니가 혼자서 바깥출입을 하거나 먼 기차여행을 할 때는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 내 나이보다도 더 젊은 어머니였는데…. “어머니, 길을 나서시면 늘 조심하세요. 차도 조심, 사람도 조심….” “얘야 걱정마라. 밖에 나가면, 니 아나? 좋은 사람들뿐이 대이. 차는 비키 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하고, 바깥에 좋은 사람 들 숱하게 많은 거, 니 모르제? 걱정하지 마라. 내 잘 다녀 올끼구만.” 어머니가 목사 아들을 위로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한희철 목사의 글을 읽으니, 지금도 길을 나서면 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DMZ 부근에서는.아마도 그의 도보행군의 첫 번째 위협은 진부령에서 만난 폭우와 우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나로서는 힘겹게 고개를 넘는 한 나그네를 환영하시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제행사로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내가 겪은 경험을 통해 말해본다. IMF 이후 중단되었던 대한항공 서울-텔아비브 노선이 10년 만인 2008년 9월에 재취항 하던 날, 나는 그 첫 비행기 시승에 초대받았고, 마침내 그 비행기는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했다. 그때 살수차(撒水車)들이 우리가 타고 간 비행기를 뺑 둘러싸고 물 폭탄을 퍼붓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은 비행기 재취항과 첫 승객을 환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항 환영행사였다. 기내 방송이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탑승했던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것을 진압하려 소방차 가 출동한 줄 알고 놀랐을 것이다. 그 생각이 나면서 한희철 목사가 진부령에서 겪은 폭우, 우박, 천둥, 번개는 얼마나 화려한 환영식이었을 까! 생각해본다. 출발부터 느낌이 좋다.


그는 걸으면서 땅을 발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하늘과 땅 을]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세기 1:1-2). 진부령을 오를 때는 폭우와 우박과 천둥과 번개가 동반하는 물을 체험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진부령에서 용대리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위로 하늘을 바라보고, 아래로 땅을 딛고, 하나님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을[‘루악흐 엘로힘’ “하나님의 바람” “강한 바람”] 가르며 걷는다. 걷는 길 앞, 뒤, 왼쪽, 오른쪽으로 각종 열매가 달린 야생 식물, 각종 날짐승, 이미 그는 저 아득한 태초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



그가 혼자서 DMZ 길을 한 마리 벌레처럼 외롭게 기어가는 고행(苦行)을 하는 동안, 그를 아끼고 염려하는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그들의 목사와 함께 DMZ 위를 걷고 있다. 더러는 시간이나 장소 등 만날 곳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미리 행선지를 알려 준 것도 아닌데, 목사가 걷는 길 위에 성지교회 성도들은 불쑥 불쑥 나타났다. 목사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이었을 것이다. 장로들이, 권사들이 새벽 일찍 길을 떠나 그가 걷고 있을 것 같은 길을 짐작하며 역(逆)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그 모습에 순례자는 감격하고 만다.


벌써 몇 번째인가, 열하루 길을 걷는 동안 장로님은 여러 번 먼 길을 달려왔다. 폭우에 젖은 발을 위해 신발을 사가지고, 행여 쓰러질까 고기를 사주시려, 물집이 잡힌 발을 감싼 인민군식 발싸개를 보고는 안쓰러워,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숙소까지(「마지막 걸음」에서).


이렇게 고마울수가! 한 권사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왔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동행자들은 길가 바닥에 앉아 그들의 목사와 함께 “드문 만남이 주는 은총”을 마음껏 누리기도 한다. 뭉클한 장면이다. 목사 의 배터리가 100퍼센트 충전되는 순간이기도 했으리라! 이렇게 듬뿍 사랑을 받게 해주시면서도 같은 목회 현장에서 동시에 아물지 않는 상처까지 함께 받게 하시는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 어느 교회나 목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는 성도도 있고, 본인들은 몰라도 자신들의 의도하지 않은 언행이 목사에게 상처를 주는 역할을 하는 성도도 있기 마련이다. 이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 목사는 그들을 차별할 수가 없다. 그들을 진정으로 다 가슴에 품으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꼬!


DMZ 횡단 도중 “평화의 댐”을 지나면서는 역대 한 정권의 위장된 안보를 회고하면서도, 세계 30여 개의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 앞에서 우리의 순례자는 “평화의 댐” 일대를 내려다보며 “한 줌의 기도”를 바친다.


이 평화의 종 제작에 당시 정갑철 화천군수의 참여가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현지에서 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내외는 한희철 목사의 감신대 동기 목회자들과 함께 화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화천 교외의 한 리조트에서 1박을 했는데, 그 펜션 거실에는 소비에트연방 마지막 대통령,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로서 199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09년 5월 그는 평화의 종 제막식에 귀빈으로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 중앙 정부의 초청이 아닌, 한 군수의 초청을 받고 평화의 종 제막식에 참석했다는 것이나, 이 행사에 참석하는 동안 화천의 한 평범한 펜션에서 숙박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날 정갑철 군수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 평화의 종 공원을 조성한 일을 격려하면서, 한편 평화의 종 제막식에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을 초청하여 동네 펜션에서 재우는 등 그런 중요한 인연이 있는데도, 화천군 안에 왜 ‘고르바초프 거리’ 혹은 ‘고르비 거리’ 하나 만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비무장지대 부근에는 순교자들이 있다. 순례자는 남북 분단과 순교 이야기, 그러나 망각된 이야기, 기억해 주는 이들마저 없어진 이야기를 안타깝게 찾는다. 1950년 6월 24일,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북한엔 기독교 목사들에 대한 마지막 일대 검거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북한 정권이 볼 때 그들은 아주 위험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순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선 우익 엘리트들이 다 월남했는데도 그들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정치를 방해하면서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노릇을 하 는 자가 많았다. 유사시 그들은 반공전선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었 다. 북한은 이 ‘잠재적 적’을 전쟁을 전개하기 전 대청소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았다. 연천, 철원, 김화, 금성 일대에서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줄줄이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그날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에서).


상세한 역사가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음을 우리의 순례자는 안타까워한다. 순례가 거의 끝날 무렵 순례자는 길 위에 나타난 구십 세의 노모를 만난다. 수고한 아들을 안아주려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한 아들의 개선을 축하하려고 길을 나선 아들의 어머니다. 당신이 남편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던 그 길 위에서의 모자상봉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순례자는 인적이 드문 길가 논 옆에서, 피사리를 하는 할머니들을 만난다. 순례자는 반가워서 먼저 말을 건다. 몰골이 말이 아닌 키다리 가 강원도 고성에서 걷기를 시작해서 임진각까지 가는 길이란 말을 들은 할머니들은 깜짝 놀란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묻는다. “어디 아파요?” 그렇지! 아프지, 아프니까 집 떠나 걷고 있지. 피살이 하던 할머니는 걷는 이의 정곡을 찔렀다.


우리의 순례자가 순례의 끝에서 받은 마지막 질문은 “아직도 아프니?”라는 주님의 질문이다. 걷기를 끝낸 그에게 나도 묻고 싶다. 그 아픔이 어디 치유되라고 있는 것인가? 그 아픔 그대로 지니고 견디라는 아픔 아닌가! 여러 성도들이 그렇게 큰 사랑을 베푼 것은, 아니, 그보다도 주님께서 친히 열 하룻길을 특별히 동행해 주신 것은, 그 아픔 그대로 지니고 이 역사에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라는 격려가 아니던가!


마지막 날은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아들의 마중을 받는다. 아내는 장모의 사랑도 함께 운반한다. 순례자에게 제일 약한 부분이 가족이다. 가족 때문에 떳떳할 수 있고, 가족 때문에 비굴할 수도 있다. 가족 때문에 부르심을 거절할 수도 있다. 동시에 제일 강한 부분이 가족이기도 하다. 한희철 목사는 평생 아픔과 상처를 지닌 채 단강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천에서 부름 받은 삶에 헌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힘이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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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 그리고 서지현 검사

- 어디서 구원은 올꼬?


최근 ‘미투’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가 된 서지현 검사의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서  “가해자가 최근 종교를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한 비판은 새삼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밀양>은 절망의 끝자락에 선 한 여인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려 하는가를 보여준다. 주연 배우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래 새삼 주목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빼놓고, 이 영화는 사실 영화적 재미나 흥행의 기대를 갖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대체로 어두운 삶을 드러내면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희망의 출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쪽은 아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답답함을 숨기기 어렵다. 영화 <밀양>도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서 시작해서, 쓰레기가 뒹구는 땅으로 카메라 앵글을 옮기지만, 그것이 반드시 명쾌한 돌파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적어도 기독교에 보내는 메시지만큼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온 주인공은 그곳에서 다시 자식을 유괴당하고 자식의 죽음 앞에서 혼이 나간다. 밀양에 왔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있었고, 그녀에게 교회는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인생의 출구가 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편안한 얼굴로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에 그녀는 절대자에게 항거하는 존재로 뒤바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청춘의 소설로, 광주 학살 이후 이 시대가 과연 이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하는가라는 고뇌가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런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고 다만, 한 인간이 좌절의 극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영화 <밀양>은 그런 고통에 휩싸인 존재에게 교회가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면모로 들어가자면 다소 유치하고 이해가 너무 일반적으로 편향된 바가 있긴 하지만, 영화는 교회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고통 보다는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밀양>에서 교회가, 기독교가 직시해야 할 자신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밀양>은 보는 이에 따라 다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교인들은 주인공의 고통과 슬픔에 동정적이다. 그러나 상대의 고난을 불행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가 하면, 그 고통의 깊이에 함께 스며들어가는 방식보다는 교회에 나오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리고는 교인이 되어 변모한 모습에 열광한다. 이 세상 도처에 깔린 고통과 슬픔의 정체에 그대로 다가서기보다는, 예수를 믿으면 그런 고통과는 결별하게 되고 그저 행복한 감정에 푹 빠지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교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상대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상대가 교회를 나오든 아니 나오든 관계없이 같이 있어주려는 마음이 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이보다는, 교인 하나가 생겨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교회의 실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영화적 서술은 사실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에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도 냉랭해졌다.


교인의 수를 늘리는 총동원 체제가 여전히 가동하고 있고, 그 안에서 각종 프로그램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현실과 발을 붙이며 함께 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니라, 천상의 조직이 되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천상의 조직에 속한 장로는 여인의 유혹에 위선의 가면을 쉽게 벗어버린다. 이 장면은 논란거리가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점에서 적당히 타협해버린 인상을 주지만 어쨌든 간에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 그 내면에 진실하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스며들게 하는 존재는 목격하지 못한다.


도리어 어찌 보면 껄렁패처럼 여겨지는 카센터 주인이 주인공의 아픔에 동참한다. 물론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러한 상황을 주도하지만, 교회는 이 사나이가 보이는 사랑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해력과 감성으로 고통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자식의 유괴와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태 앞에서 교회는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슬금슬금 눈치나 보면서 뒤로 물러나고 만다.


정신 요양원에서 나온 주인공이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미장원에서 만난 미용사, 그러니까 유괴범의 딸과 만나는 장면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주인공이 이 유괴범의 딸을 만났을 때 그렇게 독기를 품고 뛰쳐나오게 하기보다는, 그 딸도 소년원에서 나와 기술을 배우고 생존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아픔의 공유가 최소한 가능한 대목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화 <밀양>은 영어 제목이 Secret Sunshine으로 되어 있다. ‘밀양’ 의 한자풀이로는 ‘빽빽한 볕’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햇빛이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인생과 대조되는 역설적 반어법으로 다가온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는 자신의 출발점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필요성 앞에 직면한다. 천상의 조직이 아닌, 지상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가장 아프고 험난한 삶의 자리에서 교회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을 찾는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로서 여러 가지 비평과 함께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쉬우나, 오늘날 교회가 고난에 처한 이에게 비밀스러운 햇볕으로 다가가 그 인생에 빽빽한 광명을 채우는 힘을 갖지 못하면 영화 <밀양>의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영화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되풀이 되는 슬픔이다. 교회는 그 자신이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햇볕 또는 빽빽한 빛, “밀양(密陽)”이 되어야 한다는 걸 망각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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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발로 선 시간의 은총


한희철 목사가 DMZ 380km를 열하루 동안 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얼마나 괴로웠으면…’이었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일까지도 길 위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심증이 확증이 되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글의 도입부를 읽으면서 가슴이 저릿해졌다. ‘이 착한 사람이 견디기 어려웠구나.’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그 너른 가슴으로 덥석 품어 안더니, 벽 같은 현실 앞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무모한 여정에 나선 것일까. 그것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올레길이나 순례길이 아니라 분단의 상흔이 고스란히 새겨진 접경 지역을 말이다. 왠지 그 아픔을 알 것도 같기에 선뜻 그 글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글을 읽기 시작했고, 멈출 수가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글을 다 읽고 나니 리베카 솔닛의 말이 떠올랐다. 리베카는 걷기는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라고 말한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 문장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등을 떠민 것은 절벽 같은 현실과 그로 인해 마음에 드리운 무거운 구름이었다. 폭우 속을 걷고, 또 폭양 속을 타박타박 걷는다는 것, 그것은 자기 육체를 극한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했을 때,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 이에게 길은 언제나 숨기고 있던 오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 예기치 않았던 이들과의 만남, 어떤 깨달음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그는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난 수많은 이들을 기억 속에 호출한다.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현존한다. 걷는 사람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이라 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떠올리고 함께 겪었던 시간을 회상하는 것 자체가 기도이다. 걷는 기도를 통해 호흡이 가지런해졌을 때 한희철 목사는 자기 발이 땅에 닿은 것 같았다고 말한다.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의무의 감옥에 갇혀 사람들을 대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그는 허공 위를 허정거리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던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의 발이 땅에 닿았다. 가속의 시간 속을 걸어가느라 허둥거리던 발걸음이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발걸음으로 변하자, 적절한 삶의 속도를 깨닫게 되었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내 발이 내 땅에 닿았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제대로 된 속도가 보였다.”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복이 이런 것일 게다. 홀로 걷는 이가 누리는 복은 또 있다. 마주 잡을 손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느꺼움 말이다. 나희덕은 <산속에서>라는 시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소중히 여긴다고 노래한다.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맞잡을 손 하나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위로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 터벅터벅 갈라진 땅을 깁고, 찢어진 마음을 깁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불원천리 하고 찾아와 함께 만남의 기쁨을 나눴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손이 된 이들이 아니겠는가.


길을 걸었기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은 여전히 지속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 몸으로 그 먼 길을 걸었던 이는 더 이상 그 현실 앞에서 울지 않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그는 홀로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이 내내 동행하고 계심을 알았을 테니 말이다.


글을 읽는 내내 탄식시를 떠올렸다.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의 바람을 뒤흔들고 때로는 흉포하게 찢어놓는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히브리 시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억눌린 함성을 토해냈다. ‘어찌하여’ 혹은 ‘언제까지’ 이런 일이 지속되는 것이냐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푸념은 언제나 가장 곤고했던 시간에 동행해주시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이끌었고, 그 기억이 회복되었을 때 팥죽처럼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새로운 신뢰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Solviture Ambulando’,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햇볕에 바래고 이끼가 달라붙은 낡은 표지판을 보며 한희철 목사가 드렸던 ‘어느 날의 기도’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폭풍 속 흔들려도

꺾이지 않게 하시고

외발로 선 시간

막막하지 않게 하소서.


그를 두고 지금 내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그는 기도의 마지막 연에서 이런 염원을 아뢰고 있다.


머무는 이 없어도 좋습니다.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갈림길 끝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가야 할 곳 제대로 가리키는

바른 표지판이게 하소서.


아우 한희철 목사, 그대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표지판이라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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